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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컬처에 빠지다] 뉴욕을 감동시킨 안중근의 유묵

한국의 광복 80주년을 기념하는 행사가 지난 15일 뉴욕 한국문화원에서 ‘광복 그 너머(Beyond Liberation)’라는 영화 시리즈의 개막과 함께 열렸다.     첫 상영작은 영화 ‘하얼빈’으로, 1909년 10월 26일 중국 하얼빈에서 일본의 초대 총리이자 대한제국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한 안중근 의사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하얼빈은 미국에서도 비평가들의 호평을 받으며 많은 관객의 열렬한 반응을 이끌어냈다. 그래서인지 극장은 빈자리가 없을 만큼 가득 찼고, 대기자 명단에 오른 많은 사람이 영화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이 영화가 한국 밖에서 큰 주목을 받는 이유는 전 세계적으로 전쟁의 참혹한 이미지들이 휴대전화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현재 상황과 맞물려 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소셜 미디어 덕분에 우리는 전쟁 범죄와 대량 학살을 숨기기 불가능하게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이제는 역사적 잔혹 행위에 대한 정보도 널리 퍼져 있다.   우리는 현재와 역사적 사건 모두에 대해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사회에 살고 있다. 역사를 더 깊이 이해하면 현재 갈등의 원인과 사건들이 국제적으로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알 수 있다. 20세기 초 한국의 독립 투사들을 살펴보면 현재 다른 나라에서 자유를 위해 투쟁하는 사람들 사이의 유사점을 발견한다. 영화 하얼빈은 압제자들에 맞서 싸우는 사람들의 길고 전 세계적인 역사 중 한 장을 보여주며, 그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한 국가의 테러리스트가 다른 국가에서는 자유 투사가 되기도 한다. 우리는 이 사상을 100년 전 안중근 의사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 일본에서는 그가 악당으로 비치지만 한국과 중국에서는 영웅으로 여겨지며 그를 기리는 박물관이 세워졌다고 배웠다. 세월이 흘러 이제는 일부 일본인들조차 안중근 의사를 존경하고 그에게 공감한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과 같은 범아시아주의에 대한 그의 사상은 이제 널리 알려져 있고, 안 의사를 주제로 한 국제 심포지엄에서 활발히 논의된다. 그의 사상은 유럽 연합보다 훨씬 앞선 것이며, 국제연맹 창설보다도 먼저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로 인해 안중근 의사에게 내려졌던 가톨릭 교회로부터의 파문은 사후에 철회되었다.   안중근 의사가 사형 선고를 기다리며 감옥에 있었을 때, 그는 자신의 뛰어난 서예 실력을 존경하는 일본인들의 요청으로 많은 작품을 남겼다. 그의 유묵(생전에 남긴 글씨나 그림)은 일본의 수집가들에게 보존되어 있으며, 한국에 있는 여러 작품은 정부 보물로 지정되었다.   안중근 의사의 유묵 중 아시아 외 지역에 있는 것은 단 한 점뿐이다. 그가 하얼빈에 머물렀던 며칠 동안 쓴 중요한 작품이다. 작품에는 ‘나라를 위하여 몸을 버리는 것은 옳음이니 돌아볼 필요가 없다’라고 쓰여 있다. 작품에 찍힌 그의 손바닥 도장에는 단지동맹으로 잘려나간 그의 약지 위쪽 부분이 보인다.   이 작품은 감정가 200만 달러에 팔릴 수도 있었다. 코리안아트소사이어티 회장인 필자는 작품 소유주이자 우리 단체 회원인 한 미국인 부부를 설득해 올해 브루클린 박물관의 200주년을 기념하여 작품을 기증하는 것을 주선했다.   브루클린 박물관의 아시아 미술 큐레이터인 조앤 커민스 박사는 “이 작품은 매우 강력한 힘을 지녔다. 안중근 의사의 애국적인 메시지는 저항 예술의 감동적인 예다. 그의 방식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조국의 독립을 이루려는 그의 열망은 많은 사람에게 큰 울림을 준다”라고 평가했다.   기증자 중 한 분은 “미국인이 소중하게 여기는 기본적인 가치, 즉 애국심, 개인의 자유, 원하는 대로 살고 믿을 권리, 기회균등, 그리고 가족과 교육의 중요성은 전통적인 한국 문화에서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다르지 않다. 이러한 공유된 전통 가치는 미국과 한국 국민을 연결하는 근본적인 전략적 연결 고리”라고 덧붙였다.   안중근 의사의 이 희귀하고 중요한 작품은 오는 11월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될 예정이다. 필자는 이 작품과 안중근 의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박물관의 한국 갤러리를 둘러보는 코리안아트소사이어티의 행사를 마련할 것이다. 우리 단체의 모든 행사가 그렇듯이 이 행사 또한 무료이다. 자세한 정보는 아래 이메일 주소로 연락해 주시기를 바란다. 여러분을 만나 이 중요한 대화를 계속 이어나가기를 기대한다.   (이 글의 일부는 곧 출간될 로버트 털리의 회고록 『잉크타운(Inktown)』에서 발췌했습니다.)   ▶코리안아트소사이어티: 이메일([email protected])/페이스북(Facebook.com/RobertWTurley) 로버트 털리 / 코리안아트소사이어티 회장K컬처에 빠지다 안중근 뉴욕 안중근 의사 뉴욕 한국문화원 영화 하얼빈

