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망에 대해서 논한 철학자는 우선 스피노자를 꼽을 수 있다. 그는 유대계 네덜란드인이었다. 그는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라고 했다. 욕망 중에서도 감정이 아닌 이성에 의해 발생하는 욕망으로 인간은 발전한다고 했다. 이러한 그의 사상을 쇼펜하우어가 물려받는다. 그는 자기의 저서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에서 표상은 칸트의 관념론을 채용하나 의지는 사람이 하고자 하는 의욕으로서 욕망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러한 욕망이 있어야 내실 있는 인간으로 발전한다고 했다. 그도 스피노자처럼 인간의 본질은 욕망이라고 했다. 이러한 욕망을 추구한 또 다른 철학자는 니체다. 니체는 기존에 존재하는 형이상학적 철학을 모두 망치로 깨부숴야 한다고까지 말했다. 그런데 자크 데리다는 해체만 시키자고 했다. 가령, 액자와 예술작품을 보고 있으면 액자는 겉 장식이요, 예술작품은 액자 속에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경계를 허물어 버린다. 마치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처럼 예술작품을 바라보았다. 가령, 강가에 배가 떠 있고, 빛은 강물에 반사되는 그림 속에서 무엇이 본질이고, 무엇이 주변인지 모르는 모네 같은 작가의 그림처럼 모든 경계를 허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그를 해체의 철학자라고 한다. 니체는 인간은 욕망이 있어야 에너지를 얻고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이것을 위버멘쉬(초인사상)라고 한다. 이것은 건강한 욕망이므로 이것을 키워야 신 같은 존재에게 손을 벌리는 나약한 존재들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즉, 신은 죽었다고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교회는 이러한 나약한 인간의 약점을 파고들어서 선과 악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인간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고, 신을 우상화하는 저질 세계라고 비판했다. 이러한 것을 탈피하지 못하면 나약한 인간으로 살 수밖에 없다고 했다.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의심할 바 없이 존재한다"라고 했는데 자크 라캉은 "나는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생각하고, 생각할 수 없는 곳에 존재한다"라고 주장한다. 즉, 나는 어디서 생각하는지도 모르겠고, 그러므로 나란 존재가 어디에 존재하는지도 모르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나란 존재는 허깨비인가? 실제로 이제껏 삶이 내가 원해서 산 적이 있는가? 사회라는 규칙과 규범이라는 짜인 틀 속에서 산 것뿐이다. 즉, 내가 산 것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대신 살아 준 것이다. 자크 라캉이 말한 "나의 욕망은 곧 타인의 욕망"이라는 주장과 맥을 함께한다.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의지는 곧 욕망이며 이런 욕망 때문에 인간이 무너질 수도 있다고 했다. 욕망이란 결코 채울 수 없는 결핍을 낳거나 한순간 채워져도 권태가 생겨서 또 다른 욕심이 생긴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은 이런 욕심이 있기에 문명과 문화를 발전시키는 힘과 에너지를 만든다고도 했다. 즉, 욕망은 나쁜 면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욕심과 욕망을 제거하는 방법은 마음수련을 하라는 것이다. 가령, 불교의 깨우침은 결국 욕심과 분노, 어리석음을 이겨내고, 자아는 없고, 제행무상과 제법무아를 깨달아야 열반에 들 수 있으니 마음 수련을 하라고 말한다. 쇼펜하우어는 흥미롭게도 불교나 우파니샤드에 매료된 사람이었다. 아인슈타인, 톨스토이, 바그너 등이 쇼펜하우어의 열렬한 독자들이었다. 후에 니체도 추종자가 된다. 소위 의지를 주장하는 철학자들이 그를 따랐다.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무의식의 영역이다. 본질을 탐구하는 것은 불교의 깨우침과도 긴밀하고, 현상학의 분야이기도 하다. 