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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인씨 7대륙 최고봉 등정기-1] 에베레스트···정상의 기쁨도 잠시 '산소는 바닥나고···'

Los Angeles

2008.12.04 1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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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잃은 나에게 다가온 구원의 손길…산소호흡기 내준 셀파 '정말 고맙구나'
지난 3년여 동안 불굴의 투지와 용기로 에베레스트부터 남극까지 세계 7대륙의 최고봉들을 발아래 둔 이성인씨,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진정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리라.

2년 전 LA 산악인 김명준씨에 이어 미주 한인으로는 두 번째가 되는 그의 7대륙 최고봉 등정기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2007년 5월 16일 오전 8시. 10여명이면 꽉 찰 에베레스트(8848m.티벳어로는 초모랑마)정상의 비탈진 만년 설상에 50여 명이 북새통이다.

티벳과 네팔 양쪽에서 한꺼번에 클라이머들이 몰렸으니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내 산소 마스크는 끈이 끊겨 떨어지고 손쓸 틈도 없이 날카로운 크램폰(등산화 밑에 부착하는 미끄럼 방지용 스파이크)에 짓밟혀 뭉개진다. 금새 숨이 막혀 온다. 물 밖에 던져진 붕어처럼 할딱인다.

'아! 여기서 죽는구나'

밤새 지쳐 떨어진 기력으로 살아 보려는 의지조차 사라진다. 조여 오는 죽음을 숙명처럼 받아 들인다. 넋을 잃고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는다.

'산 사람이 산에 묻히니 영원히 살리라'

삶을 포기한 탓일까. 일순 마음이 편안해져 온다.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찰나의 순간이 억겁처럼 여겨지는데 퍼뜩 눈이 떠지면서 천천히 시야가 맑아져 온다.

먹구름이 갈라지며 찬란하게 치솟는 동녘햇살과 오버랩된 내 전담 셀파 타케의 얼굴이다. 목구멍이 뚫리는 듯 시원하고 머리도 맑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 얼굴에 타케의 빨간 산소 마스크가 씌어져 있고 타케는 마스크도 없이 버티고 서 있다.

"네가 나를 살렸구나. 고맙다. 그러나 너는 …"

말이 필요없다. 내 시선의 뜻을 알아 차린듯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킨다.

"Don't worry. I am OK."

타케가 거인처럼 보인다. 신들의 세계는 내게 죽음의 지대(Death Zone 산소통없이는 살 수 없는 해발 7000피트 이상의 고지)가 아니다. 오히려 요람처럼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밀물처럼 밀려 왔다가 서둘러 사진을 찍고는 썰물처럼 빠져 나간 정상의 자리는 거짓말처럼 썰렁해졌다. 정신을 차린 우리도 사진을 찍고 하산에 앞서 장비점검에 들어갔다.

하지만 내게는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배낭속의 산소통에 산소가 거의 바닥났다는 사실을 타케가 찾아낸 것이다.

타케는 망설이지 않고 자기 산소통을 내 산소 마스크에 연결시킨다. 살신성인의 참모습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 입는 그의 은혜다. 고마움에 핑 흘러 내리는 고글속의 내 눈물을 타케는 보았을까.

이제 타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모두 내게 줬다. 산소 마스크도 없다. 산소통도 없다. 만약 타케에게 호흡 위기가 닥친다면 나는 산소와 마스크를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망상에 빠진다. 하지만 답은 너무도 쉽게 나온다.

'No'

나는 살아야 하고 내 생명의 은인은 내 몰라라 하는 한톨의 죄의식조차 없는 배은망덕이다. "나는 나쁜 놈인가?" 또 자문하지만 답을 내놓지 못한다. 타케의 무사 하산을 기원할 뿐이다. 내가 좋은 놈이 되기 위해서.

정상 바로 밑 50m쯤 되는 급경사 하단에 들어선다. 2시간전 오를 때의 감회가 새롭다. 어둠을 벗어난 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여늬 때면 터져 나왔을"아 ! 정상 이구나"하는 탄성에 앞서 눈물이 먼저 터졌다.

봇물터지듯 흘렀다. 참지 않았다. 엉엉 울었다. 나뿐 아니다. 앞쪽에서도 뒤쪽에서도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이는 환희의 코러스가 터지고 있다. 코앞에 둔 세계 최고봉을 맞는 지상 최고의 감격이 참는다고 참아지겠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타케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하다. 다행이다. 한 시간 가량 더 내려온다. 세컨 스텝(Second Step 8600m)이 기다린다. 지난밤 여기서 겪은 시련이 악몽같다.

2m짜리 알미늄 사다리가 걸쳐진 고작 4m높이에 불과 하지만 온몸의 진을 빼낸 마의 고비다. 지체된 클라이머들로 인해 한시간 넘게 기다린 병목현상으로 시달린 데다 날씨까지 나빴다.

폭설로 인해 사투끝에 올라섰다. 돌 틈새에 쌓이는 분말(8000m급 고산의 얼음눈)이 가장 힘들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폭설을 거슬러 올라야 했던 광경은 생각조차 싫다. 그러나 오늘 날씨는 바람 한점 없다. 푸른 하늘이 한층 더 깊다. 우모복이 더울 정도로 따뜻하다. 날씨가 좋으니 경치도 기가 막힌다. 발 아래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바다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봉과 설봉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오후 1시께 도착한 하이 캠프(8300m)에서 미리 내려온 셀파 주미(2008년 8월 K2에서 사망)가 반긴다. 엊저녁 우리 텐트앞에서 엎드려 쉬다 그대로 숨져버린 어느 백인 클라이머의 주검은 치워 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쉬는사이 내 배낭속의 산소통을 점검한 타케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산소가 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주미가 자기 산소통을 선뜻 내준다. 시장에 팔려고 아껴서 남겨뒀던 러시아제 미화 400달러 상당의 보물같은 것이다. 두번째 산소부족이고 세번째 입는 은혜다.

"고맙다. 주미"

타께에 이어 주미마저 무산소다. 두 셀파에게 거듭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지만 마음만 못하다. 걸음이 느린 난 먼저 하산을 시작한다. 해 지기전 노스콜(North Call.7100m)에 도착해 산소 마스크를 벗는다. 산소통도 내려 놓는다.

마중나온 대원들이 탄성을 지르며 반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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