샌퍼낸도 시의 한 어두운 거리로 치카노 소울 음악의 부드러운 선율이 흘러나왔다. 사람들은 간판에 적힌 ‘ICE, 편견을 가진 사람, 마가(MAGA)는 환영하지 않는다’란 문구를 지나 레코드숍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장 안엔 LP판 진열대를 대신해 판매 부스가 들어섰고, 일부 상인은 미니어처 차량 모형과 치카노(멕시코계 미국인)풍 예술 작품을 판매했다. 방문객들은 가게 중앙에 모여 라이브 소울 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이날 밤은 1930~40년대 멕시코계 미국인 하위문화인 ‘파추코’에서 영감을 받았다. 주트 수트(1930~40년대 멕시코계 청년층 중심으로 유행한 양복)와 덕 테일(오리 꼬리) 헤어스타일, 재즈 등으로 대표되는 이 문화는 차별에 맞선 자기표현의 방식이었다. 최근 LA에서 이민 단속 요원들이 라티노 주민에 대한 대규모 검거를 시작하면서 그 의미는 더욱 각별해졌다. 겉으로 보면 ‘미드나이트 아워(The Midnight Hour)’는 전 세계에서 수집한 수백 장의 음반이 진열된 레코드숍이다. 그러나 북부 샌퍼낸도 밸리 주민들에게 이곳은 팬데믹 기간 문을 연 이후 줄곧 공동체의 생명선이자 모임 장소였다. 지난해 초 산불이 LA를 휩쓸었을 때는 기부 물품 접수처로 변신했다. 그리고 지난해 여름 ICE(이민세관단속국)의 대대적 단속이 시작된 이후, 이곳은 도시 이민자들의 안전한 피난처이자 저항 운동의 본부가 됐다. 아내 알리사 카스트로 아말피타노와 함께 미드나이트 아워를 운영하는 세르히오 아말피타노는 “이런 때일수록 이것이 바로 공동체라는 걸 깨닫게 된다. 모두가 힘든 시기에 서로를 지켜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1943년 LA에서 수천 명의 백인 군인과 민간인이 파추코 스타일 복장을 한 이와 유색인종 청년들을 공격한 ‘주트 수트 폭동’을 떠올렸다. 아말피타노는 “십여 년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며 우리의 소속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흡수되지 않고, 우리의 문화와 역사를 포기하지 않는다는 걸 표현하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풀뿌리 단체들이 매장을 활용해 조직 활동을 하고, 포스터와 안전 키트를 제작하며 ‘이민자 권리 알기’ 워크숍을 열고, 인근 홈디포 매장을 감시하는 커뮤니티 감시단을 운영하도록 공간을 내주고 있다. 이 매장은 하드코어와 팝 펑크 공연이 열리는 콘서트장이 되기도 하고, 어떤 날은 갤러리나 팝업 마켓으로 변신한다. 도시가 위기에 처하면 건물은 곧바로 행동 본부가 된다. 운영 방식도 독특하다. 행사 기간 소규모 상인에게 판매 수수료를 받지 않고, 공연하는 밴드가 상품을 판매해도 수익을 떼지 않는다. 아말피타노는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서로 연결돼 있다. 우리는 ‘상품보다 공동체’라는 모토로 살아간다. 공동체가 번영하려면 모두가 함께 성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지역의 상징 같은 공간도 내년 1월 임차 계약 만료 이후 문을 닫을 수 있다. 많은 소규모 상점과 마찬가지로, 인플레이션과 이민 단속 강화로 불안정해진 경제 속에서 고전하고 있다. 미드나이트 아워는 물리적 매장을 열기 전부터 이동식 레코드숍으로 존재했다. 아말피타노는 오랜 기간 엔터테인먼트 업계에서 공연 기획과 DJ 활동을 하며 ‘미드나이트 아워 소셜 클럽’ 이름으로 LA 전역에서 음악 행사를 열었다. 