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경기를 TV로 보고 있었다. 푸른 유니폼으로 물든 화면과 함성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기억은 어느새 2017년 가을로 돌아갔다. 다저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관중 속에 나도 한 사람이었다. 플레이오프 최종전을 며칠 앞두고 다저스의 열혈 팬인 아들이 함께 가자고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깜짝 놀랐다.“엄마 표도 이미 샀어.” “얼마인데?” “2000달러.” 순간 말을 잃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 LA에서 열리는 다저스 플레이오프 결승전을 다시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엄마랑 꼭 같이 가고 싶었어.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야.” 그 한마디에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아들은 내게 평생 한 번뿐인 하루를 선물해 주었다. 경기 당일. 오래전부터 갖추어 둔 다저스 티셔츠와 재킷, 모자를 쓰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푸른 물결로 뒤덮인 거대한 구장. 수많은 관중 사이에 앉아 그 자리에 나를 데려와 준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나는 참 행복한 엄마구나.’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아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화답이라 생각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목이 쉬도록 응원했다. 사람들의 환호에 맞춰 일어나고, 손뼉 치고, 두 손을 흔들며 힘껏 소리쳤다. 나의 함성은 선수들을 향한 응원이기도 했지만, 아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내 오른손등을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던졌다. 홈런공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얼떨결에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지만 이미 공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순식간에 수많은 손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결국 공은 바로 옆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웃음이 번졌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내 손을 찾아온 홈런공이라니. 공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지만, 먼저 내 손등에 인사를 남기고 다녀간 셈이었다. 나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브라보! 홈런공이 엄마 손을 맞추고 갔네. 이것도 엄마 평생 자랑거리다. 고마워, 아들.” 아들은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환하게 웃었다. 순간 내 눈에 가장 빛난 것은 홈런공이 아니라 아들의 미소였다. 그날 다저스는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는 패배한 경기로 남아 있지 않다. 수만 명이 한마음으로 일어나 응원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기쁨과 아쉬움을 함께 나누던 광경. 스포츠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지금도 야구를 보고 있으면 관중의 함성 사이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엄마, 다시 이런 경기를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날의 티켓은 경기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아들이 건네준 사랑의 입장권은 지금도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준다.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입장권 사랑 다저스 플레이오프 다저스 티셔츠 엄마 평생
