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 여행하면서 어떤 게 가장 좋았어?” “혼자 떠난 거,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 뉴욕 현대미술관과 브로드웨이 뮤지컬, 할렘의 재즈가 나올 줄 알고 물었던 친구는 놀라는 기색이었다. 다른 문화를 접하려고 여행할 때 나도 남들처럼 책과 자료를 뒤져보지만, 가장 오래도록 남는 것은 언제나 지식보다 내면의 느낌이다. 가족이나 직장을 두고 가도 자기 자신은 두고 갈 수 없고, 이국의 밤 골목에서도 내 그림자는 늘 나를 뒤쫓는다. 비영어 사용자, 유색인종, 젊지도 늙지도 않은 40대 후반의 나이. 이것이 내가 가을에 열흘간 뉴욕에 머물면서 늘 의식한 조건이다. 이 세 조합이 가져온 무명의 감각은 발가벗겨진 느낌을 주었고, 그건 작은 희열을 만들어냈다. 왜 희열일까. 쓸쓸하다고 말해야 하지 않나.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감정이 여행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첫째, 평소 능력치를 넘어 주어지는 책임과 평가에서 벗어나 내 실체를 직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노력이 소소한 열매를 맺으면 곧 더 높은 기대가 뒤따른다. 사회 경력은 대체로 안간힘을 써서 얻어낸 것이다. 그게 자신과 동일시될 때가 많다. 하지만 나를 인정해주는 동료나 가족 없이 여행하면 과장된 내가 쭈그러든다. 난쟁이가 되면 다른 사람들이 커 보이고 세상과의 거리도 더 벌어져 사유할 공간이 생긴다. 혼자이면 부서지고, 부서지면 열린다. 거기서 나만 아는 나를 목격하는데, 그런 헐벗음을 보는 게 꽤 괜찮다. 둘째, 같은 인종과 같은 업계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다 보면 정체성이 날로 비대해진다. 반면 뉴욕에서는 피부색과 체형만으로도 나는 ‘표준’에서 비껴나 있다는 감각이 부여된다. 가이드로 만나서 할렘 거리를 같이 걸었던 흑인 래리 핸더슨의 겉모습만으로도 취향과 창의성이 엿보여 신선했으며 내 안의 무언가를 들여다볼 창을 열어주었다. 셋째, 영어를 쓸 때 경직되는 것은 나를 소외의 불안으로 내몬다. 자신을 지탱하던 단단한 세계는 없어지고 땅에 발 디딜 때마다 비틀거리는 감각을 느낀다. 게다가 단일 언어 사용자는 융통성이 줄어든다는 생각과 함께, 모국어의 문체나 언변이 쓸모없어졌다는 것을 깨닫는다. 갑자기 담장은 높아지고 운신할 수 있는 공간은 좁고 어두워진다. 이처럼 내가 보잘것없다는 자각은 곧 두 가지 발견으로 이어진다. 첫째, 다른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생각된다. 찬쉐의 소설 『신세기 사랑 이야기』에는 추이란·샤오위안·미스터 유·웨이보 등 온천여관의 접대부 여성들과 이 서비스의 이용자, 그리고 애인 없이 못사는 여러 인물이 나와 이야기를 거미줄처럼 엮는데, 작가가 뿌려놓는 실마리들을 따라가노라면 이렇게 표면을 겉도는 삶을 사는 이들이 알고 보면 ‘내면 깊숙한 곳에서 온 사람들’임을 깨닫게 된다. 나 역시 내가 ‘죽도 밥도 아닐’ 때 타인의 새로운 면모를 발견하게 되었다. 둘째, 우리가 살아남으려면 타인의 호의와 친절에 더 많이 기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다. 여행하고 돌아온 이들은 “리스본 사람들은 친절해” “교토 사람들은 불친절해”와 같은 말을 곧잘 한다. 친절은 상대가 누구인가와 상관없이 베푸는 이의 성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로스트 재팬』의 저자 알렉스 커는 도쿠시마현과 고치현 경계에 위치한 이야 계곡을 여행하면서 왜 이 지역 사람들은 유독 친절할까를 거듭 생각하다가 이런 결론을 내린다. 인구밀도가 낮고 복잡하지 않은 “산악 지역이 평야 지대보다 친절한 사람들을 만들어낼 개연성이 있다.” 그들은 집단 경작을 하지 않아 경쟁을 덜 하고 사냥하거나 나무하며 먹고살기 때문에 독립성이 강하고 여유도 있다는 것이다. 반면 교토 사람들은 영광스러웠던 과거의 끈을 부여잡고 살기에 매사 긴장 상태이고 친절할 수 없다는 것이다. 여행자는 타인이 늘 호의를 베풀어주길 임의로 기대할 수 없으며, 친절은 어쩌면 베푸는 이의 특권이다. 그럼에도 대략적인 가늠을 하자면, 자신이 부른 택시가 제때 오지 않아 손님의 시간을 낭비할까 봐 안절부절못하는 (내가 만났던) 리스본 식당의 직원 주앙과 같은 인물은 신이 예비해둔 선물처럼 어느 도시에나 몇 명씩은 있다.