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기계에 마비되어/바삐 움직이면서/시간을 돈 쓰듯 물건 쓰듯 쓰기만 하고/시간 자체!를 느끼는 일은 전무한 듯/하니, 시간의 꽃인 그 시간 자체는/어떻게 되었는가./(…)꽃 시간은 희귀하게 동터오니/이미 망한 세상에서 우리는/이미 망한 줄도 모르고 살고 있는/여지없이 망한 인생임에 틀림이 없다”(정현종 ‘꽃 시간2’ 중)
돈과 기계에 마비된 보통 사람들은 꿈에 로또 숫자가 탁 떠오르길 기대한다. 그러나 시인들은 꿈에서 시를 기다린다.
“잊었다/새벽 꿈속/시 한수 와 있다가/꿈 깨이자/천리 밖으로 갔다/굳이 돌아오길 바라지 않는다//가서/세상의 티끌이거라 나의 시라는 것들 다 남의 핏줄이니라/돌아오지 마라”(고은 ‘자각’ 전문)
그런데 꿈에서 깨는 ‘자각’의 순간 시는 달아나버린다. 자각이 곧 망각이다.
‘아이구 아깝다’란 탄식은 꿀꺽 삼킨다. 잊어버리든, 적어 내어놓든 품을 떠난 시는 ‘남의 핏줄’. 집착을 버린다.
“잠결에/시가 막 밀려오는데도,/세계가 오로지 창(窓)이거나/지구라는 이 알이 알속에서 부리로 마악 알을 깨고 있거나/시간이 영원히 온통/푸르른 여명의 파동이거나/(…)/하여간 그런 시가 밀려오는데도/나는 일어나 쓰지 않고/잠을 청하였으니……”(정현종,‘시가 막 밀려오는데’ 중)
시 쓰는 일이란 천형(天刑)이라 했다. 때론 제 발로 걸어오는 시마저 훠이 훠이 쫓아내며 시에 붙들린 운명을 놓아버리고 싶을 터다.
“지금부터 쓰는 시는/시집도 내지 말고/다 그냥/공기 중에 날려버리든지/하여간 다 잊어버릴란다./그럴란다./(아이구 시원해)”(정현종, ‘지금부터 쓰는 시는’ 전문)
시 몇 수 남기고 하직했다면 ‘요절한 천재 시인’으로 길이 남았을지도 모를 일. 동료들을 수없이 떠나보내며 40년, 50년 시를 쓰는 건 축복이자 짐이다.
“이 시간이면/올 사람이 왔겠다 생각하니/슬프다./갈 사람이 갔겠다 생각해도/슬플 것이다./(왜 그런지)/그 모오든 완결이/슬프다.”(정현종 ‘슬프
다’ 전문)
“오랜 두려움 끝/이제 두렵지 않다/오전의 하늘에 없던 구름이 슬쩍 와 있다/구름 밑/산이 간다/산 밑/산그늘이 간다/그동안 내가 나에게 목숨 바쳤다//정말이지/죽음은 남이 아니다 아니구말구”(고은 ‘죽음을 보며’ 전문)
죽음마저 끌어안는 시인에게도 두려운 게 하나 있다. 11일 저녁 고은 시인의 등단 50주년 기념 그림전 폐막 뒤풀이 자리.
밤이 깊어갈 무렵 시인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응~. 오늘 마지막 날이라 친구들이랑 술 한 잔 하고 있어. 오늘만 양해해줘요.” 아내 이상화 중앙대 교수의 전화였다. 너무나 사랑해서 두려운 존재, 아내.
“엄마가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지나간다./뭐라고 뭐라고 딸이 옹알거리고/뭐라고 뭐라고 엄마가 되풀이한다./나는 누구인가./나는 저 딸아이가 낳은 것이다/라는 생각이 번개처럼 스친다./시작도 없고 끝도 없다.”(정현종 ‘거대한 무의식’ 중)
“너 낳은 몸/너 기른 몸/너에게 말과 무언을 준 몸/저 끝 간 데 모를 푸른 하늘이/아득히/아득히/네 에미니라//그 동안의 삼천년 잘못이었다/하늘은 네 아비가 아니라/네 에미니라”(고은 ‘에르푸르트에서’ 중)
생명을 낳는 여성에 대한 경외감은 하늘과 땅, 음양의 순서까지 바꾸어 말할 정도로 강력하다.
# 080915_북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