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에 가끔씩 이제 나도 정말 아저씨가 되었나보다라고 느낄 때가 있다. 머리에 흰머리가 조금이나마 생기고 탱탱했던 피부에 약간의 잔주름들이 보이는 것에서 또 옷에 약간 자국이 생기거나 뭐가 묻어도 이제는 별 상관 안 하고 다니는 모습에서 아저씨가 되어감을 느낀다. 최근에 내가 이제는 나이가 들었구나 라고 느끼게 되는 일이 있었다. 큰아이를 집으로 데리고 가려고 유아원에 들렀는데 선생님 왈 오늘 '우리 아이가 사고를 쳤다'는 것이었다. 아이들끼리 같이 뛰고 놀다가 한 아이를 밀게 되었는데 그 아이가 그대로 앞으로 넘어져서 이마에 혹이 크게 났다는 것이었다. 정말 그 아이를 보니 이마의 반 이상이 혹으로 덮혀 있었다. 머리에 혹이 난 아이를 본 그 부모는 얼마나 열이 나고 기분이 안 좋을까 생각이 들었다. 사실 우리도 원래 다니던 학교가 있었는데 거기서 어떤 중국아이가 손톱이 길었는지 우리아이를 할퀴었는데 눈 밑과 얼굴에 심하게 긁히고 상처가 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나는 애들끼리 그럴 수도 있지 하고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우리 어머니와 아내가 노발대발 하는 바람에 학교를 지금 학교로 옮기게 된 것이었다. 그래서 난 우리 아이가 밀어서 넘어져 머리에 혹이 난 그 아이의 부모가 어떻게 느끼실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우리 아이를 차에 태우자마자 난 심하게 야단을 쳤다. 다시는 친구를 밀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시키고 내일 그 친구를 만나면 꼭 다시 사과하라고 했다. 그 날 저녁 잠 자리에 누워서 생애 최초로 우리 아이가 벌인 일 때문에 깊은 생각을 했다. 그 전 학교에서 딴 아이가 우리 아들 얼굴에 상처를 냈었을 때 도대체 어떻게 생긴 아이인가 보고 싶기도 했고 그 부모가 도대체 누구일까 따지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근데 이런 일이 나에게도 일어나자 내일 학교에 아이를 데려다 주러 갈 때 전화번호라도 받아서 비록 내가 한 일은 아니지만 죄송하다고 그 학부형에게 사과를 해야겠다 다짐을 했다. 다음날 아침에 학교에 가면서 근데 자꾸 마음이 바뀌고 있었다. '아 뭐 애들끼리 장난 치다가 다친 건데 내가 한 것도 아닌데 꼭 그 학부형에게 전화로 나마 사과를 해야 할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조그마한 선물도 준비해 가니까 그냥 넘어가도 되겠지 하며 생각했다. 학교에 가보니 넘어진 그 아이가 오지 않았다. 원장선생님께 이 문제를 어떻게 할까 의논 드렸더니 그 아이의 아빠에게 전화 한번 해 주십사 어렵게 부탁을 하셨다. 전화를 걸면서도 아 이거 내가 우리 아들내미 때문에 대신 사과도 하고 내일이 아닌 일로 다른 학부형과 통화를 해야하는 그런 나이가 되었음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죄송하다고 메시지와 전화번호를 남겼다. 그 뒤에 그 아이의 아빠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전화해 주셔서 감사하고 아이들끼리 장난치다가 그럴 수 있으니까 너무 신경쓰지 마시라고 잘 이해해 주셨다. 나는 내 아이의 잘못을 무마시키기위해 약간의 용기와 시간이 필요했지만 우리 하나님은 어떤가. 그분은 자녀된 우리의 죄를 없애시기 위해서 가장 큰 희생을 치르셨다. 바로 하나님 자신보다 더 귀중히 여기시는 아들 예수님을 죽이시고 피를 쏟게 하셨다. 이번 일을 통해서 그런 하나님을 다시 한번 묵상하며 그분의 사랑을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주심에 감사를 드렸다. 앞으로 아이들의 아빠로 살아가면서 이런 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겠다. 하여간 난 이제 내 일뿐 아니라 내 자식의 잘못도 책임져야 하는 정말로 아저씨인가보다.