2025.08.25.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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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조카 안원생 지사 유해 한국으로 봉환된다

안중근 의사의 조카인 안원생 지사의 묘소가 43년 만에 애리조나주에서 확인돼, 국가보훈부가 유족 협의를 거쳐 유해의 한국 봉환을 추진할 계획이다.   국가보훈부는 3일 안 지사의 묘소가 애리조나주 선랜드 메모리얼 파크에서 발견됐다고 밝혔다. 해당 묘소는 작년 말 보훈부가 서남부 지역 내 독립유공자 묘소 실태조사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처음 확인됐다.   안원생 지사는 안중근 의사의 동생인 안정근 지사의 아들로, 1925년 중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반일 시위와 전단 배포 활동을 벌였다. 이후 193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 선전위원 및 선전부 편집위원 등을 역임하며 독립운동에 기여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중에는 미국과 영국 측과 접촉하며 외교 활동도 펼쳤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보훈부는 다양한 자료 분석을 통해, 선랜드 메모리얼 파크에 ‘데이비드 W. S. 안(David W. S. Ahn)’이라는 이름으로 안장된 묘소가 안원생 지사의 것임을 최종 확인했다. 안 지사는 1982년 애리조나주에서 별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권오을 국가보훈부 장관은 “광복 80주년을 맞아 조국의 독립을 위해 헌신하신 안 지사님의 묘소를 확인하게 된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라고 강조했다.   보훈부는 대한인국민회(이사장 클라라 원) 등과 함께 잉글우드 묘지에 안장돼 있던 임창모 애국지사의 유해도 오는 11일 한국으로 봉환한다.〈본지 7월16일자 A-3면〉   보훈부는 이번 실태조사 과정에서 LA인근에 안장된 송헌주 지사(1995년 독립장 추서) 등 총 40기의 독립유공자 묘소 관리 상태도 점검했다. 그간 소재가 확인되지 않았던 강영승 지사(2016년 애국장 추서) 등 29기의 묘소도 새로 확인했다.   보훈부는 이들 묘소에 대해서도 유족 확인 및 협의를 통해 유해 봉환 또는 관리 방안을 적극 추진할 방침이다. 정재홍·강한길 기자안중근 안원생 안원생 지사 안중근 의사 한국 봉환

2025.08.03.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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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의 만장

