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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의 향기] 용서하고 화해를 청한 사람들 (2)

인간은 누구나 진심으로 자신을 비워 본심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알게 된다. 인간이 탐욕으로 눈이 어두워지면 자신의 과오를 알지 못한다. 깜깜한 밤에 저지른 실수는 물론이고 밝은 대낮에 행한 과오도 깨닫지 못하고 살아가기 일쑤다. 그러나 자신을 알게 될 때 순수한 본성으로 돌아가게 되는데 그 때는 놀라운 변화가 일어난다. 즉 변화된 삶 바로 그것은 사랑의 삶으로 드러난다. 사랑! 사랑의 나무에는 뉘우침과 용서와 관용의 꽃이 피고 화해의 열매가 맺힌다. 여기 소개하는 한 그리스도인도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상적으로 실천하여 우리에게 큰 모범을 남기신 분이다. 그분은 운석 장면(요한) 박사다. 그분의 생애를 읽으면서 본인은 그분의 관대한 마음과 그리스도인으로서 보여준 용서의 미덕을 보고 한 번 더 고개가 숙여졌다. 60대 이후의 사람들은 우리 역사에서 "못 살겠다 갈아보자"라는 구호를 잘도 기억할 것이다. 본인도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릴 때 어른들이 외치던 그 구호를 5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잘도 기억하고 있다. 그 당시 정치적 상황은 언급하지 않겠다. 장면 박사가 1956년 8월 15일 부통령에 취임한 지 한 달 조금 지난 9월 28일 이승만 대통령의 자유당 정권에 의한 암살 기도가 있었다. 그 날 민주당 전당 대회가 있었는데 복도를 걸어가던 장면 박사를 향해 자유당의 사주를 받은 김상붕이라는 자가 총을 쏘았으나 다행히 왼쪽 손에 관통상만 입히고 그 자리에서 붙잡히고 말았다. 그를 포함한 서울 성동 경찰서의 사찰계 형사주임 이덕신과 최훈 등은 사형선고를 받았고 그 다음 해 11월 1일 사형이 확정되었다. 이 소식을 접한 장면 박사는 그 다음 날 대통령에게 서신을 보내어 그들의 감형을 요청했고 후에 국무총리가 된 뒤에는 감형시켜 주었다. 세월이 한 참 지난 1965년 7월 27일 사형수 최훈은 장면 박사에게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편지의 내용은 구구절절 참회와 감사 그리고 새 사람이 되겠다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 후 그는 천주교 신자가 되었다. 한편 저격범 김상붕은 30년이 지난 후 장면 박사의 자제 천주교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님을 만나 이렇게 증언했다. "저에게 저격을 사주했던 그 사람들은 당시 새도 떨어뜨릴 만큼 권세 당당한 위치에 있었습니다. 그들은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 위기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여당의 이승만 박사가 당선되고 부통령으로서는 야당 출신의 장면 박사가 당선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박사는 그 때 80이 넘었는데 주치의들의 말이 3년을 넘기기가 힘들다는 거였습니다. 당시 헌법에는 대통령의 유고 시 부통령이 그 권한을 승계 한다고 명시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만의 하나 대권이 야당으로 넘어갈까 두려워 한 겁니다." 그 배후에는 그 당시 실력자 이기붕이 있었다. 제 2 공화국 국무총리 시절 장면 박사는 1960년 12월 12일 저격범 김상붕을 교도소로 찾아가서 그의 잘못을 용서해 주었다. 그는 회심하여 새로운 사람이 되었고 개신교 신자가 되어 성실히 살아가다가 1987년 목사가 되어 하느님의 일을 했다. 이와 같이 관용과 뉘우침 그리고 용서의 꽃은 아름다운 화해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용서와 화해는 본심으로 돌아간 인간이면 누구나 실천해야 할 덕목이다. 인간의 삶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용자와 고용인 상사와 부하 직원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는 갈등은 미움과 싸움이 아니라 뉘우침 용서 관용 화해로 드러나면 불의가 정의로 죄인이 의인으로 미움이 사랑으로 전쟁이 평화로 시기 질투의 공동체가 친교가 넘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변화될 것이다.

2009.05.19. 16:56

[신앙의 샘] 경외함이 넘치는 부부!

만약 에덴 동산에서 아담 혼자 살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날마다 무질서한 삶과 밤마다 외로움에 헐떡이지 않았을까요? 씻지 않은 남자의 쾨쾨한 냄새에 가장 눈살을 찌푸린 건 아마도 코가 가장 긴 코끼리이었을 것입니다. 어쨌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아담이 딱해 보였던지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신부 하와를 보내주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예수님도 결혼식에 참석하는 것을 기뻐하셨으니까요. 예수님은 가나에 있었던 결혼식에서 물을 포도주로 만드셔서 새로운 가정의 출발을 축복해 주셨습니다(요 2:1-11). 바울은 어떻고요. 비록 독신이었지만 바울도 가정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는 부부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해주었습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엡 5:21). 천국 가정의 핵심은 주님을 경외함입니다. 결혼 생활의 제일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건강한 부부생활의 핵심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할 때 남편은 아내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서로 복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경외하는 자연적인 결과는 서로 복종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경외한다는 뜻은 무엇일까요? 경외란 "떨며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그러나 단순히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을 사랑하고 기뻐하면서 두려워해야 합니다. 시편 2편 11절에서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분의 임재 가운데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것이 바로 '경외'입니다. 아브라함은 75세 때 아들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그리고 100세가 돼서야 아들 이삭을 얻게 됩니다. 무려 25년이라는 시간을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니 아들 이삭이 얼마나 귀했겠어요. 이때 하나님은 그의 아들 이삭을 번제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청첩병력 같은 말씀을 들었지만 아브라함은 말씀에 순종해 이삭을 모리아 산에서 번제로 바치려는 순간 여호와의 사자의 목소리를 그에게 들립니다.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창 22:12) 우리가 기억해야 할 사실은 아브라함을 시험했던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도 시험하신 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을 경외함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해야 아내는 남편에게 복종할 수 있으면 남편은 아내를 목숨을 다해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2009.05.12. 15:45