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감각이 가장 빛을 발하는 것은 혼자 한 여행에서 고국으로 돌아왔을 때다. 우리의 기억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인 것과 큰 관계가 없어 집에 돌아오면 어느덧 이 모든 것이 ‘타국에서 나는 특별한 존재였다’는 감각으로 뒤바뀐다. 가로수가 온통 상수리나무뿐이라 지루했던 파주출판도시가 예뻐 보이고, 낮엔 길가에 사람이 거의 없어 스산했던 이곳이 갑자기 뉴욕의 뒷면처럼 여겨지는 등 내 다리와 모든 기억과 감정이 나 자신에게 매우 우호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이은혜 / 글항아리 편집장마음 읽기 아무것 느낌 뉴욕 현대미술관 비영어 사용자 할렘 거리
2023.12.11. 21:18
그 옛날 소크라테스의 명언은 오늘까지도 유효하다. 자기 자신을 아는 사람이 되거나 자기가 누군지 아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얼마나 드문 일인가. 게다가 날이 갈수록 내가 아는 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 가까운 지인들 사이에서도 밥 같이 잘 먹다가 기분이 상하기 일쑤다. 같은 일에 대해 너무 다른 견해를 갖고 서로 옳다고 우겨대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눈치 보며 말없이 밥만 먹는 자리는 피곤하고 재미없다. 내 가까운 사람의 진짜 속내도 모를 판에 매스컴에서 매일 보는 정치인을 너무도 잘 아는 듯 핏대 올리며 욕하든지 역성드는 사람들을 보면, 참 순진하고도 어리석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누구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을까. 가장 가깝다고 생각한 오래된 인연의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낯선 외계인으로 느껴진 경험을 해본 적 있는 사람은 안다. 가족이나 오랜 친구가 길에서 처음 본 사람보다 더 모르는 사람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는 걸. 그런데도 우리는 매 순간 누군가에 관해 그를 잘 아는 듯 생각하고 말한다. “그 사람은 내가 잘 알아” “그는 그런 사람이 아니야” “그가 그렇지 않다는 건 내가 보장해” 등등. 나이가 들면서 우리는 점점 이런 확신이 사라져가는 게 정상이다. 그게 누구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욕을 하거나 무작정 편을 들지는 말자고 생각한다. 비록 그 상대가 내 혈육이거나 자기 자신이라 할지라도. 비현실적인 과대한 자신감을 지니고 무조건 자신에게만 관대한, 자기중심적인 사람을 자기애성 성격장애, 심하면 자기애성 인격 장애라 부른다. 정신의학 전문가들은 그런 성향의 사람들을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자신이 그런지 인식 못 하는 채 그 병에 걸려있는 경우도 드물지 않다. 그들은 대체로 자기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성향을 지닌다. 습관적으로 모든 게 거짓말이기 일쑤이고, 수치심과 죄의식, 타인에 대한 공감 능력이 현저히 떨어진다. 무조건 남의 탓으로 돌리고 잘못을 뒤집어씌우기 일쑤다. 결국 자신마저 감쪽같이 속이는 병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성향의 사람들은 늘 우리 가까이 편재해 있었다. 아니다 싶으면서도 한동안 그 옆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던 몹시 개인적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떠올린다. 그때는 몰랐으나 절대 신뢰할 수 없는 자기애성 인격 장애 환자에게 내 허약한 영혼을 기대 본 사람은 안다. 한때 혹은 오래도록 우리가 기댔던 그 카리스마 넘치는 존재가 정작 자기 자신이 누군지 모르는 미성숙한 존재라는 사실을 완전히 파악하기까지 꽤 오랜 세월이 걸리기도 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오래전에 이렇게 예언했다. “대다수의 편에 서는 게 꼭 옳은 건 아니다. 