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델 출신으로 배우자인 서세원 씨와의 사이에 아들 하나 딸 하나를 두고 있는 서씨는 아침마다 말씀을 펴고 주님을 기다리며 주님의 품에 안겨 수다 떠는 시간이 제일 행복하다고 말한다. '서정희의 주님'은 2006~2007년까지 매일 아침 3~4시간씩 성경 말씀을 묵상하며 날마다 기록한 묵상노트 중에서 특별히 나누고 싶은 부분들을 따로 모아 정리하여 한 권으로 엮은 책이다. 중간 중간 서정희씨(사진)의 친필 고백문과 딸 서동주 씨가 연출하며 찍은 사진들도 수록되어 있다. 저자는 성경 묵상에 대해서 제대로 배운 적도 없고 제대로 기도도 할 줄 모르고 제대로 묵상할 줄도 몰랐지만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 만큼은 절대 움직이지 않고 몇 시간 동안 끈질기게 성경을 주시하였다. 이 책은 그러한 과정 속에서 깨닫게 된 은혜들을 숨김 없이 기록하고 있다. 똑 부러지는 살림살이로 때로는 남편보다 더 많은 주목을 받았던 그녀는 최근 시련과 묵상 어김없이 찾아온다. "남편이 영화 '조폭 마누라'를 만들 때였어요. 교회를 다니는 사람이 돈을 벌기 위한 영화를 만들고 있으니 마음이 편하지 않았어요. 아무리 말려도 남편이 말을 듣지 않자 그때부터 교회 사람들과 함께 영화가 실패하도록 함께 기도를 하기도 했었죠." 그러나 영화 '조폭 마누라'는 세 편의 속편이 이어질 정도로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고 영화의 성공 이후 서세원 씨는 많은 사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다. 그리고 얼마 후 이들 부부는 가장 힘든 고난을 겪게 된다. 2002년 연예인 비리 사건에 남편 서세원 씨가 연루되어 구속 기소됐고 징역 10월에 집행유예 2년 벌금 5000만원의 판결이 확정된 것. 이 사건은 서정희 씨에게도 깊은 상처를 남겼다. 그녀는 "시간이 지나며 다시 안정된 생활로 돌아올 수 있었지만 요즘도 그 때의 일을 생각하면 끔찍하기만 하다"고 말하며 "오직 신앙심 하나로 고난을 이겨낼 수 있었다"고 고백했다. "남편 역시 최근 새벽기도를 통해 신앙심이 깊어졌고 지금은 안수집사로 많은 간증 집회에 참석한다"고. 올해 나이 48세. 그러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여전히 아름다운 미모를 간직하고 있는 그녀는 그동안 세상에서 누렸던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또 다른 꿈을 품고 살아간다. "고난을 통해서 성숙해질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는 힘들어하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살고 싶습니다." 이 묵상집에는 서씨의 진솔한 삶과 신앙 이야기가 담겨있다.
2008.09.08. 14:55
황석영이 자신의 소년시절을 소설로 썼다. 공사판과 오징어잡이배 빵공장을 떠돌다 입산하여 행자생활을 하고 다시 또 베트남전에 차출되었던 아픈 방랑의 시간들이 그대로 소설이 되었다. 세상과 온몸으로 부딪혀온 그의 청춘이 고스란히 담겨 있기에 어느 때보다 더 아프고 어느 때보다 더 깊은 감동을 준다. '개밥바라기별'은 이미 출간 전부터 화제의 중심에 있었다. 6개월 가까이 네이버에 연재되는 동안 작가는 거의 매일 연재 블로그에서 독자들과 부대끼고 놀며 때론 정담을 때론 치열한 토론을 해왔다. 인터넷 매체는 가벼워서 본격문학이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그동안의 통념을 깨뜨린 것은 우리 문단에서도 하나의 '사건'으로 받아들여질 만큼 신선한 충격이었다. 작가의 첫사랑 얘기가 나오면 독자들은 자신의 사랑 이야기를 나누었고 어머니와의 일화가 나오면 독자들은 모두 자기 어머니를 떠올리며 대화를 나눴다. 작가의 분신인 작중인물 준이처럼 실제로 무전여행을 떠난 독자도 있었다. '개밥바라기별'은 황석영이 작정하고 쓴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주인공 준이 겪는 길고 긴 방황은 실제 작가 자신의 청춘의 기록이기도 하다. 상처를 헤집어 그 시절과 다시 대면하는 작가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크고 작은 상처들을 돌아보게 하고 가슴 아프게 한다. '개밥바라기별'은 바로 그 상처를 들여다보는 작품이다.
