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함석헌 선생의 이 말씀은 매우 복합적이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해방둥이의 나이가 올해 80세다. 달리 말하면, 많은 국민이 일제강점기를 잘 모른다는 이야기다. 그 시대의 아픔을 실제로 체험한 사람은 많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지나간 한 시대의 기억을 학교에서 배우거나, 글이나 말로 얻은 간접경험이 있을 뿐이다. 젊은 세대는 더 실감이 없다. 교과서로 배운 일방적 주입식 교육이나 대중문화와 관광여행을 통한 인식이 거의 전부다. 지난 80년간 한일관계는 양국의 정치 상황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리며 갈등을 겪어왔다. 하지만, 세대가 바뀌고 시대가 흐름에 따라 자연스레 개선될 것이다. 그럴 수밖에 없다. 말 그대로 세월이 약이다. 하지만, 무시하거나 잊어서는 안 될 숙제가 많다. 민족적 정체성과 정신적 자존감에 관한 많은 문제들은 슬그머니 넘어가서는 절대 안 될 문제들이다. 그런 근본적 문제 중의 하나를 예로 들면, 우리 역사에는 자주적 근대가 없다는 사실이다. 이건 대단히 중요한 문제다. ‘근대’라는 낱말의 뜻을 사전은 ‘현대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 가까운 과거의 시대’라고 설명한다. 서양의 역사에서는 고대, 중세, 근대로 구분하는데, 우리는 여기에다 전통적 왕조별 시대구분을 조합하여 고대(고조선-통일신라), 고려시대, 조선시대, 근대(일제강점기), 현대(8.15광복 이후)로 구분한다. 근대는 왕조시대와 현대 사회를 이어주는 징검다리다. 한 나라, 한 사회의 방향과 성격, 철학 등 기본골격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시기다. 건물로 치면 기초공사요, 한 개인으로 말하면 어린이와 어른 사이의 인격을 형성하는 사춘기 같은 민감하고 중요한 시기인 셈이다. 그런데, 우리 역사에서는 근대가 바로 일제 식민지 시대였다. 나라 잃은 서글픈 시절, 아무것도 우리 힘으로 자주적으로 할 수 없는 아픈 세상이었다. 한국 사회 전반의 기초가 우리의 의지가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닦여졌고, 현대화의 바탕이 될 서양 문물도 모두 일본을 통해서 받아들였다. 우리의 뜻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사회 모든 분야에서 그랬다. 다른 분야에 대해서는 말할 처지가 못 되고, 내 전공인 미술을 예로 설명하자면 이런 식이다. 우리의 현대미술은 일본에서 공부한 유학생들이 배워온 서양미술로 시작된다. 그런데, 이 무렵 일본에서는 이미 인상파, 후기인상파 미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도 당연히 그런 미술을 배워서 돌아와 그대로 그렸다. 그러니까, 서양미술의 가장 오래된 철학적 바탕이자 전통인 리얼리즘, 사실주의를 건너뛴 것이다. 학자에 따라 해석이 다르겠지만, 서양미술을 받아들이면서 리얼리즘을 건너뛴 것은 문화적으로 결함(?)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리얼리즘이란 단순히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기술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 미술과 사회현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현대미술에는 치열한 리얼리즘 전통이 자리 잡을 공간이 거의 없었다. 80년대 초 민중미술이 등장하기까지는 그랬다. ‘구상화’라는 개념이 전부였다. “문제 제기 차원에서 굳이 말한다면, 한국의 근대미술은 ‘지나치게 예쁘기만 하다’는 것이다. (…) 미술도 인간의 영위인 이상, 인간들의 삶이 고뇌로 가득할 때에는 그 고뇌가 미술에 투영되어야 마땅하다.”-서경식 교수 역사의 방향을 결정짓는 중요한 시기를 우리 스스로 고민하고 설계하고 경영하지 못했다는 것은 치명적인 일이다. 근대 시기에 우리가 좀 더 당당하고 의젓하게 주인 노릇을 했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근대 자주적 근대 리얼리즘 전통 한국 사회
2025.08.21. 18:28