이러한 인간 정신세계를 파고들어야 암묵적 지식의 세계로도 접근할 수 있다. 박검진 단국대 전자공학과 졸업. 한국기술교육대에서 기술경영학(MOT)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LG반도체 특허협상팀 팀장,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차장, 호서대 특허관리어드바이저, 한국기술교육대 산학협력단 교수를 거쳐 현재 콜라보기술경영연구소 대표.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욕망 발전 욕망 때문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인간 정신세계
2025.05.19. 18:50
대학교에 입학한 이후로 25년 동안, 나는 악기를 쉬지 않고 연주해왔다. 친구들과 밴드가 하고 싶어 집에 있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떼쓰듯이 팔고는 싸구려 중고 알토 색소폰을 하나 샀다. 그리고 학교에 있는 ‘윈드 오케스트라(현악기가 없이 관악기만으로 이루어진 오케스트라)’에 입단했다. 어쩌다 보니 군악대를 다녀오고, 여러 오케스트라와 밴드를 전전하며 매순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지금까지 악기를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다. 오리건에 올라오기 전 LA에서는 샌타모니카를 비롯한 여러 파머스 마켓에서 내 연주가 울려 퍼지기도 했다. 지금 이 동네에서도 포틀랜드에서 꽤 이름 있는 재즈 오케스트라의 단원으로 앉아있다. 물론 이런 구력이 나의 실력을 포장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지금까지 꾸준히 해온 것만큼은 자신 있게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체계적인 정규교육을 받지 않은 채 길거리 악사로 살아온 나는, 어디를 가든 내 실력을 증명해와야 했다. 1세대 이민자라 영어가 부족했고, 음악 쪽 인맥도 없다 보니, 오디션과 잼 세션(jam session·즉흥 협주)에서 어떻게든 내 실력을 보여야 했다. 특히 잼 세션에서는, 서로 얼굴도 모르는 뮤지션들이 무대에 올라 즉석에서 몇 곡을 정해 연주해야 했는데, 당연히 그런 자리의 즉흥 연주는 늘 공격적일 수밖에 없었고, 뒤따르는 피로감도 적지 않았다. 어느 날은 내가 마지막 프레이즈를 끝내기도 전에 다음 주자가 내 연주를 끊어버린 적도 있었고, 일부러 궁합이 맞지 않는 곡을 던져주는 일도 많았다. 웃자고 하는 얘기지만, 잼 세션 초대를 받을 때는 “악기를 가져와라” 대신 “Bring your axe(도끼를 가져와라)”라는 메시지를 받는다. 그런 경험들 때문인지, 몇 년 전부터는 잼 세션에 나가지 않게 되었다. 뉴욕에는 진푸름이라는 걸출한 알토 색소포니스트가 있다. 대한민국 사람 중 알토를 가장 잘 부는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단연 그녀를 선택할 것이다. 이번에 그녀가 신보를 냈다기에, 10장 정도 받아서 한국을 방문할 때마다 클럽마다 시디를 비치해뒀다. 그러던 중, 금호동의 작은 클럽 ‘올레오’를 방문하게 되었다. 여기서는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 5일 동안, 정규 공연 없이 오직 잼 세션만 운영하고 있었다. 일본의 오래된 재즈 클럽 ‘인트로’ 정도나 이런 실험적인 운영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한국에도 이런 형태의 공간이 생겼다는 게 신선하고 반가웠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랴.’ 나는 다시 도끼를 꺼내들고 잼 세션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첫 방문 때, 얼굴이 시뻘게질 정도로 박자를 놓쳤다. 그놈의 미련이 또 몸 밖으로 튀어나와, 두 번, 세 번, 계속해서 올레오에 들락날락했다. 그러던 와중 어제는 참 반가운 소식을 들었다. 올레오의 잼 세션에서 호스팅하던 드러머에게서 함께 연주해보지 않겠느냐는 제안을 받은 것이다. 부끄러움과 고마움의 감정이 동시에 들었다. 아직도 나는 그 친구들에 비하면 한참 실력이 부족한데, 나를 써주겠다고 한 드러머와 클럽사장의 마음이 갸륵했다. 그렇게 바라던 한가지 일이 이루어졌는데 마침 나에게 온 다음 감정은 더 잘하고 싶은 마음 한편에 부담스러움이었다. 갑자기 뒤를 돌아보고 나에게 되묻는다. 이 정도까지 했으면, 이제 잠깐 멈춰서도 되지 않을까. 이삼십대의 나라면 앞만 보고 달렸겠지만, 마흔이 되어 돌아보니, 이제는 무엇을 더 가지려는가, 또 무엇을 놓아야 하는가를 고민하게 된다. 