2008.09.08. 14:54
"호수와 강이 가까워서인지 도시는 밤이 되면 곧잘 안개로 뒤덮인다…세상은 온통 안개 천지이다. 뿌옇게 감싸인 아파트 숲과 밤거리가 어찌 보면 저주와 재앙의 도시 같은가 하면 신비한 신생(新生)의 의식이 치러지는 신전 같기도 하다." 은희경씨의 첫번째 연애소설 '그것은 꿈이었을까'는 안개의 소설이다. 주인공인 의대생 준은 이야기의 말미에 결혼해서 안개의 도시에서 살고 있다. 아내와 다섯 살 난 아들 약간의 저축과 콘도미니엄 회원권 등 그는 신도시에 사는 평균적인 사람이다. 하지만 준은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독한 상실과 블랙홀에 빠져드는 듯한 젊음의 한 시기를 통과했다. 안정된 미래가 보장되어 보였던 의대생이었던 시절 그는 '꿈'을 꾼 것이다. 준이 무엇 하나 특별할 것 없는 인생에서 특별하게 여기는 것이 3가지 있다. 화가 에곤 실레의 화집과 하드 커버로 된 카프카의 소설 '성' 그리고 비틀스를 좋아하는 같은 의대생인 친구 진. 준은 이 3가지를 통해 갑자기 안개 속에서 길을 잃듯 삶의 낯선 지점으로 빨려 들어간다. 카프카의 고향 프라하에서 돌아온 준은 교통사고로 죽은 친구 진의 약혼녀와 결혼한다. 적당한 양을 적당한 시간에 규칙적으로 먹어서 체중을 유지하는 일에 신경쓰는 아내. 그리고 준 자신은 언제부터인지 젊은 캐디와 같은 자동차를 타고 다니는 선배와 함께 일상을 보낸다. 선배와 같은 속인이 되어갈 준도 더 이상 꿈을 꾸지 않는다. 무서운 꿈을 꾸었다며 놀라는 아이에게 아내는 "너도 곧 어른이 되면 무서운 꿈을 안 꾸게 돼. 다 크느라고 그런 거야"라고 말해준다. "꿈은 인생의 다른 버전(version)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은씨는 일부러 '인생은 꿈이었을까'를 모호한 분위기의 소설로 썼다고 말했다. 사실 날선 칼처럼 세상의 폭력에 대해 위악과 냉소의 포즈를 취하던 은씨의 작품 경향은 이 소설에 와서 180도라 해도 좋을 정도로 달라졌다. 준이 스스로를 '마리아' 혹은 '미리암'이라고 부르는 실레의 그림을 닮은 초록옷을 입은 여자를 만난 고시원 '레인 캐슬'은 2년여 전 은씨가 장편소설 '새의 선물'을 쓰기 위해 보름여 체류했던 가야산의 고시원을 무대로 한 것이다. '불은 항상 켜져 있습니다' '수련 중 체험하게 되는 현상은 수련의 과정이니 당황하지 말고 정진하십시오'라는 마치 비밀 집단의 강령 같은 소설 속 문구도 그대로였다고 한다. '스노랜드'에서 간판의 '스' 자가 떨어져 나가버려 아무것도 아닌 땅이라는 뜻의 '노랜드'가 되버린 위락시설이 있던 설천은 전북 무주에 실재하는 지역이다. 준이 마리아를 만난 뒤 수련의 생활을 그만 두고 프라하로 떠나기 전 혼자 살았던 복합건물은 소방서였고 길 건너편의 주유소가 있는 피자집 건물은 일산 신시가지의 6차선 도로 옆 한적한 뒷길에 실제로 서 있다. 은씨는 "나는 나를 포함해서 많은 사람들이 어릴 적에는 세상은 이러저러하다고 반듯한 교육을 받고 자랐습니다. 그러나 점점 그 반듯함이 세상의 본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가 없었지요. 그래서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릅니다. 내 소설의 위악은 삶의 그 허상을 걷기 위한 방법"이라고 부언했다.
2008.09.08. 14:53
그가 누군가의 정자를 기증받아 아이를 가졌다는 소식은 우리 사회에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유명 방송인이 남편없이 홀로 아이를 낳아 키우겠다고 나섰으니 파장은 컸다. 빛나라, 세상이 어두울수록 허수경 지음, 문학사상사 하지만 힘든 시간을 보냈을 허수경(41)은 "지금 완벽하게 행복하다"며 활짝 웃었다. "간절히 바라던 아이를 얻고 그 아이가 6개월 째 건강하게 크는 과정을 지켜보는 요즘은 햇살이 반짝반짝 내려앉은 파란 바다 앞에 선 기분입니다. 예전의 행복은 폭풍우 속에서 예쁜 꽃을 바라보거나 땡볕 속에서 시원한 바람 한 줄기를 맞는 정도였다면 지금은 너무 완벽하게 행복해 때로는 두렵기까지 해요." 허수경은 앞으로도 계속 호기심어린 시선을 견뎌야할 것이다. 하지만 15일 만난 그의 얼굴에서는 '나 씩씩하니 걱정마세요'라는 메시지가 전해졌다. "절박한 마음으로 선택한 길이고 이미 임신을 했을 때는 스스로 단단해져있었기 때문에 어떤 스트레스도 받지 않았습니다. 별이를 낳은 지금부터는 저의 선택에 책임지는 모습을 보여드려야겠지요. 이제는 저뿐만 아니라 자식의 인생이 걸렸기 때문에 더욱 조심하면서 잘 살아야죠." 허수경이 책을 냈다. 딸에게 전하는 편지 형식의 자전 에세이 '빛나라 세상이 어두울수록'(문학사상). 책을 통해 두 번째 이혼에서부터 딸 별이를 얻기까지 그리고 별이를 키우고 있는 현재의 심경을 물 흐르듯 써내려갔다. 자신의 상처와 치부 실수 등에 대해서도 솔직했다. 그는 책 출간에 대해 "마치 별이 동생을 낳은 기분"이라며 "물론 도망다녔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것도 모자라 무슨 책을 쓰나 싶었다. 하지만 별이를 생각할 때 엄마로서 해주고 싶은 이야기들 삶의 지침들을 정리해놓으면 나중에 컸을 때 특별한 선물이 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예전에는 모범적인 모습만 보여줘야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강한 척 꿋꿋한 척만 할 것이 아니라 무너질 줄도 알아야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며 "그동안 내 삶을 돌아봤을 때 부끄러웠던 부분들을 속이지 않았기 때문에 책을 쓸 수 있었다"고 말했다.
