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의 원시림이 등정의 승패를 가른다. 등반 초입에서 만나게 되는 이 밀림만 통과한다면 등정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다. 오세아니아대륙의 최고봉 칼츠텐츠(4884m)의 정글은 특별히 연구 조사된 생태계의 자료나 거리 높이 캠프사이트등 등반정보도 거의 없다.
밤마다 쏟아지는 폭우와 습도높은 한낮의 폭염과도 싸워야 한다. 허리까지 빠지는 늪지를 빠져 나와야 하고 깊이를 알수 없는'워터 크레바스'도 살펴야 한다.
LA에서 파푸아 뉴기니의 오지 수가파까지 3일간(시차포함) 총 28시간을 날았다. 원정대와 원주민은 서로 구경꺼리가 된다. 원정대는 옷을 걸쳤고 원주민은 벌거 벗은 알몸이기 때문이다.
각국에서 합류한 원정대원(유럽 4 미국 2 한국 1)을 돕는 가이드 조리사 포터 등 도우미 35명은 모두 옷을 입었다. 그들은 일이 끝나면 생활하기 편한 자연인(벌거숭이)으로 돌아간다.
C1(캠프1 2200m)으로 향하는 산의 초입에서 난데없이 나타난 민간복 차림의 군인이 길을 막는다. 잔돈푼을 쥐어주고 통과한다. 산불이 곳곳에서 흰연기를 낸다. 화전민이 애써 불을 질렀지만 밤마다 내리는 비때문에 밭내기가 쉽지 않다.
400m를 내려왔고 600m를 오르는 길목에서 이번에는 산적을 만난다. 칼을 휘두르고 장총까지 거꾸로 멘 알몸이다. 무섭다기 보다는 대낮의 코믹한 쇼처럼 보인다. 통행세를 몇푼주고 지난다.
화전민촌의 질척거리는 시골길의 끝인 촌장의 초가집이 C1(2200m)이다. 아내 4 명 자녀 24명을 거느린 대가족의 촌장은 갓 넘은 중년쯤 될까. 큰 아들은 17살이고 막내아기를 이틀전 풍토병으로 잃었단다. 원주민의 실생활을 하룻밤 체험한다. 집안 한복판은 커다란 화덕이 자리 잡았다. 식구들이 둘러 앉아 감자를 구워 저녁을 먹는다.
야자수 잎을 엮어 덮은 지붕은 통풍이 잘되고 빗물도 잘 흘러 내린다. 잠자리도 간편하기 짝이 없다. 땅바닥에 깔린 마른 잎이 침구다. 모닥불을 쬐다가 웅크리고 앉거나 뒤로 눕워 자기 편할대로 잔다.
샤워도 필요 없다. 빗줄기에 들어갔다 나오면 그만이다. 신발도 필요 없다. 발바닥이 신이다. 만져 보니 뼈처럼 딱딱하고 굳은살이 두툼하다. 자연과 하나되어 자연스럽게 살고 있다.
아침 햇살이 따갑다. 여성대원들은 양산을 펴든다. C2로 가는길은 1시간을 못넘기고 돌변한다. 밀림이 시작되는구나 느끼는사이 벌써 앞이 어둡다. 울창한 숲이 하늘을 가린다. 질펀했던 흙바닥이 무릎까지 빠지는 늪지로 변해간다.
습기가 숲속을 가득 채워 한증막이 따로 없다. 모두들 땀에 젖고 늪지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텐트를 설치하니 곧 C2 (2600m)가 된다. 잠결에 바닥이 축축함을 느낀다. 텐트바닥 한쪽이 푹 꺼져 물이 스며 든다.
아침은 늘 쾌청하다. 흙탕물 투성이로 젖어 얼룩진 옷을 꽉 짜서 다시 입는다. 어제 힘겹게 지나온 늪지는 오늘과 비교하면 비단길이다. 태고의 원시정글을 실감한다. 대낮인데도 하늘을 볼 수 없다.
썩은 나뭇잎을 자칫 잘못 밟으면 무릎까지 빠진다. 나뭇가지에 빠진 다리는 빼내기도 힘들다. 죽어 나자빠진 통나무는 기름바른 미끄럼틀보다 더 미끄럽다. 딛는 순간 벗겨지는 이끼와 함께 나동그라진다. 한대원은 허리까지 늪에 빠진다.
산속 화전민촌의 촌장집서 하룻밤을 난다. 앉은 채로 뒤로 벌렁 넘어지면 취침준비 완료.
물 흐르는 소리가 발아래 수풀에서 들려 온다. 발아래 무엇인가가 두다리를 잡아끌어 당겨 내릴듯 소름이 끼친다. 아이스 크레바스가 히말라야와 매킨리에 있듯 워터 크레바스가 이 곳에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된다.
뚫린 구멍이 있어 들여다 본다. 빠지기라도 하면 물귀신이 되겠다. 조심 또 조심한다. 너무 깊어 바닥을 볼 수 없다. 철철 흐르는 물소리로 그 깊이를 짐작할 뿐이다.
11시간동안 생지옥같은 900m를 더 올라 C3(3500m)를 구축한다. 덜 젖고 덜 푹신거리는 나뭇잎을 찾아 텐트부터 친다. 텐트바닥이 움직일 때마다 물에 뜬듯 출렁인다. 저녁을 잊은채 모두들 시체처럼 잠에 빠진다.