[기독교인의 삶] 작은 천국인 가정

가정의 달(5월)을 보내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가정은 어떤 것일까? 생각해보며 그림을 그려봅니다. 지난 주일 설교 말씀 중 아내의 역활은 바로 '키워주는 것 그리고 안식을 제공하는 것' 이라는 말씀을 들으면서 가정은 키워가고 안식을 줄 수 있는 작은 천국임을 깨닫습니다. 아무리 좋은 곳을 여행 갔다왔을지라도 집에 들어오는 순간 집이 너무나 편하고 좋았던 기억은 누구에게나 다 있을 겁니다. 가정은 이렇게 쉼과 힘을 공급해주는 하나님이 주신 작은 천국과 같은 안식처입니다. 매주 주일날은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쉼을 누리며 힘을 공급받습니다. 예배를 통해 영혼이 소생하는 기쁨을 누리며 식어져갔던 사랑이 소망이 다시 회복되는 은혜를 경험합니다. 늘 말씀은 새롭지만 제 영혼이 기쁨의 힘을 얻을때를 생각하면 조금은 지쳐있었던 저의 모습일때가 많습니다. 그때 제 마음의 빈 잔에 하나님의 은혜가 채워질때의 기쁨은 하나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고 채움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매번 경험합니다. 분주한 일상 생활속에서 하나님께서 안식일을 정하신 이유를 생각하면 '잠시 멈추지 않고 쉼을 누리지 못하면 우리의 영혼은 쉽게 메마르고 고갈되기 때문'이라는 깨달음을 갖습니다. 영혼의 안식처는 하나님의 성전이고 하나님의 성전 안에서 쉼을 얻고 힘을 공급받는 즐거운 날이 안식일임을 깨닫습니다. 쉼을 얻으면 힘을 얻습니다. 힘은 모든 것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돕는 원동력이고 그 힘의 근원은 바로 하나님안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얼마 전 이사야 큐티 말씀을 통해 '쉼' 이라는 단어를 묵상합니다.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사 58;13)말씀 하듯이 하나님과 가정 안에서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인간은 쉼을 통해 힘을 공급받아야 하는 연약한 존재로 지은바 되었지만 가장 강한 사람은 하나님과 연합하는 사람이라 합니다. 연합한다는 의미는 동맹을 맺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동맹을 맺을 때 하나님께로 공급을 받기에 강한 사람이 된다는 목사님 말씀을 통해 깨달음이 더 해갑니다. 그렇듯이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아내와 남편이 서로 연합할 때 힘을 얻습니다. '너희는 오라 잊어버리지 아니할 영영한 언약으로 여호와와 연합하자' (렘 50:5) 먼저 하나님과 연합하고 하나님께서 짝지어주신 베필과 연합하는 가정을 하나님께서 지켜주심을 믿습니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결혼을 하지만 왜 많은 가정들이 가정을 지키지 못할까 질문을 해봅니다. 저는 인간의 사랑과 노력만으론 한계에 부딪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성품속에 담긴 축복' 책에서 '외모와 재산으로 결혼은 성사될지 모르나 결혼을 유지시키는 것은 성품이다' 라고 말합니다. 우리에게 구원을 주신 하나님의 목적은 천국에 가는것만이 아니라 그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의 성품을 닮아가는 것(벧후 1:4)입니다. 행복한 가정이란 불화가 없는 것이 아니라 불화.갈등을 극복하므로 성숙해나가는 사랑을 이루는 곳입니다. 무너진 가정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십자가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성품이 지켜줄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어떤 가정에서 태어나느냐보다 어떤 가족을 이루느냐가 중요하다'라는 '링 라드너'의 글처럼 가정에 대한 아름다운 꿈을 포기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가정에 대한 꿈을 포기 하지 않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식을 주시는 이유는 쉼을 누리며 힘을 공급받아 가정을 키워나가 작은 천국들이 이 땅 곳곳에 세워지길 바라시기 때문이라 저는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가정이 소중하듯이 저에게도 가정은 소중합니다. 소중한 것을 지키기는 쉽지 않지만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의 씨앗으로 심고 가꾸어 간다면 그 가정을 자라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심(고전 3:6)을 믿습니다. 아직은 이루어지지 않은 소박하면서도 아름다운 가정에 대한 꿈을 위해 저는 기도하며 기대합니다.

2009.05.12. 15:45

[특별 기고] 이란 땅의 꼬레 새색시! 내 딸!

"엄마! 난 S(이란 청년) 말고는 시집이란 것 절대 안 가." 30대 중반을 훌쩍 넘고 요즈음 세상 흔하디 흔한 유학파 노처녀의 고집스럽고 단호한 말에 얘가 제 정신인가? 지금 미국하고 이란이 어떤 관계인데 하필이면 적대국가 악의 축에 속하는 나라이니 대사관도 없고 비자도 워싱턴DC의 파키스탄 대사관이 대행할 정도에 종교.언어.문화.풍습이 완전히 다른 이슬람 국가에 시집을 가다니…. 30여년 전 "딸 낳고 저렇게 좋아하는 산모는 처음 봐" 내뱉는 간호원의 소리가 지금도 쟁쟁한데 더구나 까다로운 아빠가 그렇게 예뻐하고 믿었기에 어려운 영국에 유학도 시켰는데…. 영국 청년 미국 청년도 아닌 그 힘든 국가의 청년이라니? 너무나 어려운 고비가 많을 텐데. 그때부터 나는 다시 기도하고 매달리고 딸애는 고민하다가 두번씩 쓰러지고 911까지 부르면서 딸하고 울고 웃고 하기를 1년. 하나 밖에 없는 딸이 왜 그렇게 힘든 사랑을 하나? 결국 이런 걱정은 국경 없는 사랑 앞에는 허공의 메아리일 뿐이었다. 이런 딸의 사랑 스토리도 제일 가까운 어미인 내가 이제야 알았다. 영국에서 공부(페르시안 미술사전공)를 마치고 옥스퍼드 대학 박물관 큐레이터로 근무하면서 2년 전 이란에 리서치 갔다 만나 사랑을 키우고 프로포즈를 받고 아들만 넷인 신랑 집안의 허락을 받았다. 딸의 말처럼 하나님의 허락까지 받았다니 속수무책일 수 밖에 없었다. 더구나 딸은 이란 문화와 언어에 도통할 정도로 열심을 냈으니 사랑의 교류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고 신랑을 가르쳐 "어머니 고마워요. 결혼 허락해 주셔서 진짜 고맙습니다"하고 또렷하게 전화로 말하니 두손을 들 수 밖에 없었다. 과연 이란 땅 그곳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기독교식으로 결혼식을 올릴 수 있을까. 하나님의 기적은 이미 일어나고 있었다. 워싱턴 DC 파키스탄 대사관에서 우리 부부의 이란 비자가 한달 만에 허락되었고 결혼절차 하나하나에 기적과 감사가 저절로 입에서 나올 수 밖에 없었다. LA공항에서 러시아 비행기로 모스크바를 거쳐 이란 테헤란 공항에 23시간 만에 도착하니 신랑형제 4형제가 다 환영 나왔으니 우리나라 옛 공항 모습을 떠올려 한치도 낯설지 않은 마음을 갖고 시댁에 도착하니 웬 가족이 그렇게 많은지. '살람 살람(Salam Salam)'하고 서로 껴안고 세번씩 스킨십 인사하고 나니 이란 말 못해도 바디 랭기지가 그렇게 효과가 있는지. 사람은 어디나 다 인정이 똑같은가 보다. 2주 후 결혼식까지 딸 시부모와 같이 생활하는데 그쪽 사람들 손님 대접은 끝내준다더니 정말 수시로 과일 티 이란 음식등 대접받고 나는 그들의 생활상의 기초언어 등을 수첩에 적어 그대로 간간히 말하면 배꼽을 빼고 웃어 좋아하는 그들과 정을 많이 나누고 드디어 아무 문제없이 테헤란에 있는 한인교회(이란교회를 빌려씀)에서 결혼 예배를 드렸다. 드디어 이란의 전통 결혼식이 저녁 늦게 시작되어 교회 가든에 꽃 장식 레드카펫 손님 테이블 피로연 음식 등 화려한 이란의 노출된 이브닝 드레스에 나는 너무나 깜짝 놀랐다. 밖에 나갈 때 쓰는 히잡은 온데간데 없고 파티할 때는 너무나 화려하게 춤추고 웃고 개방된 모습에 그 옛날 페르시아 제국의 화려했던 문화의 후예다운 전통에 내 마음은 왠지 안심이 되고 호기심으로 가득해졌다. 분홍 한복 입은 색시엄마 나도 이란의 매력 넘치는 전통음악에 맞추어 같이 팔을 흔들며 춤을 추며 분위기를 맞췄고 결혼식은 무사히 끝내게 되었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한 마음을 하나님께 진실로 진실로 드릴 수 밖에 없었다. "내 딸아 부디부디 S와의 모든 벽을 잘 허물고 잘 살아라! 페르시아 왕자같이 착하고 잘 생겼다고 인물만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께서 믿음 좋고 지혜로운 너를 이란 땅에 보내실 때는 무슨 큰 뜻이 있으실 거다. 어려서 교회생활할 때부터 그렇게 무슬림을 위한 기도회에 참석하더니 결국 너는 하나님의 큰 사명을 띠고 멀고 먼 중동 이란 땅에 가서 그 대가족 다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 가운데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감당할 씨앗이 되리라 믿는다. 처음은 미약하나 나중은 창대하리라는 말씀이 귀에 쟁쟁하다. 사랑하는 딸아 금방 보고 왔는데 또 보고 싶다."

