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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이슬람 문명의 이해와 존중

이번에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편협된 고정관념을 벗어나 그들의 찬란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예찬하고 싶다. 그동안 튀르키예, 알람브라 궁전 그리고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유명한 모스크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장대하고 웅장한, 섬세한 기교에 머리로는 경외감이 일었으나 마음에 감동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아마 내 마음에 그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해할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들에게 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준비된 만큼 배우게 마련이다. 이번에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를 읽고 나니 그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혹자는 ‘그 위험한 곳을 왜?’라고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은 한국을 훨씬 더 위험한 나라로 알고 있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이기에 언제 북한이 공격해 올지 불안하다는 말이다.   전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57개국 나라의 20억 인구가 이슬람교도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역시 내면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를 지향한다. 실제로 테러 집단은 이슬람교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중동 이슬람권과 적대적인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당연히 미국이 제공하는 미디어만 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갖게 되었다. 상업을 중요시하고 생활과 종교가 밀착된 이슬람 교인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이슬람 문명의 뿌리를 내린다. 도시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문화유산인 건축물과 그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이슬람 도시의 매력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적어냈다.   저자는 이슬람을 대표하는 도시탐방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시작한다. 20억 이슬람 교인들이 평생 꿈꾸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아야 하는 순례지이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공동 성지로 겸손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회개의 공간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당시의 찬란한 기독교(동로마교회) 전통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5000년 전 고대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로마와 이슬람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이고 중동의 진주로 불린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는 사막에 세계 최대의 스키 리조트를 만들고 뉴욕과 파리를 넘어 세계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향로의 도시, 오만의 살랄라, 시가지 전체가 박물관인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이슬람의 종교적 영성이 가득한 신비주의 도시인 코나, 페르시아 문화의 당당한 후예인 이란의 테헤란, 17세기에 세상의 부와 문화를 다 모아들인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는 이스파한, 지식과 문화가 넘치는 실크로드를 자랑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파키스탄의 고도, 라호르 성채는 이슬람과 힌두문화의 만남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타지마할은 화려하고 우아한 무굴예술의 극치로 알려져 있다.이집트의 카이로는 고대문명의 집산지, 리비아의 트리폴리는 로마 시대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튀니스는 이미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카뮈와 지드의 소설의 산실인 알제리, 모로코의 마라케시, 스페인의 코르도바, 그라나다는 인류 최고의 보석으로 알려진 알람브라 궁전을 자랑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력에 무너져가던 위기감 속에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숭배가 금기되어 있어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 대신 모든 건축물에 기하학적 문양이나 꽃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또한 수학, 건축학, 천문학, 과학을 고대 시대부터 생활에 적용해 왔으며 종교와 생활의 일치를 주장하고, 인류의 공존과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중동의 전쟁은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이슬람 문명 이슬람 문명 이슬람 문화 이슬람 도시

2025.10.14.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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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을 인간 모습으로 본 순간, 문명이 꽃피웠다

