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4월 일라가 그녀의 친구 메리 맥코넬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메리의 오빠는 한국전쟁에서 사망했다. 일라가 건강한 모습으로 층계도 오르고 한층 젊어 보이니 현대 의학과 하느님의 치료의 손길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일라가 18년을 도와주었는데 앞으로 30년 더 살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 드렸다. 그때 나도 은퇴할 것이다. 얼마 후 일라는 미국의 집을 팔고 한국으로 와서 나와 함께 살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녀는 집 차 그리고 소유한 모든 재산을 정리한 모든 돈을 우리에게 기부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고아원 문을 닫고 정식으로 인가받은 고등학교를 함께 설립하기로 결정했다. 할 수 없이 16세 미만의 아이들은 다른 고아원으로 옮겼다. 80명 중 18명이 대학에 진학했고 그들 모두 졸업했다. 알프레드는 미국 정계에서 아시안 아메리칸으로서는 최고 높은 자리에 올랐다. 그는 코리안 아메리칸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변호사가 됐으며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하원의원 그리고 상원의원에 각각 당선됐다. 캘리포니아 민주당 코커스 위원장을 맡았고 아시안계로는 최초로 캘리포니아 주 기관장이 되었다.1982년 그는 영향력이 큰 캘리포니아 주 농업노동자 관계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됐다. 한인 최초의 영자 신문 코리아타운위클리는 사진신부 출신인 알프레드 송의 어머니에 대해 특강과 인터뷰를 여러 번 부탁하기도 했다. 드디어 알프레드 송이 인터뷰에 응했다. 나의 아버지 송진구는 1900년 초 여섯살 때 부모님을 따라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노동자로 왔다. 열여덟 살 때 겨우 6학년의 교육을 받고 사진신부와 결혼했다. 나는 1919년 장남으로 태어났고 나의 남동생은 13세 때 이 세상을 떠났다. 나는 1949년 남가주대학교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취득했고 어머니와 함께 로스앤젤레스에서 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어머니는 "한국에 있는 전쟁고아들이 걱정되니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버려진 전쟁고아들을 돌봐야 겠다"라고 말했다. 어머니에겐 돈이 거의 없었고 더구나 당시 60세의 고령이었다. 어머니는 여러 단체로부터 기부금을 부탁했으나 그녀가 너무 늙었고 교육도 제대로 받지 못한 사람이라고 모든 단체가 기부를 거부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돈도 없이 홀로 한국으로 떠났다. 나는 어머니의 이러한 무리한 결정이 쓸데없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한국에서도 가장 빈민가에서 진흙으로 건물을 세워 고아원을 설립했다. 내가 1967년에 어머니를 처음으로 방문했을 때 아이들이 저녁 먹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어머니에게 물어보았다. "어떻게 아이들이 이런 곳에서 지낼 수 있죠? 무엇을 먹기에 아이들이 저렇게 초라해 보이나요?" 어머니는 꽁보리밥에 야채를 섞어 끓여 아이들에게 주고 있었다. 먹을 거라곤 매일 보리밥과 김치가 전부였다. 어머니가 어떻게 수년간 고아원을 운영해왔는지 알 수 없다. 어머니의 인생은 한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희생. 그리고 어머니는 일하고 일하고 또 일했다. 어머니는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오자마자 일을 시작했고 집에서는 집안일을 도맡아 해야 했다. 우리 모두 사탕수수밭에서 일했고 겨우 먹고 살았다. 아버지는 장남이었기 때문에 어머니는 할아버지 할머니와 어린 삼촌들도 돌봐야 했다. 아버지는 겨우 6학년까지만 학교에 다녔다. 어머니는 군대 근처의 양장점에서 바느질을 하면서 일감을 집에 가져와 밤늦게까지 집에서 바느질을 했다. 내가 자랄 때 대공황이 닥쳤다. 어머니는 학교에서 점심을 사먹을 수 있도록 매일 10센트씩 주었다.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 어머니가 운동화를 사주셨다. 당시 하와이에서는 모두 맨발로 다녔는데 나는 7학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운동화를 가질 수 있었다. 어머니가 이런 고통을 다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아마 하느님에 대한 신앙심일 것이다. 어머니는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기에 자신이 한국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믿는다. 인간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 특히 어린아이들에 대한 사랑이 어머니가 활동적인 삶을 사실 수 있었던 원동력이라고 생각된다. 어머니는 한 달에 한 번 소리 나는 대로 영어를 적어 나에게 편지를 쓰신다. 나는 어머니 아들이기에 어머니의 편지를 읽을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다. 어머니는 교회를 다니라고 꾸짖으신다. 레슬리 송 위너는 미주 한인 최초의 민주당 집안 장녀로서 성장했다. 그녀의 아버지 알프레드 송은 몬터레이파크 시의원 로스앤젤레스 커미셔너 등을 역임했다. 그녀 역시 할머니에 대한 기억이 있다.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두 달 전 하와이에서 로스앤젤레스로 이주했다. 할머니는 한국으로 가기 전까지 줄곧 우리와 함께 살았다. 할머니로부터 아주 따뜻함을 느꼈다. 나는 첫 번째 손녀였고 우리는 아주 특별한 할머니-손녀 관계였다. 할머니는 나에게 무척 큰 영향을 주셨다. 물론 그 당시에는 잘 몰랐어도 말이다. 할머니와 나는 아주 가까웠고 나는 할머니를 무척 사랑했다. 할머니는 따뜻하고 정이 많았는데 우리 어머니와는 달랐다. 할머니에게 하느님을 믿는 신앙생활은 매우 중요했다. 우리는 방을 함께 썼는데 어느 날 할머니가 나에게 하느님의 부르심이 있었느냐고 물었던 것이 기억난다. 