홀로 악기와 함께 있던 시절은 이제 멀리 있다. 지금은 내가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고, 새로운 페이지를 열어가는 일은 결코 가볍지가 않다. “욕망의 주머니가 한번 채워지면 비워낼 줄도 알아야 한다.” 어느 친구가 했던 이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돈 한 푼 벌리지 않는 악기를 열심히 불고 있을 때, 집에서 엄마와 단둘이 놀고 있을 아들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린다.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는다면, 한 시간이라도 아이와 더 함께 있어야 하지 않을까. 아니면, 맛있는 것 하나라도 더 먹일 수 있는 돈을 버는 게 맞지 않을까. 포기가 아름답진 않을 수 있다. 하지만 삶의 갈림길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선택이라면, 그 또한 하나의 삶으로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지 않을까. 이유건 / 회계사오리건 살이 주머니 욕망 재즈 오케스트라 윈드 오케스트라 즉흥 연주
2025.05.06. 18:40
싯다르타는 작은 나라의 왕자로 태어났다. 싯다르타가 태어날 때, 점괘는 인도를 통일시키는 위대한 왕이 되거나 위대한 종교인으로 나왔다고 한다. 그 점괘를 본 왕은 싯다르타에게 좋은 것만 보여주고 늙고, 병들고, 죽는 모습을 절대로 보여주지 않았다고 한다. 그가 젊은이가 되었을 때, 말을 타고 성안을 둘러보면서 처음으로 늙은 사람과 병든 사람 그리고 시체를 보고는 자신도 그렇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시름에 빠졌다.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을 뒤로하고 출가(出家)를 결심한다. 그의 아들은 나후라였는데 홋날 붓다를 따라 머리를 깎고 수행에 정진하여 붓다의 제자가 되고, 아라한(깨우친 자)이 된다. 아비인 붓다가 물려준 유산은 보물도 다른 재물도 아닌 정신수양을 일깨운 것이었다. 붓다는 마음의 평화와 안정이 인간 속세의 생로병사를 이겨내는 수단으로 깨달음을 얻도록 중생들을 교화시켰다. 붓다는 6년간의 고행을 통하여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제행무상이라 흘러가고, 마음이 여여한 무심의 상태에서 우리는 늘 현실을 주시하고 있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싯다르타는 인생은 결국 고난의 연속이므로 그 역경 속에서도, 명상을 통하여 무소유의 맑은 정신을 가지라는 것이었다. 결국, 기독교는 사랑과 봉사를 베풀어서 천국에서 영원히 사는 영생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불교는 명상을 통하여 마음의 온갖 욕망과 잡념을 없애고, 무소유로 되면 윤회하지 않고 해탈하고, 열반에 들어서는 것을 최선으로 본다. 이것은 불생(不生)을 의미한다. 즉, 진여(眞如)의 상태다. 진여는 늘 그 자리에 존재하는 것으로 갑자기 생긴 것이 아님을 뜻한다. 불교는 공자의 유교나 노자의 도가와 비슷한 시기에 전파된 종교다. 불교는 고통으로부터 중생을 구제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마음속의 번뇌를 털어버릴 것을 요구한다. 번뇌는 욕심과 그릇된 사랑으로부터 발생하니,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기에 욕심이 없을 수가 없으니 수양으로 극복하길 교화한다. 불교에서는 인(因)과 연(緣)을 중시한다. '인'이 직접원인이라면 '연'은 간접원인이다. 가령, 사람이 늙고 죽는 것은 태어났기 때문인데, 부모가 직접원인이라면, 그 부모는 또 다른 이유로 서로 맺어졌으니 결국, 우주만물은 상호연결되어서 서로 의지하는 관계로 된다는 것이다. 즉, 유위(有爲)라는 것은 인간의 의지로 만든 사물이나 존재물이기 때문에 모두 인연의 구속을 당한다. 신이 있어서 우주와 만물이 생성된 것이 아니라 인연으로 생성되었다고 교화한다. 그러므로 인간 모두는 원래 부처이며, 누구나 부처로 돌아갈 수 있고, 고통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사서 중의 하나인 중용에서는 하느님의 마음이 곧 사람의 마음과 만물의 마음이라고 주장하므로 우주 만물은 하나라고 교화한다. 단, 욕심을 버려야만 된다는 단서를 단다. 형식만 다르지, 내용은 별반 차이가 없다. 