샌게이브리얼 밸리 출신인 그는 1970년대 후반 아르헨티나 독재를 피해 미국으로 이주한 부모 아래에서 자랐고, 아버지에게 배운 실크스크린 인쇄업을 주 수입원으로 삼아왔다. 코로나19로 라이브 행사가 중단되자, 부부는 오랫동안 꿈꿔온 샌퍼낸도 밸리에 상설 공간을 열기로 결심했다. 세상이 멈춘 시기, 부부는 정부 지원금 전액을 투자해 샌퍼낸도 시에 오프라인 매장을 열었다. 첫날 인파가 몰렸고, 이틀째엔 대부분 재고가 동났다. 미드나이트 아워의 행사에서 염가로 머리를 다듬어준 미셸 아르고테는 10대 시절 인근 야외 몰에서 일했으며, 매장 개점 이후 단골이 됐다. 그는 “우리는 모두 같은 배를 타고 버티고 있다. 이 공동체를 위한 공간을 잃어선 안 된다”고 말했다. 지난달 5일, 매장에선 다음 날 밸리 전역에서 예정된 ICE 반대 학생 동맹 휴학 시위를 준비하는 행사가 열렸다. 배드 버니의 노래가 흐르는 가운데 약 50명의 고등학생이 ‘우리 학교에서 ICE를 몰아내라’ ‘이민자가 미국을 세운다’ ‘이민자가 아니라 무지와 싸워라’ 등의 문구를 적은 플래카드를 제작했다. 활동가들은 ‘권리 알기’ 워크숍을 진행했다. 아말피타노는 학생들에게 “여러분은 역사의 일부이며, 이 싸움의 일부”라며 “여러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계속 상기시키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 사회정의는 매장 설립 초기부터 핵심 가치였다. 아말피타노 부부와 협력해 커뮤니티 행사를 기획한 밸리 출신 예술가 미셸 리마는 지난해 여름 이민 단속 이후 그의 노력이 치열해졌다고 말했다. 8월 리마는 매장에서 자선 공연을 열어 이민 단속 피해 가족들을 위해 2500달러를 모금했다. 그는 설치 예술 작품을 만들고 이민자에게 가족사진을 가져오도록 요청했다. 그의 어머니 사진 한 장으로 시작한 벽면은 결국 100여 가정의 사진으로 가득 찼고, 이 작품은 라틴 문화유산의 달을 맞아 샌퍼낸도 시청에 전시됐다. 리마는 “모두가 거리로 나가 시위할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래서 안전한 공간을 제공하려 했다. 모든 것이 예상 이상으로 성장했고, 이는 사람들이 이 공간을 원하고 필요로 한다는 증거”라고 말했다. 행사는 에너지로 넘치지만, 공동체엔 여전히 두려움의 먹구름이 드리워져 있다고 그는 덧붙였다. 또 “만약 당신이 스패니시를 쓰고 피부색이 갈색이라면 자동으로 두려움을 느끼게 된다”고 말했다. 매장 수익은 간신히 운영비를 충당할 만큼이다. 경제 위기 심화로 음반과 상품 판매는 줄었고, 직원은 두 명가량만 유지하고 있다. 단속 이후 행사 참석자는 늘었지만, 매출은 오히려 감소했고, 빚은 늘었다. 주민이 외출을 두려워하며 야외 몰의 유동 인구도 줄었다. 아말피타노는 기본 생계비 마련도 어려운 상황에서 음반은 그들에게 우선순위가 아니라고 말했다. 알리사는 “지금 우리가 사는 현실이 그렇다. 소규모 사업에 우호적이지 않은 세상에서 버티는 건 어렵다. 우린 모두 살아남기 위해 싸우고 있다”고 말했다. ━ 원문은 LA타임스 2월 25일자 ‘In the Midnight Hour, the San Fernando record shop at the center of the Valley’s ICE resistance‘ 기사입니다. 글=잇첼 루나레코드 심장부 도시 이민자들 밸리 주민들 미드나이트 아워
2026.03.04. 19:00
