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증 사진 찍을 때 화장해도 돼요?” 열여섯 살 손녀의 물음에 나도 모르게 불쑥 대답했다. “그럼 더 예뻐 보일 텐데.” 옆에 있던 딸이 기가 막힌다는 듯 웃는다. “엄마는 내가 고등학생일 때, 대학 가기 전엔 화장하지 말라고 고집하더니….” 딸의 말대로다. 세 아이를 키우던 젊은 시절엔 걱정이 많았다. 뭐든 “안 돼!”를 연발하며 자녀를 키웠던 기억이 선명하다. 그런 내가 이제 와서 손녀에게 ‘예뻐 보일’ 자유를 허락하다니. 그동안 나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최근 연구에 따르면 인간은 나이가 들수록 행복감이 높아진다고 한다. 특히 80대 초반이 되면 20대 초반과 비슷한 수준의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중년의 위기 시기에 잠시 주춤했다가 다시 서서히 상승하는 이 행복감은, 신체적 질병이나 경제적 어려움, 지적 능력의 저하와 무관하다는 점이 흥미롭다. 학자들은 이 상식 밖의 현상에 대해 몇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자신의 한계를 받아들이고, 과거 성취에 만족하며, 동료들과의 경쟁에서 벗어나 해방감을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심지어 침팬지나 오랑우탄 같은 유인원들도 중년 이후 더 편안하고 즐거운 기분을 많이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나이가 들수록 뇌가 더욱 편안한 상태로 변해간다는 추측을 뒷받침한다. 물론, 과거에는 노년의 삶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있었다. 100여 년 전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50세가 넘은 개인은 융통성이 결여되어 더 이상 가르칠 수 없다”고 말했다. 하지만 뇌 과학의 눈부신 발전으로 이러한 통념은 완전히 깨졌다. 뇌 가소성(Neuroplasticity)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면서 우리 뇌는 평생에 걸쳐 새로운 신경 세포를 만들고, 정보 교환을 활성화하며 지속적으로 변화하고 성장한다는 사실이 밝혀졌기 때문이다. 런던 택시 운전사 연구는 뇌 가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복잡한 중세 도로를 누비는 런던 택시 운전사는 어려운 시험과 3년마다 치르는 재시험에 합격해야 하는데, 오랜 경력의 운전사들은 비슷한 연령대의 비운전자에 비해 기억 중추인 해마 조직이 훨씬 커져 있었다. 이 연구는 끊임없는 학습과 노력이 뇌를 새롭게 변화시킨다는 것을 증명했다. 60세가 넘어서도 새로운 학문에 도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급격한 고령화로 인해 ‘은빛 쓰나미(Silver Tsunami)’라 불리며 사회적 부담으로 여겨지던 노년층이, 이제는 ‘황금빛 파도(Golden Wave)’로 불리며 활력 넘치는 새로운 삶의 주인공으로 떠오르고 있다. 미국의 심리학자 윌리엄 새들러 박사는 은퇴 이후의 30년을 ‘제3의 시기(Third Age)’ 또는 ‘열정의 시기(Hot Age)’라 명명했다. 새들러 박사가 제시한 ‘열정의 시기’를 보람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은 공통점이 있다. 돈, 명예, 지위 대신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삶의 가치를 찾아 내면의 만족을 추구한다. 또 ‘나’를 위한 삶을 산다. 과거에는 가족, 친구, 직장을 위해 살았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존중하는 삶을 산다. 뿐만 아니라 은퇴 후에도 과거에 하고 싶었던 일, 여가 활동, 봉사 등 스스로 선택한 일을 하며 계속 활동한다. 다양한 관계를 맺는데도 소홀하지 않다. 죽음이 삶의 자연스러운 일부임을 받아들이고 언제든 맞이할 준비를 한다. “안 돼”를 외치던 내가 손녀에게 “더 예뻐 보일 텐데”라고 말한 건, 아마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쌓인 삶의 경험과 지혜가 나를 더 자유롭고 유연한 사람으로 만들었기 때문일 것이다. 제3의 시기를 향해 나아가는 모든 이들에게 건강과 행복이 함께하기를 바란다. 수잔 정 / 소아정신과 전문의오픈 업 쓰나미 은빛 은빛 쓰나미 황금 파도 심리학자 윌리엄
2025.08.20. 19:26