2009.05.12. 15:44

[지혜의 향기] 마음 먹기 나름

"여기에 한 물건이 있으니 이것이 무슨 물건인가?(有一物於此 一物何物?) 마음은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중략)…나도 아니고 남도 아니다.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고 냄새도 안 나고 빛깔도 없으며 성인도 아니고 범부도 아니다. 무엇이라 이름 할 수 없어서 고로 한 물건이라 하였다." (조사 어록) 마음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 그 마음은 곧 불성이니 부처 와 중생과 마음은 서로 하나이고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러나 부처 성자 선지식들은 그 마음을 꿰뚫어 보았고 중생 범부는 어두운 막이 가리워져서 그 마음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검은 막 오라만 없어지면 부처와 내가 하나임을 활연히 통찰하는 것이다. 그 검은 막을 없애는 방법이 마음을 맑히는 것인데 염불이요 참선인 것이다. 염불 참선을 할 때도 내가 부처임을 확실히 믿어야 속히 마음을 확연히 볼 수 있는 것이다. 부처님은 "일체 유심조"라고 하셨다. 역사적으로 불기는 2500여년 서기는 2000여년 공자님도 2400여년. 현 겁의 삼대 성인을 보면 불기가 가장 먼저이고 다음이 공자님인데 공자의 제자가 물었다. "사부님이시여 이 세상에 성인은 오직 사부님뿐이옵니다" 하니까 공자 왈 "아니다. 서역에 석가세존이라고 하는 부처님이 계신데 그 분이야말로 이 세상에서 성인 중의 성인이라고 할 수 있는 어른이다"고 하였다. "일체 유심조" 란 일체 모든 것은 오직 마음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우리가 가끔 이 세상에 마음에 관한 책들을 보면 많은 철인들이 부처님 말씀을 인용한 것을 볼 수 있다. 부처님께서는 우주가 이루어지는 것도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하였다. 필자는 10여년전만 해도 그 뜻을 잘 이해를 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제는 오직 이치로서만 알 수 있다. 현재는 양자 물리학자들도 말한다. "전 우주가 생각(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불교는 염불 참선을 깊이 하여 삼매에 들고 정에 들어서 오랜 기간 지속하면 본래 인간의 마음을 보아 활연 대오하므로 자연히 우주의 이치를 알게 되는 것이다. 또한 공자님은 말씀하셨다. "정신 일도 하사불성"(精神一到 何事不成). "정신(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면 이루지 못할 것이 없다"고. "마음은 유능한 화공과 같아서 무엇이든지 만들어낸다." 그대의 '마음'이 지금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그대의 앞날은 결정되는 것이다. 물론 생각을 할 때는 깊이 해야 한다. 사람의 마음은 참으로 미묘한 것이어서 온갖 것을 만들기도 하고 허물기도 한다. 인간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몇 개의 층으로 형성되어 있다고 한다. 첫번째는 욕망의 층 두번째는 슬픔의 층 세번째는 분노의 층 네번째는 공포의 층이다. 인간의 마음 깊이 알 수 없는 두려움이 있다고 한다. 그것은 끝없는 윤회의 삶 속에서 고통 속에 죽어갔던 과거의 기억들이 누적되어 불안과 공포의 마음을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9.05.12. 15:39

[목회 칼럼] 해피 다이어트

우리 집 부엌에는 생뚱맞은 물건이 하나있는데 그것은 체중계이다. 우리집 체중계는 작년 이맘 때부터 화장실에서 부엌으로 옮겨졌다. 장소만 바꾸어진 것이 아니다. 특이한 장면은 11학년짜리 큰아이가 학교에 갔다 오면 체중계 앞에서 벌어진다. 체중계를 앞에 놓고 올라가기 전에 입고 있던 옷을 마구 벗고 무게를 줄일 만큼 줄인 다음 그 위에 올라선다. 체중을 재고난 후에야 비로소 그 앞에 있는 냉장고 문을 열어 먹을 것을 꺼낸다. 나는 옷을 벗는 아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큰 아이는 태어날 때부터 먹는 은사(?)를 받고 태어났다. 어렸을 때는 그래도 날씬한 편이었는데 십대에 들어오면서 어느 음식 하나 맛있지 않은 것이 없는 것처럼 모든 음식을 즐기더니 작년 들어서는 무려 200백 파운드를 육박했다. 처음에는 타고 났거니 하다가 그것도 넘어서 큰 일 났구나 나중에는 이일을 어쩌나 하기까지 이르렀다. 그러다가도 가끔 그 육중한 체구로 첼로를 켤 때 깊은 소리가 나면 풍성한 몸집 덕인가보다 하며 스스로 위로하곤 했지만 그것 하나 빼고는 걱정뿐이었다. 그러던 작년 봄 무렵부터 아이가 저녁상에 나타나지 않는다. 한 두 번은 그냥 지나갔는데 이상해서 아내한테 물었다. 요즈음 하영이가 저녁식사에 통 안보이니 어떻게 된 거예요? 집사람의 대답이 다이어트를 시작했다는 것이다. 나는 피식 웃었다. 며칠이나 갈까 먹으면서도 배고프다고 하던 아들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대견하다 싶었다. 그런데 작심삼일이 아니었다. 한두 달을 계속하더니 여름방학이 시작되었는데 아예 체중계를 끼고 사는 것 같았다. 어느 날은 하도 달라 보여 확인해 보았더니 무려 30 파운드가 줄어 있었다. 그동안 한 번도 음식을 못먹어 괴로워 보인 적도 없고 전문가와 의논하거나 약을 먹거나 하는 것을 보지 못했는데 싶어 너무 놀라웠다. 그런데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아들의 바뀐 식습관은 계속 되었고 여름방학이 끝나고 학교에 갔을 때는 친구들이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해 있었다. 50 파운드 가까이 몸무게를 줄인 것이다. 중국 조선족 표현대로 하면 드디어 우리 아들이 '살까기'에 성공한 것이다. 나는 아들이 50파운드를 다이어트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배울 점이 많아 그 이름을 '해피 다이어트'(happy diet)라고 붙여 주었다. 왜냐면 우리는 보통 다이어트t하면 '작전'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용사처럼 온갖 작전과 화학요법 심지어 특수 장비까지 다 동원된다. 그러니까 다이어트 자체가 전쟁이요 스트레스다. 그런데 아들의 '해피 다이어트'는 근본부터 다르다. 다이어트가 전쟁이 아니라 즐거움이다. 아들은 자기가 절제해야 하는 음식 때문에 괴로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유익한 음식을 골라 먹는 재미에 푹 빠진 것이다. 우리가 저녁을 먹는 동안 자기는 즐겁게 훌라후프를 돌린다. 또 하나는 작은 목표다. 한번도 10파운드가 목표인 적이 없었다. 항상 5파운드다. 두 번 성공하면 10파운드 세 번 성공하면 그 다음부터는 자신감이 생겨서 계속 하게 되는 것이었다. 벌써 일 년이 지나도록 요요현상도 없이 기분 좋게 그 몸을 유지하고 있다. 다이어트 성공이 아들에게 여러 모로 삶의 태도나 학교생활에서 자신감을 갖게 해주었다. 요즈음 이민사회가 경기침체의 여파로 너무나 어두워져 가고 있다. 가정이나 교회에도 영적 다이어트와 경제적 구조 조정이 불가피해졌다. 상당히 긴 터널을 지나야 할 것 같다. 그렇다면 구조조정에 따른 태도를 바꾸자. 내가 포기해야 하는 것에 집착하여 힘들어하기 보다는 현재 내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음을 기뻐하자. 작게라도 목표를 세우자. 자주 몸무게를 달아보듯이 쉬지 말고 기도하자. 그리고 적은 소득 적은 성취라도 기뻐하며 감사하자. 그러다 보면 어느덧 '소원의 항구'(시107:30)에 닻을 내리게 될 것이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살전5:16~18)

2009.05.05. 15:27

[신앙의 샘] 사서 고생!