2026.08.16. 18:30
이민 연차가 오랜 분들, 이젠 안정적인 분들께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이제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지요.” 겸손한 안분지족(安分知足)이다. 그 밥, 아직도 살만한 기준이 되는 잣대로 쓰인다. 삼시세끼 밥을 먹던 우리 세대에겐 밥을 먹는 게 곧 살아가는 일이었다. 서로 마주치면 “식사 하셨습니까?” 하고 안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즈음 밥은 갈수록 홀대를 받는다. 드넓은 캘리포니아 곡창지대에서 질 좋은 쌀을 공급받고 있어서 귀한 줄 모르게 되었다. 다이어트 열풍 속에서 탄수화물 집합체인 밥은 접시 한 귀퉁이의 흰색 데커레이션으로 남은 채 버려도 되는 음식물이 되었다. 지난 주일 교회에서 배식하고 밥이 남았다. 큰 솥 한 솥이 남아 봉지봉지에 담겨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우들 대부분이 밥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히려 떠맡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우리집에도 밥을 안 먹는 이가 있어서 쌀을 아예 들이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엔 밥이 귀하다. 내가 기꺼이 한 봉지 얻으니 다른 교우들도 마지못해 가져가서 밥이 눈 앞에서 버려지는 참사는 없었다. 맨밥을 얻어가며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주변에서 놀린다. 오래전 김지하 시인의 글에서 ‘밥은 하늘’ 운운한 시를 읽은 뒤엔 더욱 밥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교회에서 얻어온 밥 5공기 분량이 냉장고에 들어있어서 마음이 쓰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한봉지의 밥을 볶아선 둥글게 뭉쳐 김자반을 뿌려 주먹밥을 만들었다. 주먹밥에 김이 잘 안 붙어서 억지로 붙인 후 한 개씩 랩으로 쌌다. 한 공기 분량의 밥으로는 유부초밥도 만들었다. 김치 없이 야채와 달걀과 햄을 넣은 볶음밥도 했다. 밥전도 했다. 더 얻어왔으면 누룽지도 만들 수 있었다. 밥을 버리지 않고 모두 활용한 뿌듯함에 스스로 기특했다. 예전에 감동하였던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입니다'시를 다시 읊조려본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함께하고 나누어야 하는 것이 어찌 밥뿐이겠는가? 식은밥 한 덩이에서도 배울 게 있어 감사하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덩이 김지하 시인 오래전 김지하 남아 봉지봉지
2026.08.13. 19:21
참 좋은 세상이다. 카톡을 통해 심심찮게 감동적인 글들을 읽을 수 있어서다. 물론 쓰레기 같은 잡문(?)도 들어 오지만, 개중에 운 좋게도 숨겨진 보물이 눈에 뜨일 때가 있다. 최근 지인이 보내온 ‘남겨진 물 한병’ 이란 글이 바로 그 경우였다. 사람은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사막을 만난다. 그 사막은 끝없이 펼쳐진 모래밭일 수도 있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 삶의 어느 순간일 수도 있다. 목이 마른 것은 비단 몸만이 아니다. 지친 마음도, 외로운 영혼도 물을 찾는다. 어떤 남자가 사막에서 길을 잃었다. 음식도 물도 모두 바닥났다. 그는 마지막 희망을 붙잡고 걷다가 오래된 오두막 하나를 발견했다. 오두막 안에는 낡은 우물 펌프가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힘껏 펌프질해도 물은 나오지 않았다. 절망이 그의 어깨를 짓누르는 순간, 천장에 매달린 작은 물 한 병이 눈에 들어왔다. 병에는 짧은 쪽지가 붙어 있었다. “이 물을 먼저 펌프에 부으십시오. 그리고 물을 얻은 뒤에는 다음 사람을 위해 다시 병을 채워 두십시오.” 그 짧은 문장은 그에게 목숨을 건 선택을 요구했다. 그 물 한 병으로 당장의 갈증을 해결할 것인가?, 아니면 메시지에 믿음을 걸 것인가? 그는 믿음을 선택했다. 병 속의 물을 펌프에 붓고 열심히 손잡이를 움직였다. 