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이 나를 뒤흔들었다. 소리쳐 울고 싶었지만 얼른 자신을 꾸짖었다. 마음을 다잡자. 가라앉히자. 사치스럽게 물을 마시지 못한다고 한탄해서는 안 된다.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고 울음을 삼켰다. 생존, 오직 생존에 집중하자.”(78쪽)
표류 스티븐 캘러핸 지음, 남문희 옮김 황금부엉이, 352쪽
망망대해 한가운데서 배가 전복됐다. 고무보트를 타고 탈출한 주인공. 생존 본능을 따르는 것 외에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없었다.
'표류'는 실화다. 무려 76일 동안이나 대서양을 표류했던 미국의 해양모험가 스티븐 캘러핸이 주인공이다. 1982년 2월 캘러핸은 자신이 직접 만든 소형 범선 나폴레옹 솔로호를 타고 대서양 1인 횡단에 도전했다.
항해에 나선 지 6일째 되던 밤 솔로 호는 고래와 충돌해 난파하고 만다. 캘러핸은 6인용 팽창식 구명선을 타고 탈출했다. 처음엔 '최대 14일은 버틸 수 있다'라고 생각했다.
표류기는 늘 흥미진진한 읽을거리다. 긴장감 넘치는 모험 이야기여서만은 아니다. 살아남기 위해 바다와 사투를 벌이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독자들은 자신의 삶을 발견한다. '생존을 위한 투쟁'이야말로 가장 원초적인 삶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표류의 고비를 이겨낸 생환 기록은 독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희망이 된다.
표류기가 매력적인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누구나 '표류'의 주인공이 된 경험이 있어서다. 어느 인생이 어느 한 순간도 '표류'의 상태를 경험하지 않고 순항할 수 있겠는가. 항로를 이탈해 길이 보이지 않는 상태.
안전한 보호막은 사라졌고 외롭고 무섭기만 하다. 하지만 이런 '표류'의 상황에서도 삶은 '절망' 한가지 색깔이 아니다. 공포와 고통.가책.좌절 사이사이 감사.희망.기쁨 등이 교차한다.
또 공포와 고통이 삶에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도 아니다. 캘러핸 역시 "공포심이 살아남는 데 도움이 됐다"고 말했다. 공포가 생존을 위한 행동을 촉발시켰다는 것이다. 궁핍한 생활이 미묘하고도 소중한 풍요를 선사하기도 했다. "고통.좌절.굶주림.갈증.외로움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찾아올 때면 참으로 그 순간을 소중히 여길 줄 알게 됐다"는 게 캘러핸의 회상이다.
캘러핸은 지름 1.5m 튜브 두 개를 포개 놓은 모양의 구명선에 몸을 의지하고 '바다의 로빈슨 크루소'가 돼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무게가 9~13kg에 이르는 거대한 물고기 만새기는 그의 항해 동료이자 식량이 됐다.
구명선을 따라다니는 만새기를 작살로 잡아 끌어올린 뒤 몽둥이로 때리고 칼로 찔러 죽이는 과정은 잔인하다기보다 엄숙했다. 만새기 안구의 기름진 액체와 아가미 안쪽의 찐득한 점액질도 캘러핸에게는 소중한 수분 공급원이었다. 철분을 섭취해 빈혈 증세를 경감시켜 볼 생각으로 땅콩 캔과 커피 캔에 붙은 녹을 긁어 먹기도 했다.
'모순투성이' 삶의 속성은 표류의 상황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햇빛이 내리쬐는 날에는 살이 타 들어갈 것 같이 괴롭지만 태양열 증류기를 이용해 만드는 물의 양이 많아진다. 반대로 짙은 먹구름이 햇살을 가려주는 시원한 날엔 생명수가 줄어드는 초조함도 함께 맛봐야 했다.
바람의 세기 역시 100% 이상적인 상태는 없었다. 바람이 거세게 불면 목적지를 향해 쾌속 전진할 수 있어 기쁜 반면 몸이 젖고 추워서 오들오들 떨어야 하고 난파의 두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또 바람이 잔잔해지면 몸이 마르고 상처가 아물며 물고기도 더 쉽게 잡히지만 표류기간이 연장되고 도중에 상어를 만날 위험도 커졌다.
내면의 갈등도 컸다. 몸이 힘들 때는 이성이 스스로의 참을성에 갈채를 보내며 의지를 다져줬지만 몸이 만족하는 순간이 오면 이성은 자제력을 잃고 불평을 해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만족'의 순간은 있었다. 만새기를 잡아 먹고 남은 살점을 줄에 꿰어 말렸을 때다. 빨랫줄에 7㎏가량의 날생선을 대롱대롱 매달아 놓고는 부자가 된 것만 같았다.
"알아주는 불평꾼에 성질 급하기로 소문난 내가 날생선 덩어리와 물 반 리터로 부자가 된 기분이 든다면 과연 누가 믿을까." 저자 스스로도 신기해했다.
"과거의 내 삶은 참으로 불필요한 정도로 복잡하기만 했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는 걸 생애 처음으로 절감했다. 항해에 나서기 전에 나는 지금 내가 필요로 하는 것 즉 음식.거처.옷.친구들을 다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어떤 목표를 포기하거나 물질적으로 탐내던 걸 손에 넣지 못할 때면 원하는 걸 죄다 갖지 못한 데 불만을 터뜨리곤 했다."(171쪽)
그러고 보면 만족을 느끼는 능력 자체가 생존 비법일지도 모른다. 또 삶에 대한 기대와 웃을 수 있는 여유 역시 절망의 순간을 이겨내는 힘이 된다.
캘러핸은 끝이 보이지 않는 표류의 상황에서 일지를 적었다. 자신이 남긴 기록이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교훈을 준다면 그게 세상에 행하는 마지막 봉사가 될 것이라는 기대에서였다. 그리고 긴장을 덜어주기 위한 시니컬한 농담도 일지에 적어 넣었다. 그 한 구절이 이렇다.
"만새기는 여전히 아름답고 매혹적이다. 그들 중 하나에게 청혼했다. 하지만 그녀의 부모들은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내 색깔이 탐탁지 않다는 것이다. 어처구니 없군. 이곳에서조차 또 편견을 대해야 하다니! 하지만 그들이 내 미래가 밝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지적했다. 합당한 거절 사유인 셈이다."(96쪽)
1982년 4월 21일. 캘러핸은 프랑스령 과달루페 섬 연안에서 구조된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2900㎞를 떠내려온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흘렀다. 캘러핸은 "결국 삶은 다시 복잡해지고 기억은 희미해졌다. 나의 욕심들이 되살아나고 예전의 불만들이 내 일상으로 다시 비집고 들어왔다"고 고백한다.
그래도 "잘 먹고 아픈 데 없고 친구와 사랑하는 이들과 어울리는 것이야말로 이 험악한 세상에서 쉽사리 얻을 수 없는 특권이요 기쁨"이라는 그의 깨달음에는 뿌리가 깊다. 삶의 바다에서 끊임없이 항해해 가며 때때로 표류를 경험하는 우리들에게 울림이 큰 메시지이기도 하다. 원제 'Adrift:Seventy-Six Days Lost at Sea by Steven Callahan'.
# 080818_북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