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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70년 LA토박이, DC에 둥지 틀다

이민 생활 70여 년, 고지식하게도 나는 첫발을 내디뎠던 LA를 좀처럼 떠나지 못했다.   평소 설경을 동경하던 내 소망이 있다면, 고향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동부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마침 딸이 미 공군에 복무 중인데, 한동안 오산 공군기지에 있다가 공군사령관을 수행하는 임무로 워싱턴 국방부에 전출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쾌재를 부르며 나는 동부행을 결심했고, 우리는 가족 주택단지 A동에 배정받아 입주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곳은 공군 기지 한가운데였다. 딸을 따라, 나는 이렇게 워싱턴 DC에 오게 됐다.   아내와 나는 베이스 안에서 첫날밤을 맞는다. 워싱턴 밤하늘엔 별빛이 촘촘하고, 늘 즐겨 듣던 ‘천국의 노래’ 합창곡이 별빛과 어우러져 우주를 수놓는다. 별들을 한참 바라보던 아내가 말을 건넨다. “여보, 저 별 좀 봐요. 글쎄, 별자리가 바뀌었네요.”   “별들도 서부에서 동부로 왔으니 자기들도 자리바꿈을 했겠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포토맥 강바람이 선뜻 얼굴을 스친다. 어느새 퇴근한 딸이 황급히 우리를 부른다. 이유도 묻지 못한 채 우리는 차에 올라 이웃 B단지로 이동했고, 딸은 두 팔을 활짝 벌려 외친다. “짜-짱!”   눈앞에 펼쳐진 건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들판을 종횡무진 누비는 반딧불 쇼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아내는 연거푸 탄성을 질렀다. “와, 놀랍다! 와우! 어메이징!” 그 수많은 반딧불은 마치 디즈니랜드 쇼를 능가할 만큼 황홀했다.     이곳 생활은 희한한 일이 잦아 우리를 자주 놀라게 한다. 하늘 높이 떼 지어 나는 시베리아 기러기 떼가 포토맥 강에서 한철을 보내고 간다. 이따금 집 앞 잔디밭에 내려앉아 온통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거위 몸집이 그렇게 클 줄 몰랐고, 허스키한 울음소리도 인상 깊다. 그들은 포토맥강의 풍족한 담수어를 주식으로 삼는 듯하다.   나의 일상 보행 코스는 5km. 길을 따라 펼쳐진 풍광은 마치 수채화 한 폭 같다. 왼편 강변에는 사철 낚시꾼들이 붐비고, 호수처럼 잔잔한 포토맥강 위로 유람선이 오르내린다. 강변에는 관광객과 다양한 유흥시설이 즐비하다.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어느 날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차량관리국(DMV)을 찾았다. DMV 직원도 대부분 흑인이고, 동양인은 LA와 달리 보기 힘들다. 창구에 앉은 흑인 여직원이 내 신청서를 받아들고 한참을 살피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찰나, 그녀가 물었다.   “당신, 이 생년월일 맞아요?”   이미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이오. 뭐가 잘못됐소?” 그녀는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오늘 일은 망쳤군.’   그런데 그녀는 이내 칠면조처럼 밝게 웃으며 이유를 들려준다. “당신 얼굴은 75세쯤 되어 보이는데, 91살이라니 믿기 어려웠어요. 와우! 어메이징!”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여러분, 이분이 91세랍니다! 믿어지세요? 우리 할아버지는 80인데도 외출도 못 해요. 큰 박수로 축하해주세요!”   청중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그녀가 고맙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내와 나는 따뜻한 환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귀가 중, 아내가 던진 한 마디에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당신, 이제 용도 폐기할까 했더니, 아직은 조금 더 써먹을 수 있겠네요. 이사 갈 때 놓고 가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 김탁제 / 수필가열린광장 la토박이 둥지 워싱턴 밤하늘 la토박이 dc 워싱턴 국방부

2025.07.03. 18: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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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읽기] 새도 지치면 제 둥지로 돌아간다

