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께 새집다오…" 하며 모랫더미에서 놀던 때가 엊그제 같습니다. 좋은 종이가 있으면 그걸로 딱지를 접어 놀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때도 추운 겨울에 손이 터질 때까지 구슬치기를 하던 일도 진정 조금전 같은데 이제는 모두 과거의 추억속으로 흘러 가버렸습니다. 요즈음 세대는 딱지치기나 모래를 가지고 놀지 않습니다. 모두 집에서나 오락실에서 전자 게임을 하며 놉니다. 저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요즘 세대들의 자랑은 얼마나 많은 또는 새로운 게임을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겁니다. 컴퓨터가 들어온 이후로 모든 것이 급속도로 변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의 놀이도 어른들의 사이의 대화도 주고받는 명함의 내용도(e-mail address는 필수) 모든 것이 이제는 컴퓨터를 빼놓고는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중에 가장 급속도로 변화하며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단연코 '정보' 일 것입니다. 이제는 지역 차이도 상관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컴퓨터의 '정보 초고속 도로'를 통해 무수히 새로운 이제 갓 나온 모든 정보를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전엔 '정보'가 모든 것을 좌우했습니다. 누가 먼저 어떤 정보를 얼마나 가지느냐에 따라 성공과 실패가 좌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약간의 컴퓨터 지식과 인터넷만 연결되면 '정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쏟아져 들어옵니다. 하지만 이제는 정보의 '양'이 아닌 그 정보의 '활용'이 성패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정보 다 간직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정보 중에 어떤 모습으로 활용할 수 있느냐가 그것을 알고 있느냐보다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잘 알고 있는 이야기가 그것을 잘 표현해 줍니다. 한 아버지가 세 딸에게 '약간'의 돈을 주며 무엇이든지 그 돈으로 살 수 있는 것을 사와 방을 가득 채우라 명령합니다. 첫째와 둘째 모두 세상으로 나가 이것 저것 중에 골라 왔지만 결코 방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셋째는 초를 사와 불을 붙임으로 그 방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입니다. 똑같은 양의 돈을 가지고 누구는 실패했지만 누구는 성공했습니다. 그 성패를 가른 것이 '지혜'입니다. 정보의 양에 놀라고 그 동안 접하지 못했던 무수한 정보로 인해 그저 들떠있는 젊은이들을 자주 봅니다. 만나서 이야기할 때마다 그들은 배운 '새로운 지식'을 얘기합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 '새로운 지식' 못지 않게 그것을 우리들이 필요한 곳에 적시적소에 활용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기가 막힌 정보를 가지고 있다 해도 그것을 사용할수 있는 지혜가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그것은 지식과는 틀립니다. 지식이 컴퓨터를 배우고 정보를 수집하는 능력이라면 '지혜'는 그것을 현실의 필요에 따라 유용하게 활용하여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모두를 기쁘게 할 수 있는 능력입니다. 정말 이 세대는 무수한 정보의 시대를 맞이하고 있습니다. 하루가 다릅니다. 그러나 늘어나는 정보에 비해 우리의 지혜는 제자리를 맴돕니다. 지혜는 IQ와 상관없습니다. 학위와도 상관 없습니다. 진정한 지혜되신 예수와 함께 동행하며 성령으로 따라 살아가면 우리는 진정한 '지혜로운 사람'이 될수 있습니다. 지금처럼 힘들고 어려운 시기에는 더 더욱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러기에 세상에서가 아닌 우리의 지혜되신 '예수 안에서' 이 땅을 살아가는 지혜를 얻어야 겠습니다. 지혜가 진정으로 필요한 때입니다.
2009.04.07. 16:37
고난 주간을 시작한 3월을 지나 부활절이 있는 4월을 맞이합니다. 고난주간을 보낸다는 것은 예수님의 아픔을 함께 하는 시간입니다. 아픔을 겪는 것을 즐거워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픔의 훈련을 통과한 후 얻는 기쁨과 행복은 배가 된다는 것을 깨달을 때 하나님이 주신 복에 대하여 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겸손한 마음을 심게 됩니다. '자신감' 책에서 '아픔을 헤아리는 사랑'의 글이 생각납니다. "아픔을 아는 사람은 결코 남을 해치지 못한다. 아픔을 아는 사람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다. 아픔을 품어야 기쁨도 알게 되는 것이다. 아픔을 두려워 말라.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더라도 아픔을 품어라. 그것이 생명의 삶이다. 아픔을 품는 가슴 십자가를 품는 가슴에서 새 생명은 잉태되고 자라나게 된다." 주님도 절 위해 아파하셨습니다. 저는 그 사랑을 너무 오랫동안 헤메이다가 찾았습니다. 그런데 어느덧 그 초심을 잃어버리고 있는 저의 모습이 이사야 큐티 말씀 속에서 비쳐집니다. 이사야 큐티(53:4-5)를 통해 예수님께서 왜 아픔을 당하셔야만 했는지 보여주십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의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예수님의 아픔이 있었기에 지금 제가 평화를 누리고 자유하고 강건할 수 있다는 은혜를 잊고 있었기에 제 삶에서 아픔을 느낄 때 견디지 못하고 아프다고만 하나님께 투정 부렸던 모습들이 떠오릅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생명력이 없어 죽어있었던 지난 날의 저의 옛 모습이 기억납니다. 죄 때문에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저를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을 만난 축복이 지금의 나의 나된 은혜는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라"(눅 20:24) 말씀을 제 삶 속에서 경험할 때마다 아직 저에게 생명이 있어 살아 있다는 것이 새삼 감사하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죽은 자에겐 아무런 소망이 없지만 산 자에겐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저에게 생명을 주셨고 그 생명 안에 기쁨 행복 감사 이해 화목 평안을 주시기 원하시는 하나님을 생각하니 제가 육신으로나 영적으로나 아직 살아있기에 이것을 공감할 수 있고 누릴 수 있다는것이 감사합니다. 봄이 되면 죽어 있었던 나무에 꽃에 싹이 돋아나고 열매를 맺는 생명을 보게 됩니다. 자연 속에서도 하나님은 독특한 생명력을 주셔서 각자만의 '색깔'을 뽑내어 하나의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십니다. 생명이 있다는것은 '이렇게 하나님께서 저에게만 주신 독특한 '색깔'이 있는 것이구나' 깨닫습니다. 저에게 주신 '색깔'은 무엇일까? 하나님이 주신 생명력있는 '색깔'을 발하고 있는지 생각하며 제 안에 죽어가고 있던 하나님에 대한 신뢰함과 소망들이 생명력 없는 칙칙한 색깔로 주위를 어둡게 하지는 않았는지 되돌아 봅니다. 복음은 굿뉴스이기에 끝은 해피 엔딩입니다. 지금은 고난주간이지만 고난주간의 끝은 부활이 있는 기쁨이 있습니다.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고"(사 52:7) 말씀 속에 계시는 예수님께서 복음의 소식을 가지고 곧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이 아름다운 소식을 들을 때 이사야 52:9절 말씀처럼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발하여 함께 노래할찌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라고 함께 감사의 찬양을 드리는 4월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2009.04.07. 16:36
아이들이 어렸을 때 우리 가족의 영웅은 TV 속에 있었다. 큰 아이는 만화물 시리즈에 심취해 있었고 둘째는 '라이언 킹'을 보고 또 보고 싶어했다. 아내는 드라마 속의 주인공에 매료되어 있었고 나도 스포츠에 열광하고 있었다. 문제는 TV가 한 대 뿐인 것이었다. TV를 놓고 각자의 채널을 맞추기 위해 공방전이 벌어지곤 했다. 나는 아이들에게 스포츠의 정당성(?)을 강조했지만 들은 체도 안했다. 아내에게도 설득 아닌 설득을 했지만 TV를 내 것으로 독차지한 경험은 별로 없다. 그래서 당시에 생각했던 가정의 행복이란 TV 앞에 온 가족을 스포츠로 무릎을 꿇게(?)하는 것이었다. 그런 나의 거대한 꿈은 세월이 십여년 흘러 지난 달에 이루어졌다. WBC 야구경기 덕분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아내가 열광하기 시작했다. 아내는 아직도 투수와 포수를 혼동하지만 안타도 알고 홈런도 알 뿐만 아니라 어느덧 선수의 신상 파악까지 나에게 알려주는 스포츠 해설자(?)로 변신해 있었다. 아이들도 언제부터인가 'Korean'이라는 정체성이 생겼는지 일본은 이겨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드디어 온가족이 TV 앞에 스포츠로 모이게 되었다. '대~한 민국'하며 소리칠 순서만 남아 있었다. 그런데 기다려온 십여년이 무너질 만큼 엄청난 변수가 생겼다. 큰 아이가 친구를 집으로 데리고 왔는데 하필이면 일본 친구였다. 설상가상으로 우리집 TV로는 중계방송을 볼 수가 없어서 인터넷으로 생방송을 찾다가 보니 일본 방송국을 연결하게 되었고 일본말로 중계를 볼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우리는 너무나 교양있게(?) 경기를 지켜보았다. 마지막 9회말 동점을 만들었을 때는 아내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본성을 드러냈다. 