‘암시, 의지, 의식, 인상, 환경, 의무, 역설, 객관, 공황, 공명, 예술, 현상(現像), 권리, 공원, 긍정, 개인, 사회, 자유, 주의(主義), 상식, 상징, 인격, 인생관, 세기(世紀), 절대, 선천, 철학, 배경, 판권, 문화, 이성(理性), 이상(理想)’ 위의 낱말들은 일본의 대중적인 어원사전(소학관 출판)에 실려 있는 ‘메이지 시대의 번역어’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근대의 번역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이밖에도 무수히 많은 어휘가 번역어로 만들어졌을 겁니다. 번역어는 외래의 말을 자신이 쓰는 말로 바꾸어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어원사전에서는 위의 어휘를 모두 문화와 관련된 말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문화 중에서도 주로 철학이나 사회와 관련된 어휘로 보입니다. 저는 위의 단어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음이 놀랍습니다. 그것은 이 어휘들이 그대로 우리말 속으로 들어왔음을 의미합니다. 일본에서 번역하여 사용하던 말이 특별한 고민 없이 우리말이 된 것입니다. 사실 번역어에는 수많은 고민이 담깁니다. 이 말이 좋을지 저 말이 좋을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합니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옛 고전도 수없이 찾아보았겠지요. 비슷한 개념의 어휘를 찾아 번역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위의 어원사전에서 권리라는 말은 원래 중국의 고전 ‘순자’에서 나오는 것으로, 선천은 ‘역경’에 있는 말로, 문화는 옛 중국 서적에 보이는 말로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사회라는 말도 중국의 유학서 ‘근시록’이라는 책에 있는 말이라고 합니다. 물론 예전에 중국에 있던 말이라고 해도 현대의 개념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개념의 재창조가 이루어진 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떤 어휘로 확정하기까지도 많은 고민이 뒤따릅니다. 개인(個人)의 경우는 일개인(一個人), 각개인(各個人)이라는 말로 사용하다가 개인으로 굳어졌습니다. 상식이라는 말은 상견(相見), 상정(常情), 통감(痛感) 등이 쓰이다가 상식으로 정착됩니다. 환경(環境)이라는 말은 환상(環象)이라고 쓰이기도 했습니다. 패닉을 나타내는 공황(恐慌)이라는 말도 경황(驚慌)이라는 말로 철학에서는 쓰이기도 했습니다. 예술도 초기에는 미술(美術)로 번역하였던 말입니다. 공원(公園)도 유원(遊園), 소요원(逍遙園)이라는 말이 쓰였으나 공유지를 만인이 즐긴다는 의미에서 공원이 정착됩니다. 물론 이러한 고민은 일본에서 근대 시기에 이루어진 고민입니다. 우리하고는 관계없었던 과정입니다. 저는 번역은 사고를 깊게 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원래 자신의 말이 아니었던 문장이나 어휘를 자신의 말로 바꾸는 과정은 우리에게 새로운 경지를 보여줍니다. 철학이나 종교 등의 인문학 서적의 경우는 그 깨달음의 정도가 훨씬 높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근대화의 시기에 이런 번역의 시간을 잃어버렸습니다. 일본의 국권 침탈 속에서 자연스레 일본이 만들어 놓은 번역을 받아들이고 사용했습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수많은 철학 용어, 과학 용어, 학문 용어는 그런 기원 속에서 탄생하여 우리 속에서 자라온 것입니다. 저는 새로 번역을 하거나 새로 어휘를 만들어 사용하자고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이미 사회성을 얻은 어휘를 바꾸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단지 용어를 사용할 때, 그 용어가 정확히 개념을 담아내고 있는지 고민하고. 또 생각해 보는 과정을 거치기 바라는 것입니다. 조현용 / 경희대학교 교수아름다운 우리말 번역어 근대 사실 번역어 번역어 세상 철학 용어
2022.12.04. 17: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