2008.08.25. 15:21
"강의는 시간이 제한돼 있었어요. 난 6시간은 충분히 강의할 수 있었지만 아마 그랬다면 그만큼 인기를 얻지는 못했을걸요." 마지막 강의 랜디 포시·제프리 재슬로 지음 심은우 옮김, 살림 항상 유머를 잃지 않은 그다운 표현이었다. 랜디 포시 교수는 인터넷 서점 아마존닷컴 인터뷰에서 '마지막 강의'(The Last Lecture)를 출간한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이 책은 카네기멜런대 강의의 배경 해설서 겸 속편이다. 말기 췌장암 환자로 화학요법의 후유증으로 복통과 구토·설사에 시달려 가며 강의 자료를 준비하던 그가 '만약을 위해 성인용 기저귀를 차고 무대에 올라야 하나' 하고 고민했다는 이야기부터 강의 끄트머리에 아내를 강단으로 불러내 키스했을 때 "제발 죽지 말아요"라고 속삭였다는 아내의 말 등 강의 내내 씩씩했던 그의 모습만 보고는 알 수 없었던 뒷이야기들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동시에 그의 강의 동영상을 접하지 못한 이라도 '곰돌이 푸'에 등장하는 티거처럼 언제나 재미를 좇으며 살았다는 포시 교수의 유쾌한 에너지를 온전히 느낄 수 있다. 그는 암이 간으로 전이된 사실을 알게 된 순간조차 한 편의 코미디처럼 풀어놓는다. 아내와 함께 울다가 진료실 안에 티슈가 없다는 걸 깨닫고 이렇게 생각했단다. "이런 장소에서 이런 때에 크리넥스 한 통쯤은 있어야 되지 않나?" 책에는 그의 창의력에 날개를 달아줬던 아버지와 엄격했던 어머니 '기본'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준 미식축구팀 코치 등 자신의 꿈을 이루도록 도와준 많은 이의 이야기도 담았다. 그리고 미래의 어느 날 이 책을 읽게 될 자녀들에게 말한다. "내 생각에 부모의 임무란 아이들이 일생 동안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고 그 꿈을 열정적으로 좇을 수 있도록 격려해 주는 것이다… 얘들아 아버지가 너희들이 무엇이 되기 바랐는지 알려고 하지 마라. 나는 너희들이 되고 싶은 것이면 그게 무엇이든 바로 그것을 이루기를 바랄 뿐이다." 그는 전공 대신 "삶을 즐기고 절대 포기하지 말라" 며 인생 이야기를 중심으로 강의했다. "사람들은 자신의 잠재력을 허비하고 있다" "무엇을 하든 벽에 부딪히지만 그 벽은 우리가 무언가를 얼마나 절실히 원하는지를 시험하는 기회"라고 말했다. 즐겁게 살라고도 주문했다. 삶을 즐기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포기하지 말 것 잘못했으면 사과할 것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갈 것 등 인생에서의 기본 자세도 강조했다. '마지막 강의'는 아마존닷컴과 월스트리트 저널 선정 베스트셀러 랭킹 1위에 등극했다. 뉴욕 타임스도 추천 도서 1위에 올렸다. 책은 며칠 만에 대부분의 대형 매장에서 동이 났다. 아마존닷컴에서 이 책을 주문하면 "다음달 7일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메시지가 뜨기도 했다. 미국 최대 서점인 반스앤드노블스에서 책을 사려 해도 2~3주일을 기다려야 하는 사태까지 일어났다. 출판사인 하이퍼리온 측은 당초 40만 부를 찍을 계획이었지만 주문이 쇄도하자 55만 부를 인쇄했다. 포시 교수에게 200만 부 이상을 찍겠다고 장담했다고 한다.
2008.08.25. 15:19
프랑스 철학자 롤랑 바르트가 '카메라 루시다'를 쓴 동기는 사진의 속성을 밝히기보다 죽음에 대한 명상을 풀어놓기 위해서였다.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상·하)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열린책들 어머니의 모습이 담긴 사진에서 '죽은 자의 귀환'과 조우하는 기이한 경험을 하며 바르트는 모친의 죽음을 넘어 자신의 죽음까지 애도하는 심연 같은 멜랑코리를 드러낸다. 말하자면 『카메라 루시다』는 죽음을 앞 둔 롤랑 바르트의 유언 같은 작품으로 남았다. '장미의 이름'으로 유명한 이탈리아 작가 움베르토 에코의 다섯 번째 소설인 이 책 역시 소설의 형식을 빌린 죽음에 대한 애도사다. 바르트와 달리 에코가 죽음의 대상으로 삼은 것은 바로 자기 자신이다. 에코의 소설 속 분신은 곧 환갑이 될 고서적 판매상인 장바티스타 보도니다. 그의 이름이 18세기 이탈리아의 활자 디자이너와 같다는 점에서 에코 특유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은 이 작품에서도 작동한다. 무수히 많은 작품들이 이 소설에도 뒤섞여 있다. 고서적 전문가인 보도니가 어느 날 갑자기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다. 그는 백과사전의 내용은 거의 다 기억하는데 신기하게도 사적인 사실들은 전혀 기억하지 못 한다. 심지어 아내의 얼굴조차 모른다. 기억을 잃어버린 노인의 자기 찾기의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다. 보도니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을 어릴 때 읽은 동화 '늙은이로 태어나서 아기로 죽은 피피노 이야기'의 주인공 피피노와 동일시한다. 늙은이로 태어나서 점점 어려지다가 결국 아기로 죽는 피피노처럼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신은 다시 태어난 늙은이이며 기억을 되찾는 작업은 아기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이유에서다. '자궁 속처럼 아늑한 안개 속으로'라는 에코의 표현에 드러나듯 보도니는 생명 이전의 상태 곧 죽음으로의 귀환이라는 달콤하고도 불가능한 꿈을 욕망하고 있는 것이다. 에코는 이 소설이 자신의 마지막 소설이 될 것이라고 했다. 당연한 말이다. 에코가 흠모했던 기호학계의 선배이자 동료인 롤랑 바르트의 '카메라 루시다'처럼 자신의 죽음에 대한 애도사이기 때문이다.
