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의 거리를 걷는다는 것은 역사를 밟아가는 탐구생활과 같다. 로스 펠리즈에서 시작해 샌페드로 항구까지 23.3마일을 뻗어나가는 버몬트 애비뉴(Vermont Avenue)는 LA시 남북을 가로지르는 최장 도로다. 한인타운과 할리우드, USC 캠퍼스를 관통하는 이 길 위에는, 골드러시의 꿈을 안고 서부로 와 LA의 초석을 다진 한 인물의 겸손한 족적이 새겨져 있다. 원래 코행가 부족민의 산책로였던 이길은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이 도로는 동북부의 버몬트주(州)에서 유래했다. 버몬트주는 북쪽으로 캐나다의 퀘벡주와 국경을 접하며, 동쪽으로 뉴햄프셔주, 남쪽으로 매사추세츠주, 서쪽으로 뉴욕주와 맞닿아 있다. LA 역사 초기, 동부 출신 이주민들이 도시 발전에 큰 몫을 담당했고, 그들을 기리기 위해 고향의 지명을 붙이는 일이 잦았다. 버몬트 애비뉴가 기념하는 인물은 오즈로 W. 차일즈(Ozro W. Childs), 바로 버몬트주 출신의 개척가였다. 차일즈는 버몬트주에서 태어나 버몬트주에서 교육받았다. 이후 오하이오주로 이주해 교사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그는 서부에 금광 개발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했다. 골드러시의 굉음이 그를 서부로 이끌었지만, 샌프란시스코의 짙은 안개는 버몬트 출신 청년에게 낯설기만 했다. 남쪽으로 뱃머리를 돌려 정착한 곳이 바로 LA였다. 그는 황금 대신 LA의 미래에 투자했다. 양철 세공 및 철물점을 시작한 그는 한 상인이 갖고 있던 모든 재고를 외상으로 넘겼받았다. 몇 년 후, 차일즈는 동업자의 지분을 모두 사들였고, 그 사업을 정리하면서 4만달러를 손에 쥘 수 있었다. 그 후, 그는 LA 남쪽 들판에 물을 대는 수로 시스템인 ‘산하 마드레(Zanja Madre)’의 확장 공사 계약을 따냈다. 그는 공사 대가로 그 지역의 땅을 받았는데 그 부지가 부를 축적하는 발판이 됐다. 그 땅이 현재 6가와 9가 사이, 메인과 피게로아에 이르는 다운타운 중심지다. 그는 황무지를 주택단지로 변모시켰고, LA를 대표하는 원예 사업가이자 성공한 은행가로 발돋움했다. 그가 세운 은행은 훗날 미국 최대 은행 중 하나인 ‘뱅크 오브 아메리카(Bank of America)’의 모태가 됐다. 그는 USC의 공동 설립자로도 이름을 올렸으며, 그랜드 오페라 하우스를 개관해 도시에 문화를 선물했다. 1869년에는 LA시의원으로 당선되어 도시 행정에도 직접 참여했다. 그의 삶이 더욱 빛나는 지점은 부와 명성을 쌓은 방식보다 그것을 사용한 방식에 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자선 후원가(Benefactor)였지만, 자신의 신앙을 드러내거나 선행을 과시하는 기록은 찾아보기 어렵다. 그는 묵묵히 도시를 위해 헌신하고, 이웃을 위해 기부했다. 이는 자신의 이름을 도로명으로 남기기 위해 시정부와 거래했던 헨리 윌셔와는 결이 다른 행보였다. 윌셔가 도로 표지판에 ‘나’를 남기려 했다면, 차일즈는 도시 곳곳에 ‘우리’를 위한 터전을 일궜다. 그의 헌신을 기리고자, 사람들은 그의 이름 대신 그의 고향인 ‘버몬트’를 길 위에 새겨 넣었다. 자신의 공을 내세우지 않았던 고인의 성품을 존중한, 가장 품격 있는 기념 방식이었으리라. 결국 윌셔는 자신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가 꿈꿨던 사회주의 세상은 흔적도 없다. 반면 차일드스는 이름 대신 출신지의 이름을 남겼지만, 그가 세운 대학과 은행, 그가 가꾼 도시는 여전히 LA의 심장부에서 살아 숨 쉰다. 진정한 유산은 도로 표지판이 아닌, 도시의 역사 속에 새겨지는 것임을 버몬트 애비뉴는 오늘도 묵묵히 증명하고 있다. 그 길을 오가며 이름도 빛도 없이 LA를 가꾼 한 개척가의 진한 삶의 향기를 느낀다.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버몬트 개척자 삶의 향기 버몬트 애비뉴 버몬트 출신
