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상담사의 정신이 무너져 내린다. 중병을 앓고 있는 딸, 어디에 있는지조차 모르는 남편. 그녀는 또 다른 정신치료사를 찾아가 정신 상담을 이어간다. 영화의 서사는 '정신 상담사의 정신 붕괴'라는 역설적 상황에서 출발한다. 어머니로서의 정체성 혼란, 존재감 상실, 그리고 자책감이 교차하는 내면의 풍경을 세밀하게 그려낸 영화 '다리가 있다면 너를 걷어찰거야(If I Had Legs I'd Kick You)'는 단순한 구조 안에 복합적인 감정과 상징을 응축해 놓았다. 관객의 시선에 따라 심리 스릴러, 비극적 판타지, 혹은 모성에 대한 드라마로 읽힐 수 있다. 영화의 여주인공 린다 역의 로즈 번은 제7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최고 연기상에 해당하는 은곰상을 받았다. 영화를 연출한 메리 브론스타인은 뉴욕 출신의 독립영화 감독이다. 저예산, 미니멀 세팅, 비상업적이고 실험적 요소가 강한 환경에서 여성 인물들의 불완전함, 인간관계의 불편함, 감정의 분출·갈등을 정면으로 드러내는 스타일을 특징으로 한다. 영화는 린다가 새벽에 딸의 의료 기구를 점검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딸은 보이지 않지만, 침대 뒤편에서는 기계음과 숨소리가 들린다. 어디론가 일하러 간 남편 찰스와는 전화 통화만 오간다. 그는 딸의 상태나 린다의 감정에 대해 “조금만 더 버티라”는 말만 반복한다. 린다의 피로한 얼굴에 방 안의 적막함이 압도적이다. 어느 날 천장에서 물이 새기 시작하더니 결국 천장이 내려앉는다. 놀란 딸의 울음소리가 집 안을 메운다. 린다는 급히 집주인에게 연락하지만 아무런 조치도 취해지지 않는다. 그때부터 린다는 모든 것을 혼자 감당해야 한다는 현실에 압도되며 점점 고립되어 간다.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그 모든 요소가 그녀의 삶을 흔든다. 필사적으로 현실을 붙잡으려 하지만 점점 더 무너져갈 뿐이다. 이후 린다는 모텔로 이사를 한다. 모텔은 어둡고 불편한 공간으로 아이의 의료 장비를 유지하기도 힘든 환경이다. 그런데도 린다는 세상과 단절된 이곳이 오히려 편안하다. 모텔에서 린다는 제임스라는 남자를 만난다. 두 사람은 서로의 고립된 상태를 조금 드러내는 정도의 어색한 대화를 나누지만 아무런 위로도 되지 못한다. 린다는 온라인으로 상담사 일을 이어간다. 점차 내담자와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그녀는 “아이를 미워하는 자신이 나쁜 사람인가요”라고 묻는 내담자의 말에 격하게 반응하며 세션을 갑작스레 중단한다. 밤늦은 시간, 린다는 술과 약물에 취한 채 멍하니 침대에 앉아 있다. 고통이 밀려올 때마다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그녀의 상담 치료사(코난 오브라이언)는 “당신은 환상 속의 대화를 실제로 존재하는 것처럼 느끼는 것 같다”고 지적한다. 그러자 린다는 폭발하듯 외친다. “그 애는 나의 전부야. 그런데 아무도 그 애를 본 적이 없어!” 이 순간부터 관객은 딸의 존재 자체가 현실인지 린다의 내면이 만들어낸 환상인지 혼란에 빠진다. 다음 날 아침 린다는 모텔 침대 옆에서 딸의 기계음이 멈춰 있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I can see you through the hole.”(구멍 사이로 네가 보여) 그날 밤 린다는 딸이 누워 있던 병원 침대와 똑같은 침대가 놓인 텅 빈 공간을 목격한다. 침대는 비어 있고 의료 장비만이 남아 있다. 린다는 한동안 그것을 바라보다가 천장을 올려다본다. 의자를 밟고 천장 구멍 쪽으로 올라가면서 영화의 제목으로 쓰인 대사를 속삭인다. “If I had legs, I'd kick you.”(다리가 있다면 너를 걷어찰거야 ) 클로즈업된 천장의 구멍을 마지막으로 린다가 그 이후 어디로 사라졌는지는 보여주지 않은 채 영화는 끝이 난다. 브론스타인 감독은 모성의 이면에 자리한 불편한 진실을 회피하지 않는다. 그녀는 린다의 심리적 붕괴를 통해 절망, 공포, 연민이 교차하는 감정의 복합성을 탐구하며 억눌린 분노와 죄책감을 상징적 서사로 표현한다. 이를 통해 모성이라는 사회적 이상과 개인의 실존 사이의 간극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영화의 전체적인 관점은 린다의 시선을 따라가며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감독은 린다가 경험하는 현실이 왜곡되었을 가능성을 암시하고 상징적인 장면들을 통해 관객이 그녀의 감정을 체험하도록 유도한다. 린다는 이미 오래전에 딸을 잃었으며 영화는 끝까지 딸의 얼굴을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대부분의 장면을 죄책감과 상실감이 빚어낸 환상으로 읽히게 한다. 천장의 구멍은 린다 내면의 '부재의 공간'을 의미하며 그 속으로 사라지는 린다의 모습은 자신의 고통과 정면으로 마주하려는 실존적 자각, 혹은 심리적 구원의 순간으로 해석될 수 있다. 영화 제목 'If I had legs, I'd kick you’에는 자신이 무력한 어머니라는 역설적 자기 인식이 담겨 있다.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 어머니’가 되지 못함에 대한 린다의 자기 고백이다. 어머니로서 자신의 무력감을 내비치는 그녀의 독백은 보이지 않는 신, 운명, 사회, 현실을 향한 분노의 표현이다. 이러한 감정의 밀도를 시각적으로 포착하기 위해 감독은 인물의 얼굴을 클로즈업으로 포착하고 흔들리는 핸드헬드 카메라로 린다의 불안정한 심리를 체감하게 한다. 