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한인타운에는 베벌리 불러바드와 6가를 잇는 라파예트 파크 플레이스(Lafayette Park Place)라는 거리와 라파예트 공원이 있다. 라파예트 공원은 LA 초창기 부동산 개발로 큰 성공을 거둔 클라라 샤토 여사가 기부한 약 35만 평의 부지에 조성된 공원이다. 이 땅은 오늘날은 물론, 기부가 이뤄졌던 1895년 당시에도 손꼽히는 요지였다. 1896년 문을 열 당시 공원의 이름은 ‘선셋 공원(Sunset Park)’이었다. 이후 1919년, 미국과 프랑스 양국의 영웅으로 추앙받는 라파예트 장군을 기리는 의미에서 지금의 ‘라파예트 공원’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라파예트 장군은 프랑스 출신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 참전하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인물이다. 미국 곳곳에서 그의 이름이 지명으로 남아 있는 이유다. 실제로 미국 어디를 가도 라파예트라는 이름을 어렵지 않게 만난다. 도시와 산, 도로, 공원에 이르기까지 그의 이름이 널리 사용된다. 루이지애나주의 라파예트 시, 퍼듀대가 위치한 인디애나주의 웨스트 라파예트 시, 백악관 앞의 라파예트 광장은 대표적인 사례다. 왜 미국은 프랑스의 귀족이자 정치가였던 라파예트를 이토록 깊이 기릴까. 그의 삶을 들여다보면 그 이유는 분명해진다. 그의 본명은 ‘마르키 드 라파예트(Marquis de Lafayette)’. 프랑스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지만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잃고 작위와 막대한 재산을 상속받았다. 미국 독립전쟁 소식을 접한 그는 19세의 나이에 전쟁 지원을 결심했다.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에 강하게 매료됐고, 아버지가 영국과의 전쟁에서 전사한 배경은 그의 반영 감정을 더욱 굳혔다. 그러나 프랑스가 공식적으로 참전하지 않은 상황에서 그는 개인 자격으로 미국에 건너가야 했다. 가족과 정부의 반대도 거셌다. 그럼에도 라파예트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개인 재산을 털어 ‘라 빅투아르(La Victoire)’라는 배를 구입했고, 뜻을 같이하는 몇몇 프랑스 육군 장교들과 함께 몰래 프랑스를 떠났다. 스페인을 거쳐 대서양을 건넌 그는 미국에 도착해 영어를 익히며 대륙의회에 참전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전투 경험이 많지 않은 20세 안팎의 프랑스 귀족을 미군 지휘부가 쉽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웠다. 라파예트는 조건을 내세우지 않았다. 봉급도, 계급도 요구하지 않고 병사로라도 싸우겠다고 했다. 그의 열정과 겸손에 감동한 미국 지도부는 그를 조지 워싱턴에게 소개했고, 워싱턴은 라파예트를 사령부 특별 참모로 임명하며 장군 계급을 부여했다. 그는 20대 초반에 소장으로 임명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다. 프랑스 내 여론을 우호적으로 이끌려는 미국의 정치적 계산도 작용했지만, 선택은 결과적으로 옳았다. 라파예트는 워싱턴의 신뢰에 충실히 응답했다. 그는 직접 전장에 나서 싸웠고, 부상을 입으면서도 물러서지 않았다. 병사들과 함께 추위와 굶주림을 견뎠고, 1778년 배런힐 전투에서는 지휘관으로서의 역량도 입증했다. 그는 열정과 인격, 실력을 고루 갖춘 독립전쟁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프랑스로 돌아가 ‘신대륙의 영웅’으로 추앙받았다. 한때 프랑스군 사령관을 맡기도 했지만 나폴레옹 정권에는 참여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는 상속받은 토지에서 농장주로 살아갔다. 어느 해 극심한 흉년이 들었다. 마름병이 퍼지며 많은 이들이 굶주림으로 목숨을 잃었지만, 라파예트의 농장은 피해를 입지 않아 풍작을 거뒀다. 한 친구가 밀값 폭등을 언급하며 지금이야말로 팔 때라고 권하자, 라파예트는 단호하게 답했다. “지금은 팔 때가 아니라 나눌 때일세.” 그는 창고에 쌓아둔 밀을 이웃과 나누었다. 그의 위대함은 일상의 선택에서도 드러났다. 라파예트는 두 살에 아버지를, 열두 살에 어머니를 잃었고, 후견인이던 외할아버지마저 일찍 떠났다. 어린 나이에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았지만, 그는 특권에 안주하지 않았다. 자유와 독립이라는 가치를 삶으로 실천했고, 흉년에는 나눔으로 응답했다. 높은 이상과 실천적 삶을 함께 살아낸 인물, 그것이 미국이 프랑스의 귀족 라파예트를 오늘까지도 기억하는 이유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라파예트 공원 라파예트 장군 웨스트 라파예트