2008.08.25. 15:17
“절망이 나를 뒤흔들었다. 소리쳐 울고 싶었지만 얼른 자신을 꾸짖었다. 마음을 다잡자. 가라앉히자. 사치스럽게 물을 마시지 못한다고 한탄해서는 안 된다.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고 울음을 삼켰다. 생존, 오직 생존에 집중하자.”(78쪽) 표류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황금부엉이, 352쪽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배가 전복됐다.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한 주인공. 생존 본능을 따르는 것 외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없었다. '표류'는 실화다. 무려 76일 동안이나 대서양을 표류했던 미국의 해양모험가 스티븐 캘러핸이 주인공이다. 1982년 2월 캘러핸은 자신이 직접 만든 소형 범선 나폴레옹 솔로호를 타고 대서양 1인 횡단에 도전했다. 항해에 나선 지 6일째 되던 밤 솔로 호는 고래와 충돌해 난파하고 만다. 캘러핸은 6인용 팽창식 구명선을 타고 탈출했다. 처음엔 '최대 14일은 버틸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표류기는 늘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다. 긴장감 넘치는 모험 이야기여서만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바다와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류의 고비를 이겨낸 생환 기록은 독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표류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누구나 '표류'의 주인공이 된 경험이 있어서다. 어느 인생이 어느 한 순간도 '표류'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고 순항할 수 있겠는가. 항로를 이탈해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 안전한 보호막은 사라졌고 외롭고 무섭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표류'의 상황에서도 삶은 '절망' 한가지 색깔이 아니다. 공포와 고통.가책.좌절 사이사이 감사.희망.기쁨 등이 교차한다. 또 공포와 고통이 삶에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도 아니다. 캘러핸 역시 "공포심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공포가 생존을 위한 행동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궁핍한 생활이 미묘하고도 소중한 풍요를 선사하기도 했다. "고통.좌절.굶주림.갈증.외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참으로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됐다"는 게 캘러핸의 회상이다. 캘러핸은 지름 1.5m 튜브 두 개를 포개 놓은 모양의 구명선에 몸을 의지하고 '바다의 로빈슨 크루소'가 돼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무게가 9~13kg에 이르는 거대한 물고기 만새기는 그의 항해 동료이자 식량이 됐다. 구명선을 따라다니는 만새기를 작살로 잡아 끌어올린 뒤 몽둥이로 때리고 칼로 찔러 죽이는 과정은 잔인하다기보다 엄숙했다. 만새기 안구의 기름진 액체와 아가미 안쪽의 찐득한 점액질도 캘러핸에게는 소중한 수분 공급원이었다. 철분을 섭취해 빈혈 증세를 경감시켜 볼 생각으로 땅콩 캔과 커피 캔에 붙은 녹을 긁어 먹기도 했다. '모순투성이' 삶의 속성은 표류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는 살이 타 들어갈 것 같이 괴롭지만 태양열 증류기를 이용해 만드는 물의 양이 많아진다. 반대로 짙은 먹구름이 햇살을 가려주는 시원한 날엔 생명수가 줄어드는 초조함도 함께 맛봐야 했다. 바람의 세기 역시 100% 이상적인 상태는 없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목적지를 향해 쾌속 전진할 수 있어 기쁜 반면 몸이 젖고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하고 난파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또 바람이 잔잔해지면 몸이 마르고 상처가 아물며 물고기도 더 쉽게 잡히지만 표류기간이 연장되고 도중에 상어를 만날 위험도 커졌다. 내면의 갈등도 컸다. 몸이 힘들 때는 이성이 스스로의 참을성에 갈채를 보내며 의지를 다져줬지만 몸이 만족하는 순간이 오면 이성은 자제력을 잃고 불평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만족'의 순간은 있었다. 만새기를 잡아 먹고 남은 살점을 줄에 꿰어 말렸을 때다. 빨랫줄에 7㎏가량의 날생선을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는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알아주는 불평꾼에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내가 날생선 덩어리와 물 반 리터로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저자 스스로도 신기해했다. "과거의 내 삶은 참으로 불필요한 정도로 복잡하기만 했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생애 처음으로 절감했다. 항해에 나서기 전에 나는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즉 음식.거처.옷.친구들을 다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떤 목표를 포기하거나 물질적으로 탐내던 걸 손에 넣지 못할 때면 원하는 걸 죄다 갖지 못한 데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171쪽) 그러고 보면 만족을 느끼는 능력 자체가 생존 비법일지도 모른다. 또 삶에 대한 기대와 웃을 수 있는 여유 역시 절망의 순간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캘러핸은 끝이 보이지 않는 표류의 상황에서 일지를 적었다. 자신이 남긴 기록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면 그게 세상에 행하는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긴장을 덜어주기 위한 시니컬한 농담도 일지에 적어 넣었다. 그 한 구절이 이렇다. "만새기는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그들 중 하나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내 색깔이 탐탁지 않다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군. 이곳에서조차 또 편견을 대해야 하다니! 하지만 그들이 내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합당한 거절 사유인 셈이다."(96쪽) 1982년 4월 21일. 캘러핸은 프랑스령 과달루페 섬 연안에서 구조된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2900㎞를 떠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캘러핸은 "결국 삶은 다시 복잡해지고 기억은 희미해졌다. 나의 욕심들이 되살아나고 예전의 불만들이 내 일상으로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잘 먹고 아픈 데 없고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야말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쉽사리 얻을 수 없는 특권이요 기쁨"이라는 그의 깨달음에는 뿌리가 깊다. 삶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항해해 가며 때때로 표류를 경험하는 우리들에게 울림이 큰 메시지이기도 하다. 원제 'Adrift:Seventy-Six Days Lost at Sea by Steven Callahan'.