C4(3800m)를 거쳐 C5(3900m)까지는 올랐다 내렸다하는 롤러코스터 등반이다. 만년설산의 빙하같은 정글 설사면같은 산비탈을 겨우 탈출했다.
새벽녘에 C6(4334m)로 떠난다. 해가 뜨면서 소리없이 안개가 사라진다. 절벽과 에메랄드빛 호수가 보아 달라는 듯 길손을 잡는다.
아침 햇살을 끌어 안은 물빛이 고즈넉하다. 직벽에 가까운 절벽을 로프도 없이 오른다. 바위틈마다 뿌리깊은 분재와 무성하고 강한 풀이 도와준다. 가이드가 고도를 묻고 고도계에 나오는 높이(241m)를 알려 준다.
마침내 베이스캠프(C6)에 입성한다. 감옥같은 정글을 탈옥한 해방감에 젖는다. 정상까지는 풀 한포기 없는 돌산이다. 고정 로프가 설치되어 있다. 홀드(손잡이와 발붙이기 좋은 곳)가 좋아 어렵지 않게 정상에 선착한다. 7대륙 최고봉을 완등하는 쾌거의 순간이다.〈끝〉
2009.01.29. 15:40
"안 내려 가면 죽는다!."는 소리에 숨이 콱 막힌다. 머리가 핑 돈다.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의 남릉(South Ridge)에 올라서는 순간 꼼짝할 수가 없다. 몸이 용수철 튕기듯 훌쩍 들뜬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고 차가운 화씨 -129도로 몰아치는 남극의 바람이다. 그 위력 앞에 무릎이 절로 꿇린다. 몸이 날려 공중분해되는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내려갈 수 없다. 불과 10m(해발고도)위가 정상이다. 다시금 소리치는 미국인 가이드 크리스의 하산명령을 더 이상 못들은 체 할 수 없어 이렇게 대꾸한다. "싫다! 죽어도 좋다. 가자!"이번이 3번째 명령 불복이다. 오고 가는 고성이 스톰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다. 더 크게 악 쓰듯 소리친다. "가자! 10m높이다"힘 겨루기가 아니다. 생과 사를 결판내는 순간이다."무슨 소리냐!. 300m 릿지다." 300km의 먼 길일 수 있고 영원의 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른 대원 3명은 방관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극한 상황 때문이다. 크리스의 허리춤을 꽉 잡고 매달린다. 한번 더 가자고 호소한다. 그는 말 대신 서로 묶은 로프를 툭 당기며 앞서 간다. 용의 등뼈라고도 불리는 300m의 능선은 그 첫 발부터 시련이 기다린 듯 앞을 막는다. 로프가 미친 용처럼 하늘에서 날뛴다. 눈바람도 거푸 후려친다. 자일자국이 갈래 갈래 깊게 패인다. 얼음 바닥도 살기등등하다. 삐죽 솟아 날을 세운 돌과 바위와 잔 커니스 (얼음처마)는 살인귀다. 쉴새 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진다. 고꾸라지고 떨어진다. 몸에 묶은 로프의 앞쪽과 뒷쪽에서 위기의 긴장감이 절절이 전해 온다. 화이트 아웃(눈보라와 안개로 시야가 막히는 현상)이 앞을 하얗게 가려 눈뜬 장님이다. 뒷줄이 돌연 당겨지며 묵직해진다. 바로 뒷쪽 대원의 추락을 직감한다.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잡는다. 피켈을 온 몸으로 깊이 박는다. 놓치면 나는 물론이고 무게가 가중돼 모두 떨어져 얼음귀신이 된다. 다행히 사투를 극복한듯 텐션이 풀린다. 계속되는 살풍을 뚫고 하얀 어둠을 더듬 더듬 헤쳐 나간다. 앞쪽 로프가 나가기를 멈추면서 크리스의 외침이 실소리처럼 들린다. "Mr. Yi! Summit!".멈춘다. 일순 자연도 멈춘듯 하다. 바람도 멈추고 어둠도 멈추고 추위도 멈춘다. 넋을 잃어 모든게 멈춘 감격의 순간에서 깨어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와락 부둥켜 안고 어깨를 들먹인다. 정상(4897m)은 아무것도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하늘도 얼음바닥도 안보인다. 하얀 어둠의 공간과 소름끼치는 바람 소리 뿐이다. 등정의 환희를 털고 하산길을 서두른다. 마의 높이 10m와 죽음의 능선 300m길이 끝난게 아니지만 모두 위기를 잘 넘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긴장이 풀린 마음 탓일까 아니면 과욕이 여신의 심기를 건드려 내려진 징벌인가. 릿지의 마지막 큰 돌을 눈앞(5m 쯤)에 두고 화를 자초한다. 큰 돌을 북쪽으로 틀면 남풍의 살기를 벗어난다.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으로 고글을 벗는 순간 분말(얼음눈)이 고글에 하얗게 쌓인다. 