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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인연들이 가져다준 축복

내 삶을 돌아보면 우연처럼 시작된 인연들에 의해 많이 달라졌다. 주한 미군에 파견 근무를 하는 카투사(KATUSA)로 군 생활을 한 것도 그중 하나다.     경기도 파주의 문산농업고등학교 2학년에 재학 중이던 1956년 12월 엄동설한에 같은 반 친구와 함께 입대 영장을 받았다. 입대와 동시에 모든 꿈과 희망이 수포로 돌아갈 것 같았다. 고등학교 졸업장이라도 없으면 취업 기회도 많지 않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훈련이 끝나자 운 좋게 카투사로 선발이 되었다. 그리고 배치된 곳이 모교 인근에 주둔하고 있던 미 제 1 기갑사단이었고 보충대 인사과에서 군번을 찍는 것이 임무였다. 당시 미군 군번표(U.S. Army dog tag)는 성명과 군번, 그리고 종교를 기재해 동판 기계로 찍어 만들었다.   주어진 임무는 밤늦게까지라도 마치며 성실함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직속 상관인 미군 인사과장과 친해졌다. 그에게 고등학교 2학년 재학 중 입대를 했고, 학교 졸업이 꿈이라는 말도 했다.     며칠 후 인사과장은 내게 중대장의 통학증을 받아 주었다.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렇게 병역 의무를 하면서 1년을 더 공부해 영광의 졸업장을 받았다. 그리고 인사장교와 부대장의 허가를 받아 야간 대학에도 진학할 수 있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미군 전우들이 자발적으로 돈을 모아 등록금을 보태줬다. 지금도 그들의 후원에 무한 감사함을 갖고 있다. 카투사 복무는 내게 큰 행복이고 은혜였다.   1959년 10월 제대를 했다. 미군 근무 경력 덕에 미군 사령부 안전관리국의 안전사고 분석관(Safety Manager)으로 취업했다. 열심히 일했더니 우수직원으로 뽑혔고 1968년 사단장의 추천과 미8군 사령관의 최종 승인으로 뉴욕대에서 안전관리학 교육도 받을 수 있었다.   1970년에는 주한미군의 군수품을 운송하는 작전 차량부대로 전근, 5년간 근무했다. 그 기간 차 사고는 75%나 급감했고, 운전병 사망 사고는 한 건도 없었다. 우수한 근무 실적과 한미 유대 관계 강화에 기여한 공로로 미 육군 2등 공로훈장을 받았다. 미국 정부를 대신해 주한 미 대사가 승인해야 받을 수 있는 특별한 훈장이다.   그 후 특별 이민비자(Special Immigration Visa)를 받아 1976년 LA에 정착했다. 그리고 에스크로 회사를 운영하는 고등학교 후배를 만난 인연으로 에스크로 회사를 설립해 42년째 운영하고 있다. 그 후배에게도 무한한 감사를 보낸다.   세월 따라 인생은 변한다는 말이 있다. 각자 만남과 인연으로 인생길을 이어가고, 그 운명 속에서 만난 사람들에게서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카투사로 근무한 것이 내겐 행운과 축복이었다. 하지만 기회라는 것은 준비된 사람만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항상 성실하고 따뜻하게 사람들을 대하려 노력했고 그런 진심이 결국 사랑으로 열매로 맺은 것 같다. 나의 인생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고, 용기를 주었으면 한다. 오늘도 하나님께 감사한 마음이다. 조익현 / 한미 에스크로 대표열린광장 인연 축복 미군 인사과장 고등학교 졸업장 미군 근무

2025.08.06. 1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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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살도 해병 될수 있다…해군, 한인 지원자 모집

다양한 문화를 접하며 세계를 탐험하는 기회를 접할 수 있는 해군을 모집하고 있다.   국방부는 인종, 성별에 상관없이 17~39세의 지원자를 받고 있다. 특히 이중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 경우 추가 혜택이 주어진다.   다만 자격은 고등학교 졸업장이 있는 영주권 또는 시민권자만 지원이 가능하다.   다니엘 현(사진) 해군 모병관은 "다른 군대보다 육체적인 훈련이 덜하다"며 "바다 위에서는 물론 세계 각지에 주둔하며 일할 기회가 주어지는 게 해군만의 특별한 혜택"이라고 소개했다.   현 모병관은 "해군은 다양한 멘토십 프로그램이 있어 직업 학교에 갈 수 있다"며 "모든 게 무료로 진행되며 자격증까지 취득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제대 후 학업을 계속 진행하고 싶어하는 전직 군인에게는 학자금도 무상 지원해준다"고 말했다.   해군에 따르면 파트 타임 복무 프로그램도 있어 한 달에 최소 2번 해군 기지에 가서 근무하면 된다. 횟수 및 날짜는 조정이 가능하며 예비군 혜택을 받을 수 있다.   ▶문의: (805)574-3110, 카카오톡 ID(NAVY.HYUN), 홈페이지(navy.com) 김예진 기자모집 기사 모집 기사 고등학교 졸업장 예비군 혜택

2022.09.13.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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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침에] 101세 할아버지의 고교 졸업장

