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세의 위진록 수필가와 68세의 정순진 국문학 교수가 공동 집필한 서간집, ‘세월의 흔적’ 출판기념회에 다녀왔다. 한국과 미국의 여러 지역에서 날아온 두 저자의 일가족 2~3대가 앉아있는 테이블에는 밝고 훈훈한 가족애가 넘쳤다. ‘8년간의 손편지에 담긴 인생’이라는 부제가 달린 책의 원제는 ‘손편지, 아름다운 사연 아름다운 인연’. 총 250쪽의 장정본으로 만만치 않은 분량이다. ‘태평양 세기 연구소(Pacific Century Institute)’ 대표 스펜서 김님의 후원으로 제작되었다는, 사회자 장소현 극작가의 인사말이 따뜻했다. 책 출간에 따른 편집·교정과 소통에 위 선생님의 아내 김로신 여사의 노고가 컸다. 내가 선생님 다음으로 못지않게 존경하는 김여사님은 그림, 서예, 심지어 댄스까지 뛰어난 재인이시다. 출판기념회가 열리기 며칠 전, 위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특유의 힘찬 필체로 사인하고 도장까지 찍은 서간집과 정순진 작가의 수필집 ‘괜찮다 괜찮다’를 건네주셨다. 위 선생님을 만나 문학이야기를 나눈 지 수년째다. 선생님은 해이해진 내 문학 정신을 일깨워주고 문학의 진수를 몸소 보여주셨다.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세토우치 자쿠초의 ‘겐지 이야기’를 중심으로 작가와 작품세계를 유려하게 토로하시는 선생님은 홍안의 소년이었다. “하정아, 네 문장은 좀 더 단단해져야 해”라며 여러 성향의 글을 접하도록 독려하셨다. 나는 책보다는 끊임없이 탐구하는 그의 문학적이고 음악적인 삶에 고무되었다. 글을 쓰고 고칠 때마다 선생님처럼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을 듣다 보니, 어느새 내 글쓰기 습성으로 자리 잡았다. 최근에 가족상을 당했을 때는 긴 편지에 브람스의 독일진혼곡을 담아 위로해 주셔서 힘을 냈다. 이번에 주신 책 두 권을 읽을 때는 랄로-스페인 교향곡을 연속으로 들었다. 작곡가 라벨, 시벨리우스, 볼레로, 드뷔시를 다시 만나고, 음악가를 색채로 표현하는 법도 배웠다. ‘세월의 흔적’은 두 분의 ‘웅숭깊은 식견’이 유감없이 발휘된 아름다운 문학이었다. 낯선 어휘가 얼마나 많은지, 국어사전을 펼쳐야 했다. 갈마들다(서로 번갈아 들다), 녹열위상(綠熱位相·생명과 열정이 교차하는 상태), 한요하다(조용하면서도 넉넉하다)…. ‘손편지의 마음, 손편지의 멋’도 새삼 알았다. ‘편지를 쓰는 사람은 쓰기 편한 시간에 쓰고, 상대방은 상대방대로 읽기 편한 시간에 읽고, 오가는데 시간이 걸려 적당히 기다리기도 하고 기대도 할 수 있다.’ 200통에 가까운 편지의 여정이 주는 감화가 컸다. 장기간 편지를 교류할 수 있었던 이유를 짐작해보았다. 문학적 교감과 조응. 그리고 상대가 언급한 내용에 대한 깊은 이해와 성실하고 진지한 해석. 두 분의 대화가 향기롭다. “꽃은 해마다 변함없이 똑같은 모습으로 피어나 기쁨을 주지만, 사람은 해가 가고 나이가 들면 달라지고 새로워지면서 웅숭깊어져서 기쁨을 주지요.” “교수님의 편지를 읽으면서 아나톨 프랑스가 한 문장에 관한 말을 상기하고 있습니다. 햇빛 같은 글, 7가지 색의 결합체인 햇빛 같은 교수님의 편지에서 감동을 체험하고 있지요.” 멋진 두 분이 ‘태산처럼 강녕(康寧)’하시기를 기원한다. 하정아 / 수필가이 아침에 손편지 마음 손편지 정순진 국문학 장기간 편지
2025.11.19. 19:45
KBS 1기 아나운서 출신 수필가 위진록(97) 선생이 펴낸 책 ‘세월의 흔적: 8년간의 손편지에 담긴 인생 이야기’ 출판기념회가 지난 1일 LA 한인타운 옥스포드 팰리스 호텔에서 열렸다. 행사장에는 재미수필가협회 회원 등 한인사회 인사들과 가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원로 문인을 축하했다. ‘세월의 흔적’은 위 선생이 2018년부터 8년간 한국의 전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정순진(68) 씨와 주고받은 손편지 200통을 엮은 서간집이다. 사회를 맡은 수필가 장소현 씨는 “거창한 철학이나 사회 담론이 아니라, 꾸밈없이 적어 내려간 일상의 기록이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위 선생은 2013년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의 고백적 기록’을 출간했다. 22살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22년, 미국에서 53년,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게 된 사연과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소 겪으면서 만난 인연들에 관해 솔직하고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위 선생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최초로 보도한 KBS 1기 아나운서로, 석 달 뒤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 수복 소식도 처음 보도했다. 