2008.11.11. 17:05
중국의 운남성은 말 그대로 구름으로 둘러싸인 남쪽 산지에 위치하고 있었다. 운남성의 곤명은 북경에서 비행기로 4시간이나 가는 베트남 국경에 인접한 도시였다. 해발 1700미터의 고산지에 위치해 있었고 고온다습하고 높고 수려한 산으로 둘러싸인 아름다운 도시였다. 곤명에 도착한 다음 날은 주일이었다. 주일날 예배는 샌디에고에서 동행한 몇 분 목사님들과 함께 묘족교회에서 드리게 되었다. 아침8시에 출발한 우리일행은 용달차로 산을 넘고 넘어서 오르다가 진흙더미에 빠지면 차가 요동을 치며 빠져 나오기를 거듭하며 낮 12시가 되어서야 어느 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정상에 올라와보니 구름이 산들마다 걸려있는 모습을 보면서 운남성이란 이름을 실감할 수 있었다. 묘족마을은 해발3300미터의 산 정상에 있었다. 토굴 같은 형상을 한 토담집들로 이루어진 작은 마을이었다. 그들의 키는 매우 작았으며 특이한 것은 여자들의 차림새였다. 아낙네가 익숙한 솜씨로 달구지를 몰고 가고 있었고 머리는 또아리를 얹어놓은 것처럼 동그랗게 감아올렸고 옷은 구약의 제사장이 입는 에봇과 비슷한 겉옷을 치마위에 덧입고 있었다. 묘족교회의 입구에 들어서니 이게 웬일인가 수십 명의 찬양대원들이 찬양을 하며 환영을 해주었다. 그들을 따라 예배당에 들어가니 그 작은 마을에 교인이 300여명이나 여자와 아이들 그리고 남자 성도들이 따로 구분하여 앉아 있었다. 성가대가 강단 앞으로 나가서 찬양을 시작했다. 선교사님의 말로는 그들의 학력은 중졸도 못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찬양의 하모니는 너무나 아름다웠다. 묘족교회의 장로님이 예배를 인도하는데 선교사님에게 우리더러 나가달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기에 예배도중에 우리가 쫓겨나야 한단 말인가. 얼떨결에 나왔더니 사연인 즉 묘족들은 하루에 두 번 11시와 오후5시에 식사를 하는데 자기들은 이미 식사를 했으니 우리보고 식사를 하고 와서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졸지에 거룩한 예배를 중단하고 식사를 하는 불경스러운 먹사가 되고 말았다. 토담 친교실에 들어갔다. 화로에는 불이 지펴져 있었고 권사님들로 보이는 분들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음식을 만들고 있는데 내 눈은 자꾸 옆에 놓인 식기를 씻었던 구정물에 눈이 간다. 그러나 맛과는 상관이 없이 정신없이 먹었다. 왜냐면 예배 중에 나와서 음식을 먹고 있으니 무슨 정신이 있었겠는가? 다시 예배에 들어갔다. 간증은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가 들어가자 찬양대가 또 앞으로 나왔다. 지휘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옷이 밭에서 일하다 온 듯 초라했지만 성령충만하게 보였다. 악기는 풍금과 아코디온이 전부였다. 성가대원 중 하나가 큰 소리로 외치는데 '왕중왕'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전원이 아름다운 하모니로 헨델의 메시야의 '할렐루야'를 찬양하기를 시작했다. '할렐루야-할~렐~루~야~왕중왕~' 하루에 두 끼 밖에 먹지 못하는 가난한 민족 악보도 없이 숫자와 글씨로만 이루어진 책을 들고 묘족 찬양대는 할렐루야를 부르고 있었다. 150년전 허드슨 테일러가 심었던 복음의 씨앗은 하도 높고 험악한 산중에 살아서 문화혁명 때 기독교 핍박의 대상도 되지 못했던 버려진 백성들을 통해 싹이 트고 열매 맺고 있었다. "권세있는 자를 그 위에서 내리치셨으며 비천한 자를 높이셨고 주리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배불리셨으며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 (눅1:52-53)
2008.11.11. 17:04
두 사람의 시각장애인이 지하철 역에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행색이 초라했습니다. 그리고 팻말을 들고 팻말에 쓴 글로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습니다. 팻말에는 "저는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였습니다"라고 적혀있었습니다. 그 사람의 앞에 통에는 몇 닢의 동전이 던저져 있었습니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은 차람이 훨씬 멀숙하게 보였습니다. 하지만 통에는 동전이 수북하게 쌓여있었습니다. 역시 팻말을 들고 있었고 팻말에는 이렇게 쓰여있었습니다. "저는 봄이 와도 꽃을 볼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표현하는데 있었습니다. 표현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행인들의 마음이 동요되는 정도가 달라졌던 것입니다. 이런 표현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생각에 여백이 많은 사람입니다. 빽빽하게 생각으로 가득찬 사람이 아니라 생각이 움직이고 활동할 수 있는 공간을 가진 사람입니다. 생각하는 공간이 많을 수록 생각이 자유롭습니다. 여백이 많기에 자신을 자유인으로 볼 수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처음 사람도 시각장애인이고 나중 사람도 시각 장애인으로 똑같이 볼 수 없는 처지였습니다. 하지만 한사람은 자신이 시각장애인이라는 생각에 꽉 차서 묶여있었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눈으로는 볼 수 없지만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생각의 여백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불가능의 일부분을 전체의 불가능으로 생각을 전염시켰습니다. 다른 한 사람은 하나가 불가능하지만 나머지 모든 것은 가능하다고 생각에 여유로움이 있었습니다. 생각에 여유로움은 생각의 공간이 늘어날 때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에 따라 생각의 반경이 넓어집니다. 부정적이고 두려움과 감정에 따라 믿는다면 생각의 테두리가 좁아져 갈 것입니다. 