할머니는 나를 빌리 그레이엄 목사나 오럴 로버트 목사의 부흥회에 데리고 다녔다. 할머니는 선교사였으며 모든 활동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라고 했다. 우리 가정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할머니가 사진신부로 하와이에 도착했을 때 할머니는 할아버지의 첫 모습에 몹시 실망했다. 반면 할아버지는 할머니에게 첫눈에 반했다. 할아버지는 장남이었고 가족을 부양해야 했기에 대학에 가지 못했다. 할아버지는 똑똑했지만 좌절감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알코올중독자가 됐다. 두 분은 나중에 이혼을 했는데 할머니는 매우 힘든 삶을 살았다. 할머니는 항상 일을 했다. 아버지를 대학에 보내기 위해 하와이에서 가정부로 취직했고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봉제 공장에서 바느질을 했으며 나중에는 디자인을 해서 샘플을 만들기도 했다. 할머니가 한국에서 돌아왔을 때 우리 가족 모두가 모였던 것을 기억한다. 할머니는 이제는 한국으로 영원히 귀국해서 고아원을 설립할 것이라고 했다. 거리에 고아들이 많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고아원을 설립하려고 했던 것이다. 우리 가족들은 할머니가 돈 없이 혼자서 할 수 없는 일이라며 터무니없다고 할머니를 만류했다. 그러나 할머니는 할 수 있다고 했다. 할머니는 종교 단체와 연결되어 기부금을 확보했고 아버지가 비영리단체 신청을 도왔다. 사람들이 이 단체에 기부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할머니는 한국으로 떠난 후 우리의 생활에서 멀어져갔다. 지난 40년 동안 할머니는 단 두 번 미국을 방문했다. 할머니가 마지막으로 이곳에 온 때는 1982년이었다.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간 후 처음엔 편지를 했는데 나중에는 그나마도 끊겼다. 할머니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지만 거리에서 아이들을 거두었다. 건물을 짓고 그 아이들을 데려다가 키웠다. 할머니는 미군에 가서 건물을 짓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성장하기 시작하자 고아원은 중학교가 되었고 할머니는 그곳에서 매일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쳤다. 할머니는 용감했다. 할머니는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해결했다. 그러한 할머니의 삶에 대해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기도에서 힘과 용기를 얻어 성스러운 종교적인 삶을 영위했다. 할머니는 하느님이 해결해주실 것을 진심으로 믿고 믿음대로 행동에 옮겼다. 나중에 할머니가 남긴 글을 읽으면서 나는 하느님의 영적인 힘이 할머니를 가서 행동하도록 이끌었다고 확신하게 됐다. 이경원 저ㆍ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정리= 장병희 기자
2016.08.31. 20:41
남가주대학교(USC)를 졸업한 후 알프레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했다. 1941년 12월 7일(일본의 진주만 공격일)에 알프레드는 캘리포니아 출신의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그날은 공포에 휩싸인 날이었다. 다행히도 당시 내가 근무했던 미군 건물은 폭격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알프레드의 엄마로서 본토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주 명령은 하느님이 우리 가족에게 주신 선물이었던 셈이다. 신혼 생활에 첫 아이가 곧 태어날 알프레드의 가족과 함께 살게 되어 나는 무척 기뻤다.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봉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알프레드는 법대로 다시 진학했다. 아들 부부에게서 레슬리 로즈라는 건강한 딸이 태어났다. 알프레드는 이후 아들 마크가 태어난 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행복한 우리 가족에게 프랜시스라는 딸이 또 태어났다. 그때 우리는 몬터레이파크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아들 퍼시와 고아들을 마음속에 품으며 조국인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났지만 조국은 분단국가가 되었다. 내가 1954년 7월 21일에 부산에 있는 이사벨 고아원으로 떠나면서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재닛과 남편인 황 선생님이 그곳에서 200명의 고아들과 여자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40년 만에 내가 떠났던 그곳에 다시 도착했다. 나는 고아원을 찾아갔고 그 곳에서의 생활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서울 근교에 버디 홈이라는 아기들을 돌보는 곳이 신설되자 나는 그곳에서 아기들에게 먹일 우유를 준비하는 일을 돕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열 명의 간호사들이 아기들을 미국으로 입양되기 전까지 돌보고 있었다. 아기들의 대부분은 혼혈이었다. 나는 세 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8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지 2주 후인 1957년 11월 7일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났다. 손자 마크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으셨어요?"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이뿐이었다. "나도 너를 무척 그리워했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게 한국으로 돌아가 춥고 배고프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돌보라고 하시는구나." 내 손자 손녀들이 음식을 갖고 불평하는 것을 보면서 거리의 아이들이 떠올랐고 그것은 나에게 큰 근심이 되었다. 