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1기 아나운서 출신 수필가 위진록(97) 선생이 펴낸 책 ‘세월의 흔적: 8년간의 손편지에 담긴 인생 이야기’ 출판기념회가 지난 1일 LA 한인타운 옥스포드 팰리스 호텔에서 열렸다. 행사장에는 재미수필가협회 회원 등 한인사회 인사들과 가족 등 100여 명이 참석해 원로 문인을 축하했다. ‘세월의 흔적’은 위 선생이 2018년부터 8년간 한국의 전 대전대 문예창작학과 교수이자 문학평론가인 정순진(68) 씨와 주고받은 손편지 200통을 엮은 서간집이다. 사회를 맡은 수필가 장소현 씨는 “거창한 철학이나 사회 담론이 아니라, 꾸밈없이 적어 내려간 일상의 기록이 오히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든다”고 소개했다. 이 책은 두 사람의 특별한 인연에서 비롯됐다. 위 선생은 2013년 자서전 ‘고향이 어디십니까-KBS 원로 아나운서 위진록의 고백적 기록’을 출간했다. 22살에 한국을 떠나 일본에서 22년, 미국에서 53년, 인생의 대부분을 외국에서 살게 된 사연과 한국 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을 몸소 겪으면서 만난 인연들에 관해 솔직하고 꼼꼼하게 기록한 책이다. 위 선생은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 발발 소식을 최초로 보도한 KBS 1기 아나운서로, 석 달 뒤 9월 28일 유엔군의 서울 수복 소식도 처음 보도했다. 전쟁 중에는 일본 도쿄 유엔군총사령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 휘하에서 전황을 방송한 아나운서였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 온 뒤 남가주 허모사비치에서 10년간 햄버거 가게를 운영하며 지역 명사가 됐다. 위 선생은 2018년 LA를 방문한 정 교수에게 자서전을 건넸다. 정 교수는 귀국길 비행기 안에서 단숨에 읽고 “격동의 현대사를 온몸으로 헤쳐온 삶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며 직접 손편지로 독후감을 보냈다. 이에 감동한 위 선생이 손편지로 답장을 보내면서 두 사람의 서신 교류가 시작됐다. 태평양을 건너 왕복 한 달이 걸린 이 편지 교류는 200여통에 이르렀다. 오랜 친구이자 태평양세기연구소(PCI) 공동창립자인 스펜서 김 회장이 이 사연을 듣고 출판을 제안하면서, 두 사람의 편지가 한 권의 책으로 세상에 나왔다.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전 회장 김화진 씨는 “이 책은 한 번 펼치면 덮지 못할 만큼 아날로그적 감성이 가득하다”며 “일상적 삶을 나누고 교감한 편지 내용이 행복의 본질을 되짚게 한다”고 평했다. 공동저자인 정 교수는 일가족을 데리고 한국에서 LA로 날아와 출판기념회에 참석했다. 정 교수는 “위 선생님과의 서신 왕래를 통해 삶은 매일매일이 기적이자 축복임을 깨닫고 있다”고 말했다. 위 선생은 “우연은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아나톨 프랑스의 말처럼, 그 우연이 이어져 이 책이 나왔다"며 “97세에 책을 내고 사람들 앞에서 말한다는 게 결코 쉽지 않은데, 이런 자리를 만들어주신 분들께 감사하다”고 소감을 밝혔다. 위 선생은 직접 붓글씨로 쓴 천자문 족자 두 점을 정 교수와 김 회장에게 선물로 전달했다. 서간집 속에는 천자문 완성을 앞두고 글씨를 망쳐 다시 써야 했던 일화가 담겨 있어 참석자들을 미소 짓게 했다. 위 선생은 남가주 문단과 방송계에서 오랜 세월 활동해온 명사로, 가주예술인연합회 회장과 재미방송인협회 고문을 역임했다. ‘하이! 