전쟁 중에는 일본 도쿄 유엔군총사령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에서 전황을 방송한 아나운서였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 온 뒤 남가주 허모사비치에서 10년간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며 지역 명사가 됐다. 위 선생은 2018년 LA를 방문한 정 교수에게 자서전을 건넸다. 정 교수는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단숨에 읽고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직접 손편지로 독후감을 보냈다. 이에 감동한 위 선생이 손편지로 답장을 보내면서 두 사람의 서신 교류가 시작됐다. 태평양을 건너 왕복 한 달이 걸린 이 편지 교류는 200여통에 이르렀다. 오랜 친구이자 태평양세기연구소(PCI) 공동창립자인 스펜서 김 회장이 이 사연을 듣고 출판을 제안하면서, 두 사람의 편지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전 회장 김화진 씨는 “이 책은 한 번 펼치면 덮지 못할 만큼 아날로그적 감성이 가득하다”며 “일상적 삶을 나누고 교감한 편지 내용이 행복의 본질을 되짚게 한다”고 평했다. 공동저자인 정 교수는 일가족을 데리고 한국에서 LA로 날아와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정 교수는 “위 선생님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삶은 매일매일이 기적이자 축복임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위 선생은 “우연은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그 우연이 이어져 이 책이 나왔다"며 “97세에 책을 내고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위 선생은 직접 붓글씨로 쓴 천자문 족자 두 점을 정 교수와 김 회장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서간집 속에는 천자문 완성을 앞두고 글씨를 망쳐 다시 써야 했던 일화가 담겨 있어 참석자들을 미소 짓게 했다. 위 선생은 남가주 문단과 방송계에서 오랜 세월 활동해온 명사로, 가주예술인연합회 회장과 재미방송인협회 고문을 역임했다. ‘하이! 미스터 위(1979),’ ‘이민 10년 생(1984),’ ‘잃어버린 노래(1993),’ ‘낙타의 속눈썹(1997),’ ‘클래식, 내 마음의 발전소(2011)’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이민자의 삶과 음악, 인생의 단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 독자 선착순 무료 배포 ‘세월의 흔적’은 시중에 판매되지 않는 책입니다. 미주중앙일보는 PCI의 후원으로 이 책을 관심 있는 독자에게 1인 1부 선착순으로 무료 배포합니다. 신청은 e메일([email protected])로만 받으며, 성함 주소 전화번호를 꼭 기재하셔야 합니다. 접수 연락을 받으신 분은 본사(690 Wilshire Pl, LA, CA 90005)에서 수령하십시오. 배송비($20) 부담 조건으로 미국에 한해 우송도 해드립니다. 이무영 기자 [email protected]위진록 손편지 손편지로 독후감 손편지 200통 고백적 기록
2025.11.02. 19:19
손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낯익은 글씨다. 조심스럽게 개봉을 하면서 벌써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반가웠다. 위진록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다. 읽기 시작하기도 전에 눈익은 손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정성껏 쓴 손편지를 받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가물가물하다. (아, 황갑주 시인께서 생전에 가끔 손편지를 보내주곤 하셨지.) 