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햇살이 약해지면서 미국의 대부분의 학교들이 개학을 했습니다. "Back to School" 준비로 학용품만 아니라 옷 백팩 신발까지 구입하느라 분주한 여름의 마지막 순간이였습니다. 자녀들은 '담임 선생님은 누굴끼?'하는 궁금함과 긴 여름방학 동안 만나지 못했던 친구을 생각에 가슴이 부풉니다. 부모들은 자녀들이 상급학년으로 올라갈수록 대학진학 준비를 위한 정보수집에 열심입니다. 그렇기에 자녀의 성적에 관심의 촛점이 되기 쉽습니다. 성적이 좋으면 자유와 특혜를 누리지만 그렇지 않으며 간섭과 시달림을 받습니다. 학생의 본분은 공부하는 일은 분명합니다. 그리고 공부를 할 바에야 좋은 성적을 받는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습니다. 반면에 자녀가 전 인격체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지성은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누가복음 2:52에 예수님께서 성장하신 모습을 한 줄로 간단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단지 한 문장이지만 예수님의 성장에서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은 지성과 신체와 영성과 관계셩에서 균형있게 성장하신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이 성숙한 '전 인격체'가 되려면 6분야에서 성장해야 한다고 합니다. 6부분은 '지적인 성장' '신체적 성장' '감성적 성장' '영적인 성장' '재정관리의 성장' '관계적 성장'으로 이루어집니다. 물론 성경에는 6가지 중에서 4분야의 성장 과정만 기록되어 있지만 예수님의 사역을 보면 재정적이나 감성적인 면도 건강하고 균형있게 성장하셨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전인격체로 자라는데 가장 큰 어려움이 있다면 6 분야에서 균형있게 성장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6분야에서 5가지가 아무리 완벽하게 성장하여도 한 분야에서 성장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다면 부족한 부분의 분량까지 밖에 자랄 수 없다는 것입니다. 6분야가 다 연결되어 한 인격체를 형성해 가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명문 대학을 나오고 경제적으로 기반을 다졌지만 인간관계에서 미숙하다면 사회생활하는데 어려움이 많을 것입니다. 인간관계가 좋고 건강하더라도 영적으로 메말랐다면 영적파산의 위험이 찾아 올 것입니다. 부모로서 자녀를 양육하면서 목사로서 학생들을 지도하면서 느끼는 점은 부모가 자녀에게 요구하는 부분이 너무 편중되어 있음을 봅니다. 자녀의 학업성적을 강조하지만 친구와의 갈등이나 인생에 대한 질문에는 무시하고 넘어갑니다. 명문대학에 입학하는 목표는 세워주지만 어떤 인격체가 되어야 하는 목표는 뚜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분이라고 고백하지만 라이프 스타일은 물질적인 것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실망시킬 때 자주하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주는데 뭐가 아쉬워서 그래?" 부모가 이민와서 생활고에 시달리고 희생하면서 자녀를 키우지만 자녀가 이런 마음을 몰라주니 답답해서 하는 말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관점은 부모의 관점입니다. 자녀의 관점은 다릅니다. 자녀가 필요한 것은 옷이나 음식이나 잠자리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자녀의 관점에서 의식주는 기본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자녀가 필요로 하는 것은 바로 가정의 소속감입니다. 부모가 눈에 보이는 필요를 다 채워줬다고 할 때 자녀는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필요를 채워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새 학년에는 우리 자녀들이 학업에만 메달리지 않고 6분야에서 균형있게 성장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어린 예수님 처럼 전 인격체로 자라도록 경작되는 인생이 되었으면 합니다.