긍정적이고 신뢰감과 자존감이 가득하다면 생각은 주어진 반경의 여유로움으로 자유로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진리를 알 때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고 하셨습니다. 진리를 알 수 있는 방법은 두가지를 충족해야 합니다. 첫째 요소는 진리에 대한 신뢰입니다. 진리가 말하는 것을 일단 신뢰해 보는 것입니다. 둘째 요소는 믿음에 의한 결단된 행동입니다. 신뢰와 행동이 함께 충족 될 때 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진리는 자연적으로 알아지지 않습니다. 진리에게 믿음과 행동으로 도전할 때 알아지는 것입니다. 도전의 결과로 진리가 정직하고 신뢰할 만 하다면 그 진리는 참 진리인 것입니다. 이런 진리는 생명력이 있습니다. 증명된 진리는 우리 삶 속에서 활력소가 되고 생명의 자유를 줍니다. 이 진리는 바로 예수 자신이기에 그렇습니다. 커피 한 잔을 마시기도 벅찬 경제적 어려움이 올 수 있습니다. 신문에서나 볼 수 있는 교통사고로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 있습니다. 생명에 위협을 주는 병으로 낙심에 빠질 수 있습니다. 세상의 유혹으로 조금씩 망가져가는 자녀를 보면서 가슴이 무너내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우리 인생의 전부가 아닌 일부분이라는 것입니다. 인생의 어떤 부분도 세상의 어떤 고통도 진리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유인이 된 사람은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자유인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8.11.11. 17:03
11월 11일이 되면 나에게는 생각나는 신자 한 분이 있다. 이 날은 뚜르의 주교 성 마르띠노의 기념일이다. 성 마르띠노는 397년에 세상을 떠나셨는데 그분은 외교인 집안에서 태어나 군인생활을 거쳐 수도원장 그리고 주교로 여생을 보내신 분으로 덕망이 높은 분이었다. 특히 불란서 교회에서 위대한 분으로 공경 받고 있다. 11월 11일은 이 성인의 소천(召天)일이지만 이 날에 태어난 한 아이에게 성인의 기념일을 기려 그분의 이름으로 세례를 준 특별한 날이기도 하다. 그 아이가 잉태되는 데는 재미있는 꿈 이야기가 하나 있다. 사제가 된 후 첫 성당에 발령을 받고 얼마 있지 않아 일어난 일이다. 어느 신자가 찾아와서 자기는 딸을 하나 낳고는 둘째 아이가 없다고 걱정스럽게 하소연을 했다. 병원에 가보았느냐고 물어보았더니 병원에 가서 정밀 진찰을 받아도 이상이 없고 좋다는 것은 다 해보았으나 아이가 없다는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보니 분명히 남자 아이를 원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 아이를 두었다면 그런 대로 살아갈텐데 딸을 하나 낳고는 오랫동안 아이가 없으니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었다. 남아선호 정신을 버리기는 쉽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확신에 찬 어조로 조금도 걱정하지 말고 열심히 기도하라고 했다. 열심히 기도하면 하느님이 꼭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힘주어 말해주었다. "청하여라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너희가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마태 77)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러고는 이 일을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저녁 미사와 회합이 끝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성당을 한 바퀴 돌아볼 때마다 그 신자가 성당 앞에서 열심히 기도드리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어떤 날은 그 신자가 기도를 끝내고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기도 했다. 두어 달 동안 그렇게 기도하더니 어느 날부터는 그 신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이제 열이 식었구나 싶어 잊어버리고 말았는데 여러 달 후에 그 신자가 하는 말이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고 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그 날이 바로 11월 11일이다. 부인이 아이를 낳고 나자 그 신자는 나와 본당 신자들에게 이런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하루는 하도 걱정이 되어서 신부님을 찾아가 고민을 이야기 했더니 신부님이 축복기도를 한 후 "요한씨 걱정하지 마세요. 하느님이 다 해결해 주십니다."라고 하더라는 것이다. 아주 편안한 마음으로 잠을 자고 난 그 신자는 꿈치고는 하도 이상한 꿈이라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않고 있다가 부인이 아이를 가졌다는 말을 듣고는 부인에게 그 꿈 이야기를 들려주었더니 그 꿈이 태몽꿈이었다면서 대단히 기뻐했다고 했다. 이스라엘에서 대사제와 예언자로 활동한 사무엘은 어머니가 하느님께 빌어서 태어났다. 그분의 모친 한나는 "만군의 주님 이 여종의 가련한 모습을 눈여겨보시고 저를 기억하신다면.....당신 여종에게 아들 하나만 허락해 주신다면 그 아이를 한평생 주님께 바치고 그 아이의 머리에 면도칼을 대지 않겠습니다."(1사무111)라고 기도드렸다. 혼신의 정을 다 바쳐 드린 한나의 기도는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은 곳으로 올라가 전능하시고 대자대비하신 하느님께 직통하여 놀라운 결과를 이루었다. 믿는 마음으로 구하는 사람의 청을 하느님은 꼭 들어주신다. 인간의 뜻과 하느님의 뜻은 분명히 다르지만 하느님이 대자대비하신 분이심을 굳게 믿고 기도하는 사람은 절대로 손해 보지 않는다.