창경궁 앞을 지나다 보니, 나무에 작은 새집이 보였다. 가까이서 보니 촘촘하게 잘도 지었다. 푸른 기운 도는 잔가지가 삐져나온 것이 지은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다. 도심 한복판에서 마주하는 새 둥지는 언제 보아도 흥미롭다. 짓는 모습을 직접 보게 되면 더 신기하다. 그런데 가로수 한 그루에만 새 둥지가 있는 게 아니었다. 옆의 나무에도, 그 옆의 나무에도 둥지를 틀었다. 빈 둥지로 보이는 것까지 하나둘 세다 보니, 무려 열일곱 개까지 세었다. 철새 서식지라도 되는 걸까? 창경궁 앞쪽 가로수에만 이렇게 집중해서 새들이 집을 짓는 무슨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해질 정도였다.   지인에게 창경궁 앞에 새 둥지가 참 많더라는 얘기를 했더니, 책 한 권을 보내왔다. 『새는 건축가다』(차이진원 글)라는 책이다. 새에 관한 흥미로운 얘기가 많았다. 새에게는 저마다의 특정한 둥지 형태가 있는데 어떤 새는 건초 줄기로 나뭇가지 사이에 둥지를, 어떤 새는 고목에 구멍을 뚫어 보금자리를 만든다.   그런 새의 건축본능은 태어나는 순간 이미 주어진다고 한다. 경험이 쌓일수록 더 잘 짓는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새는 저마다의 환경 적응 방식에 따라 둥지를 배치한다. 이를테면, 나무에서 활동하는 새는 숲에 집을 짓고, 지상에서 활동하는 새는 풀숲이나 바위틈에 둥지를 숨겨두며, 바닷새는 물결 따라 움직이는 수초처럼 보이도록 수면 위에 집을 짓기도 한다. 그리고 흥부전에 나오는 제비처럼 사람들과 친밀한 새라면, 우리가 사는 지붕의 처마 밑에 둥지를 틀고 알을 품으며 산다.   새에 관한 책을 읽다 보니 자연스레 인간의 삶과 가정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다. 알다시피 세상의 모든 가정이 행복과 불행을 번갈아 겪으며 살아간다. 분명한 것은 집안의 가장이거나 부모라면, 어떤 세파가 몰아쳐도 끄떡없이 가정을 보호하려 들고, 될 수 있으면 가정을 튼튼하게 지켜내려 애쓴다는 점이다. 우리 부모님도, 저 윗대 조상님들도 그러했을 것이다. 오늘도 절에 와서 기도하는 분들을 보면, 대부분이 가족의 건강과 행복을 위해 기원한다. 먼저 가신 부모님의 왕생극락을 발원하며 엎드려 절하고, 화목한 가정과 원만한 대인관계를 위해 마음의 평온을 유지하려 명상에 집중한다.   물론 나처럼 출가한 경우엔 얘기가 조금 달라진다. 출가한 자에게 있어 가정은 그리 큰 의미도 없고, 삶에 미치는 영향도 적은 편이다. 그때그때 시절 인연에 따라 조화롭게 어울려 살다 가면 그뿐이다. 하지만 생각은 늘 그러하나, 몸은 그러하질 못할 때가 많다. 고향 집 떠난 지 30여 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나는 간혹 몸이 아프면 어릴 적 어머니가 끓여주던 우렁이 된장찌개가 먹고 싶다. 새도 지치면 제 둥지로 돌아간다더니, 제아무리 출가했어도 마음이 여려지면 제 둥지를 찾지 못한 새처럼 허공을 헤매는 듯하다.   우리는 항상 어떤 것이 있다가 사라졌을 때, 더 크게 ‘없음(無)’을 인식한다. 현재 가지고 있는 것에 대해 감사하며 살아야 하는데, 습관처럼 더 많은 것을 얻지 못함을 투정한다. 본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스스로 가진 게 없다고 괴로워한다. 나도 고향을 떠날 땐 고향이 소중한 줄 몰랐다. 산속에 살 때는 산속 절이 춥고 불편하기만 했다. 공기가 좋은 줄도, 물이 맑은 줄도 모르고 당연한 듯 여겼다. 그러다 산속 절을 떠나 도심에 깃들어 살아보니 이제야 알 것 같다. 머물고 있던 그 자리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말이다. 지금 내 곁에 없는 소중한 것들은 어느덧 내 기억 속에만 흔적으로 남았다. 출가 여부를 떠나 지난 생의 기억들을 돌아보면, 새의 귀소본능만큼이나 우리에게도 그런 회귀본능이 있는 것 같다. 치유가 필요한 어느 순간이 오면, 떠나온 둥지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다. 그곳이 꼭 고향 집이나 부모님이 아니어도 괜찮다. 그저 잠시라도 몸과 마음을 안온하게 쉴 수만 있다면, 어느 빈 둥지인들 어떠랴 싶다. “인간은 자신이 필요한 것을 찾아 세상을 여행하고, 집에 돌아와 그것을 발견한다.” 영국의 철학자 조지 에드워드 무어가 남긴 귀소에 대한 의미를 불교에서 찾으라 하면, 곧장 마음의 근본 자리로 돌아갈 것을 권하리라. 중생의 마음을 넘어 부처의 마음자리로 가는 길 말이다. 게다가 탐욕과 성냄과 어리석음만 여의면 언제든 가능한 마음자리니, 본질만 꿰뚫으면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마음이다. 물론 더 깊이 들어가면, 부처 마음 따로 있고 중생 마음 따로 있지는 않다. ‘부처 눈에는 부처만 보이고,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듯’, 그저 마음 씀씀이에 따라 부처도 되고 중생도 되는 법이다. 자, 그럼 어떻게 마음의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원영 스님 / 청룡암 주지마음 읽기 둥지 근본자리 둥지 형태 부처 마음 중생 마음

2024.03.31. 17: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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