신은 도대체 어떤 모습일까. 전지전능의 존재를 인간의 시각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건 어리석은 일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게 중생의 호기심이기도 하다. 그런 인간의 발상이 서구문명의 근저를 형성했다는, 참신한 통찰을 담은 책이 나왔다.   UC버클리 중동학연구소 교수인 토머 펄시코의 ‘하나님의 형상대로’다. 원제는 ‘In God’s Image: How Western Civilization Was Shaped by a Revolutionary Idea'.   이 책은 문명사 해석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유태-그리스도교의 핵심적인 인간관이 근대 서구문명 형성의 결정적 동인이라는 독특한 주장을 전개한다. 이게 독특하다는 건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는 사상이 개인의 자아, 자유와 자율성, 평등, 양심, 의미라는 현대 서구 문명의 핵심 가치를 혁명적으로 형성해왔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이는 고대 문명에선 보편적으로 인정되지 않던 가치들이었다.     저자는 문명의 태동기에서부터 당시 주변 지역과 확연히 다르게 출발했던 히브리 사유에 주목하는 데에서 시작한다. 이어지는 역사적 접근과 분석은 관련된 다양한 지역들과의 비교를 통해 그 독특함을 더욱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전개된다. 예를 들면, 고대 근동 사회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왕에게만 적용되는 제한적인 개념이었지만, 유태교 전통에서는 이를 모든 사람에게로 확장하는 민주화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는 것이다.     고대엔 계층 구조가 당연시됐고, 여성이나 노예는 남성이나 주인의 소유물로 간주되는 관습법이 일반적이었다. 반면 유태교 전통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은 모든 인간이 신성을 공유하기 때문에, 평등할 뿐 아니라 주체적 자아로서의 자유를 지닌다는 해방의 혁명적 인간관으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물론 유태교 전통이 이러한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오늘날 서구문명이 향유하는 인간적 가치가 고대로부터 바로 실행되었던 것은 아니다. 서구에서도 근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러한 사상이 본격적으로 구현되었음은 물론이다.   이 책은 시대 순으로 구성돼 있다. 저자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와 바빌론 등 성서 시대부터 중세를 거쳐 종교개혁과 이후 근대 및 세속화된 현대 사회까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의 진화를 보여준다. 또 그는 이 사상이 구체적으로 표출시킨 가치들을 열거하고, 각 가치들이 이를 어떻게 반영하면서 구현하고 있는지를 집요하게 분석한다. 그 다섯 가지를 간략히 살펴보자.     첫째, 자아, 특히 개인적 자아의 출현이다. 고대사회에는 집단주의가 지배적이었는데 하나님의 형상은 각 인간에게 동등하게 부여된 것이니 인간 개인이 중요하게 부상하는 계기가 됐다. 이로써 개인의 고유성과 자율성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아울러 '하나님의 형상'이 인간 창조의 원형이라고 이해함으로써 고대 종교들의 우상 숭배를 타파하고 하나님의 형상인 인간의 가치를 드높일 수 있었다. 사회적으로는 남성의 소유물로 간주되던 여성이 법적인 주체로서의 지위를 갖게 되는 근거가 되었다.     둘째, 당연하게도 개인적 자아의 부상은 자유라는 가치를 필연적으로 구현하게 했으니 '하나님의 형상'은 권위주의를 거부하는 자유사상의 근거로 작동해 왔다. 특히 사도 바울을 통해 '하나님의 형상'은 그리스도교 안에서 본격적으로 내재화했다. 이로써 계층, 인종, 성별과 무관한 추상적 개인 개념이 자리잡기 시작하면서 인권에 대해서도 관심이 점증하게 되었다.     셋째, 개인의 자유가 중요한 가치로 부각됨으로써 자유와 함께 가야 하는 책임에 관한 도덕과 윤리의 차원이 강조됐다. 여기엔 양심의 문제가 관건이었는데, 이 역시 '하나님의 형상'의 구체적인 내용을 구현하는 사회적 표출이었다. 역사적으로는 개신교의 종교개혁 운동이 양심의 역할에 대해 더욱 주목하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는 점에서도 확인된다. 아울러 종교적 자유에 대해 더욱 강조하게 되면서 종교가 점차 개인적 차원으로 축소됐는데, 오히려 근대 이후 세속화의 씨앗이 여기서 심어졌다고 볼 수도 있다.     넷째, '하나님의 형상'이 모든 인간에게 동일하게 부여되었으니 평등은 필연적인 가치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이는 서구 근대화 과정에서 두드러진다. 