잠시 후, 맑은 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그는 목을 축인 뒤 자신의 물통을 채우고, 약속대로 병에도 다시 물을 가득 담아 천장에 걸어 두었다. 그리고 쪽지 아래에 한 줄을 남겼다. “나도 의심했습니다. 하지만 이 펌프는 정말 작동합니다.” 이 이야기를 오래도록 마음에 품게 된 이유는 ‘물 한병’ 때문이다. 그 작은 병은 누군가의 배려였고, 다음 사람을 향한 신뢰였다. 한 사람이 약속을 지키고, 또 다른 사람이 그 약속을 이어 갔기에 사막에서도 생명은 계속 살아날 수 있었다. 우리의 삶도 그 물 한병 위에 서 있다. 부모가 흘린 땀, 스승이 전해 준 가르침, 선배들의 경험, 이름 없이 자신의 자리를 지켜 온 수많은 사람의 성실함…. 우리는 모두 누군가가 남겨 준 보이지 않는 물 한병을 마시며 오늘을 살아간다. 그래서 삶은 혼자 이루는 것이 아니다. 앞사람의 신뢰를 이어받고, 다시 뒷사람에게 전해 주는 긴 여정이다. 언젠가 우리도 이 세상을 떠나야 한다. 그날, 재산보다 값진 것 하나를 남길 수 있기를 바란다. 누군가가 절망의 순간에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용기를 건네는 말 한마디, 따뜻한 손길 하나, 그리고 “나도 걸어 보니 이 길은 괜찮았습니다”라고 말해 줄 수 있는 삶의 흔적 말이다. 사막은 곳곳에 존재한다. 그러나 그 사막이 완전한 절망이 되지 않는 이유는, 오늘도 누군가가 말없이 물 한 병을 채워 두고 떠나기 때문이다. 우리 역시 그런 사람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한 사람의 삶이 남길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 되지 않을까?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수필가이아침에 우물 펌프 번쯤 사막 가르침 선배들
2026.08.12. 18:41
아, 또 졌다. 어제까지 5단이었는데, 이제 4단이다. 바둑 이야기다. 아이패드나 전화기를 열어 태평양 건너 한국의 이름 모를 누군가와 일과처럼 바둑을 둔다. 상대방을 볼 수는 없지만, 돌을 보면 그 사람의 기풍이나 기분을 알 수 있다. 몸을 사리며 틈을 엿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변칙수를 꺼내 드는 사람도 있다. 그래서 평정심을 갖고 내 바둑을 두는 것이 쉽지 않다. 크게 이기고 있는 바둑을 잘 지키기는 생각처럼 쉽지 않다. 이미 판을 그르친 상대방이 마구 도발하기 때문이다. 이때 잘못 말려들면 역전패다. 다소 불리한 바둑도 포기하지 않고 한 집씩 내 집을 키우고 상대방의 집을 부수어나가면 짜릿한 역전승을 하기도 한다. 대마를 잡아 대승해도 한판의 바둑이고, 반집을 이겨도 한판승이다. 바둑 격언에 이런 말들이 있다. ‘피강자보 (彼强自保)’, 상대가 강한 곳에서는 내 마음을 낮추고 자신을 먼저 돌보라는 말이다. ‘아생연후 살타(我生然後 殺打)’ 도 비슷한 의미다. 내 돌은 아직 미생인데 남의 돌을 잡으려고 덤벼들다가는 결국 크게 망한다. ‘신물경속(愼勿輕速)’, 경솔하고 경망스럽게 빨리 두지 말라는 뜻이다. 빨리 두는 상대를 만나면 어느새 따라 두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 사람의 페이스에 말려드는 것이다. 대화도 그런 것 같다. 생각보다 앞서 서둘러 말을 하면 말실수를 하게 된다. ‘소탐대실(小貪大失)’, 작은 이익을 탐하다가 오히려 큰 것을 잃는다는 뜻이다. 가끔은 상대가 미끼를 던지기도 하는데 이때 덥석 물면 결국 큰 것을 잃게 된다. ‘기자쟁선(棄子爭先)’, 돌 몇 개(사석)를 버리더라도 선수를 잡는 것이 훨씬 이득이라는 뜻이다. 살다 보면 때로는 손해를 볼 때도 있다. 본전 생각에 밑 빠진 독에 계속 물을 부어봐야 손해만 커질 뿐이다. 도박이 그렇고, 안 되는 사업이 그렇다. 이럴 때는 빨리 손을 터는 것이 낫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뜻이다. 너무 승부에 집착하면 결코 이길 수 없다는 의미다. 내가 4단과 5단 사이를 오르내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바둑을 잘 두려면 상대방의 수에 대항해 내가 놓을 수와 그에 따라 앞으로 진행될 다양한 변화를 미리 머리로 놓아 보고 계산해 내게 유리한 수를 놓아야 한다. 고수들이 바둑을 두며 경험하고 연구한 수순을 정석이라고 하며 이를 따라 두면 모두 큰 손해 없이 진행된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이렇게 두지 않는 경우가 많다. 