더 시간이 가기 전에 어릴적 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만장(輓章)에 대한 이야기를 털어놓아야겠다. ‘효갈모생무적거(曉蝎謀生無跡去), 석문영사유성래(夕蚊寧死有聲來) - 새벽 빈대는 살기 위하여 자취를 감추지만, 저녁 모기는 죽을지언정 소리를 내며 날아온다.’  어릴 적 할아버지가 안중근 의사의 만장이라며 알려주신 내용이다. 만장이란 고인의 업적과 공덕을 치하하고 슬퍼하는 짧은 글을 비단이나 종이 쓴 깃발을 말한다.     나는 열 살 때부터 열흘에 한 번 정도 할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유교적인 가정교육을 받았다. 사실은 일방적인 훈시였다. 할아버지는 늘 “안중근 의사처럼 불굴의 의지를 갖고 목표를 달성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안중근 의사의 만장을 시조처럼 목청 높여 읊고 훈시를 끝냈다. 그의 왕방울 같은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다. 좀처럼 눈물을 보이는 분이 아니었다. 그런 분이 눈물을 흘리니 나도 눈시울이 뜨거워져 같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와 안중근 의사는 같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해주시 광석동(廣石洞), 일명 ‘광석 개’다. 할아버지보다 두 살이 많은 안중근 의사는 일곱 살 때 황해도 신천으로 가족과 함께 이사했다.     이 칠언시 만장은 많은 의문점을 갖게 한다.  만장을 만들었다면 안중근 의사가 일제에 사형을 당한 후 시신이 없는 장례식, 혹은 추도식이라도 치렀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주최자는 누구였을까? 장소는, 해주, 신천, 연해주, 또는 상하이, 어디에서 열렸을까? 누가 빈 상여를 메고 가두 행렬을 했을까?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온다. 하지만 인터넷 백과사전을 찾아봐도 안중근 의사의 장례식이나 만장에 대한 언급은 없다.   각설하고 나는 지난해 안중근 기념사업회에 만장의 칠언시를 유물 전시관에 전시할 수 있는지 문의하는 내용의 이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할아버지에게서 들은 구전(口傳)의 글이라고 밝혔다. 그런데 기발한 회답이 왔다. 그 때 사용했던 만장, 그 유물(遺物)을 제출하라는 것이었다. 답답한 노릇이었다.     그래서 올해 다시 용산 대통령 민원실에 이 만장의 칠언시를 안중근 기념관에 무형유산으로 전시해달라고 민원을 제출했다. 역시 비슷한 내용의 다음과 같은 회답을  받았다. ‘귀하께서 언급하신 만장 및 칠언시는 안중근 의사와 관련된 의미 있는 기억의 일부분으로 볼 수 있으나 무형유산의 범주에는 해당하지 않는 것으로 보입니다. 이 점을 양해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나는 올해 구순이다. 총성과 함께 ‘꼬레아 우라(대한민국 만세)’라는 메아리가 울리는 듯한 이 만장은 돌이 물속으로 가라앉듯 나와 함께 세상에서 사라질 것이다. 독자 여러분과 특히 미주 안중근 의사 숭모회 회원들은 이 칠언시를 메모하여 보존하기를 바란다.     윤재현 / 전 연방정부 공무원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기념관 미주 안중근

2024.10.02. 1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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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순국 제113주기 추모식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 뉴욕지회, 안중근 의사 숭모회 뉴욕지회는 26일 베이사이드 뉴욕한인봉사센터(KCS) 커뮤니티센터에서 ‘안중근 의사 순국 제113주기 추모식’을 진행했다. 추모식에 참석한 이들이 조국의 독립과 동양평화의 원칙을 만천하에 고한 안중근 의사의 뜨거운 마음을 되새기는 시간을 가진 뒤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백범김구선생 기념사업회 뉴욕지회·안중근 의사 숭모회 뉴욕지회]안중근 추모식

2023.03.26.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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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

그저께는 77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 밝은 세상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일제 36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수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역사를 생각해본다.     최근, 김훈 소설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작가는 ‘권총 한 자루와 100루블의 여비로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던 한국 청년 안중근의 치열한 정신을 부각하고싶었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113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아무런 정치적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한 적의 법정에서, 그는 “대한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전쟁 중 작전을 통해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항소하지 말라,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며 의연함을 보였다.     일제는 만주 여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다. 거사 이후 80여 년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안중근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남겨졌다. 1993년 8월 21일에 와서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수행으로 타당하다”고 선언했다.   안중근 거사 이후, 역사가 소용돌이쳤다.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했다. 안중근 일가는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큰 아들분도가 일곱 살에 죽었다. 누군가 쥐여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남겨진 가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의 서곡이었다.     30년 뒤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에서이토의 아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아비의 잘못을 사죄했다. 당시 경성일보는 ‘이토 공 영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운명의 아들, 안준생 군’ 이라는 사진을 게재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박문사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일을 손석희 앵커는 뉴스 시간 앵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 개와 같은 자식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겨진 가족에게 현실은 잔혹했다. 애국 대신 매국을 선택하여 살아남고자 했던 비극과 통한의 역사였다.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김구는 광복 직후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 안준생은 1952년 부산에서 병사했다.       다시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고, 현재는 어떤가. 그리고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동양평화’를 절규하는 안중근의 총성이 울려온다.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정찬열 / 시인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거사 안중근 일가

