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일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에서 레이건 국방포럼(RNDF)이 열렸다. 이 포럼은 미국 안보 현안의 흐름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자리다. 명함이 오가고, 악수가 이어지며, 공식 문서에 담기기 전의 생각들이 가장 솔직하게 오가는 공간이다. 그런 무대에 미국 안보 라인 핵심 인사 700여 명이 집결했다. 그 한가운데에 한국은 보이지 않았다.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을 필두로 댄 케인 합참의장, 육·해·공군 참모총장과 해병대 사령관, 인도태평양사령관까지. 미국 군 지휘부의 정점이 총출동했다. 여기에 록히드마틴·보잉·노스롭그루먼·RTX 등 미국 4대 방산업체 수장, 안두릴과 팔란티어 같은 신흥 방산기업 리더들, 제이미 다이먼 JP모건체이스 CEO까지. 정치·군·산업 권력이 한 공간에 모였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의 ‘힘에 의한 평화’ 철학을 기치로 한 포럼의 화두는 분명했다. 중국, 그리고 동맹이었다. 이 주제에서 한국·일본·대만은 빠질 수 없는 국가다. 미국의 인도·태평양 전략 실행과 대중 견제의 최전선에 선 국가들이기 때문이다. 이날 야마다 시게오 주미 일본대사와 주미 대만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미 대만경제문화대표부(TECRO)의 알렉산더 유이 대표가 모습을 드러냈다. 특히, 유이 대표는 지난 7월 애스펀 안보 포럼에 이어 이번에도 참석했다. 이들은 미 정부 고위 인사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했고, 대학생 펠로들에게까지 직접 각국의 현안을 설명했다. ‘현장 외교’의 교과서 같은 장면이었다. 하지만 한국 정부 인사들은 없었다. 강경화 주미대사는 물론, 한국 정부 관계자 단 한 명도 현장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애스펀 안보 포럼에 이어 두 번째 공백이다. 실수로 치부하기엔 시점이 너무 중요하다. 한국은 막 미국과 관세 협상을 마무리했고, 한미 조선 협력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 건조라는 굵직한 안보 현안을 구체화하는 단계에 있다. 이런 국면에서 미국 안보 라인 핵심 인사들이 한자리에 모인 자리를 비운다는 건 외교적 무신경함에 가깝다. 아이러니는 기조연설에서 극명해졌다. 헤그세스 장관은 한국이 국방비를 증액해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는 모범 동맹이라고 소개했다. 한국이 칭찬의 대상이 된 무대에, 정작 한국은 없었다. 그 결과, 원자력 추진 잠수함과 MRO(유지·보수·정비)를 넘어 미 해군 함정을 한국 조선소에서 건조하고 싶다는 메시지는 정부 관계자가 아니라 취재 기자의 입을 통해 전달됐다. 포럼 이후 리셉션에서 마이클 더피 국방부 획득·유지 담당 차관이 기자에게 한국 정부의 요구 조건들을 되묻는 장면은 외교 공백이 만들어낸 풍경이었다. 주미대사관의 인력이 충분하지 않다는 현실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선택과 집중이 요구된다. 전략적으로 가장 중요한 자리에 대사가 직접 얼굴을 비추는 판단이 필요하다. 한미 동맹의 무게를 고려할 때, RNDF 같은 자리에 강경화 대사가 참석할 수 있도록 조율하는 것 역시 외교 역량의 일부다. 만약 “시미밸리는 워싱턴과 정반대에 있어 멀다”는 물리적 거리를 핑계로 댄다면, 설득력이 없다. 일본과 대만은 왔고, 참석자 상당수는 워싱턴에서 이동했다. 동맹은 성명서로 유지되지 않는다. 얼굴을 비추고, 같은 공간에서 시간을 쓰며, 관계를 축적할 때 비로소 작동한다. 미국 안보의 중심 무대에 일본과 대만은 있었고, 한국만 없었다. 이 사실이 남긴 메시지는 분명하다. 이를 놓친 대가는, 결국 한국이 치를 수 밖에 없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안보 외교 안보 현안 애스펀 안보 안보 라인
2025.12.14. 17:50