상대가 내 허를 찌르며 들어오는 것이다. 5단 오르기는 힘들어도, 4단 내려가는 것은 순식간이다.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바둑을 지고 나면 화가 나 또 두게 된다. 이때는 꼭 이겨 앞서 잃은 점수를 찾겠다는 마음뿐이다. 서두르게 되고, 공격적인 바둑이 된다. 그 판도 지고 나면 본전 생각이나 판을 떠나지 못한다. 하루 이틀 사이에 6, 7연패를 하면 어느새 4단이다. 찬물로 세수하고, 커피 한 잔 내려 다시 도전한다. 커피를 만든 이유는 한 모금씩 마시며 천천히 두자는 숨은 뜻이다. 중반에 접어들어 큰 싸움이 벌어져 어느새 손따라 두다가, ‘소탐대실,’ 또 졌다. 식어버린 커피를 마시며 다시 바둑판을 연다. 5단, 갈 길이 멀다. 고동운 / 전 가주공무원이아침에 바둑 격언 본전 생각 태평양 건너
2026.08.11. 18:29
세상에는 다녀간 자리마다 은은한 향기를 남기는 사람이 있다. 오래 머물지 않아도, 그 온기는 이상하리만치 오래 남는다. 나는 그 향기를 한 사람에게서 배웠다. Y다 한국에서 수필 대상 수상 소식을 듣고 서울로 향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도 그녀였다. 낯선 도시에서 길 하나 익숙하지 않은 나를 위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나의 시간을 준비해 주었다. 건네받은 일정표는 단순한 계획이 아니라 마음의 지도 같았다. 어디를 가는지보다, 어떻게 머물게 할지를 먼저 생각한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일본에서의 일정을 마치고 김포공항에 도착했을 때, 환하게 맞아주던 그녀의 미소는 낯선 공기를 단번에 따뜻하게 바꾸어 주었다. 이틀의 쉼을 마련해 주고, 영월로 향하는 길까지 세심하게 이어주던 손길. 그 배려 덕분에 나는 아무 걱정 없이 풍경 속으로 스며들 수 있었다. 시상식 날, 그녀가 건네준 장미꽃다발은 유난히 싱싱했다. 떠나는 날까지 엿새 동안 단 한 송이도 시들지 않았다. 나는 그 꽃을 끝내 버리지 못하고 호텔 방에 두고 나왔다. 꽃은 두고 왔지만, 향기는 가져올 수밖에 없었다. 여든여덟의 남편을 곁에서 돌보는 그녀는 그날도 변함없이 준비되어 있었다. 김밥과 간식을 챙기고, 내가 시상대에 오를 때는 남편의 팔을 부축하며 함께 그 자리에 서 주었다. 그 모습은 어떤 말보다 깊은 울림으로 남았다. 모든 일정이 끝난 뒤, 서울로 올라와 그녀는 호텔 앞에 나를 내려주고 떠나지 않았다. 방 안까지 들어와 편안한지 살핀 뒤에야 조용히 돌아섰다. 시작과 끝을 함께 책임지는 사람, 그러나 그 흔적은 늘 드러나지 않는다. 떠나기 전, 그녀가 건네준 참기름과 들기름의 고소한 향이 오래도록 손끝에 남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오래 남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비롯된 향기였다.이제 그녀는 내 곁에 없지만, 여전히 향기는 남아 있다. 나는 생각한다. 사람도 향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지 않아도 스며들고,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삶으로. 그녀의 이름을 떠올리면 항상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다. 그리고 그 향기는,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향기 마음 한편 엿새 동안 수필 대상
2026.08.02. 18:30
지금도 문득 귀를 기울이면 아련히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일반 가위보다 훨씬 크고 두꺼운 무쇠로 만들어서, 부딪힐 때마다 ‘찰깍찰깍’ 하는 특유의 맑고 경쾌한 쇳소리다. 그 소리만 들리면 골목은 금세 들썩였다. 아이들은 빈 병을 들고 뛰어나왔고, 나도 할머니의 고무신을 들고 나갔다.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떠드는 소리가 들리고 엿 위에 날카로운 끌(정)을 대고 작은 나무망치로 ‘딱, 딱, 딱!’ 치면, 엿이 원하는 크기로 툭 하고 부러지는 소리를 냈다. 당시 아이들에게 엿 맛은 그야말로 꿀맛이었다. 여기에 코끝을 스치는 칡 냄새까지 더해지면 골목은 어느새 활기 넘치는 작은 장터로 변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가장 기다리던 사람이 또 있었다. 바로 약장수였다. 풍각쟁이의 북소리가 둥둥 울리면 동네 사람들은 하나둘 빈터로 모여들었다. 