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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은빛으로 나를 세우다

Los Angeles

2026.01.22 18:20 2026.01.22 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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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가슴이 서늘했다. 골밀도가 심하게 낮아졌다는 의사의 진단은 내 몸의 뼈가 성글어가고 있다는 경고였다. 자칫하면 무너져 내릴 수도 있다는 말에 덜컥 겁이 났다. 무엇을 먹으면 좋겠느냐는 나의 물음에 의사는 웃으며 ‘멸치 많이’라고 답했다. 익히 알고 있던 정답이었음에도 나는 의사의 처방을 듣고 돌아오며 열심히 먹어야겠다고 결심했다. 텅 빈 내 안을 채울 것이 이토록 작고 반짝이는 존재들이라니 왠지 모를 위안이 느껴졌다.
 
고추장에 찍어 먹을 생각으로 멸치를 볶았다. 열기에 몸을 달구며 내뿜는 고소한 향이 마늘과 청양고추의 알싸함과 어우러져 금세 내 마음을 사로잡는다. 갓 지은 밥 한 그릇이 순식간에 비워진다.
 
멸치의 눈과 마주치는 것조차 무서워 울먹이던 어린 날의 내가 문득 떠올랐다. 죽은 생명이 불쌍하여 젓가락을 내려놓던 그 여린 마음은 어느덧 사라지고, 이제 나는 나의 뼈를 세우기 위해 그들의 뼈를 빌리는 생의 엄숙한 순환 앞에 서 있다.
 
한 줌의 멸치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이 작은 몸 하나에도 세월의 무늬가 스며 있다. 먼 바다에서 길어 올린 눈부신 햇살과 거친 파도, 그물에서 멸치를 털어내던 일꾼들의 투박한 손마디가 이 은빛 비늘 속에 촘촘히 박혀 있다. 멸치는 비록 작고 여리지만, 제 몸을 부수어 타인의 생을 단단하게 지탱해 주는 넉넉한 삶의 철학을 품고 있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를 따라간 외가는 바다 냄새가 갯바람에 실려 오는 곳이었다. 장을 봐 오신 할머니와 찬모의 발걸음이 부엌과 광을 분주하게 드나들면, 소쿠리 속에는 시래기가, 양은 바가지 속에는 은빛 멸치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물 밖으로 나와서도 한동안 파닥거리며 물비늘을 흩날리던 그것들은 바다의 윤슬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눈부셨다.
 
할머니는 풋배추를 말려 만든 시래기를 냄비 바닥에 넉넉히 깔고, 그 위에 멸치를 층층이 쌓으셨다. 된장과 고추장을 섞어 만든 비법 양념장이 자박하게 끓어오를 때쯤이면, 집안 구석구석은 구수한 향기로 가득해졌다. 뚜껑을 여는 순간 피어오르던 그 따스한 김 속에는 남해의 파도 소리와 할머니의 정성이 함께 버무려져 있었다.
 
때로는 귀한 죽방멸치가 선물로 들어오기도 했다. 손바닥 위에 올리면 매끄러운 은빛 광택이 흐르던 그 작은 존재들은, 바다를 고스란히 응축해 놓은 결정체 같았다. 갓 지은 밥에 다시마나 배추를 손바닥에 올리고 멸치조림 한 점을 얹어 드시던 어른들의 웃음소리. 그 쌈 한 입에 깃든 바다의 기운은 어린 내 눈에도 신기하고 즐거운 삶의 풍경으로 남았다.
 
짜고 단 것을 즐겼던 지난 습관을 떠올리면 이만하기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이제 멸치를 통해 내 몸을 다시 세우려 한다. 멸치여, 너희들은 이제 내 안에서 부서져 나의 뼈가 되고 나의 별이 된다. 바다의 눈물 같은 그 은빛 몸뚱이가 내 기억 속에서 오래도록 반짝이길 바란다. 설령 바다의 생명이 다하는 날이 올지라도, 내가 사랑했던 그 푸른 기억만큼은 은빛 비늘에 새겨져 내 안에서 영원히 살아 숨 쉬길 바란다.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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