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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가재가 노래하는 곳-한국 방문기 첫 번째

Chicago

2025.11.03 12:47 2025.11.03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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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철]

[신호철]


뒷뜰을 돌아봅니다. 훌쩍 키가 큰 백일홍, 꽃잎을 두어 개 남기고도 바람에 버티고 있는 코스모스가 손짓합니다. 돌아오지 못할 길을 가는 사람처럼 나뭇가지에 아직 푸른 꽃잎에게, 떨어진 낙엽 위에 눈길을 줍니다. 앙상해진 가지만 드러낼 나무들을 바라 보며 문득 누군가도 잠 못 이루고 뒤척일 짧은 숨소리를 듣습니다. 차고 문이 열리고 나는 밖으로 나옵니다. 차고 문이 닫히고 이제는 다른 세상에 발을 내미는 듯합니다. 내가 걸어온 길과 조금 다른 길을 한 달간 다녀갈 것입니다. 그 속에서 만나게 될 사람들의 웃음과 분주한 발걸음 속에서 나를 찾아보겠습니다. 비행기 이륙을 앞두고 긴 이야기 말하지 못하고 떠나 온 안타까움은 잠시 충분히 이해해 줄 하늘에 뿌릴 것입니다.
 

짐을 싸고 짐을 풀고 50파운드의 한계량을 맞추고 있어요. 한 벌 옷, 신발 한 켤레이면 가능할지도 모르는 여행을 이렇게 준비하는 것도 욕심이 아닐지 생각이 듭니다. 다 내려놓아야 할 것들, 아니, 다 내려놓고 떠나야 할 것들을 챙기고 있습니다.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는 인생이라고 말하고 있는 내가 부끄럽기도 합니다.
 

나를 위한 배려라고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어 생소한 질문이네요. 돌이켜 보면 나를 위한 삶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한 삶이었어요. 그게 마땅한 삶이라고 생각했어요. 한 치의 의심 없이 열심히 더 노력하며 살았어요. 공항 로비에서 살사 한 접시와 마가리타 한 잔을 주문했어요. 한국행 비행기를 기다려요. 이 작은 순간이 나를 위한 배려라 여겨져요. 이제 시작이에요. 막무가내로 열정을 폈던 시간과 땀과 노력이 나를 위한 것이었나요? 이제 하늘을 나를 거예요. 얼마 후면 지구의 반대편 막연히 그리운 그곳의 땅을 밟을 거예요. 엎드려 키스하지 않아도 벌써 그 감흥은 내 안에 느껴져요. 한 달간의 여행은 온전히 나를 위한 배려가 될 거예요. 늦기 전에요.
 

가재가 노래하는 곳
 
오빠는 떠나면서 말했다
위험하면 깊숙한 곳
가재가 노래하는 곳에 숨어
사람들은 그를 습지에 사는 소녀라 불렀다
 
오빠가 떠난 후 처음으로
아픔이 가슴에 찾아왔다
얼마나 많은 일들을 버텨왔다는 걸
 
습지엔 선과 악이 없었다
단지 자신을 지켜가기 위함일 뿐
판단은 늘 당신들의 몫이었다
습지를 아는 사람은 없었다
 
펼쳐진 평온을 바라보는 마음
오랫동안 만나지 못한
친구의 얼굴을 보는듯하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었다 
 

오늘이 한국에서의 첫 아침이에요 오랜만에 닭이 홰를 치는 소리가 들리네요. 산이 보이는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고 있어요. 퇴촌이라고 하는 곳이에요. 양옆으로 듬성듬성 전원주택이 있어요. 길옆으로 흐르는 시내를 따라가요. 아직 안개가 걷히지 않아 하얀 산등성이가 고즈넉하네요. 시카고의 새벽길이 아닌 경기도의 어느 작은 마을을 걷고 있어요. 막다른 골목인가 하면 다시 길이 생기고 그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점점 산이 가까워져요. 하루가 시작됐던 첫걸음이 벌써 지나간 긴 추억처럼 길게 늘어져 있어요. 고목골길이라는 곳이 나오네요. 새들이 울고 아니, 노래하는 거겠죠. 우리 인생길도 이런 외길이 아닐지 생각해요. 산 정상에 오르면 우린 우리가 걸어온 구불구불한 길을 내려다볼 수 있겠지요. 좁고 거친 힘들었던 길도 평탄하게 드러난 행복했던 길도 보이겠죠. 또 가을빛으로 붉게 우거진 깊은 산도 보이겠지요. 이쯤에서 되돌아가야 할 것 같아요. 거친 호흡 내려놓을게요. 어디에서나 어느 곳에서나 풀 냄새가 좋고 나무를 스치는 바람의 결에 긴 목을 움츠려요. 새벽안개가 산비탈을 타고 내려와요. 찬 바람에 손이 곱아요. (시인, 화가)
 

신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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