2025.12.17. 18:55
LA한인타운에서 테니스를 치는 이라면 ‘샤토(Shatto)’ 공원 코트를, 배드민턴을 즐기는 이라면 샤토 공원 체육관을 한 번쯤 이용해봤을 것이다. 월셔 불러버드와 3가를 잇는 샤토 플레이스, 그리고 4가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한 샤토 공원은 한인들에게 매우 익숙한 공간이다. 그러나 이 지명들이 LA의 초창기 개발자이자 자선가였던 조지 R. 샤토(George R. Shatto)와 클라라 샤토(Clara Shatto) 부부의 이름에서 비롯된 사실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조지는 1850년 8월 15일 오하이오주 메디나 카운티에서 부유한 농부 가정의 8남매중 7남으로 태어났다. 농사보다 사업에 관심이 많았고 성인이 되자 도시로 나가 점원으로 일하며 돈을 모아 잡화상점을 차렸다. 꼭 26번째 생일인 1876년 8월15일 그는 아내 클라라와 결혼했다. 부부는 미시간주 여러 도시를 다니며 작은 소매상 가게를 운영하며 돈을 벌었고, 그랜드 래피즈로 이주했다. 그후 부동산 개발업과 백화점 사업으로 꽤 많은 재산을 모았다. 하지만 이 시기에 첫 아들 월터를 생후 8개월 만에 잃는 아픔도 겪었다. 결혼 10년차가 되던 1886년 부부는 미시건에서 LA로 이주하며 새로운 삶을 시작했다. 부부는 익숙치 않은 곳에서도 사업 수완을 발휘했다. LA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부부가 지역 사회의 주목을 받은 이유는 두 가지 대형 프로젝트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1887년, 현재의 굿사마리탄 병원 부지에 지은 고급 주택 ‘샤토 맨션’이었다. 당시에는 보기 드물었던 품격 있는 주택으로, 지역 상류층의 관심을 한몸에 받았다. 두 번째는 카탈리나섬 개발이다. 부부는 샌타 카탈리나섬을 15만 달러에 매입한 뒤 관광 산업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휴양지 개발에 착수했다. 섬의 지도를 만들면서 새롭게 개발된 시가지의 이름을 샤토로, 항구는 샤토 항구로 부르자는 제안이 나왔다. 하지만, 조지 샤토는 이를 고사했다. 대신 전설 속 신화의 섬 이름에서 따온 ‘아발론(Avalon)’이라는 지명이 탄생했다.조지는 이후에도 자신의 이름을 따라 거리나 시설명을 짓는 것을 꺼렸다고 한다. 사업가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LA 이주 7년 만인 1893년 LA시 경찰 커미셔너에 임명돼 명성까지 거머쥐었다. 그러나 그해 5월30일 그는 열차충돌사고로 42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게 된다. 조지가 사망한 뒤에는 아내 클라라가 사업을 이었다. 부부는 사업적 성공만큼 나눔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조지는 생전에 35에이커의 땅을 LA시에 기부했고, 이는 1918년 프랑스 독립전쟁 영웅을 기리는 ‘라파예트 공원(Lafayette Park)’으로 조성됐다. 남편이 숨진 뒤에는 클라라가 기부 활동을 이어갔다고 한다. 그녀가 기부한 커먼웰스 선상 5가와 6가 사이의 대지는 LA에서 가장 오래된 개신교 교회 중 하나인 ‘제일회중교회(First Congregational Church)’의 터전이 됐다. 이외에도 여러 교회에 예배당 부지를 기부하고, 생후 8개월 만에 떠난 아들을 기리기 위해 포모나 대학에 장학금도 기탁했다. 이처럼 클라라는 LA의 초기 종교·교육·공공 인프라 조성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샤토 거리나 샤토 공원은 LA의 미래를 꿈꾸며 과감한 투자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한 부부의 삶이 남긴 대표적 유물이다. 길을 걷고 공원에 갈때마다 샤토 부부의 열정, 시대를 읽어낸 안목, 그리고 따뜻한 나눔의 가치를 되새기게 된다. 한 세기가 지난 오늘, 그들의 이름은 도시에 남아 조용히 이야기하고 있다. “당신의 성공은 지역과 함께 나눌 때 더 오래 기억된다”고.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샤토 부부 샤토 공원 클라라 샤토 샤토 항구
2025.12.01. 18:24