우리는 광기 있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는 걸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 무릇 정신이 건강한 사람이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사람이다. 생각 없이 무조건 믿고 따르는 건 사이비종교의 속성을 떠올리게 한다. 칼 융에 의하면 사람들이 너무 쉽게 판단하는 건 사고하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이 사람이 저 사람보다 좋다고 생각하고, 이 자식이 저 자식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편애하고 더 잘해주고, 그렇게 생각에 속고 휘둘리며 살아왔다는 걸 너무 뒤늦게 알게 되는 우리는 늘 어리석다. 다음 생이 있다면 지혜롭게 살리라. 연구에 의하면 우리가 지닌 지혜는 모두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게 다일지 모른다. 과학자들은 지구의 수명은 인간이 그렇듯 무한하지 않다고 말한다. 매 순간 죽어가는 지구인, 우리는 누군가 말하듯 “악한 사람들 사이에서 사는 악한 사람들이다. 이 사실에 지혜롭게 대처하는 유일한 방법은 서로를 너그럽게 대하기로 합의하는 것이다.”(브리지드 딜레이니 『불안을 이기는 철학』) 하지만 인간은 계속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며 살다가 죽는 게 일반적이다. 만일 그렇지 않은 개인이, 그렇지 않은 세상이 존재한다면 인류의 전쟁은 오래전에 종식되었을 것이다. 언젠가 우리가 끝없이 되풀이해온 분노와 복수를 드디어 끝낸, 아직 태어나지 않은 지혜로운 세대를 감히 우리가 꿈꿀 수 있을까. 뿌연 거리감이 걷히고 세상 풍경이 또렷이 보이고 들리기 시작하는 또 가을이다. 문득 엉뚱한 문장 하나가 떠오른다. “내 사랑은 얼마인가요?” 내게 그것은 “내 그림은 얼마인가요?” 같은 질문으로 들린다. 모든 것에 가격을 매기는, 물질이 마음을 이긴지 오랜 세상, 오늘 내가 아무것도 모른다 해도, 살아있다는 건 참 쓸쓸하고도 아름다워라. 황주리 / 화가삶의 향기 아무것 외계인 자기애성 성격장애 자기애성 인격 정신의학 전문가들
2023.09.29. 21:35
갤러리에 들어가면 하얀 텅 빈 공간 같지만 사방 벽면은 모두 회화 작품으로 채워진, LA에서 보기 드문 특별한 전시회가 열린다. 다운타운 아트디스트릭에 위치한 PRJCLA 갤러리에서 LA를 기반으로 오랫동안 미니멀리즘의 작품 세계를 구축해온 유제화 작가 초대전이 오는 27일부터 9월 24일까지 열린다. 유제화 작가는 “전시 공간에 투명 붉은 천을 설치해 시원한 넓은 들판을 구현했다”며 “갤러리 4개 벽면을 천정부터 바닥까지 대형작품으로 메꿔, 열심히 했지만 멀리서 보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완전히 텅빈 미니멀리즘을 추구했다”고 밝혔다. 한국의 단색화와 결을 같이하는 이번 전시는 그동안 단단히 구축되었던 작가만의 독특한 화법이 점에서 선으로 다시 공간으로 무한 확장되면서 그 텅 빈 공간 안에 빛과 공기의 이야기가 가득 채워진다. 갤러리 측은 “작가의 조그만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놀랄 만한 집중력과 스케일은 보는 관객들에게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하는 훌륭한 전시가 될 것”이라며 “주목할 만한 점은 붉은색 투명한 천을 이용한 설치 작품으로 벽에 걸린 평면 작품을 공간으로 확장하며 그 표현을 극대화해 관람객에게 선과 빛과 투명한 공간의 향연을 느끼게 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1965년 홍익대학교 미대를 졸업한 유제화 작가는 1969년 캘스테이트 LA(MFA)에 유학차 도미했다. LA를 기반으로 미국·한국·유럽 등지에서 20회가 넘는 개인전을 열었으며, 100여 회의 그룹전에도 참가했다. 이번 전시회에서는 대작 10여점을 포함해 전시실을 들어가기 전 벽을 장식한 소품 작품까지 총 20~25여점이 소개된다. 오프닝 리셉션은 27일 오후 3시부터 6시까지 열린다. ▶주소: 1452 E.Sixth Street. LA. ▶문의: [email protected] 이은영 기자미니멀리즘 아무것 오랫동안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 추구 이번 전시회
2022.08.21. 14: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