미스터 위(1979),’ ‘이민 10년 생(1984),’ ‘잃어버린 노래(1993),’ ‘낙타의 속눈썹(1997),’ ‘클래식, 내 마음의 발전소(2011)’ 등 다수의 저서를 통해 이민자의 삶과 음악, 인생의 단상을 기록으로 남겼다. ━ 독자 선착순 무료 배포 ‘세월의 흔적’은 시중에 판매되지 않는 책입니다. 미주중앙일보는 PCI의 후원으로 이 책을 관심 있는 독자에게 1인 1부 선착순으로 무료 배포합니다. 신청은 e메일([email protected])로만 받으며, 성함 주소 전화번호를 꼭 기재하셔야 합니다. 접수 연락을 받으신 분은 본사(690 Wilshire Pl, LA, CA 90005)에서 수령하십시오. 배송비($20) 부담 조건으로 미국에 한해 우송도 해드립니다. 이무영 기자 [email protected]위진록 손편지 손편지로 독후감 손편지 200통 고백적 기록
2025.11.02. 19:19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임시뉴스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 새벽 북한 공산괴뢰군이 38선 전역에 걸쳐 공격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국민 여러분 안심하십시오. 우리 국군이 건재합니다.(반복)” 스물두 살 청년 3년차 아나운서 위진록은 몰랐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서울중앙방송국(KBS 전신) 숙직실에 느닷없이 찾아온 국방부 한 군인의 요청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줄은…. 73년의 세월이 흘러 원로가 된 위진록(95)씨를 가디나 자택에서 만났다. 구순을 넘어 100세 ‘상수(上壽·병 없이 하늘이 내려준 나이)’를 바라보고 있지만 그의 발음은 여전히 또렷했다. 그는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1950년 6·25 한국전쟁 발발 1보, 9·28 서울 수복 1보’ 방송 기록을 남겼다. 1950년 6월 24일 숙직이었던 위씨는 저녁방송을 끝내고, 다음날 새벽방송을 위해 2층짜리 방송국에서 쪽잠을 자고 있었다. “6월25일 새벽 5시쯤 국방부에서 박 대위라는 사람이 찾아와 다짜고짜 잠을 깨웠어요. 쪽지를 보이면서 ‘38선 전역에 걸쳐 북한군이 공격을 시작했다’며 지금 방송하라고 했지요.” 그는 급히 당시 민재호 국장대리에게 연락했다. 민 국장대리는 용산 국방부까지 찾아가 사실확인을 했다고 한다. 곧바로 “이미 개성이 함락됐다. 방송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제가 원고를 직접 썼어요. 오전 6시30분 아침방송 시작과 동시에 북한군 공격 1보 임시뉴스를 내보냈지요. 같은 말을 반복했습니다. 일요일이라 휴가나온 군인들은 부대로 복귀하라는 의미도 담았죠.” ‘북한군 38선 전역 공격’이란 엄청난 뉴스가 나갔지만, 전쟁 당일 남한사회는 둔감했다. 1보를 내보낸 위씨도 오전 10시 퇴근 후 서울운동장 도시대항 축구대회 관람에 나섰을 정도였다. “그 전에도 38선 여러 곳에서 무장 충돌이 있었어요. 그래서 공격이 중지되는 것 아닐까 생각했죠. 축구경기 전반전이 끝나자 장내에서 ‘북한군이 침략해서 오늘 축구시합을 못 한다’고 하더군요. 그때야 정말 큰일났구나,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져 집으로 돌아갔어요.” 곧 서울은 북한 인민군에 함락됐다. 경기도 문산, 임진강변 고랑포 등에서 두 달여 피신한 위씨는 9월 28일 국군이 서울에 들어온 것을 보자마자 방송국으로 돌아갔다. 그는 “정동에 있던 방송국은 폭파돼 흔적도 없었지만, 국군 서울 수복 사실을 알려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송신소가 있던 당인리(서울 마포구) 발전소로 향했다. 다행히 그곳 기술자들 도움을 받아 송신 장비, 마이크로 조그마한 스튜디오를 만들었다. 