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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가재가 노래하는 곳-한국 방문기 첫 번째

1  뒷뜰을 돌아봅니다. 훌쩍 키가 큰 백일홍, 꽃잎을 두어 개 남기고도 바람에 버티고 있는 코스모스가 손짓합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사람처럼 나뭇가지에 아직 푸른 꽃잎에게, 떨어진 낙엽 위에 눈길을 줍니다. 앙상해진 가지만 드러낼 나무들을 바라 보며 문득 누군가도 잠 못 이루고 뒤척일 짧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차고 문이 열리고 나는 밖으로 나옵니다. 차고 문이 닫히고 이제는 다른 세상에 발을 내미는 듯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과 조금 다른 길을 한 달간 다녀갈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의 웃음과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 나를 찾아보겠습니다. 비행기 이륙을 앞두고 긴 이야기 말하지 못하고 떠나 온 안타까움은 잠시 충분히 이해해 줄 하늘에 뿌릴 것입니다.   2  짐을 싸고 짐을 풀고 50파운드의 한계량을 맞추고 있어요. 한 벌 옷, 신발 한 켤레이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여행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도 욕심이 아닐지 생각이 듭니다. 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 아니,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것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3  나를 위한 배려라고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생소한 질문이네요. 돌이켜 보면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었어요. 그게 마땅한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치의 의심 없이 열심히 더 노력하며 살았어요. 공항 로비에서 살사 한 접시와 마가리타 한 잔을 주문했어요.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려요. 이 작은 순간이 나를 위한 배려라 여겨져요. 이제 시작이에요. 막무가내로 열정을 폈던 시간과 땀과 노력이 나를 위한 것이었나요? 이제 하늘을 나를 거예요. 얼마 후면 지구의 반대편 막연히 그리운 그곳의 땅을 밟을 거예요. 엎드려 키스하지 않아도 벌써 그 감흥은 내 안에 느껴져요. 한 달간의 여행은 온전히 나를 위한 배려가 될 거예요. 늦기 전에요.   4  가재가 노래하는 곳   오빠는 떠나면서 말했다 위험하면 깊숙한 곳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숨어 사람들은 그를 습지에 사는 소녀라 불렀다   오빠가 떠난 후 처음으로 아픔이 가슴에 찾아왔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버텨왔다는 걸   습지엔 선과 악이 없었다 단지 자신을 지켜가기 위함일 뿐 판단은 늘 당신들의 몫이었다 습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펼쳐진 평온을 바라보는 마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의 얼굴을 보는듯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5  오늘이 한국에서의 첫 아침이에요 오랜만에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리네요. 산이 보이는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고 있어요. 퇴촌이라고 하는 곳이에요. 양옆으로 듬성듬성 전원주택이 있어요. 길옆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가요.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하얀 산등성이가 고즈넉하네요. 시카고의 새벽길이 아닌 경기도의 어느 작은 마을을 걷고 있어요. 막다른 골목인가 하면 다시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점점 산이 가까워져요. 하루가 시작됐던 첫걸음이 벌써 지나간 긴 추억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요. 고목골길이라는 곳이 나오네요. 새들이 울고 아니, 노래하는 거겠죠. 우리 인생길도 이런 외길이 아닐지 생각해요. 산 정상에 오르면 우린 우리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다볼 수 있겠지요. 좁고 거친 힘들었던 길도 평탄하게 드러난 행복했던 길도 보이겠죠. 또 가을빛으로 붉게 우거진 깊은 산도 보이겠지요. 이쯤에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거친 호흡 내려놓을게요. 어디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풀 냄새가 좋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의 결에 긴 목을 움츠려요. 새벽안개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와요. 찬 바람에 손이 곱아요.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 가재가 한국 방문기 한국행 비행기 비행기 이륙

2025.11.0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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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과 만났다] 자연과 우리는 하나…가재가 노래하는 곳