사람은 으레 편안함을 찾기 마련입니다. 학교에서 강의를 들을 때나 직장에서 일할 때 행여 의자나 자리가 불편하면 여간 곤혹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능한 한 편안한 자리나 또는 편안한 자세를 갖추기를 원합니다. 육체적인 불편함 뿐만 아니라 상황을 통해 부딪히는 심적 불편함이 때로는 더 힘들고 견디기가 어렵습니다. 싫어하는 사람을 마주 대하고 있어야 할때는 비록 같이 있기는 하겠지만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편안함에 안주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더러는 인간 관계에서 오는 불편함을 없애고자 사람들과 부딪히는 것을 피하여 혼자 있기만을 즐기기도 합니다. "내가 당신에게 상관하지 않듯이 당신도 나에게 상관하지 마시오!"(you don't bother me and I don't bother you!) 하는 생각들이 그러한 많은 사람들을 사로 잡고 있습니다. 또한 더러는 '책임'이란 부담을 불편히 여겨 자신이 책임져야 할 자리는 어떻게 해서든 피하려 합니다. 이러한 모든 생각들은 우리 크리스천들에게도 그대로 영향을 끼쳐 많은 사람들의 생각의 형태를 좌지우지합니다. 교회에서나 다른 여러 곳에서 사랑과 희생을 배우며 그 모든 것이 옳다고 믿으면서도 내가 지금 있는 '편안 지대'에서 벗어남으로 인해 오는 불편함과 고통은 피하려 합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삶은 배움과 행동이 다른 이면적 생활을 해 올때가 많은 것 입니다. 모임 같은 곳에 새로운 사람이 와도 내가 먼저 다가가서 인사 하기를 두려워 합니다. 당연히 하는 것이 옳은 줄 알면서도 말입니다. 목사님이나 전도사님 또는 인도자들이 '헌신'에 대해 나누면 부담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그들이 있는 '편안 지대'를 벗어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요한1서 3장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 함으로 하자." 사랑은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진실한 마음과 행동입니다. 내가 원하는 '편안 지대' 안에서 다른 사람들을 들어 오라고 외치기만 한다면 그것은 사랑이 아닐 것입니다. 진실된 사랑은 나의 '편안 지대'를 부수고 나가 그들의 아픔과 고통을 함깨 나누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사랑일 것입니다. 나의 '편안 지대'를 부수고 나가 "젊어 고생은 사서도 한다"는데 사서 고생좀 합시다! 하늘 보좌 라는 '편안 지대'를 버리시고 이 땅이라는 죄악 세상으로 오셔서 사랑 때문에 '사서 고생'하신 예수를 본받아 우리도 예수의 사랑 때문에 '사서 고생' 좀 합시다! 이 글을 읽는 모든 분들이 '사서 고생'하는 크리스천이길 바랍니다. 할렐루야! '사서 고생!'

2009.05.05. 15:26

[기독교인의 삶] 하나님의 말씀을 꼭 잡고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 이도 하나님 나의 나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고등학교 2학년 때 캐나다로 조기 유학을 가서 영어 때문에 어려워하고 힘빠지던 그 시절 나를 지으시고 나를 나로 불러주신 그리고 내가 내 뜻대로 원해서 온 것은 아니지만 나를 이곳으로 보내신 이는 하나님이라는 말씀은 그 시절 내가 붙들만한 단 하나의 희망이었다. 다른 엄마들이 그렇게 보내고 싶어하는 강남 8학군에 명문 고등학교에서 원만한 학교생활과 교회생활을 아무 문제없이 하고 있을 나를 캐나다 토론토라는 생소한 곳으로 부르셔서 학교 수업의 매 쉬는 시간마다 하나님 나를 도와달라고 기도할 수 밖에 없고 잠자리에 드는 매일 밤에 하나님 나에게 지혜를 주시지 않으면 내가 학교생활을 하기 힘들다는 고백을 하게 하셨다. 내가 의지할 곳은 나를 돌보시는 친할머니도 아니고 멀리 한국에 계신 부모님들도 아닌 하나님 한 분이라는 고백을 내 삶에서 경험케 하셨다. 그 땐 참 힘들었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그때 이후로 나에게 문제가 생기고 어려울 때마다 하나님께 나아가는 법을 배웠다. 1999년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대학원을 가기로 결정을 하고 여러가지 준비와 8년간의 캐나다의 생활을 정리하기 분주한 그 때 작년에 다녀온 카작스탄 단기 선교로 부르심에 순종했었다. 근데 나에게 돌아온 것은 100여명의 단기 선교 팀원들 중에서 여권 만기일이 6개월 미만이라서 유일하게 내 비자만 발급할 수 없다는 소식이었다. 한국 영사관에 가서 여권을 연장하려고 하자 내가 미국으로 갈 것이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여권을 갱신해 줄 수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뜻은 여기 까지인가 보다 하고 가는 것을 포기하려던 내게 100명중에 한명인 일개 청년부원인 내가 꼭 같이 가야한다며 담임목사님과 선교팀은 중보기도하며 격려해 주셨다. 우여곡절 끝에 토론토 영사관에 담당영사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내가 왜 카작스탄에 가야하는지를 두서없이 설명하는 나에게 그 영사는 여권 갱신대신에 카작스탄 미국에만 갈 수 있는 여행증명서를 만들어 주셔서 카작스탄 비자를 받을 수가 있었다. 나중에 여행증명서를 주시면서 자기는 크리스천이 아니지만 영사님의 어머니가 독실한 크리스천이라고 했고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주셨다. 카작스탄에 그리고 작년에 갔던 그 도시에 다시 들어갔을 때 교회가 없었던 그 도시에 100여명 정도 모이는 교회가 탄생해 있었고 작년에 복음을 전했을 때 예수를 영접했던 그들이 멋지게 신앙생활하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작년에 통역을 담당했던 한 자매가 올해 또 우리 통역을 담당하게 되었는데 작년에는 예수믿기를 거절했지만 올해는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남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깨닫게 되었다. 아이들을 격려하라고 이들에게 다시 복음을 나누라고 나를 부르셨구나. 어제 청년부를 담당하셨던 목사님이 교회 개척을 하셔서 창립감사예배에 참석하게 되었다. 천방지축으로 돌아다니는 막내 때문에 예배에 집중할 수는 없었지만 여러 목사님들의 격려사 후에 소감을 말씀하시는 시간이 있었다. 상파울로에 있는 한 옷가게에서 그 일이 인생의 전부인양 살아가던 나를 목회자로 설 수 있게 불러주신 목사님과 하나님께 감사드린는 그 말씀에 큰 감동이 있었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를 지으셨기 때문에 우리를 불러주시고 부르신 후에 우리를 보내주신다. 그때에는 왜 우리를 이런 가정으로 이런 직업으로 이런 교회와 사회와 나라로 보내심을 이해하지 못한다. 근데 그 부르심과 보내심에 순종해서 아직 결과는 알 수 없지만 믿음으로 결단을 할 때 하나님은 내가 상상할 수 없었던 은혜를 경험케 하신다.