연장전에서 일본이 이겼을 때 아들 친구는 혼잣말로 "Yes!" 하며 조심스럽게 기뻐했다. 우리집은 그날 '대~한 민국'이 없이 한일친선 단합대회(?)로 끝을 맺고 말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피겨 스케이트에 '김연아'가 나타나서 한 방에 홈런을 터트렸으니 한일전 코드는 시원한 대미를 장식했다. 역시 남자보다 여자인 것 같다. 나는 우리집에서 일어난 한일전의 아이러니를 생각해 보았다. 다른 곳도 아닌 우리 집이 어떻게 하다가 이런 동상이몽의 현장이 되었을까 의아했다. 고난주간을 맞아서 주님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다보니 고난의 현장에 있었던 성경도 우리에게 동상이몽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성경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예수님과 그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과 생각을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마치 개선장군의 입성처럼 묘사를 하고 있다. 그런 그에게는 칼도 빛나는 갑옷도 승리의 월계관과 명마도 없었다. 대신 그저 소수의 무리가 환호하며 종려가지를 꺾어서 흔들었을 뿐이었고 나귀새끼를 타고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입성하셨다. 그런데도 예수님의 태도는 전혀 달랐다. 눅19장에 보면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라고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호산나"를 외치는 무리들을 책망하라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눅19:40)고 말씀하셨다. 혹독한 고난과 십자가의 길을 가시는 예수님의 그런 당당함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그 이유는 비록 죽음의 길이라 할지라도 그의 앞에는 '부활'이라는 진정한 영광의 승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영웅의 칭호는 승리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가족의 진정한 영웅은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신 예수님 한분이시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2009.04.07. 16:35
하와이 군도의 몰로카이 섬에서 선교사로 사시다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신 다미안 신부님이 생각난다. 700여명의 나환자들은 자기들에게 온 백인 신부를 별로 달갑지 않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자기들을 위하여 좋은 일을 하고 가정방문을 하면서 위로해주어도 시큰둥하게 대하기 일쑤였다. 신부님은 의사가 부족한 그 지역에서 직접 나병환자들을 돌보기 시작했다. 고름도 짜주고 붕대로 상처를 감아주기도 하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관을 짜주며 묘지를 파주기도 했다. 그 분의 헌신적인 삶을 보고 전보다는 약간 가까워졌지만 여전히 친구는 되지 못하고 어딘지 모르게 틈이 있다는 느낌을 받으며 지냈다. 그런 식으로 6~7년간 지난 어느 날 신부님은 놀라운 일을 경험했다. 사람들이 지난 날보다 더 정답게 자기에게 다가오며 가까워진 것을 느낀 것이다. 의아해하면서도 그 이유를 모르고 있던 신부님은 쉽게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복도를 지나가다가 벽에 걸려 있던 거울을 우연히 보게 되었는데 거울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을 보았을 때 알게 된 것이다. 자기의 얼굴이 찌그러지고 코가 비틀어진 나병환자가 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바로 이거로구나. 나도 이 사람들과 같이 나병환자가 되었구나. 얼굴이 찢어지니 이들의 친구가 될 수 있구나! 이젠 손가락 발가락도 떨어져 나가겠지." 이런 헌신적인 선교사를 기려 그 지역 주민들은 그가 귀천한 후 동상을 세워 "벗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바친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라는 성경 말씀을 써붙였고 교회는 그분의 헌신적인 선교정신과 희생정신을 기려 복자품위에 올렸으며 올 10월에는 로마에서 성인으로 추대할 것이라고 한다. 다미안 신부님의 생애를 보면서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성경 말씀을 떠올린다. 이 말씀은 어느 시대 어느 누구에게나 적절한 말씀이다. 가정과 직장 어느 단체든 자기를 희생하고 봉사하며 헌신하는 정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정에서는 서로 희생하고 봉사하는 삶이 대단히 중요하므로 늘 강조해야 한다. 안중근(토마스) 의사와 같은 독립투사들을 생각해 본다. 자신의 목숨을 아까워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민족을 위해 헌신한 애국자들이 있었기에 오늘의 우리나라가 있지 않은가? 순교자들도 마찬가지다. 그분들이 흘린 고귀한 피는 결코 헛되지 않아 그리스도인들에게 신앙의 씨앗이 되고 있다. 하지만 요즈음은 성공을 위하여 각자 주체가 되라고 주장한다. 누구에게 종속되지 말고 자기를 드러내야 성공한다고들 한다. 일리가 있지만 이런 주장만 하면 우리 사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최고의 가치인 사랑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희생과 봉사가 반드시 함께한다. 가족을 사랑하는 엄마는 남편과 아이들을 위하여 희생 봉사한다. 어머니의 의무가 아니라 사랑의 행위인 것이다. 요즈음 이런 말을 들을 때가 있다. 여성들은 성공하는 비결은 배웠을지 몰라도 엄마와 부인 가정주부로서 해야 하는 일에는 무지하며 남성들도 특히 전통적으로 가부장적인 사고를 지닌 우리나라 남성들은 사회에서 성공하고 출세하는 것은 잘 배울지 몰라도 가정에 헌신하고 희생하는 것에는 우둔하다고들 한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아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라는 말씀은 성서적으로는 일차적으로 예수님의 삶을 이야기하지만 우리 모두에게도 적절하고 필요한 말씀이라 이를 수용하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때 우리 사회가 조금씩 더 밝아지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2009.04.07. 16:33
한국 불교를 세계에 널리 알리신 숭산 스님의 이야기다. 스님께서 오래 전에 한국의 어느 작은 절에 계시면서 절 살림을 맡아 하실 땐데 대중들의 공양에 쓰려고 창고에 보관하고 있던 날두부가 밤마다 한 모씩 없어지는 것이었다. 문을 꼭꼭 걸어 잠갔을 뿐만 아니라 두부 따위를 훔쳐 갈 사람이 있을 법도 않은 한적한 시골 절간인데도 불구하고 두부는 날마다 사라지는 것이었다.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이에 스님은 귀신이든 도둑이든 꼭 잡고야 말겠다고 다짐하고 초저녁부터 남몰래 잠복에 들어갔다. 바깥으로 자물쇠를 채워 겉보기에 감쪽같은 창고에 숨어 들어간 스님은 어스레한 구석 물건 더미 사이에 몸을 숨기고는 숨소리도 죽인 채 시간을 흘려보냈다. 날이 어두워지고 캄캄한 밤이 된 뒤에도 끈질기게 기다렸지만 적막 속에 아무 일도 없었다. 이윽고 시간이 흘러 한밤중이 지났다. 그런데 어느 순간 뭔가 작고 검은 물체가 환기통을 통해 벽을 타고 들어오더니 두부를 물에 채워 담가 놓은 깊고 큰 독의 전두리에 자리를 잡는 것이었다. 어렴풋이 새어 드는 달빛 속에 눈을 부릅뜨고 자세히 보니 고양이였다. 고양이는 물 속의 두부를 노려보았다. 십 분이 흐르고 한 시간이 흐르고 고양이는 꼼짝 않고 물 속을 노려보고 스님은 어둠 속에서 고양이를 노려보았다. 이러고도 한참 후 마침내 눈 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믿거나 말거나! 물 속의 두부 한 모가 스르르 표면을 향해 떠오르는 것이었다. 고양이는 잽싸게 이 두부를 앞발로 건져내더니 게 눈 감추듯 맛있게 잡수시고는 귀신같이 휙 환기통을 통해 사라지는 것이었다. 내일 밤을 기약하면서. 이 이야기를 실제 일어난 사실로 믿고 말고는 각자의 판단이고 자유다. 의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분 그럴 수도 있겠다고 믿는 쪽으로 기우는 분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코웃음 치는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만약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라 훌륭하신 큰스님에 얽힌 얘기니까 무조건 믿어야 한다거나 버젓이 책에 쓰여 있으니까 믿어야 한다는 쪽으로만 몰고 간다면 곤란하다. 그것은 이 좋은 이야기의 초점을 흩뜨려 가르침의 본질을 벗어나 쓸데없는 곁가지를 뻗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이런 곁가지가 너무 무성하여 본줄기가 잘 안 보이는 종교도 있고 그런 곁가지에만 매달려 그 속에 파묻혀 사는 종교인들도 많다. 노상 무슨 기적이니 영험이니 뭐가 보이거나 들린다느니 어디에 뭐가 나타났다느니 하는 것 만으로 밥 먹고 사는 이들이다. 아닌 게 아니라 나도 조금 염려는 된다. 설마 위의 이야기를 읽고는 두부 한 모 건져 먹으려고 몇 시간이나 물 속을 들여다보고 있는 분은 없으시겠지? 하지만 장담 못하겠다. 세상에는 황당한 일도 많으니까. 이를테면 죽은 가족의 시체가 다시 살아날 것으로 믿고 침상에 몇 날이고 뉘여 놓았다든지 병 고쳐 준다면서 다 죽어 가는 사람 더욱 두들겨 패는 분들이라든지. 이제 가르침의 본줄기를 찾아 가자. 이 고양이 얘기의 본질이랄까 이게 만약 국어 시간의 독해 시험 문제라면 설문의 주제 해답은 무엇일까? 내가 채점자라면 정신력의 위대함 정신집중의 불가사의한 강렬함이라고 쓴 답안에 높은 점수를 줄 것이다. 그리고 고양이도 하는데 사람이 왜 못하랴? 무슨 중대하고 소중한 일을 앞두고 내 마음이 어지러워 갈피를 못 잡을 때 떠올리고 다짐해야 할 선명한 참조사항이 될 것이다.