2008.11.11. 17:03
우리는 끝도 가도 없는 우주의 한 가운데에 살아가고 있다. 우리가 숨 쉬고 생활하는 모든 행위는 거대한 우주의 틀에서 이뤄지고 있고 그 흐름에 따라 우리의 생활이 종속되고 있음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일 것이다. 천지우주는 나와 더불어 하나라는 말은 이를 잘 반영해주고 있는 선지식의 말이지만 우리는 늘 바쁜 생활로 인해 이를 잊고 살아가고 있다. 광활한 우주는 우리 인간의 삶의 터전이고 우리 인간은 결코 우주를 벗어나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이다. 불가에서는 이미 부처님 시대부터 이러한 우주의 중요성을 깨우치고 우주 변화 및 생성의 논리를 깨우침의 중대요소로 삼아왔던 것이다. 우선 우주는 불성으로 가득 차 있다고 말한다. 우리가 금을 녹이고 제련해서 반지를 만들거나 목걸이를 만들어도 그 반지나 목걸이는 내내 순금성품 그 자체이듯이 모든 만물은 조금도 변함이 없이 불성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다만 이런 불성이 그때그때의 인연에 따라 이것도 되고 저것도 되며 잠시간의 인연으로 태어나기도 하고 사라지기도 하는 것이다. 이러한 불성은 우주에서 순수 생명을 가진 에너지 형태로 존재하고 있으며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광명공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불교의 우주론은 이렇듯 우리 인간의 마음을 기본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우주는 이러한 마음 다시 말해서 우리 중생들이 사랑하고 싫어하는 마음들이 동력이 되어서 우주가 만들어지고 이러한 심식만이 우주를 운영하고 우리의 삶을 행복과 불행으로 이끌어 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좋아하고 사랑하는 마음의 작용이 가득한 에너지로 우주를 운용해 나가면 그 기운이 우주를 덮게 되어 자비와 지혜가 가득한 곳으로 평화와 사랑이 가득할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오늘날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강도 살인이나 전쟁 등으로 인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비롯한 우주세계를 더욱 복잡하고 힘들게 만들어 갈 것이다. 최근 전 세계가 금융환란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이러한 이치에서 출발한 것이다. 결국은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 낸 조그마한 현상인데도 얼마나 많은 인간들이 고통을 겪고 있는가. 이러한 일도 어느 한 편에 서 있는 우리 인간 무리들 전문인으로 부르는 그런 사람들의 마음이 나쁜 쪽으로 마음을 움직이고 힘을 발휘해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우리 인간 사회에서 비도덕적이고 비윤리적인 생각들이 공동악업을 만들어 자비롭고 지혜로운 인간세계에 반한 삶의 균형을 깨뜨리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변에서 쉽게 말하고 생각해 버리는 경우를 종종 찾아 볼 수가 있다. 우리가 이렇듯 쉽게 말하고 생각하는 것들조차도 그것 모두는 우주공간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중생이 선한 마음을 함께 갖는다면 그 마음은 정해진 파동에 따라 움직이고 이미 존재하고 있는 선한 마음과 더불어 과보를 얻게 되는데 이때에 맺어지는 결실로 우리 사회는 맑고 밝은 세상이 되는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출발하지만 끝에는 우리 중생 모두의 공동 선업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마당을 쓸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깨끗해졌습니다. 꽃 한 송이를 피었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아름다워졌습니다. 마음속에 시 하나 싹텄습니다. 지구 한 모퉁이가 밝아졌습니다'라는 어느 한 시인의 글처럼 내가 살고 있는 터전에서 우주를 생각하고 우주에 살고 있는 인간을 비롯한 모든 만물을 중요시하는 마음을 갖고 살아가는 현대인이 되었으면 한다.