‘꿈을 이루는 데 늦은 때는 없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 101세의 메릴 피트먼 쿠퍼가 영예로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쿠퍼는 인종차별의 시대에 성장했다. 그는 버지나아주 흑인 학교를 8학년까지 다녔다. 그 후 스토터 스쿨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흑인만 다니는 고등학교였다.   아버지 없이 쿠퍼를 혼자 키우던 어머니는 아들의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정부로 일했다. 학업도중 쿠퍼는 어머니가 더 이상 학비를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갔다. 그 해가 1938년이었다.     쿠퍼는 가정을 돕기 위해 일을 했다. 1945년 시의 첫 번째 흑인 버스 운전기사가 됐다.  교통연합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3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2018년 그는 80년 만에 스토터 학교를 방문했다. 지금은 하퍼스 페리 국립 역사공원의 일부분이 됐다. 그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공원 역사 전문가와 얘기를 나누었다.   쿠퍼는 항상 고등학교를 졸업 못한 것에 대해 슬퍼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 갈수록, 더 늦었다고 생각해 차일피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사위인 로드 베커링크가 계획을 세웠다. 그는 하퍼스 페리 공원의 직원에게 장인의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퍼슨카운티 교육구는 쿠퍼에게 큰 선물을 준비했다.     올해 3월 베커링크와 쿠퍼의 입양 딸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퍼스 페리 호텔로 갔다. 그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졸업식 모자와 가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퍼슨카운티 교육감이 영예로운 학위를 수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온라인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쿠퍼는 “이렇게 행복한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속담에 ‘꿈을 잉태하면 해산의 날은 반드시 온다’고 했다. 80세가 넘은 나는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을 종종 했다. 이 기사를 읽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쿠퍼는 1921년에 태어나 미국의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포했어도 여전히 흑백차별이 심했던 시대였다. 세계 1차, 2차 대전과 대공황 시대를 지나면서 온갖 고난과 인종차별을 당하며 살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민권운동을 했지만 차별은 여전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긍정의 마인드로 평생을 살았고 101세에 그의 꿈을 이뤘다.     쿠퍼 할아버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김수영 / 수필가이 아침에 할아버지 졸업장 쿠퍼 할아버지 고등학교 졸업장 고교 졸업장

2022.05.18. 20:10

[이 아침에] 101세 할아버지의 고교 졸업장

 ‘꿈을 이루는 데 늦은 때는 없다.’ 워싱턴포스트의 보도에 따르면 올해 101세의 메릴 피트먼 쿠퍼가 영예로운 고등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쿠퍼는 인종차별의 시대에 성장했다. 그는 버지나아주 흑인 학교를 8학년까지 다녔다. 그 후 스토터 스쿨의 입학시험에 합격했다. 흑인만 다니는 고등학교였다     아버지 없이 쿠퍼를 혼자 키우던 어머니는 아들의 학교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기 위해 가정부로 일했다. 학업도중 쿠퍼는 어머니가 더 이상 학비를 충당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필라델피아로 이사를 갔다. 그 해가 1938년이었다.     쿠퍼는 가정을 돕기 위해 일을 했다. 1945년 시의 첫 번째 흑인 버스 운전기사가 됐다.  교통연합회에서 지도자로 활동했으며 3명의 아이를 입양했다.     2018년 그는 80년 만에 스토터 학교를 방문했다. 지금은 하퍼스 페리 국립 역사공원의 일부분이 됐다. 그는 그곳에서 근무하는 공원 역사 전문가와 얘기를 나누었다.   쿠퍼는 항상 고등학교를 졸업 못한 것에 대해 슬퍼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 갈수록, 더 늦었다고 생각해 차일피일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의 사위인 로드 베커링크가 계획을 세웠다. 그는 하퍼스 페리 공원의 직원에게 장인의 이야기를 했다.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제퍼슨카운티 교육구는 쿠퍼에게 큰 선물을 준비했다.     올해 3월 베커링크와 쿠퍼의 입양 딸들은 아버지와 함께 하퍼스 페리 호텔로 갔다. 그가 호텔에 도착했을 때 졸업식 모자와 가운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제퍼슨카운티 교육감이 영예로운 학위를 수여했다.     가족들과 친구들은 온라인으로  그 장면을 지켜보았다. 쿠퍼는 “이렇게 행복한 날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고 소감을 밝혔다.     속담에 ‘꿈을 잉태하면 해산의 날은 반드시 온다’고 했다. 80세가 넘은 나는 어떤 일을 하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말을 종종 했다. 이 기사를 읽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쿠퍼는 1921년에 태어나 미국의 어려운 시대에 살았다. 남북전쟁이 끝나고 링컨 대통령이 노예해방을 선포했어도 여전히 흑백차별이 심했던 시대였다. 세계 1차, 2차 대전과 대공황 시대를 지나면서 온갖 고난과 인종차별을 당하며 살았다. 마틴 루터 킹 주니어 목사가 민권운동을 했지만 차별은 여전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긍정의 마인드로 평생을 살았고 101세에 그의 꿈을 이뤘다.     쿠퍼 할아버지에게 큰 박수를 보낸다.  김수영 / 수필가이 아침에 할아버지 졸업장 쿠퍼 할아버지 고등학교 졸업장 고교 졸업장

2022.05.1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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