LA 한인타운에서 윌셔 길을 따라 다운타운 쪽으로 가다 보면 위트머(Witmer)와 만나는 언덕에 자리한 붉은 벽돌 건물이 시선을 끈다. 한국어로 통역과 안내 서비스를 제공해 한인들에게도 친숙한 종합병원인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PIH Health Good Samaritan Hospital)’이다. LA에서 가장 오래된 이 병원의 뿌리는 1885년 성공회 신앙인들이 세운 기독교 병원이었다. 당시 LA는 도시가 활발히 개발되던 시기였다. 성공회 수녀 메리 우드(Mary Wood) 여사는 올리브가(Olive Street)의 작은 통나무집에서 진료소를 열었다. 침상은 단 아홉 개. 그러나 병든 사람을 돌보려는 마음 하나만은 크고 단단했다. 그것이 오늘날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의 시작이었다. 초창기 진료소 사정은 열악했다. 메리 우드 수녀가 홀로 운영하며 어려움에 직면하자, 10년 뒤인 1895년 성 바울 성공회 교회(St. Paul’s Episcopal church)의 여성도들이 이 진료소를 인수했다. 이들은 병원을 단순한 치료 공간이 아닌, 도시의 병든 영혼을 돌보는 신앙의 공동체로 키워갔다. 병원 이름도 ‘성 바울 병원(St. Paul’s Hospital)’으로 바꾸면서 발전시켰다. 이후 병원은 더 넓은 사랑을 실천하고자 병원 이름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으로 다시 변경했다. 성경 누가복음에 등장하는 강도 만난 나그네를 외면하지 않았던 사마리아인의 선행처럼, 도시의 약자와 이방인을 품는 의료기관이 되겠다는 다짐이었다. 흥미롭게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이라는 이름은 전국에 14개나 있다. 캘리포니아주에만 LA, 샌호세, 베이커스필드 등 세 곳에 있으며, 오리건, 워싱턴, 뉴욕 등에도 같은 이름의 병원이 있다. 모두 성경 속 선행과 사랑을 본받자는 취지로 명명된 병원들이다. 병원 설립 26년 후인 1911년,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은 현재 위치로 이전했다. 114년간 같은 자리에서 LA 시민들을 치료해온 셈이다. 병원은 1976년 408개 병상의 종합병원으로 확장 건축될 때까지, 시대의 요구에 맞추어 끊임없이 증축과 발전을 거듭했다. 특히 1896년에 부설 간호대학을 세워 100년 넘게 사명감 있는 간호사를 배출해온 역사는, 병원이 단순 치료를 넘어 인재 양성을 통한 사회적 책임을 다했음을 보여준다. 지역 의료를 담당하던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은 2019년 PIH Health 그룹에 합류하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비영리 의료 법인 연합의 일원이 된 것이다. 현재 다우니 PIH 병원 등과 함께 370만 주민의 건강을 돌보는 시스템의 중심축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Good Samaritan’, 그것은 병원의 브랜드를 넘어 도시가 간직한 하나의 이야기이자 기억이라고 할 수 있다. 한 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LA의 하늘 아래 수많은 병원이 생겨나고 사라졌지만, 선한 사마리아인 병원은 여전히 그 언덕 위에 있다. 도시의 역사를 품은 건물로, 이민자들의 불안을 달래는 공간으로, 그리고 ‘선함’을 잃지 않으려는 사람들의 마음 한가운데 자리한 상징으로. 한인타운을 관통하는 LA의 중심가인 윌셔길을 걸으며 이 병원을 마주칠 때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한 문장이 떠오른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연민.” 그 마음이 바로, 이 도시가 여전히 따뜻한 이유일지 모른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사마리아인 역사 병원 이름 바울 병원 병원 설립
2025.11.05. 19:43