2008.08.18. 15:35
"별 하나에 추억과 / 별 하나에 사랑과 /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천문대 가는 길 전용훈 지음, 이음 시인 윤동주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을 불러본다"고 노래했다. 별은 사람들의 상상력을 자극한다. '별이 빛나는 밤'을 그린 빈센트 반 고흐는 "별이 반짝이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현대의 도시인은 총총한 별빛을 거의 보지 못하고 산다. 사람들 대부분은 바쁜 일상에 쫓겨 밤하늘을 쳐다볼 여유조차 없다. 어쩌다 하늘을 봐도 도시의 강한 불빛에 가려 별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이 책은 한국의 대표적인 천문대 10곳을 탐방한 답사기다. 천문대는 별을 관측해야 하는 특성상 공기가 맑고 인근에 인공적인 불빛이 없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도시를 탈출해 한적한 여유를 만끽할 여행장소로 손색이 없다는 얘기다. 천문학과 과학사를 공부한 저자는 천문대에다 별.망원경.천문학자들의 얘기를 녹여냈다. 우리나라에 구경 5m 10m급 대형 망원경이 없는 이유 영조 임금이 중국에서 사온 태양관측용 망원경을 부숴버린 사연 우리나라 최대인 보현산천문대 망원경이 작동이 안돼 연구원들이 직접 고친 대목 등은 흥미진진하다. 저자는 천문대 근처 명승지와 문화유적지도 함께 소개했다. 예를 들어 소백산천문대 가는 길에선 소수서원과 부석사 별마로천문대에선 청령포와 단종묘 김해천문대에선 수로왕릉 서귀포천문과학관에선 추사 김정희 유배가옥을 엮었다. 도시 근처에 있어 찾아가기 쉬운 천문대도 나온다. 대전시민천문대는 뒷동산에 산책 가듯 갈 수 있어 '하늘 놀이터'로 불린다고 한다. 장흥아트파크에 있는 송암스타밸리는 미술관과 조각공원을 갖추고 있어 서울과 수도권 시민들이 하루 나들이를 즐길만한 명소다. 이 책은 사진과 일러스트가 거의 매쪽 나와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특히 우리나라 최초의 천문 월간지 '하늘'을 창간했던 고 박승철씨의 사진 '숲속의 북두칠성'은 경이로운 느낌마저 든다. 무주 적상산의 참나무 가지 사이에 북두칠성이 모두 걸려있는 이 한 컷을 찍는데 꼬박 1년이 걸렸다고 한다.
2008.08.18. 15:33
근대는 바다 저 멀리서 홀연히 나타났다. 서양의 상인.탐험가.군인들이시장과 식민지 확장을 꾀하며 조선의 바다로 향했으니 배에 실은 진짜 화물은 근대의 얼굴이자 속내인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였다. 그렇게 홀연 나타난 이방인들을 용납하기엔 조선이 걸어 잠근 쇄국의 빗장은 두껍기만 했다. 전형적 접촉 사례 하나. 1832년(순조 32) 7월 17일 영국 상선 로드 애머스트호가 황해도 장연 바다에 정박했다. 첫 만남의 상대인 조선 어부들은 이방인들이 떠나기를 바라는 몸짓을 하면서도 해안으로 초대해 생선과 술을 대접했고 곧 관리들을 데리고 왔다. 이방인들은 육지에 감자도 심고 책을 나눠주기도 했다. 긴장 속에서도 우호적이었지만 그것이 끝이었다. 조선의 두꺼운 문을 확인한 이방인들은 두 달 만에 닻을 올렸다. 그리고 황해감사는 이방인들과 교류한 관리들을 벌주고 책도 불태웠다. 최초의 당혹과 공포와 호기심 조심스런 접촉을 통해 적의(敵意) 없음을 확인함 약간의 우호적 교류 이방인의 끈질긴 문호 개방 시도와 조선측의 끈질긴 거부 이양선의 출항과 조선 조정의 무용(無用)한 뒷논의 그리고 이방인과 교류한 이의 처벌. 19세기 조선과 이양선의 접촉에서 반복되는 이 패턴의 다양한 사례들을 저자는 현장감과 생동감을 불어 넣어 재구성해냈다. 광범위한 자료의 비교 검토 덕분에 보다 분명해진 사건도 있다. 1622년(광해군 14) 돛대 30여 개를 세운 큰 배가 사도진(고흥군 금사리) 앞바다에 들어오자 조선군이 화살을 쏘았고 조선인 8명이 사로잡혔다. 저자는 네덜란드 상선 혼트호로 추정한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문서에 따르면 혼트호는 바타비아에서 일본으로 향하다 항로에서 벗어나 '코레아 병정 36명의 급습'을 받고 격전 끝에 겨우 물리쳤다. 우리 실록과 네덜란드 기록이 각각 사도진과 제주도로 다르지만 1622년이라는 시기가 같고 항로상 전라좌수영 사도진 수군과 교전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 조선과 유럽 국가 간 최초 교전이다. '최초' 기록에 관심 많은 독자라면 1816년 9월 조선의 서해안을 탐사한 영국 군함 알세스트호와 리라호가 각별할 듯 하다. 함대를 이끈 맥스웰 대령.홀 대령이 마량진첨사 조대복 비인현감 이승렬과 교류하는 과정에서 '최초' 기록이 양산됐다. 이승렬은 최초로 서양식 진료를 받았고 조대복은 최초로 성서를 손에 넣었으며 그 둘은 최초로 포크 나이프 스푼을 사용한 서양식 식사를 했고 최초로 서양 와인을 마셨다. 나중에 조선 조정은 이 둘을 파면시켰지만 홀 대령은 조대복을 이렇게 평했다. "자신과 무척 다른 사람들의 관습을 예의 바르고 편안하게 따르려는 그의 태도는 탄복할 만했다. 그의 예의범절은 그 사회의 문화 수준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는 이 세상 어디에서나 예의 바르고 관찰력이 예리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 틀림없다." 