가난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과 대조적으로 풍요한 조건에서 자라나고 있는 나의 손자 손녀들이 조그만 것을 두고 불평하고 싸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1959년 1월 10일 오전 5시에 기도 중에 있던 나는 밖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느님 내가 한국에 가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나 선교 집단도 저에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너무 늙었고 교육도 받지 못해 선교사로 활동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하느님의 답이 들렸다. "왜 걱정하느냐? 그 일은 내 일이다. 가라. 내가 너를 보살필 것이고 너의 일을 도울 것이다. 내가 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해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약점과 강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를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가야 한다. 며칠 후 일라 기브스로부터 나의 파트너가 되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일라는 오랫동안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고 하루 14시간은 병석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보고서를 손수 타이프로 일일이 쳐서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보내고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매달 나에게 지원금을 보냈다. 나는 그렇게 얻은 돈으로 서울에서 집 없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 1959년부터 30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내게 기부금을 보냈다. 1959년 2월 300파운드의 헌 옷과 800달러의 현금을 가지고 나는 인디언이라는 이름의 배에 올랐다. 한국에 도착해 꽤 한참 동안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소년들이 살기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드디어 나는 가나안 농부학교의 설립자인 김영기 장로를 만나 그가 제공해준 장소를 찾았다. 김영기 장로는 교회를 짓고 있었는데 교회 근처에 하느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소년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급히 일라에게 내가 소지하고 있는 800달러에 추가로 400달러가 더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마리 수녀님이 나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줘서 800달러는 저축할 수 있었다. 그 후 18년 동안 일라는 나에게 그녀가 모금할 수 있는 돈을 매달 부쳐주었다. 5월에는 사람을 시켜 배추 고추 무 옥수수 오이 감자 수박 등을 심을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고 비옥한 땅에서 모든 작물들이 무럭무럭 잘 자랐다. 나는 텐트에 살면서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고 그들에게 진흙 집을 지어주었다. 대강 지은 집이었지만 거리에서 살던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집이었다. 24년 동안 50명의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나는 미국 시민권자라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어린 아들 남해성을 믿을 수 있는 일꾼으로 두고 도움을 받았다. 그의 이름으로 건물을 사서 가나안 학교를 기독교 기관으로 등록을 마쳤다. 1959년 12월 20일에 네 명의 소년들이 모여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성장했고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고 있다. 남해성이 거리에서 아이들을 더 데려왔고 우리는 김평 목사와 가족을 목사 사관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초빙했다. 김 목사님은 그곳에 사는 한편 자신의 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하면서 오전 6시와 오후 6시 우리를 위해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서 미국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를 한국어로 불렀다. 매일 성경을 가르쳤고 구절도 암송했다. 점차 아이들이 만월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다가 돈이 모이자 더 큰 집을 짓게 됐고 70명의 아이들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강당도 마련했다. 1965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아들 가족과 다시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3개월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면서 우리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지원해준 일라의 친구들과 친지들을 만났다.