누구나 부처가 될 수 있고, 하느님의 얼굴을 가질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서로 다른 성인들이 비슷한 깨달음을 얻었으니 신기할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이들보다는 시기적으로 약간 뒤의 성인이나 도덕적으로 정직하게 살라는 교훈을 주었고, 그의 제자였던 디오게네스는 견유학파(犬儒學派)를 이루었는데 개처럼 욕심 없이 지금 순간을 즐기고,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행동으로 보였다. 사람은 욕심이 많아서 재물이나 식량을 비축하려 하나 개나 돼지 같은 동물들은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면, 인간처럼 비축하지 않은 차이점을 말하는 것이다. 그는 개들처럼 밖에서 잠을 잤고 걸식도 했다. 그러나 절대로 욕심을 부리지 않는 절제된 자유를 누렸다. 종교철학이든 일반철학 사상이든 한결같이 요구하는 것은 욕심을 버리라는 것이다. 박검진 단국대 전자공학과 졸업. 한국기술교육대에서 기술경영학(MOT)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LG반도체 특허협상팀 팀장,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차장, 호서대 특허관리어드바이저, 한국기술교육대 산학협력단 교수를 거쳐 현재 콜라보기술경영연구소 대표.박검진의 종교·철학 여행 무소유 욕망 하이닉스반도체 특허분석팀 아비인 붓다 우주 만물
2025.02.17. 19:43
누군가 찾아와 푸념을 쏟아내던 중 내게 묻는다. 스님은 외롭지 않나요? 라고. 듣는 찰나에 씁쓸한 엷은 웃음이 미간으로 퍼진다. ‘뭐 이런 질문을 하지? 외롭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다고!’ 아무래도 출가자는 외로운 사람일 거라는 선입견이 작용한 것 같다. 그래서 답을 하기 전에 물음을 되돌려준다. 당신은 외롭지 않으냐고. 그랬더니 맨날 외롭단다. 바람 소리만 들어도 춥고 옆구리가 시려 오고, 해가 바뀌는 무렵이 되면 더 외롭고 쓸쓸하다면서 자신의 정리되지 못한 감정들을 하소연한다. 사실 이런 얘기는 그 누구와도 오래 하고 싶지 않다.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여름날에도 오한 들 듯 싸늘한 마음을 다지는 게 수행자의 삶이다. 그런데, 굳이 이런 속내까지 드러내면서 상대를 위로해야 하는 게 싫을 때도 있다. 왠지 가련한 나의 생애라도 내놓고 파는 듯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어쨌든 춥다는 생각은 외로움을 부른다. 그 외로움은 불청객 감기를 불러오고, 감기는 몸을 아프게 하며, 몸이 아프면 다시 혼자라는 생각에 빠져 외로워지게 한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우리 삶에서 이런 식으로 이어지는 것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러니 자신이 일으키는 한 생각이 얼마나 중요한지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모든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지만, 누구라도 자신이 처한 현실보다 나은 삶을 추구하려는 마음은 대개 비슷할 것이다. 그것이 정신적이든, 물질적이든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있기에 그러하다. 더욱이 새해 새날이 되면 그런 생각이 더 간절해지기도 할 테니, 길을 모색하려면 몸도 마음도 잘 추슬러야 한다. 특히 외로움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들을 더 두렵게 하고, 새롭게 솟아날 용기를 가로막는다. 때문에, 서둘러 내려놓지 않으면 정작 가야 할 길을 보이지 않게 만든다. 고향 집을 떠나올 때, 어머니가 남긴 마지막 말씀이 생각난다. “힘들면 언제든 돌아와.” 이별의 순간이었지만 가슴 깊이 간직해야겠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하지만 많은 시간이 지난 후 비로소 어머니의 말씀이 귀에 와 닿는 순간, 그대로 박혀버려서 지금껏 빼낼 수 없게 되어 버렸다. 그 말씀 덕분에 살면서 언제든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의 위안이 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한편으론 외롭고 힘들 때마다 더 크게 내 마음을 흔들어 놓기도 했다. 기댈 곳이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각각 장단점이 있기는 매한가지인 듯하다. 