LA 한인타운 인근에 자리한 맥아더 공원. 이 공원에는 한때 미국의 번영을 상징했던 두 영혼의 이야기가 겹쳐져 있다. 한 명은 도시의 발전을 위해 자신의 재산을 기꺼이 내놓은 의사이자 사업가였고, 다른 한 명은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전쟁 영웅이다. 공원의 원래 이름은 ‘웨스트레이크 공원’이었다. 1888년 LA로 이주해 도시 발전에 큰 공헌을 했던 의사 헨리커스 월러스 웨스트레이크의 이름을 딴 것이다. 캐나다 몬트리올의 맥길대학교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에든버러와 비엔나에서 추가 학위를 취득하며 철저히 준비된 의사였던 그는 LA에 정착해 대규모 의료시설을 운영하며 성공을 거뒀다. 그의 사업 영역은 의료 분야에만 머물지 않았다. 초기 성공을 발판 삼아 석유산업과 애리조나의 광산 개발에도 진출하며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가치는 재산 증식보다 나눔과 기여에서 빛났다. 그는 지역사회와 도시 발전을 위해 자선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특히 겨울철 폭우로 물이 고여 ‘보기 흉한 협곡’이라 불리던 황무지 같은 땅을 개발해 LA시에 기부했다. 이 땅은 오늘날의 맥아더 공원으로 변모했으며, 당시 부유층이 선호하던 주거 지역에 조성되어 도시의 ‘서쪽 호수’라는 별명처럼 지역사회에 아름다운 휴식 공간을 선물했다. 그의 이름은 공원 인근의 웨스트레이크 애비뉴에 여전히 남아 그의 흔적을 기리고 있다. 웨스트레이크 공원은 1942년 5월 7일, 필리핀에서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던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이름을 따서 개칭되었다. 육군사관학교를 수석 졸업하고, 최연소 육군 참모총장과 원수까지 오른 그의 삶은 곧 육군 그 자체였다. 그는 군인으로서의 탁월한 능력 외에도 독실한 신앙인으로도 유명했다. 그의 어머니 메리 핑크니 하디 맥아더는 아들의 사관학교 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해 웨스트포인트 앞에서 4년간 살았다는 전설적인 일화를 남겼고, 이 일화는 오늘날 ‘헬리콥터 맘’의 원조로 회자되기도 한다. 맥아더의 군인 인생은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한국 전쟁 당시 트루먼 대통령과의 의견 충돌로 해임되었을 때, 그는 “노병은 죽지 않고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명언을 남기며 쓸쓸히 군복을 벗었다. 하지만 그의 유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인천 상륙 작전의 영웅으로서 그는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수호에 기여했고, 일본에서는 관대한 전후 통치로 평화 재건의 토대를 마련했다. 또한 필리핀에서는 아버지에 이어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3개국의 ‘영웅’으로 존경받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두 영웅의 숨결이 살아 있는 이 공원은 오늘날 아이러니한 현실에 직면해 있다. 도시의 번영을 상징했던 푸른 호수와 깨끗한 공원은 사라지고, 노숙자 텐트와 마약 문제가 만연한 ‘우범 지대’의 오명을 쓰고 있다. 이 공원을 지키고, 가꾸고, 발전시키려 했던 웨스트레이크의 희생과 자유 수호를 위해 목숨 걸었던 맥아더의 헌신은 공원을 가득 메운 무관심과 절망의 그림자에 가려져 있다. 과거에는 가족들이 모여 여가를 즐기고, 낚시를 하던 이 평화로운 공간이 이제는 하루하루 생존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삶의 터전이 되었다. 공원에 드리워진 어두운 현실은 단순한 사회 문제가 아니다. 이는 미국의 발전과 번영을 상징했던 가치들이 어떻게 퇴색했는지를 보여주는 슬픈 초상이다. 공원에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 땅에 담긴 두 위대한 영혼의 이야기를 기억할까. 공원을 지켜보는 우리는 이 비극적 현실을 통해 무엇을 깨달아야 할까. 미국 근대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했던 이 공간이 왜 이토록 초라한 모습이 되었는지,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과제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맥아더 공원 맥아더 공원 웨스트레이크 공원 공원 인근
2025.09.24. 19:24