 책을 읽고 나면 한동안 그 책의 세계에 빠져 책과 헤어지는 게 안타까운 책들이 있다. 쥐스킨트의 ‘향수’가 그랬고,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가 그랬다. 그런데 ‘가재가 노래하는 곳’은 읽은 지 한 달이 지났음에도 여전히 주인공이 누린 완벽한 자유, 야생성을 잃지 않은 한 인간이 자연과 어우러져 풍겨내는 그 과도한 매력에 빠져 다른 책으로 건너갈 수가 없으니 이제는 이 책이 내 사전 최고의 책이 되어버린 것이다.   책은 아버지의 무능과 폭력으로, 여섯살 때 엄마가 곁을 떠나고, 열 살 때는 형제들도 모두 떠나, 외진 바닷가 습지에서 홀로 처참한 가난과 외로움과 차별의 문제에 한꺼번에 노출된 채 살아가는 ‘카야’라는 소녀의 성장소설이면서, 테이트라는 소년과의 사랑 이야기면서, 살인사건이 첨가된 스릴러물이다. 소설의 기본 중에 기본요소인 ‘흥미’ 면에서 그 어떤 소설에도 뒤지지 않으나, 이 책에는 그 어떤 책에서도 맛볼 수 없었던  ‘맑음’이 있다.     그림처럼 눈 앞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자연, 그 자연과 한 인간과의 완벽한 교감, 우리 인간이 결국 다 같이 하나의 자연이라는 사실, 그리고 계산 없이느릿느릿, 겉치레에 치중하지 않고 내면에만 충실해도 삶은 얼마든지 진화될 수도 행복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을 조용하고도 품위 있게 알려준다. 그 점에서 비슷한 내용의 다른 통속소설과 완벽하게 구별된다.   책의 작가 ‘델리아 오언스’는 70평생 생태학자의 길을 걷다가, 2018년 첫 소설작품으로 이 책을 발표했다고 한다. 평생을 통한 생태계연구로 비할 데 없이 아름답게 자연을 묘사할 수 있었던 점에 경이에 가까운 존경심이 일었다. 한 가지 일로 뿌리를 내리고, 튼실한 열매를 맺게 하는 삶. 이보다 더 부러운 삶이 있을까…언젠가 그런 습지에서, 문명의 이기와 잡다한 관계들을 뒤로 한 채, 외롭고도 외롭게 꼭 한번 살아보고 싶다는 생경한 소원을 갖게 한 이 책은 다만, 최고의 반전이 있는 마지막 부분이 너무 충격적이어서 주춤거려지기는 했으나, 이보다 더 매혹적으로 자연 친화적인 우리 본래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면서, 나도 모르게 스르르 위로를 받게 하는 책은 글쎄…나의 짧은 독서력 안에서는 없었던 듯하다. 끝나지 않은 코로나의 뭉근한 무게로 앞이 뿌연했으나, ‘바람이 분다…살아봐야겠다…’는 기운을 나도 모르는 사이 얻게 해주었다.     그런데, 드디어, 상상 속의 바닷가가 어떻게 실제 모습으로 드러날지 참으로 기대됐던 영화가 올여름 극장 개봉을 했다. 아. 어찌 감히 책 속의 그 아름다움을 영화가 표현해낼 것이라 기대를 했던 것일까. 이 책을 발굴해서 40주 연속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가 되는 길을 열어주고, 영화로까지 제작한 배우, 리스 위더스푼의 시도가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주인공 선정을 시작으로, 어찌나 편편하고 좁은 시야로 영화가 전개되든지 실망스럽기 짝이 없었다. 책을 능가하는 영화는 있을 수가 없다는 진리(?)를 새삼 절감하며 책 속에서 품은 나만의 풍광을 더더욱 그리워하게 되었다. 그래도 스토리라인 자체가 튼실하기 때문인지, 나온지 2개월이 지났음에도 영화는 아직 극장 상영 중이다. 박영숙 / 시인이 작품과 만났다 가재가 자연 시야로 영화 바닷가 습지 올여름 극장

2022.09.28.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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