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희민 목사는 미주 한인 교계의 거목으로 꼽힌다. 한인 사회의 산증인이자 대표적인 1세대 종교인이다. 나성영락교회 제2대 담임목사로 사역한 그는 은퇴 이후에도 한인 교계의 영적 버팀목 역할을 이어왔다. 한인 교계에 굵직한 한 획을 남긴 박 목사는 지난 2023년 4월 별세했다. 그가 남긴 족적은 한인 1세대가 지닌 개척자 정신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한인 이민자로 걸어온 그의 삶의 궤적은 미국 이민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다. 1992년 4월 29일, 누적된 분노와 갈등이 폭발한 LA 폭동 당시 한인 사회는 깊은 상처를 입었다. 당시 나성영락교회 담임이던 박희민 목사는 팔을 걷어붙였다. 상처를 보듬고 한·흑 커뮤니티 간 화해의 다리를 놓기 위한 종교계의 움직임 중심에 박 목사가 있었다. 당시 한인기독교교회협의회는 흑인 교계 지도자들과 함께 같은 해 9월 한·흑 교계 회의를 개최하겠다고 발표했다. 한인 교계는 갈등 해소를 위해 흑인 목회자 방한 사업도 추진했다. 실제로 LA 인근 흑인 교계 지도자 80여 명을 초청해 두 차례에 걸쳐 한국 방문 행사를 진행했으며, 모든 비용은 한인 교계가 부담했다. 이 모든 과정은 4·29의 상처를 치유하고 한인 사회가 다시 주류 사회 속에서 우뚝 설 토대를 마련하려는 박 목사의 의지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박 목사의 삶 자체는 개척자 정신으로 가득했다. 그는 한인 최초의 에티오피아 선교사였다. 당시 교단 선교위원장이던 한경직 목사가 선교지를 고민하던 그에게 에티오피아를 권유했고, 박 목사는 척박한 땅에서 복음 전파와 구제 사역에 헌신했다. 에티오피아에서 둘째 딸을 낳았고, 젖먹이 아이를 돌보며 사역을 감당했다. 두 아이 모두 풍토병에 걸렸지만 치료약도, 의료 시설도 부족한 환경이었다. 박 목사는 아이들이 몸을 긁지 못하도록 손에 붕대를 감아줄 정도였다. 아내가 아이들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그는 홀로 남아 사역을 이어갔다. 이러한 인내와 헌신은 훗날 그가 미주 한인 교계의 큰 어른으로 자리매김하는 밑거름이 됐다. 그가 나성영락교회에 청빙된 것은 1988년 1월이다. 김계용 목사의 후임으로 부임해 1989년 10월 제2대 담임목사로 위임받았다. 당시 나성영락교회는 동양선교교회와 함께 LA의 양대 교회로 꼽혔다. 50대 초반의 젊은 목회자로 부임한 그는 변화의 시기를 맞은 이민 교계에서 막중한 역할을 맡게 됐다. 박 목사는 담임목사가 된 지 약 3년이 지나면서 교회의 틀을 본격적으로 바꾸기 시작했다. 전통 예배 대신 현대적인 '컨템포러리(Contemporary)' 예배를 도입했고, 목회자 가운도 과감히 벗었다. 설교 강단 역시 보다 자연스러운 구조로 바꿨다. 당시 한인 사회는 자영업에 종사하는 이들이 많아 생계를 위해 쉼 없이 일하던 시기였다. 이민 생활의 고단함 속에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이들도 적지 않았고, 경제적 어려움이나 가정 문제로 고통받는 이들도 많았다. 이에 따라 가정을 바로 세우고 치유하는 사역의 필요성이 커졌다. 또 1세대가 자리를 잡으면서 2세들이 미국에서 태어나기 시작했고, 차세대 기독교 교육의 필요성도 절실해졌다. 한인 교회가 울타리 안에만 머물러서는 안 된다는 인식도 확산됐다. 박 목사는 이러한 흐름을 일찌감치 간파했다. 그는 목회 비전으로 ▶복음적 설교와 사역을 통한 전인적 구원 ▶이민자의 아픔과 필요를 채우는 교회 ▶평신도 리더 양성 ▶2세 교육과 차세대 목회 ▶세계선교 리더십 발휘 ▶지역사회 섬김 ▶건강한 가정 만들기 등 7가지를 제시했다. 특히 차세대 사역에 중점을 두고 이중언어가 가능한 교역자를 적극적으로 영입했다. 