4000달러. 지난 15일부터 18일까지 콜로라도주 애스펀에서 열린 애스펀 안보 포럼 입장권 가격이다. 4일간 현장 취재를 위해 참석했다.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만 듣는 자리의 참가비로 수천 달러를 내야한다는 건 일반적인 상식선에서 납득하기 어려울 수 있다. 그러나 다른 시각에서 보면 4000달러는 결코 비싸지 않다. 지난해 11월 주미한국대사관은 4만 달러에 로비업체 머큐리 퍼블릭 어페어스와 2개월 단기 계약을 맺었다. 전략 컨설팅, 공보, 정부 관계자 접촉 등을 대행하기 위한 계약이었다. 금액만 놓고 보면, 포럼 참가비는 로비 계약의 10분의 1 수준이다. 물론 4일짜리 포럼 입장권 가격과 2개월짜리 계약금을 숫자만 두고 비교하면, 당연히 후자가 더 경제적이다. 그러나 애스펀 안보 포럼이 제공하는 ‘현장 외교’ 기회를 고려하면, 이 4일짜리 포럼 참가가 훨씬 가성비 있는 대미 외교 투자일 수 있다. 국제 안보 현안을 다루는 애스펀 안보 포럼은 크게 두 가지 기회를 제공한다. 하나는 세계 각국의 외교·안보 전문가들 인사이트를 직접 들을 수 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들과 동등한 위치에서 식사하고, 대화하며 자연스레 네트워킹할 기회다. 참석자 대부분은 쟁쟁한 전문가들이지만 현장에는 의전도, 수행원도 없었다. 로키산맥에 둘러싸인 리조트에서 전·현직 장·차관, 군 장성, 기업인, 대학교수, 언론인 등 수백 명이 자연스럽게 어울렸다. 포럼 참가자는 누구든 ‘이름표 하나’만으로 관계를 시작할 수 있다. 일례로 포럼 둘째 날인 지난 15일, 아침 식사가 제공되는 리조트 가든 텐트에 차히아긴 엘벡도르지 전 몽골 대통령이 홀로 벤치에 앉아 식사 중이었다. 지난 1990년 몽골 민주화혁명 핵심 인사로, ‘몽골 민주화의 아버지’라 불린다. 기자가 “같이 앉아도 되겠느냐”고 묻자 그는 흔쾌히 허락했다. 그렇게 한인 언론사 기자와 전직 국가 정상 간 ‘1대1 조찬’이 40분간 이어졌다. 식사 중 그는 방북 경험부터 북한 체제의 문제점,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파병된 북한군의 함의, 미국의 아태 전략 속 한반도와 몽골의 지정학적 위치 등에 대한 견해를 나눴다. 또 이날 점심에는 국방부, 사이버보안 및 인프라 보안국(CISA), 세계적인 경영컨설팅 업체인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 관계자들과 한 테이블에 앉았다. 인공지능(AI)을 비롯한 기술 발전 과정 속 정부의 역할에 대한 의견을 주고받았다. 대화 중, PwC 관계자는 과거 한국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과 만났던 경험을 언급하며, 한국의 톱다운식 정책 결정 방식과 정부와 기업 간 관계가 기술 혁신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로비업체를 통해서는 얻기 어려운, 생생하고 진솔한 대화의 연속이었다. 안타까운 점은 이런 자리에 주미한국대사관이나 한국 외교부 관계자는 보이지 않았다. 중국, 일본, 대만 정부 및 기업 관계자들은 빠짐없이 참석했다. 특히 사실상 주미 대만 대사관 역할을 하는 주미 대만 경제문화대표부(TECRO)의 유타레이 대사가 활발히 미국 고위 인사들과 어울리는 모습은 부럽기만 했다. 이번 포럼에는 미국 방위산업 및 첨단기술 기업 관계자들도 대거 참석했다. 예를 들어 크리스 브로스 안두릴 인더스트리즈 최고전략책임자를 비롯해 보잉, 록히드마틴, 인텔, 오픈 AI 등의 대표자들도 자리했다. 항공우주, AI, 위성 등 기술 기반 안보 전략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한국 입장에서 이들과의 접점은 절실하다. 더구나 K-방산 강화와 한국형 3축 체계 고도화를 추진하는 현재 상황에서 한국 방산 기업이나 정부 관계자들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애스펀 안보 포럼은 단지 앉아서 듣는 행사가 아닌, 직접 보고, 만나고, 말 걸고, 관계를 맺는 ‘현장 외교’의 장이었다. 물론 새 정부 출범 초기이자 외교부 장관이 이제 막 임명되고, 주미대사직이 공석인 점을 고려하면 관계자 부재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하지만 외교의 시계는 기다려주지 않는다. 진정성 있고 관계 중심적인 외교, 정보 밀도 높은 외교는 로비업체가 아닌 이런 현장에서 시작된다. 외교도 경쟁이다. 현장에서의 경쟁력 없이는 존재감도, 영향력도 없다. 애스펀 안보 포럼 같은 외교 최전선에서, 한국은 더 많이, 더 자주, 더 적극적으로 보여야 한다. 김경준 / 사회부 기자기자의 눈 최전선 외교 정부 관계자 애스펀 안보 대미 외교
2025.07.23. 19:5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