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4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캔자스주의 맨해튼에 살고 있는 프랜시스 태더셀을 만났던 때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천국이 이처럼 흥분되고 황홀할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는 고마움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프랜시스는 하녀로 일하며 한 달에 고작 61달러를 벌고 있었는데 50달러를 한국의 조니(이 세상을 떠난 그녀의 남편 이름)를 위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름답게 눈으로 덮인 로키산맥이 있는 콜로라도 주의 덴버와 글랜우드 스프링스로 떠났다. 3개월 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가나안 학교에는 배병철 담임 목사가 새로 부임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했고 이제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학교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중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1970년 3월 18일에 7학년 교실을 예배당에 열었고 정윤중학교라고 이름을 지어 근처의 가난한 아이들을 학생으로 받았다. 남해성이 교장이 되었고 자원봉사자들이 교사가 되어 7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일리노이 주 휘튼의 팀 선교회에서 온 리처드와 줄리아 한 선교사 부부가 학생들에게 학교 건물을 짓는 법을 가르쳤다. 진흙 벽돌을 태양에 말려 학생들이 운반했다. 어떤 학생들은 머리에 올리고 가슴에 받치거나 등 뒤에 올려 놓고 벽돌을 운반했다. 학생들이 즐겁게 노래하면서 열심히 진흙 벽돌을 운반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정말 행복했다. 하느님도 이것을 보시면 행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유일하게 중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였다. 1973년에 첫 번째 졸업생이 탄생했을 때 처음으로 세 개의 교실을 신축했다. 우리 학교의 신조는 잠언 1장 7절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이다"였다. 1974년 1월 일라의 심장이 급속히 쇠약해져 생명이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해 8월 일라의 딸이 더 이상 가망이 없더라도 로스앤젤레스의 한 의사가 수술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 학교의 전교생이 일라의 쾌유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 학교는 그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다. 정말로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주비 에트 박사가 그녀의 심장에 있는 세 개의 밸브를 두 개의 돼지 밸브와 한 개의 플라스틱 밸브로 교체하는데 성공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정리= 장병희 기자
2016.08.24. 20:40
사진신부 출신 송정윤은 1950년대 테레사 수녀처럼 단신으로 전쟁으로 폐허가 된 조국에 돌아갔다. 그녀는 40년 전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건너왔다가 다시 조국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전쟁으로 폐허간 된 조국에는 고아와 거지가 넘쳐났다. 그녀는 그들에게 음식과 쉼터를 제공하고, 교육을 시킨 거리의 천사가 되었다. 구제와 교육에 온전히 삶을 바친 송정윤의 이야기는 그의 회고록, 그리고 아들 알프레드 송과 손녀 레슬리 송의 이야기를 종합했다. 레슬리 송은 2012년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25년 만에 할머니의 양아들인 한남고등학교 박세원 교장과 만나기 위해 한국 땅을 밟았다. 할머니는 박 교장, 그리고 그 가족과 함께 오랫동안 살았다. 아마 박 교장이 나보다 할머니에게는 더 가까운 가족이었을 것이다. 박 교장은 할머니를 어머니로 불렀고 박 교장의 딸 미경은 할머니라고 불렀다. 박 교장은 나의 아버지를 '형'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할머니와 무척 가까웠다. 1943년부터 1957년까지 할머니가 캘리포니아 주에 있을 때 우리 가족과 함께 지냈다. 나는 2층 다락방에서 할머니와 함께 생활하고 함께 잤다. 할머니는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다. 성경책을 항상 읽었고 어느 날 나에게 "하느님의 말씀이 있었니?"라고 질문한 적이 있었다. 나는 할머니가 내게 한 이 질문의 의미를 나중에서야 할머니의 글을 읽으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할머니가 한국으로 돌아가서 35년 동안 80명의 고아들을 돌보고 수천 명의 학생들이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한 이유는 바로 하느님의 뜻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할머니가 하남 근처의 땅을 구입해 고아원을 설립할 때 우리는 편지를 주고 받았기 때문에 할머니가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지 조금은 알 수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할머니와 편지를 주고 받는 횟수가 뜸해졌다. 가끔 아버지로부터 할머니 소식을 들었고 아버지가 할머니를 방문해 찍은 사진을 볼 수 있었다. 방문한 학교에는 큰 예배당과 교실이 있었는데 40년이 넘은 교실 건물은 너무 낡아 보수가 필요해 보였다. 1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그 곳에서 공부하고, 놀고, 대화를 나누는 것을 보자 나 또한 그들을 도와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밤 10시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저녁도 학교 식당에서 먹었다. 한국에 대해 배우면 배울수록 나에게는 기적처럼 느껴졌고 특별하게 다가왔다. 세계 방방곡곡으로 흩어진 한국인들의 시작과 근본은 바로 이곳, 한국이었다. 한국처럼 지난 수십년 동안 엄청나게 발전한 나라가 있을까? 할머니도 바로 한국의 기적이 가능하도록 기여했던 것이다. 