주일학교 교사들에게도 이중언어 사용을 장려했고, 영어권 목회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이중언어 사역 도입 이후 주일학교 학생 수는 1500명 이상으로 늘었다. 그는 1000만 달러 장학기금 모금 운동도 시작했다. 한인 사회가 1세대에서 끝나지 않고 차세대의 미래로 이어지도록 씨앗을 심는 작업이었다. 매년 30만 달러 규모의 장학금이 조성됐고, 그의 목회 기간 동안 3000명 이상이 혜택을 받았다. 박사 과정 학생만도 100명이 넘는다. 이들은 현재 대학 교수와 목회자, 각계 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나성영락교회는 지금도 이 기금을 바탕으로 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IMF 외환위기 당시 한인 교계 역시 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나 박 목사는 KAMSA라는 기관을 조직해 500명의 선교사에게 매월 200달러씩 지원하는 운동을 펼쳤다. 박 목사는 나성영락교회에서 16년간 사역했다. 정년은 70세였지만 그는 68세에 스스로 은퇴를 결정했다. 더 많은 사역을 감당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은퇴 이후에도 한인 사회를 위한 그의 발걸음은 멈추지 않았다. 그는 새생명선교회를 설립해 매년 대학 입학 예정자와 대학생, 대학원생 등 100명에게 장학금을 전달했다. 또 이민 역사를 기록하는 일이 커뮤니티의 뿌리이자 정체성 보존이라는 신념 아래 미주 한인 교회사 전체를 집대성한 책을 발간했다. 2023년 4월 출간된 이 책에는 120년 미주 한인 교계의 역사가 담겼다. 교단과 교파를 초월해 목회자와 신학자, 사학자들이 참여한 대규모 편찬 프로젝트였으며, 그 중심에 박 목사가 있었다. 세대 전환기와 변혁의 시점에서 목회자로서 맡은 바를 온전히 감당한 박희민 목사가 남긴 흔적은 앞으로 펼쳐질 미주 한인 사회의 발전을 지탱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종교라는 한 축을 통해 그는 이민자가 써 내려간 미국 역사에 또 하나의 중요한 페이지를 남겼다. ━ ☞박희민 목사는… 충남 예산 출신인 그는 장로회신학대학과 프린스턴신학교대학원, 녹스신학교를 졸업했다. 하버드대학교에서는 메릴 펠로우로 신학을 연구했다. 에티오피아 선교사로 사역을 시작해 교계 곳곳에서 맡은 소명을 감당했다. 나성영락교회 2대 담임목사로 사역하다 은퇴한 그는 생전 대한민국 국민훈장 목련장 등을 받기도 했다. 지난 2023년 4월 별세했다. 장열 기자박희민 울타리 박희민 목사 한인 교계 한인 이민자
2025.12.31. 19:59
고 박희민(사진) 목사 소천 1주기 목회자 세미나가 열린다. 새생명선교회(대표 김은형)에 따르면 고 박희민 목사 소천 1주기 목회자 세미나는 오는 20일 오전 9시 LA지역 새생명비전교회(담임목사 강준민)에서 진행된다. ‘디아스포라를 위한 건강한 교회’라는 주제로 열리는 이번 세미나에서는 ▶노창수 목사의 제자훈련 ▶강준민 목사의 영성훈련 ▶한기홍 목사의 기도사역 ▶김한요 목사의 설교사역 ▶최경욱 목사의 선교사역 ▶민종기 목사의 목회리더십 ▶김태형 목사의 장애인 사역 ▶이상훈 총장의 선교적 교회 등 다양한 내용을 다루게 된다. 또, 이날 세미나 후 새 생명선교회 측은 전국에서 선발된 50명의 소형 교회 목회자에게 1500달러씩 지원금을 전달할 예정이다. 한편, 박희민 목사는 미주 한인 교계를 대표하는 1세대 목회자로 전립선암 재발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지난해 4월 26일 눈을 감았다.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게시판 박희민 박희민 목사 담임목사 강준민 목회자 세미나
2024.05.15. 18:14