나도 부엌일 하던 언니의 손을 잡고 맨 앞줄에 자리를 잡았다. 능청스러운 입담으로 사람들을 웃기던 약장수는, 마술과 원숭이 재주까지 곁들이며 순식간에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신명 나게 판을 벌이던 그가 갑자기 목청을 높였다. “애들은 가라! 애들은 가! 아버지 모셔와!” 그 말이 떨어지면 아이들은 정말 집으로 달려갔다. 아버지나 할아버지를 모셔와야만 그다음 흥미진진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약장수는 커다란 유리병을 번쩍 들어 올렸다. “이 약 한 제만 먹으면 뱃속 회충이 이렇게 다 나옵니다.” 병 속에서 꿈틀거리던 굵은 회충은 사람들의 눈길을 단숨에 붙잡았다. 지금 생각하면 허풍도 적지 않았겠지만, 사람들은 그의 말을 믿고 가족의 건강을 위해 주머니를 열었다. 할머니가 치마를 걷어 올리고 고쟁이 주머니에서 돈을 꺼내 사 오시던 고약도 기억에 선하다. 몸에 종기나 부스럼이 나면 정성스레 붙여 주셨고, 머리가 아프거나 배가 아플 때도 약장수의 약 한 봉지는 만병통치약처럼 여겨졌다. 믿음이 약효를 키우던 정겨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당시에 사람들이 산 것은 비단 약만이 아니었다. 웃음을 샀고, 위안을 샀고, 하루의 쏠쏠한 즐거움을 샀다. 문화시설 하나 없던 시절, 약장수의 북소리는 연극의 시작이었고 그의 입담은 입체적인 공연이었다. 사람들로 가득 찬 빈터는 마을의 열린 극장이 되었고, 약을 사지 않아도 함께 웃고 박수를 치는 것만으로도 마음은 한없이 넉넉해졌다. 세상은 몰라보게 변했다. 병원과 약국은 문만 열면 있고, 손안의 휴대전화로 무엇이든 찾을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그러나 생활이 윤택해질수록 골목에서 함께 웃던 풍경은 점점 사라져 갔다. 몸의 병은 더 잘 고치게 되었을지 몰라도, 현대인의 깊은 외로움까지 덜어 주지는 못하는 듯하다. 그래서 가끔은 귓가에 그 우렁찬 목소리가 그리움처럼 되살아난다. “애들은 가라! 아버지 모셔와!” 그 한마디에는 약을 팔려는 장삿속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온 동네 사람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고, 함께 웃게 하며, 사람 냄새가 물씬 배어 있던 시간을 만들어 내는 마법 같은 힘이 있었다. 이제야 깨닫는다. 내가 오래도록 그리워한 것은 약장수의 묘약이 아니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의 안부를 묻고, 웃음과 온기를 나누며 하루를 함께 살아 내던 그 골목의 시간이었음을.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골목 시절 약장수 고쟁이 주머니 뱃속 회충
2026.07.23. 18:47
굳이 핑계를 대자면 늦은 나이에 이민 와서 자리를 잡느라 바빴던 탓이다. 내게 음악, 특히 클래식은 그저 숨 가쁜 일상 너머에 있는 사치로 생각됐다. 수십 년을 LA에 거주하면서도 할리우드 보울을 찾은 것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였다. 화려한 불꽃놀이가 압권인 독립기념일 무대나 세계적인 한인 피아니스트 조성진과 임윤찬의 연주를 직접 보고 싶어 큰맘 먹고 나섰던 기억이 있다. 그만큼 내게 그곳은 평범한 일상과는 거리가 먼 특별한 이들의 공간이었다. 그러던 내게 특별한 초대장이 찾아왔다. 조카 친구가 LA 필하모닉의 비올라 부수석으로 당당히 합격하여, 영화 ‘모아나 월드 프리미어(Moana World Premiere)’ 초대권을 보내온 것이다. 아들에게 자랑했더니 LA 필 단원이 되는 것은 벼락에 맞을 확률만큼 대단한 것이라고 나보다 더 흥분했다. 궁금해 챗GPT에 물어봤더니 단원이 은퇴하거나 사망해야만 오디션이 열리고, 오직 연주 소리 하나만으로 평가하는 철저한 블라인드 테스트로 뽑는단다. 최고의 대우는 물론이고 은퇴할 때까지 자리가 보장되는 종신 단원(Tenure)이라니, 클래식 연주자들의 ‘꿈의 직장’다웠다. 미국에 유학 와서 대학과 대학원을 마칠 때까지 그 아이가 흘렸을 땀방울을 생각하니 자랑스럽고 자부심이 밀려왔다. 디즈니 만화영화를 실제 배우들이 출연하는 영화로 리메이크한 것을 영화 개봉 전 세계 최초로 볼 수 있다니 흥분되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들어선 헐리우드 보울은 이미 영화 속 ‘모투누이(Motunui)섬’ 그 자체였다. 주최 측이 재현해 놓은 폴리네시아의 이국적인 정취에 우리는 한순간에 압도되었다. 