검은 고글과 그 안의 투명안경도 쓸 수 없게 된다. 동상과 설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북면에 들어서서 5분쯤 흘렀다. 바람을 벗어 났으나 안개는 더 찬다. 온통 희다. 위와 아래 앞과 뒤를 분간할 수 없다. 대원의 상태를 살피는 가이드는 나를 자세히 보기도 전에 기겁을 하며 놀란다. 얼른 속장갑을 벗어 내 두눈을 덮어 보온하며 응급 조치 한다. 아는 게 병이라더니 그제서야 얼굴에 통증을 느낀다. 안구는 건조한 모래속에 파묻힌 듯 갑갑하고 아프다. 앞을 못 보는 하산길의 인간 지팡이가 되어 주는 가이드가 고맙다. 툭툭 튕기며 길을 여는 로프가 유일한 생명줄이다. 앞을 못 보기는 크리스 또한 나보다 낫지 않다. GPS가 그의 눈이고 발이다. 잠시 쉰다. 안개가 가득 차고 기온도 뚝 떨어져 하산을 두번 째 권유했던 설사면이다. 크리스는 현재의 위기와 상황을 패트리어트힐 (806m)의 본부와 숨가쁘게 교신한다. 마음만 바쁘지 헛수고다. 악천후가 발을 묶는다. 비행기는 뜰 수 없다. 대기중인 의사도 올 수 없으니 별무소용이다. 정상과 서브라인봉(4865m)이 갈라지는 새들(4700m)을 지난다. 바람이 심해지고 안개가 끼기 시작해 하산을 처음 권유 받았던 곳이다. 밤 10시 초주검 상태로 하이캠프(3800m)에 도착한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14시간만에 돌아 온다. 죽은듯 안정하지만 신음속에 하얀 밤(백야)을 꼬박 샌다. BC(베이스 캠프 2150m)까지의 하산을 하루 늦춘다. 크리스가 200m의 로프 6동을 설치한 각도 45도의 새 루트 설사면(높이 800m) 을 무사히 내려와 BC에 돌아온다. 등정 5일째다. 눈이 파묻힐 정도로 퉁퉁부어 흉했던 얼굴이 나아졌다. 눈도 떠 졌다.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 스키 비행기가 BC를 떠나 패트리어트힐로 향한다. 끝없는 설원(평균 두께 2000m)에 띄엄 띄엄 솟은 설산이 바다에 솟은 섬같이 둥둥 떠 있다. 날씨가 좋았다면 정상에서 보는 경치가 이랬을 것이다.
2009.01.22. 16:25
그 윗 자락은 하늘을 보고 누워 볼록히 솟은 쌍봉 설산이다. 몽실하게 솟은 젊은 여신의 젖가슴일까.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낡은 국내선 일류신을 탄다. 마차보다 더 시끄럽게 덜컹거리는 소리는 차라리 참을만 하다. 기내까지 스며드는 개스 냄새에 다들 좌불안석이다. 3시간의 공포비행 끝에 미네랄리보디에 안착한다. 전용 차량편으로 5시간을 더 달린다. 최종 목적지 이트콜의 벽산계곡(2500m) 에 도착한다. 한국의 설악산초입의 설악동같은 산골이다. "둘둘! 셋! 넷!" 다음날 아침 체조로 몸을 풀고 600m를 오르는 연습산행에 들어간다. 정상의 언저리인 체켓봉(3500m)을 왕복하는 고소적응 트레킹이 오늘의 스케줄이다. 깊은 산맥의 서늘한 바람은 이곳 한여름의 열기를 한풀 꺽는다. 송글송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금새 훔친다. 상의를 훌떡 벗은 두 러시아 사병이 순찰을 멈추고 그늘에 앉아 쉬며 히덕거린다. 총따로 몸따로다. 총은 한국전 사진에서 낯익은 북한군의 따발총을 닮았다. 총을 집어들어 내 손에 쥐고 병사와 기념사진을 찍는다. 산 전체를 위와 아래로 나눠 본다. 그 아래쪽은 온갖 야생화 군락지다.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찬란하게 하늘을 수 놓는다. 얼굴에 스치는 꽃잎이 꿈결처럼 부드럽다. 꽃냄새가 숨막힐듯 물씬하다. 한마디로 꽃천지다. 마음에 가득 담는다. "산이 좋아 산을 닮아 산다." 평소의 그런 산마음을 닫고 방금 물든 꽃마음을 연다. 시인은 아니지만 흉내를 낸다. "꽃이좋아 꽃품에 안겨 꽃산에 머문다." 대원들은 벌써 내려가고 없다. 혼자 남아 내려갈 줄 모른다. 벌떡 일어나 훌훌 턴다. 그러나 바람이 꽃춤을 앞세워 더 머물라고 손을 잡는다. 꽃냄새도 내려가지 말라고 배낭을 당긴다. 도로 주저 앉는다. 뒤뜰의 꽃밭같은 꽃산을 벗삼아 사는 아랫마을의 주민들이 부럽다. 그 위쪽은 흰산이다. 하늘이 색깔을 바꿀때마다 쌍봉도 따라한다. 검은 구름이 덮으면 검은색 흰구름이면 흰색 안개가 끼면 회색이다. 구름 한점 없으면 태양빛이다. 해돋을녁은 금빛 해질녁은 불빛이다. 인간은 이를 보며 즐거워 하고 닮아가고 행복을 찿는다. 하늘같은 지아비와 땅같은 지어미라더니 우리네 부창부수가 이와 닮았다. '행복의 산'이라는 엘 브루즈(페르시아원어)의 본뜻을 알듯 하다. 