2008.09.16. 15:50
아내가 지난달에 시민권을 우여곡절 끝에 어렵게 취득했다. 신청 후에 무려 8년이란 세월이 걸렸다. 처음에는 미국 중부에서 개척교회를 하다가 얻은 훈장(?)이었는지는 몰라도 지문이 제대로 찍혀지지가 않아서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러다가 LA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주소변경으로 인하여 어려움을 당했고 나중에는 인터뷰가 신청지인 그곳에서 있게 되었는데 아내의 수술 날짜와 겹쳐지는 바람에 연기신청을 하였지만 케이스는 미궁 속으로 빠져버렸다. 그래서 결국은 다시 재신청을 해서야 겨우 받을 수가 있었다. 미국 시민권이 로마의 시민권처럼 파워풀한 시대는 지나갔지만 아내는 시민권을 받아들고 나와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것은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고 싶다는 거였다. 그 덕분에 나도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나도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고민만 하다가 참여하지 않았던 것은 교인들 가운데 공화당도 있고 민주당도 있는데 목사가 어느 한쪽에 치우친 정치색을 드러내는 것이 영 불편하여서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내의 특별한 내조(?)에 힘을 얻어 진지하게 두 후보와 전당대회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러다가 나는 중대한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두 후보가 열심히 열변을 토하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이 단 두 가지라는 것이었다. 첫째는 '내가 누구인가?'라는 'Who'였고 둘째는 '내가 나라에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What'이었다. 공교롭게도 한 후보는 전쟁영웅으로 부각되는 'Who'는 있었는데 'What'에 대한 확신이 없었고 다른 후보는 '변화'라는 'what'은 귀에 들어오는데 누구(Who)라는 면에 도달해서는 너무나 희미했다. 두 후보 중에 한명을 선택을 했다. 그러나 나는 이번에도 결정을 못하고 아내와 다른 길(?)을 걸어가야만 할 것 같다. 생각해보니 내가 두 후보에게서 만족할 점을 찾지 못하는 근본 이유는 예수님에게 있는 것 같다. 예수님의 인생의 전부는 그가 누구이시며 동시에 무엇을 하셨는가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누구라는 인물이 되고자 숫한 노력을 했거나 이루기 전략을 세운 적이 없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당신 자신(Who)을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라고 분명하게 드러내셨다. 또한 무엇(What)도 마찬가지셨다. 그가 우리에게 내놓은 무엇(What)이란 것은 바로 십자가이셨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 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 물로 주려함이니라"(막10:45)고 분명한 십자가의 목적을 말씀하셨고 홀로 그 십자가의 길을 가셨다. 그런데 오늘날 예수의 사람들은 어떤가? 예수의 "Who or What"을 추구하기 보다는 세상의 권력에 집착하고 있다. 작년에는 목사님들이 삭발을 하시더니 올해는 스님들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다. 교계 안에 직분이 너무 화려하여 직분을 직위로 착각하는 현대교회가 되었다. "성도"라는 본연의 이름을 자랑하거나 십자가의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는 예수꾼보다는 위로와 사랑받기를 더 좋아하는 신앙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래서 점점 교회에서 예수의 향기인 "Who or What"이 사라지고 있다. 이제는 성도인 우리들이 일어나서 세상에 빼앗겼던 예수와 십자가를 되찾아야한다. 예수만이 유일한 Who이시고 십자가만이 진정한 What임을 선언해야 한다. 예수님은 방법을 말씀하셨다: "내안에 거하라 나도 너희 안에 거하리라..."(요15:4)
2008.09.16. 15:49
작년에 아마도 서울 상암 축구 경기장이었던 것으로 기억이 되는데 큰 기독교 집회를 하는 것을 인터넷으로 본일이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모였고 유명한 목사님들께서 여러가지 순서를 맡으셨다. 찬양을 인도하는 목사님이 올라오셨고 이분은 워낙 찬양인도를 잘하시고 신세대 찬양들도 많이 아시니까 무슨 곡으로 이 큰 집회의 찬양인도를 시작하실까 궁금하기 시작했다. 놀랍게도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 말 들으사 죄인오라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주여 주여 내말들으사 죄인 오라하실때에 날 부르소서' 찬송가 337장으로 시작하시는 것이 아닌가. 축제의 분위기였고 크리스천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구나 대단하다 이렇게 큰 곳에서도 이런 집회를 갖는 것이 가능하구나하고 감탄하며 보고 있었었고 그 집회에 참석하는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내눈에는 보였다. 근데 그 상황에서 '인애하신 구세주'는 좀 뜻밖이었다. 왜 많은 찬양중에서 저 곡으로 시작하실까라고 의아해하다가 이 찬송을 따라 부르다가 무언가 깨닫는 것이 있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 서로가 서로를 보면서 우리 참 대단해라는 자리에서 주여 죄인오라하실때에 날 불러 달라는 찬양은 뭔가가 안 맞을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참 필요한 찬양이었다. 