'여인 천하'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음모와 배신의 궁중 암투 거침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들 그리고 권력의 싸늘한 속살이 드러나는 역사 드라마 말이다.
이 책은 16세기 영국 튜더 왕실에서 벌어진 왕위 계승 드라마의 한 자락을 그린 역사 픽션물이다. 도도한 역사의 한 꼬투리에 불과한 사건이지만 분 냄새와 피 냄새가 야릇하게 섞이는 가운데 얽히고 설킨 인간들의 사연이 결코 만만치 않다. 주인공의 이름은 제인 그레이. 입을 때보다 더 기쁘게 여왕의 예복을 벗어던진 여인. 16세에 영국 왕위에 올랐지만 단 9일만에 죄수로 전락했다.
제인은 그 '말썽 많은' 튜더 왕가의 혈족이다. 그의 외할머니 메리는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이다. 메리는 18세의 나이에 52세 먹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정략결혼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숨지자 오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사랑 찰스 브랜든과 결혼했다. 그 사이에 딸 프랜시스가 태어났고 프랜시스는 제인을 낳았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위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종교개혁을 한 것은 물론 여섯 차례의 결혼과 두 차례의 왕비 처형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세 명의 적자를 뒀다. 정략 결혼한 스페인 출신 첫 부인이 낳은 메리 둘째 부인 앤 볼레인에게서 얻은 엘리자베스 그리고 셋째 부인 제인 시무어 소생인 아들 에드워드다. 이 셋은 모두 영국의 여왕과 국왕에 오른다.
맨 처음 왕위에 오른 이는 에드워드로 10살에 즉위해 15살 때 세상을 떠난다.
에드워드는 선왕의 유언과 고관들의 압력에 따라 왕위를 누나에게 물려주지 않고 고종사촌 누나인 프랜시스 브랜든의 딸인 제인 그레이에게 넘겨주기로 한다. 하지만 제인의 시대는 고관들의 반발로 9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왕관은 메리에게 넘어간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옴니버스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관련 인물들이 하나씩 차례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을 한 뜸 한 뜸 재구성해 나간다.
그러면서 '그 세기 가장 섬세한 마음을 지닌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제인의 면모가 드러난다.
어려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아 교양을 쌓은 그는 원래 왕비 감으로 점찍혔지만 거대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여왕에 오른 것도 그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러다 끝내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친척인 메리 여왕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배신과 이용을 당한 끝에 목이 잘리게 된다. 원제 'Innocent Traitor'.
당신이 문화를 만드는 시대 왔다
최근 전화기능만 있는 휴대전화를 사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혹시 '구식'이라고 불리울지 모르지만 주변에는 요즘 이런 시도를 했다가 낭패를 본 이들이 꽤 있다. 이 책을 쓴 MIT 인문학부 교수인 헨리 젠킨스도 그런 전화를 사려다 실패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지난해 휴대전화를 구입하면서 디지털 카메라 기능이 없고 MP3플레이어도 안되며 영화 예고편이나 소설을 읽을 수 '없는' 휴대전화를 찾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점원의 코웃음이었다.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한 탓이다. 미디어 비교연구 전문가인 그는 자신의 이 경험을 통해 휴대전화가 미디어 컨버전스 과정의 중심에 놓여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그가 새삼스럽게 미디어 컨버전스를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그는 '컨버전스'라는 용어를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사전을 뒤져보면 '컨버전스(convergence)'는 '한 곳으로 모임(집합) 집중성 통합'이란 뜻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IT업계에서 컨버전스란 용어는 "다양한 미디어의 기능이 하나의 기기에 융합되는 기술적 기능"이란 뜻으로 자주 거론돼왔다. 그러나 젠킨스는 이 개념에 반대한다. 지나치게 기술적 요소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컨버전스가 "미디어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겪는 기술적 산업적 문화적 사회적 변화"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정의한다. 과거에 특정 미디어에 특화된 것으로 생산되고 유통돼 온 콘텐트가 다수의 미디어 채널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미디어 생산자(미디어 기업)과 소비자의 힘(참여문화)이 복잡하게 얽히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미디어 콘텐트의 순환이 소비자의 적극적 참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새로운 미디어 시스템에서 소비자가 새로운 정보를 찾아내고 서로 흩어진 미디어 콘텐트를 연결하며 문화적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컨버전스 문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요소로 미디어 컨버전스 참여문화 집단 지성을 꼽는다.
미디어 컨버전스에서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는 공존하고 충돌한다. 한때 미래에 모든 미디어 콘텐트가 하나의 블랙박스를 통해 우리 거실로 유통될 것이라고 믿어진 적도 있었지만 젠킨스는 이러한 예측이 빗나갔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를 가리켜 '블랙박스의 오류'라 부른다.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는 노트북과 휴대전화 아이팟과 게임보이 등 블랙박스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드웨어가 분화된 대신 콘텐트가 유통되는 방식만 다양해진 것이다.
미디어 기업이 이 변화를 놓칠 리 없다. 다양한 채널로 콘텐트를 유통시키며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젠킨스는 근대의 미디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로 미국 TV프로그램 '서바이버'(2004) '아메리칸 아이돌'(2002)과 영화 '매트릭스'와 '스타워즈' 등을 꼽았다.
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원래의 콘텐트가 원래의 미디어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 생산의 장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 주체는 소비자다. 시청자들이 새 미디어를 통해 새 네트워크 즉 '지식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함께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데 앞장 섰다. 젠킨스는 컨버전스가 집단 지성과 참여문화의 가능성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젠킨스가 컨버전스 문화 현상에 이토록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그가 자신을 가리켜 '비판적 이상론자'라고 소개한 데 있다. 그는 새로운 참여의 기술이 TV프로그램이나 영화나 게임에 적용되는 사례에서 정치활동 교육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찾았다. 대중문화에서 '참여 정치학'의 원형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미디어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비관론자들이 말하듯이 "모든 미디어를 거부하고 숲 속에 살면서 소규모 대안 출판사가 재생용지로 출판한 책만을 읽으며 사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그는 유능한 선생님답게 생생한 사례를 들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니 '감정경제'니 여기 저기 튀어나오는 낯선 용어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책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한 미디어 학자의 열정적인 강의를 듣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의 '이상론'에 동의할 지 말지 판단할 일이 숙제처럼 여겨지지만 말이다.
# 080818_북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