인간에게 '행복의 산'은 신에게는 '불행의 산'이었다.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여 인간에게 불을 전파하고 쇠사슬에 묶인채 독수리에게 심장을 파 먹히는 '형벌의 산'이기도 했다. 코카서스산맥 (주봉엘 브루즈)이 알프스 산맥 (주봉 몽블랑)보다 더 나은듯 싶다. 더 아름답고 섬세하며 더 높고 깊으며 인간의 때도 덜 묻어 더 자연스런 분위기다. 엘 브루즈 등반은 셀파 포터 노새 등 짐꾼이 필요 없다. 두번의 관광 케이블카와 한번의 스키 리프트가 그 대역을 맡는다. 아자우(2200m) 에서 바렐산장(3900m)까지 짐을 나른다. 술통 모양의 바렐산장은 대피소겸 베이스캠프(BC)역할도 함께한다. 아침까지 멀쩡했던 대원들이 고소증상을 보인다. 두통을 호소하고 음식을 토하며 무기력에 빠진다. 영하로 떨어진 수은주가 계속 곤두박질한다. 짙은 구름이 꽉차 아랫쪽 꽃산을 가린다. 퓨리읏산장(4200m)을 거쳐 파츠코브(4800m)까지 이틀간의 고소적응를 끝내고 서밋데이(등정일)를 기다린다. 언제든 맑은 날이 등정일이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다. 개스도 왔다 갔다 멋대로다. 하루가 지난다. 이틀을 더 보낸다. 젊거나 성급한 대원들은 웬만하면 내일 오르잔다. 자연에 순응하면 성공하고 불응하면 실패한다. 철칙을 깰 수 없다. 좀더 기다리자고 달랜다. 마침내 서밋데이다. 나흘째인 오전 2시. 스톰의 뒤끝이 잦아든다. 동틀녁 바람 한점 없다. 고개를 삐죽 내미는 태양이 쑥쑥 솟는다. 태고의 흰산을 찬란하게 물들인다. 천지를 창조하는 빛이 저랬을까. 오전 8시 동봉과 서봉이 갈리는 고갯마루(5300m)에서 잠시 쉰다. 대원 12명중 4명이 등정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350m를 더 오르면 서봉(정상)이다. 몸이 가볍고 마음은 즐겁다. 등정을 낙관한다. 러시아인 가이드 푸틴과 농담할 정도로 여유롭다. 마지막 남은 급경사 한시간을 잘 버틴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섰다. 동양과 서양이 나뉘고 만나는 분기점이다. 날씨는 계속 쾌청하다. 시계가 넓어 카스피해가 보인다. 흑해도 손에 잡힐 듯하다. 꺼내든 깃발들이 유럽 최고봉에 휘날린다.
2009.01.15. 15:56
영화‘킬리만자로의 눈’에서 봤듯이 정상엔 소복하게 쌓인 하얀 눈이 태양에 눈 부시고, 달콤한 러브 스토리가 달빛에 흘렀다. 잃어버린 사랑도 되돌아 올 것 같이 로맨틱했던 하얀 산(스와힐리어의 원뜻)은 이제 더 이상 그런 동경의 대상이 아니다. 영원히 볼 수 없는 추억의 옛 산으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아프리카 야생동물인 악어뱀임팔라 등으로 만든 요리'야마쪼마'의 맛이 보기만 못하다. 질기고 냄새를 덜 빼 누린내가 심하다. 먹다 말고 탄자니아의 소도시 아루사에 있는 민속식당을 나온다. 모시를 거쳐 마차메 게이트 (1800m)에서 입산 수속을 끝내고 산행에 들어간다. 마차메 게이트를 출발한 지 5일만에 정상을 밟는다. 속이 메스껍고 머리가 띵한 두통이 스치듯 왔다 사라진다. 화산 분화구의 가장 높은 검은 돌 무더기가 정상이다. 검은 화산돌은 구멍이 숭숭 나 있다. 별탈없이 힘든 줄 모르고 올라오니 관광인지 원정인지 헷갈린다. 정상인 우흐르 피크의 나무 팻말 앞에서 증명사진 같은 기념사진을 먼저 찍는다. 그러나 팻말이 눈에 거슬린다. 찢어진 플라스틱 조각들이 너덜거린다. 그 밑은 찌그러진 빈깡통 쓰다버린 낡은 등산용품 등 쓰레기가 지저분하다. 화산돌의 구멍마다 인간의 때가 묻어 있다. 과자 부스러기 음식 찌꺼기가 끼어 있다. 애달픈 정상의 모습이다. 검은 대륙이라는 자리 탓일까 아니면 남보다 덜 가진 가난 탓일까. 다른 대륙의 최고봉도 이런 괄시를 당할까. 푸대접을 받지만 푸념조차 못하는 신세다. 이 곳 산세와 비슷한 남가주 지역의 산에서는 전혀 볼 수 없는 환경 파괴의 일그러진 참상이 아닐수 없다. 씁쓸한 기분이다. 백록담크기의 열 배쯤 되는 분화구는 척박한 맨땅이다. 그 안팎으로 만년설이 드문드문 눈에 뜨인다. 많지 않다. 열개 남짓하다. 높이 2-3층 아파트 정도의 얼음 덩어리부터 커 봤자 실내 야구장 정도다. 모두 각이 났다. 위에서 아래로 줄이 패여 있다. 분화구 안쪽은 거대한 가마솥을 방불케 한다. 만년설이 그 안에서 바글바글 끓듯 녹는다. 흘러 내리는 물이 흥건히 괴여 있어야 할 바닥은 겨우 젖어 있다. 몇발자국 밖은 말라 있다. 분화구 바깥쪽도 안쪽과 같다. 녹아 흐르는 만년설을 바짝 가까이서 본다. 서서히 녹는게 아니다. 