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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인씨 7대륙 최고봉 등정기-6]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 엄청난 얼음 폭풍···고통의 한발 또 한발

Los Angeles

2009.01.22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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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 뒤로한 채 정상에 오른 기쁨도 잠시
과욕이 불러온 '설맹과 안면 동상'으로 고생
"안 내려 가면 죽는다!."는 소리에 숨이 콱 막힌다. 머리가 핑 돈다. 남극 최고봉 빈슨 매시프(4897m)의 남릉(South Ridge)에 올라서는 순간 꼼짝할 수가 없다. 몸이 용수철 튕기듯 훌쩍 들뜬다. 지구상에서 가장 빠르고 차가운 화씨 -129도로 몰아치는 남극의 바람이다. 그 위력 앞에 무릎이 절로 꿇린다.

몸이 날려 공중분해되는게 아닐까하는 두려움이 엄습한다. 그러나 내려갈 수 없다. 불과 10m(해발고도)위가 정상이다. 다시금 소리치는 미국인 가이드 크리스의 하산명령을 더 이상 못들은 체 할 수 없어 이렇게 대꾸한다.

"싫다! 죽어도 좋다. 가자!"이번이 3번째 명령 불복이다. 오고 가는 고성이 스톰의 기세를 이기지 못한다. 더 크게 악 쓰듯 소리친다.

"가자! 10m높이다"힘 겨루기가 아니다. 생과 사를 결판내는 순간이다."무슨 소리냐!. 300m 릿지다." 300km의 먼 길일 수 있고 영원의 길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른 대원 3명은 방관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극한 상황 때문이다.

크리스의 허리춤을 꽉 잡고 매달린다. 한번 더 가자고 호소한다. 그는 말 대신 서로 묶은 로프를 툭 당기며 앞서 간다.

용의 등뼈라고도 불리는 300m의 능선은 그 첫 발부터 시련이 기다린 듯 앞을 막는다. 로프가 미친 용처럼 하늘에서 날뛴다. 눈바람도 거푸 후려친다. 자일자국이 갈래 갈래 깊게 패인다. 얼음 바닥도 살기등등하다. 삐죽 솟아 날을 세운 돌과 바위와 잔 커니스 (얼음처마)는 살인귀다. 쉴새 없이 미끄러지고 넘어진다. 고꾸라지고 떨어진다. 몸에 묶은 로프의 앞쪽과 뒷쪽에서 위기의 긴장감이 절절이 전해 온다.

화이트 아웃(눈보라와 안개로 시야가 막히는 현상)이 앞을 하얗게 가려 눈뜬 장님이다. 뒷줄이 돌연 당겨지며 묵직해진다. 바로 뒷쪽 대원의 추락을 직감한다. 무의식적으로 브레이크를 잡는다. 피켈을 온 몸으로 깊이 박는다.

놓치면 나는 물론이고 무게가 가중돼 모두 떨어져 얼음귀신이 된다. 다행히 사투를 극복한듯 텐션이 풀린다. 계속되는 살풍을 뚫고 하얀 어둠을 더듬 더듬 헤쳐 나간다. 앞쪽 로프가 나가기를 멈추면서 크리스의 외침이 실소리처럼 들린다.

"Mr. Yi! Summit!".멈춘다. 일순 자연도 멈춘듯 하다. 바람도 멈추고 어둠도 멈추고 추위도 멈춘다. 넋을 잃어 모든게 멈춘 감격의 순간에서 깨어난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둘이 와락 부둥켜 안고 어깨를 들먹인다. 정상(4897m)은 아무것도 없다.

보이지도 않는다. 하늘도 얼음바닥도 안보인다. 하얀 어둠의 공간과 소름끼치는 바람 소리 뿐이다.

등정의 환희를 털고 하산길을 서두른다. 마의 높이 10m와 죽음의 능선 300m길이 끝난게 아니지만 모두 위기를 잘 넘기고 있다. 그러나 나는 아니다. 긴장이 풀린 마음 탓일까

아니면 과욕이 여신의 심기를 건드려 내려진 징벌인가. 릿지의 마지막 큰 돌을 눈앞(5m 쯤)에 두고 화를 자초한다. 큰 돌을 북쪽으로 틀면 남풍의 살기를 벗어난다. 자세히 보고 싶은 충동으로 고글을 벗는 순간 분말(얼음눈)이 고글에 하얗게 쌓인다. 검은 고글과 그 안의 투명안경도 쓸 수 없게 된다. 동상과 설맹에 무방비 상태로 노출된다.

북면에 들어서서 5분쯤 흘렀다. 바람을 벗어 났으나 안개는 더 찬다. 온통 희다. 위와 아래 앞과 뒤를 분간할 수 없다. 대원의 상태를 살피는 가이드는 나를 자세히 보기도 전에 기겁을 하며 놀란다. 얼른 속장갑을 벗어 내 두눈을 덮어 보온하며 응급 조치 한다.

아는 게 병이라더니 그제서야 얼굴에 통증을 느낀다. 안구는 건조한 모래속에 파묻힌 듯 갑갑하고 아프다. 앞을 못 보는 하산길의 인간 지팡이가 되어 주는 가이드가 고맙다. 툭툭 튕기며 길을 여는 로프가 유일한 생명줄이다. 앞을 못 보기는 크리스 또한 나보다 낫지 않다. GPS가 그의 눈이고 발이다. 잠시 쉰다. 안개가 가득 차고 기온도 뚝 떨어져 하산을 두번 째 권유했던 설사면이다.

크리스는 현재의 위기와 상황을 패트리어트힐 (806m)의 본부와 숨가쁘게 교신한다. 마음만 바쁘지 헛수고다. 악천후가 발을 묶는다. 비행기는 뜰 수 없다. 대기중인 의사도 올 수 없으니 별무소용이다.

정상과 서브라인봉(4865m)이 갈라지는 새들(4700m)을 지난다. 바람이 심해지고 안개가 끼기 시작해 하산을 처음 권유 받았던 곳이다.

밤 10시 초주검 상태로 하이캠프(3800m)에 도착한다. 오전 8시에 출발해서 14시간만에 돌아 온다. 죽은듯 안정하지만 신음속에 하얀 밤(백야)을 꼬박 샌다. BC(베이스 캠프 2150m)까지의 하산을 하루 늦춘다.

크리스가 200m의 로프 6동을 설치한 각도 45도의 새 루트 설사면(높이 800m) 을 무사히 내려와 BC에 돌아온다. 등정 5일째다. 눈이 파묻힐 정도로 퉁퉁부어 흉했던 얼굴이 나아졌다. 눈도 떠 졌다. 사진을 찍어 기록으로 남긴다.

스키 비행기가 BC를 떠나 패트리어트힐로 향한다. 끝없는 설원(평균 두께 2000m)에 띄엄 띄엄 솟은 설산이 바다에 솟은 섬같이 둥둥 떠 있다. 날씨가 좋았다면 정상에서 보는 경치가 이랬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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