LA 한인타운의 동쪽 경계를 긋는 후버 거리(Hoover Street). 이 길을 지날 때면 으레 미국의 31대 대통령 허버트 후버(1874~1964)를 떠올리게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의 진실은 우리의 상식을 비켜간다. 이 거리의 이름은 대공황 시대의 대통령이 아닌, 19세기 초반 스위스에서 건너와 LA의 황무지를 개척한 한 이민자 가문의 땀과 헌신을 기리고 있다. 바로 ‘후버 가문’의 성공기다. 이야기는 서부 전체가 황금을 향한 열망으로 들끓던 ‘골드러시’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9년, 스위스 출신의 의사 레온스 후버(Dr. Leonce Hoover)는 새로운 삶을 찾아 가족을 이끌고 머나먼 미국 땅을 밟았다. 프랑스 파리에서 의학을 공부하고 나폴레옹 군대의 군의관까지 지냈던 엘리트였지만, 그는 낯선 땅에서 과감히 의사 가운을 벗어 던졌다. 펜실베니아주로 이민온 그는 수잔나 리드와 결혼했다고 전해진다. 그 후 그는 펜실베니아주, 인디애나주에서 거주하다가 1849년 아내와 아들, 두 딸과 함께 LA로 이주했다. 기록상 그가 LA에서 의료 활동을 했다는 흔적은 없다. 대신 그는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포도 농장을 일구며 LA 와인 산업의 선구자가 되었다. 와인을 만드는데 그치지 않고 판매 사업에도 뛰어들어 큰 재력을 얻었다. 그의 선택은 미지의 땅에 풍요와 산업의 씨앗을 뿌린 개척자의 결단이었다. 아버지 레온스가 대지에서 희망을 일구었다면, 그의 아들 빈센트 후버(Vincent A. Hoover)는 도시의 뼈대를 세웠다. 20대 청년 빈센트는 아버지와 달리 은행업과 부동산 개발에 뛰어들어 신흥도시 LA의 성장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874년 LA 카운티 은행(Los Angeles County Bank)의 초대 행장으로 도시 경제의 기틀을 다졌고, 탁월한 수완의 부동산 개발업자로서 오늘날 LA의 지도를 그려나갔다. 그의 헌신은 경제 분야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1859년부터 1865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LA 시의회 의원으로 봉사하며 도시의 미래를 설계하는 데 깊숙이 관여했다. 황량한 평원에 길이 나고 건물이 들어서는 도시 개발의 최전선에는 이민 2세 빈센트의 도전 정신과 뜨거운 열정이 있었다. LA시는 그의 지대한 공헌을 잊지 않았다. 1875년, 도시는 그의 이름을 붙인 ‘후버 스트리트’를 헌정하며 한 이민자 가문의 역사를 LA의 심장부에 새겼다. 이는 개인의 성공을 넘어, 낯선 땅에 뿌리내려 도시의 주역으로 우뚝 선 개척자 가문에 대한 최고의 찬사였다. 빈센트 후버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1883년, 50대 초반의 나이로 짧은 생을 마감했다. 그는 비록 자신의 혈육을 남기지 못했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오늘 우리가 무심코 걷는 길 위에, 그리고 세계적인 대도시로 성장한 LA의 역사 곳곳에 뚜렷이 살아 숨 쉬고 있다. 후버 거리를 지날 때면, 170여 년 전 LA를 개척했던 한 이민자 가문의 뜨거운 숨결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후버 가문의 개척 정신은 한인을 포함한 후대의 이민자들에게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김영옥 대령을 기념하는 5번 프리웨이 구간이나 도산 안창호 선생을 기리는 10번.110번 프리웨이 교차로 인터체인지처럼, 새로운 이민자들이 정착해 역사를 만들어가며 도시의 풍경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 넣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그 길 위에는 LA의 잊힌 역사가 새겨져 있으며, 이는 과거의 사실을 넘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도전과 희망의 메시지를 던져준다. 이민자의 꿈이 도시의 역사가 되는 땅, LA는 오늘도 그렇게 새로운 후버들을 기다리고 있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후버길 성공기 이민자 가문 부동산 개발업자 후버 가문
2025.09.08. 19:30
8월이 되면 으레 8.15 광복절 기념행사가 이어진다. 1945년 8월은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일이지만, 연합군의 승리를 결정적으로 이끈 날은 1944년 6월 6일이었다. 바로 노르망디 상륙작전 기념일이다. 흥미롭게도 LA 시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 중 하나인 ‘노먼디(Normandie) 애비뉴’가 바로 이 역사적인 날을 기념하고 있다. 1884년 건설된 이 도로는 원래 ‘로즈데일 애비뉴’로 불렸다가 1898년 ‘노먼디’로 개명되었다. LA에서 토런스에 이르는 22.5마일(약 36.2km)의 긴 도로는 여러 도시를 관통하며 발전했다. 