샤워하듯 줄줄 흘러 내린다. 바닥은 연못처럼 괴어 있다. 손을 대본다. 차갑게 얼어붙어야 할 손이 이상하리만치 차갑지 않다. 분화구의 주변도 마찬가지다. 높이가 있어 어느 정도의 만년설은 남아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예상은 빗나간다. 흐르는 빙하도 흘러 내리는 물도 없다. 그늘진 북쪽의 깊은 골짜기조차 바짝 메말랐다. 돌틈에서 스며나와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라도 있을 듯 한데 습기조차 없다. 지금까지의 녹아내린 추세를 어림하면 만년설의 남은 수명을 얼추 짐작할 수 있다. 짧으면 10년 길어야 50년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이곳 수석 가이드의 예측이다. 얼음 한 덩어리없는 킬리만자로의 앞날이 보이는 것 같다. 하산길에 들어 선다. 능선따라 내려가는 포터들의 행렬이 길어 백명을 웃돌아 보이지만 39명이다. 이들이 부르는 노래를 귀담아 듣는다. "쟘보! 쟘보! 쟘보 부아나 와까리 빗져" 심금을 울리고 영혼까지 흔드는 흑인영가의 뿌리다. 12명인 대원은 LA에서 온 나를 빼고 모두 한국서 왔다. 언어 음식 감정이 같아 편하다. 협조도 말없이 눈치껏 잘 이뤄진다. 포터가 나르는 짐의 무게는 20kg을 밑돈다. 히말라야 셀파보다 덜 진다. 덩치는 셀파의 곱절인데 짐은 절반이다. 많은 실업자에게 일자리를 창출하려는 당국의 자구책이다. 필수품만 챙긴 대원의 짐은 달랑 당일용 배낭 하나다. 5kg을 넘지 않는다. 날씨는 더없이 계속 좋다. 덥지도 춥지도 않다. 산언저리(3000m전후)는 구름 또는 안개로 늘 가득 찬다. 동양화에서 봐왔던 절경을 눈앞에서 만끽한다. 운해건너쪽 홀로 솟은 고산(마웬지봉)이 고즈넉하다. 신비에 감싸인 고성같다. 바늘이 먼저가면 실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어느 원정대든 똑같은 스케줄이다. 등반의 바톤을 사파리 투어가 실처럼 뒤를 이어 받는다. 탄자니아 국립공원 '끝없는 평원' (마사이족말로는 세렝게티)에서 코끼리 사자 표범 버팔로 코뿔소등 소위 말하는'Big Five'들과 신물 나도록 함께 어울린다. 세계 최대 분화구의 웅고롱고 사파리는 재미가 으뜸이다. 뚜껑 열린 짚차타고 휘젓듯 달린다. 동물들도 더불어 달린다. 놀라서 뛰고 살려고 튄다.
2009.01.08. 15:57
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원주민들은 '디날리'라고 부름)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북극에 가까운 지리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데다 성곽조차 각종 법규와 규제로 무장됐다. 까다로운 등반조항과 함께 불문법으로 굳어진 포터 없는 등반이 그 철의 장막이다. 장빼고 포까지 빠진 공격이 쉬울 턱이 없다. 삐걱거리는 비행기타고 에베레스트보다 어려울 수 있는 흰산으로 날아 간다. 상공에서 내려다 보이는 디날리의 첫 인상은 가슴이 섬뜩한 백색의 사생화다. 그림의 윗쪽은 설벽의 난이도가 세계에서 첫째로 꼽히는 헌터봉(5300m)이 좌청룡처럼 꿈틀거린다. 아랫쪽은 기상변화를 좌지우지하는 퍼레이커봉(4500m)이 우백호처럼 으르렁댄다. 그 가운데 15마일 상단에 매킨리가 우뚝 솟아 있다. 굶주린 아가리를 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악마처럼 드러누워 있는 흉물스런 크래바스는 소름끼치는 살풍경이다. 랜딩포인트(2200m)에 착륙한 스키 비행기의 트랩을 내리는 순간부터 흙 한줌 없는 설산등반은 시작된다. "아자 ! 아자 !" 우리 일행 셋(대장:이성인 대원:이세중김지우)은 거푸 외친다. 하늘로 뻗어 올려 하이파이브를 하느라 맞부딪히는 스틱 소리가 힘차다. 기분좋게 첫발(스키)을 뻗어 나간다. 먼저 떠나 올라 가던 우크라이나팀이 다시 내려와 씩씩거리며 앞질러 나간다. 아랫쪽이 바른 길인 데 윗쪽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해프닝이다. 배낭과 썰매의 무게가 각각 30kg인데도 무거운 줄 모른다. 200m에 달하는 내리막이 신나지만 한 시간을 못 넘긴다. 다시 400m의 오르막으로 바뀌는 높이 2400m의 스키힐이 힘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 배낭이 허리 밑을 누르고 썰매가 뒤를 당긴다. 날씨도 짓궂다. 하늘이 뚫린 듯 뙤약볕이 쏟아진다. 