예컨대, 소수인종인 유태인들이 유럽사회에 받아들여지는 과정이나 그리스도교가 타자를 대하는 태도에서의 변화 등에서 이러한 평등이라는 가치가 구현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섯째, 근대 과학혁명과 자연주의가 귀결시킨 현대 무신론은 앞선 근대와도 구별되는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왔다. 예를 들면, 신이 도덕성의 근거였다가 오히려 이를 위협하는 존재로 간주되었던 것을 들 수 있다. 당연하게도 이에 대한 반응으로 우리 시대에 와서 두드러진 세속주의의 출현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형상'은 이 대목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하나님의 형상'이 위에서 열거한 여러 가치들로 구체화되면서 인간 안에서 이성이나 자유의지와 같은 본성으로 내재화하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개인의 삶의 의미는 이제는 더 이상 밖으로부터 강요되는 것이 아니라 그 스스로 존엄성을 추구하는 근거로 작동하며 나아가 이를 새기고 실현하는 터전이 된다.     결국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은 특히 근대 이후 서구에서 이러한 가치 구현의 방식으로 실현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일어난 세속화는 종교의 붕괴가 아니라 오히려 종교의 세속적인 연장과 확대라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방식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사상이 비록 세속화의 방식이지만 서구 문명을 형성하는 혁명적인 이념이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오늘날 영성적 차원을 인정하면서 종교를 거부하는 이른바 SBNR(spiritual but not religious)이 확산하고 있다. 이런 풍토에서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종교적 사상은 세속적으로 변화하면서도 여전히 인간의 본성과 가치를 구현하게 하는 근거라고 저자는 주목한다. 이러한 그의 통찰은 탁월한 논리적 일관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전체적으로, 이 책은 무엇보다 시대의 변천과 역사적 변화가 물질적 조건보다 사상의 영향력에 더 근본적인 뿌리를 두고 있다는 문명사적 해석을 제시한다.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하나의 사상을 기축으로 시대와 역사를 꿰뚫어내는 노력이 매우 인상적이다.   반면, 다양한 변화요인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든다. 나아가 저자의 주장을 일반화하기에는 그 적용범위가 서구로 제한된다는 한계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평등이라는 문제를 다루는 장에서는 지나치게 유태교와 유태인에 집중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보다 광범위하게 접근했으면 더욱 큰 설득력을 지닐 수 있었을 것이라는 아쉬움을 피할 길 없다. 유태-그리스도교 사상과 문명 사이의 관계에 비중을 두는 종교문화사적인 접근이기에 다른 종교들에 대한 논의가 전개될 공간은 제한적이었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백미를 유감없이 보여주는 통찰이 있으니, 근대 세속화의 동인으로서의 '하나님 형상' 해석 바로 그것이다. 즉,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이 이를 평등하게 공유하는 인간의 가치를 부상시킴으로써 인간이 오히려 역설적으로 신의 권위로부터 벗어나는 세속화와 인간중심 사상을 추동했다는 것이다.     지극히 종교적인 사상이 오히려 탈종교화와 세속화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해석은 이 책에서 우리가 살필 수 있는 가장 전율적인 통찰이 아닐까. 한편으로는 탈종교화와 세속주의를 부추기는 듯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근대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사상이 그 혁명적인 변화의 원동력으로 작동해 왔다는 주장을, 저자는 방대한 사료와 해석을 통해 개진하고 있다.   정재현   연세대학교에서 철학과 문학사를 공부한 뒤 에모리대에서 종교철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에서 종교철학전공 주임교수를 거쳐, 현재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대 교수이자 연세대 특임교수. 저서로는 『신학은 인간학이다』, 『자유가 너희를 진리하게 하리라』, 『인생의 마지막 질문』, 『통찰』 등 다수.문명 하나님 근대 서구문명 오늘날 서구문명 고대 문명