할머니는 한국 사람이었고, 보통 한국인들처럼 완고하고 고집스러운 분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아버지가 가나안 기독학교를 설립하고 비영리단체로 등록하도록 도움을 줄 수 있었던 것이고, 할머니 역시 기업의 기부금이나 기금 모금 없이 개인 독지가의 도움만으로 학교를 설립할 수 있었던 것이다. 1957년에 할머니는 기부받은 어린이 옷들을 가득 싣고 한국에 다시 돌아가 봉사 활동에 전념했다. 그동안 할머니는 미국을 몇 차례 방문했는데 1965년이 할머니의 마지막 방문이었다. 1991년 할머니는 양아들인 박 교장의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이같이 너의 빛이 사람 앞에 비치게 하여 그들로 너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 에 계신 너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태복음 5장 16절) 송정윤이 1991년 93세로 이 세상을 떠나기 전 남긴 24쪽의 회고록에 쓰여 있는 내용이다. 나는 1897년 대구에서 김정윤으로 태어났다. 5살 때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1914년 사진신부로 한국을 떠나면서 부산에서 아버지와 작별했는데, 그 후 아버지를 다시 보지 못했다. 당시 17세였던 나는 일본으로 가서 신체검사를 받고 배를 타고 태평양의 파도를 보며 앞으로의 미래에 대해 상상했다. 한번도 가본 적 없고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미지의 세계에서 나는 어떻게 될 것인가? 배를 타고 며칠을 갔을까. 드디어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해 이민국 직원의 질문에 대답하는 것으로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1914년 10월 21일 목사님의 성혼 선언과 함께 나는 송진구의 아내가 됐다. 그후 나의 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왔다. 새로운 의무가 많이 생겼고, 시부모님과 남편 형제들과 한집에서 생활했다. 1919년 2월 16일 맏아들 알프레드 호연이 출생했다. 그 아이가 걸음마를 하고, 말을 시작하고, 다른 아이들과 어울리며 놀만큼 자랐을 때, 동생 퍼시 호성이 1921년 6월 12일에 태어났다. 퍼시는 내가 임신 중 건강이 좋지 못해서인지 알프레드처럼 건강하지 못했다. 나는 자궁 절제 수술로 휴식이 필요해서 퍼시를 시골에 있는 시누이 집으로 데리고 갔다. 퍼시는 성장이 좀 더뎌 형보다 늦게 걷기 시작했다. 그는 성경 이야기를 좋아했고 어릴 때부터 성경을 잘 암송했다. 알프레드는 다섯살에 유치원에 입학했는데,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노는 것을 참 좋아했다. 그러나 퍼시는 성장이 더디어 여섯살에야 겨우 유치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알프레드와 퍼시는 일요일이면 호놀룰루 4가에 있는 감리교회에 나가 한국어를 열심히 배웠다. 퍼시는 한문도 배웠고, 프리츠 목사처럼 한국에서 목회를 하는 꿈을 키웠다. 집에서도 퍼시는 언제나 성경 구절을 가르쳐달라고 졸랐지만 알프레드는 학교나 교회에서 꼭 필요한 수업만 듣는 편이었다. 알프레드는 아이들과 어울려 놀고 밖에서 게임하는 것을 더 즐겼다. 두 아들 모두 학교에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다. 특히 알프레드는 우등생이었다. 퍼시가 9학년 때 그 아이는 마태복음 6장 19~21절을 항상 명심하며 지냈다. "너를 위해 보물을 쌓아두지 말라. 그것은 없어질 수도 있고 누가 훔쳐 갈 수도 있다. 천국에 보관하면 보물은 영원히 빛날 것이며 누가 훔쳐 갈 수 도 없다. 보물이 천국에 있다면 네 마음도 그곳에 있을 것이다." 나와 친구들은 퍼시가 어린 마음에도 하느님 말씀을 유념하고 지낸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하느님이 퍼시에게 통찰력과 영원한 생명을 주시려던 것 같다. 아마도 퍼시를 갑자기 데려가시기 위해 미리 준비하셨던 것이 아닐까. 어느 더운 여름 퍼시가 맨발로 다니다가 날카로운 것에 발을 찔렸는데 그만 파상풍에 걸리고 말았다. 당시 파상풍은 치료하기 힘든 병이었다. 그 아이가 세상에서 마지막으로 내게 남긴 말은, "엄마 걱정하지 마. 나는 이겨낼 거야"였다. 그리고 1934년 12월 8일 숨을 거두었다. 퍼시가 세상을 떠난 후 2주 동안 나는 그 아이의 병을 고치기 위해 뭔가 더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후회하고 고민했다. 드디어 나는 고민의 답에 도달했다. 퍼시가 원했던 것처럼 내가 한국으로 돌아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다. 나는 마음의 평화를 되찾았다. 내 모든 순간은 하느님을 섬기는 노래로 가득했다. 문득 퍼시가 학교에서 가난한 아이들에게 돈을 줬던 것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하느님이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시는 것과 비슷하게 행동했다. 퍼시는 친구가 없는 아이들과 항상 함께 놀아주었으며, 사랑이 필요한 아이들을 찾아 그들의 친구가 되어주었다. 가족들은 퍼시 때문에 더 이상 울지 않는 나를 보고 다행스럽게 생각했다. 나의 마음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하느님을 섬기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나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 다음 해 알프레드가 고등학교를 졸업하며 대학 진학을 결정했다. 그러나 남편은 트럭 운전사로 일했기 때문에 아들의 대학 학비를 부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알프레드의 학비를 벌기 위해 나는 가정부로 취직했고 알프레드도 나와 함께 그 집에서 생활했다. 2년 동안 알프레드는 시립 도서관에서 일했다. 알프레드는 하와이 대학교에서 2년을 공부하고 남가주대학교(USC)로 전학했다. 남가주대학교는 사립대학으로 학비가 매우 비쌌다. 그런 비싼 대학을 어떻 게 다닐 수 있을까? 그날 밤 나는 무릎을 끓고 하느님께 기도를 드렸고, "염려 말라"라는 음성을 들었다. 그것은 하느님이 내게 하시는 말씀이었다. "걱정하지 말라." 그 다음 일요일 나는 친구들에게 알프레드가 남가주대학교로 전학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했는데, 친구들이 내 주머니에 돈을 찔러넣기 시작했다.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집에 와서 돈을 세어보았다. 알프레드와 내가 본토까지 갈 수 있는 뱃삯과 첫 학기 학비까지 낼 수 있는 금액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하느님이 알프레드가 본토의 남가주대학교에서 공부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주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정리= 장병희 기자
