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病)은 생과 사의 갈림길이다. '병'에는 삶에 대한 희망과 죽음의 공포가 공존한다. 가장 무서운 병은 발병하면서부터 회생 의지를 꺾어버리는 병이다.
바로 절망이다. 절망 세포가 순식간에 희망 세포를 삼켜버리고 나면 살아도 살아있는 것이 아닌 '식물인간'이 돼 버린다.
LA한인타운에서 부동산 에이전트 일을 하고 있는 임수경(57.리맥스 트라이시티 소속)씨. 소위 '멀티-밀리언 달러 클럽'에 속해 있는 잘 나가는 에이전트다. 남가주이화여대총동문회에서 4년째 회장과 이사장을 연임하면서 동문들의 화합을 이끄는 데도 열심이다. 요즘같은 연말에는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란다.
하루하루를 웃음으로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 임씨가 두 아들을 연달아 교통사고로 잃고 그 자신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96년 2월: 믿을 수 없다. 후배를 데려다 주고 집에 돌아오던 맏아들 우영(18)이가 교통사고로 허망하게 갔다. 하늘이 무너졌다. 어떤 말로도 이 슬픔을 표현할 수가 없다.
#97년 1월: 둘째 주영(17)이와 새해 첫날 새벽 송구영신 예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데 대형 교통사고를 당했다. 눈을 뜨자마자 주영이부터 찾았다. 첫째 우영이를 보낸지 첫 기일이 얼마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남편은 주영이가 다른 병동에 있다고만 했다.
#97년 4월: 석 달간 입원치료가 끝나고 겨우 몸을 일으켰다. 주영이 병동에 가겠다고 했다. 그런데 남편의 표정이 이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주영이의 사망소식을 전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던 것이다. 며칠 밤을 남편과 부둥켜 안고 서럽게 울었다.
#98년 10월: 재활치료가 끝났다. 살아도 왜 사는지 모르겠는데 몸은 살고 싶었나 보다. 슬픔이 쌓여 절망이 됐다. 신앙의 힘으로도 고통을 이겨낼 수가 없었다. 깨어있기도 잠 들기도 힘들었다.
#99년 11월: 자식을 잃은 사람들의 모임에 나갔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런데 모두 죽은 자녀들과의 추억에만 빠져 있다. 위안이 될 줄 알았는데 오히려 슬픔만 더해갔다. 두 번 다시 이 모임에 참석하지 않기로 했다. 집에 돌아오는 길 하늘 나라의 두 아이가 절망에 빠져 있는 엄마의 모습에 슬퍼하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희망 세포 한 개가 피어나는 순간이다.
#99년 12월: 용기를 냈다. 아이들을 키우느라 10년이 넘도록 서랍 안에 넣어뒀던 부동산 에이전트 자격증을 다시 꺼내들었다. 남편도 다시 활기찬 모습으로 제자리에 돌아온 모습이다. 그렇게 두 아들을 가슴 속 한켠 깊은 곳에 묻었다.
#2009년 12월: 치열했던 삶 속에서 '나'라는 자아를 다시 찾았다. 일과 생활 사람의 소중함도 새삼 느껴진다. 얼마 전 아내를 잃었다는 한 남자가 연락을 취해왔다. 희망없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냐며…. 절망을 맛본 사람만이 진정한 자신을 찾는다고 달랬다. 스스로 멈춰놨던 삶의 시계 바늘을 다시 돌리는 순간 마음의 병은 치유되기 시작한다고. 곧 돌아올 두 아들의 기일에는 말해주고 싶다. 엄마 다 나았다고. 생이 다하는 순간까지 최선을 다해 살 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