2009.04.07. 16:29
나는 야구경기를 통해서 많은 기쁨과 감동을 누려왔다. 내가 초등학교 2학년때인 1982년은 야구팬으로서 잊을 수 없던 해였다.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서울 잠실구장에서 했던 관계로 강남에 살았던 나는 직접 야구장을 찾아가 미국과 한국의 경기를 관람할 수가 있었고 지금은 감독인 선동렬선수가 미국의 타자들을 상대로 10개가 넘는 삼진아웃을 잡아내는 빼어난 피칭을 보며 감탄했었다. 서로 가장 좋은 기록을 가진 두 팀이 결승전을 치르게 되어 있었는데 그때 상대는 공교롭게도 일본이었다. 1-2로 지고 있었던 8회에 우리나라는 그라운드의 여우라고 소문난 김재박 선수의 일명 '개구리 번트'로 2-2동점을 만들었고 한대화 선수의 3점 홈런으로 8회가 시작하기 전 0-2로 지고있던 경기를 5-2 단숨에 역전하게 되어 한국이 처음으로 대회에서 우승하게 된다. 그때 얼마나 열광하고 난리를 쳤던지 아직도 그때의 감동이 생생하다. 마침 그해에 내가 응원하고 회원으로 가입되어 있던 OB 베어즈가 원년 프로야구에서 우승을 하게 됨으로 나는 야구의 묘미에 빠져들게 되었다. 1991년에 나는 캐나다 토론토로 가게 되었다. 유학을 떠나면서도 드는 걱정이 아 거기 가면 어떻게 한국프로야구를 볼 수 있을까였다. 친구 얘기가 거기 가면 메이저 리그라는 야구가 있기 때문에 괜찮을 거라고 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곳 토론토를 연고지로 하는 토론토 블루제이스 야구팀의 광팬이 되었다. 1992년에는 블루제이스 야구팀이 팀 역사상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월드 시리즈에서 우승하게 되었다. 그때의 분위기는 정말로 굉장했다. 토론토 모든 사람들이 다 길거리로 뛰쳐나오고 서로 포옹하고 교통은 마비가 되고 각 곳에서 폭죽을 터트리고…그런 모습은 처음 경험했었다. 1993년에는 또 토론토 팀이 월드시리즈에서 우승을 해서 그 어렵다는 2회 연속 우승을했다. 이번에는 9회말 1아웃에 3점 홈런을 쳐서 역전승으로 이긴 경기였다. 나는 그 게임은 다 졌다고 생각을 하고 아 내일 있는 마지막 경기에서 결판이 나는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역시 야구는 9회말 부터라는 말을 실감케하는 경기였다. 그날 나는 너무 기뻐서 친구 집에서 야구 이야기를 하며 밤 늦게 잠을 이루지 못했었다. 1999년에는 미국으로 오게 되었고 내가 사는 애나하임을 연고로 하는 에인젤스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이 에인젤스팀은 2002년에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월드 시리즈를 우승하게 되었다. 그때도 여섯번째 게임에서 8회에 0-5로 지고 있다가 역전해서 6-5로 이기게 되었고 그 여세를 몰아 7차전 경기에서 승리해서 우승을 했다. 이 애나하임에 사는 사람들은 야구를 얘기하면 그때를 기억하며 아직도 즐거워한다. 그래서 나는 이번 WBC에서 한국이 결승전을 올라갔을 때 이런 경험에 비추어보아 꼭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응원하는 팀들은 꼭 이렇게 역전의 드라마를 쓰면서 이기는 것을 경험한 그 기억이 생생해서 이번에도 아마 8회나 9회에 역전을 해서 우승을 하리라 믿었다. 정말 9회말에 한점에 그치지 않고 2점을 내서 정말 드라마같이 거기서 이겼다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아직도 생각을 한다. 김인식 감독님이 이날 저녁 잠을 주무시지 못하셨다는 것처럼 나도 너무 아쉬워서 게임 후에 말을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잠도 한참동안 뒤척이며 잘 수 없었다. 2주동안 WBC야구를 지켜봤던 나에게 그들은 나도 할 수 있다는 희망과 한번 해보자라는 자신감과 대한사람이라는 자랑스러움을 일깨워 주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맙고 감사했던지. 내가 우리 선수들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듯이 하나님께서 나를 하나님의 야구 선수로 자랑스러워 하셨으면 좋겠다. 때로는 내야 땅볼로 플라이로 삼진으로 병살로 아웃이 될 때도 있고 게임에 질 때도 있지만 이용규 선수처럼 몸에 공을 맞더라도 도루하다가 헬멧이 으스러질 지라도 최선을 다하는 그 모습으로 하나님께 감동을 드리는 그분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그런 삶을 살아드리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2009.03.31. 16:50
작년 이 맘 때쯤 어떤 장로님 내외 분의 초청으로 '수정교회'(Cristal Cathedral)에서 하는 부활절 연극 'The Glory of Easter'를 관람하러 갔었습니다. 잘 짜여진 이야기 구성과 속도감 있는 진행 방식이 돋보이는 연극이었습니다. 중간 중간에 독창을 부르는 솔로들의 풍부한 성량(Volume of Voice)도 좋았고 길게 길게 잘 빠진 무용수들의 춤 솜씨도 일색이었습니다. 모두가 이 분야에 전문가들이라는 것을 한 눈에 알 수 있었습니다. 연극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두 인물이 있었는데 한 사람은 '헤롯'이었고 또 다른 사람은 '빌라도'였습니다. 모두가 뚱뚱했습니다. 제 기억에 가장 뚱뚱한 순으로 악역을 맡긴 것 같습니다. 예전에 어느 미국 교회에서 큰 규모의 부활절 연극을 하는데 예수님의 역을 맡은 사람이 한 몸집 하는 분이었습니다. 워낙 노래도 잘하고 목소리가 좋아서 그런대로 봐 줄만 했는데 마지막 장면에서 십자가에 달릴 때 엄청나게 우람한 배(?)가 흘러 내리는 바람에 근엄해야 할 순간이 한편의 희곡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수정교회에서 했던 연극에서는 뚱뚱한 빌라도와 헤롯의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웠습니다. 그들이 뚱뚱하면 할수록 그들의 탐욕스럽고 퇴폐적인 모습이 잘 묻어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여배우들을 품에 안고 희희낙락하는 헤롯의 모습이 너무도 행복해 보였습니다. "원래 저런 사람아냐?"하는 소리가 입에서 저절로 흘러 나왔습니다. 문득 제 자신을 되돌아 보았습니다. LA로 부임해오면서 체중이 참 많이 불어 났습니다. 주변의 지인들과 성도님들의 사랑을 무차별하게(?) 즐긴 결과입니다. 훗날 이 LA 지역의 목사님들로 구성된 연극팀을 만들게 된다면 "나는 무슨 역이 어울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빌라도'나 '헤롯'일 수 밖에 없겠다는 위기의식이 들었습니다. 뚱뚱하면 천사도 될 수 없습니다. 와이어에 매달릴 수도 없을 테니 말입니다. 중간중간에 말을 타고 등장하는 로마 병사들은 모두 마른 사람들이었습니다. 뚱뚱한 사람들은 밑에서 칼과 창을 들고 걸어 다녔습니다. "덜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습니다. 중세 시대에 수도사들에게 여러가지 죄의 덕목이 있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살이 찌는 것'이었습니다. 많은 사람들과 나누어야 할 음식을 혼자서 다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연극의 마지막 부분에서 예수님이 상의가 벗겨진 채 채찍에 맞는데 앙상하게 마른 모습이 예수님의 역할에 잘 어울렸습니다. "그래 예수는 마를수록 좋네!"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몸도 잘 가꾸고 매사에 절제하는 것이 우리 신앙인들이 신경써야 할 중요한 덕목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번 부활절 연극에는 어떤 인물들이 배역을 맡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2009.03.31. 16:49