도로명 표기는 영어식 ‘Normandy’가 아닌 프랑스어 ‘Normandie’를 사용하는데, 이는 연합군이 나치 독일로부터 프랑스를 해방시킨 역사적 맥락을 상징한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 6월 6일, 미국, 영국, 캐나다 등 연합군이 독일 점령하의 프랑스 노르망디 해변에 감행한 역사상 최대 규모의 상륙작전이다. 전문가들은 상륙작전이 어려운 지형과 불안정한 날씨 때문에 이 작전을 반대했다. 실제로 작전은 여러 차례 연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아이젠하워 장군이 이끄는 연합군은 이러한 악조건을 극복하고 작전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이 상륙작전은 북서 유럽 해방의 서막이자 서부전선 승리의 결정적인 분수령이 되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이 있었기에 1945년 8월의 종전이 가능했다. 이 작전은 훗날 한국전쟁 당시 인천상륙작전의 토대가 되었다. 조수간만의 차가 크고 상륙이 어려운 인천의 지형 때문에 많은 군사 전문가들이 작전을 반대했으나, 맥아더 사령관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성공 사례를 들어 이들을 설득했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영화로도 여러편이 만들어졌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 ‘지상 최대의 작전(The Longest Day)’ 등 20여 편이 넘는 영화의 소재가 될 만큼 세계적으로 큰 관심을 받았다. 미국내 8개의 노르망디 시(City)가 있다. 미국에 노먼디 공원이나 노먼디 도로도 많다. 이런 경우 대부분은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지명들이다. 이렇게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사랑받고 화두가 되는 이유는 역사상 가장 성공한 작전이자 세계 역사를 바꾼 전쟁이어서다. 제1, 2차 세계대전은 과학과 합리성을 믿었던 현대주의를 몰락시키고 포스트모더니즘을 탄생시킨 계기가 되었다. 상식, 지성 그리고 과학을 믿고 인간의 합리성을 믿었던 현대주의는 두 전쟁을 거치면서 인간에 대한 처절한 불신을 갖게 된다. 모두가 죽는 전쟁을 일으켜 멀쩡한 이웃을 죽이는 인간의 어리석음에 인류가 절망함으로 포스트모더니즘이 출현했다. 노르망디 작전은 단순히 군사적 성공을 넘어, 기도로 승리한 작전으로도 기억된다. 영국은 6년간의 전쟁 기간 중 7번의 ‘국가 기도의 날’을 선포했는데, 그 마지막 일곱 번째 기도의 날이 바로 노르망디 작전을 위한 것이었다. 작전을 앞두고 장병들 앞에서 행한 아이젠하워 장군의 마지막 연설은 다음과 같이 끝맺는다. “장병 여러분의 행운을 빕니다! 그리고 이 위대하고 고귀한 작전을 수행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아이젠하워는 참모들과 함께 작전 지역을 마지막으로 순시하면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고 전해진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은 단순한 군사적 승리를 넘어, 신념과 기도가 함께한 역사적인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광복절 애비뉴 노르망디 상륙작전 광복절 기념행사 로즈데일 애비뉴
2025.08.13. 18:43
LA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역사를 밟아가는 탐구생활과 같다. 로스 펠리즈에서 시작해 샌페드로 항구까지 23.3마일을 뻗어나가는 버몬트 애비뉴(Vermont Avenue)는 LA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최장 도로다. 한인타운과 할리우드, USC 캠퍼스를 관통하는 이 길 위에는,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서부로 와 LA의 초석을 다진 한 인물의 겸손한 족적이 새겨져 있다. 원래 코행가 부족민의 산책로였던 이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도로는 동북부의 버몬트주(州)에서 유래했다. 버몬트주는 북쪽으로 캐나다의 퀘벡주와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 뉴햄프셔주, 남쪽으로 매사추세츠주, 서쪽으로 뉴욕주와 맞닿아 있다. LA 역사 초기, 동부 출신 이주민들이 도시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고향의 지명을 붙이는 일이 잦았다. 