2022.08.17. 20:25

[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를 생각한다

어제는 77주년 광복절이었다. 광복, 밝은 세상을 되찾았다는 의미다. 일제 36년의 어둠으로부터 벗어난 날이다.  수많은 애국지사의 피와 땀을 기억하고 역사를 생각해본다.     최근, 김훈 소설가가 쓴 ‘하얼빈’을 읽었다. 작가는 ‘권총 한 자루와 100루블의 여비로 세계사적 폭력과 야만성에 홀로 맞섰던 한국 청년 안중근의 치열한 정신을 부각하고싶었다’고 말한다.      지금부터 113년 전인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15분, 중국 하얼빈역에서 안중근은 일본  전 총리이자 초대 조선통감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했다. 아무런 정치적 정당성도 인정받지 못한 적의 법정에서, 그는 “대한제국의 의군 참모중장으로 전쟁 중 작전을 통해 적장을 사살한 것”이라고 당당하게 주장했다.     어머니는 아들의 죽음 앞에서 “항소하지 말라, 큰 뜻으로 죽음을 받아들여라”라며 의연함을 보였다.      일제는 만주 여순 감옥에 갇힌 안중근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이 집행됐다. 그의 나이 서른한 살이었다.      안중근은 천주교인이었다. 거사 이후 80여 년 동안 한국천주교회는 안중근의 행위를 정당화하지 않았다. 1910년 당시 뮈텔 주교의 판단에 따라 안중근은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어긴 ‘죄인’으로 남겨졌다. 1993년 8월 21일에 와서야 서울 대교구장인 김수환 추기경이 ”안중근의 행위는 ‘정당방위’이고 ‘국권 회복을 위한 전쟁수행으로 타당하다’고 선언했다.    안중근 거사 이후, 역사가 소용돌이쳤다. 일제는 한반도를 병탄했다. 안중근 일가는 중국 흑룡강성으로 이주했다. 큰 아들분도가 일곱 살에 죽었다. 누군가 쥐여준 과자를 먹고 갑자기 죽었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남겨진 가족이 겪어내야 했던 수난의 서곡이었다.      30년 뒤인 1939년 10월 16일,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은 이토 히로부미의 위패가 있는 박문사에서이토의 아들에게 깊이 고개 숙여 아비의 잘못을 사죄했다. 당시 경성일보는 ‘이토 공 영령 앞에서 머리를 조아리는 운명의 아들, 안준생 군’ 이라는 사진을 게재했다. 조선총독부의 기획과 연출로 이루어진 ‘박문사 화해극’이었다. 당시 조선과 일본의 언론에 감격적인 필치로 크게 보도되었다.      이 일을 손석희 앵커는 뉴스 시간 앵커 브리핑에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호부견자(虎父犬子), 호랑이 아버지에 개와 같은 자식이라는 비난이 쏟아졌다. 남겨진 가족에게 현실은 잔혹했다. 애국 대신 매국을 선택하여 살아남고자 했던 비극과 통한의 역사였다. 희생으로 싸워 찾은 가치를 지키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김구는 광복 직후 장개석을 만났을 때 안준생을 체포 구금해 달라고 요청했고, 그를 ‘교수형에 처해달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다. 안준생은 1952년 부산에서 병사했다.        다시 광복절이다. 무엇으로부터 광복인가. 우리에게 일본은 어떤 나라였고, 현재는 어떤가. 그리고 어떤 나라여야 하는가. ‘동양평화’를 절규하는 안중근의 총성이 울려온다. 지금 우리가 지켜내야 할 가치는 무엇인가.   정찬열 / 시인열린 광장 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안중근 거사 안중근 일가

2022.08.15. 19:12

안중근 의사 서거 112주기 추모식…26일 베이사이드 KCS에서

백범 김구선생 기념사업회 뉴욕지회 및 안중근 의사 숭모회 뉴욕지회(회장 김광석)가 안중근 의사 서거 112주기를 맞아 추모식을 거행한다. 추모식은 오는 26일 오전 11시 베이사이드 뉴욕한인봉사센터(KCS) 커뮤니티센터(203-05 32애비뉴)에서 대면으로 열린다. 주최 측은 “조국의 독립과 동양의 평화를 만천하에 고한 안중근 의사의 뜨거운 마음이 주는 의미를 되새기고, 세계평화와 조국의 통일에 기여하고자 하는 각오를 확인하는 자리가 될 것”이라고 전했다.   장은주 기자안중근 추모식 안중근 의사 백범 김구선생 회장 김광석

2022.03.10. 17:40

[사진] 안중근 의사 외손녀 황은주 여사 별세…향년 93세

안중근 의사 외손녀 황은주 여사 별세…향년 93세 (서울=연합뉴스) 안중근 의사의 손자 항렬 유족 중 마지막으로 생존했던 황은주 여사가 지난 12일 별세했다고 안중근의사숭모회가 13일 밝혔다. 향년 93세. 사진은 황은주 여사. 2021.12.13 [안중근의사숭모회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email protected] (끝)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사진 안중근 외손녀 황은주 여사 안중근 의사 연합뉴스 무단

2021.12.13. 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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