2025.10.13. 16: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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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이슬람 문명의 이해와 존중

이번에는 이슬람 문화에 대한 부정적인 측면이 아닌 긍정적인 면을 이야기해 보고 싶다. 편협된 고정관념을 벗어나 그들의 찬란한 문화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예찬하고 싶다. 그동안 튀르키예, 알람브라 궁전 그리고 모로코를 여행하면서 유명한 모스크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장대하고 웅장한, 섬세한 기교에 머리로는 경외감이 일었으나 마음에 감동이 일렁이지는 않았다. 아마 내 마음에 그들의 진가를 알아보고 이해할 준비가 덜 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기회는 항상 준비된 자들에게 온다. 아는 만큼 보이고 준비된 만큼 배우기 마련이다. 이번에 ‘도시로 보는 이슬람 문화’를 읽고 나니 그들의 찬란한 문화유산을 직접 체험해 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혹자는 그 위험한 곳을 왜? 반문할지 모르겠지만 외국인들은 한국을 훨씬 더 위험한 나라로 알고 있다. 한국은 아직 전쟁이 끝나지 않은 휴전 상태이기에 언제 북한이 공격해 올지 불안하다는 말이다.     전 세계 인구의 1/4을 차지하고 57개국 나라의 20억 인구가 이슬람교도다.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이슬람 역시 내면의 평안과 세계의 평화를 지향한다. 실제로 테러 집단은 이슬람교에서도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다. 중동 이슬람권과 적대적인 나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다. 우리는 당연히 미국이 제공하는 미디어만 접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슬람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만 갖게 되었다. 상업을 중요시하고 생활과 종교가 밀착된 이슬람 교인들은 도시를 중심으로 이슬람 문명의 뿌리를 내린다. 도시를 장식하고 있는 화려한 문화유산인 건축물과 그들의 정서를 읽을 수 있는 전통시장을 돌아다니면서 천 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이슬람 도시의 매력을 예리하게 관찰하고 적어냈다.     저자는 이슬람을 대표하는 도시탐방을 사우디아라비아의 메카로 시작한다. 20억 이슬람 교인들이 평생 꿈꾸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아야 하는 순례지이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은 세 종교의 공동 성지로 겸손한 인간으로 돌아가게 하는 회개의 공간이다.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로서 당시의 찬란한 기독교(동로마교회) 전통과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 5000년 전 고대문명이 태어난 곳이자 로마와 이슬람 문화가 화려하게 꽃피웠던 곳이고 중동의 진주로 불린다. 아랍에미리트의 두바이는 사막에 세계 최대의 스키 리조트를 만들고 뉴욕과 파리를 넘어 세계 유행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로 급부상하고 있다. 향로의 도시, 오만의 살랄라, 시가지 전체가 박물관인 튀르키예의 이스탄불, 이슬람의 종교적 영성이 가득한 신비주의 도시인 코나, 페르시아 문화의 당당한 후예인 이란의 테헤란, 17세기에 세상의 부와 문화를 다 모아들인 세상의 절반이라고 하는 이스파한, 지식과 문화가 넘치는 실크로드를 자랑하는 우즈베키스탄의 사마르칸트, 파키스탄의 고도, 라호르 성채는 이슬람과 힌두문화의 만남이 이루어낸 작품이다. 인간이 만든 최고의 걸작, 타지마할은 화려하고 우아한 무굴예술의 극치로 알려져 있다. 이집트의 카이로는 고대문명의 집산지, 리비아의 트리폴리는 로마 시대의 구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고대도시이며, 지중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 튀니스는 이미 나의 버킷리스트에 올려놓았다. 카뮈와 지드의 소설의 산실인 알제리, 모로코의 마라케시, 스페인의 코르도바, 그라나다는 인류 최고의 보석으로 알려진 알람브라 궁전을 자랑하고 있으며 기독교 세력에 무너져가던 위기감 속에서도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완성한 이슬람 문명의 결정체다.     이슬람교에서는 우상숭배가 금기되어 있어 사람이나 동물의 형태 대신 모든 건축물에 기하학적 문양이나 꽃을 모자이크 형식으로 표현한다. 그들은 또한 수학, 건축학, 천문학, 과학을 고대 시대부터 생활에 적용해 왔으며 종교와 생활의 일치를 주장하고, 인류의 공존과 세계 평화를 기원한다. 중동의 전쟁은 왜 멈추지 않는 것일까.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이슬람 문명 이슬람 문명 이슬람 문화 이슬람 도시