하나은행이 21년 만에 LA에 지점을 다시 개설하며 북미 시장 내 입지 확장에 나섰다. 하나금융그룹의 미국 법인 하나은행USA(행장 이병현)는 지난 25일 LA한인타운 올림픽 불러바드에 위치한 ‘더 보라 3170’ 건물 1층에서 LA지점(3170 W. Olympic Blvd) 공식 오픈 행사를 개최했다. 이날 하나금융 이은형 부회장, 반도건설 권홍사 회장, 김영완 LA총영사 등 내·외빈이 참석한 가운데 리본 커팅식이 진행됐다. 이은형 하나금융 부회장은 축사에서 “LA에 새로운 채널을 여는 것은 하나금융그룹의 오랜 숙원이었다. 기업 금융과 세대별 니즈에 부응하는 맞춤형 자산관리 서비스를 제공하며 고객을 최우선으로 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LA지점 개점은 하나은행USA가 2013년 브로드웨이 내셔널 뱅크(BNB)를 인수한 이후 처음으로 개설하는 신규 지점으로, 기존 뉴저지 본점과 뉴욕 맨해튼 및 플러싱 지점에 이어 네 번째 네트워크다. 지난 2008년 캐나다에 진출한 하나금융그룹이 북미 지역에서 17년 만에 신규 확장을 한 것으로 이번 LA지점 개점은 상징적인 의미가 큰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나은행은 과거 외환은행 시절 LA와 시애틀 등 국내 주요 도시에서 지점을 운영했으나, 지난 2003년 론스타에 인수된 이후 금융당국 규정에 따라 지난 2004년 영업망을 철수한 바 있다. 따라서 LA지점 재오픈은 당시 폐점 이후 무려 21년 만이다. 지난주부터 소프트 오프닝을 통해 시범 영업에 나섰던 LA지점은 이날 오프닝 행사를 통해 공식 업무에 들어갔다. 이병현 하나은행USA 행장은 “하나은행은 끊임없이 신뢰와 역량을 쌓는 데 집중해왔다. 디지털 금융 역량 강화를 통해 미국과 한국을 오가는 손님, 그리고 한인 커뮤니티에 더 가까이 다가가는 든든한 금융 파트너가 되겠다”며 한인들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부탁했다. 하나은행USA는 국내 중소기업 대출과 개인 금융 중심의 리테일 영업에 주력하고 있는 커뮤니티 기반 은행으로, 그간 뉴욕과 뉴저지 등 동부 지역을 중심으로 사업을 전개해왔다. 이번 LA지점 신설을 통해 미주 한인 인구가 가장 많은 가주 지역을 새로운 전략 거점으로 삼고 사업을 다각화할 계획이다. 특히 이번 개점으로 하나은행은 단순한 영업망 확장뿐만 아니라 LA지점을 중심으로 디지털 플랫폼을 활용한 글로벌 연계, 현지 핀테크 및 스타트업과의 파트너십 강화, 그리고 교민을 위한 특화 금융상품 출시 등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할 방침이다. 하나금융은 북미를 포함한 전 세계 26개국에 걸쳐 200여 개의 글로벌 네트워크를 운영하고 있으며, 해외 부문 수익 비중 확대를 위한 전략적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은행이 연방예금보험공사(FDIC)에 제출한 실적보고서(Call Report)에 따르면 지난 2분기 하나은행USA의 상반기 누적 순익은 762만 달러, 자산 규모는 6억4616만 달러에 달한다. 글·사진=우훈식 기자하나은행 심장부 이은형 하나금융 이날 하나금융 la한인타운 올림픽
2025.08.25. 22:00
미국에서 연방 상원의원이나 하원의원을 뽑을 수 없는 시민들이 있다. 놀랍게도 그 주인공은 다름 아닌 미국의 수도, 워싱턴 D.C.의 주민들이다. 50개 주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특별구(District)’로 지정된 워싱턴 D.C.는 미국 정치 시스템 안에서 매우 독특하고, 동시에 모순적인 위치에 놓여 있다. 연방 의회는 상원과 하원으로 구성된다. 상원은 주마다 동등하게 2명의 의원을 선출하고, 하원은 주 인구 수에 비례하여 의원 수를 배정한다. 인구가 적은 델라웨어, 버몬트 같은 주들도 상원의원은 2명씩 확보하고 있지만, 하원의원은 1명뿐이다. 이 구조는 미국 건국 당시 인구가 많은 주와 적은 주 간의 첨예한 이해 충돌을 조정한, ‘대타협(Great Compromise)’의 산물이다. 연방주의와 국민주권을 동시에 실현하기 위한 절묘한 정치적 균형 장치였다. 