사람들의 생각과는 달리, 출가의 길은 건조해진 마음을 유연하게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하지만 원하는 것을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제약과 금기가 많아서 한시라도 몸가짐이 흐트러지면 안 되기 때문에 고단한 삶에 가깝다. 마음가짐은 곧 몸가짐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인생에서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 하고, 가지고 싶다고 다 갖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간절하게 원하는 것들도 마음 한 번 내려놓고 나면 사라지게 마련인 것을. 우리나라에 깊은 애정을 보여주었던 세계적인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인 사카모토 류이치가 2023년 봄 아름답게 생을 마감하였다. 특히 인생 후반부에 접어들 무렵부터는 불교의 ‘공(空)’ 사상을 음악으로 표현하고자 심혈을 기울이기도 했다. 나의 고단했던 유학 생활에서 그나마 마음이 각박해지지 않았던 건 그의 음악 덕분이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지난해 초여름 출간된 그의 유작 저서 .나는 앞으로 몇 번의 보름달을 볼 수 있을까.를 읽고 있노라면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여느 보통 사람들과 다름없는 인간적 고뇌를 느낄 수 있다. 또 어머니에 대한 추억이 담담한 화법으로 서술되는 문장에서는 은은한 공감을 표하게 된다. 다음은 그의 문장이다. “‘자연으로 돌려보내기 위한 실험’이라는 이름으로, 시험 삼아 피아노를 마당에 그냥 놔둬 보기로 했습니다. 몇 년의 시간 동안 수차례 비바람을 맞으며 도장도 다 벗겨진 지금은 점점 본래의 나무 상태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이대로 어떻게 썩어갈 것인가. 그것은 우리 인간이 어떻게 나이 먹어 가야 하는가, 하는 것과도 이어져 있다는 느낌이 듭니다.” 암 투병 중 깨달았던 그의 사생관도 들여다볼 수 있다. 본연의 상태로 돌아가는 것. 나이를 쌓아만 가는 것은 나무가 썩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비유에서 시사하는 메시지가 크다. 결국 어떻게 살고 어떻게 죽을 것이냐는 사카모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면서, 더불어 우리 모두 답을 찾아야 할 화두이기도 하다. 이제 2025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과도한 목표나 실현 불가능한 소망, 작심삼일로 끝날 다짐을 정하기보다는 후회나 절망의 늪으로 빠지지 않도록 바람의 크기를 재단하는 것은 어떨까. 올해 을사년에 볼수 있는 보름달이 아직 열두 번이나 남아있으니까. 원영 스님 / 청룡암 주지마음 읽기 욕망 마음 말씀 덕분 사카모토 류이치 나무 상태
2025.01.01. 17:31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는 존재이다. 행복이란 자기 욕망을 충족시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종교계 일각에서는 인간의 욕망 충족 행위를 불편한 눈으로 보거나 심지어 혐오 대상으로 삼기도 한다. ‘마음을 비워라’, ‘욕망을 끊어라’ 등 사람이 감당 못 할 요구를 서슴지 않고 해댄다. 심지어 몸이 욕망의 근원이라고 자기 몸을 굶기거나 잠을 안 재우거나 때리는 자기학대 행위를 신앙적인 행위라고 여기기도 한다. 사람의 몸과 마음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종교적 연출은 경악스럽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인가? 내적인 유혹을 극복했다고 호언장담하는 사람들은 허풍쟁이들이다. 이들인 가진 병적인 콤플렉스를 ‘이카로스 콤플렉스’라고 한다. 새의 깃털을 모아 밀랍을 굳혀서 만든 날개로 태양을 향해 날아가다가 추락해서 죽은 이카로스는 현실 부적응자, 회피성 성격 장애인이자 비현실적인 몽상가를 대표하는 사람이다. 금욕적인 이들은 다른 사람들도 자기들처럼 살아야 한다고 강요하며, 그렇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하거나 경멸한다. 이들은 헛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얼핏 모든 것을 초월한 듯이 보이지만 실상은 염세주의자에 지나지 않는다. 인생에서 성공한 경험이 없는 무능력자들이 주로 이런 소리를 한다. 