예상보다 빠른 속도다. 초고령화 사회로의 진입 속도를 이름이다. 유엔(UN)은 65세 이상 인구가 전체 인구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기준으로 7% 이상 고령화 사회, 14% 이상 고령 사회, 20% 이상 초고령 사회로 구분한다. 한국은 행정안전부 주민등록 인구 통계에 따르면 65세 이상 인구가 1024만4550명으로 전체 인구(5122만1286명)의 20%를 넘은 것으로 집계되어(2024년 12월 23일 기준) 이미 초고령 사회에 진입했다.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은 65세 이상 고령인구 비중이 2046년부터 일본을 넘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수준에 이르며, 2062년에는 홍콩을 제치고 전세계에서 가장 고령인구 비중이 높은 나라가 될 것이다. 이런 초고령화 속도는 세계적으로도 최고 수준이다. 고령 사회에서 초고령 사회로의 진입은 일본 10년, 독일 36년, 프랑스 39년이 각각 걸린 반면에 한국은 7년 만에 초고령 사회로 접어들었다. 미주 한인사회의 역사는 한민족이 걸어온 근현대사의 축소판이자 미러 이미지(mirror image)다. 미주 한인사회와 한국이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란 뜻이다. 한국의 국내 현실이 큰 여과 없이 그대로 미주 한인사회에 투영되어 왔음을 안다면 가장 빠른 속도로 초고령 국가가 된 한국 사회의 변화는 미주 한인 교계와 사회의 미래를 가늠하는 바로미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의 현실은 어떠한가. 인구조사국(U.S. Census Bureau)에 따르면 미국은 2015년 15%를 넘어 고령 사회로 진입했으며, 2030년엔 20%가 넘는 초고령 사회로 진입할 것으로 전망된다. 2024년 1월 기준으로 미국의 100세 이상 인구는 세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많고, 향후 30년 동안 4배로 증가할 것으로 추산한다. 미국 시장조사 전문기업 인사이더 인텔리전스(Insider Intelligence) 또한 2030년까지 모든 베이비붐 세대가 만 65세 이상이 될 것이라고 내다본다. 저출산, 초고령 사회는 머지않은 미래에 세계의 판도를 크게 바꾸어 놓을 것이다. 지나 러몬도 미 상무장관은 “고령화 문제가 벽돌 더미처럼 미국을 강타할 것”이라고 했으며,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는 “저출산에 따른 세계 인구 붕괴는 인류 문명에 지구 온난화보다 훨씬 큰 위험 요소”라고 주장했다. 초고령 사회로 전 세계가 재편되면서 가장 심각한 타격을 받을 분야는 경제다. 고령화에 휘감긴 지구촌의 어둔 풍경을 세계 경제에 덮치는 ‘은빛 쓰나미’라 표현할 정도다. 생산 가능 인구가 줄고 소비가 위축돼 국가 경제가 저성장의 늪에 빠질 우려가 심각하다. 가족구조 변화와 은퇴 후 사회적 역할 축소 및 상실, 배우자 사망, 죽음에 대한 두려움, 신체기능 저하, 경제력 감소 등 노년기에 맞닥뜨리는 여러 가지 삶의 변화와 문제들이 우울, 외로움, 고립감, 자괴감 등을 유발한다. 급기야 스스로 사회적 가치가 없는 사람이라 여겨 극단적 선택으로 치닫기도 한다. “노인들을 어떻게 살릴 것이냐고 세상에 묻지 말고, 노인들이 세상을 어떻게 살릴 것인지를 물어야 할 때이다.” 스탠퍼드 장수연구센터(Stanford Center on Longevity)의 설립자이자 심리학자인 로라 L. 카스텐슨 교수의 말이다. 시편 기자는 자신의 노년을 위한 기도를 다음과 같이 올린다. “내가 이제 늙어서, 머리카락에 희끗희끗 인생의 서리가 내렸어도 하나님, 나를 버리지 마십시오. 주님께서 팔을 펴서 나타내 보이신 그 능력을 오는 세대에 전하렵니다”(시 71:18 새번역). 하나님과 그 은혜 안에서 꿈꾸며 계속 성장하는 시니어는 나이는 들겠지만 늙지 않는다. ‘은빛 청년들(silver youth)’이다. 이들에게 있어 시간이라는 것은 어쩌면 일직선상으로 흐르는 크로노스의 물리적 시간이라기보다는 자신의 생애 동안 ‘의미있고 가치있는 삶’을 추구하고 싶은 질적이고 주관적이고 위로부터 임하는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에 가깝다. 나이 듦은 하나님의 부름으로부터의 멀어짐이나 떠남이 아닌 그 안에서의 지속적 ‘머묾’과 ‘자람’이다. 시니어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창조적이고 생산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돕는 사역이 활성화되면 교회 안팎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 것이다. 이런 새로운 변화에는 우리 한인 사회와 교계의 지원과 연대가 요구된다. 이를 위해 시니어 사역의 지속성과 함께 전문성 확보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다소 늦었지만 이제라도 시니어의 영적, 정신적 성장을 도와 문화적 성숙과 영적 지혜로 교회와 세상을 섬길 ‘은빛 청년’ 시니어들을 양육할 수 있는 공동체가 곳곳에 세워져야만 할 때다. 이상명 / 캘리포니아 프레스티지 대학교 총장성서로 세상읽기 초고령화 은빛 초고령화 사회 초고령화 속도 초고령 사회
2025.05.05. 19:30
은빛 대학 은빛 대학 기념 필드
2023.11.20. 2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