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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불교 수행에도 믿음이 필요할까

“믿음을 강요하지 않아서 좋아요.”     불교에 호감을 갖는 주된 이유 중 하나다. 현대인들에게 ‘믿음’은 불편함을 넘어 때로는 경멸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들의 바람처럼 불교는 믿음을 강요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렇다면 불교 수행에서 믿음은 전혀 고려할 필요가 없는 단어일까.     검은색 볼펜을 수건으로 가린 채 묻는다. “이 수건 안의 볼펜은 검은색입니다. 믿으십니까?” 누군가는 믿을 것이고, 누군가는 믿지 않을 것이다. 이유도 다양할 수 있다. 수건을 걷고 볼펜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은 뒤 다시 묻는다. “이 볼펜이 검은색인 것을 믿으십니까?” 어딘가 어색하다. 이미 확인된 사실에 대해 굳이 ‘믿는다’고 말하지 않기 때문이다. 믿음이 과학적·경험적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생사와 무형한 마음을 다루는 종교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는 이유다.     우리 일상은 생각보다 믿음과 깊이 연관돼 있다. 식당을 고를 때, 미용실이나 병원을 정할 때 참고하는 후기와 입소문이 과연 100% 옳은 선택을 보증할 수 있을까. 결국 이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신념이나 믿음에 일정 부분 의지할 수밖에 없다. 태생적으로 믿음과 거리가 멀어 보이는 자연과학도 예외는 아니다. 관찰로부터 일반화를 하기 위해서는 이론적 틀과 가설이라는 일종의 믿음에 의지할 수밖에 없다.     자연과학의 사정이 이럴진대, 생사나 마음 같은 추상적 내용을 다루는 불교 수행에서 믿음이 필요 없을 리 없다. 불교에서는 믿음으로 법의 바다에 들어가고, 지혜로 건넌다고 한다. 믿음이 없으면 수행을 시작할 수 없고, 지혜에 이르면 믿음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는 것은 대승 불교를 관통하는 기본 인식이다. 깨달음 이후에는 믿음이 필요 없지만, 깨달음에 이르기 위해 믿음은 불가피하다는 것이 불교의 관점이다.   ‘나는 이해되는 것만 받아들인다’는 현대인들의 인식 태도는 불법 수행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에도 실제로는 적용되기 어렵다. 다섯 살 아이는 엄마가 주는 음식을 판단할 능력이 없다. 만약 “이 음식이 먹어도 괜찮은지 확실히 알 때까지는 먹지 않겠다.”고 한다면, 아이는 판단 능력을 갖추기 전에 굶어죽을 수도 있다. 일단 신뢰하고 먹어야 자랄 수 있고, 이후에야 판단할 능력을 갖추게 된다. 믿음은 비합리적이라는 이유로 제거해야 할 오류라기보다 불가피한 인식 방식의 하나로 봐야 할 것이다.     삼세인과나 천지의 은혜 같은 가르침은 한두 번의 설명으로 내 것이 될 만큼 간단하지 않다. 당장 이해되지 않는다는 이유만으로 완전한 깨달음 이후로 이들을 유예한다면, 믿음이 불법 수행의 출발점이라는 불교의 전제와 어긋날 뿐 아니라, 만약 그것들이 진리라면, 그 선택이 가져올 손해 역시 결코 가볍지 않을 것이다.     무턱대고 믿으라는 말은 아니다. 맛집을 찾기 위해 경험자의 평가와 전문가의 조언을 참고하듯, 성자의 가르침 또한 이성과 논리로 최대한 점검해야 한다. 이를 ‘합리적 믿음’이라 하여 맹목적 믿음과 구분하지만, 그러한 믿음 역시 여전히 오류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불교에서 믿음은 끊임없이 점검되어야 할 불완전한 것이지만, 인간 인식의 한계 속에서 불가피하게 요청되는 수행의 한 과정이기도 하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Won Meditation Center삶의 향기 불교 수행 불교 수행 대승 불교 불법 수행

2026.01.19. 18:50

[삶의 향기] 용서의 의미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용서와 관련한 성경구절이다. 기독교에서 용서(Forgiveness)는 핵심적인 신앙 개념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용서하시고, 신자들 또한 서로를 용서하도록 명령하신다는 가르침을 기반으로 한다. 성경에서는 용서를 하나님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에서도 중요한 덕목으로 강조한다.   불교에도 자비와 같은 용서와 유사한 개념이 있긴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접근방식과 관점이 다소 다르다. 용서는 ‘죄나 잘못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즉, 용서는 특정 행위가 벌이나 제재를 받아야 할 ‘나쁜 것’임을 전제로 한다. 반면 불교에서는 죄나 잘못을 나쁜 것이라기보다는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따라서 죄나 잘못은 벌해야 하는 것이 아닌, 가엽게 여기고 무지를 깨우치도록 인도해야 할 대상인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기와 살해는 나쁜 행위이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하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불교에서는 사람은 물론이고 죄나 잘못도 나쁜 마음이 아닌 어리석음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애초부터 사람이든 일이든 용서할 대상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골목길에서 운전하다가 난데없이 홈리스(Homeless people)에게 심한 욕을 들은 적이 있다. 내 딴에는 자전거를 타고 가는 그분을 생각해서 천천히 간 것인데, 본인은 위협 혹은 조롱으로 느낀 듯 했다. 욕을 들었을 당시에는 불쾌했지만, 오래 가지는 않았다. 소음이 가시지 않는 도로변에서 잠을 자고, 적지 않은 수가 마약에 손을 대고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다면 홈리스 상태에서 제정신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자동차에 발길질을 하는 홈리스를 차주가 그냥 넘어가는 경우도 이와 비슷한 이유라 하겠다.   부처님을 표현하는 대표적인 단어가 ‘대자대비’이다. 대자(大慈)는 말 그대로 자비심을 이르는 것이고, 대비(大悲)는 사리 분별 못하는 어린 자녀가 제 눈을 제 손으로 찌르고, 칼날을 잡아서 제 손을 상하게 하건마는 그 이유는 알지 못하고 울고불고 하는 것을 보면 부모가 가엾은 생각이 나서 더욱 보호하고 인도하여 주는 것 같이, 부처님께서도 모든 중생이 삼독심(욕심, 성냄, 어리석음)에 제 스스로 악도에 떨어질 일을 지어 죄를 받음에도 불구하고 늘 주위를 원망하는 것을 보시면 크게 슬퍼하고 불쌍히 여기어 정성으로 제도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홈리스는 물론 연쇄살인범에 대해서도 증오와 분노보다 연민과 제도의 마음을 내는 것이 불교 수행의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럼, 이유 없이 욕을 하고 공공기물을 훼손하는 홈리스나 연쇄살인범을 처벌하는 일은 진리적이지 않은 것인가? 사람이 범한 죄와 잘못에 대해 시비를 가리고 그 행위에 상응하는 벌을 주는 현대사회의 형법체계는 부처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인가? 대종사께서는, “성자들은 주로는 도덕으로 자비 방편을 베풀지만, 때로는 도덕이나 법률로 중생을 제도하기도 한다.” 하셨다. 사회질서와 더 큰 죄업을 방지하기 위해서 적절한 벌은 필요하다. 벌 역시 넓은 의미의 자비라 할 수 있다. 법률과 정치가 자비가 되기 위해서는 증오와 분노심이 아닌, 연민과 제도의 심경이 바탕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email protected] 양은철 / 교무·원불교 미주서부훈련원삶의 향기 용서 의미 홈리스 상태 정치가 자비 불교 수행

2025.01.27. 17: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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