현대인에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단어 중에 하나가 비전(Vision)이나 꿈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대한 비전을 갖는 것이 위대한 과업을 성취하는 가장 기본적인 일이다. 그래서 비전은 희망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지만 모든 비전이 다 이루어 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있다. 비전이 이루어지는 확률이 로토 당첨 확률보다 낮다고 생각되어서 그런지 비전을 가꾸어 가는 사람보다 로토를 구입하는 사람들이 더 많아 보인다. 범죄 심리학에 '깨진 유리창 이론(Broken Window Theory)'이 있다. '스탠포드 교도소 실험'으로 유명한 필립 짐바르도교수가 1969년에 실행한 흥미로운 실험에서 시작된 이론이다. 실험의 내용은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 상태가 비슷한 자동차 2대의 후드(Hood)를 열어둔 채 일주일 동안 방치해 두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자동차 한 대는 고의적으로 창문을 조금 깬 상태로 놓아두었다. 일주일 후 깨진 창문의 작은 차이는 자동차의 보존 상태에 큰 차이를 나타냈다. 창문를 깨지 않은 자동차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지만 창문이 깨진 자동차는 그렇지 않았다. 방치된지 10분만에 배터리를 도난 당하고 타이어도 잇따라 없어졌다. 일주일 후에는 완전히 폐차 상태로 고철이 되어있었다. 건물에 깨진 유리창을 그대로 방치하면 사람들이 건물의 다른 유리창도 깨고 나중에는 그 건물에서 절도나 강도 같은 중범죄가 일어날 확률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미미한 사회악을 방치하면 중범도 쉽게 저지르는 심리로 발전할 수 있다는 이론이다. 세계적인 도시로 알려진 뉴욕은 1990년 중반까지도 이미지에 걸맞지 않게 강력범죄로 시달리고 있었다. 뉴욕을 안전한 도시로 만들려고 역대 시장들은 무던히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였다. 1994년 뉴욕 시장에 당선된 루돌프 줄리아니는 대대적인 범죄소탕을 시작했다. 줄리아니 시장은 경찰을 증원하였다. 그리고 강도나 살인 마약관련 사건과 같은 강력범죄가 아닌 경범죄를 단속하였다. 자신이 취임 때 "빨간불일 때 횡단보도를 건너는 사람을 막을 수 없다면 강도도 막을 수 없다"고 말한 것을 지킨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었지만 줄리아니 시장이 취임시 2000건에 달하던 살인사건이 2001년 퇴임 시에는 650건를 넘지 않았고 줄리아니는 뉴욕을 안전한 도시로 만든 영웅이 되었다. 크리스천들은 하나님이 주신 위대한 비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작고 사소한 일은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택시 운전사가 들어가기를 거부하는 뉴욕 빈민촌에 위치한 메트로 교회의 빌 윌슨 목사는 자신의 저서인 "이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가?(Whose child is this?)"에서 자신은 하나님의 음성도 들어본 적이 없고 하나님이 환상도 본 적이 없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누군가 빈민촌에 버려진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필요를 보았기 때문에 어려운 지역에서 목회를 한다고 했다. 빌 윌슨 목사가 본 작은 필요가 2만명의 어린이들이 허름한 창고에서 예배드리는 메트로 교회로 출석하고 있다. 어려운 상황을 극복하려면 비전을 가져야 한다. 위대한 비전은 어려움을 극복하는데 반드시 필요한 희망을 준다. 비전은 고통을 잊게하는 진통제와 같다. 비전이 미래의 현실을 보는 능력인 동시에 현재의 필요를 보는 능력이다. 줄리아니 시장이 안전한 뉴욕도시를 꿈꾸며 현재 필요한 작은 법을 지키게 한 것 처럼 우리도 하나님이 주신 꿈을 꾸며 삶 속에 일어나는 사소한 일을 신실하게 대해야 한다. 하나님이 칭찬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사소한 일을 위대하게 할 때가 아닌가 생각된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찌어다." (마 25:23)
2009.03.31. 16:48
산세가 수려한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에서 5년 간 본당신부를 한 적이 있었다. 가은이라 하면 삼국시대에는 상주군에 속했지만 일제 시대에 문경군으로 편입되었다. 행정 구역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역은 산 좋고 물 좋은 아름다운 고장일 뿐 아니라 풍수지리로도 좋은 곳이라 걸출한 인물들이 출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후백제를 세운 견훤 장군이 태어난 곳이며 그의 태를 묻었다고 하여 왕릉 1리 2리 3리 4리란 행정 구역명도 생겨났을 정도이다. 거기서 시오리쯤 북쪽으로 올라가면 유명한 사찰 봉암사가 자리하고 있다. 불교의 스님들이 참선하는 곳인데 역사가 깊어 신라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거기서 많은 도사들이 출현했다. 워낙 산세가 수려하여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풍수들이 이곳을 지나다가 장차 우수한 인재들이 날 것을 우려하여 봉의 부리처럼 튀어나온 바위(봉암)를 잘라버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 곳에는 봉암사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삼십리쯤 북쪽으로 가면 문경읍이 나오는데 북쪽으로는 문경새재가 있어 1관문 2관문 3관문으로 이어지는 등산로가 있어 산책하기에 무척 좋은 곳이다. 나는 그 곳에 살면서 예전에 알지 못했던 등산의 가치를 깊게 알 수 있었다. 좀 귀한 손님들이 오면 문경새재로 안내하여 함께 산책을 하기도 했다. 요즈음은 사극 드라마를 위해 마련된 신라궁 백제궁 고려궁이 세워져 있어 역사 탐방의 장소가 되기도 하여 사방에서 사람들이 몰려들기도 한다. 어느 날 손님들과 그 곳을 오르다 보니 서울에서 왔다면서 중학생들 백오십여명이 산을 오르고 있었다. 모두들 뚱뚱했다. 왠 일일까? 뚱뚱한 중학생들이 여기 와서 산을 오르니 서울 근교에도 산이 많은데? 학생들은 이십명씩 조를 지어 오르고 있었는데 각 조마다 빨간 모자를 쓴 20대 젊은이들이 학생들의 등산을 지도하고 있었다. 빨간 모자를 보니 군 복무시절 유격훈련을 받을 때의 조교들이 생각났다. 심한 기압을 주던 그 조교들 생각만 해도 진저리가 나는 사람들이다. 맨 뒤에는 선생님들이 이야기를 하면서 따라가고 있었다. 십 킬로미터 쯤 올라갔다가 내려오면서 주차장에 들리니 대형 버스 3대가 있었다. 알고 보니 학생들을 태우고 온 버스들이었다. 차 앞뒤에는 극기 훈련원이라는 표시가 붙어 있었다. 오오라 극기 훈련원에서 뚱뚱한 아이들을 태우고는 등반하기 좋은 이곳에 와서 아이들을 훈련시키는구나. 그러니 뚱뚱한 학생들의 부모들이 극기 훈련원에 돈을 내고는 우리 아이 좀 날씬하게 해주십시오 라고 부탁하는 곳이 극기 훈련원이로구나. 극기가 좋긴 좋은 모양이다. 극기는 뚱뚱한 아이도 날씬하게 만드니 얼마나 좋은가? 성인병은 원래 어른들이 걸린다는 병으로 알고 있었는데 요즈음은 그 증세가 아이들에게도 그대로 일어난다고 한다. 덜 먹고 덜 마시기 운동을 할 필요가 있다. 천주교회는 예수님의 부활 대축일을 앞두고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면서 극기하라고 권고한다. 너무 많이 먹어 뚱뚱해진 몸을 날씬하게 하여 병에 걸리지 않으려고 자녀들을 극기 훈련원에 보내면 돈이 든다. 하긴 그래야 극기 훈련원도 살 수 있으니 할 말은 없지만 다른 어느 시대보다도 요즈음은 절제와 극기가 요구되는 시대다. 건강하게 살기 위하여 덜 먹어 배고파 보는 것과 주님의 십자가에 동참하려고 배고파 보는 것은 배가 고프다는 점에서는 같으나 그 의미와 정신에 있어서는 상호 큰 차이가 있다. 후자의 정신은 진정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순수한 동기로 신앙을 키우고 은총을 받는 수단이 되리라.