한국 기독교가 이만큼 성장해 왔지만 우리가 해야할 고백은 우리는 죄인이라는 것이고 예수님의 공로없이는 예수님께 의지함 없이는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분위기와 맞지 않는 것 같지만 가장 우리에게 필요한 찬양이었는지 모르겠다. 가장 영광스러운 순간에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 그것이 참 겸손이 아닐까? 지금 한국에서는 기독교인들이 집중공격을 받고 있다. 어떻게 보면 별일이 아닐 수 있는 일이 과장되게 보도가 되고 그런 소식을 듣는 안 믿는 사람들도 동조하는 것 같다. 이런 때일수록 우리 크리스챤들은 더욱 낮아졌으면 좋겠다. 예수님께서 사하여 주신 우리의 죄는 잊어버리되 우리가 죄인이라는 사실을 늘 기억하면서 더 섬겼으면 좋겠다.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들이 저렇다는 것은 어쩌면 그들이 우리에게 우리가 예수를 믿기 때문에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바라는 점이 기대하는 점이 많다는 얘기일 수 있다. 기대가 많으면 실망도 크다. 그러나 그런 실망을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우리 크리스천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겸손과 인내와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 닮은 우리의 모습을 그들의 삶의 현장에서 체험하면서 경험하면 그래서 그런 소식들이 하나 둘 씩 알려지게되면 자연히 어려운 소식들도 없어지지 않을까 싶다. 나는 우리나라를 향한 꿈이 있다. 미국과 캐나다가 기독교 국가지만 여러가지 잘 못하는 부분들은 있다. 그것들은 우리가 따라하면 안된다. 하지만 여기서 생활해보면 그들의 삶에서 잘 정착되어 있는 기독교 정신을 느끼게 되고 체험하게 된다. 나는 할아버지 아버지세대에 잘 전수 되어온 믿음을 이제는 우리 3세 4세 크리스챤들이 우리의 삶에 잘 정착시키는 것을 보고싶다. 양으로 승부해서 좋은 결과를 내었다면 이제는 질적으로도 승리하는 그런 기독교국가가 되는 것을 정말 보고싶다. 우리의 일상생활에서도 그렇게 진실한 크리스챤이 될 수 있도록 순간순간 성령님께 지혜를 구하자.
2008.09.16. 15:48
지난 7월 29일 오전 11시 30분경 San Bernardino 지역의 Chino Hills 도시 남부 2마일 지점에서 지진이 일어났다. 그 시간에 환자 방문을 하고 있었는데 오전에 가기로 한 마지막 집을 방문하고 기도를 마친 후 소파에 앉아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갑자기 집이 흔들리더니 내 몸도 흔들렸다. 거실에 있던 텔레비젼과 냉장고도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간적이었지만 아찔했다. 5-6초 정도 흔들리다가 잠잠해졌고 조금 후 몇 번 여진이 있다가 조용해지기에 즉시 텔레비전을 켜보았다. 미국 방송들은 모든 프로그램을 중단하고 지진 상황을 중계하고 있었다. 정확한 지진 진앙지를 알려주면서 그 지역의 피해상황이 방영되었다. 약국과 술가게 등에서 선반에 있던 물건들이 떨어진 정도였고 소방용 수도 파이프가 터져 물이 흘러내리는 것 등이 보였다. 그런 것들을 보면서 함께 있던 신자들은 집에 전화를 걸거나 걸려오는 전화들을 받느라고 정신이 없었다. 가족 끼리 안부를 묻는 전화들이었다. 안전하다는 연락을 받고 안도하는 모습들이었지만 한 가정은 선반에 얹어둔 물건들이 떨어져 깨어졌다는 연락을 받고는 걱정하기 시작했다. 전화가 불통인 이들은 불안한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대자연 앞에서 약하디 약한 인간의 모습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일찍이 빠스칼이 말해던가. 인간을 압사하기에는 저 하늘에 떠도는 한 방울의 물방울도 충분하다고. 태풍 홍수 토네이도 지진 화재 등 대자연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재해들 앞에서 인간은 약하기 짝이 없는 존재다. 대자연의 재앙 앞에서 인간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지진 발생 시간을 엄밀히 계산하고 알아내어 미리 대피할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내는 것을 생각해 볼 수 있으나 이는 현시점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신앙을 가진 이들은 생명의 주인이신 하느님께로 나아간다. 이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겠지만 이 세상이 인간의 마지막 목적지가 아니므로 인간에게 영원한 목적지를 하사하시는 하느님께로 마음을 돌리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죽는 순간이 제일 중요하다.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죽어가는 순간에 병자와 고해성사를 받고 주님의 이름을 부르면서 이 세상을 떠난다면 이보다 더 복된 죽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갑작스럽게 닥쳐오는 대재앙 앞에서는 어떤 생각도 나지 않을 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늘 죽음 준비를 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그것은 일생동안 살아오면서 '내가 사랑을 실천해 왔는가'를 수시로 점검하면서 언제 어디서 죽음을 맞이하더라도 생명의 주인 앞에서 떳떳하게 생을 마감할 수 있도록 늘 준비하면서 살아가는 삶의 자세이다.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 실천에 최선을 다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지 않을까?