군의관 매클라우드도 "우리가 만난 모든 조선인들의 행동에는 인간적인 솔직함이 있었으며 무례하다고 생각될 수 있는 성향은 없었다"고 평했다. 저자의 관심은 접촉의 전말과 기록을 정리하는 일도 시세 급변에 눈 감고 쇄국을 고수하다 망국에 이른 조선을 반면교사 삼는 것도 아니다. 그는 우리와 타자의 소통과 이해에 눈길을 돌린다. 집권층은 격식화된 공문서의 틀에 갇혀 이방인을 추상적으로만 인식하면서 경직된 쇄국으로 일관했다. 재야 지식인 일부는 중국에서 입수한 서적을 통해 단편적 지식과 관념의 차원에서 이방인을 인식하고 교류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했지만 실천성을 결여한 '서재의 사상'에 그쳤다. 저자가 주목하는 건 바다라는 삶의 터전에서 일상의 노동에 충실했던 조선의 섬 주민이나 바닷가 어민들 그들 가까운 곳에 있던 말단 관리들이다. 생동하는 삶의 현실 속에서 이방인과 대면한 그들은 호기심과 공포 사이에서 머뭇거리면서도 이방인에 대해 대체로 친절했고 크게 혐오하지도 않았다. 영국 군함 리라호에 올라타 대단한 호기심으로 배 안을 휘젓고 다닌 주민들 1845년 7월 제주도를 거쳐 거문도에 상륙한 영국 측량선 사마랑호 선원들과 술을 교환한 주민들 사마랑호 선원들이 물 나르고 텐트 세우는 것을 도와준 제주 주민들 1854년 러시아 증기선 보스토크호가 수심 얕은 곳에서 곤경에 빠졌을 때 성심껏 도와준 거문도 주민들 1856년 프랑스 해군 게랭 제독이 지휘하는 비르지니호에 소를 팔고 술.담배.비누를 받았지만 곧 관리에게 빼앗긴 원산도 농민들 등등. (게랭 제독은 "농민과 어부들은 프랑스인들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가장 친절하게 대접했다"고 보고한다.) 이념이나 사상의 더께가 쌓이지 않은 생활 세계에서 이루어지는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을 동경한다는 점에서 저자는 순진하다. 무지렁이 백성들의 대책 없는 친절은 결국 제국주의를 도운 것 아니냐는 '사회과학적' 트집도 가능하겠다. 그러나 그 순진함이 유의미한 까닭은 예컨대 생활 세계의 자율성 역동성과 멀어져 무기력해진 작금의 우리 제도권 정치 풍경 때문이다. 19세기에 이양선을 타고 나타난 이방인과 조선인 사이의 장벽과 방불한 우리 안의 장벽은 또 얼마나 많은지. 결국 저자의 훈계 아닌 훈계는 이렇다. 참된 소통과 이해의 가능성은 아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비로소 온전히 싹튼다는 것이다.
2008.08.11. 15:24
"달려야 한다. 아니다. 이겨야만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당신은 승리해야만 한다. 그런데 당신에겐 경기를 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다. 대신 동료가 금메달을 따낸다. 축하해줘야 한다. 하지만 동료의 빛나는 승리가 당신에게 순수한 축복일 리 없다. 승부란 그런 것이다. 승리보다 소중한 것? 글쎄…." 1996년 미국 애틀란타 올림픽에 참가했던 일본 육상 여자대표 아리모리 유코의 이야기다. 이 책은 일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올림픽 취재일기다. 작가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을 취재하며 3주 가량 호주에서 쓴 글을 묶었다. 처절하리만큼 고독한 스포츠 현장을 들여다보며 호주의 역사와 문화를 양념처럼 곁들였다. 일기처럼 가볍지만 쉽게 휘발되지 않는 이유다. "스포츠는 결과가 전부죠. 아무리 긴장하고 불안해도 만약 메달을 딸 수 있다면 '긴장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잘 됐다' 하면 끝이니까요. 이겨 버리면 끝이니까." 일본 마라톤 감독의 말은 곧 우리들의 생각과 다름이 없다. 일본 마라토너의 패배를 두고 "감독으로서 이번 올림픽을 통해 얻은 게 있냐고요? 역시 굴욕이죠."라고 말하는 부분에선 왠지 서글퍼진다. 그러나 결론을 내리기엔 이르다. 수많은 승리와 패배를 담담히 관찰하며 작가는 계속 이야기를 듣는다. "금메달이라는 게 뭐죠? 금메달을 따기 위해 자기 자신을 그렇게까지 버려야 하는 걸까요? 애인이 있으면 곤란한가요? 저는 결혼하고 가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오랫동안 경기에 임하고 싶어요. 그게 중요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자는 '승리보다 소중한 것'을 정의하는 대신 고백한다. "물론 나는 승리를 사랑한다. 그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기분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 승리 이상으로 '깊이'를 사랑하고 평가한다. 때로 인간은 승리하고 때로 패배를 맛본다.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라고. 영원히 승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오늘은 동료의 금메달에 힘껏 박수를 쳐주고 내일 그리고 또 내일 다시 달리면 되는 거다. 설사 마지막으로 결승점을 통과했다 하더라도 조용히 트랙에 입을 맞추고 '당신만의 레이스'를 꾸려가면 된다. 그 뿐이다.