2008.11.11. 16:59
#풍경1 : 존 웨슬리(그림.1703~91)는 감리교의 창시자다. 22세 때 그는 성직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젊은 나이에도 '예수'를 향한 그의 방향성은 남달랐다. 그러나 그의 설교는 밋밋했다. '강한 의지'만으로 설교에 '숨결'이 흐르는 건 아니었다. 훗날 그는 "당시 나의 설교는 실패였다. 나는 청중이자 신자였기에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여겼다. 그래서 회개의 도리를 설교의 생명으로 삼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직 '예수'를 만나지 못했던 것이다. #풍경2 : 32세 때 웨슬리는 옥스퍼드 대학의 교수였다. 그러나 그는 교수직을 버리고 배를 탔다. 선교를 위해 북아메리카 대륙으로 향했다. 거센 폭풍이 몰아쳤다. 웨슬리는 공포에 떨었다. 그런데 배 안에 있던 독일 경건파인 모라비아 교도들은 태연했다. 그들의 표정에선 아무런 두려움도 읽히지 않았다. 폭풍이 물러간 후 웨슬리가 물었다. "폭풍이 두렵지 않습니까?" 그들은 답했다. "하나님께 감사한 일이죠. 두렵지 않습니다. 여자와 아이들도 두려워하지 않죠." 웨슬리는 큰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자신의 신앙에 '문제'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랬다. 죽음 앞에서 '나'를 부여잡을 때 어김없이 '공포'가 올라온다. 그러나 몰아치는 폭풍 앞에서 그는 '나'를 부여잡았다. 여전히 자신을 자신에게 바치고 있었던 것이다. 웨슬리는 곧장 모라비아 교단의 목사를 찾아갔다. 그건 '목마름'이었다. 목사는 그에게 의미심장한 물음을 던졌다. "당신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나요?" "당신은 자신을 잘 알고 있나요?" 이 물음은 화살처럼 웨슬리의 가슴에 박혔다. 웨슬리는 대답을 제대로 못했다. 그는 지금껏 살면서 이토록 신랄한 '영적 물음'을 맞아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경3 : 아메리카에서 돌아온 웨슬리는 절망했다. "나는 원주민들을 회개시키러 갔었다. 그러나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 이후 웨슬리는 끝없이 자신을 낮추었다. 그리고 결국 1738년 작은 집회에서 '거듭남'을 체험하게 된다. 이후 웨슬리는 달라졌다. 88세로 세상을 뜰 때까지 웨슬리는 4000회 이상의 설교를 했고 40만㎞가 넘는 선교 여행을 다녔다. 18세기 영국 사회에선 "감리교인과 단 5분만 대화를 해보라. 그럼 당신도 감리교인이 되고 말 것"이란 말이 '상식'처럼 퍼졌다. #그리고 풍경4 : '2008년 11월 한국의 감리교'는 도무지 낯설기만 하다. 하나의 교단에 두 명의 감독회장이 뽑혔다. 한 나라에서 두 명의 대통령을 뽑아놓은 셈이다. 한 쪽에선 "사법부에서 후보 등록을 무효화했으니 후보 자격을 상실했다"고 지적하고 또 다른 쪽에선 "우리가 최다 득표를 했으니 명실공히 당선자다"라고 받아친다. 2008년 한국 감리교에는 '존 웨슬리'가 보이지 않는다. "당신은 예수를 아는가?"라는 물음에 가슴을 찢었던 웨슬리 "나를 회개시킬 자는 누구인가"라며 절규했던 웨슬리가 보이지 않는다. 올해는 존 웨슬리 회심 270주년이다. 그래서 묻고 싶다. "쿠오바디스 감리교(감리교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2008.11.11. 16:58
지금 캘리포니아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11월 4일 어제 있었던 대선이었다. 이 나라의 최고 리더를 뽑는 대통령선거도 참 중요하지만 나는 주민발의안 8번 동성결혼 합법화의 무효화도 굉장히 중요한 사안이라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 심지어 몇몇 교회와 교인들 조차 이것이 그다지 큰 일이 아니라고 소수의 동성애자들에게 그저 기본권인 결혼을 할 수 있는 인권을 제공하는 일이라고 하지만 이 것은 개인들의 사상과 생각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영적 분위기의 방향성을 정하는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적어도 기독교인들은 동성연애와 동성결혼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안에서 비추어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은 태초에 남자(아담)를 창조하시고 그가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해 그를 돕는 배필 여자(하와)를 만드셨다. 그리하여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었다.(창세기 2장) 반면에 성경 어디에도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남자를 사랑하는 남자 여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창조하였다고 쓰여 있지 않다. 대신에 성경에는 동성 연애를 죄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러분은 불의한 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상속받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십니까? 속지 마십시오. 음행하는 사람이나 우상 숭배하는 사람이나 간음하는 사람이나 남자로서 몸을 파는 사람이나 동성 연애를 하는 사람이나"(고린도전서 6장 9절) 또한 죄악이 심해 멸망 당한 소돔과 고모라에 대해 성경은 롯을 방문한 천사들을 보고 동성간의 성관계를 맺으려는 소돔 백성들의 모습으로 나타내었다.(창세기 19장) 롯 또한 동성연애를 하려는 소돔 백성들에게 "내 형제들아 이런 악을 행치 말라"(창세기 19장 7절)라고 꾸짖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성경을 믿어야 한다. 많은 사람들이 괜찮다고 말하고 자신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할지라도 성경이 죄라고 이야기 한다면 그 것은 분명 죄인 것이다. 물론 동성애자를 미워하고 배척해서는 안된다. 간음한 여인을 고소한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죄 지은 적이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말씀하셖셨고 샇이에 사람들은 그녀를 정죄하지 않고 하나둘씩 그 자리를 떠나갔다. 이에 예수님은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한복음 8장) 또 하나의 예를 들면 불우한 환경 속에서 자란 잔인한 범죄를 저지른 갱 멤버를 우리는 이해하고 위로해 주어야 하지만 동시에 그 범죄가 잘못된 것이라고 알려주며 다시는 범죄를 짓지 못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 동성연애자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가정과 사회적 환경등으로 인하여 동성연애에 관한 영향을 받았기에 그들의 어려운 상황들을 이해하고 안아주지만 그들의 잘못된 행동을 알려주고 고칠 수 있도록 도와 주어야 한다. 동성애자는 태어났을 때부터 뇌의 구조가 달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는 거짓말에 우리는 속으면 안된다. 이러한 일이 있으면 절대 안되지만 설령 과반수 이상이 동성연애를 한다고 할지라도 영원불변의 하나님의 말씀이 죄라고 말한다면 그 것은 죄인 것이다. 이것은 보수와 진보 개방 사상을 떠나 진실이고 정의인 것이다. 나는 이 진실과 정의가 이 미국 땅 캘리포니아에 실현되어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칭찬 받는 나라가 되길 진심으로 기도하며 소망한다.