나는 제대로 안부도 여쭙지 못하고 사는데, 손편지를 보내주시니, 사람 구실 제대로 하라는 가르침을 주시는 듯해서 몹시 부끄럽다. 반성한다. 손글씨로 답신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올해 95세인 위진록 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하게 책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가끔 글도 쓰신다. 보내주신 손편지를 뵈니 건강하심을 바로 알겠다. “저는 아시는 바와 같이 95세, 백두옹(白頭翁)이지만 여느 때처럼 보고, 쓰고, 생각하며 잘 늙어가고 있습니다. (중략)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컴맹’ 아닙니까. 그래서 늘 이렇게 손편지로 소식을 전하면 손편지로 회답하는 분이 있어 흐뭇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대학교수와는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 60통 가까운 손편지가 오갔지요. 어떤 사람은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손편지냐고 하지만, 편지 보낸 사람의 육필(肉筆)을 볼 수 있는 손편지가 제일이라 생각해, 손편지로 근황을 전합니다. 환절기에 내외분 건강하세요.” 위 선생님 편지의 한 구절이다. 선생님께서 손편지를 쓰시는 것은 컴맹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편지 보낸 사람의 육필(肉筆)을 볼 수 있고, 사람 냄새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근본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지금은 글씨를 손으로 쓰는 촌스러운(?) 시대가 아니다. 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시대, 인간이 기계에 휘둘리는 시대… 손으로 글씨를 쓰는 사람이 희귀 인간 취급을 받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휴대전화 글자판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너무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전화, 비퍼, 이메일, 휴대전화 문자, 카톡 등으로 계속 편리해져 왔고, 짧고 간단명료해졌다. 군더더기 없이 요점만 간단히! 앞으로도 날이 갈수록 더 편리하고 짧아질 것이다. 문제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여유롭고 행복해졌냐 하는 것인데,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바쁘고 건조해진 것으로 보인다. 손글씨에 스며있는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저 ‘아날로그 꼰대’의 뒤돌아보기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사람다운 삶에 대한 성찰, 정성 어린 관계의 소중함, 한없는 편리함의 함정, 애틋한 정겨움 등을 곱씹어 보는 마음이다. 느림, 여유, 낭만, 자부심, 배려, 공생 등등 잊혀가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사람 중심의 가치 체제를 바로 세우는 운동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신언서판(身言書判) 같은 옛날 가치를 되살리자는 말이 아니라, 사람다움과 각 개인의 개성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서는 기계에 너무 의존하지 않아야겠다는 말이다. 사람이 기계의 머슴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정한 소통이란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텐데, 그걸 기계에 맡길 수는 없다. 긴말 줄이고, 올해 감사의 계절과 연말연시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손글씨로 또박또박 써서 보내야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손편지 향기 손편지로 소식 휴대전화 글자판 선생님 편지
2023.11.16. 20:08
