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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향기] 절제하며 사세요

Los Angeles

2009.03.24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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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수 신부/성마리아 엘리자벳 성당
한국에 있을 때도 텔레비전을 통해서 가끔 오프라 윈프리의 프로를 보곤 했는데 옛날에 본 것 중에 이런 내용으로 된 프로가 기억난다.

에이즈에 걸린 청년을 등장시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 여사가 직접 그 청년에게 "자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마디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청하자 그 청년은 심각한 표정으로 정색을 하더니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얼마 후 죽게 됩니다.

젊은 20대에 죽으려고 하니 너무 괴롭습니다.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저를 좀 살려주세요…. 여러분 제발 극기하십시오.

제가 조금만 극기했더라면 이 몹쓸 병에 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발 절제하면서 사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울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에게는 '오프라 윈프리 프로' 하면 그 장면이 선하게 떠오른다.

극기로 번역되는 영어의 abstinence. 어릴 적 사순시기가 되면 성당이나 집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은 '고신극기'였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성당에 가면 수녀님이 집에 오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고신극기하고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학생이면서도 사순절 금요일에 재를 지켰다고 하면 요즈음 학생들은 놀랄지 모르겠다.

알고 보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신심이었고 육체는 더럽고 추하므로 고행을 통해 다스려야 하고 영은 고귀하다는 플라톤의 사상이 깔린 중세기 신심과 얀세니즘의 잔재가 전승된 영성이었다. 하긴 살기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교회 내적으로는 쇄신과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자는 공의회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경제적인 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70년과 80년 대를 거치면서 다소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시골에서 본당신부를 하면서 본 현상은 5일 만에 서는 장날 시장에서 사람들이 막걸리 대신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가 이런 식으로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급격하게 변해 간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어졌다. 옛날에 못 먹고 못 해본 것을 먹고 해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질적으로 좋고 풍부한 것들이 마구 쏟아지니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는 풍조가 서서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침투되기 시작했다.

사람은 본성상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어릴 때 먹지 못한 것들을 자녀들에게 막 먹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막 먹고 어른들도 먹고 마셔대니 절제나 고신극기 같은 말들이 케케묵은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옛날 중세기나 통하는 말이지 요즈음 같이 달나라 별나라 가는 시대에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식중독이나 급체 또는 비만 등으로 숨져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불멸의 영성적인 가르침은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그 중의 하나가 고신극기이다. 참살이(well-being)를 위해서 굶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루 세 끼를 먹지 않고 두 끼만 먹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배고픔을 체험해보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배고파 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절제하라"고 외치면서 에이즈로 죽어가던 그 청년의 말은 많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현대인들에게 경고의 복음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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