벌써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이마에는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화씨 90도(섭씨 32도)쯤 되는 찜통 더위다. 그러나 언제 불어 닥칠 지 모르는 영하 50도(섭씨 영하40도)의 동장군 보다 낫다. 앞에 가는 한 여성은 탱크탑 차림인 데도 헐떡인다. 대략 30도~50도 가량의 급경사로 솟아 있는 3300m의 모터 사이클힐의 밤은 있는 듯 없는 듯 짧다. 자정 넘어 어둠을 잠깐 깔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녘을 밝힌다. 북극권의 백야를 실감한다. 스키를 벗어 눈속에 보관하고 크램폰으로 갈아 신는다. 고도 4400m의 윈디코너는 바람이 낮잠을 자는지 잠잠하다. 그 틈을 타 일행은 잽싸게 지난다. 고개를 돌려 히뜩 쳐다보니 경치가 확 트인다. 앵커리지가 발아래까지 바짝 다가 온다. 원통의 휴대용 변기를 꺼내 일을 치른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변기는 묵직 해졌다. 등반루트의 심장부격인 바신캠프(4300m디날리 시티)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의료실과 뒷간이 있는데 날씨 변화를 점치고 지쳐 거덜난 몸도 추스릴 수 있는 다목적 쉼터다. 위치까지 좋아 최고의 뷰 포인트로 꼽힌다. 왼쪽의 헌터봉과 오른쪽의 퍼레이커봉이 코 밑에 가깝다. 살풍과 얼음눈을 앞세워 몰아쳐 올 듯한 기세이지만 심술을 참는 듯 하다. 상투 끝에 머무른 흰구름이 피어 오를 듯 사라진다. 아발란체(눈사태)에다 짙은 안개와 바람(시속120마일)이 잦다는 높이 600m의 헤드 월 (최저 경사 50도)도 기세를 낮춘다. 쉽게 오른다. 헤드 월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능선도 편안하다. 양쪽 낭떠러지가 몸을 잡아 당길 듯 오금이 저려 오지만 미풍조차 없다. 디카에 설경을 담는다. 여기까지 올라 온 "너는 최고"라는 듯 우뚝 선 엄지바위가 반긴다. 순풍을 탄 새처럼 쉽게 올라온 상황이 5200m의 하이캠프에서 돌변한다. 바람에 날리는 소변이 바짓 가랑이에 묻는 순간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변한다. 떨어진 기온과 기압은 둘째다. 바닥난 체력이 더 큰 문제다. 쉬는날 없이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 와 누적된 피로가 화근이다. "너희 둘이 올라가라. 나는 포기한다." 그러나 지우와 세중은 꿈쩍 않는다. 함께 오르자거니 아니라거니 좁은 텐트안에서 갑론을박하는 고성이 울먹임과 뒤섞여 반복될 뿐이다. 결론은 내일 함께 오르자는 쪽으로 가닥났다. 3일분밖에 남지 않은 부족한 식량과 기상악화 이 두 악재가 배수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호재로 바뀌었다. 짙은 개스가 끼었지만 디날리 패스도 칼날능선도 굳게 뭉친 우리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는지 길을 막지 않는다. 등정의 문이 열린다. 더 나아갈 곳도 오를 곳도 없다. 정상이다. 지우가 가장 감격해 한다. "아시죠 6일만에 정상 찍은 거" 평균등반기간인 14일에서 20일을 반으로 잘라 줄였다. 한국인중 최단기 등정 기록이다. 세중의 입도 귀에 걸린다. "날씨가 좋았어 운도 따랐고"
2008.12.18. 16:20
남미대륙에 최고봉으로 우뚝 솟은 아콩카구아(6962m)는 산자락에서부터 정상까지 분홍, 빨강, 까망등 화려한 컬러로 멋진 옷을 걸쳤다. 지층에 따른 색깔로 진하게 화장을 해서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인간이 빨려 들듯 들어가려 하지만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다. 터줏대감인 바람의 신 ‘이올로’(Eolo)와 태양의 여신 ‘페보’(Febo)의 마음을 알아 내지 않고는 등정을 이룰 방법이 없다. 2006년 1월 1 일. 힘들면 내려 오라는 아내의 당부를 뒤로 남기며 신을 만나러 떠난다. 집을 떠나기 앞서 뒷뜰에서 이렇게 기원했다. “등정의 문을 열어 주소서. 열어 주시면 겸허히 들어 가겠읍니다. 닫으신다면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LA발 비행기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목적지 아르헨티나 멘도자에서 날개를 접는다. 