2008.09.16. 15:47
우선 내 스스로가 나의 속박에서 벗어나야 남의 속박도 풀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묶여있는데 어떻게 남의 속박을 풀어줄 수가 있겠는가? 불교는 어떤 원인에는 틀림없이 결과가 따른다는 과학적인 이치가 그대로 적용되는 인연과법이 있다. 즉 내가 누구를 주먹으로 한번 때렸다면 때린 만큼 다시 내가 맞아야하는 업의 원인에 따라 그 과보가 따른다는 것이다. '선업에는 즐거운 과보가 따르고 악업에는 괴로운 과보가 따른다'는 부처님의 말씀에도 우리 인간은 끊임없이 선과 악의 업을 짓고 그 업에 따라 과보를 받는 행위를 일을 일삼고 있다. 우리가 말하는 업에는 신(몸) 구(입) 그리고 의(뜻)로 지어지는 삼업을 대표적으로 들 수가 있다. 이 삼업은 다시 열 가지 악업으로 나누어지는데 몸으로는 살생 투도(도적질) 사음(삿된 음행) 등 세 가지 업을 짓고 입으로는 거짓말의 망어 꾸밈말의 기어 두 가지 말의 양설 악독한 말의 악설 등 네 가지 업을 짓고 뜻으로는 탐욕 진애(성냄) 치암(어리석음)의 세 가지 업을 지어 과보를 받게 된다.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처해져 있는 불행한 환경 탓인지 선업보다는 악업을 행하기가 더 쉽고 이러한 악업에 한번 빠지면 끊임없이 반복하는 경향을 보인다. 확실히 선업보다는 악업을 행하기가 더 쉬운 게 우리 인간인 듯하다. 그래서인지 부처님께서도 선업보다는 악업에 관한 말씀을 먼저 하시고 이 악업에 반대되는 일로 선업을 나중에 말씀하셨던 것이 아닌가한다. 부처님 법은 낙제할 사람을 억지로 붙인다거나 온갖 악행을 저지르고 남에게 해를 입혀온 사람에게 무조건 부처님만 믿으면 제도를 받고 극락에 가는 그런 부자연스런 법이 아니다. 자기가 한 해 기도했으면 기도한 만큼 그 복덕을 받는 것이고 하루 선행했으면 하루 선행한 만큼 그에 상응하는 복덕을 받는 것이다. 그러나 가끔 우리 주변에는 분명 잘못하고 남에게 못되게 구는 사람이 착하게 사는 사람보다 더 잘 사는 것처럼 보이는 경우를 종종 볼 수가 있다. 우리는 이런 경우를 대할 때면 자주 삶의 회의와 좌절을 느끼기도 한다. 부처님은 또 이렇게 가르침을 주신다. "선의 열매가 맺기 전에는 착한 사람이 화를 당하기도 하지만 그 선이 익게 될 때는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며 악의 열매가 아직 익기 전에는 악한 사람이 복을 받기도 하지만 그 악이 익어질 때는 혹독한 죄의 대가를 스스로 받게 될 것이다"라고. 우리는 당장 어떠한 결과나 이익이 보이지 않는다고 서두르지도 말 것이며 우리가 행한 만큼 받아야 할 업이나 과보는 꼭 따르는 인과응보의 법칙을 깊게 새겨두며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 같은 선과 악의 업을 원인으로 하는 결과는 현재의 삶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죽음에 이르러서는 그 업보에 따라 육도(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 인간 천상) 윤회의 틀 속에서 헤매게 된다. 우리가 살아있을 때 잘 살아야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삶의 고통과 윤회를 끊어내기 위해 우리는 신.구.의 삼업을 짓지 않고 살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를 위해 우선 중생이라는 허물을 벗어버려야 한다. 누에가 자신의 몸을 여러 차례 바꿔가며 실을 만들어 내듯이 우리도 우리 몸뚱이에 대한 애착을 떠나 참다운 자기 실상의 모습으로 바꿔가려는 삶의 자세가 필요하다. 우리가 진정 우리를 감싸고 있는 몸뚱이의 억압에서 벗어나 대자유인이 된다면 신.구.의 삼업에서 벗어남은 물론 삶의 고통과 궁극적으로 육도의 윤회에서 함께 자유로워지게 될 것이다.