이들은 스스로 스승을 자처하며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기 삶의 방식을 강요해서 수많은 사람을 종교적 신경증에 걸리게 한다. 그래서 대중들이 더 이상 이런 자들이 던지는 언어의 유희에 걸려들지 않도록 욕망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자 한다. 욕망과 욕심은 구분해야 욕망과 욕심은 다른 것이다. 욕망과 욕심을 동일한 것으로 생각하고 쓸데없는 죄책감, 자기 혐오에 빠져 사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욕심은 다른 사람이야 어떻게 되건 자기 욕망만 채우려는 것, 다른 사람들을 갈취하여 자기 잇속만 채우려는 것을 말한다. 결핍 욕구가 심하고 심리적 허기짐이 심한 사람들이 욕심을 부린다. 그래서 욕심은 공감 능력 결핍자인 사이코패스들의 전유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반면 모든 욕망은 필요한 것이다.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는 두 가지이다. 생리적 욕구와 정서적 욕구. 생리적 욕구는 먹고 마시고 입고 가지고 싶은 욕구를 의미하며, 정서적 욕구는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말한다. 일부 종교인들은 생리적 욕구를 죄악시하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구 역시 세속적인 명예를 추구하는 것이라고 평가절하한다. 심지어 그런 욕구들은 악으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단정하여 심약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 혐오에 사로잡히게 한다. 생리적 욕구는 사람으로 하여금 살맛을 느끼게 해준다. 만약 사람이 가지고 싶은 욕구, 무언가 하고 싶은 욕구가 없다면 무기력증에 걸렸다고 하지, 초연하다고 하지 않는다. 정서적 욕구 또한 인생을 건강하게 사는 데 아주 중요하다. 간혹 “나는 다른 사람들을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다른 사람들로부터 인정받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인정받고 싶은 욕구를 유아적인 언어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이 있다는 건 건강하다는 징표 욕망은 끊을 수 있는 것인가? 이는 비현실적인 욕심에 지나지 않는다. 욕망은 실처럼 끊어버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욕망은 일종의 감정이기에 비우거나 끊으려 하면 억압을 하게 된다. 억압이란 공을 물속에 강제로 눌러서 가라앉게 하는 것과 같은데, 이렇게 억압된 욕망은 누르면 누를수록 튀어 오르려 한다. 또한 심한 억압은 인격의 구멍을 만든다. 인격에 구멍이 생긴 사람들은 전체로서 유기적으로 존재하지 못하고, 자신이 인정하지 못하는 부분을 소외시킴으로써 내적인 불균형 상태에 빠진다. 억압은 신체적으로도 이상 현상을 일으킨다. 히스테리성 마비 증세가 그것인데, 자신이 하고픈 것을 하지 못하면 신체에 마비 현상을 일어난다. 예컨대 하고픈 말을 못 하면 입 근육 경직이, 갖고 싶은 것을 못 가지면 손가락 마비 현상이 온다. 그렇다면 욕망이 올라오면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좋은가? 자신이 아직 건강한 신호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건강하니까 갖고 싶고 하고 싶은 것이 많은 것이다.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해 보면 답이 보인다. 또한 뇌 구조상 욕망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 현명하다. 인간의 뇌에는 영장류의 뇌 이외에 파충류, 포유류의 뇌도 공존하기에 욕망은 없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인식하면 편해진다. 욕망은 없애려 하지 말고 달래야 한다. 작은 사치를 부려서 욕망을 달래줄 필요가 있다. 인간은 욕망의 존재이며 욕망이 인간을 진화시켜 준다. 과하면 안 되지만 없어서도 안 되는 것이 욕망이다. 홍성남 / 가톨릭 영성심리상담소장속풀이처방 욕망 회피주의자 욕망 충족 구조상 욕망 생리적 욕구
2024.08.25. 18:07