포도주와 바베큐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집을 떠난 산생활이 벌써 3주째다. 정상을 코 앞에 둔 현재 시간은 20일 오후 2시. 새벽 3시에 하이캠프 (6000m)를 출발한지 11시간이 지났다. 정상까지 남은 높이는 100m 남짓한데 천릿길처럼 아득하다. "당신은 내려가시오"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인 수석 가이드의 하산 지시를 받은 이스라엘인 대원이 순순히 발길을 돌린다. 여기까지 따라온 그는 누가 봐도 무리다. 대원 11명중 4번째 하산이다. 어제 이 자리에서 스위스 원정대의 한 대원이 숨진 사실을 상기하는 듯 가이드는 시선을 바꿔 나를 째려 본다. "You too! " 이미 짐작했던 바다. 내눈이 불같이 달아 오르고 저항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 또한 이미 하산한 대원보다 나을 게 없다. 벌써 하산했어야 할 컨디션이다. 그러나 나는 대답대신 배낭을 벗어 버린다. 꺾을 수 없는 내 의지를 읽은 듯 가이드는 앞장서 갈길을 서두른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발걸음을 내딛지만 너무 지쳐 땅에 끌린다. 거리감도 고도감도 없다. 무의식 무감각 상태다. 풀린 다리가 폭삭 무너져 고꾸라진 상태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불현듯 외침이 들린다. "오른쪽이 정상이다" 정신이 번쩍 들고 힘이 불끈 솟는다. 10m쯤 남았을까. 달리듯 걷는다. 사진찍는 대원들의 즐거운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정상이다. 나도 얼떨결에 찍어둔다. 그리고 잊었다. 몸이 흔들리고 가자며 깨우는 소리에 눈이 스르르 떠진다. 싸락눈이 내린다. 이미 이곳 저곳에 희끗희끗 쌓여 있다. 한동안 잠(기절)이 들었었구나. 쌓인 눈을 어림해 20분 가량 혼절한 듯 싶다. 사진을 이미 찍었는데 하얗게 잊고 또 찍는다. 값진 증명사진이다. 즐거워야 할 하산길이 오를 때 보다 낫지 않다. 풀린 다리에다 정신까지 혼미해서 반송장이 따로 없다. 뒷덜미와 양팔을 잡아주는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해질 무렵 하이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비몽사몽 긴 밤을 헤맨다. 새벽녘에야 의식이 돌아 온다. 눈을 감은채 기억을 더듬는다. 또옹 바람(아콩카구아의 돌풍)에 시달린 시련이 등정의 기억보다 더 크게 클로즈업 된다. 어제 11시께 동북면(약 6500m)의 그늘진 설사면에서다. 윗쪽은 직벽이고 몇 발자국앞 아랫쪽은 낭떠러지다. 슬슬 불던 또옹바람이 전 대원을 삼킬듯 돌풍으로 돌변한다.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둥글게 모여 어깨를 맞잡고 쭈그려앉아 무게 중심을 잡는다. 몸이 날리는 위기를 피했지만 앙칼진 얼음 바람의 긴 꼬리가 기세를 꺽지 않는다. 얼굴을 할퀴고 옷의 틈새 구석구석까지 파고 든다. 옆 대원이 이를 딱딱 떨고 몸도 부들부들 떤다. 나도 마찬가지다. 트위스트 추듯 마구 떤다. 바람의 신 이올라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면 눈치라도 살피련만 그렇지 못해 속절없다.어쨌든 어제는 25시보다 긴 하루였다. 하산을 준비하면서 발아래 펼쳐진 자연의 신비를 만끽한다. 높이마다 산빛이 또렷하다. 높이 2000m (호콘스)는 엷은 핑크 3000m (콘프렌시아)는 진한 빨강 4000m (BC)는 검붉은 색으로 층층마다 다른 특색을 보인다. 뫼가 높으면 골도 깊기 마련. 계곡마다 분말처럼 흘러내려 수북히 쌓인 모래인(돌과 모래가 쌓인 너덜지대)이 실폭포처럼 싱그러워 감칠맛이다. 곱게 빚어내린 금발보다 아름답다. 하루 일을 끝낸 뮬러(마부)들의 한바탕 놀자판도 낮의 경치 못지 않은 밤의 비경이다. 달빛에 노래가 흐르고 모닥불에 춤이 일렁이는 낭만의 현장이다. 지구 온난화는 여기도 예외는 아니다. 산 전체가 폭염에 죽어간다. 정상까지 녹아 맨땅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동면 한곳(폴리쉬루트)에 만년설이 살아 있지만 시한부 인생이다. 페니텐테스(빙석)가 광활하게 널려있는 산의 허리춤(5000m)은 눈뜨고 볼 수없는 참상을 처절하게 드러낸다. 크든 작든 모든 빙석이 땀을 뻘뻘 흘리며 쩔쩔맨다. 빙석 상부는 태양열에 녹아내리고 하부는 지열에 녹아흘러 바닥이 질펀하다. 녹고 녹아 손바닥만하게 줄어든 만년설의 꺼져가는 마지막 삶이 애잔할 뿐이다.