2016.08.17. 22:04
수전 조국의 독립을 위해 가족이 희생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아니고 어머니가 엄청난 희생을 했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선택했다. 외할아버지는 아버지의 스승이었는데 아버지 안창호를 '좋은 친구이지만 부자로 못 살 사람'이라고 소개하면서 두 분이 만나게 되었다. 어머니는 18세에 아버지와 결혼했고 1902년에 함께 미국으로 오게 되었다. 3년 후 오빠 필립이 로스앤젤레스 병원에서 태어났다. 그때 우리 가족은 리버사이드의 파차파 캠프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1912년에 필슨 오빠가 리버사이드에서 출생했고 나는 1915년 수라는 1917년 그리고 랠프는 1926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태어났다. 우리는 아버지가 설립한 흥사단 건물 뒤에서 살았다. 로스앤젤레스에 오는 대부분의 한인들이 우리 집을 거쳐갔고 엄마는 그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면 항상 많은 사람들이 왕래했는데 어머니는 가난한 살림에도 그들에게 어떻게든 식사를 제공했다. 밥과 김치는 항상 있었고 우리에게 유대인 상점에서 생선을 사오라고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아버지는 시간이 되면 우리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인자했지만 어머니는 엄격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에게 감정을 표현하는 것을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서로 존경했기 때문일 것이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겨우 13년만 함께 사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생활력이 아주 강한 여성이었다. 집 정원에 많은 야채들을 심어 우리가 먹을 수 있게 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서울 근교에서 옥수수와 호박을 심은 조그만 밭을 보았는데 어머니가 집앞 텃밭에서 심었던 것과 흡사했다. 아버지는 조경을 무척 좋아했는데 돌 자갈 그리고 나무들을 조합해 정말 아름다운 정원을 만들었다. 아버지가 장미를 심고 어머니는 그 옆에 옥수수를 심었다. 아버지가 아름다운 정원을 가꾸는 것을 좋아했다면 어머니는 우리 가족이 굶지 않도록 항상 먹을 것을 준비하는 것에 신경을 썼다. 아버지는 항상 자기보다는 남을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가정적이었으며 온갖 집안 일을 도맡았을 뿐만 아니라 생업을 위해 잡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우리는 로스앤젤레스 최초의 한인 가정이었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한국어를 사용했다. 우리가 어릴 때 어머니는 병원에서 일했다. 아주 더럽고 힘들고 고된 노동이었지만 어머니는 견뎠다. 어머니는 다른 사람과 소통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를 구사할 수 있어서 병원 근무에 별문제는 없었다. 어머니가 가정부로 일할 때도 백인 가족들은 어머니를 미시즈 안이라고 불렀다. 말도 별로 없고 조그만 체구의 어머니였지만 그녀를 존경한 것이었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웅대한 목표를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신여성이었다. 그 당시 남자들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했던 반면 여자들은 집을 떠나 대학에 갈 수 없었다. 내가 장학금을 받고 샌디에이고 주립 대학교에 진학할 때 어머니는 말리지 않으셨다. 우리에게 어머니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했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한국인들을 계몽해 조국의 독립을 쟁취하고 좋은 나라를 건국하는 데 기여한다는 웅대한 목표를 품고 있는 것을 알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보내는 편지에 "감옥 생활은 힘들지만 그래도 나는 한국 땅에 있다"라고 썼다. 1938년 어머니가 랠프와 함께 서대문 형무소를 방 문했을 때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직전 창문을 열어달라 하면서 마지막으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조국의 땅을 보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글을 가르쳤기 때문에 어머니는 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 그러나 당시 대부분의 여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어머니는 여성들이 남자들을 돕는 역할을 한다고 인정했지만 그렇다고 결코 자신이 열등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목적은 자신의 남편을 돕는 것이었고 남편의 소장품을 소중히 간직했다. 리버사이드에서 로스앤젤레스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와 기타 지역으로 이사 다닐 때 어머니는 아버지의 소장품을 하나도 버리지 않았다. 어머니를 포함해 그 시대 사진신부 등 여성 선구자들은 아주 강했기 때문에 미국까지 올 수 있었다. 용기가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노동자로 미국에 온 한국 남성들보다 교육받은 사진신부들이 더 총명했다. 내 세대 한국 여성들은 어머니로부터 배우고 그 유산을 물려받은 덕분에 성공할 수 있었다. 당시 한인 인구가 너무 적었기 때문에 우리는 한곳에 모여서 살지 못했다. 