2009.05.05. 15:25

[사목의 향기] 사람을 찾습니다

소위 말하는 '노무현 전 대통령 게이트'의 실상이 파헤쳐지고 있는 요즈음 "믿을 사람이라곤 하나도 없구나"라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한 때 우리나라의 연속극에서 일본 말로 "민나 도로보데스"라고 내 뱉은 한 탤런트의 현실 고발도 떠오른다. 다들 왜 이러는가? 군부독재자들이야 그런 자들이었으니까 아예 기대를 하지 않았지만 문민정부를 만든 소위 선량들이라는 자들도 모두 그 모양이니 화가 나서 하는 말이다. 두 김씨 전직 대통령들 아들들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도덕성을 중시한 노무현 전 대통령 일가의 비리에 이르기까지 역대 대통령들의 친인척 비리가 끊이지 않고 있으니 하는 말이다. 이런 사람들이 애국을 논할 수 있겠는가? 대통령 유세 때만이 아니고 그 높은 자리에 앉아서도 기회 있을 때마다 하시던 말씀이 '깨끗한 정치' '돈 받지 않는 정치'였는데 청렴한 정치와는 거리가 먼 사건들이 터지기 시작하니 국민들의 실망이 이만저만 아닌 것 같다. "당신도 별 수 없구나"하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고 한다. 그러니 사람들이 전직 대통령을 향해 '600만불의 사나이' '뇌물현' '노구라' 등 신조어를 만들어 낸 것이 아니겠는가? 사람들을 속이면 이런 말이 나오는 것이다. 파렴치한 사람이란 뜻이리라. 도대체 왜들 이러는가? 우리나라 대통령치고 한 사람도 백성에게 모범이 될만한 인물이 없었으니 하는 말이다. 그 곳에만 들어가면 모두 다 그 모양이니 도대체 어느 대통령을 믿을 수 있겠는가? 이런 자들이 무슨 애국을 논하겠는가? 돌이켜 보면 노 전 대통령은 상당히 인기있는 분이었다. 특히 젊은이들에게 먹혀들어가는 말을 거침없이 지껄여대니 젊은이들이 노무현 형. 노무현 오빠에게 반해버렸다. 젊은이들은 감성에 끌렸고 종교인들은 그의 청렴에 끌려갔다. 나와 둘도 없는 친구도 노사모의 일원처럼 행동했다. "이 땅에 저 사람 같이 청렴한 사람은 없다"라고들 했다. 기성 정치인들이 워낙 그렇고 그랬으니 그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이 백번 맞다. 항간에는 그의 조직이 취약하여 걸려들었다고들 한다. 이런 말 자체가 문제가 아닌가? 조직이 강한 대통령은 얼마든지 해먹어도 괜찮다는 말인가. 분명히 도덕성의 결여다. 대통령 친인척 비리를 집중 감시하는 청와대 내부의 민정수석실이 있지만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비리에 연루되어 구속되는 경우를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니 하는 말이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할 사람을 찾습니다"라고 외치는 것이다. 살아가는 데 돈과 재산은 꼭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재물은 귀하다. 귀한 것을 귀하게 쓰는 이는 복을 받는다. 자신과 가족과 나라와 불우한 이들을 위해 잘 쓰인다면 얼마나 좋으랴! 그러나 그 귀한 재물도 더러울 때가 있다. 정당하지 않은 돈과 재물을 긁어모을 때는 천금 만금을 모아도 더럽고 지저분하다. 인격이 실추되어 역사에 탐욕스런 인물로 기록될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도 살아가면서 일생동안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을까? 백성은 김수환 추기경 같은 위대한 인물은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분이 나오신다면 금상첨화겠지만…. 뛰어난 우리 국민 중에 태국의 잠롱 같은 지도자는 언제쯤 나오실까? 그 정도 인물이라도 하루 빨리 나오도록 기대하면서 다음 선거 때는 우리 모두 "황금 보기를 돌 같이 할 사람을 대통령으로 뽑읍시다"라고 외쳐야하지 않을까?

2009.05.05. 15:24

[지혜의 향기] 폭죽과 등불

미국에 와서 처음으로 독립기념일을 맞았을 때다. 해가 기울자 사람들은 간이 걸상 같은 것들을 들고는 동네 공원으로 모여 들었다. 한 쪽에서는 불고기를 굽는 등 축제 분위기인데 이윽고 땅거미가 깔리자 제복을 입은 사람들이 작은 박격포들을 늘어놓고 하늘에다 마구 폭죽을 쏘아대었다. 그 동네만이 아니고 온 천지 여기저기서 일시에 그런 불꽃놀이를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미국 땅 전체가 그럴 것이었다. 동부에서 서부로 지는 해의 발뒤꿈치를 따라 빨랫줄이 지나가듯 남북으로 줄지어 일제히 불꽃이 튀고 콩 볶는 소리가 날 것이니 상상만 해도 장관이었다. 어쨌든 작은 마을 단위에서마저 아낌없이 공중에 날려 버리는 이 불꽃놀이도 끝이 나고 사람들은 흩어졌다. 낯선 땅에서의 하루가 또 저물고 있었고 나는 까닭 모를 설렘과 앞날에 대한 안쓰러움 속에서 몸과 마음을 추슬렀다. 언젠가 내 나름의 폭죽 하나라도 남들의 머리 위로 쏘아 올리며 주눅 들지 않고 어울려야지 하는 다짐을 하며. 하지만 산다는 것이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는 것도 내가 꾸미는 불꽃놀이의 많은 부분이 실현하기 어려운 한 때의 치기였음도 얼마 안 가 자명해졌다. 밤하늘이든 내 가슴 속에서든 어둠을 뚫고 치솟아 피어나는 그 불꽃들은 휘황하지만 숨 돌릴 틈에도 다시 어둠속으로 사그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그 불꽃 하나하나에 울고 웃으며 내 젊은 날은 비껴가고 그에 따라 어느덧 내 마음의 불씨 생명의 불씨마저 꺼질듯 자주 바람 앞에 사운거렸다. 이에 나는 발길을 돌려 한 순간의 불꽃이 아니라 어둡고 긴 밤을 내내 지켜 내는 꺼지지 않는 나만의 등불을 찾기로 했다. 다행히 세상에는 오래 전부터 그러한 등불의 전설이 전해 오고 있었다. 슈라바스티에 한 가난한 여인이 있어 이 집 저 집 밥을 빌어 겨우 목숨을 이어갔다. 어느 날 성 안이 떠들썩한 것을 보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물으니 부처님이 오늘 밤 이 성으로 오신다는 것이었다. 권세 높은 프라세나지트 왕도 백성들과 더불어 수만 개의 등불을 밝혀 연등회를 베풀고 부처님을 맞이한다는 것이었다. 아무 것도 가진 게 없는 이 여인은 한 닢 두 닢 동전을 빌어 기름을 구하여 부처님이 지나가실 길목에 등불을 밝히고 빌었다. 부처님 저는 가난해서 아무 것도 공양할 것이 없사옵니다. 보잘것없는 등불 하나를 밝히오니 이 공덕으로 저도 오는 세상에 부처를 이루어지이다. 밤이 깊어 다른 등불은 다 꺼졌으나 이 등불만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부처님을 주무시게 하려고 제자 아난다가 이 등불마저 끄려고 하였으나 결코 꺼지지 않으니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아난다야 부질없이 애쓰지 마라. 가난하지만 착한 여인이 큰 서원과 정성으로 켠 등불이니 결코 꺼지지 않으리라. 그 여인은 이 공덕으로 오는 세상에 부처가 되리라. 나는 절에 찾아가 연등 접수를 하고 기원을 적어 넣었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스님을 도와 편지를 부치고 접수도 받고 거들어 연등도 매달았다. 그러다 성긴 법당 천장을 얼른 채우지 못하는 아쉬움을 달래면서 한 해의 이때만이라도 온 거리까지 형형색색의 오색 등불이 넘실거리는 화려한 상상을 하곤 했다. 법을 등불 삼고 자신을 등불 삼으려 가난한 여인의 정성으로 타오르는 등불. 그 불빛들이 모여 시내가 되고 강물이 되고 바다를 이룰 때 나는 홀로 사람들의 머리 위로 솟구치는 폭죽이 아니라 더 안으로 안으로 갠지스의 모래알이 되어 그 흐름 속에 깊숙이 쓸려 들고 싶다.

