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보고 싶은 연극이 있었다. 한국의 대표적 원로배우 신구(87)와 박근형(83) 두 분이 열연하는 〈고도를 기다리며〉가 그 작품이다. 연기경력 60년이 넘는 원로배우들의 농익은 연기를 감상하는 것만도 벅찬 감동인데, 게다가 그 작품이 〈고도를 기다리며〉라니…. 극작가 사무엘 베케트(1906~1989)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부조리극의 대명사로 불리는 긴 설명이 필요 없는 현대의 고전이다. 인간 존재의 의미와 무의미에 대한 질문을 무대언어로 살려낸 이 작품은 1953년 프랑스 파리에서 초연된 이후 지금까지 세계 곳곳에서 꾸준히 공연되고 있다. 처음 공연되었을 때에는 일반 대중은 물론 연극 평론가들에게까지 “도무지 무슨 내용인지 이해가 안 된다”는 혹평에 시달렸지만, 공연이 거듭될수록 공감대가 넓어졌고, 베케트가 1969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에는 한층 더 유명해졌다. 이 연극은 한국에 유달리 사랑받으며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임영웅 연출 버전은 1969년 초연된 이래 거의 매해 장기공연을 가지면서, 수많은 배우들이 무대를 빛냈다. 이번 공연은 한국판 중 최고령 원로배우들의 열연으로 신드롬을 일으키면서, 전국을 순회하며 공연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꼭 보고 싶었지만, 연극 하나 보겠다고 한국까지 갈 팔자는 못 되는지라, 그저 토막 영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꾹 참아야 했다. 이 공연을 보고 싶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원로 여배우 박정자(82) 씨가 한국 공연 역사상 첫 여배우 출연으로 화제를 모았고, 소년 역을 여배우가 맡았기 때문이었다. 어떤 무대가 될지 상상만 해도 흥미로웠다. 왜냐하면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는 금녀(禁女)의 작품으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극작가 베케트는 이 작품에 여배우가 등장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워낙 유명하고 자주 널리 공연되는 작품인지라, 연출가나 배우들은 자기 나름의 개성을 살리고 다양한 해석을 하고 싶어 하는데, 완고하게 용납하지 않았다. 그저 금지하는 정도가 아니라, 소송을 제기하는 등 적극적으로 막았다. 예를 들어, 베케트는 1988년 네덜란드의 한 극단이 여배우들을 캐스팅해서 공연을 준비하자 직접 소송을 제기했다. 당시 베케트가 말한 반대 이유는 “여성은 전립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극중 인물이 종종 소변을 보기 위해 무대를 떠나는 설정에 대해 전립선 문제가 있어서라는 설명이다. 베케트 사후에도 여배우 출연과 관련한 소송이 제기됐다. 물론, 베케트 측이 모든 경우 승소한 것은 아니고, 예외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극작가 베케트는 생전에 자신의 희곡 그대로 무대에 올릴 것을 요구했다. 새로운 해석이 작품을 왜곡시킬 수 있다고 우려한 것이다. 그리고, 저작권을 관리하는 ‘베케트 에스테이트’는 세계 각국에서 대본 수정, 음악 사용 등 희곡에 없는 시도를 할 때마다 소송 등 제동을 거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번 신구, 박근형의 〈고도를 기다리며〉에서도 앙코르 공연에는 박정자와 소년 역의 여배우는 참가하지 못했다. 저작권 가진 ‘베케트 에스테이트’의 강력한 요구 때문이었다고 한다. 이런저런 이유를 댔지만, 요점은 ‘여배우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좀 어처구니가 없다. 이 작품의 주제가 인간의 보편적 이야기인데 성별의 차이가 무슨 의미를 갖는지? 여자 햄릿이 버젓이 무대에 오르는 세상이다. 박정자는 이렇게 자기 생각을 밝혔다. “베케트 에스테이트가 〈고도를 기다리며〉 앙코르 공연에 여배우 출연을 안 된다고 한 결정은 넌센스라고 생각한다. 하루가 다르게 세상이 변하는데, 너무 시대착오적 아닌가. 만약 베케트가 지금 살아있더라도 여배우 출연에 대한 과거의 태도를 고수할지 모르겠다.” 나도 베케트 선생님께 묻고 싶다. 고도는 신(神)인가? 전립선이 인간의 실존과 무슨 관계인가? 대답이 참 궁금하다. 특히 전립선의 부조리에 대해서…. 장소현 / 극작가·시인문화산책 여자 고도 여배우 출연 베케트 에스테이트 극작가 베케트
2025.09.11. 18:56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구절이다. 막이 오르면 텅 빈 무대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외로운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떠돌이는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에스트라공은 벌판 한가운데 앉아 장화를 벗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블라디미르가 입장한다. 떠돌이 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사소한 대화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채우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누군지 모르는 그를 기다린다. 1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그래도 2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던 나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연극은 시작과 같은 방식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너무나 비관적이지 않은가? 누가 이 연극을 보러 가겠는가?’ 나 혼자 중얼거리며 극장을 나왔던 것이 1969년 한국 초연의 임영웅 연출을 보았던 나의 20대였다. 이 연극을 다시 보게 된 것은 2013년도 12월 말, 브로드웨이의 CORT Theatre에서였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한 브로드웨이의 한가운데여서였을까? 무작정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측은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 남의 나라에 와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나는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훤히 뚫린 길을 따라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전에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세 번째로 이 연극을 다시 본 것은 4년 전 여름, 더블린에서였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연기하는 단막극이었다. 제임스 조이스, 새뮤얼 베켓, 오스카 와일드 등 문학의 거장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듀크(Duke)’라는 술집에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그 분위기가 마치 중세기로 되돌아 간듯했다. 