브론스타인 감독은 이 영화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서 비롯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딸이 심각한 신체적 질환을 앓게 되면서 가족은 뉴욕을 떠나 샌디에이고의 병원 근처로 이주하게 되었다. 병원 측에서 제공한 임시 숙소에서 8개월간 머물렀다. 이 시기에 그는 집도 아니고 병원도 아닌 ‘어색한 공간’에서 시간이 멈춘 듯한 감정을 강하게 경험한다. 자신이 점점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브론스타인은 이 경험을 통해 엄마가 되기 전의 나와 엄마가 된 후의 나 사이의 단절을 자각한다. 그는 딸을 돌보는 과정에서 ‘어머니로서의 나’와 ‘한 인간으로서의 나’ 사이의 간극에 짓눌린다. 서로 다른 두 자아의 갈등과 긴장감이 영화의 모티브가 되었고 딸의 병실·좁은 공간·천장의 균열 같은 이미지들은 그 시절의 기억을 시각적으로 변형한 것이다. 모성은 기본적으로 사회적 부담을 동반한다. 사회는 엄마에게 역할을 기대하고 책임을 부과한다. 린다는 이 과정에서 압도당하며 자신의 삶과 존재에 대한 혼란에 빠진다. 영화는 그녀를 바라보는 관객이 어디서부터가 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심리적 상상인지 그 경계의 불확실성을 체험하게 한다. 천장 구멍으로 들어간 린다는 정말로 자살한 것일까. 린다의 ‘사라짐’은 실제보다는 상징적 행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린다의 모든 행위와 대사에 담긴 이중성이 영화의 핵심이다. 김정 영화 평론가 [email protected]어머니 절규 영화 다리 정신 상담사 병원 침대
2025.10.22. 19:12
성당에서는 사순시기를 마감하고 파스카 성삼일을 시작하는 주님 만찬 성목요일 미사에서 신부님이 무릎을 꿇고 신자들의 발을 씻겨 주는 세족식을 한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일의 의미를 되새기기 위함이다. 세족식 참석 인원은 예수님 살아생전의 제자 수인 12명에 불과하다. 따라서 신자 수가 많은 큰 성당에서는 하고 싶어도 세족식에 참여하기가 쉽지 않다고 한다. 선택되면 그건 은총이며 축복이다. 내가 다니는 성당은 매주 미사에 참석하는 신자 수가 100명도 되지 않는 작은 성당이다. 그래서 웬만한 신자들은 모두 한두 번은 세족식에 참여해 보았다. 신부님에 따라 세족식에 참여하는 사람을 정하는 방법도 다르다. 미리 정해 놓기도 하고, 제비를 뽑기도 하고, 원하는 신청자를 받기도 한다. 쉽고 흔하면 귀한 줄 모르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어느새 우리에게 세족식은 그저 흔한 연례행사가 되어 버린 듯싶었다. 올해 세족식에서는 신부님이 새로운 방법을 택하셨다. 그날 저녁 미사에 온 모든 신자가 발을 씻고 발 씻김을 받았다. 먼저 12명의 발을 신부님이 씻겨 주시고, 발 씻김을 받은 12명이 무릎을 꿇고 다음 12명의 발을 씻겨 주었다. 처음에는 조금 당황하고 어색해하던 신자들이 세족식이 끝날 무렵에는 모두 감동 어린 얼굴을 하고 있었다. 요즘 세상에는 가족이라도 남의 발을 씻겨 주기는 쉽지 않다. 낯선 이의 발을 씻기고 수건으로 말려 그 발에 입을 맞추며 짧은 순간이지만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자연스럽게 생각하지 않았을까 싶다. 주일에는 미사를 마치고 투병 중인 교우 K형제의 문병을 다녀왔다. 그분의 아내로부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메시지를 받았다. 뇌종양 탓에 그가 우리 일행을 알아보는데 잠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나 역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병원 침대에 누워 어눌하게 말하는 그가 내가 알던 K형이라는 사실이 전혀 믿기지 않았다. 나를 번쩍 안아 차에 태워 ME 피정에 데려다주었던 그가 아니던가. 늘 쩌렁쩌렁한 음성으로 호탕하게 웃던 그가 아니던가. 자꾸 뭐라고 말을 하는데 나는 그의 말을 알아듣지 못해 부인이 곁에서 통역해 주었다. 월남 참전 용사며 국가유공자인 그의 방에는 감사장과 사진이 가득했다. 뇌신경이 눌린 탓에 그는 과거와 현재를 잘 구별하지 못했다. 하지만 사람은 이럴 때 그 본성이 나오는 것 같다. 우리를 알아본 그는 한 사람씩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그 자리에 없는 다른 교우들을 부탁했다. 시간의 차이만 있을 뿐, 그가 가는 길은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길이다. 그날 나는 이쪽에서 병원 침대에 누워있는 그를 바라보며 마음 아파했지만, 언젠가는 내가 그쪽에 눕고 누군가 이쪽에서 나를 위로할 것이다. 과연 나는 그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비칠 것인가. 돌아오는 길, 들판에는 야생화가 피어있고, 날씨는 더워 에어컨을 켜고 왔다. 봄은 시작되었는데, 누군가는 우리 곁을 떠나려 한다. 과연 삶이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는 아침이다. 고동운 / 공무원이 아침에 사순시기 세족식 참석 올해 세족식 병원 침대
2023.04.12. 18: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