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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향기] 용서하고 화해를 청한 사람들 (2)

Los Angeles

2009.05.19 16: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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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달수 신부/성마리아 엘리자벳성당
인간은 누구나 진심으로 자신을 비워 본심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알게 된다. 인간이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자신의 과오를 알지 못한다. 깜깜한 밤에 저지른 실수는 물론이고 밝은 대낮에 행한 과오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일쑤다.

그러나 자신을 알게 될 때 순수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변화된 삶 바로 그것은 사랑의 삶으로 드러난다.

사랑! 사랑의 나무에는 뉘우침과 용서와 관용의 꽃이 피고 화해의 열매가 맺힌다.

여기 소개하는 한 그리스도인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상적으로 실천하여 우리에게 큰 모범을 남기신 분이다.

그분은 운석 장면(요한) 박사다. 그분의 생애를 읽으면서 본인은 그분의 관대한 마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준 용서의 미덕을 보고 한 번 더 고개가 숙여졌다. 60대 이후의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잘도 기억할 것이다.

본인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릴 때 어른들이 외치던 그 구호를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잘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은 언급하지 않겠다.

장면 박사가 1956년 8월 15일 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 조금 지난 9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에 의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 그 날 민주당 전당 대회가 있었는데 복도를 걸어가던 장면 박사를 향해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김상붕이라는 자가 총을 쏘았으나 다행히 왼쪽 손에 관통상만 입히고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를 포함한 서울 성동 경찰서의 사찰계 형사주임 이덕신과 최훈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다음 해 11월 1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장면 박사는 그 다음 날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감형을 요청했고 후에 국무총리가 된 뒤에는 감형시켜 주었다.

세월이 한 참 지난 1965년 7월 27일 사형수 최훈은 장면 박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구구절절 참회와 감사 그리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후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한편 저격범 김상붕은 30년이 지난 후 장면 박사의 자제 천주교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님을 만나 이렇게 증언했다. "저에게 저격을 사주했던 그 사람들은 당시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 당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당의 이승만 박사가 당선되고 부통령으로서는 야당 출신의 장면 박사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박사는 그 때 80이 넘었는데 주치의들의 말이 3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거였습니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그 권한을 승계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만의 하나 대권이 야당으로 넘어갈까 두려워 한 겁니다."

그 배후에는 그 당시 실력자 이기붕이 있었다. 제 2 공화국 국무총리 시절 장면 박사는 1960년 12월 12일 저격범 김상붕을 교도소로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그는 회심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실히 살아가다가 1987년 목사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했다. 이와 같이 관용과 뉘우침 그리고 용서의 꽃은 아름다운 화해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용서와 화해는 본심으로 돌아간 인간이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인간의 삶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용자와 고용인 상사와 부하 직원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미움과 싸움이 아니라 뉘우침 용서 관용 화해로 드러나면 불의가 정의로 죄인이 의인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전쟁이 평화로 시기 질투의 공동체가 친교가 넘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화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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