역사로 남은 임시방송은 또 시작됐다. “서울 시민 여러분, 대한민국 국민 여러분 서울이 탈환됐습니다. 이제 우리는 자유와 평화를 다시 찾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유엔(UN)군과 국군은 북쪽으로 도망가는 공산군을 추격하는 중입니다….” 북한 황해도 재령이 고향인 그, 6·25전쟁 발발 1보와 9·28 서울 수복 1보라는 역사의 주인공이 됐다. 이 기록은 결국 그를 유엔군총사령부방송 심리작전국 소속 아나운서 길로 이끌었다. 서울 수복 후 위씨는 임시방송국을 지키며 전황을 라디오방송으로 전했다. 그러다 방송국을 찾은 유엔 연합군 미 육군 장교 매튜 중령의 눈에 띄었다. 매튜 중령은 위씨의 목소리를 듣고 도쿄 ‘유엔군총사령부방송(VUNC)’에 가서 한 달 정도만 대북방송을 하고 오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한 달 예정이던 파견 생활은 1951년 1·4후퇴로 연장됐다. 그후 22년간 그는 도쿄와 오키나와를 오가는 ‘대북방송 전문가’의 삶을 살았다. 초기 유엔군총사령부방송은 주둔군사령부가 있던 도쿄 NHK 방송시설을 사용했다고 한다. 대북방송을 위한 심리작전국에는 위씨 등 아나운서 2명, 작가 및 번역가, 각계 전문가 등 한국인 10명 이상이 일했다. 대북방송은 ‘전쟁 관련 뉴스, 미국 등 국제뉴스, 스탈린 독재, 세계 공산화 전략, 김일성 부조리’ 등을 다뤘다고 한다. 위씨는 1972년 삼남매 교육을 위해 일본에서 LA로 이민 길에 올랐다. 그는 허모사비치에서 ‘서프 버거(SURF BURGER)’집을 인수, 위씨네 식당(WEE’S KITCHEN)을 운영하며 제2 인생을 살았다. 대북방송 아나운서였던 그는 1990년 꿈에 그리던 고향 북한을 방문해 형님 가족과 재회도 했다. 한국전쟁 정전과 한미동맹 70주년을 마주한 위씨는 자신에게 남은 생이 얼마 안 된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말했다. 그는 자신이 겪었던 전쟁의 실상을 꼭 알리고 싶다고 강조했다. “6·25에 관한 역사적인 사실이 자꾸 희미해지고 왜곡되고 있습니다. 가장 걱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6·25가 이승만과 미국 사람들이 일으킨 전쟁이다. 미국의 모략이다’라고 말해요. 그런 말을 전하는 교과서까지 있어요….” 위씨는 역사를 바라보는 서로 다른 견해는 존중했다. 다만 사실을 외면하거나 왜곡해서는 안 된다고 당부했다. “6·25는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이 역사적으로 겪은 동족상잔 중 가장 참혹한 전쟁입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는 당시 소비에트연방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김일성입니다. 북한이 T34 탱크와 중화기를 앞세워 남침을 시작한 겁니다. 요즘 이 사실을 인식하려는 사람들이 없어져 가는 세태가 슬퍼요.” 위씨는 “한국 사람이라면 지나간 역사를 똑바로 봐야 한다”고 덧붙였다. 외면과 왜곡 없는 자세를 갖출 때 동족상잔 전쟁을 똑바로 평가하고, 남과 북 미래를 새롭게 펼칠 수 있다는 지론이다. “(전쟁은)‘누구 잘못이다’고 따지는 것이 아닙니다. 전쟁 당시의 사실을 냉철하게 평가하고 편협하지 않게 역사를 인식해야 해요. 그래야 비극적인 전쟁이 다시 일어나지 않고 (남과 북이) 신뢰관계를 회복할 것입니다.” ▶약력: 평양 사범학교 중퇴/1947년 서울중앙방송국 아나운서/1950~1972년 유엔군사령부방송(VUNC) 대북방송 아나운서/재미방송인협회 고문 및 가주예술인연합회 회장. ▶저서: ‘’오래된 출장’,‘고향이 어디십니까?’ 김형재 기자사설 위진록 당시 임시뉴스
2023.06.23. 2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