2009.05.05. 15:21

[백성호 기자의 현문우답]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

중국의 약산(藥山 745~828) 선사는 어릴 적부터 경전을 익혔죠. 그러나 나중에는 문자를 버리고 선문(禪門)으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선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죠. 깨친 후에도 약산선사는 '법화경' '열반경' '화엄경' 등의 경전을 늘 곁에 두고 읽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경전을 펼치고 있으면 불호령이 떨어졌죠. "경전의 노예가 된다. 경전을 읽지 말라"고 말이죠. 이를 참다 못한 한 제자가 물었습니다. "스님. 저희에겐 경전을 덮으라 하시면서 스님은 왜 날마다 경전을 보십니까?" 이에 약산선사가 대답했죠. "나는 경전을 눈 앞에만 놓았을 뿐이다. 한 번도 읽은 적이 없느니라." 그러자 제자가 '옳거니'하면서 말했습니다. "저희도 경을 눈 앞에만 두고 읽지 않으면 되지 않겠습니까." 약산선사는 무표정하게 제자를 쳐다봤죠. 그리고 고개를 돌려 밖을 보며 말했죠. "나는 눈 앞에만 놓았을 뿐이다. 그러나 너희가 경전을 눈 앞에 놓을 때 문자가 너희를 보지 않느냐. 그걸 어찌 막으려 하느냐." 엥? 이게 무슨 뚱딴지 같은 소리인가요. 언뜻 들으면 '내가 하면 로맨스 네가 하면 불륜'이란 얘기네요. 그러나 선의 세계는 냉혹하고 정확합니다. "어버버"하며 넘어가는 두리뭉실한 세계가 아니죠. 한 마디만 던져도 '내가 선 자리'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곳이니까요. 그럼 약산선사와 제자들의 차이는 뭘까요. 바로 '나의 유무'죠. 약산선사는 이미 '나'가 허상임을 본 거죠. 그래서 그에겐 경전을 보는 '나'가 없는 겁니다. 경전을 보고 비교하고 풀이하는 '나'를 여읜 거죠. 그러니 마당에 있는 소나무 하늘을 나는 새처럼 경전도 그냥 눈 앞에 놓기만 할 뿐이죠. 그 외에 달리 무얼 할 수 있을 까요. 그러나 제자들은 딴 판입니다. 경전을 보는 '나'가 엄연히 존재하죠. 경전을 재고 평하고 따지는 '나'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도 경전을 눈 앞에만 놓고 읽지 않겠습니다"라는 말이 무의미한 거죠. 그걸 약산선사가 안 겁니다. 그래서 꼬집은 거죠. '네가 경전을 보지 않아도 경전이 너를 보지 않느냐'라고 말이죠. 제자들에게 '나'가 없다면 경전도 제자를 못 보겠죠. 산중의 큰스님들은 종종 "선과 악 양변을 여의라"고 하십니다. 대체 '양변'이 어딜까요. 이 일화에도 양변이 있습니다. '나'와 '경전' 그게 바로 양변이죠. 그래서 한쪽 변인 '나'를 여의면 다른 쪽 변인 '경전'은 절로 여의게 됩니다. 줄다리기는 한쪽만 줄을 놓아도 당겨지질 않습니다. 그때는 수천 번 수만 번 경전을 봐도 '경전의 노예'가 되지 않겠죠.

2009.05.05. 15:18

[기독교인의 삶] 인간을 중심에 놓으면···

기독교와 할리우드 영화 관계자들은 오랜 시간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기독교인들에게 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안 되느냐고 질문을 하면 대체로 나오는 답변은 “섹스, 폭력 등 자극적 컨텐츠로 가득한 할리우드가 세상을 망쳐놓고 있다”고 답합니다. 모슬렘 사회 지도자들도 같은 이유로 할리우드 영화를 싫어합니다. 한국 드라마나 한국 영화가 모슬렘 사회에서 인기를 끄는 이유는 자극적인 컨텐츠가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한국 드라마 자체에 자극성이 없다는 게 아니라 그 사회로 수출된 드라마나 영화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다는 뜻입니다. 다시 할리우드 이야기로 돌아오면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경우 표현의 자유가 있는 나라에서 영화 내용에 대해 자주 비평을 하는 기독교인들을 좋아할 리 없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변화가 생겼습니다. 할리우드 관계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자극하는 영화는 뜬다고 생각하기 시작하고 오히려 ‘네가티브 이미지 마케팅’을 하게 됐습니다. 즉, 기독교인들이 펄펄 뛰면 마케팅이 잘 되어 영화를 보는 사람이 늘어난다는 것입니다. 영화인들에게 패러다임 시프트가 이뤄진 것입니다. 기독교인들도 패러다임 시프트를 해야 합니다. 어떻게 해야 할까요. 로마서 1장을 읽다보면 인간이 욕정대로 사는 것에 대한 내용이 나옵니다. 주로 성적인 욕정이 나옵니다. 할리우드 영화는 바로 이런 성적인 욕정을 자유롭게 표출하고 행동으로 옮기라고 메시지를 던집니다. 또한 할리우드 영화에서는 온갖 불의와 악행과 탐욕과 악의로 가득 찬 내용이 주를 이루며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적의로 가득 찬 내용이 많이 있습니다. 재미난 사실은 성경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한국 드라마나 영화도 그렇구요. 요즘 막장 드라마라는 표현을 자주 듣게 되는데 바로 로마서 1장28절 내용에 부합하는 것입니다. 이게 바로 인간사입니다. 우리는 중상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고, 불손하고, 오만하고, 자랑하고, 악을 꾸미고, 우매하고, 신의가 없고, 무정하고, 무자비합니다. 할리우드 영화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인생사가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할리우드 영화나 대중문화를 보면서 무엇을 생각해야 할까요. 어떤 내용을 다룰 때 레벨이 있다면 인간의 문란한 삶은 A, B, C, D 레벨 가운데 B급 레벨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계속 B급에서 대화를 하고 언쟁을 하고 싸움을 합니다. A급 레벨은 바로 ‘신을 무시하고 자기를 영화롭게 하는(self-glorification) 삶’입니다. 할리우드 영화나 대중문화의 문제점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세상의 중심에 놓는 사고방식이 바로 가장 큰 우리의 문제입니다. 대중문화나 할리우드 영화는 바로 이것을 리드하고 있는 것입니다. A가 안 되니까 B, C, D는 당연히 바람직하지 않은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편지가 “도덕적으로 살자”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신을 인정해라, 신은 이 세상을 만드신 분이다, 우리가 할 일은 그를 영화롭게 하고 그에게 감사하는 것이다라는 내용이 핵심입니다. 그러한 관점에서 할리우드 영화를 보면 우리 인간의 문제를 보게 됩니다. 인간의 문제를 보며 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죄로 가득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대중문화 안에서 예수를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키워야 합니다.

