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대륙에 최고봉으로 우뚝 솟은 아콩카구아(6962m)는 산자락에서부터 정상까지 분홍, 빨강, 까망등 화려한 컬러로 멋진 옷을 걸쳤다.
지층에 따른 색깔로 진하게 화장을 해서 그 눈부신 아름다움에 인간이 빨려 들듯 들어가려 하지만 좀처럼 문을 열지 않는다. 터줏대감인 바람의 신 ‘이올로’(Eolo)와 태양의 여신 ‘페보’(Febo)의 마음을 알아 내지 않고는 등정을 이룰 방법이 없다.
2006년 1월 1 일. 힘들면 내려 오라는 아내의 당부를 뒤로 남기며 신을 만나러 떠난다.
집을 떠나기 앞서 뒷뜰에서 이렇게 기원했다. “등정의 문을 열어 주소서. 열어 주시면 겸허히 들어 가겠읍니다. 닫으신다면 열릴 때까지 기다리겠습니다.”
LA발 비행기는 칠레 산티아고에서 잠시 숨을 고른 뒤 목적지 아르헨티나 멘도자에서 날개를 접는다. 포도주와 바베큐 냄새가 물씬 풍겨온다.
시간이 훌쩍 지났다. 집을 떠난 산생활이 벌써 3주째다. 정상을 코 앞에 둔 현재 시간은 20일 오후 2시. 새벽 3시에 하이캠프 (6000m)를 출발한지 11시간이 지났다. 정상까지 남은 높이는 100m 남짓한데 천릿길처럼 아득하다.
"당신은 내려가시오" 놀랄 일이 아니다. 미국인 수석 가이드의 하산 지시를 받은 이스라엘인 대원이 순순히 발길을 돌린다. 여기까지 따라온 그는 누가 봐도 무리다. 대원 11명중 4번째 하산이다. 어제 이 자리에서 스위스 원정대의 한 대원이 숨진 사실을 상기하는 듯 가이드는 시선을 바꿔 나를 째려 본다.
"You too! "
이미 짐작했던 바다. 내눈이 불같이 달아 오르고 저항의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음이 틀림없다. 나 또한 이미 하산한 대원보다 나을 게 없다. 벌써 하산했어야 할 컨디션이다.
그러나 나는 대답대신 배낭을 벗어 버린다. 꺾을 수 없는 내 의지를 읽은 듯 가이드는 앞장서 갈길을 서두른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발걸음을 내딛지만 너무 지쳐 땅에 끌린다. 거리감도 고도감도 없다. 무의식 무감각 상태다. 풀린 다리가 폭삭 무너져 고꾸라진 상태에서 숨을 고르고 있는데 불현듯 외침이 들린다.
"오른쪽이 정상이다"
정신이 번쩍 들고 힘이 불끈 솟는다. 10m쯤 남았을까. 달리듯 걷는다. 사진찍는 대원들의 즐거운 모습이 시야에 잡힌다. 정상이다. 나도 얼떨결에 찍어둔다. 그리고 잊었다. 몸이 흔들리고 가자며 깨우는 소리에 눈이 스르르 떠진다. 싸락눈이 내린다. 이미 이곳 저곳에 희끗희끗 쌓여 있다. 한동안 잠(기절)이 들었었구나.
쌓인 눈을 어림해 20분 가량 혼절한 듯 싶다. 사진을 이미 찍었는데 하얗게 잊고 또 찍는다. 값진 증명사진이다. 즐거워야 할 하산길이 오를 때 보다 낫지 않다. 풀린 다리에다 정신까지 혼미해서 반송장이 따로 없다.
뒷덜미와 양팔을 잡아주는 대원들의 도움을 받아 해질 무렵 하이캠프에 도착하자마자 비몽사몽 긴 밤을 헤맨다. 새벽녘에야 의식이 돌아 온다. 눈을 감은채 기억을 더듬는다. 또옹 바람(아콩카구아의 돌풍)에 시달린 시련이 등정의 기억보다 더 크게 클로즈업 된다.
어제 11시께 동북면(약 6500m)의 그늘진 설사면에서다. 윗쪽은 직벽이고 몇 발자국앞 아랫쪽은 낭떠러지다. 슬슬 불던 또옹바람이 전 대원을 삼킬듯 돌풍으로 돌변한다. 대원들은 누가 먼저랄 것 없이 둥글게 모여 어깨를 맞잡고 쭈그려앉아 무게 중심을 잡는다.
몸이 날리는 위기를 피했지만 앙칼진 얼음 바람의 긴 꼬리가 기세를 꺽지 않는다. 얼굴을 할퀴고 옷의 틈새 구석구석까지 파고 든다. 옆 대원이 이를 딱딱 떨고 몸도 부들부들 떤다. 나도 마찬가지다. 트위스트 추듯 마구 떤다.
바람의 신 이올라의 모습이 눈앞에 보인다면 눈치라도 살피련만 그렇지 못해 속절없다.어쨌든 어제는 25시보다 긴 하루였다.
하산을 준비하면서 발아래 펼쳐진 자연의 신비를 만끽한다. 높이마다 산빛이 또렷하다. 높이 2000m (호콘스)는 엷은 핑크 3000m (콘프렌시아)는 진한 빨강 4000m (BC)는 검붉은 색으로 층층마다 다른 특색을 보인다.
하루 일을 끝낸 뮬러(마부)들의 한바탕 놀자판도 낮의 경치 못지 않은 밤의 비경이다. 달빛에 노래가 흐르고 모닥불에 춤이 일렁이는 낭만의 현장이다.
지구 온난화는 여기도 예외는 아니다. 산 전체가 폭염에 죽어간다. 정상까지 녹아 맨땅을 드러낸 지 이미 오래다. 동면 한곳(폴리쉬루트)에 만년설이 살아 있지만 시한부 인생이다. 페니텐테스(빙석)가 광활하게 널려있는 산의 허리춤(5000m)은 눈뜨고 볼 수없는 참상을 처절하게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