2009.03.31. 16:47
일미진중함시방 일체진중역여시(一微塵中含十方 一切塵中亦如是). 하나의 티끌 작은 속에 우주를 머금었고 모든 티끌마다 우주가 가득하네.(의상대사 게송 청화대종사 번역.) 신라시대 의상대사(625~702)는 속성은 김씨이고 일찍이 출가하여 수행하다가 당나라의 불교가 왕성함을 듣고 650년 청년의 나이에 원효와 함께 중국으로 구법차 가던 중에 요동에서 원효는 무덤 사이에서 해골에 고인 물을 마시고 유심(唯心) 즉 만법(萬法)은 오직 마음에 있다는 도리를 깨닫고 되돌아 왔으나 의상스님은 당나라에 가서 662년 종남산 지상사 지엄화상에게서 현수(顯首)와 함께 황엄경을 연구하여 드디어 불성을 체득하고 신라에 돌아왔다. 조그만 먼지 하나가 우주를 삼켰다. 그런데 무량무수로 많은 그 먼지 모두가 또한 그러하다. 이 말씀을 유물론적으로 해석하고자 하면 언어도단이고 도저히 이해가 안가는 것이다. 먼지라고 하면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금진(金塵)이나 전자 양성자 원자도 모두 먼지라 할 수 있는 것인데 이러한 작은 알갱이들이 어떻게 우주를 삼켜버린단 말인가. 그러나 이것은 법계의 자연 순환 법칙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우주의 생성소멸은 무에서 시작하여 인연 따라 만유가 존재하므로 시원으로부터 발흥의 원리를 분석하고 물질이 아닌 우주 법계의 진리가 먼지 하나의 속에도 담겨있고 또한 모든 먼지도 이와 같아서 먼지의 이치를 깨치면 우주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무량원겁즉일념 일념즉시무량겁( 無量遠劫卽一念 一念卽是無量劫)도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크고 작고 멀고 가까움의 차이가 없는 이치와 방불한 것이다. 우주는 빈틈도 없이 불성으로 가득차 있는 것인데 만상이 불성으로 이루어진 것이다. 나도 너도 불성으로 되었다. 이 도리만 알면 지금 바로 부처인 것이다. 만약 불성(부처)을 증득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이 도리를 확연히 믿어서 알기만 하면 이 깨침을 해오(解悟)라 한다.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셋 모두 차별이 없이 일미평등한 것이다. 인간이 일생동안 살아가면서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고 건강하고자 하나 병이 들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들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은 모든 것을 개체로서 분별해서 보기 때문이다. 너와 나를 부처로서 하나로 보고 화합을 하면 시비와 분쟁도 없어지는 것이다. 즉 우리의 본래 면목이 바로 아미타불이요 마음이 청정하면 현실 세계 그대로 극락세계이나 따로 구할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실상의 본체를 여의치 않고 가행정진을 하게 되면 부처님의 광명 지혜가 바로 나타나고 업장이 녹아져서 그대로 정토요 매사 마음대로 여의주를 얻게 되는 것이다. 광명 앞에서는 칠흑 같은 어둠이 사라지고 진리 앞에서는 미혹과 질병이 없어지는 법이다. 불성을 바로 보아 정진을 하게 되면 억지로 구하지 않아도 얻어지고 건강과 행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되는 것이다. 참으로 있지도 않은 것 잠시간 있는 듯하다가 없어지는 그 따위 물질 때문에 우주의 주인인 우리 마음을 상하게 해서야 되겠는가. 항상 마음으로 만족함을 알고 천지 우주는 나와 더불어서 둘이 아닌 도리를 알면 이곳이 바로 극락정토인 것이다.
2009.03.31. 16:43
중국 마조(馬祖.709~788)선사의 문하에 대매(大梅)라는 제자가 있었죠. 처음 마조 선사를 만났을 때 대매가 물었습니다. "무엇이 부처입니까?" 마조 선사가 대답했죠.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다." 대매는 홀로 깊은 산속으로 들어갔죠. 그리고 스승의 가르침을 안고 참선에 들었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죠. 마조 선사는 대매에게 사람을 보냈습니다. '제자의 공부'를 떠보기 위함이었죠. 그 사람이 대매를 만나 물었습니다. "스님은 누구의 제자입니까?" "마조 선사요" "마조 선사의 문하에서 무엇을 배웠습니까?" "단 한 마디 '마음이 부처'라고 하셨소." "거참 이상하군요. 요즘 마조 선사는 '마음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다(非心非佛)'라고 가르치고 있거든요." 그러자 대매가 소리를 버럭 질렀죠. "아니 그 늙은이가 아직도 죽지 않고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구나. 그래도 나는 '마음이 곧 부처(卽心卽佛)'다." 이 얘기를 들은 마조 선사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죠. 그리고 제자들을 모아 놓고 말했죠. "매실이 다 익었으니 그대들은 가서 마음껏 따먹도록 하라." 복잡한가요? '마음'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 있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마음 없는 마음'이죠. '마음 있는 마음'은 열이면 열 '형상'을 붙들고 있죠. 그 속에는 '형상'에 대한 집착 '형상에 대한 바람 '형상'에 대한 욕망이 있죠. 그래서 '형상' 안에서만 맴돕니다. '형상' 너머를 못 보는 거죠. 그래서 '부처'가 보이질 않습니다. '부처'는 늘 형상 너머에 있으니까요. 그럼 '마음 없는 마음'은 어떨까요? 그 마음은 '형상'을 붙들지 않죠. 오히려 '형상'을 여의죠. 그래서 '형상' 너머가 보이죠. 그곳에 흐르는 '부처'가 보이죠. 그래서 마음이 곧 부처 즉심즉불(卽心卽佛)이 되는 겁니다. 반면 마음 있는 마음은 '비심비불(非心非佛)'이 되는 거죠. 사람들은 절에 가서 절을 하죠. 삼배도 하고 백팔배도 하고 삼천배도 하죠. 하지만 따져보세요. '나는 어디를 향해 기도를 하는가'. 집착과 바람을 향하는가 아니면 마음 없는 마음을 향하는가. 나의 기도가 '형상'을 향하는가 아니면 '본질'을 향하는가 살펴봐야죠. 기독교에선 '우상(偶像)'을 섬기지 말라'고 합니다. '우상'이란 게 뭔가요. 이교도의 숱한 상징만이 '우상'인가요. 천만에요. '형상'으로 붙들고 있는 내 안의 신이 바로 '우상'이죠. 나무나 돌로 빚어야만 '우상'이 아닙니다. 내가 만든 예수 내가 빚은 부처가 바로 '우상'이죠. '우상'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예수 내 마음의 부처도 '우상'일 수 있는 거죠. 예수님은 "나는 알파요(시작) 오메가(끝)"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알파 이전의 예수 오메가 이후의 예수를 찾아야죠. 부모미생전(父母未生前 부모로부터 몸 받기 전)의 부처를 찾아야죠. 원래부터 있던 예수 본래부터 있던 부처를 찾아야죠. 왜냐고요? 거기에만 생명이 있기 때문이죠. 모든 '우상'은 박제에 불과하죠. 숨을 쉬지 않죠. 생명이 없으니까요. 그래서 따져보고 짚어봐야죠. 내 안의 예수가 숨을 쉬나 내 안의 부처가 살아있나. 바로 '지금 여기'서 말이죠.
