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최고봉 매킨리(6194m 원주민들은 '디날리'라고 부름)는 난공불락의 철옹성이다. 북극에 가까운 지리적으로 천혜의 조건을 갖춘 데다 성곽조차 각종 법규와 규제로 무장됐다. 까다로운 등반조항과 함께 불문법으로 굳어진 포터 없는 등반이 그 철의 장막이다. 장빼고 포까지 빠진 공격이 쉬울 턱이 없다.
삐걱거리는 비행기타고 에베레스트보다 어려울 수 있는 흰산으로 날아 간다. 상공에서 내려다 보이는 디날리의 첫 인상은 가슴이 섬뜩한 백색의 사생화다. 그림의 윗쪽은 설벽의 난이도가 세계에서 첫째로 꼽히는 헌터봉(5300m)이 좌청룡처럼 꿈틀거린다.
아랫쪽은 기상변화를 좌지우지하는 퍼레이커봉(4500m)이 우백호처럼 으르렁댄다. 그 가운데 15마일 상단에 매킨리가 우뚝 솟아 있다. 굶주린 아가리를 딱 벌리고 먹이를 기다리는 악마처럼 드러누워 있는 흉물스런 크래바스는 소름끼치는 살풍경이다.
랜딩포인트(2200m)에 착륙한 스키 비행기의 트랩을 내리는 순간부터 흙 한줌 없는 설산등반은 시작된다.
"아자 ! 아자 !"
우리 일행 셋(대장:이성인 대원:이세중김지우)은 거푸 외친다. 하늘로 뻗어 올려 하이파이브를 하느라 맞부딪히는 스틱 소리가 힘차다. 기분좋게 첫발(스키)을 뻗어 나간다. 먼저 떠나 올라 가던 우크라이나팀이 다시 내려와 씩씩거리며 앞질러 나간다. 아랫쪽이 바른 길인 데 윗쪽으로 갔다가 되돌아오는 해프닝이다. 배낭과 썰매의 무게가 각각 30kg인데도 무거운 줄 모른다.
200m에 달하는 내리막이 신나지만 한 시간을 못 넘긴다. 다시 400m의 오르막으로 바뀌는 높이 2400m의 스키힐이 힘을 빼내고 있는 것이다. 배낭이 허리 밑을 누르고 썰매가 뒤를 당긴다. 날씨도 짓궂다.
하늘이 뚫린 듯 뙤약볕이 쏟아진다. 벌써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이마에는 맺힌 땀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화씨 90도(섭씨 32도)쯤 되는 찜통 더위다. 그러나 언제 불어 닥칠 지 모르는 영하 50도(섭씨 영하40도)의 동장군 보다 낫다.
앞에 가는 한 여성은 탱크탑 차림인 데도 헐떡인다.
대략 30도~50도 가량의 급경사로 솟아 있는 3300m의 모터 사이클힐의 밤은 있는 듯 없는 듯 짧다. 자정 넘어 어둠을 잠깐 깔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동녘을 밝힌다. 북극권의 백야를 실감한다.
스키를 벗어 눈속에 보관하고 크램폰으로 갈아 신는다.
고도 4400m의 윈디코너는 바람이 낮잠을 자는지 잠잠하다. 그 틈을 타 일행은 잽싸게 지난다. 고개를 돌려 히뜩 쳐다보니 경치가 확 트인다. 앵커리지가 발아래까지 바짝 다가 온다. 원통의 휴대용 변기를 꺼내 일을 치른다. 몸은 가벼워졌지만 변기는 묵직 해졌다.
등반루트의 심장부격인 바신캠프(4300m디날리 시티)에 발을 들여 놓는다. 의료실과 뒷간이 있는데 날씨 변화를 점치고 지쳐 거덜난 몸도 추스릴 수 있는 다목적 쉼터다. 위치까지 좋아 최고의 뷰 포인트로 꼽힌다.
왼쪽의 헌터봉과 오른쪽의 퍼레이커봉이 코 밑에 가깝다. 살풍과 얼음눈을 앞세워 몰아쳐 올 듯한 기세이지만 심술을 참는 듯 하다. 상투 끝에 머무른 흰구름이 피어 오를 듯 사라진다.
아발란체(눈사태)에다 짙은 안개와 바람(시속120마일)이 잦다는 높이 600m의 헤드 월 (최저 경사 50도)도 기세를 낮춘다. 쉽게 오른다. 헤드 월이 끝나면서 이어지는 능선도 편안하다. 양쪽 낭떠러지가 몸을 잡아 당길 듯 오금이 저려 오지만 미풍조차 없다. 디카에 설경을 담는다.
여기까지 올라 온 "너는 최고"라는 듯 우뚝 선 엄지바위가 반긴다. 순풍을 탄 새처럼 쉽게 올라온 상황이 5200m의 하이캠프에서 돌변한다.
바람에 날리는 소변이 바짓 가랑이에 묻는 순간 서리가 내린 듯 하얗게 변한다. 떨어진 기온과 기압은 둘째다. 바닥난 체력이 더 큰 문제다. 쉬는날 없이 알파인 스타일로 올라 와 누적된 피로가 화근이다.
"너희 둘이 올라가라. 나는 포기한다."
그러나 지우와 세중은 꿈쩍 않는다. 함께 오르자거니 아니라거니 좁은 텐트안에서 갑론을박하는 고성이 울먹임과 뒤섞여 반복될 뿐이다.
결론은 내일 함께 오르자는 쪽으로 가닥났다. 3일분밖에 남지 않은 부족한 식량과 기상악화 이 두 악재가 배수진을 준비하는 우리에게 오히려 호재로 바뀌었다.
짙은 개스가 끼었지만 디날리 패스도 칼날능선도 굳게 뭉친 우리의 열정에 감동을 받았는지 길을 막지 않는다. 등정의 문이 열린다. 더 나아갈 곳도 오를 곳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