2008.09.16. 15:43
#풍경: 율법 학자가 시험 삼아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 첫째 가는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답했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가는 계명이요. 둘째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태복음 22장 35~40절) 자주 읽히는 성경 구절이죠. 사람들은 밑줄을 긋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대목 그리고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대목에 밑줄을 치죠. 그리고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서 하나님을 찬양하고 가난한 이웃을 위해 기부금을 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번 주에도 가장 큰 계명을 지켰구나'라고 말이죠. '현문우답'은 묻고 싶습니다. 예수님은 과연 어디에 밑줄을 치셨을까요. 예수님께서 왜 이걸 '가장 큰 계명'이라고 하셨을까요. 어째서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는 걸까요. '현문우답'은 그 구절을 읽고 또 읽습니다. 그리고 '다함'이란 말에 주목합니다. '네 마음을 다함 네 목숨을 다함 네 뜻을 다함.' 왜냐구요. 그 '다함'이란 단어에서 '열쇠'가 만져지기 때문입니다. 어떤 열쇠냐고요? 하나님께 나아가는 열쇠죠. 계명은 '이정표'이지 '쇠창살'이 아닙니다. 그러니 계명에는 '열쇠'가 있기마련이죠. 그런데 다함의 순간은 언제일까요. 나의 마음이 다하는 순간 나의 목숨이 다하는 순간 나의 뜻이 다하는 순간은 언제일까요. 그 '다함'의 순간에 '나'는 어디에 있을까요. 그렇습니다. '나'는 없습니다. 어디에도 없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나의 마음을 다한 뒤에 '내 마음'은 남지 않죠. 나의 목숨을 다한 뒤에 '내 목숨'은 남지 않죠. 나의 뜻을 다한 뒤에 '내 뜻'은 남지 않죠.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됩니다. 왜일까요. 내 마음과 내 목숨 내 뜻은 어김없이 하나님을 가리는 존재니까요. 그게 바로 에고의 마음 에고의 목숨 에고의 뜻이기 때문이죠. 둘째 가는 계명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도 마찬가지죠. 사람들은 '이웃을 사랑하라'에 밑줄을 치죠. 그런데 '현문우답'은 '네 몸과 같이'란 대목에 방점을 찍습니다. 왜 예수님은 "이웃을 사랑하라"고 하지 않고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셨을까요. 그런 사랑은 이웃이 내 몸이 될 때나 가능한 일입니다. 과연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그런데 '다함의 순간'에선 가능하죠. 나의 마음 나의 목숨 나의 뜻이 다한 곳에 무엇이 남을까요. 거기엔 이웃만 남죠. 이웃의 마음 이웃의 목숨 이웃의 뜻만 남죠. 그 순간 '내 이웃=내 몸'이 됩니다. 그러니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은 둘이 아니죠. 첫째 계명이 풀리면 둘째 계명은 따라서 풀리죠. 그래서 '가장 큰 계명'은 '가장 큰 고개'가 됩니다. 그 너머에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2008.09.16. 15: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