2008.11.04. 15:10
과학적인 것이 모두 진리가 아니듯이 선거에 의해 '합법'이 되는 모든 것들이 우리 영혼에 유익한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지금 광고와 치밀한 선거전략으로 아무리 추한 것이라도 아름답게 보이게 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때문에 죄에 대한 날 선 분별력과 통찰력을 갖춰야 하겠습니다. 첫째 죄는 합법으로 위장합니다. 우리에게는 자살할 수 있는 자유가 있지만 이것은 본인과 주변인의 영혼에 독약이 됩니다. 미국에서 술마시고 도박하며 방탕한 삶을 사는 것과 동성애가 모두 합법이지만 우리 영혼을 말려 죽이는 해로운 것들입니다. 사실과 진리는 다릅니다. 과학적인 사실조차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그러나 진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사실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라고 가르치십니다. 하나님은 특히 죄를 이기려 하거나 장난치지 말고 피하라고 가르치십니다. 우리는 합법적인 모든 것이 선한 것인가를 항상 물어야 합니다. 둘째 죄악은 단순한 욕망을 통해 우리 영혼을 장악합니다. 에서가 본인과 후손의 영적인 축복을 져버린 일은 단순히 '배고픔'으로 시작했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인류에게 원죄를 안겨준 사건은 '보암직스럽고 먹음직스러운' 아주 기본적인 욕구에서 시작된 것이었습니다. 사단은 우리의 영혼을 사로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가 자발적으로 내어주는 문으로는 들어올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합법적으로 우리 안에 거하기를 주장합니다. 정신만 똑바로 차리면 몸은 어디있건 괜찮다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에이즈에 관한 연구를 한 닥터 로렌 데이는 동성애자들을 상담하고 관찰하여 '동성애자들은 변태적인 성행위에 중독이 되어 결국 삶에 대한 열정보다 성행위에 대한 열정이 커진다'라는 결론을 내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이 성령으로 충만하여 영이 육체를 다스리길 원하시고 사단은 육체의 욕구가 영혼을 집어 삼키길 원합니다. 우리는 둘 중에 한가지만 선택할 수 있습니다. 셋째 죄악은 파괴적입니다. 인권과 자유를 보장해 달라며 동성애를 외치는 사람들의 삶을 보십시오. 그들은 어린 아기를 입양합니다. 그리고 여자를 아빠로 부르게 하고 남자를 엄마로 부르게 합니다. 그 아기들은 과연 어떤 정신구조를 가지고 성장하게 될까요. 자신들의 쾌락을 위해 다른 사람들의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파괴합니다. 이것이 과연 그들이 주장하는 인권이요 자유입니까. 죄악은 종류를 불문하고 우리 가정과 사회에 한 번 뿌리박으면 바로 파괴를 가져옵니다. 한 사람의 삶과 건강을 파괴하고 건강한 부부관계를 파괴하고 곧 사회구조를 무너뜨리기 시작합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멸망당한 이유 대 로마제국이 외세의 침략 없이 스스로 멸망한 모습은 죄의 파괴적인 성향을 증명해 줍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이 올 때 우리의 가치기준을 흔드는 일들이 연일 일어날 것이라는 것은 예언된 일입니다. 주님은 우리가 이러한 때를 볼수록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하라'고 요구하십니다. 변함없는 진리의 말씀으로 굳은 심지를 세워갑시다.