술병을 높이 치켜들고 ‘I will have a pint!’라는 아이리시 가요를 부른 후 두 명의 배우가 나와서 2막의 한 부분을 연기한다. 그 후 우리는 모두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배우에게 다가가 “너는 ‘고도’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혹시 하느님 아닌가?” 하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지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문현답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無)에 대한 연극으로 유명하다. 스물두 살에 탈출의 꿈을 이루었고 파리에 상륙하여 제임스 조이스를 도와 일했고, 파리의 어느 포주에게 찔려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전쟁에 참여하여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하던 중 게슈타포에 거의 체포될 뻔했던 작가, 그는 그의 육체적·정신적 모든 고통을 ‘고도를 기다리며’에 쏟았다고 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왜 지구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는 한 쌍의 인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빈약한 가정을 하고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Godot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의미와 방향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자신의 허무한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고귀함을 얻게 된다는 연극비평가들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다림은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다림 그 자체로 희망적이다. 이춘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고도 떠돌이 생활 제임스 조이스 사뮈엘 베케트
2022.12.11. 18:10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뮈엘 베케트의 연극 ‘고도를 기다리며’의 첫 구절이다. 막이 오르면 텅 빈 무대에 말라비틀어진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아무도 다니지 않는 외로운 시골길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라는 두 떠돌이는 ‘고도’라는 이름의 사람을 기다린다. 에스트라공은 벌판 한가운데 앉아 장화를 벗으려고 애를 쓰고 있고 블라디미르가 입장한다. 떠돌이 두 남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나 사소한 대화로 하루하루의 시간을 채우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누군지 모르는 그를 기다린다. 1막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난다. 그래도 2막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겠지 하던 나의 기대는 무참히 무너지고 연극은 시작과 같은 방식으로 그 막을 내린다. ‘이 연극은 너무나 비관적이지 않은가? 누가 이 연극을 보러 가겠는가?’ 나 혼자 중얼거리며 극장을 나왔던 것이 1969년 한국 초연의 임영웅 연출을 보았던 나의 20대였다. 이 연극을 다시 보게 된 것은 2013년도 12월 말, 브로드웨이의 CORT Theatre에서였다. 크리스마스트리가 화려한 브로드웨이의 한가운데여서였을까? 무작정 기다리는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에게 측은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연극을 보는 내내 나 자신을 보는 것 같았다. 사실 돌이켜 보면 오랜 세월, 남의 나라에 와서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나는 계절이 바뀌기를 기다리고, 훤히 뚫린 길을 따라 누군가를 만나기를 기다리고, 아이들이 꽃처럼 피어나기를 기다리고 우리의 때가 오기를 기다렸다. 그전에 어디론가 떠나 버린다면 모든 일이 허사로 되돌아갈 것만 같았다. 늦은 밤, 롱아일랜드로 가는 기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면서 늙은 방랑자들의 모습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세 번째로 이 연극을 다시 본 것은← 4년 전 여름, 더블린에서였다. 술집을 돌아다니면서 연기하는 단막극이었다. 제임스 조이스, 새뮤얼 베켓, 오스카 와일드 등 문학의 거장들이 자주 드나들었다는 ‘Duke’라는 술집에 들어서니 고풍스러운 그 분위기가 마치 중세기로 되돌아 간듯했다. 빨간 벽돌로 둘러싸인 이층의 작은 방에는 독일, 영국, 오스트리아, 프랑스, 슬로바키아 등 주위의 여러 나라에서 온 사람들이 공연이 시작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술병을 높이 치켜들고 ‘I will have a pint!’라는 아이리시 가요를 부른 후 두 명의 배우가 나와서 2막의 한 부분을 연기한다. 그 후 우리는 모두 다른 술집으로 이동하기 위해 밖으로 나갔다. 블라디미르 역을 맡았던 배우에게 다가가 “너는 ‘고도’가 누구라고 생각하니? 혹시 하느님 아닌가?” 하고 물었다. “나도 모르겠다. 내가 아는 것은 지금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뀌기를 기다린다는 것이다”라고 했다. 우문현답이었다. ‘고도를 기다리며’는 무(無)에 대한 연극으로 유명하다. 스물두 살에 탈출의 꿈을 이루었고 파리에 상륙하여 제임스 조이스를 도와 일했고, 파리의 어느 포주에게 찔려 간신히 살아남았으며 전쟁에 참여하여 레지스탕스를 위해 일하던 중 게슈타포에 거의 체포될 뻔했던 작가, 그는 그의 육체적 정신적 모든 고통을 ‘고도를 기다리며’에 쏟았다고 한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자신들이 왜 지구에 오게 되었는지 모르는 한 쌍의 인간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에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이라는 빈약한 가정을 하고 나름대로 깨달음을 얻기 위해 Godot을 열심히 찾고 있다. 의미와 방향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으므로 자신의 허무한 존재를 뛰어넘을 수 있는 일종의 고귀함을 얻게 된다는 연극비평가들의 이야기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기다림은 목적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기다림 그 자체로 희망적이다. 이춘희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고도 떠돌이 생활 제임스 조이스 독일 오스트리아
2022.12.07. 21: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