모아나가 타고 바다를 누비던 전통 돛단배(Wayfinding Canoe)가 위풍당당하게 서 있고 영화 속 화려한 전통 의상을 입은 관람객들은 근사한 포토 존에서 축제를 즐기는 듯 사진을 찍고 있었다. 영화 속 아웃핏을 입은 관객들을 대상으로 ‘베스트 드레서 콘테스트’가 열렸는데,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무대에 올라 저마다의 개성을 뽐냈다. 단순한 관람객을 넘어 진정으로 축제를 즐기는 주인공처럼 보였다. 평범한 일상복을 입고 온 나는 잠시 낯선 이방인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생각해보면 미국에 온 이후 내 삶이 늘 그랬다. 남들의 화려한 무대를 먼발치에서 바라보는 구경꾼이었다. 하지만 관객과 무대가 하나 되어 뜨겁게 숨 쉬는 열기를 오늘 직접 느껴보니 내 마음속에서도 작은 일렁임이 시작되었다. 다음번에는 나 역시 단순한 구경꾼이 아니라, 무대의 당당한 주인공이 되어 축제를 즐겨보겠다는 뒤늦은 다짐이다. 어둠이 내리고 폴리네시아 전통 음악과 춤으로 화려한 오프닝 무대가 펼쳐졌다. 유명 배우 드웨인 존슨이 무대에 등장하자 관객석은 환호성으로 뒤덮였다.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 아래 영화가 상영되고 LA 필의 연주는 웅장하고 감동적이었다. 영화가 끝나고 밤하늘을 수놓은 화려한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생각했다. 잊고 살았던 내 안의 모험심을 깨워준 영화 속 모아나처럼, 나 역시 이민자라는 이방인의 옷을 벗고 진정한 내 삶의 항해를 시작해야겠다고.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시사회 디즈니 만화영화 영화 개봉 클래식 연주자들
2026.07.22. 18:31
선배님 부부는 복수국적을 취득해 일 년의 절반은 한국에서, 나머지는 미국에서 사신다. 아드님들 보러 미국에 오시면 딱히 할 일이 없어 재미가 없다고 바깥 선생님이 불평이 많으시단다. 이 선배님의 부군 B사장님은 한국 방송사의 미국법인 사장님이셨다. 심심하면 옛날 회사 부근을 산책하곤 하신다. 어느 날 윌셔 길에서 한인 아주머니가 돈을 주셨단다. 10달러짜리 지폐를 주며 불쌍히 쳐다보시더니 식삿값이라 하곤 황급히 가셨단다. 거절할 새도 없이, 홈리스가 아니라고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팔순을 훌쩍 넘기신 수필가 K선생님은 스타벅스 모카 병 커피 애호가시다. 하루는 세븐일레븐에 커피를 사러 갔더니 점잖게 생긴 백인 남자가 “미안합니다. 이것밖에 수중에 없어서…” 하며 돈을 주더란다. 받고 보니 4달러였다. 거기서 그쳤으면 그래도 괜찮은데, 늘 보던 편의점 알바생이 10달러를 내밀며 제발 받으라고 하기에 받아왔노라 하신다. K선생님은 요즘 허리통증으로 고생 중이시고 허리가 많이 굽으셨다. 그러면서 하시는 말씀이 “이 선생, 거지가 아니어도 남들 눈엔 내가 거지로 보이나 봅니다. 하늘 갈 나이 되어서 다 비우는 중이니 거지가 맞지만, 적선을 받고 나니 참 씁쓸하네요” 하신다. 그 마음을 알 것 같다. 나도 선생님을 뒤따라가는 형국이어서 머지않은 때의 나의 모습일 것이다. 이번에 시댁 조카의 결혼식 참석차 한국에 갔었다. 만나고 싶은 분들은 내가 있는 분당으로 오셨다. 다리는 부실하고 총체적 난국인 내 건강 상태를 고려한 배려였다. 덕분에 여고동창들과 교회 오라버니들, 남동생들, 내 형편을 아는 오랜 친구들이 먼 곳에서까지 찾아와 반가운 대면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친구들은 나를 만나러 오면서 온갖 텃밭 푸성귀에, 맛난 빵, 좋은 책, 볶은 깨, 부엌행주, 화장품, 양산, 숄, 스웨터, 머그컵, 꽃, 떡, 보이차, 홍삼 진액에 작품가방, 건강용품, 조선 팔도 유명 먹거리까지 바리바리 많이도 싸 와서 나를 행복하게 해 주었다. 췌장암 완치 판정을 받은 친구는 기쁜 나머지 내게 용돈 봉투를 주기도 했다. 내가 축하금을 줘도 모자랄 판에. 이번 나간 김에 일곱 번째 수필집을 낸 내게, 작품 해설을 써주신 나태주 선생님도 여비라며 큰돈을 주셨다. 한국에서 받은 많은 사랑과 베풂을 생각나는 대로 적다 보니, 사람들은 본래 남과 나누는 마음을 가지고 태어나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 집만 해도 텃밭 채소나 과일은 우리 몫보다 남을 주는 게 더 많지 않은가 말이다. 어려운 이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마음도 어딘가에 숨겨놓고 살고 있는지 모른다. 이번에 선물 받은 네발 지팡이를 짚고 윌셔 거리로 한번 나가볼까나?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행색 선생 거지 작품가방 건강용품 수필가 k선생님