2008.11.04. 15:09
숫자나라에 많은 숫자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10이라는 숫자는 자기보다 낮은 숫자들을 무시하고 괴롭혔습니다. 특히 1.5를 유달리 구박하고 못살게 굴었습니다. 이유인 즉 1.5의 몸에 박혀 있는 '점' 때문이었습니다. 제일 바닥의 숫자이면서도 2로 도약하지 못하고 1.5로 살아가는 녀석의 모습이 아주 한심해 보였던 모양입니다. 10은 1.5를 볼 때마다 불러서 괴롭혔고 1.5도 10을 보면 멀리서도 주눅이 들어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1.5가 예전과는 달리 아주 불량한 눈으로 10을 위 아래로 훑어보는 것이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 10에게 1.5가 당당하게 말을 합니다. "나 오늘 점 뺐다!" 숫자들의 이야기라고 돌려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리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조금만 환경이 바뀌면 과거의 모습을 다 잊어버리고 금방 교만해져서 '개구리가 올챙이 시절 기억 못하는 것'처럼 삽니다. 목회를 하다 보면 여러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 가지 이상의 '점'(defect)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점'이 기도제목이 될 때도 있고 한숨 섞인 눈물의 고백이 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부끄러워서 고개도 못 드는 치명적인 약점이 되기도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그 고통스러운 '점'이 그 분을 교만과 우쭐함으로부터 지켜주는 '겸손의 씨앗'이 됩니다. 예전에 어떤 권사님이 저에게 기도를 부탁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하나님께 중보기도를 해서 자신의 아픈 '고통의 점'을 뽑아달라고 부탁을 했습니다. 그 점은 그린벨트에 꽁꽁 묶여서 풀리지 않는 자신의 땅을 팔 수 있도록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권사님의 모습이 너무도 진지하고 간절했기 때문에 저도 기도할 때마다 마치 제가 그 분인 양 하나님께 간절히 매달렸습니다. 지성이면 감천이었을까요! 몇 달 후 그 땅이 정말 기적처럼 풀려서 비싼 값에 팔렸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당시 교회의 온 가족들이 기뻐하며 감사와 영광을 주님께 돌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그 권사님은 바쁘고 힘든 사업 때문에 교회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예전처럼 간절하게 기도를 하시거나 어린아이처럼 찬송을 부르시던 모습은 찾아 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길에서 그 권사님을 만났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권사님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저를 모른 척 하면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해 지나가셨습니다. 속상한 마음으로 저는 권사님을 쫓아가서 먼저 아는 척을 했습니다. 그리고 저만 아는 우스개 인사를 권사님께 던졌습니다. "권사님 점 뺐군요!" 자신의 눈에 있는 가시를 빼어 달라고 하나님께 세 번이나 간절히 기도하던 바울의 모습(고후 12:8)이 생각났습니다. 전무후무한 능력의 사도 바울에게 왜 하나님은 가시를 그대로 가지고 살도록 허락하셨을까요? 눈물로 간구하는 바울에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데서 온전하여 짐이라"(고후 12:9). 하나님은 바울이 너무 교만해 지는 것을 막으시고자 가시를 허락하신 것입니다. 우리의 약점은 결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결점으로 인해 주님을 의지하지 않는 것입니다. 결점은 분명 어렵고 힘든 결함이지만 하나님이 우리를 쓰시는 통로이기도 합니다. 이 귀한 신비를 함께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2008.11.04. 15:08
가톨릭교회는 1년 열두 달 중 여러 달을 특별 신심을 위한 달로 정해놓고 공동체 전체가 하나의 방향으로 나아가게 한다. 예를 들면 3월은 성 요셉 성월로 예수님의 양부이신 그분을 기리면서 가장의 신심과 의무는 물론이고 그분의 성실한 면을 본받도록 하며 5월에는 성모성월로 구세주의 길을 성실히 따라가신 어머니의 신심을 일깨우고 9월은 우리나라 순교자들의 성월로 순교정신을 일깨우며 10월은 전교의 달로서 전교의 중요성을 고취시키고 11월은 위령성월로 정해놓고 세상을 떠난 이들을 위해 기도와 희생을 바치며 개개인의 죽음을 묵상하게 한다. 이러한 제정은 대개 계절과 연관을 맺고 있다. 5월은 1년 중 가장 아름다운 계절로서 계절의 여왕이라고들 한다. 이 달을 성모님께 봉헌하며 11월은 가을이라 낙엽이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들만 남는 나무들을 보노라면 인간의 마음이 우울해지기도 하며 우수에 젖기도 한다. 이때는 세상을 떠난 이들을 떠올리며 기도하고 개개인의 죽음을 묵상하기 좋은 계절이다. 성경을 보면 기원 전 2세기 중엽 유다인들의 사령관 유다는 군사들과 함께 그들의 주검을 거두어 장사지내러 갔다. 그런데 전사자들의 몸에서 유다인들이 금한 얌니아 우상들의 패가 발견되어 그들 모두는 전사자들이 우상을 섬긴 벌로 인해 죽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자비하신 하느님께 그들의 죄를 완전히 용서해주시도록 간청하였다. 유다는 백성에게 죄를 멀리하라고 권고한 후 모금을 하여 속죄의 제물을 바쳐 달라고 은 이천 드라크마를 예루살렘에 있는 사제들에게 보내었다. "그는 부활을 생각하며 그토록 숭고한 일을 하였다…그러므로 그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속죄를 한 것은 그들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1243~45). 한편 주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라고는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셨으나 평소에 가르치신 여러 말씀들을 종합해보면 죄와 심판에 대해서 뿐 아니라(마태 1232.36;1627;루카747;1247-48) 죽음과 심판에 대해서는 엄한 태도를 보이셨다(마태 812;루카 1220;1623). 사도 바오로께서도 오네시포로스(2티모118)에 대한 언급과 다른 곳에서 이를 간접적으로 시사하고 있다(1코린3 10-15). 이러한 말씀들과 유다교 전통 그리고 오래 전부터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해오던 전통에 따라 가톨릭교회는 특히 11월이 되면 죽은 이들을 많이 생각하며 각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달로 정해놓고 실천하고 있다. 이승의 삶이 끝난 다음에 오는 상태와 장소 또는 조건은 마지막 심판 때까지 지속된다고 가르치며 영혼이 비록 은총 상태에서 죽었다 하더라도 정화 과정을 거쳐 완전해 질 때까지 단련을 받는다. 그것은 소죄와 불완전함 그리고 대죄의 사함을 받았다 해도 잠벌이 없어질 때까지 정화된 후 하느님과 대면하는 지복직관의 상태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의 죽음은 모든 것이 끝나는 종말이 아니라 새로운 삶으로 옮아가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 과정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쉽게 수용되지 않는다. 두려움과 불안 의심과 공포의 대상이다. 그러나 인간인 한 누구나 그 길을 가지 않을 수 없다. 이승의 삶 연옥 그리고 지복직관의 과정이 대부분이 가야할 길이다. 20세기 철학자 중 가장 위대한 분으로 평가 되는 마르틴 하이데거는 인간을 "죽음에로의 존재"라고 정의했다. 영원한 행복을 원하는 인간은 이승에서 그 염원을 이루지 못하므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놓으신 그곳에서만 그것을 성취한다는 의미가 아닐까? 이런 의미에서 영생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는 진정 복된 자이다.