파리의 고급 스트립클럽 ‘A Mon Seul Desir’(My Sole Desire)에 박사 과정의 대학원생 마농(루이즈 쉐빌로트)이 오로라라는 예명으로 취직을 한다. 그녀는 동료 댄서이며 배우 지망생 미아(지타 한로트)와 친구가 된다. 마농은 ‘쉽고 빠른’ 돈을 보장해주는 욕망의 세계에서 곧 불타오르는 나방처럼 스타로 떠오른다. 이제 그녀에게 있어 스트리핑은 생계유지의 수단이 아니라 에로틱한 삶을 탐닉하며 미처 몰랐던 자아 속 욕망의 분출구가 된다. 마농은 직업과 개인적 욕망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의 성적 취향에 대한 질문에 직면한다. 돈을 벌기 위해 시작한 대학원생의 삶과 벌거벗은 육체를 파는 스트리퍼의 삶이 우선순위가 바뀌고 거부할 수 없는 욕망의 세계가 펼쳐지면서 사치와 환락이 그녀의 일상을 지배한다. 이후 영화는 마농과 미아의 ‘관계’에 집중하고 그들의 심리 안에 잠재해 있는 레즈비언의 본능을 탐구한다. 두 여자는 관객 앞에서 레즈비언들의 사랑을 연습하면서 어쩌면 사랑일지도 모르는 감정에 흥분되고 함께 성적 유희를 경험한다. 영혼이 자유로운 마농에 비해 남자친구 몰래 클럽에서 일하는 미아는 주저한다. 그러나 마농의 에로틱한 여정에 친절한 가이드 역할을 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든다. 마농과 미아는 매춘에 연루되고 남자들에게 성폭행을 당하면서 이들의 사랑과 우정은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영화를 이끌고 가는 주된 동력은 프랑스 영화계의 새로운 주역 루이즈 셰빌로트(Louise Chevilotte)와 지타 한로트(Zita Hanrot)의 대담한 연기이다. 루시 볼레토 감독은 이들의 불꽃 튀는 연기를 토대로, 스트리퍼들의 에로틱한 삶을 탐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성노동에 종사하는 여성들의 고통을 여성적 시각에서 들여다본다. 그녀는 미국영화들에서 흔히 보는 스트립클럽의 눈요기는 되지 않도록 자제하고 성을 상품화하는 시대의 편린들을 거부한다. 볼레토 감독의 성은 노골적이지 않아도 그 자체로 섹시하다. 영화는 예상치 못한 곳에서 잡초처럼 자라는 두 스트리퍼의 삶을 통해 우리의 가장 깊은 욕망을 재조명한다. 사랑과 욕망, 그리고 환희, 그 모든 것들의 뒤에 오는 결론. 성의 영역에서는 모든 게 미스터리라는 사실. 김정 영화평론가 [email protected]욕망 유일 개인적 욕망 프랑스 영화계 마농과 미아
2024.02.23. 20:19
“욕망은 인간의 본질이다.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바뤼흐 스피노자·네덜란드 철학자한마디 욕망 본질 바뤼흐 스피노자 네덜란드 철학자
2022.05.03. 18:56
저의 'Face-Book 친구(페친)‘ 중 한 분은 Face-Book에 많은 글과 사진을 올립니다. 그녀는 ’페친‘을 통해서 회사의 영업직을 얻었고, 집을 구했고, 식당 매니저가 되었습니다. 저도 매일 습관적으로 ‘Face-Book'에 들어갑니다. ’좋아요‘를 눌러준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인해 봅니다. 그 분들이 저를 인정해주는 것이 고맙습니다. 저도 다른 분들이 게시한 글이나 사진이 좋으면 ’좋아요!‘를 누릅니다. 누구나 타인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합니다. 이 욕구에서 자유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많은 마케팅 업체가 인정 욕구를 이용해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한 데이터 분석업체는 어떤 개인이 SNS상에서 어디에 ‘좋아요’(likes)를 눌렀는지 68개만 알면 그 사람을 직접 만나지 않고도 그의 피부색과 가정사, 마약·술 중독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다고 합니다.70개를 알면 그와 잘 아는 ‘절친’처럼 될 수 있고, 300개를 알면 그의 아내나 남편보다 그를 더 속속들이 알 수 있다고 합니다. 300개를 넘어서면 그에 대해 그보다 더 잘 아는 전지자 경지에 오를 수 있다고 합니다. ‘좋아요’가 기업들에 소중한 마케팅 자료로 쓰이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상업적 가치가 1조 달러를 넘는다고 합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의 인정을 받고 싶어 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들꽃/김영자’ 시인의 ‘사랑받고 싶으신 하나님’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 무엇이 부족하셔서 / 하찮은 나의 사랑이 필요하시리 / 다만 나를 너무도 사랑하시기에 / 내 사랑도 받고 싶으신게지 / 나를 진정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 