2026.07.15. 18:48
끙끙 앓는 소리에 밤잠을 설쳤다. 작년에 신경치료를 받았던 남편의 어금니가 또다시 말썽을 부린다. 며칠째 이어지는 치통에 담당 의사에게 연락했지만, 예약은 보름 뒤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진통제로 버티겠다는 말과 달리 그의 얼굴에는 통증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급한 대로 인근 치과를 찾던 중 남편의 사업장 단골이 한 곳을 추천해 주었다. ‘미아리 치과’, 이국땅에서 오래전 기억 속 지명을 만난 듯 반가웠다. 남편의 직장과도 멀지 않아 망설일 것도 없이 그곳으로 향했다. 막상 도착해 보니 상호는 보이지 않고 ‘G치과’ 라는 간판만 눈에 들어왔다. 한참을 헤매다 안으로 들어가 물었다. “혹시 이 근처에 미아리 치과가 있나요?” 직원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주변에는 우리 치과밖에 없는데 혹시 저희 선생님을 찾으시는 건가요?” 그제야 출입문 한쪽에 붙은 작은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DR. MIA LEE.’ 남편과 나는 서로를 바라보다 결국 웃고 말았다. 살다 보면 같은 말을 나누고도 서로 전혀 다르게 이해할 때가 있다. 얼마 전 지인과의 통화가 떠올랐다. 고등학생 아들의 중요한 프로젝트를 도와주던 남편은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자 답답한 마음에 결국 아들에게 목소리를 높였다고 한다. “이런 중요한 숙제를 왜 항상 마감 직전에 몰아서 하냐? 아빠는 그 나이 때 뭐든 혼자 계획해서 다 끝냈고, 성적도 항상 상위권이었어.” 그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아들이 서툰 한국말로 대답했다. “잘났어 아빠. 진짜 대단해.” 순간 남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뭐라고? 넌 아빠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남편은 그것을 비꼼으로 받아들였고, 이유도 모른 채 혼이 난 아들은 끝내 눈물을 보였다고 했다. 아들은 단지 감탄이 스친 짧은 표현이었을 뿐이다. 우리는 저마다의 렌즈를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같은 말을 듣고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있다. 어쩌면 우리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말에 비친 자신의 기억을 먼저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람은 결국 자신이 살아온 시간의 방식대로 듣고,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미아리 치과’도 그랬다. 익숙한 이름 하나를 마음속에 새겨 둔 채, 그 틀 안에서만 간판을 찾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사람 사이의 오해도 이와 다르지 않다. 우리는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보다, 이미 알고 있다고 믿는 모습으로 먼저 바라본다. 굳어진 확신은 때로 눈앞의 진심보다 마음속 기억을 먼저 믿게 한다. 이해란 결국 내가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음을 받아들이는 일이다. 섣불리 단정하지 않고 내 안의 확신을 잠시 내려놓을 때, 타인의 진심은 비로소 드러난다. 우리가 안다고 믿었던 세계는 생각보다 좁고, 이해라고 여겼던 것들 역시 한 조각의 시선에 불과했음을 그제야 알게 된다. 오늘도 나는 이해와 오해의 경계를 건너며 사람을 배워 간다. 김윤희 / 수필가이아침에 미아리 치과 미아리 치과가 인근 치과 우리 치과
2026.07.14. 19:34