2008.08.11. 15:18
'여인 천하'는 한국에만 있는 게 아니다. 음모와 배신의 궁중 암투 거침없이 욕망을 추구하는 인간들 그리고 권력의 싸늘한 속살이 드러나는 역사 드라마 말이다. 이 책은 16세기 영국 튜더 왕실에서 벌어진 왕위 계승 드라마의 한 자락을 그린 역사 픽션물이다. 도도한 역사의 한 꼬투리에 불과한 사건이지만 분 냄새와 피 냄새가 야릇하게 섞이는 가운데 얽히고 설킨 인간들의 사연이 결코 만만치 않다. 주인공의 이름은 제인 그레이. 입을 때보다 더 기쁘게 여왕의 예복을 벗어던진 여인. 16세에 영국 왕위에 올랐지만 단 9일만에 죄수로 전락했다. 제인은 그 '말썽 많은' 튜더 왕가의 혈족이다. 그의 외할머니 메리는 영국 국왕 헨리 8세의 여동생이다. 메리는 18세의 나이에 52세 먹은 프랑스 국왕 루이 12세와 정략결혼을 했다. 하지만 남편이 숨지자 오빠의 반대를 무릅쓰고 첫사랑 찰스 브랜든과 결혼했다. 그 사이에 딸 프랜시스가 태어났고 프랜시스는 제인을 낳았다. 헨리 8세는 이혼을 위해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종교개혁을 한 것은 물론 여섯 차례의 결혼과 두 차례의 왕비 처형으로 악명을 떨쳤다. 그는 세 명의 적자를 뒀다. 정략 결혼한 스페인 출신 첫 부인이 낳은 메리 둘째 부인 앤 볼레인에게서 얻은 엘리자베스 그리고 셋째 부인 제인 시무어 소생인 아들 에드워드다. 이 셋은 모두 영국의 여왕과 국왕에 오른다. 맨 처음 왕위에 오른 이는 에드워드로 10살에 즉위해 15살 때 세상을 떠난다. 에드워드는 선왕의 유언과 고관들의 압력에 따라 왕위를 누나에게 물려주지 않고 고종사촌 누나인 프랜시스 브랜든의 딸인 제인 그레이에게 넘겨주기로 한다. 하지만 제인의 시대는 고관들의 반발로 9일 천하로 막을 내리고 왕관은 메리에게 넘어간다. 이 책은 이러한 역사를 옴니버스적인 방식으로 그렸다. 관련 인물들이 하나씩 차례로 등장하면서 자신의 시각으로 사건을 한 뜸 한 뜸 재구성해 나간다. 그러면서 '그 세기 가장 섬세한 마음을 지닌 여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제인의 면모가 드러난다. 어려서부터 많은 교육을 받아 교양을 쌓은 그는 원래 왕비 감으로 점찍혔지만 거대한 권력 투쟁의 소용돌이 속에 원치 않은 결혼을 하게 된다. 여왕에 오른 것도 그의 의사가 아니었다. 그러다 끝내 아버지 시아버지 남편 그리고 친척인 메리 여왕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사람에게 배신과 이용을 당한 끝에 목이 잘리게 된다. 원제 'Innocent Traitor'. 당신이 문화를 만드는 시대 왔다 최근 전화기능만 있는 휴대전화를 사려고 시도해본 적이 있는가? 혹시 '구식'이라고 불리울지 모르지만 주변에는 요즘 이런 시도를 했다가 낭패를 본 이들이 꽤 있다. 이 책을 쓴 MIT 인문학부 교수인 헨리 젠킨스도 그런 전화를 사려다 실패한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지난해 휴대전화를 구입하면서 디지털 카메라 기능이 없고 MP3플레이어도 안되며 영화 예고편이나 소설을 읽을 수 '없는' 휴대전화를 찾았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점원의 코웃음이었다. 세상이 변해도 많이 변한 탓이다. 미디어 비교연구 전문가인 그는 자신의 이 경험을 통해 휴대전화가 미디어 컨버전스 과정의 중심에 놓여있다는 것을 절감했다. 그러나 그가 새삼스럽게 미디어 컨버전스를 강조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는 않다. 반대로 그는 '컨버전스'라는 용어를 새롭게 정의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사전을 뒤져보면 '컨버전스(convergence)'는 '한 곳으로 모임(집합) 집중성 통합'이란 뜻으로 나와 있다. 따라서 IT업계에서 컨버전스란 용어는 "다양한 미디어의 기능이 하나의 기기에 융합되는 기술적 기능"이란 뜻으로 자주 거론돼왔다. 그러나 젠킨스는 이 개념에 반대한다. 지나치게 기술적 요소만 강조했다는 것이다. 대신 그는 컨버전스가 "미디어가 유통되는 과정에서 겪는 기술적 산업적 문화적 사회적 변화"이며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정의한다. 과거에 특정 미디어에 특화된 것으로 생산되고 유통돼 온 콘텐트가 다수의 미디어 채널을 넘나드는 과정에서 미디어 생산자(미디어 기업)과 소비자의 힘(참여문화)이 복잡하게 얽히며 역동적으로 상호작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미디어 콘텐트의 순환이 소비자의 적극적 참여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새로운 미디어 시스템에서 소비자가 새로운 정보를 찾아내고 서로 흩어진 미디어 콘텐트를 연결하며 문화적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가 됐다고 주장한다. 이런 맥락에서 그는 '컨버전스 문화 시대'를 이끌어가는 핵심적인 요소로 미디어 컨버전스 참여문화 집단 지성을 꼽는다. 미디어 컨버전스에서 올드 미디어와 뉴미디어는 공존하고 충돌한다. 한때 미래에 모든 미디어 콘텐트가 하나의 블랙박스를 통해 우리 거실로 유통될 것이라고 믿어진 적도 있었지만 젠킨스는 이러한 예측이 빗나갔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를 가리켜 '블랙박스의 오류'라 부른다. 실제로 우리 생활에서는 노트북과 휴대전화 아이팟과 게임보이 등 블랙박스가 더 늘어났기 때문이다. 하드웨어가 분화된 대신 콘텐트가 유통되는 방식만 다양해진 것이다. 미디어 기업이 이 변화를 놓칠 리 없다. 다양한 채널로 콘텐트를 유통시키며 '시너지'를 창출하기 위해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다. 젠킨스는 근대의 미디어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프랜차이즈로 미국 TV프로그램 '서바이버'(2004) '아메리칸 아이돌'(2002)과 영화 '매트릭스'와 '스타워즈' 등을 꼽았다. 이들의 가장 큰 공통점은 원래의 콘텐트가 원래의 미디어에서 벗어나 다른 문화 생산의 장에도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그 주체는 소비자다. 시청자들이 새 미디어를 통해 새 네트워크 즉 '지식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함께 새로운 지식을 만들어내는데 앞장 섰다. 젠킨스는 컨버전스가 집단 지성과 참여문화의 가능성을 촉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렇다면 젠킨스가 컨버전스 문화 현상에 이토록 집중한 이유는 무엇일까. 대답은 그가 자신을 가리켜 '비판적 이상론자'라고 소개한 데 있다. 그는 새로운 참여의 기술이 TV프로그램이나 영화나 게임에 적용되는 사례에서 정치활동 교육 사회 변화의 '가능성'을 찾았다. 대중문화에서 '참여 정치학'의 원형을 본 것이다. 그러면서 미디어의 힘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을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다. 비관론자들이 말하듯이 "모든 미디어를 거부하고 숲 속에 살면서 소규모 대안 출판사가 재생용지로 출판한 책만을 읽으며 사는" 것이 대안이 될 수 없다고 못박는다. 그는 유능한 선생님답게 생생한 사례를 들며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끌어간다.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이니 '감정경제'니 여기 저기 튀어나오는 낯선 용어들이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책 읽는 재미를 반감시킬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한 미디어 학자의 열정적인 강의를 듣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 그의 '이상론'에 동의할 지 말지 판단할 일이 숙제처럼 여겨지지만 말이다.