11일 오전 11시에 나성영락교회에서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1세대 종교인이었던 고 박희민 목사 장례 예배가 진행됐다. 새생명비전교회 강준민 목사가 추모설교를 전한 이 날 예배에는 200명이 넘는 성도가 참석해 한인사회에 큰 족적을 남긴 박 목사의 마지막 떠나는 길을 배웅했다. 고인은 1988년부터 2003년까지 나성영락교회에 2대 담임 목회자로 봉사했다. 은퇴 후에는 새생명선교회 설립 및 미주한인교회사 발간에 앞장서는 등 차세대 육성에 심혈을 기울였다. 김예진 기자 [email protected]단독사진 박희민 박희민 목사 새생명비전교회 강준민
2023.05.11. 20:17
2022년 3월 14일이었다. 전립선암으로 투병 중이던 박희민 목사를 만났다. 그는 한인사회의 대표적 1세대 종교인이다. 나성영락교회 2대 담임 목사로 은퇴 후에도 한인 교계의 영적 버팀목 역할을 했다. 당시 본지의 ‘남기고 싶은 이야기’ 시리즈 기사를 위해 박 목사와 인터뷰를 진행했었다. 박 목사는 그때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죽음 앞에 서 보니까…”라며 말문을 열었다. 아내와 아침 산책 중에 자주 흥얼거리는 곡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찬양(찬송가 508장) 한 곡조를 불렀다. “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 화려한 천국에 머잖아 가리니.” 가사는 곧 그의 심경이었다. 가야 할 곳이 그리 멀지 않았다. 그는 알고 있었을 터다. 박 목사가 암 판정을 받은 건 2018년 8월이었다. 암세포가 뼈까지 전이된 상태였다. 그때 심정을 물었다. “그동안 목사로서 얼마나 많은 장례식을 집례했겠나. 죽음을 늘 가까이서 보며 살았다. 가족은 충격을 많이 받았는데 나는 오히려 덤덤해지더라.” 병명을 알기 전에는 원인 모를 아픔에 시달려야 했다. 이유도 모른 채 육체적 고통을 감내한 게 1년 정도다. 암 진단은 고통의 원인을 비로소 알게 한 희소식이었다. 병명을 통해 이유를 알았으니 “그랬구나…”라며 되레 이해됐다. 두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하늘을 향해 조용히 감사 기도를 읊조렸다고 했다. 암으로 인한 고통을 말하면서도 박 목사는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는 “막상 직면해보니까 죽는다는 게 다 나쁜 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말투는 초연했다. 죽음에 대해 더 물었다. “사실 그동안 살면서 비본질적인 것도 욕심내고 그랬다. 그런데 그런 거 다 던져버리게 되더라. 그동안 남편으로서, 아버지로서 부족했던 것도 회개하게 되고…요즘은 남은 생을 어떻게 살까, 어떻게 하면 더 뜻깊게 하루를 보낼까, 이런 생각 하며 지낸다.” 죽음과의 조우는 그를 사색으로 안내했다. 본질적인 것에 오롯이 집중하도록 했다. 잠깐 있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닌 영원한 가치를 더 갈망하고 좇게 됐다. 그는 몇 마디를 덧붙였다. “본래 죽음은 삶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따라온다. 출생과 함께 죽음이 공존한다. 사실 우리는 한평생 살다 죽는 게 아니다. 하루에도 그 경계를 왔다 갔다 한다. 우리가 삶에 대해 이해하려면 죽음이란 것도 이해해야 하지 않겠나.” 인터뷰 도중 알게 됐다. 팬데믹이 한창이던 2021년 6월 18일이었다. 그는 또 한번 죽음의 그림자를 경험했다. 병원을 다녀오던 중 210번 프리웨이에서 대형 트럭이 박 목사가 운전하던 차를 덮친 것이다.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생과 사가 종이 한장 차이에 불과함을 절감한 순간이었다. 