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꽃천지' 위쪽은 '눈천지' 절경의 끝 나흘 기다려 오른 정상 '카스피해' 까지 보여
그 윗 자락은 하늘을 보고 누워 볼록히 솟은 쌍봉 설산이다. 몽실하게 솟은 젊은 여신의 젖가슴일까. 눈부시도록 아름답다.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낡은 국내선 일류신을 탄다. 마차보다 더 시끄럽게 덜컹거리는 소리는 차라리 참을만 하다. 기내까지 스며드는 개스 냄새에 다들 좌불안석이다. 3시간의 공포비행 끝에 미네랄리보디에 안착한다.
전용 차량편으로 5시간을 더 달린다. 최종 목적지 이트콜의 벽산계곡(2500m) 에 도착한다. 한국의 설악산초입의 설악동같은 산골이다.
"둘둘! 셋! 넷!" 다음날 아침 체조로 몸을 풀고 600m를 오르는 연습산행에 들어간다. 정상의 언저리인 체켓봉(3500m)을 왕복하는 고소적응 트레킹이 오늘의 스케줄이다. 깊은 산맥의 서늘한 바람은 이곳 한여름의 열기를 한풀 꺽는다. 송글송글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을 금새 훔친다.
상의를 훌떡 벗은 두 러시아 사병이 순찰을 멈추고 그늘에 앉아 쉬며 히덕거린다. 총따로 몸따로다. 총은 한국전 사진에서 낯익은 북한군의 따발총을 닮았다. 총을 집어들어 내 손에 쥐고 병사와 기념사진을 찍는다.
산 전체를 위와 아래로 나눠 본다. 그 아래쪽은 온갖 야생화 군락지다. 파도처럼 넘실거린다. 바람에 날리는 꽃잎은 찬란하게 하늘을 수 놓는다. 얼굴에 스치는 꽃잎이 꿈결처럼 부드럽다. 꽃냄새가 숨막힐듯 물씬하다. 한마디로 꽃천지다. 마음에 가득 담는다.
"산이 좋아 산을 닮아 산다." 평소의 그런 산마음을 닫고 방금 물든 꽃마음을 연다. 시인은 아니지만 흉내를 낸다. "꽃이좋아 꽃품에 안겨 꽃산에 머문다."
대원들은 벌써 내려가고 없다. 혼자 남아 내려갈 줄 모른다. 벌떡 일어나 훌훌 턴다. 그러나 바람이 꽃춤을 앞세워 더 머물라고 손을 잡는다. 꽃냄새도 내려가지 말라고 배낭을 당긴다. 도로 주저 앉는다. 뒤뜰의 꽃밭같은 꽃산을 벗삼아 사는 아랫마을의 주민들이 부럽다.
그 위쪽은 흰산이다. 하늘이 색깔을 바꿀때마다 쌍봉도 따라한다. 검은 구름이 덮으면 검은색 흰구름이면 흰색 안개가 끼면 회색이다. 구름 한점 없으면 태양빛이다. 해돋을녁은 금빛 해질녁은 불빛이다.
인간은 이를 보며 즐거워 하고 닮아가고 행복을 찿는다. 하늘같은 지아비와 땅같은 지어미라더니 우리네 부창부수가 이와 닮았다. '행복의 산'이라는 엘 브루즈(페르시아원어)의 본뜻을 알듯 하다.
인간에게 '행복의 산'은 신에게는 '불행의 산'이었다. 고대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프로메테우스가 제우스의 뜻을 거역하여 인간에게 불을 전파하고 쇠사슬에 묶인채 독수리에게 심장을 파 먹히는 '형벌의 산'이기도 했다.
코카서스산맥 (주봉엘 브루즈)이 알프스 산맥 (주봉 몽블랑)보다 더 나은듯 싶다. 더 아름답고 섬세하며 더 높고 깊으며 인간의 때도 덜 묻어 더 자연스런 분위기다.
엘 브루즈 등반은 셀파 포터 노새 등 짐꾼이 필요 없다. 두번의 관광 케이블카와 한번의 스키 리프트가 그 대역을 맡는다. 아자우(2200m) 에서 바렐산장(3900m)까지 짐을 나른다. 술통 모양의 바렐산장은 대피소겸 베이스캠프(BC)역할도 함께한다.
아침까지 멀쩡했던 대원들이 고소증상을 보인다. 두통을 호소하고 음식을 토하며 무기력에 빠진다. 영하로 떨어진 수은주가 계속 곤두박질한다. 짙은 구름이 꽉차 아랫쪽 꽃산을 가린다.
퓨리읏산장(4200m)을 거쳐 파츠코브(4800m)까지 이틀간의 고소적응를 끝내고 서밋데이(등정일)를 기다린다. 언제든 맑은 날이 등정일이다.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린다.
개스도 왔다 갔다 멋대로다. 하루가 지난다. 이틀을 더 보낸다. 젊거나 성급한 대원들은 웬만하면 내일 오르잔다. 자연에 순응하면 성공하고 불응하면 실패한다. 철칙을 깰 수 없다. 좀더 기다리자고 달랜다.
마침내 서밋데이다. 나흘째인 오전 2시. 스톰의 뒤끝이 잦아든다. 동틀녁 바람 한점 없다. 고개를 삐죽 내미는 태양이 쑥쑥 솟는다. 태고의 흰산을 찬란하게 물들인다. 천지를 창조하는 빛이 저랬을까. 오전 8시 동봉과 서봉이 갈리는 고갯마루(5300m)에서 잠시 쉰다.
대원 12명중 4명이 등정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렸다. 350m를 더 오르면 서봉(정상)이다. 몸이 가볍고 마음은 즐겁다. 등정을 낙관한다. 러시아인 가이드 푸틴과 농담할 정도로 여유롭다. 마지막 남은 급경사 한시간을 잘 버틴다.
마침내 정상에 올라 섰다. 동양과 서양이 나뉘고 만나는 분기점이다. 날씨는 계속 쾌청하다. 시계가 넓어 카스피해가 보인다. 흑해도 손에 잡힐 듯하다. 꺼내든 깃발들이 유럽 최고봉에 휘날린다.
# 이성인씨 7대륙 최고봉 등정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