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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인가 폭력인가…복수의 도덕적 역설

복수의 대상이 나타난다. 그에게 자신이 당했던 고문과 학대를 가한다. 그러나 그가 자신을 정말 고문했던 자였는지에 대한 의문이 제기된다.     복수는 정의의 이름을 빌려 행해진다. 하지만 그 정의를 누가 정의하나. 폭력으로 억압받은 자가 폭력으로 대응할 때 그것은 정의인가, 아니면 또 다른 폭력의 반복인가. 진실은 하나일지 몰라도 그 진실에 도달하는 도덕의 경로는 언제나 모호하다. 더구나 그 ‘진실’이 우리의 불완전한 기억에 의존하고 있다면.     2025년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그저 사고였을 뿐(It was just an accident)’은 복수극처럼 보이지만 진실, 도덕, 기억의 불확실성에 대한 정치적 논쟁을 던지고 있는 작품이다.     이란 감독 자파르 파나히는 고문과 폭력의 피해자와 가해자 사이의 관계를 개인적 복수로 단순화하지 않고 제도와 시스템이 만들어낸 구조적 폭력의 문제로 확장한다.     그에게 영화 활동 금지령을 내렸던 이란에 대한 파나히의 일침이 날카롭다. 그는 영화를 이란 사회와 국가 폭력의 축소판으로 다루면서 전 세계 어둠 속 눈먼 자들을 향해 외친다. 침묵하지 말라, 행위의 주체가 되어 복수의 욕망을 극복하고 인간의 존엄을 증언하라고!     파나히 감독에게 영화는 저항의 형식이다. 그의 작품 세계는 철저하게 정치적이고 그가 만든 모든 영화는 저항 행위이다. 이 영화는 고문자와 피해자의 관계를 통해 이란 정부의 억압과 지식인의 침묵을 은유적으로 비판한 ‘이란의 내부 고발’이다.     파나히 감독은 영웅적 저항이나 인간적 결단의 서사에 머무르지 않고 개인의 결단이 사회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냉정한 입장을 고수한다. 그는 “우리는 모두 체제 속에서 누군가를 억압하는 역할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라는 불편한 질문을 던진다. 영화는 여전히 제도적 구조의 전환 없이는 해방도 미완이라는 파나히가 일관되게 탐구해온 세계관의 연장선에 있다.   한 밤중, 한 남자가 아내와 어린 딸을 차에 태우고 어디론가 달리고 있다. 어둠 속을 가르며 달리던 도로 위 유기견을 치고 만다. 차가 손상되어 근처 정비소로 들어간다.     아제르바이잔계 바히드는 의족 때문에 삐걱 소리를 내며 걸어 오는 정비소의 주인(에그발)의 모습을 보며 한 남자를 떠올린다. 이 남자가 과거 정치범으로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자신을 고문했던 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친다.     순간 바히드는 복수심에 불탄다. 정말 자신을 고문했던 자인지를 확인하겠다는 생각으로 밤 중에 그의 집에 침입해 납치하고 밴에 가둔다. 그리고 이전의 동지들을 불러 모은다. 여성 사진작가 시바, 결혼을 앞둔 커플, 다혈질의 하미드 등 고문 피해자들이 모여든다.       이들은 하나같이 고문으로 인한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살고 있다. 그러나 누구도 고문 가해자를 직접 본 일이 없다. 그들은 늘 눈을 가린 채 고문을 당했다. 단지 그가 의족을 하고 있어 걸을 때마다 들리던 삐끄덕 소리만을 기억할 뿐이다.     에그발은 자신이 고문자가 아니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그에게 아이가 있고 아내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바히드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 갈등이 생긴다. 즉각적으로 에그발을 처벌하자는 주장과 좀더 진실을 확인한 뒤 행동하자는 의견으로 갈린다.     그들이 도덕적 딜레마에 빠져 있는 동안 에그발의 집에서 임신한 아내가 출산을 위해 속히 병원에 가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 벌어지고 이 일로 인해 복수 플랜은 잠시 중단된다.     새로 태어난 생명을 축하하는 장면에서 바히드의 인간적 면모가 드러난다. 바히드와 시바는 에그발을 조용한 장소로 데려가 묶은 채로 그를 심문한다. 완강히 부인하던 에그발은 점차 자신의 과거 행적을 일부 인정한다. 그러나 진실한 고백인지 강압에 의한 자백인지 확신할 수 없다. 