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는 1년 열두 달 중 여러 달을 특별 신심을 위한 달로 정해놓고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를 들면 3월은 성 요셉 성월로 예수님의 양부이신 그분을 기리면서 가장의 신심과 의무는 물론이고 그분의 성실한 면을 본받도록 하며 5월에는 성모성월로 구세주의 길을 성실히 따라가신 어머니의 신심을 일깨우고 9월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성월로 순교정신을 일깨우며 10월은 전교의 달로서 전교의 중요성을 고취시키고 11월은 위령성월로 정해놓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개개인의 죽음을 묵상하게 한다.
이러한 제정은 대개 계절과 연관을 맺고 있다. 5월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서 계절의 여왕이라고들 한다.
이 달을 성모님께 봉헌하며 11월은 가을이라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는 나무들을 보노라면 인간의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하며 우수에 젖기도 한다. 이때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개개인의 죽음을 묵상하기 좋은 계절이다.
성경을 보면 기원 전 2세기 중엽 유다인들의 사령관 유다는 군사들과 함께 그들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러 갔다.
그런데 전사자들의 몸에서 유다인들이 금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어 그들 모두는 전사자들이 우상을 섬긴 벌로 인해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그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시도록 간청하였다.
유다는 백성에게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한 후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제들에게 보내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숭고한 일을 하였다…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1243~45).
한편 주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으나 평소에 가르치신 여러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죄와 심판에 대해서 뿐 아니라(마태 1232.36;1627;루카747;1247-48) 죽음과 심판에 대해서는 엄한 태도를 보이셨다(마태 812;루카 1220;1623). 사도 바오로께서도 오네시포로스(2티모118)에 대한 언급과 다른 곳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1코린3 10-15).
이러한 말씀들과 유다교 전통 그리고 오래 전부터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오던 전통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특히 11월이 되면 죽은 이들을 많이 생각하며 각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달로 정해놓고 실천하고 있다.
이승의 삶이 끝난 다음에 오는 상태와 장소 또는 조건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된다고 가르치며 영혼이 비록 은총 상태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정화 과정을 거쳐 완전해 질 때까지 단련을 받는다.
그것은 소죄와 불완전함 그리고 대죄의 사함을 받았다 해도 잠벌이 없어질 때까지 정화된 후 하느님과 대면하는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쉽게 수용되지 않는다. 두려움과 불안 의심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인 한 누구나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승의 삶 연옥 그리고 지복직관의 과정이 대부분이 가야할 길이다.
20세기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분으로 평가 되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정의했다.
영원한 행복을 원하는 인간은 이승에서 그 염원을 이루지 못하므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곳에서만 그것을 성취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진정 복된 자이다.
# 081104_종교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