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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광장] 이반 일리치가 남긴 마지막 질문

가까운 지인의 장례식에 다녀왔다. 몸이 많이 불편하다는 소식은 들었지만, 이제 팔십을 갓 넘겼는데 이토록 갑작스럽게 떠날 줄이야. 슬픔보다는 가슴속 깊은 곳에서 아픔이 밀려왔다. 단지 지인의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부재를 통해 마주한 건, 다름 아닌 나 자신의 모습이었다.     삶이 얼마나 빠르게 황혼기에 다다르고 있는가. 고인의 영정 속 모습이 잔영으로 내 모습과 겹쳐진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저 자리에 언젠가 나도 누울 것이다. 그건 생각보다 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았다.   장례식장에서는 누구나 숙연해진다. 죽음은 말이 없지만 강력한 메시지를 남기기 때문이다. 더욱이 황혼의 길목에 서성거리는 나에게 되묻는다. 죽음에 대한 생각은 애써 외면해 왔는데 말이다. 나에게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무엇보다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지, 남은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하는지를 묻는다. 평소에는 피하거나 미루기 바빴던 질문들이었지만 죽음 앞에서 그것들을 잊지 않게 한다.   오래전에 읽었던 톨스토이의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다시 회상했다. 당시에는 젊었기에 그 책에서 ‘죽음’이란 단어 자체가 그리 마음에 와닿지는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죽음에 대한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이반 일리치는 성공적인 삶을 살아왔다고 믿었던 법관이었다. 그는 ‘정상적’이고 ‘모범적’인 인생 경로를 충실히 밟아왔고, 남들도 그를 그렇게 평가했다. 그러나 병으로 쓰러지고, 죽음을 앞두고 나서야 그는 결정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렇다면, 내 인생은 모두 틀렸던 건가?” 이 단 한 문장은 그가 평생을 실속없이 겉으로만 그럴듯하게 꾸민 위세를 무너뜨리는 질문이었다. 그가 사회적 성공과 외적 체면에 매달려온 세월은, 죽음 앞에서 한순간에 허무로 변했다.   톨스토이는 이반 일리치를 내세워 인간의 진짜 비극을 보여준다.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보지 못한 채 죽는 것이야말로 참된 두려움이라는 것을 일깨워 준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 순간에야 사랑과 용서, 겸손의 가치를 깨닫듯, 누구든 나이의 경계에서 그 질문과 마주하지 않을 수 없다.   젊은 날엔 더 높이 오르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다. 가정, 사회, 교회에서도 ‘남보다 나아야 한다’는 생각이 자연스러웠다. 그러나 나이 들수록 삶의 본질은 경쟁이 아니라 톨스토이가 추구하는 ‘관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내가 먼저 사랑하고, 또 사랑받았는가가 결국 인생의 성적표임을 일깨워 준다. 이반 일리치는 죽음을 맞으며 비로소 진실을 본다. 그는 마지막 순간, “죽음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고 외친다. 그 절규 속에는 역설적 평안이 있다. 죽음이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임을 본 것이다.   신앙의 눈으로 보면, 그것은 바로 ‘부활의 문턱’이다. 삶의 마지막에서 비로소 진리를 깨닫는 인간의 회심, 그것이 톨스토이가 던진 복음적 메시지다.   성경은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고 시편 기자를 통해 말한다. 이반 일리치가 마지막에 얻은 그 지혜, 즉 ‘삶은 유한하나, 그 유한 속에 영원이 있다’는 깨달음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제 나에게 남은 소망은 단순하다. 더 가지려는 욕심보다, 더 사랑하려는 마음으로 하루를 채우는 것. 내가 걸어온 길이 누군가에게 작은 위로가 되고, 내 미소가 또 다른 이의 빛이 된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황혼기에 접어든 지금, 나는 이반 일리치의 마지막 고백에 내 마음을 포개본다.   “죽음이 사라지고, 대신 빛이 있었다.” 그 빛이 바로 은혜이며, 나의 남은 생을 이끄는 힘이 될 것이다. 박철웅 / 일사회 회장열린광장 일리치 이반 이반 일리치 사회적 성공 인생 경로

2025.10.19. 18: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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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뜨락에서] 성공이란?