박 목사는 “죽음이란 렌즈를 통해 찬찬히 인생을 조명하다 보면 신실하게, 정직하게, 사랑하고, 용서하며, 베풀고, 섬기며 살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인터뷰 도중 문득 아버지를 떠올렸다. “아버지가 떠난 지 53년이나 됐다”고 회상했다. 박 목사는 새벽기도를 나서며 찬양을 흥얼거리던 아버지의 목소리가 유난히 귓가에 맴돈다고 했다. 이제는 그 찬양을 아내와 같이 부르며 아침을 맞는다고도 했다. “죽는다는 게 사실 쉬운 건 아니다. 목사지만 고통이 찾아오면 흔들릴 때가 왜 없겠나. 그럴수록 찬송하고 성경을 묵상한다. 그러면 평안함이 찾아오고 기도가 깊어짐을 느낀다.” 박 목사는 간간이 찬양을 부르며 인터뷰를 대신했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은 없네. 이 세상 부귀와 바꿀 수 없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그때마다 질문을 멈추고 그가 부르는 찬양을 조용히 들었다. 박 목사는 죽음을 기다리는 게 아니었다. 영원한 하늘을 바라고 있었다. 박희민 목사는 그렇게 남은 시간을 보내다 본향으로 돌아갔다. 지난 26일 오전 3시였다. 당시 인터뷰 기사는 미완성으로 남았다. 박 목사의 건강 악화로 추가 인터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의 남겨진 이야기를 이렇게라도 전한다. 장열 / 사회부 부장중앙칼럼 박희민 이야기 박희민 목사 담임 목사 그동안 목사
2023.05.01. 19:15
미주 한인사회를 대표하는 1세대 종교인 박희민 목사(사진)가 별세했다. 향년 86세. 재미한인기독교선교재단은 “박희민 목사가 전립선암 재발로 투병 생활을 하던 중 26일 오전 3시 자택에서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고 이날 밝혔다. 박 목사는 토론토한인장로교회에서 시무하다가 지난 1988년 나성영락교회에 2대 담임 목회자로 부임했다. 이후 2003년 은퇴까지 목회 활동을 하면서 한인 교계의 영적 버팀목 역할을 담당했다. 박 목사는 목회 활동을 하면서 각종 사회 활동도 펼쳤다. 1992년 4·29폭동 직후 박 목사는 흑인 목사 방한 사업을 추진했다. 갈등 해소를 목적으로 LA지역 흑인 교계 지도자 80여 명을 초청, 두 번에 걸쳐 한국 방문 행사를 진행하기도 했다. 나성영락교회에서 시무할 당시 1000만 달러 장학기금 모으기 운동도 펼쳤다. 1세대에서 끝나는 한인사회가 아닌, 미래를 살아갈 차세대를 위해 씨앗을 심겠다는 목적이었다. 그 장학금으로 목회하는 동안 3000명 이상의 학생을 도왔다. 박 목사는 이민 교계의 미래를 내다보고 차세대 지도자를 세우는 일에도 심혈을 기울였다. 그와 함께 사역했던 부교역자 중 진재혁 목사(전 지구촌교회), 박형은 목사(컴패션코리아), 양춘길 목사(필그림선교교회) 등 많은 교역자가 이후 교계 곳곳에서 자기 몫을 다하는 목회자가 됐다. 70세가 정년이었지만 그는 68세에 은퇴했다. 자리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었다. 원로 목사 추대도 거절하고 교회를 떠나 아름다운 은퇴의 모범을 보였다. 은퇴 후 박 목사는 새생명선교회를 설립했고, 재미한인기독선교재단 이사장 등을 맡았다. 팬데믹 사태 때는 미주 지역 한인교회 45곳을 선정, 지원금을 전달하고 매해 100명의 장학생을 선발해 장학금도 수여했다. 최근에는 미주 한인 교계 역사상 최초로 ‘미주한인교회사’ 발간에도 앞장섰다. 박희민 목사는 한인 사회의 산증인이었다. 그는 지난해 3월 본지와 마지막 인터뷰를 했다. 당시 박 목사는 인터뷰 도중 자주 흥얼거리는 노래라며 찬송가 508장(우리가 지금은 나그네 되어도)을 부르기도 했다. 박희민 목사는 그렇게 본향으로 돌아갔다. 장열 기자ㆍ[email protected]박희민 한인 박희민 목사 한인 교계 양춘길 목사
2023.04.26. 2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