2008.11.04. 15:07
어릴 때 밤중에 일어나 마루로 오줌을 누러 나가다 잘못하여 같이 자던 동생의 연약한 손이라도 짓밟아서 동생이 잠결에 비명을 지른다 해도 그 땐 모르고 그랬다면 그뿐이었다. 좀 커서는 골목에서 장난치며 놀다가 잘못해서 누구의 머리가 터져 피가 흐르기도 했는데 일부러 한 짓이 아니라서 그건 그냥 실수지 죄랄 것도 없었다. 제복을 입은 학생이 될 때쯤 해서는 일류학교 따라지학교 하며 학벌을 따지는 바람에 휩쓸려 또래의 아이들과 상처를 주고받기도 한 것 같다. 그러다 어른들이 여태 양반 상놈을 가리거나 대놓고 지방색을 드러내는 걸 보고는 세상에는 책에 있는 정의니 평등 자유니 박애 같은 것들과는 아귀가 잘 안 맞는 일들이 많음도 금방 알게 되었다. 하지만 세상일이란 으례 그러려니 하면서 은근히 한 통속이 되는 게 일일이 마음에 그런 문제를 두는 것보다는 살아가기에 수월했으니 성인이 되어 가는 과정이란 어찌 보면 이러한 야합에 어울리도록 나의 안팎을 때맞추어 꾸며 나가는 속절없는 세월이었다. 한국의 군대에 있을 때 우리 부대에는 갖가지 사고가 잦았는데 한 번은 병사 둘이 주제에 예우나 말씨 등 위계 문제로 말다툼을 하다가 하나가 대검에 찔려 죽었다. 그 때 부대의 지휘관들이 가장 먼저 취한 조치는 병사들을 겁주어 정보를 차단하여 누가 바깥에서 탐문을 나오더라도 아무 것도 모르는 일이라고 딱 잡아떼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차가운 초겨울 날씨에 죽은 병사를 벗겨 거적데기에 눕혀 놓은 천막 밖에서 밤중에 몇 시간 보초를 섰는데 달빛이 참 교교하였다. 이튿날 아침 트럭으로 도착한 어머니가 팔을 휘저으며 허둥대며 걸어가 천막 앞에서 무너져 내리던 모습이 떠오른다. 하지만 아무도 아무 말도 해 줄 수가 없었다. 죽은 병사나 어머니나 무슨 죄가 있겠나 나쁜 업이 쌓였던 거겠지 하고 애써 이해하면서. 나중 부처님의 가르침을 되새기면서 내가 그 동안 길지 않은 삶이었지만 알게 모르게 많은 업을 지어 온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나 개인이 몸과 입과 뜻으로 내 맘대로 지은 업들도 많지만 어떤 조직에 속하여 그 그늘에서 함께 지은 업들이 더 많아 보였다. 업이 한 개인의 업으로 그친다면 나 혼자서 착한 업만 지으며 조심해서 살면 될 것이다. 나 혼자 밤중에 오줌이 마려워 깨어나더라도 조심만 한다면 동생의 손을 밟는 불상사는 안 생길 테니까. 하지만 동무들 사이에서 골목대장을 하는 것에서부터 학교 군대 직장 같은 조직생활은 물론이고 가정생활 종교생활 등 함께 어울려 업을 짓는 마당에서는 나 한 사람만 잘 한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 되지는 않는다. 나 자신의 내부적 동기인 인만 잘 간추린다고 해서 고질적인 학벌 문제라든지 지방색 무리한 위계질서 부정부패 사회적 빈곤 따위가 잘 해결 될 리가 없다. 내부의 인은 물론이거니와 외부적 조건인 연을 동시에 중시하여 같은 업을 갖고 있는 중생 끼리 사회적 정치적 관심을 갖고 제도의 개선과 봉사라는 공동 목표를 향해 함께 전진할 때 실마리가 풀릴 것이다. 즉 인과 연을 함께 살피면서 안팎으로 선업을 지어 선과를 얻어야 비로소 많은 중생들의 고통을 덜어 줄 수가 있는 것이다. 고국도 미국도 쉽지 않은 이 시기 우리 불자들이 나만의 골방을 벗어나 어울려 사는 한마당에서 선한 공업을 더욱 많이 지어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2008.11.04. 15: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