그러나 수도인 워싱턴 D.C. 주민들은 이러한 권리를 누리지 못한다.연방정부의 직할지로서, 독립성을 보장받는 대신 정치적 권리를 일정 부분 포기해야 했다. 1961년 비준된 수정헌법 제23조를 통해 비로소 대통령 선거 투표권은 부여받았지만, 상원의원은 여전히 한 명도 직접 선출할 수 없다. 하원에도 표결권이 없는 ‘비투표권 대표(Delegate)’만을 둘 수 있다. 즉, ‘민주주의의 심장부’에서 시민들은 여전히 ‘의회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존재’로 남아 있는 셈이다. 자치권 역시 반쪽짜리다. 1973년 제정된 ‘홈 룰 법(Home Rule Act)’은 워싱턴 D.C.의 지방정부 설립과 시장·시의회 선출 등을 가능하게 했지만, 연방 의회가 언제든지 이들의 결정에 제동을 걸 수 있는 권한을 유지하고 있다. 지방 세금의 사용, 형법 개정, 예산안 승인 등에서 D.C.는 다른 주들과는 다른 제약을 받는다. 최근 트럼프 대통령의 명령으로 연방 정부가 워싱턴 D.C.의 경찰권을 장악한 사건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잘 보여준다. 연방정부는 ‘홈 룰 법’을 근거로 ‘치안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D.C. 자치정부의 의사와 상관없이 연방 법 집행 기관을 배치했다. 이 사례는 D.C. 주민들의 일상이 언제든지 연방 정부의 결정에 좌우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주가 아닌 특별구라는 태생적 조건이 민주적 자치의 한계를 낳고 있는 셈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미국의 독립을 이끈 구호가 바로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였다는 점이다. 그러나 오늘날 워싱턴 D.C.에서는 그 구호가 여전히 반복되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연방세를 납부하지만, 자신들을 대표할 상·하원의원을 선출할 수 없다. 세금을 내면서도 정치적으로는 소외된, 민주주의 원칙이 무너진 모순의 공간이 바로 수도 워싱턴이다. 이는 단지 법과 제도의 문제가 아니다. 워싱턴 D.C.는 흑인 인구 비율이 높은 지역 중 하나이며, 인종·계층적 소외와도 맞닿아 있다. 투표권의 부재는 곧 사회적 영향력의 부재를 의미하며, 이는 지역의 교육, 복지, 주거정책 등에 있어 장기적인 불균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정책의 대상이 아니라 객체로 존재하는 시민들의 현실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불합리를 해소하려는 노력도 있었다. 워싱턴 D.C.를 51번째 주로 승격시키자는 논의는 오랜 기간 이어졌지만, 매번 정치적 벽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공화당은 민주당 지지세가 강한 D.C.가 주가 될 경우 상·하원에서 민주당 의석이 늘어날 것을 우려하며 반대해 왔다. 결국 주 승격 문제는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닌, 정당 간의 이해득실로 변질되어 온 것이다. 연방주의의 역사적 유산이자, 미국의 정체성을 지탱해 온 원칙은 분명 다양성과 자율, 그리고 공정한 대표성이다. 이를 위협하는 제도적 결함은 시대의 흐름에 맞춰 점검되고 개선되어야 한다. 김한신 / 변호사니케의 저울 민주주의 심장부 오늘날 워싱턴 시의회 선출 비투표권 대표
2025.08.20. 19: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