오피니언 면 제작 담당자로 자리를 옮긴 후 기다리는 것이 한 가지 생겼다. 매주 한두 번 ‘오피니언면 담당자 앞’으로 배달되는 손편지다. 처음에는 좀 놀라기도 했다. 지금 시대에 손편지라니.... 이메일이 일상화된 후 손편지는 기억 저편의 유물이 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손편지를 주고받았던 게 언제였던가 기억조차 까마득하다. 요즘 우편함은 각종 공과금 고지서와 광고 메일로 채워질 뿐 손편지는 보기 어렵다. 편리함에 밀려 아날로그 방식의 정겨운 소통 수단 한 가지가 사라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손편지를 다시 만나게 될 줄이야. 발신자는 주로 오피니언 면에 게재되는 ‘독자마당’의 기고자들이다. 처음에는 타이핑을 다시 해야 하는 번거로움 탓에 넌지시 이메일을 권했다. 그랬더니 이메일 사용이 익숙지 않다며 양해를 구했다. 대부분 연령대가 높은 분들이라 이해도 됐다. 분량 또한 부담스러울 정도는 아니어서 그 정도 수고는 감내키로 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잘한 생각이었다. 손편지를 받았을 때의 느낌은 컴퓨터에서 이메일을 열어 볼 때와는 다르기 때문이다. 백지에 한 자 한 자 정성스럽게 써내려간 사연은 다양하다. 자녀와 배우자 등 가족에 관한 이야기, 한국 여행을 다녀온 소감, 인생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조언, 때로는 잘못된 사회현상에 대한 지적, 정치인에 대한 신랄한 비판도 있다. 한 번도 뵌 적이 없지만, 꾹꾹 눌러쓴 손글씨를 보면 어렴풋이 모습이 그려지는 분도 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생각을 정리해야 하고, 단어를 선택하고, 문장을 다듬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정 과정도 있었을 법한데 필자가 받아보는 편지들은 깔끔하다. 이들의 수고는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편지봉투에 주소를 쓰고,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넣어야 비로소 기고가 마무리된다. 여간 정성이 아닌 셈이다. 이런 수고를 마다치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 본인의 생각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어서일 것이다. 하고 싶은 얘기, 전하고 싶은 사연을 마음속에만 담아 둘 수 없어서다. 아마도 기고하는 분들에게는 ‘독자마당’이 또 하나의 소통 창구가 되어주고 있는 듯하다. 비록 군데군데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틀리고 표현이나 문장이 어색한 곳도 있지만 이들의 글에서는 진심이 느껴진다. 그리고 세상살이의 연륜과 진한 사람 냄새도 배어 있다. 서운함을 토로하면서도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겠지”, 비판을 하다가도 “오죽하면 그랬겠어”하는 식으로 마무리가 되기도 한다. 이들이 보내주는 손편지는 잊고 있었던 추억 한 가지는 물론 사람의 따스함도 소환해 주는 듯하다. 그러다 보니 편지가 뜸해지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건강은 괜찮은지 걱정이 되기도 한다. 타이핑 무료 봉사는 얼마든지 할 테니 앞으로도 왕성한 기고 활동이 지속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오피니언 면은 신문이라는 매체의 특징이자 장점이다. 물론 검증 과정은 거치지만 각계의 다양한 주장과 의견이 제기되는 공론의 장 역할을 한다. 본지의 오피니언 지면도 그런 역할을 하고 있다. ‘독자마당’의 기고자들뿐만 아니라 변호사,교수,의사 등 전문직 종사자, 수필가·시인 등 문인, 그리고 전직 공무원, 전직 교사, 사회단체 관계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하는 분들이 정기 기고자로 활약하고 있다. 이들의 치열한 고민과 수고가 있었기에 지면이 더욱 풍성해질 수 있었다. 다만 어렵게 보내준 내용 모두를 지면에 소개하지 못하는 점 양해 바란다. 지나치게 개인적인 내용이라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어렵다고 판단되거나 사실 확인이 되지 않은 일방적인 주장, 특정인이나 단체를 이유 없이 비방하는 글, 또 본지의 편집 방향과 맞지 않는 내용 등은 활자화되지 못했다. 올 한 해 오피니언 면을 빛내주신 기고자들의 수고에 감사를 드린다. 김동필 / 논설실장뉴스 포커스 손편지 사연 오피니언면 담당자 오피니언 지면 이메일 사용
2022.12.22. 19: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