버몬트 애비뉴가 기념하는 인물은 오즈로 W. 차일즈(Ozro W. Childs), 바로 버몬트주 출신의 개척가였다. 차일즈는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버몬트주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오하이오주로 이주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서부에 금광 개발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골드러시의 굉음이 그를 서부로 이끌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짙은 안개는 버몬트 출신 청년에게 낯설기만 했다.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정착한 곳이 바로 LA였다. 그는 황금 대신 LA의 미래에 투자했다. 양철 세공 및 철물점을 시작한 그는 한 상인이 갖고 있던 모든 재고를 외상으로 넘겼받았다. 몇 년 후, 차일즈는 동업자의 지분을 모두 사들였고, 그 사업을 정리하면서 4만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LA 남쪽 들판에 물을 대는 수로 시스템인 ‘산하 마드레(Zanja Madre)’의 확장 공사 계약을 따냈다. 그는 공사 대가로 그 지역의 땅을 받았는데 그 부지가 부를 축적하는 발판이 됐다. 그 땅이 현재 6가와 9가 사이, 메인과 피게로아에 이르는 다운타운 중심지다. 그는 황무지를 주택단지로 변모시켰고, LA를 대표하는 원예 사업가이자 성공한 은행가로 발돋움했다. 그가 세운 은행은 훗날 미국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모태가 됐다. 그는 USC의 공동 설립자로도 이름을 올렸으며,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를 개관해 도시에 문화를 선물했다. 1869년에는 LA시의원으로 당선되어 도시 행정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의 삶이 더욱 빛나는 지점은 부와 명성을 쌓은 방식보다 그것을 사용한 방식에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자선 후원가(Benefactor)였지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거나 선행을 과시하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묵묵히 도시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을 위해 기부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남기기 위해 시정부와 거래했던 헨리 윌셔와는 결이 다른 행보였다. 윌셔가 도로 표지판에 ‘나’를 남기려 했다면, 차일즈는 도시 곳곳에 ‘우리’를 위한 터전을 일궜다. 그의 헌신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 그의 고향인 ‘버몬트’를 길 위에 새겨 넣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던 고인의 성품을 존중한, 가장 품격 있는 기념 방식이었으리라. 결국 윌셔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 세상은 흔적도 없다. 반면 차일드스는 이름 대신 출신지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가 세운 대학과 은행, 그가 가꾼 도시는 여전히 LA의 심장부에서 살아 숨 쉰다. 진정한 유산은 도로 표지판이 아닌, 도시의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임을 버몬트 애비뉴는 오늘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그 길을 오가며 이름도 빛도 없이 LA를 가꾼 한 개척가의 진한 삶의 향기를 느낀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버몬트 개척자 삶의 향기 버몬트 애비뉴 버몬트 출신
2025.07.14. 19:57