우리는 나라를 빼앗겼기 때문에 미국에 와서 살게 된 것이고 우리의 부모들은 모두 조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한국 사람이 아니었다. 수전도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수전=나 역시 한국의 독립운동에 참여할 방법이 있다고 생각했고 미국을 위해 싸우는 것이 옳다고 믿었다. 그 당시 미 해군에 동양인이 입대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내가 처음 미 해군에 자원했을 때 나의 입대는 허락되지 않았다. 미군이 한국을 전혀 몰랐기 때문이었는데 몇 달 후 내가 입대할 수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해군 모병소에 가서 입대 신청을 마치고 나는 미 해군 최초의 아시안 아메리칸 여성이 되었다. 1943년에 내가 한국인으로 한국어를 할 줄 알고 조금 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군대에서는 나를 워싱턴 DC에 있는 정보국에 발령했다. 내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첫딸을 얻었다며 무척 귀여워했고 특별히 보살폈다. 아버지는 우리에게 자상했고 훌륭하게 잘 성장하는 것에 항상 관심을 두었다. 아버지가 1926년에 떠나면서 장남인 오빠 필립에게 "나는 하느님께 죄를 짓는구나. 우리 가족에 대한 책임을 너에게 맡기고 떠난다"라고 말했다. 아버지는 항상 정직하고 거짓말을 하지 말라고 강조했고 각자가 좋은 사람이 될 것을 가르쳤다. 아버지는 한국이 좋은 국가가 되려면 중국 외에는 문호를 닫았던 쇄국정책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아버지는 철학자 교육자 그리고 혁신주의자였다. 집에서 우리와 게임을 같이 하면서 자신 스스로 책임을 지면 좋은 국가를 얻을 것이고 훌륭한 시민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1960년대 이후 미국에 온 한인 이민자들과는 달리 초기 한인들은 아무것도 없이 혈혈단신 미국에 건너왔다. 교육도 받지 못했고 하와이 사탕수수 농 장에서 막노동을 했다. 아버지는 그들에게 자신 스스로를 알고 누구를 위해 싸워야 하는지를 가르쳤다. 아버지는 훌륭한 시민이 되는 법에 대해 글을 많 이 썼다. 그는 "미국에서 산다면 미국에서 훌륭한 사람이 되어라"라고 강조했다. 한국의 독립은 교육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흥사단을 창립 한 것이다. 흥사단은 아직까지 미주 한인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유일한 단체다. 다른 모든 단체는 없어졌다. 특히 한국에서 흥사단은 매우 활발한 활 동을 전개하고 있다. 우리가 두번째 살았던 집은 현재 남가주대학교(USC)에서 활용하고 있다. 우리 가족은 1935년부터 1947년까지 거기에 살았다. 그 집에서 어머니와 우리는 아버지가 감옥에서 석방되어 살아서 돌아오길 학수고대했다. 어머니는 1938년 3월 10일에 형무소 병원에서 아버지가 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는 3월 8일에 아버지에게 편지를 썼는데 보내지는 못했다. 3월 10일에 전화가 걸려왔을 때 불길한 예감을 느꼈던 어머니는 울 면서 "돌아가셨다"라고 외쳤다. 내 딸이 하버드 대학교에 진학했을 때 한국학을 전공한 와그너 박사의 강의를 들은 후 와그너 박사에게 "안창호를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는가"라고 질 문을 던졌다. 와그너 교수는 "한국 최고의 지도자다. 만약 그가 1945년까지 생존했다면 한국이 분단국가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와그너 박사는 내 딸이 안창호의 외손녀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랠프=1963년에 한국에 갔을 때 박정희 대통령이 어머니와 나를 점심에 초대했다. 박 대통령도 "아버지가 생존해 계셨다면 오늘날 한국은 통일국가가 됐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때 나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으나 이제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 나는 북한이 고향인 사촌 누나를 방문했는데 그녀는 김구 선생이 북한에 와서 김일성을 만나 통일 한국에 대해 의논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김구 선생이 아버지의 옛집을 찾았는데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감정이 복받쳐 식사도 하지 못한 채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가 한국을 한 달 동안 방문했을 때 어머니의 나이는 85세였다. 그런데 어머니는 아무런 감정도 표출하지 않았다. 무표정에 말도 없었다. 1969년 어머니는 로스앤젤레스에서 이 세상을 떠났다. 1973년 안헬렌 여사는 남편 안창호 옆에 묘소가 마련되어 도산 묘지에 묻혔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2016.08.10. 22:44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걸쳐 위기를 맞은 한국에서 국경과 인종 그리고 시대를 초월한 위대한 지도자가 탄생했다. 도산 안창호에게 애국자 또는 독립운동가라는 호칭들은 그를 설명하기에 너무나 부족한 수식어이다. 안창호는 분열된 한인사회를 통합하는 기적을 이루어낸 지도자였으며, 한국의 독립과 민주화 그리고 해외로 떠난 한국인들을 위해 평생을 싸우다 간 선지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산 안창호는 유교시대에 태어나 자랐으면서도 혁명가, 노조 조직책, 그리고 사회 통합가로서 활동했을 뿐 아니라, 미국식 민주주의 그리고 평등주의를 꿈꾸며 몸소 실천에 옮긴 지도자로 평가할 수 있다. 1938년 일제에 항거하다 서대문 형무소에서 순국한 도산 안창호가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대립이 첨예하던 시기에 이미 통일 한국의 꿈을 꾸고 있었다는 사실은 70년이 흐른 지금 더욱 절실하게 느껴진다. 도산은 평양에서 스승의 딸 안헬렌(이혜련)과 결혼 후 망명 생활 동안 다섯 자녀를 뒀다. 나는 도산에 대한 책도 읽고 명성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그에 대해 자세히 알지는 못했다. 