2009.04.28. 16:08

[목회 칼럼] 바보 예수

"너 바보지?"라고 물었을 때 "그래 나 바보다!"라고 이야기하는 "바보"는 이 세상에 아무도 없습니다. 아무리 바보라도 "나 바보 아냐!"라고 말하면서 실실 웃습니다. 그러나 웃는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바보입니다. 머리 속에 바보의 모습을 떠 올릴 때면 우리는 항상 마음 속에서 '무장해제'를 경험합니다. 바보는 남을 해치거나 괴롭히는 나쁜 마음을 품지 않습니다. 야심 있는 바보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과 등을 돌리고 살아갈 자존심도 없습니다. 어느 의사가 글을 쓰면서 "바보들에게는 암(Cancer)이 없다"고 말한 것이 기억납니다. 사실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제가 기억하는 바보들 중에서 정말 '암'에 걸린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바보들의 실없는 웃음은 그들의 마음이 얼마나 세상의 욕심과 스트레스에서 해방되어 있는가를 보여주는 '바로메타'입니다. 바보들은 항상 우리에게 파안대소를 선사하는 존재들입니다. 바보들이 존재하지 않는 세상! 똑똑하고 냉철하고 날카로운 사람들만이 사는 세상! 그런 곳이 있다면 아마도 그곳이 지옥일 것입니다. 바보들은 긴장과 논리로 찌들린 우리들의 삶에 웃음과 페이소스(pathos)를 선사하는 청량음료 같은 사람들입니다. 저는 주일 저녁에는 어김없이 '개그컨서트'라는 코메디 프로를 봅니다. 너무 저질스럽지도 않고 그렇다고 복잡하지도 않고 편하게 웃을 수 있는 풍자와 시사들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온갖 근심과 걱정을 다 끌어안고 죽지 못해 살아가는 똑똑한 현대인들에게 '행복의 병원균'(Happy Virus)을 선사하는 바보 같은 개그맨들은 어쩌면 '타고난 천재들'일지도 모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든 것이 치밀하고 계산적인 '잘난 사람들'보다는 차라리 언제든지 '뻐드렁 웃음'을 터뜨릴 준비가 되어있는 바보들과 함께 살고 싶습니다. 제가 아는 엄청난 바보 한 사람이 있습니다. 자기 밥그릇 하나 챙기지 못하고 평생을 남에게 퍼주다가 십자가 형틀에서 못곳에 찔려 죽은 사람입니다. 우스꽝스럽게도 그의 탄생은 짐승의 밥그릇에서였습니다. 로마 식민지 치하에서 살아남기 위해 여자들은 몸을 팔고 남자들은 자존심을 팔던 시대였습니다. 정죄 당하기 싫으면 먼저 남을 먼저 정죄하고 고난 받기 싫으면 먼저 남을 괴롭혀야 하는 시대 속에서 그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모든 사람들을 끌어 안았습니다. 그것이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길을 기쁨으로 걸어 갔습니다.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 자신을 배신할 것을 이미 알고 있었으면서도 그들을 위해 '고난의 잔'을 단숨에 들이켰습니다. 세상을 뒤집는 혁명은 단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지만 그는 '정치범'이라는 이름으로 처형을 당했습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 바보는 제자들에게 자신이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정말 인류 최고의 바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바보가 세상을 통째로 바꾸었습니다. 각박하고 삭막한 약육강식의 세상을 '사랑방'같은 훈훈한 곳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죽음 같은 세상을 살만한 곳으로 변화시켰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을 자신과 똑같은 바보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 분을 따르는 바보들이 있기에 세상은 빛이 나고 짭짤한 맛이 있는 세상으로 바뀌었습니다. 그 분은 정말 거룩한 바보였습니다. 그러므로 바보가 되십시오! 너무 똑똑 하려고 노력하지 마십시오. 손해도 보십시오. 어떤 때는 기쁨으로 손가락질을 당하십시오. 그 바보가 우리의 주님이심을 믿는다면!?

2009.04.28. 16:06

[신앙의 샘] 시간과의 전쟁

90년대 한 긍융기업이 이미지 TV광고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광고가 눈길을 끈 것은 CEO가 직접 나와서 '시간은 돈'이라는 내용으로 끌고가다가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멘트로 광고를 마무리 했습니다. "Thank you for your time." 그 때 '당신이 무의식 중에 벌써 나에게 30초라는 돈을 주셨습니다'라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현대인들이 앓고 있는 병들이 늘어나고 있습니다. 육체적으로 오는 성인병은 물론이고 스트레스 등과 같은 정신질환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가 바로 조급증입니다. 현대인들은 시간과의 경쟁으로 쫒기듯 살고 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서 속도를 더 증가 하려고 합니다. 공간을 점령하기 위해 신속한 도구가 필요했습니다. 컴퓨터 자동차 모빌통신 전자 오븐처럼 더욱 빨리 멀리 높이 가기 위해 신상품들이 오늘도 쏳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어떠한 상품도 시간을 앞지르지 못합니다. 그래서 마음으로 시간을 앞지려고 합니다. 마음 속에 '조급'이라는 연료를 넣으면 더 빨리 간다고 착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조급증은 두려움에서 옵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부정적인 미래의 예측은 두려움을 가져오고 조급이라는 옥탄가(Octane)가 높은 연료를 사용하여 변수를 만들어 보려고 시도합니다. 고급 옥탄가의 조급증은 운전을 할 때 빨간불 신호등에서 조금 이라도 신형의 고급 자동차 뒤에서 기다립니다. 1초라도 빨리 출발하기 위해섭니다. 마켓에서도 물건을 실은 카트를 밀면서 어느 계산대 줄이 가장 짧은가 살피고 줄을 섭니다. 기다리는 동안도 '내가 다른 줄에 서 있었다면 어디 쯤에 서있을까?' 하며 머리 속으로 경쟁을 합니다. 전화를 걸어서 음성사서함이 나오면 당장 끊어 버립니다. 아니 통화대기만 되도 기다리지 못합니다. 가정에서도 가족을 소를 몰듯이 몰고 다닙니다. 조급증에 시달리는 사람은 입술에 "빨리 빨리"가 붙어다닙니다. 유대교의 랍비들은 하나님께서 칠일동안 창조활동을 했다고 믿습니다. 창세기 2장2절에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이 이르러서 일을 마치셨다고 기록된 것을 근거로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셨다고 믿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안식을 창조하시고 안식하셨다고 믿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안식은 하나님께서 하신 창조활동을 마무리하는 작업이였습니다. 창조를 완성하시는데 안식이 꼭 필요했다는 의미입니다. 유대교의 사상가인 아브라함 헤셸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가장 마지막 작품이자 하나님이 의도한신 것 가운데 가장 첫 번째 작품인 안식이야 말로 천지창조의 목적이다."라고 했습니다. 안식이라는 의미가 현대사회에서는 '휴식'에 가깝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는 휴식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우리는 쉬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휴식은 목적이 아니다." 휴식은 일을 위한 수단처럼 생각할 수 있습니다. 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서 능률을 높이기 위해서 아니면 소모된 기력을 되찾기 위해서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식은 시간과 경쟁할 때 오지 않습니다. 안식은 많은 공간과 물질을 소유하거나 점령할 때 오지 않습니다. 안식은 시간에 의미를 둘 때 옵니다. 우리는 시간이 반복해서 온다고 생각합니다. 어제가 가면 오늘이 오고 4월이 가면 또 5월이 옵니다. 봄이가면 여름이 오듯이 말입니다. 평범한 일상은 미래의 두려움을 갖게 합니다. 이런 생각의 양식은 삶을 조급하게 만들고 건조하게 만듭니다. 식상한 생활에서 벗아나기 위해서는 순간 순간 시간의 의미가 부여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시간의 의미가 부여될 때 시간과의 전쟁이 종결되고 진정한 안식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시간과 경쟁하면 관계의 조화가 깨집니다. 사람과의 관계가 흩트러지면 감정이 메말라 집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잃어버리면 감각을 상실합니다. 일과의 관계에서 목적을 잃어버리면 불행해 집니다.