바히드는 에그발을 처벌하지 않고 풀어준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바히드의 뒷모습을 길게 따라가는 롱테이크로 촬영됐다. 그는 사건 이후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온 듯 보이지만 주변 풍경은 무겁고 정적에 잠겨있다. 그때 뒤편에서 절뚝이며 다가오는 발소리, 그리고 금속이 긁히는 듯 삐걱 소리가 들린다. 이에 멈칫하는 바히드, 그러나 끝내 돌아보지 않는다. 화면은 고요한 채로 암전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이란에게도, 바히드에게도 진정한 해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억압과 통제의 메커니즘은 여전히 작동 중이다.     바히드는 자유에 도달한 듯하지만 실상은 절대 자유롭지 않다. 마치 이란 사회의 현실처럼 억압은 형태만 바뀌었을 뿐 지속하고 있다.       우발적 사건처럼 보이는 교통사고, 납치, 복수로 이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은 국가 폭력이 개인의 일상 속으로 어떻게 스며들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영화는 끝까지 진실을 확증하지 않는다. 피해자들은 복수의 대상을 두고 과연 그가 정말 가해자였는지, 그리고 그를 처벌하는 것이 정의인지에 대하여 갈등한다. 잔혹한 체제에 부역한 자를 처벌하는 일이 과연 그 체제 자체에 대한 복수가 될 수 있는가. 그리고 상처 입은 그들의 마음속에서 진정한 용서는 가능한가.   바히드는 곧 파나히의 분신이다. 체제의 폭력 앞에서 무력하기만 했던 파나히 감독 자신의 도덕적 트라우마와 국가 폭력과 예술 검열 경험을 극화한 자전적 인물이다. 그럼에도 그는 작중 인물 에그발이 정말 고문자였나에 대하여 한 번도 명확히 답하지 않는다. 이러한 불확실성은 관객 스스로 풀어야 할 과제로 남겨 두고자 함이다.     '그저 사고였을 뿐'은 이란 감독의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2026 아카데미상 국제장편영화 부문에 프랑스를 대표하는 작품으로 출품된다. 비밀리에 촬영된 이 영화는 이란 정부가 공식 승인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란의 출품작이 될 수 없다. 파나히 감독은 2010년부터 이란 정부로부터 일체의 영화 제작 및 영화 관련 해외 활동 금지령을 받았다.     다행히 아카데미는 제작비 60% 이상을 투자했고 배급권을 보유한 프랑스의 출품을 인정하고 있다. 프랑스는 오랫동안 이란 감독들의 피난처 역할을 해왔다.   영화 ‘그저 사고였을 뿐’은 반체제 감독 자파르 파나히가 만든 이란 영화이고, 프랑스가 제작, 투자한 프랑스 영화이며 동시에 표현의 자유를 지지하는 우리 모두의 영화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역설 도덕 칸영화제 황금종려상 국가 폭력 구조적 폭력

2025.11.05.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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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도덕적 해이인가, 구조적 문제인가

LA시소방국 소방관 노조(UFLAC)를 둘러싼 초과근무 수당과 재정 비리 논란이 거세지고 있다. 이번 사태는 단순한 개인의 일탈을 넘어, 노조의 도덕적 책임과 LA시의 구조적 한계를 동시에 드러내고 있다.   UFLAC 지도부의 초과근무 구조는 많은 의문을 낳는다. 노조 임원들은 평일에는 노조 업무를 수행하며 정규 급여를 받고, 주말과 휴일 등에는 초과근무를 병행해 시 예산에서 추가 수당을 받아왔다.     법적으로 허용된 구조라 해도, 시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공공기관의 특성상 이중 혜택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특히 노조는 수년간 인력 부족과 예산 삭감을 강하게 비판해왔지만, 정작 내부적으로는 초과근무 구조를 활용해 수당을 최대화해온 점에서 모순이라고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프레디 에스코바 노조위원장이다. LA타임스에 따르면, 에스코바는 지난 2022년 시에서 기본급과 초과근무 수당을 포함해 총 42만4500달러를 받았고, 노조 수당으로 11만5962달러를 추가로 수령해 연간 약 54만 달러에 달했다. 