김그레이스가 나에게 선구자인 도산에 대한 심층 취재를 권유했는데 일단 미 전역에 퍼져 생존해있는 도산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들을 먼저 찾아가 만나보기로 했다. 안헬렌의 생애 안창호의 자녀들과 손자, 손녀의 증언을 통해 안헬렌 여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여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세상 밖으로 잘 드러나지 않은 그녀의 생애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한 남편 안창호를 내조하고 돌보는 데 바쳐졌던 것으로 보인다. 도산 안창호는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이 한 번도 보지 못한 조국, 한국과 결혼했다고 해도 결코 과언이 아니었다. 도산이 조국 독립을 위해 하와이, 중국, 러시아, 유럽, 그리고 멕시코 등 해외로 다닐 때 안헬렌 여사는 농장 노동, 가사 노동, 청과상, 봉제공 등의 막노동을 하면서 남겨진 가족들과 남편을 돌봤다. 안 여사도 조국의 독립을 염원했기에, 도산 안창호의 정신적 동반자이자 후원자로서 도산 못지 않게 큰 역할을 해냈다. 그녀는 또한 리버사이드와 로스앤젤레스 자신의 집에서 가난한 한인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며 그들을 돌봤다. 안 여사가 세상을 떠난 지 20년이 지난 1980년 당시, 72세의 백발 노인이 된 장녀 수전 안을 통해 어머니인 안 여사의 생애를 조명해볼 수 있었다. 안수전 여사는 1942년 미 해군에 입대한 최초의 한인, 그리고 아시안 여성으로서 이민사를 장식한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 후 그녀는 미 해군 역사상 최초의 여성 포병장교로 임관했으며, 2차 세계대전 중 일본과의 전쟁에서 정보장교로 활약하기도 했다. 도산 안창호의 막내 아들 랠프도 함께 인터뷰에 참여해 그의 기억을 함께 나눴다. 랠프는 교사에서 은퇴한 후 누나 수전, 수라와 함께 문게이트 식당을 운영했다. 문게이트 식당은 로스앤젤레스 근교에서 장남 필립이 운영하던 곳으로 필립은 그 지역의 명예시장 역할을 오랫동안 맡았으며 최초의 아시안 아메리칸 영화배우로서 명성을 날렸다. 안필립은 1974년에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 다음은 수전과 랠프가 돌이켜본 엄마 안헬렌 여사에 대한 기억이다 ▶수전 어머니는 이 세상에서 가장 강한 여성이었다. 어머니의 희생 없이 결코 아버지는 조국 독립을 위해 세계 곳곳을 다니며 활동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자신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마음대로 활동할 수 있도록 조용히 뒤에서 도와주고 후견인 역할을 했다. 어머니는 한 번도 불평하신 적이 없다. 아버지가 감옥에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듣고 어머니가 처음으로 눈물을 흘리는 것을 봤다. 어머니는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강한 여성이었다. ▶랠프 아버지는 내가 태어나기 직전 1926년 집을 떠났는데 영원히 돌아오지 못했다. 나는 한 번도 아버지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내가 태어났을 때 어머니는 41세였다. 내가 처음으로 어머니에게 아버지에 대해 물어본 것이 언제인지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겠다. 다만 어머니는 아버지의 활동에 대해 내게 설명해 주곤 했다. 아버지는 단 한 푼도 집으로 송금하지 않았다. 자신도 가난했기 때문에 송금할 돈이 없었다. 우리는 다 함께 절약하며 가난을 이겨내야 했다. 어 머니는 가정부로 일하면서도 아버지에게 돈을 부치곤 했다. 어떻게 어머니가 그렇게 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저자 -이경원: 주류언론에서 지난 40년 동안 기자활동을 했으며 미주 한인사회의 영문신문인 ‘코리아타운 위클리’와 ‘코리아 타임’지 발행인과 편집인으로 활동했다. 1997년 버지니아에 위치한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유일한 아시안 저널리스트로 헌액됐다. 미주 한인언론인협회 창립을 주도했으며 UCLA에서 언론학을 강의했다. -고 김익창: UC데이비스 의대에서 교수로 재직하다가 은퇴했다. 미주한인정신과의사협회를 창설했으며 아시안 아메리칸 정신과의사협회의 기관지 편집장을 역임했다. -김그레이스: 한국과 미국에서 38년간 교직생활을 하고 은퇴했다. 서울 교육대학을 졸업했으며 캘폴리 샌루이스 오비스포에서 카운슬링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옮긴이 UC리버사이드 대학교 교수이며 대학 부설 김영옥 재미동포연구소 소장이다. UC버클리에서 한흑갈등 연구(New Urban Crisis: Korean-Black Conflict in Los Angeles)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저서로 ‘미국의 흑인 그들은 누구인가’, ‘대한민국 하늘을 열다’, ‘아시안 아메리칸’ 등이 있으며 LA폭동 전문가로 미국과 한국 주요 대학에서 초청 강연을 했다. SAT한국어 채택에 기여한 공로로 1995년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훈민정음 반포 549돌을 맞이하여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2016.08.03. 22:45
중앙일보가 초창기 이민사 인물들을 소개하는 기획 시리즈를 시작합니다. 이민선조의 생애와 업적을 기록한 '외로운 여정'(고려대학교 출판문화원) 출판에 맞춰 기획된 이번 시리즈는 사회 각분야의 인물을 통해 하와이에서 유카탄, 쿠바까지의 이민사를 조명합니다. 영문판은 아시안 저널리스트 최초로 언론인 명예의 전당에 오른 이경원 기자와 고 김익창 박사(UC데이비스 의대교수), 김그레이스 교사 공저이며 한글번역은 UC리버사이드 장태한 교수가 맡았습니다. 출판 비용은 밝은미래재단(회장 홍명기)이 후원했습니다. 이민선조들의 생생한 육성 기록과 각종 자료를 통해 이민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이번 시리즈는 깊은 감동과 함께 읽는 재미를 선사할 것입니다. 특히 1.5세와 2세들에게는 자랑스러운 한인이민사의 발자취를 알려 정체성을 확립하는 계기도 될 수 있습니다. 시리즈는 매주 목요일 미주판 지면에 연재됩니다.
2016.08.03. 2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