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모여 사는 사회도 결국 여덟 자의 테두리를 넘어서지 못 한다. 2009년 우리의 삶과 한인사회의 좌표를 생로병사희로애락으로 풀어본다.
캄캄한 어머니 뱃속에서 9개월을 보내야 비로소 삶이 주어진다. 생(生)은 그렇게 어둠에서 출발한다.
이현정(40)씨는 '생'을 맛보지 못했다. 태어나서부터 40년을 어둠의 터널 속에 있다. 가난한 집에서 병약한 아이로 태어났다. 선천적으로 음식물의 일부가 위가 아닌 기도로 자꾸 넘어가는 희귀병에 시달렸다. 먹지 못하니 살이 찔 일이 없었다. 몸무게 78파운드(35kg). 9차례나 수술을 받았다. 하도 병치레를 하다보니 가족들조차 외면했다.
어렵사리 미국에 와 웨이트레스 등 힘든 일을 했다. 전 남편에게 가정폭력으로 시달리다 버려졌다.
딱 한번 생의 기쁨은 있었다. 아들 이삭을 낳았을 때다. "지금까지 살면서 애기를 낳았을 때가 가장 기뻤어요. 하지만 그 기쁨이 곧 슬픔으로 다가오더라구요. 어미로서 아들에게 해줄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으니까요."
현정씨는 현재 아들 이삭(9)과 함께 '소중한 사람들'이 운영하는 홈리스 쉘터에서 살고 있다. 전에는 지인의 도움으로 더부살이를 했지만 경기가 어려워지면 지인도 도와줄 여력이 없었다. 방 한칸이라도 얻으려면 일을 해야했지만 뼈만 남은 앙상한 몸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딱 한번' 생의 기쁨인 아들의 손을 잡고 캄캄한 거리로 나와야 했다.
'어둠'에 익숙한 현정씨였지만 이번에는 슬픔이 치밀어 올랐다. 기도에 구멍이 나 있는 현정씨의 울음은 거친 숨이 새는 소리였다.
"엄마 울지마 괜찮아." 이삭이 엄마를 위로했다. 이삭이는 밝은 아이다. 애교도 많고 어리광도 잘 부린다.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엄마에게 뽀뽀세례를 퍼부으며 하루종일 있었던 일을 조잘조잘 털어놓는다. 엄마의 어둠을 알고 본능적으로 생의 밝음을 보여준다. 다른 사람들은 어른스런 이삭이를 대견하다고 하지만 엄마는 또래답지 않은 아들의 모습에 오히려 가슴이 아프다.
매일 진통제를 먹어야만 견딜 수 있는 고통에 차라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도 많았다. 하지만 "엄마 아프지 마"라며 품 안에 파고드는 어린 아들을 만질 때면 '생'을 포기할 수 없었다. 한때는 이삭이의 입양도 생각했다. 앞으로 살날이 얼마남지 않았다는 불안한 마음에 좀 더 나은 길을 아들에게 터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삭이가 없다면 전 살아있어도 죽은 몸일 거예요."
어둠은 생을 낳고 생은 어둠과 동행한다. 현정씨 모자는 그 삶의 의미를 보여준다. 어려운 시절 모두가 어둠 속에 있다고 하지만 사실 바로 옆에는 생(生)이 있다.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어둠이 없다면 생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