2008.12.11. 15:40
지난 3년여 동안 불굴의 투지와 용기로 에베레스트부터 남극까지 세계 7대륙의 최고봉들을 발아래 둔 이성인씨, 그에게 있어서만큼은 진정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리라. 2년 전 LA 산악인 김명준씨에 이어 미주 한인으로는 두 번째가 되는 그의 7대륙 최고봉 등정기를 7회에 걸쳐 연재한다. 2007년 5월 16일 오전 8시. 10여명이면 꽉 찰 에베레스트(8848m.티벳어로는 초모랑마)정상의 비탈진 만년 설상에 50여 명이 북새통이다. 티벳과 네팔 양쪽에서 한꺼번에 클라이머들이 몰렸으니 밀고 밀리는 아수라장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 내 산소 마스크는 끈이 끊겨 떨어지고 손쓸 틈도 없이 날카로운 크램폰(등산화 밑에 부착하는 미끄럼 방지용 스파이크)에 짓밟혀 뭉개진다. 금새 숨이 막혀 온다. 물 밖에 던져진 붕어처럼 할딱인다. '아! 여기서 죽는구나' 밤새 지쳐 떨어진 기력으로 살아 보려는 의지조차 사라진다. 조여 오는 죽음을 숙명처럼 받아 들인다. 넋을 잃고 고개를 떨구며 눈을 감는다. '산 사람이 산에 묻히니 영원히 살리라' 삶을 포기한 탓일까. 일순 마음이 편안해져 온다. 의식을 잃고 혼수상태에 빠진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찰나의 순간이 억겁처럼 여겨지는데 퍼뜩 눈이 떠지면서 천천히 시야가 맑아져 온다. 먹구름이 갈라지며 찬란하게 치솟는 동녘햇살과 오버랩된 내 전담 셀파 타케의 얼굴이다. 목구멍이 뚫리는 듯 시원하고 머리도 맑아지고 있음을 느낀다. 내 얼굴에 타케의 빨간 산소 마스크가 씌어져 있고 타케는 마스크도 없이 버티고 서 있다. "네가 나를 살렸구나. 고맙다. 그러나 너는 …" 말이 필요없다. 내 시선의 뜻을 알아 차린듯 그가 내 등을 토닥이며 오히려 나를 안심시킨다. "Don't worry. I am OK." 타케가 거인처럼 보인다. 신들의 세계는 내게 죽음의 지대(Death Zone 산소통없이는 살 수 없는 해발 7000피트 이상의 고지)가 아니다. 오히려 요람처럼 나를 포근하게 감싸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한 시간쯤 흘렀을까. 밀물처럼 밀려 왔다가 서둘러 사진을 찍고는 썰물처럼 빠져 나간 정상의 자리는 거짓말처럼 썰렁해졌다. 정신을 차린 우리도 사진을 찍고 하산에 앞서 장비점검에 들어갔다. 하지만 내게는 또 다른 위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내 배낭속의 산소통에 산소가 거의 바닥났다는 사실을 타케가 찾아낸 것이다. 타케는 망설이지 않고 자기 산소통을 내 산소 마스크에 연결시킨다. 살신성인의 참모습이 아닐 수 없다. 두번째 입는 그의 은혜다. 고마움에 핑 흘러 내리는 고글속의 내 눈물을 타케는 보았을까. 이제 타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모두 내게 줬다. 산소 마스크도 없다. 산소통도 없다. 만약 타케에게 호흡 위기가 닥친다면 나는 산소와 마스크를 되돌려 줄 수 있을까. 이렇게 자문자답하는 망상에 빠진다. 하지만 답은 너무도 쉽게 나온다. 'No' 나는 살아야 하고 내 생명의 은인은 내 몰라라 하는 한톨의 죄의식조차 없는 배은망덕이다. "나는 나쁜 놈인가?" 또 자문하지만 답을 내놓지 못한다. 타케의 무사 하산을 기원할 뿐이다. 내가 좋은 놈이 되기 위해서. 정상 바로 밑 50m쯤 되는 급경사 하단에 들어선다. 2시간전 오를 때의 감회가 새롭다. 어둠을 벗어난 정상이 흐릿하게 보였다. 여늬 때면 터져 나왔을"아 ! 정상 이구나"하는 탄성에 앞서 눈물이 먼저 터졌다. 봇물터지듯 흘렀다. 참지 않았다. 엉엉 울었다. 나뿐 아니다. 앞쪽에서도 뒤쪽에서도 어깨를 들먹이며 울먹이는 환희의 코러스가 터지고 있다. 코앞에 둔 세계 최고봉을 맞는 지상 최고의 감격이 참는다고 참아지겠는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타케는 아무 이상이 없는 듯하다. 다행이다. 한 시간 가량 더 내려온다. 세컨 스텝(Second Step 8600m)이 기다린다. 지난밤 여기서 겪은 시련이 악몽같다. 2m짜리 알미늄 사다리가 걸쳐진 고작 4m높이에 불과 하지만 온몸의 진을 빼낸 마의 고비다. 지체된 클라이머들로 인해 한시간 넘게 기다린 병목현상으로 시달린 데다 날씨까지 나빴다. 폭설로 인해 사투끝에 올라섰다. 돌 틈새에 쌓이는 분말(8000m급 고산의 얼음눈)이 가장 힘들었다. 폭포처럼 쏟아지는 폭설을 거슬러 올라야 했던 광경은 생각조차 싫다. 그러나 오늘 날씨는 바람 한점 없다. 푸른 하늘이 한층 더 깊다. 우모복이 더울 정도로 따뜻하다. 날씨가 좋으니 경치도 기가 막힌다. 발 아래 펼쳐지는 파노라마는 바다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설봉과 설봉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오후 1시께 도착한 하이 캠프(8300m)에서 미리 내려온 셀파 주미(2008년 8월 K2에서 사망)가 반긴다. 엊저녁 우리 텐트앞에서 엎드려 쉬다 그대로 숨져버린 어느 백인 클라이머의 주검은 치워 졌는지 보이지 않는다. 잠시 쉬는사이 내 배낭속의 산소통을 점검한 타케는 난감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다. 산소가 또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를 눈치챈 주미가 자기 산소통을 선뜻 내준다. 시장에 팔려고 아껴서 남겨뒀던 러시아제 미화 400달러 상당의 보물같은 것이다. 두번째 산소부족이고 세번째 입는 은혜다. "고맙다. 주미" 타께에 이어 주미마저 무산소다. 두 셀파에게 거듭 미안하고 고맙다고 말하지만 마음만 못하다. 걸음이 느린 난 먼저 하산을 시작한다. 해 지기전 노스콜(North Call.7100m)에 도착해 산소 마스크를 벗는다. 산소통도 내려 놓는다. 마중나온 대원들이 탄성을 지르며 반긴다.
2008.12.04. 15: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