2009.03.31. 16:39
내 일도 아니면서 참담한 마음입니다. 욕망의 끝을 보는 것같습니다.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화가 나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조차도 충분치 못했는지 한 의원은 "경영진은 사과한 뒤 물러나거나 자살하거나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한다"며 직격탄을 날렸습니다. 보험사 AIG 이야기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연말에 무려 184억 달러의 보너스 잔치를 벌인 월스트릿에 분노하고 있더 차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AIG가 1800억 달러의 정부의 구제 금융을 받고 마치 수술대 위에서 링겔 주사를 꽂고 누워있는 주제에 1억6000만 달러의 보너스 잔치를 벌린 것입니다. 이 사건은 그렇지 않아도 들끓던 국민의 여론에 기름을 붓는 격이 된 것입니다. 최고로 많이 받은 사람이 640만불 100만 달러를 받은 직원만 73명이라니 기가 막힐 일입니다. 1800억 1억6000만 640만 100만 이것이 얼만큼의 돈인지 우리네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그저 숫자에 불과해서 우리의 귀를 마비시킵니다. 문제가 더 심각한 것는 이번 보너스 파동이 AIG로 끝나지 않는다는데 있습니다. 자동차회사들 이번 경제위기의 주범인 페니멕과 프레드메이 모기지 회사들이 정부 보조금으로 보너스 잔치를 계획 중이라는데 있습니다. 도무지 부끄러움을 모릅니다. 우리는 부끄러움을 아는 마음을 '염치'라고 합니다. 이 염치는 법이나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양심의 발로입니다. 보너스 파동의 당사자들은 몰염치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없다더니 오늘 우리가 탐욕에 사로잡힌 인간이 어디까지 떨어질 수 있는지를 목격하고 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신뢰가 가지 않는 자본주의(그렇다고 제가 공산주의자는 아닙니다)에 더 절망하게 됩니다. 그나마 지금의 자본주의는 따뜻함을 잃어버린 천민 자본주의요 타락한 자본주의입니다. 미국의 자본주의는 지금 탐욕의 구덩이에 빠진 고삐풀린 망아지 같습니다. 약간의 우월적인 지위와 능력이 보상에서는 엄청난 차이로 작용하는 승자독식 사회는 결코 건강하지 않습니다. 찰스 디킨스의 '크리스마스 캐롤'에 보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지하실로부터 쇠사슬을 끄는 소리가 들리며 구두쇠 스쿠루지 앞에 옛 친구 마아리의 유령이 나타납니다. 그의 전신에서는 무덤의 냄새가 나고 허리에는 긴 쇠사슬을 칭칭 감고 있었습니다. 이런 그가 스크루지에게 말합니다. "친구여. 내 허리에 칭칭 감은 이 쇠사슬을 누가 만들었는지 아는가? 바로 날세. 내가 세상 살아있는 동안 이 쇠사슬 한 고리 한 고리씩 만든 걸세." 이 시대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얽어 메고 있는 욕망에 사로잡혀 정신없이 살고 있습니다. 입술로야 그럴듯한 변명을 둘러대지만 그것은 욕망의 발톱을 가리는 것일 뿐 본질을 들여다 보면 전적으로 남들은 어떠든지 나만 잘 살면 된다는 놀라운 이기주의의 발로입니다. 그러한 사람은 욕망이라는 쇠줄로 한고리 한고리 쇠사슬을 만들고 또 그것을 자신의 몸에 칭칭 동여메고 있는 것입니다. 이번의 경제난에서 우리 사회가 '탐욕'에 대해 교훈받지 못하면 절망입니다. 이대로는 안됩니다. 변해야 합니다. 그리고 제 생각으로는 특별히 그리스도인들에게 변화를 이끌 책무가 주어졌다고 생각합니다. 더 따뜻하게 더 나누며 더 사랑이 있는 그런 사회로 말입니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수도사 성 프란체스코는 일생동안 "내 주여 나의 전부여!" 하는 이 한마디를 항상 읊으며 지내다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고 합니다. 마음 속에 탐욕이 일어날 때마다 길을 걸을 때마다 그리고 무시로 되뇌였다는 그의 이 말은 오늘날 더욱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습니다. 본성이야 누구나 차이가 없겠지만 우리는 본성을 이기는 사람이 됩시다.
2009.03.24. 15:42
한국과 미주 한인 사회에서는 최근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이 화제의 이벤트가 됐다. WBC는 야구 월드컵이다. WBC는 축구 월드컵보다 전 세계적인 관심도와 집중력이 덜한 편이지만 적어도 한국인들에게는 중요한 행사로 여겨진다. 필자의 지인은 이 대회를 참관하기 위해 한국 직장에서 휴가를 내고 미국에 왔을 정도다. WBC는 왜 한국인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가 생각해 보았다.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야구가 인기 스포츠이기 때문에 몇 달 동안 언론에서 집중적으로 보도했기 때문에 일본과 맞대결이 자주 있기 때문에 등 여러 이유가 있다. 필자는 WBC와 스토리 텔링(Storytelling)을 연관지어 생각해 보았다. 스토리텔링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이야기하기'이다. 이야기를 하는 자를 스토리텔러(Storyteller)라고 할 수 있다. 스토리텔링과 WBC는 무슨 연관이 있다는 말인가. WBC에는 단순히 승패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승패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있다. '봉중근 의사와 이치로 히로부미'와 같은 말이 생산되고 사람들의 입에 회자된다. 야구를 싫어하는 사람이 아니라면 WBC를 둘러싼 이야기가 대화를 이끌어가는 '꺼리'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얼마 전 방문했던 교회에서는 설교자가 설교 중에 WBC 이야기를 하며 '한국을 위해 기도해달라'고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이야기했는데 청중들은 이 말에 잠시 웃을 기회가 있었다. 이처럼 WBC에는 공통으로 관심 있는 이야기가 있기에 사람들이 더욱 집중을 하는 것이다. 교회 미래학자인 레너드 스윗은 "경험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능력은 철저하게 종교적인 문제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우리는 이야기를 풀어냄으로써 경험을 조직화한다"고 덧붙였다. WBC와 스윗이 한 말을 연관짓는다면 세계 야구 대회에서의 경험이 이야기로 펼쳐질 때 이는 종교적인 요소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야구가 좋은 게 아니라 어떤 종교적인 면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몰두한다고 볼 수 있다. '봉중근 의사와 이치로 이로부미'라는 말은 바로 어떤 경험이 이야기로 풀어내어진 것이고 사람들은 이런 표현을 듣고 보면서 희열을 느낀다. 요즘 한국과 미주 한인 사회에서 불고 있는 또 다른 대중문화적 현상은 바로 소녀시대와 최양락 신드롬이다. 소녀시대는 9명의 10대 후반 20대 초반의 여성들로 구성된 음악그룹으로 그들이 부른 'Gee'라는 노래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다. 왜 소녀시대와 Gee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고 있을까. WBC처럼 여러 이유가 있다. 소녀시대의 멤버들이 귀엽고 노래도 잘하고 예의도 바르고 등등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필자의 아내는 "TV에 자주 나오니까 그렇지"라고 나름대로 분석했다. 다 맞는 말이다. 이를 스토리 텔링의 관점으로 본다면 흥미롭다. 9명의 '소녀'들은 각자가 다양한 경험이 있다. 그들이 토크쇼나 인터뷰에서 쏟아내는 말들은 지겹지가 않고 신선하다. 9명이기 때문에 이야기가 더욱 신선하게 들린다. 계속 새로운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기에 이들은 더욱 자주 TV출연을 하게 되는 것이다. 표현이 거칠지 않고 담백하면서도 솔직하기 때문에 그들의 이야기는 멈춰지지 않는 것이다. 같은 이야기를 여기저기서 써먹으면 금세 지겹지만 소녀시대는 새로운 이야기를 연일 쏟아내기에 TV만 켜도 소녀시대가 나온다는 말을 들으면서도 거의 신드롬을 일으키는 수준까지 이르게 됐다. 최양락이라는 80~90년대에 인기 있었던 개그맨이 최근 '황제의 귀환'이라는 타이틀로 복귀하면서 놀라운 인기를 끌게 된 것도 그의 '스토리 텔링'이 신선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요즘 젊은이들에게는 그가 쏟아내는 말들이 새롭게 느껴진다. 성경도 사실 이야기로 구성됐다. 도덕경전이 아니라 피조물의 희로애락을 담은 이야기들을 모은 책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서 했던 것들은 주로 스토리텔링이었다. 하나님 나라 하나님의 성품 그리고 그의 뜻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인간의 근본을 다루는 스토리텔링이었기에 그의 복음은 지금까지도 사람들 사이에 읽혀지고 있는 것이다. 스토리는 사람들을 끄는 힘이 있다. 종교적이기 때문이다. 그 스토리를 어떤 관점으로 어떤 정착지로 이끌고 갈 것인가는 스토리텔러와 청중의 마음과 뜻에 달려 있다.