그는 주당 평균 48시간을 노조 업무에 투입했다고 보고했지만, 시 기록에는 주당 약 30시간의 초과근무도 포함돼 있었다.   UFLAC의 재정 운영 역시 도마에 올랐다. 전국 소방관 노조 연맹(IAFF)이 진행 중인 감사에서는 법인카드 사용 내역과 복지재단 계좌 이체 등 재정 전반이 조사 대상이다.     전직 임원 아담 워커는 복지재단 명의 계좌에서 지난 2022년 12월부터 2024년 1월까지 개인 계좌로 7만5000달러 이상을 이체한 사실이 드러났다. 워커는 “장애 소방관을 위한 골프대회 비용 환급”이라고 해명했지만, IAFF는 복지재단 계좌의 부적절한 사용으로 판단해 워커를 노조와 재단에서 모두 해임했다. 또 다른 전직 임원 도밍고 알바란 주니어는 노조 차량을 개인적으로 구입하면서 거래 금액을 실제보다 낮게 신고해 세금을 회피한 사실을 시인했다.   다만 이번 논란을 노조의 책임만으로 돌리긴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초과근무에 대한 과도한 의존은 LA소방국 전체가 안고 있는 구조적 문제다.     지난 2022년 LA소방국은 초과근무 수당으로만 2억2500만 달러를 지출했는데, 이는 직원 수가 세 배 많은 LA경찰국(LAPD)의 초과근무 총액과 맞먹는 수준이다. 소방국은 연간 약 50만 건의 출동을 소화하는데 이 중 81%가 의료 응급 상황이다. 24시간 3개 교대조가 돌아가지만, 병가나 휴가 발생 시 초과근무로 공백을 메우는 구조다. 초과근무가 없으면 소방차나 앰뷸런스 일부가 운행되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할 수밖에 없다.   시 당국도 문제를 인식하고 있다. 캐런 배스 시장은 올해에만 신입 소방관 양성을 위해 1360만 달러의 예산을 배정했고, 화재 진압 장비 구입과 신규 인력 충원을 추진 중이다. 그러나 인력 충원은 더디게 진행됐고, 초과근무 부담은 해마다 반복돼 왔다.     지난 2019년 회계감사에서도 초과근무 비용 증가에 대한 경고가 나왔지만, 구조적 해법은 미흡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 마크 배숄 전 프린스조지카운티 소방국장은 “인력 공백은 또 다른 공백을 부른다”며 “지친 소방관들이 병가로 빠지면 남은 인력이 더 많은 초과근무를 떠안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초과근무 논란은 더 이상 특정 개인이나 노조 내부의 문제만으로 치부할 수 없다. 이번 사태는 LA소방국이 안고 있는 구조적 허점과 노조의 도덕적 해이를 동시에 드러낸다. 노조의 자정 노력과 더불어 시 당국의 책임 있는 인력 운영 및 제도 개선이 동시에 이뤄져야만 이 악순환을 끊을 수 있다. 정윤재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도덕 해이 초과근무 구조 초과근무 수당 노조 수당

2025.05.04.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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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도덕률, 스스로 도덕적인 인간 가둬

도덕적 관점에 대해서 니체는 선악의 이분법 자체를 부정한다. 그는 사람의 도덕적 가치에 대한 평가를 부정하면서 그것은 하나의 해석 방식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즉, 특정한 방식으로 도덕의 가치를 해석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특정한 정신적 수준을 말해준다고 비판한다. 그는 기존의 도덕적 절대주의, 이성주의 윤리학, 자연성에 대한 금욕주의, 도덕적 문제 제기 방식의 문제점 등을 언급하면서 비도덕주의가 도덕적 자연주의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즉,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신과 육체 그리고 자기 극복을 추구하는 의지(쇼펜하우어는 이것을 '욕망'이라고 했다)가 상호 유기적으로 연결되어서 상승적인 삶을 이끈다고 주장한다.     칼 융에 따르면, 도덕성은 결코 밖에서 타인이 심은 것이 아니라, 인간은 애초부터 그 자신 내면에 '도덕법칙' 자체가 아닌 '도덕성의 정수(精髓)'를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 자신의 천성(天性)에 따라 살라는 것보다 더 도덕적인 관점은 없다고 주장한다.     