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설경을 동경하던 내 소망이 있다면, 고향처럼 사계절이 뚜렷한 동부에서 살아보는 것이었다. 마침 딸이 미 공군에 복무 중인데, 한동안 오산 공군기지에 있다가 공군사령관을 수행하는 임무로 워싱턴 국방부에 전출되었다.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쾌재를 부르며 나는 동부행을 결심했고, 우리는 가족 주택단지 A동에 배정받아 입주했다. 사방을 둘러보니 이곳은 공군 기지 한가운데였다. 딸을 따라, 나는 이렇게 워싱턴 DC에 오게 됐다.
아내와 나는 베이스 안에서 첫날밤을 맞는다. 워싱턴 밤하늘엔 별빛이 촘촘하고, 늘 즐겨 듣던 ‘천국의 노래’ 합창곡이 별빛과 어우러져 우주를 수놓는다. 별들을 한참 바라보던 아내가 말을 건넨다. “여보, 저 별 좀 봐요. 글쎄, 별자리가 바뀌었네요.”
“별들도 서부에서 동부로 왔으니 자기들도 자리바꿈을 했겠지.”
이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포토맥 강바람이 선뜻 얼굴을 스친다. 어느새 퇴근한 딸이 황급히 우리를 부른다. 이유도 묻지 못한 채 우리는 차에 올라 이웃 B단지로 이동했고, 딸은 두 팔을 활짝 벌려 외친다. “짜-짱!”
눈앞에 펼쳐진 건 경이로운 장면이었다. 들판을 종횡무진 누비는 반딧불 쇼는 좀처럼 보기 힘든 진풍경이었다. 아내는 연거푸 탄성을 질렀다. “와, 놀랍다! 와우! 어메이징!” 그 수많은 반딧불은 마치 디즈니랜드 쇼를 능가할 만큼 황홀했다.
이곳 생활은 희한한 일이 잦아 우리를 자주 놀라게 한다. 하늘 높이 떼 지어 나는 시베리아 기러기 떼가 포토맥 강에서 한철을 보내고 간다. 이따금 집 앞 잔디밭에 내려앉아 온통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거위 몸집이 그렇게 클 줄 몰랐고, 허스키한 울음소리도 인상 깊다. 그들은 포토맥강의 풍족한 담수어를 주식으로 삼는 듯하다.
나의 일상 보행 코스는 5km. 길을 따라 펼쳐진 풍광은 마치 수채화 한 폭 같다. 왼편 강변에는 사철 낚시꾼들이 붐비고, 호수처럼 잔잔한 포토맥강 위로 유람선이 오르내린다. 강변에는 관광객과 다양한 유흥시설이 즐비하다.
재미난 에피소드 하나. 어느 날 운전면허 갱신을 위해 차량관리국(DMV)을 찾았다. DMV 직원도 대부분 흑인이고, 동양인은 LA와 달리 보기 힘들다. 창구에 앉은 흑인 여직원이 내 신청서를 받아들고 한참을 살피더니 내 얼굴을 유심히 바라본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지?’ 속으로 중얼거리던 찰나, 그녀가 물었다.
“당신, 이 생년월일 맞아요?”
이미 기분이 그리 좋지 않았던 나는 약간 퉁명스럽게 말했다. “사실이오. 뭐가 잘못됐소?” 그녀는 믿기 어렵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내 속이 부글부글 끓는다. ‘오늘 일은 망쳤군.’
그런데 그녀는 이내 칠면조처럼 밝게 웃으며 이유를 들려준다. “당신 얼굴은 75세쯤 되어 보이는데, 91살이라니 믿기 어려웠어요. 와우! 어메이징!”
그리고는 주변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여러분, 이분이 91세랍니다! 믿어지세요? 우리 할아버지는 80인데도 외출도 못 해요. 큰 박수로 축하해주세요!”
청중들은 일제히 박수를 보냈다. 그녀가 고맙고 아름다워 보였다. 아내와 나는 따뜻한 환대에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귀가 중, 아내가 던진 한 마디에 우리는 배꼽을 잡고 웃었다. “당신, 이제 용도 폐기할까 했더니, 아직은 조금 더 써먹을 수 있겠네요. 이사 갈 때 놓고 가지는 않을 테니 안심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