2009.03.24. 15:41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호텔의 분수쇼는 참 아름답습니다. 단 전기가 흐를 동안만 그렇습니다. 물기둥이 공중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누군가 공급해주는 에너지를 태워야만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폭포는 반대입니다. 자신의 높은 위치를 잃고 떨어지는 모습은 항상 장관입니다. 폭포수같이 떨어지는 물들은 큰 에너지를 발산합니다. 바위를 쪼개기도 하고 굉음을 내기도 하며 발전기를 돌리기도 합니다. 낙차가 크면 클수록 즉 자신의 위치 에너지를 잃는 폭이 크면 클수록 주변에 더 큰 에너지를 뿌려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기로 했으면서도 더 갖길 원하고 더 높아지길 원합니다. 병고침을 받고 남보다 성공해야 하나님의 복을 받는 것처럼 여깁니다. 항상 에너지를 필요로 합니다. 그래서 결핍을 놓고 기도합니다. 만족이 있을 수 없습니다. 혹이라도 병고침 때문에 예수님을 믿은 사람은 암에 걸리면 예수님을 버리기 쉽습니다. 성공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실패하면 예수님을 원망하기 쉽습니다. 설교자들의 웅변이나 논리로 설득되어 예수를 믿기로 한 자들은 다른 명쾌한 설명을 만나면 주님 믿는 논리를 버릴 것입니다. 결국 세상에서 사람을 모으기에 효과적으로 보이는 성공 신학은 오히려 예수님의 영광을 가리고 있으며 복음을 변질시키고 있습니다. 존 파이퍼는 말했습니다. "번영의 신학은 아무도 예수님 앞에 무릎꿇게 못한다." 복음이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가졌던 때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였습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과 함께 기쁘게 고난받는 길 자신의 삶을 버리는 길을 택했습니다. 사자굴에 넣었는데 찬양하며 찢겨 죽어갔습니다. 돌로 때려 죽이는데 두 손을 벌리며 순교하는 그들의 모습이 천사같았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크리스천들을 통해 십자가의 자기부인과 부활의 신앙고백을 보았고 심지어 그들을 경외하기까지 했습니다. 이 때 엄청난 복음의 에너지를 세상에 내뿜었습니다. 12명의 제자들이 한결같이 고문당하고 유배받고 순교해 갔지만 세상은 그들로 인해 흔들렸습니다. 얼마나 성공하는가보다는 얼마나 죽느냐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세상은 암에서 고침받은 것으로 주님앞에 경배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암중에서도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면 세상은 십자가 앞에 굴복하게 될 것입니다. 사순절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은 온 우주에서 가장 크게 낮아지신 분이십니다. 하나님의 보좌를 버리고 인간으로 세상에 오셨습니다. 우리가 회복되는 것을 기대하시며 고난을 참으셨습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죄없이 죽으셨습니다. 그렇게 낮아지심으로 온 우주가 구원받을 수 있는 에너지 죄사함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 분 안에 항상 흘러넘친 폭포수의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나타났으면 합니다.
2009.03.24. 15:41
한국에 있을 때도 텔레비전을 통해서 가끔 오프라 윈프리의 프로를 보곤 했는데 옛날에 본 것 중에 이런 내용으로 된 프로가 기억난다. 에이즈에 걸린 청년을 등장시켜 사람들과 대화를 나눈 후 마지막으로 사회자인 오프라 윈프리 여사가 직접 그 청년에게 "자 이제 시간이 다 되어 갑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한 마디만 해주시면 고맙겠습니다"라고 청하자 그 청년은 심각한 표정으로 정색을 하더니 이렇게 말문을 열었다. "저는 얼마 후 죽게 됩니다. 젊은 20대에 죽으려고 하니 너무 괴롭습니다. 저는 더 살고 싶습니다. 저를 좀 살려주세요…. 여러분 제발 극기하십시오. 제가 조금만 극기했더라면 이 몹쓸 병에 걸리지는 않았을 겁니다. 제발 절제하면서 사십시오…"라고 말하고는 울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에게는 '오프라 윈프리 프로' 하면 그 장면이 선하게 떠오른다. 극기로 번역되는 영어의 abstinence. 어릴 적 사순시기가 되면 성당이나 집에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말은 '고신극기'였다.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면서도 성당에 가면 수녀님이 집에 오면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고신극기하고 참고 인내하라는 것이었다. 매주 금요일 저녁마다 십자가의 길 기도에 참여하는 것은 물론이고 중학생이면서도 사순절 금요일에 재를 지켰다고 하면 요즈음 학생들은 놀랄지 모르겠다. 알고 보면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신심이었고 육체는 더럽고 추하므로 고행을 통해 다스려야 하고 영은 고귀하다는 플라톤의 사상이 깔린 중세기 신심과 얀세니즘의 잔재가 전승된 영성이었다. 하긴 살기 어려웠던 우리나라의 사회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분위기였다. 그러다가 교회 내적으로는 쇄신과 시대의 징표를 파악하자는 공의회의 바람이 일기 시작했고 경제적인 성장과 더불어 우리나라는 70년과 80년 대를 거치면서 다소 윤택한 삶을 누리게 되었다. 시골에서 본당신부를 하면서 본 현상은 5일 만에 서는 장날 시장에서 사람들이 막걸리 대신 맥주를 마시는 것이었다.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라는 구호가 이런 식으로 현실화되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급격하게 변해 간 우리나라는 농경사회에서 산업사회로 바뀌어졌다. 옛날에 못 먹고 못 해본 것을 먹고 해보는 시대가 된 것이다. 물질적으로 좋고 풍부한 것들이 마구 쏟아지니 먹고 마시고 놀고 즐기자는 풍조가 서서히 우리나라 사람들의 생활에 침투되기 시작했다. 사람은 본성상 누구나 편안한 것을 좋아하기 마련이다. 어른들은 자기들이 어릴 때 먹지 못한 것들을 자녀들에게 막 먹이기 시작했다. 아이들도 막 먹고 어른들도 먹고 마셔대니 절제나 고신극기 같은 말들이 케케묵은 것으로 들릴 수밖에 없었다. 옛날 중세기나 통하는 말이지 요즈음 같이 달나라 별나라 가는 시대에는 필요 없다는 생각이 만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식중독이나 급체 또는 비만 등으로 숨져가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불멸의 영성적인 가르침은 빛을 발하기 마련이다. 그 중의 하나가 고신극기이다. 참살이(well-being)를 위해서 굶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하루 세 끼를 먹지 않고 두 끼만 먹는 사람들이 많아진 것이다. 주님의 수난에 동참하기 위하여 배고픔을 체험해보는 것이 아니라 더 오래 살기 위해서 배고파 보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이런 의미에서 "절제하라"고 외치면서 에이즈로 죽어가던 그 청년의 말은 많이 먹고 마시며 즐기는 현대인들에게 경고의 복음이 아닐까?