니체가 도덕이란 관점에 대해 칸트를 비난한 것은, 결국 인간은 스스로 도덕적인데, 도덕법칙을 만들어서 인간을 틀 속에 가두려 했다는 점이다. 즉, 칸트가 주장한 보편적 도덕법칙이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가령, 일제 강점기에, 안중근 의사와 같은 분이 특정 일본인을 '민족의 원수'라는 이름으로 암살한 사건은 과연 도덕적인지를 묻고 있다. 즉, 도덕이란 상대적이지, 보편적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니체는 자기를 극복하고자 하는 '의지'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인간의 상승을 이끄는 에너지이며, 이런 상승 프로세스로부터 생기는 자연스러운 이기심과 욕심을 비도덕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해석일 뿐, 결국 삶의 방향은 본인이 결정해야 하는 운명이라고 한다. 그가 보는 이런 프로세스의 좋은 점은 힘의 느낌이 드는 힘에의 의지, 그 힘 자체를 인간 내부로부터 증대시키는 긍정적 에너지이고, 나쁜 점은 인간의 나약함에서 유래하는 것들. 가령, 종교에 빠진다든지, 건강을 해치는 유혹에 빠지는 행위 등이라고 한다. 이런 나약한 행위들은 인간을 절망 속으로 빠지게 하고, 종교에 종속되게 한다고 한다.     니체가 생각하는 '행복'이란 힘이 증가하는 느낌과 그것을 방해하는 내부저항이 극복되었다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가령, 칸트의 '도덕법칙'에 따랐으나 행복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점은 칸트도 인정한 부분이다. 칸트는 덕에 의존해서 선을 베풀었으나 본인이 행복하지 않으면 최고선이 아니고 자신이 추구하는 도덕법칙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했다.     니체는 내면의 힘을 키우고 자연스럽게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 개인이든 국가 등 강해지므로 '자율'에 맡기라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사상은 노자의 거피취차(去彼取此) 사상과 거의 똑같다.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하라는 뜻인데, 다시 말하면 멀리에 있는 실체도 없는 이상을 좇지 말고, 가까이에 있는 자기의 이상을 실현하라는 것이다. 개성과 자율을 중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사상과도 같다.     니체는 힘찬 영혼에서 솟아오르는 건전하고 건강한 '이기심'을 복(福)된 것이라고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주장한다. 여기서 그 이기심이 어떤 가치를 가지는지를 결정하는 수단은 삶의 방향이 상승선으로 향하느냐, 하강선으로 가느냐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했다. 가령, 어떤 사람의 삶이 자기 지배력이 부재(不在)하고, 병리적 상태이며, 수동성과 복종으로 경멸할 만하고, 자유롭지 못한 자고, 스스로에 대해 확신이 없는 자, 이러한 사람들은 '노예도덕'을 지닌 사람들로서 그들의 시선은 강한 자의 덕(德)에 증오를 품는다고 한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니체는 "나는 사람들에게 그들의 존재가 지닌 의미를 터득시키고자 한다. 그들은 '위버멘쉬(초인)'이요, 위버멘쉬는 이 대지의 뜻이다. 모든 신은 죽었다. 이제 우리는 위버멘쉬가 등장하기를 바란다"라고 세상 사람들을 설득했다. 일반적으로 니체를 잘 모르는 사람들은 그를 허무주의자 내지는 실성한 철학자로 잘못 알고 있다.   박검진   단국대 전자공학과 졸업. 한국기술교육대에서 기술경영학(MOT)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LG반도체 특허협상팀 팀장,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차장, 호서대 특허관리어드바이저, 한국기술교육대 산학협력단 교수를 거쳐 현재 콜라보기술경영연구소 대표.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도덕률 도덕 도덕법칙 자체 도덕적 관점 도덕적 가치

2025.04.14.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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