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내 스스로가 나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남의 속박도 풀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묶여있는데 어떻게 남의 속박을 풀어줄 수가 있겠는가?
불교는 어떤 원인에는 틀림없이 결과가 따른다는 과학적인 이치가 그대로 적용되는 인연과법이 있다. 즉 내가 누구를 주먹으로 한번 때렸다면 때린 만큼 다시 내가 맞아야하는 업의 원인에 따라 그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부처님의 말씀에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선과 악의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행위를 일을 일삼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업에는 신(몸) 구(입) 그리고 의(뜻)로 지어지는 삼업을 대표적으로 들 수가 있다.
이 삼업은 다시 열 가지 악업으로 나누어지는데 몸으로는 살생 투도(도적질) 사음(삿된 음행) 등 세 가지 업을 짓고 입으로는 거짓말의 망어 꾸밈말의 기어 두 가지 말의 양설 악독한 말의 악설 등 네 가지 업을 짓고 뜻으로는 탐욕 진애(성냄) 치암(어리석음)의 세 가지 업을 지어 과보를 받게 된다.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처해져 있는 불행한 환경 탓인지 선업보다는 악업을 행하기가 더 쉽고 이러한 악업에 한번 빠지면 끊임없이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확실히 선업보다는 악업을 행하기가 더 쉬운 게 우리 인간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부처님께서도 선업보다는 악업에 관한 말씀을 먼저 하시고 이 악업에 반대되는 일로 선업을 나중에 말씀하셨던 것이 아닌가한다.
부처님 법은 낙제할 사람을 억지로 붙인다거나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남에게 해를 입혀온 사람에게 무조건 부처님만 믿으면 제도를 받고 극락에 가는 그런 부자연스런 법이 아니다.
자기가 한 해 기도했으면 기도한 만큼 그 복덕을 받는 것이고 하루 선행했으면 하루 선행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복덕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우리 주변에는 분명 잘못하고 남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대할 때면 자주 삶의 회의와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부처님은 또 이렇게 가르침을 주신다. "선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착한 사람이 화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 선이 익게 될 때는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며 악의 열매가 아직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이 복을 받기도 하지만 그 악이 익어질 때는 혹독한 죄의 대가를 스스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우리는 당장 어떠한 결과나 이익이 보이지 않는다고 서두르지도 말 것이며 우리가 행한 만큼 받아야 할 업이나 과보는 꼭 따르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깊게 새겨두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선과 악의 업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는 현재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업보에 따라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윤회의 틀 속에서 헤매게 된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잘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고통과 윤회를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우선 중생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려야 한다.
누에가 자신의 몸을 여러 차례 바꿔가며 실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도 우리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떠나 참다운 자기 실상의 모습으로 바꿔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몸뚱이의 억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된다면 신.구.의 삼업에서 벗어남은 물론 삶의 고통과 궁극적으로 육도의 윤회에서 함께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 080916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