2025.07.14. 19:57
LA 코리아타운의 중심 도로중 하나가 동서로 가로지르는 윌셔 불러바드다. 다운타운의 마천루부터 코리아타운의 활기, 박물관 거리의 우아함을 지나 샌타모니카의 푸른 바다까지 이어지는 이 거리는 LA의 심장과도 같다. 화려한 자본주의의 상징과도 같은 이 도로가 사실은 ‘골수 사회주의자’의 이름을 땄다면 믿을 수 있을까. 역사의 아이러니는 바로 이곳, 우리 발밑에 있다. 이 도로 이름은 1800년대 후반 부동산 개발로 유명했던 헨리 게이로드 윌셔(Henry Gaylord Wilshire)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그는 1890년대 웨스트 레이크(현 맥아더 공원 근처)에 보리밭을 사서 주택단지로 개발했다. 단지 중앙을 관통하는 폭 4미터 정도의 길을 내고 자신의 땅을 시에 기부하는 조건으로 단 하나를 요구했다. 바로 그 길에 자신의 이름 ‘윌셔’를 붙여달라는 것이었다. 보리밭 사이로 난 작은 길은 훗날 LA의 동서를 잇는 대동맥으로 성장했지만, 그 이름 뒤에 숨겨진 윌셔의 진짜 꿈은 따로 있었다. 그의 삶은 한마디로 역설이었다. 윌셔는 1860년 6월6일(다른 자료는 1861년에 출생 주장)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를 졸업 후 하버드 대학에 입학했으나 중퇴했다. 그는 곧 LA로 이주해 24살 나이에 사업을 시작했고, 서른이 될 즈음 상당한 돈을 벌었다. 막대한 부를 쌓은 자본가였지만 그의 신념은 부의 축적이 아닌 부의 철폐를 외치는 사회주의에 있었다. 그런 그는 캘리포니아, 뉴욕, 영국, 캐나다 등 삶의 터전을 옮길 때마다 사회주의 후보로 선거에 출마했다. 번번이 낙선했지만 굴하지 않았다. 윌셔의 삶을 연구한 캘리포니아 역사가 케빈 스타에 의하면 윌셔의 이름은 LA(Wilshire Boulevard), 풀러턴(Wilshire Avenue), 애리조나 피닉스(Wilshire Drive)에서 각각 도로이름으로 사용 중이다. LA 윌셔와 켄모어 코너에 있는 게이로드 아파트는 윌셔의 미들네임을 딴 빌딩이다. 이 건물은 1924년에 당시 최고급 호텔로 개관했고 아파트로 바뀌어 오늘에 이르렀다. 윌셔는 부동산 개발업, 광산업, 건강산업, 전기산업 등 다양한 사업에 손을 댔다. 하지만 가장 강력한 무기는 ‘출판’이었다. 1900년에 ‘윌셔 출판사(The Wilshire Book Company)’를 열었다. 윌셔는 이 출판사에서 자신의 책을 두 권 출판했는데 그중 하나가 자신이 발행한 잡지 사설들을 모은 책이다. 요컨대 사회운동을 설명하고 선전하는 글 모음집이다. 윌셔가 발간한 잡지는 ‘도전(the Challenge)’이다. 나중에 ‘윌셔 매거진(Wilshire Magazine)’으로 개칭한 이 잡지는 사회주의 운동을 선전하는 잡지였다. 미국 내 발행이 법적으로 어려워지자, 캐나다로 옮겨서 발행하는 열성을 보였는데 한때는 42만5000부를 발행하는 굴지의 잡지가 되었고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주의 운동 잡지였다. 이처럼 부동산과 광업, 출판을 넘나들며 부를 쌓는 동시에, 그 부를 기반으로 자본주의의 심장을 겨눈 혁명가를 꿈꿨던 윌셔. 하지만 그의 말로는 초라했다. 왕성한 활동으로 부와 명예를 모두 거머쥔 듯 보였던 그는 1927년 9월, 뉴욕에서 빈털터리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지난 6일은 윌셔가 태어난 지 160년 되는 날이었다. 그가 남긴 윌셔 불러바드에는 그가 타도하고자 했던 자본주의의 활기가 그 어느 때보다 넘실댄다. 한인들의 성공 신화가 쓰이고, 세계적인 기업들의 로고가 번쩍이며, 할리우드 스타들의 차량이 거리를 메운다. 윌셔 불러바드를 걸으며 인생을 생각한다. 사라질 수밖에 없는 인생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붙잡아야 할까. 강태광 / 월드쉐어USA 대표·목사길 위의 인문학 역설 골수 사회주의자 부동산 개발업 사회주의 후보
2025.06.16.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