 솔직히 말하면 아시안 혐오 범죄문제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왜냐면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30년 이상 몸담은 직장에서는 나 자신이 아시안이어서 당하는 눈총이나 설움을 당해본 기억이 없다. 가끔 환자나 보호자가 나에게 국적을 물어본 적은 있다. 그러면 나의 대답은 항상 “I am a Korean Jew” 하며 어깨를 들먹이면 그들은 어이없어하며 당황한 눈빛으로 꼬리를 내린다. 난 더 의기양양하게 내 할 일을 노련하게 처리한다. 지금처럼 IT 강국이 된 나의 조국은 나의 어깨에 힘을 더 실어준다.     미국 내에서 인종차별은 항상 존재해왔다. 링컨 대통령이 노예를 해방해 흑인들을 자유롭게 해주었지만 자유를 모르고 살아온 그들은 지금도 진정 자유의 의미와 책임을 모르고 혼돈 속에서 헤매고 있다. 그러던 중에 아시안이 대거 이민 와 곳곳에서 열심히 일하고 공부하며 성공하기 시작하자 흑인들은 아시안을 겨냥하고 공격하기 시작했다. 1992 LA 폭동, 조지 플로이드 인권침해, 흑인 과잉 진압사례 등은 범죄의 표적이 되었던 흑인들이 분노의 표출을 아시안 혐오로 돌리고 있는 경우이다.     이번 팬데믹의 시원인 코로나19의 발원지가 우한이었다는 핑계로 모든 아시안이 혐오와 범죄의 표적이 되고 있다. 10월 3일 딸아이가 NYC Chapter launch Event ‘Stand with Asian American’의 연사로 초청받았다. 아시안 혐오범죄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 “ - 팬데믹을 통해서 우리는 아시안의 사회적 성공이 우리의 안전과 보안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배웠다. 재력과 사회적 성공으로는 무지한 사람들을 설득시킬 수가 없다. 오직 교육만이 그들을 깨우치고 깨닫게 하며 스스로 삶을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도구가 된다. -” 라고 역설했다. 이제 한인 2~3세대들은 교육열이 높은 부모 덕택에 재계, 금융계, 전문직, 혹은 학계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미국사회에 깊숙이 수용되고 녹아들고 있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성공이 아시안의 안전한 보안을 책임질 수는 없다. 얼마나 정확한 지적인가! 나는 경련했다.     미국이란 나라는 엄청 크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상위 10%가 미국을 이끌어 간다 해도 하위 10%는 늘 문제를 일으킨다. 아무리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고 복지혜택을 준다 해도 그들의 의식이 깨어나지 못하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식이다. 흑인들이 급여를 받는 즉시 즉흥적으로 소비하고 돈이 떨어지면 범죄를 저지른다. 이런 범죄의 연결고리를 끊기 위해서는 건강한 시민의식이 있어야 하고 그 의식을 깨우기 위해서는 절대로 교육이 필요하다. 이들에게는 왜 교육을 받아야 하는 지 동기부여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들은 부모들이 교육을 받지 못해 교육의 중요성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사회의 어둠 속에서 돌고 돌며 악순환을 반복하는 그들을 끌어 올리는 방법은 동기부여와 교육밖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좋은 직장을 찾기 위한 교육이 아니고 우리의 삶을 윤택하게, 삶을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하기 위해 교육은 정말 필요하다.     교육에는 지식 전달 기능뿐만 아니라 양심을 닦고 가꾸는 인문학적 기능 또한 중요하다. 양심은 거울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 한인도 이제는 이민역사가 제법 길어가고 있다. 한인사회만 바라보는 미시적인 투자와 선행을 넘어 우리가 사는 이 미국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거시적인 투자와 기부활동이 활발하게 간절하게 요구되는 시기이다. 정명숙 / 시인

2021.10.15.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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