2009.03.24. 15:40
태고사를 지으신 무량 스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한 때 무량 스님을 도와 태고사를 짓는 일을 하던 미국인이 있었다. 이 분은 갖가지 공사일을 할 줄 아는 핸디맨이면서 골프 선수였는데 성적은 신통찮아서 대회 참가비도 잘 못 건지는 수준이었다고 한다. 스님과 함께 여러 날 동안 땅파기 돌쌓기 배관 목공 등 잡다한 일들을 닥치는 대로 하면서 시합을 기다렸는데 날짜가 다가오자 점차 초조함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이를 본 스님이 늘 관세음보살을 염하라고 권하였고 이를 따라 계속해 보니 과연 마음이 차차 안정되고 하던 일도 다시 손에 제대로 잡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번 시합은 안정 속에서 좀 더 나은 성적을 올릴 것이라고 내심 기대하였다. 그런데 무슨 영문일까? 막상 차를 몰고 시합장으로 가는 도중에 갑자기 관세음보살이라는 명호가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이건가 저건가 아무리 입 밖으로 소리를 내어 보고 생각을 굴려 봐도 도무지 잡히지가 않고 입 안에서만 뱅뱅 돌 뿐이었다. 이것 참 큰일이구나 하고 다시 마음이 흔들리는데 문득 코카콜라라는 말이 떠올랐다. 아닌 것은 알겠지만 상당히 비슷한 것도 같아서 꿩 대신 닭이라고 에라 모르겠다 코카콜라라도 염송하자고 그 순간부터 마음 속으로 줄곧 코카콜라만 열심히 불렀다고 한다. 마음이 곧바로 평정을 되찾았음은 물론이요 근래에 보기 드문 성적을 올려 얼마간의 상금도 탔다던가. 사실 우리가 관세음보살 또는 관음보살님이라고 부르는 이 분은 그 이름이나 부르는 소리도 만들어 놓은 형상도 시대나 나라에 따라 갖가지이다. 중국에서는 콴인이며 일본 발음으로는 캉옹이다. 일본 카메라인 캐논이 본래 관음에서 따온 말이라는 것을 아시는가? 범어로는 아발로키테슈바라 보디사트바인데 중국에서 그 뜻과 소리를 한자로 옮겨 관세음보살 또는 관자재보살이 되었다. 세상의 온갖 괴로운 소리를 다 굽어 살피시는 보살님 지극한 마음으로 부르면 그 목소리 가운데 나타나 고난에서 구해주시는 거룩하신 보살님이시다. 화려함 속의 외로움 가족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어제의 외톨이 핸디맨이 알록달록 근심걱정 하나 없어 뵈는 군중의 주시 속에 외로이 버티고 서서 당신을 간절히 부르고 있는 파란 잔디밭. 어찌 굽어보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님은 언제 이 세상에 왔다 가신 분일까? 부처님의 십대제자에도 그런 이름은 없던데? 없을 수밖에 없다. 그 분은 역사상의 또 다른 인물이 아니라 우리 신앙의 대상인 부처님 자신이며 분신이기 때문이다. 관세음보살님이 구제의 화신이라면 아미타 부처님은 내세에 우리를 서방정토로 인도하시는 화신이며 미륵보살님은 훗날 이 세상에 재림하시는 화신 지장보살님은 우리를 대신해 지금도 지옥 고통을 스스로 받고 계시는 부처님의 화신이다. 분업이요 역할 분담이다. 이렇듯 여럿이 하나이고 하나가 여럿인 부처님의 화신들에 대해 아신다면 불교는 종교가 아니라 철학이라느니 자력신앙일 뿐이라느니 다신교에다 우상숭배라느니 하는 설익은 언사를 함부로 내뱉기가 부끄러울 것이다. 그렇다면 관세음보살님은 언제 어떻게 우리를 건져 주시는가? 아무 조건도 없다. 누구든 현재 처한 그 자리에서 한 생각으로 간절히 그 분을 부르기만 하면 된다. 설사 일시적으로 그 이름이 헷갈려 코카콜라 보살님이 될지라도.
2009.03.24. 15:37
성경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너희는 땅끝에 이르기까지 나의 증인이 되리라(사도행전 1장8절).' 개신교에서 '나의 증인이 된다'는 말은 '복음을 전한다'는 뜻으로 풀이되죠. 이 말은 해외 선교사들이 두고두고 가슴에 새기는 구절입니다. 그래서 이슬람권이든 아프리카 오지든 몸을 사리지 않고 달려갑니다. 최근에 만난 한 목사님은 "선교사들에게 이 구절은 선교에 관한 절대적인 지침"이라고 설명하더군요. 그런데 저는 궁금합니다. '땅끝'의 의미가 과연 뭘까. 사도행전을 쓸 때는 어땠을까. 당시에는 땅이 어떻게 생겼다고 봤을까. 네모였을까 아니면 동그라미였을까. 그리고 당시 사람들이 봤던 '땅끝'은 과연 어느 나라 어느 지방쯤이었을까.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실 때 완전하게 만드셨죠. 무엇 하나 보탤 것도 무엇 하나 뺄 것도 없이 온전하게 만드셨죠. 들판의 나무 길가의 돌 그 위를 지나는 바람까지 '완전한 존재'였겠죠. 인간도 마찬가지죠. 아담과 이브도 그렇게 완전한 존재였겠죠. 그런데 '선악과'를 따먹는 순간 달라졌죠. 아담과 이브만 '불완전한 존재'가 되고 만 거죠. 죄를 아니까요. 이후 인류의 역사에서 인간은 계속 '불완전한 존재'로 머물고 있죠. 나무도 돌도 바람도 하나님이 만드신 그대로인데 '인간'만 달라진 거죠. 주 기도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하늘은 어떤 곳일까요. 완전한 곳이겠죠. 그럼 땅은요. 불완전한 곳입니다. 그래서 하늘의 뜻을 땅에서도 이루어달라고 인간이 그토록 절절하게 기도를 하는 거겠죠. 그럼 '땅'은 어디일까요. 우리가 딛고 선 이 지구의 지층만 '땅'일까요. 육지와 바다로 된 이 세상만 '땅'일까요. '땅'은 불완전한 공간 불완전한 존재죠. 그래서 저는 '인간'이 바로 '땅'이 아닐까 싶네요. 아담과 이브의 후신인 '나의 몸'과 '나의 마음'이 바로 '땅'이 아닐까 싶네요. 그럼 '땅끝까지 복음을 전하라'에는 또 다른 의미가 담기죠. 인간의 몸은 약 80조 개의 세포로 이뤄져 있다고 합니다. 그 세포 하나하나에 '선악과의 흔적'이 남아 있죠. 나도 모르는 잠재의식의 그 밑바닥에 욕망과 집착의 뿌리가 남아 있죠. 그럼 '땅끝'은 어디가 될까요. '나'에게서 가장 멀리 '나'속에서 가장 깊이 숨어 있는 '마지막 불완전함'이 바로 땅끝이겠죠. 그게 '나'라는 '땅'의 끝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다시 짚어봐야죠. 지구의 땅 끝뿐 아니라 태양계 너머 아니 은하계 너머 이교도의 땅을 찾아가는 목숨 거는 선교를 한다 해도 '내 안의 땅끝'에 닿지 못한다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예수님은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고 하셨죠. '내 안의 땅끝'에 복음이 흐르지 못한다면 결코 예수님 안에 거할 수도 없겠죠. 마태복음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마태복음 16장19절).' 산상설교에는 이런 구절도 있죠.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복음 5장5절).' 예수님을 만나는 곳 그건 '지구상의 땅끝'이 아니라 '내 안의 땅끝'이 아닐까요.
2009.03.24. 15: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