그 사람도 나의 사랑을 원하지 않을까? /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 왜냐하면 나는 너를 그 만큼 사랑하니까" / 이렇게 말 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 그 사람의 사랑이 진실일까? / 나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 좋다 / 나를 그만큼 사랑해 주신다는 게 좋다 /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다는 사실이 / 나를 황홀하게 만든다 / 부족한 이 모습 이대로 / 나 이제 / 나의 하나님을 내 온 맘 다해 사랑하오리 / 그 분이 원하시는 사랑은 / 당신의 가슴 크기 만큼이 아니라 / 쪽박만큼이나 작고 좁은 / 내 가슴 크기 만큼일 테니까 /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 질투하는 하나님인 즉" (출20:5) / "네 하나님 여호와는 소멸하는 불이시오 /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라(신4:24) 많은 학자들이 연구한 결과 ‘인정 욕구’가 사람을 성장시키고 일의 성과를 올리는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밝혔습니다. 동시에 인정 욕구의 문제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그중 가장 심각한 것은 무의식적으로 생기는 인정 욕구에 대한 강박이었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인정 욕구의 늪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의 삶은 인정 욕구에 좌우됩니다. 인정받으면 변화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인정이 필요합니다. 인정해 주면 자존감이 올라갑니다. 사람은 인정받으면 받을수록 거기에 매달리게 됩니다. 노력해서 만든 몸을 자랑하고 싶어 SNS에 사진을 올렸다가 ‘좋아요’를 꽤 많이 받자, 사람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으려고 무리하게 운동하고 체중 감량을 하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SNS를 시작하지만 어느새 타인의 평가에 연연하게 됩니다. SNS에 혹은 카페 게시판에 게시물을 올린 뒤 조회 수가 얼마인지, ‘좋아요’가 얼마나 눌려졌는지 수시로 확인하게 됩니다. 의식적으로 든 무의식적으로 든 타인에게 ‘잘했다!’, ‘멋지네!, ‘괜찮아’라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인정 욕구입니다. 인정 욕구는 더 나은 삶을 위해 꼭 필요하지만 과해지면 오히려 스트레스에 잠식되거나 번 아웃에 빠져 일상생활조차 제대로 이어 가기 힘들게 됩니다. 인정은 거울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거울을 통해서만 자신의 얼굴을 바라볼 수 있는 것처럼 타인과 주위의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자신의 능력을 깨닫고 그것이 얼마만큼 가치가 있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애초에 인정은 상대의 의지에 달려 있습니다. 자신이 아무리 인정받고 싶어도,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가 인정해주지 않으면 인정 욕구는 채워지지 않습니다. 아무리 막강한 권력과 경제력이 있어도 힘을 써서 인정을 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이처럼 타인이 존재해야 하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가운데 충족되는 욕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먼저 자신이 지금 이렇게 괴로운 것이 ‘완벽하지 못해서’, ‘예쁘지 않아서’, ‘연봉이 높지 않아서’, ‘실적을 채우지 못해서’, ‘열심히 일하지 않아서’가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합니다. 나아가 남의 인정에 목말라 하지 않으려면 우리 자신보다 더 잘 아시는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목회칼럼욕망 목회칼럼 인정 욕구 하나님 여호와 데이터 분석업체
2022.02.15. 13: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