2008.08.04. 16:17
교통과 통신의 발달로 세계가 사뭇 가까워졌다. 이제 세계화니 지구촌이니 하는 말이 더 이상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하고 그저 평범하게 들리는 그런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에게 적도지방은 아직 낯설기만 하다. 그만큼 우리와 소통이 자연스럽지 못한 탓일 게다. 그래서 어쩌다 적도 운운하는 책을 만나면 호기심부터 일게 마련이다. 대부분이 이색풍물을 소개하는 기행문 따위이긴 하지만 말이다. 이 책도 우선 그런 면에서 일단 눈길을 끈다. 언뜻 보면 기행에세이 정도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조금만 들춰보면 금세 가벼운 터치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된다. 이 책은 한마디로 한 지역의 역사와 문화 풍물 등을 포괄해 다루는 민족지(ethnography) 그중에서도 해양민족지(maritime ethnography)이다. 폴리네시아 하와이 제도로부터 마샬제도를 거쳐 미크로네시아제도에 이르기까지 적도 태평양 군도의 다채로운 역사와 문화가 지난 세기 한반도의 경험과 어떤 인연으로 연결돼 있는지 추적하고 있다. 저자는 적도 태평양에 드리웠던 '문명화'의 해악과 그늘을 다루면서 근대화 와중에 침묵 당해야 했던 원주민들의 삶과 기억 나아가 그들이 지닌 무한한 잠재력들을 탈식민주의 시선으로 재발견한다. 그는 이 같은 작업을 위해 우선 '태평양은 정말 태평할까'라는 질문으로 출발한다. 그리곤 '전혀 아니다'라고 결론을 내린다. 그것은 '만들어진 제국의 작품'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이 책은 이 같은 질문에서부터 결론을 끌어내기 까지의 과정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책은 적도 태평양이라는 풍경에 각인된복잡하고 섬세한 맥락들에 관해 즉 '만들어진 태평양'에 관해 분석하고 추적하고 고증을 들이댄다. 이를 위해 고고학.역사학.지리학.종교학.신화학.민족학.민속학.인류학.의학.식물학.동물학 등 그야말로 전 방위로 박물학적 지식과 정보가 동원되고 있다. 저자는 이미 이 같은 방식의 저술에 익숙하다. 수년 전 나온 '제국의 바다 식민의 바다'도 다루는 대상 영역이 동아시아 바다라는 점만 다를 뿐 추구하는 점이나 접근 양식이 같다. 말하자면 이번에 나온 '적도의 침묵'에서 관심영역을 더 확장한 것 뿐이다. 여기서 혹자는 웬 뜬금없이 적도냐고 궁금해 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 저자는 "그곳이 바로 수많은 한인들이 징용. 징병으로 끌려갔던 남양군도"라며 "우리 역사와 무관한 곳이 결코 아니다"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이 같은 연관성을 바탕으로 공부를 하다 보면 앞으로 이들 지역과의 새로운 관계를 모색할 수 있다는 믿음을 곳곳에서 드러내고 있다. 저자는 이전 저작들에서도 그랬듯이 이 책도 철저히 '현장 바로 그곳'에 기초해 기술하고 있다. 예를 들어 하와이 호놀룰루 시내 주청사 앞에 있는 다미엔(Damien)신부의 동상을 보고 20세기 초 한센병과 관련된 제국주의의 비인권적 처사(일제 때 세워진 소록도 수용소를 생각해보라)를 얘기하는 것 같은 방식이다. 그것은 저자가 금과옥조로 여기는 학문태도이자 신념이다. 이 책의 저술을 위해 저자는 2007년 해양연구원 탐사선인 온누리호에 승선해 현지를 답사했다. 저자는 이 과정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적도 태평양에 관한 지식의 대부분이 이 지역을 식민지로 삼았던 제국주의 시각에서 쓰인 것임을 확인하고 이 같은 시각에서 벗어날 것을 요구한다. 그래야 진실에 보다 접근할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저자는 말한다. "왜 태평양의 원주민 아이들이 자신의 노래 대신 셰익스피어의 연극을 배워야 하는가. 정작 이 친구들에게 필요한 건 바닷가에서 발휘할 고기잡이 기술일 수도 있다. 왜 그네들의 민속지식은 무시되고 유럽지식만 선진이라는 이름 아래 강요되는가. 또 우리는 이 문제에서 얼마나 자유로운가." 이 책은 ▶전복(顚覆)▶침묵▶수평▶수직 등 크게 4부로 구성돼 있다. 이는 각 지역의 특성을 상징적으로 잡은 제목으로 1부 전복 편은 폴리네시아 하와이 민족지이고 2부 침묵 편은 적도 태평양상의 배에서 쓴 해양문명의 조건 등에 관한 기록이다. 3부 수평 편은 미크로네시아 캐롤라인제도 축섬의 민족지 4부 수직 편은 미크로네시아 캐롤라인 폰페이섬의 민족지이다. 각 부마다 예리한 분석과 비평도 그렇지만 풍부한 관련 도판과 함께 펼쳐지는 다양한 정보의 제공은 전문적인 내용임에도 마치 기행문처럼 술술 읽히는 재미가 있다. 하와이하면 으레 떠올리는 훌라춤이 즐거움과 경외 노래 기도 한탄 신에 대한 찬미 남자와 여자 등에 대한 모든 것을 나타내는 원주민 사회의 통합기제에서 한낱 관광용으로 전락하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선 선교사를 앞세운 제국주의의 횡포에 화가 나기도 하고 한인이민사를 구조적으로 해체해 원인과 과정을 드러내 보일 때엔 "아하 그랬었구나"하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해양문명에 대한 저자의 열정과 박람강기가 돋보인다.
2008.07.28. 1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