2009.04.28. 16:05

[사목의 향기] 똑 바로 듣기

어느 수녀원에서 연중 피정 강론을 끝내고 아침 식사를 하는데 그 수녀원의 은인이라는 모 회사의 사장님이 미사를 마치고 식당에 함께 했다. 자연스럽게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는데 그 사장님은 대화가 무르익자 회사의 성공담을 들려주기 시작했다. "저희 회사 성공은 잘 듣는 데에 있습니다"라고 했다. 식사 중 그분과 나눈 대화가 지금까지 내 머리에 남아있는 것을 보면 나에게 상당히 인상을 준 내용이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제가 회사에서 직원들을 모두 모아놓고 이런 훈련을 해보았습니다. 100여명을 둥글게 원을 그려 세워 놓고 제 바로 옆에 있는 직원에게 귀에 대고는 한 마디 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 사람에게 똑같이 귀에 대고 전하라고 했습니다. 이런 식으로 100여명의 귀를 통해 저의 지시가 전해졌는데 마지막 사람이 저에게 하는 말은 제가 첫 번째 사람에게 한 말과는 달랐습니다. 저는 직원들에게 화를 내지는 않고 정중하게 듣는 것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 훈시를 했습니다. 회사의 지시를 모두 잘 듣고 그대로 해야 일사분란하게 회사가 운영되며 우리 회사가 성공할 수 있습니다…훈시는 이런 식으로 간단하게 끝났습니다. 그런데 한 달 후 회사의 실적이 달라졌습니다. 직원들의 근무 태도도 달라졌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수입이 올랐으니 자연적으로 보너스 액수도 올랐습니다. 모두들 좋아했습니다. 잘 들으니 이런 결과가 난 것입니다. 그분의 경험담이었다. 그리고 그분은 한자의 경청이라는 단어를 열심히 설명했다. '청'자는 마음을 다하여 귀로 듣는다는 뜻인데 귀가 두 번이나 나옵니다. 근성으로 듣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다해 두 귀로 듣는다는 뜻입니다. 옛날 사람들도 듣는 것을 이렇게 강조했다는 뜻입니다. 일상생활에서 듣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강의실에서도 잘 들어야 한다. 학생이 강의를 잘 듣지 못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리고 자녀들은 부모의 가르침을 잘 들어야 한다. 부모는 사랑과 경험을 바탕으로 자녀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사업가는 사업가대로 선배의 의견을 경청할 때 성공할 수 있을 것이고 인생 연륜이 많은 어른들의 경험담을 듣고 따를 때 자녀 교육이나 부부생활 등에 필요한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자녀교육과 이혼 등 가정에 문제가 많은 요즈음 삶의 특별한 지혜는 이론보다는 경험이 더 중요한 교훈이 될 때가 많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이다. 잘 들어야 한다. 잘 듣고 따를 때 영성생활에 진보한다. 구체적으로 이번 주일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선 잘 들어야 한다. 일주일에 한 번만 성당에 가는 사람일수록 더 잘 들어야 한다.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잘 듣지 못하면 엉뚱한 곳으로 가게 된다. 엉뚱한 곳이란 멸망이다. 주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던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느님을 버리고 풍요를 약속했던 바알 신에게 가곤 했다. 그들을 질책한 예언자들의 말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계속해서 악행을 저질렀으므로 그들은 벌을 받아 전쟁에 패하고 끌려가고 귀양 가는 수난을 당해야만 했다. 그러므로 성경에는 "들어라 이스라엘아!"(Shema Israel)라고 하면서 듣는 것을 자주 강조하고 있다. 주도적인 사고도 중요하지만 덜 익고 덜 여문 과일이 맛을 못내는 것처럼 덜 된 인간도 듣지 않고 함부로 날뛰다가는 이스라엘 백성의 신세를 면치 못할 것이다.

2009.04.28. 16:04

[지혜의 향기] 모든 것은 비어 있다

지구의 중생은 중탁(重濁)한 육신을 갖고 있어서 자유롭지가 못하다. 인간은 업장이 무거워서 없는 것을 있다고 생각한다. 모두가 무겁다. 오온 개공(五蘊 皆空)이란 형태의 모든 것이 비었다는 것이지 과학적으로 이것 저것 분석해서 "물질은 없다"고 하니까 빈 것이 아니다. 반야심경의 색즉시공(色卽是空)이라 쪼개고 분석하기 이전에 그대로 즉시 비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부처님 법은 지극히 심심미묘(甚深微妙)하고 불성의 공덕은 한량이 없어서 중생의 저소한 견해로는 감히 짐작하기도 어려운 것이다. 필자는 불경(경전)을 볼 때마다 고개가 숙여지고 감탄하고 눈물이 절로 난다. '오온'이라 색수상행식(色受想行識)을 말한다. '색'이란 물질을 일컷는 것인데 즉 육신을 말한 것이고 '수'는 감수 작용 단순 감정을 말하고 '상'은 마음에 떠오르는 상(像)으로 표상작용(表象作用) '행'은 충동적 욕구에 의하여 일어나는 육신의 동적작용 '식'은 인식작용 시비 분별하여 아는 것이다. 제법(諸法)이 공이라든가 색즉시공이란 말들은 사실 그대로 물질은 없으니까 없다고 한 것이다. 중생들이 물질인 보석같은데 너무 집착을 하니까 부처님께서 물질에 얽매이면 안 된다고 하는 노파심에서 말씀하신 게 아니라 우주 자연법이 그대로 없는 공(空)이니까 공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이 만약 있다고 할진대 반야심경의 오온 개공은 허구가 될 것이다. 오온 개공이란 것은 눈에 보이는 모든 존재를 다 포함한 것이 바로 공이란 뜻이다. 또한 감수하고 상상하고 인식 분별 시비하고 이런 것들이 모두 관념체계인데 물질 뿐만 아니라 이런 관념체계도 실재한 것이 아니고 곧 비어있다는 오온 개공이다. 우리 중생이 범소유상 개시허망한 이치를 안다고 생각할 때는 적어도 이전투구 적이고 이기적인 극단주의는 없을 것이다. 또한 이 세상에 여러 이념과 종교들 간의 배척과 갈등은 상대방을 이해하는 바탕위에서 생기는 일들이 아니고 무조건적으로 나 아니면 안 되고 내 종교만이 최고라는 소극적이고 극단적인 관념에서 생겨나는 일들이다. 다른 이념과 다른 종교에 대한 거침없는 적대행위는 보다 많은 세력을 확보하려는 실리적인 동기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이는 자신의 상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하여 무조건 상대방을 깎아내리는 저열한 상행위와 조금도 다름이 없고 또는 먹이나 영역을 놓고 동족간에 혈투를 전개하는 동물의 세계에서나 있을 수 있는 일들이다. 다만 인간의 싸움은 그럴듯한 이론으로 포장이 되었다는 점이 동물과는 조금 다를 뿐이다. 본래로 물질이란 없는 것인데 오온이 다 공한데도 눈에 보이는 있지도 않은 것 때문에 심신을 소모해서야 되겠는가? 모든 인류가 부처님 법을 공한 이치를 바로 알아서 마음의 평화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 지구상에 모든 인류가 행복하기를 기대해 본다.

2009.04.28.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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