LA 코리아타운의 중심 도로중 하나가 동서로 가로지르는 윌셔 불러바드다. 다운타운의 마천루부터 코리아타운의 활기, 박물관 거리의 우아함을 지나 샌타모니카의 푸른 바다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는 LA의 심장과도 같다. 화려한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도로가 사실은 ‘골수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땄다면 믿을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곳, 우리 발밑에 있다. 이 도로 이름은 1800년대 후반 부동산 개발로 유명했던 헨리 게이로드 윌셔(Henry Gaylord Wilshire)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1890년대 웨스트 레이크(현 맥아더 공원 근처)에 보리밭을 사서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단지 중앙을 관통하는 폭 4미터 정도의 길을 내고 자신의 땅을 시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단 하나를 요구했다. 바로 그 길에 자신의 이름 ‘윌셔’를 붙여달라는 것이었다. 보리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은 훗날 LA의 동서를 잇는 대동맥으로 성장했지만,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윌셔의 진짜 꿈은 따로 있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역설이었다. 윌셔는 1860년 6월6일(다른 자료는 1861년에 출생 주장)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그는 곧 LA로 이주해 24살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고, 서른이 될 즈음 상당한 돈을 벌었다. 막대한 부를 쌓은 자본가였지만 그의 신념은 부의 축적이 아닌 부의 철폐를 외치는 사회주의에 있었다. 그런 그는 캘리포니아, 뉴욕, 영국, 캐나다 등 삶의 터전을 옮길 때마다 사회주의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번번이 낙선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윌셔의 삶을 연구한 캘리포니아 역사가 케빈 스타에 의하면 윌셔의 이름은 LA(Wilshire Boulevard), 풀러턴(Wilshire Avenue), 애리조나 피닉스(Wilshire Drive)에서 각각 도로이름으로 사용 중이다. LA 윌셔와 켄모어 코너에 있는 게이로드 아파트는 윌셔의 미들네임을 딴 빌딩이다. 이 건물은 1924년에 당시 최고급 호텔로 개관했고 아파트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윌셔는 부동산 개발업, 광산업, 건강산업, 전기산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출판’이었다. 1900년에 ‘윌셔 출판사(The Wilshire Book Company)’를 열었다. 윌셔는 이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두 권 출판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발행한 잡지 사설들을 모은 책이다. 요컨대 사회운동을 설명하고 선전하는 글 모음집이다. 윌셔가 발간한 잡지는 ‘도전(the Challenge)’이다. 나중에 ‘윌셔 매거진(Wilshire Magazine)’으로 개칭한 이 잡지는 사회주의 운동을 선전하는 잡지였다. 미국 내 발행이 법적으로 어려워지자, 캐나다로 옮겨서 발행하는 열성을 보였는데 한때는 42만5000부를 발행하는 굴지의 잡지가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운동 잡지였다. 이처럼 부동산과 광업, 출판을 넘나들며 부를 쌓는 동시에, 그 부를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눈 혁명가를 꿈꿨던 윌셔. 하지만 그의 말로는 초라했다. 왕성한 활동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듯 보였던 그는 1927년 9월, 뉴욕에서 빈털터리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지난 6일은 윌셔가 태어난 지 160년 되는 날이었다. 그가 남긴 윌셔 불러바드에는 그가 타도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활기가 그 어느 때보다 넘실댄다. 한인들의 성공 신화가 쓰이고, 세계적인 기업들의 로고가 번쩍이며, 할리우드 스타들의 차량이 거리를 메운다. 윌셔 불러바드를 걸으며 인생을 생각한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역설 골수 사회주의자 부동산 개발업 사회주의 후보
2025.06.16.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