2025.10.06. 21:53

동물로 사육된 남자가 던진 슬픈 문명 비판

인간이 만약 언어 교육과 사회생활을 전혀 하지 않고 신체만 어른인 상태로 성장한다면 사회는 그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The Enigma of Kaspar Hauser)’는 독일 역사의 기이한 실화를 베르너 헤어조크 감독 특유의 실존주의적 시각으로 재해석한 걸작이다. 1960년대 라이너 베르너 파스판버, 빔 벤더스와 함께 독일 영화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뉴저먼시네마’ 운동의 3대 명장 중 한명인 헤어조크는 광기에 가까운 실존주의를 특징으로 하는 감독이다. 그의 독특한 영화 방식을 가장 잘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되는 이 영화는 미스터리, 생존과 죽음의 본질, 비애와 비밀을 간결하고도 리얼하게 표현한다. 1975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돕는다.’   성경 구절인 듯 들리는 이 말은 고대 그리스의 속담에서 유래됐다. 영화의 독일어 원제 ‘Jeder fur sich und Gott gegen alle’를 번역하면, ‘사람들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그에 반한다’(Every Man for Himself and God Against All)이고, 이를 좀 더 풀어 말하면 ‘모든 사람은 자신을 위해 살고 신은 모든 사람을 상대로 그의 존재를 드러낸다’는 뜻이 담겨 있다. 1974년 이 영화가 한국에서 개봉될 때 ‘하늘은 스스로 돌보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다. 기존 속담의 반어법적 효과와 헤어조크의 실존주의적 성향을 드러내기 위한 의도였을 것이다.     1828년 오순절 일요일 독일의 뉘른베르크 길가에 한 아이가 버려진다. 그의 이름이 ‘카스퍼하우저’이고 군인으로 징집되기를 바란다는 내용의 편지 한 장을 들고 있다. 모든 게 미스터리한 이 아이는 자신이 어릴 적부터 어느 가난한 농부에 의해 지하실에 갇혀 동물처럼 사슬에 묶여 살다가, 그마저도 농부의 형편이 좋지 않아 버려졌다고 말한다. 마을 사람들은 아이의 기이한 모습에 의아해했지만 그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완전히 문명과 격리된 그의 백지상태는 사람들의 호기심 또는 지식인층의 실험의 대상으로 취급받는다. 서커스의 구경거리가 되어버린 카스파는 어느 교수의 집으로 도망을 한다.     교수는 몇 마디 말과 자신의 이름을 쓸 수 있는 정도에 불과했던 그에게 학문과 음악, 미술, 종교 등을 가르친다. 빠른 학습에 점차 ‘문명’에 눈을 뜨게 된 카스파의 말과 행동은 나름의 자아 세계를 형성한다. 곧 자서전을 쓰고 피아노를 연주하게 된 카스파의 존재는 정치적으로 상류사회에 당혹스러운 존재로 떠오른다.   그가 귀족 출신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다. 카스파를 마을에 버린 망토를 두른 인물이 다시 등장한다. 사악한 이 자는 언어를 구사하게 된 카스파가 자신을 기억하고 사람들에게 말을 할지도 몰라 두려워한다.     세상은 카스파를 발견하고 카스파는 세상을 발견한다. 세상에 낯선 사람으로 온 현명한 바보 카스파는 사회를 받아들이고 싶어하지만 그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 사회이다.  카스파에게 문명이란 사람들의 시야를 가리는 도구이고 사람들은 이를 자각하지 못하고 그저 죽음을 향해 달려가는 존재들일 뿐이다.     학문과 논리의 대상이 아니라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는 교수와의 대화 중에 그에게 모든 사람이 늑대였다고 토로한다. 그는 교회 회중의 침묵이 오히려 비명을 지르는 것과 같다고 말하고, 왜 피아노를 호흡처럼 연주할 수 없나, 라고 반문한다. 토론에서 종교와 합리주의의 모순을 지적하며 오만한 논리학자를 제압한다. 그는 자신의 사고와 행동을 이해하지 못하는 주변 사람들과 마찰을 빚는다.   카스파는 1833년 두 번째 폭행을 당하고 가슴 깊숙이 칼에 찔린 채 살해된다. 사람들은 그의 기형성 또는 비정상성을 분석하기 위해 시체를 해부한다. 자신들의 지적 욕구를 위해서다. 공증인은 카스파의 뇌의 어느 한 부분이 변형됐다고 기록한다. 변형이라는 말 외에 더 나은 설명을 찾을 수 없던 독일 지식인들의 위선을 상징하는 듯, 영화는 절뚝거리며 걸어가는 공증인의 뒷모습으로 끝이 난다.     헤어조크는 카스파의 음울한 우화를 구체적이고 철학적인 탐문으로 이어간다. 그는 카스파에게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함으로 서구 문명의 큰 축인 이성과 종교에 도전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문명을 조롱하는 ‘문명화된 카스파’와 문명화의 비극을 목도한다. 헤어조크는 문명과 비문명의 경계에서 인간의 순수성을 포착해 낸다.     헤어조크 감독은 카스파 역에 브루노 슐라인슈타인이라는 43세의 비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그는 평생 보호 시설에서 보냈고, 정상적인 교육을 받지 않았지만 음악적 재능이 있었다. 그의 삶을 다룬 TV 다큐멘터리를 통해 익히 알려진 인물이었다.     슐라인슈타인은 연기 이상의 것을 연기한다. 순수하고 교활한, 그리고 선량하고 악의적인 카스파의 장난기를 과장하지 않고 침착하게 표현한다. 젊은 카스파를 연기하기엔 나이가 좀 많긴 했지만 카스파 만큼이나 수수께끼 같은 인물인 이 배우는 코믹한 카스파 역을 이질감 없이 잘 소화해 냈다. 낯선 세계에 휘둥그레진 어린 그의 눈은 영화의 중심 이미지이다.   헤어조크는 50년 전 사회 제도 또는 체제에서 벗어난 삶을 사는 사람들이 감수해야 하는 고통, 그리고 권력에 대한 민중의 두려운 심리를 리얼하게 파헤쳤다. 상상력과 지성에 기반한 이 영화는 후세대 거장들인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1980), 라르스 폰 트리에의 ‘바보들’(1998), 요르고스 란티모스의 최근 작품 ‘푸어 씽스’(2023) 등의 영화들에 영감을 주었다. 상류층 엘리트 계급이 주도하는 사회 제도가 그들 외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고통의 삶을 안겨 주고 있음을 비판한 영화들이다.     명상적이며 가슴 아픈 담론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돌보지 않는다’는, 예의 바른척하는 지성인들의 학문과 이성은 문명의 오만함이며 혼돈이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던진다. 헤어조크는 이 영화를 통해 삶을 살고자 했던 카스파를 ‘학문적 창조물’로 인식했던 상류사회의 오만을 반성하고자 했다.     유튜브에서 무료로 감상할 수 있다.  김정 영화평론가비판 문명 바보 카스파 칸영화제 그랑프리 서구 문명

2024.09.18.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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