6월 첫째 주 토요일은 따사로웠다. 하늘도 청명했다. 거리는 생각보다 한산해 예정보다 일찍 도착했지만, 주차장은 꽉 찼다. 그래도 계속 들어오는 차들이 있어 주차 안내를 하는 분들이 도와주고 있었다. 검은색 옷은 가급적 입고 오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인가 차에서 내린 사람들의 옷이 밝고 환했다. 무거웠던 마음이 가벼워지는 것 같았다. 사람들의 모습도 엄숙함보다 평상시와 다름없는 분위기가 느껴졌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모습이 들어왔다. 스크린과 강대상 앞에 꽃으로 둘러싸인 그녀의 영정사진은 환하게 웃는 모습이었다. 마치 그녀의 영혼이 우리를 반갑게 맞이하며 환대하는 것 같았다. 제법 큰 교회인데도 1층은 다 찬 것 같았다. 조문객이 250명 정도는 되었다. 그녀는 많은 단체에서 활동했다. 내가 아는 것만 해도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재미시인협회, 그리고 합창단 활동 등일 정도다. 그녀는 수필 모임을 끝낸 후 바로 다음 모임으로 서둘러 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녀를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6개월 전, 수필 모임 회원의 출판기념회에서였던 것 같다. 나는 그녀에게 요즘 얼굴 보기가 힘들다고 말했고, 그녀는 앞으로 모임에 잘 나오겠다고 답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녀의 죽음은 갑작스럽게 찾아왔다.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녀는 3-4개월쯤 전 줌으로 진행된 글공부 모임에 참석해 몸이 좀 아프다고머 말했다. 나는 그녀가 곧 회복할 것이라고 믿었다. 당시엔 그녀의 상태가 심각한지 몰랐다. 그녀가 몸이 아파 병원에 갔을 땐 이미 암이 많이 진전된 상태였다고 들었다. 그녀는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이미 죽음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면서도 마지막 순간까지 본인이 할 수 있는 것을 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녀는 임종 전 가족에게 세 가지 당부를 했다고 한다. 첫 번째는 본인이 천국에 입성할 것을 알기에 감사예배를 드려달라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조문객들이 검은 옷 대신 밝은 색상의 옷을 입었으면 좋겠다고 했단다. 세 번째는 조문객들을 극진히 대접하라는 것이었다. 천국 입성 감사예배가 끝나고 조문객들은 친교실로 안내되었다. 그녀의 바람대로 극진한 음식 대접이 기다리고 있었다. 많은 조문객의 표정도 밝았다. 그녀가 원했던 것은 조문객들이 슬픔 대신, 천국에 들어가는 자기를 환송하며 기뻐하는 모습이었던 것 같다. 그녀는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천국행 열차를 타게 되어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영혼이 숨 쉬는 장례식이었다. 기쁨과 감사가 흘러넘치는 이별이었다. 이러한 분위기에 슬픔은 끼어들지 못했다. 언젠가 있을 나와 가족의 장례식도 이런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정호 / 수필가이아침에 장례식 재미수필문학가협회 재미시인협회 천국행 열차 천국 입성
2026.07.07. 20:35
수련이 피어난 연못으로 왔다. 초여름 오전, 하루가 활기를 띠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마주한 수련 한 송이. 숨이 잠시 멈추었다. 경이롭다. 꽃잎에는 먼지가 한 점도 묻지 않은 투명하고 매끄러운 빛깔이 고여 있었다. 사람들은 흔히 물 위에 피는 꽃을 보면 그저 ‘연꽃’이라 통칭하곤 하지만, 이 꽃은 연꽃이 아니라 수련(睡蓮)이다. 수련은 이름처럼 밤이 되면 꽃잎을 오므리고 고요히 잠을 자듯 서늘해진다. 그 잠은 게으른 휴식이 아니다. 진흙이라는 어두운 바닥을 딛고 서서, 낮 동안 세상의 햇살을 가득 머금었다가 밤이 되면 다시 조용한 내면으로 침잠하듯 스스로를 정화해온 노력의 시간이다. 세상의 부유물들을 밀어내며 끊임없이 자신을 다스려온 결과물인 것이다. 연꽃은 잎과 꽃을 물 위로 1미터 이상 쑥 올려세워 장엄한 자태를 뽐내지만, 수련은 그저 물 표면에 찰싹 붙어서 낮게 핀다. 갈라진 곳 없이 둥글고 커다란 연잎과 달리, 수련의 잎은 한쪽이 브이(V) 자 모양으로 깊게 갈라진 하트 모양을 하고 있다. 마치 살아가며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 하나쯤은 품게 마련인 우리네 인간의 모습과도 닮았다. 하지만 그 상처 같은 갈라짐 속에서도 수련은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하다. 화려하게 위로 솟구치거나 겉을 포장하려 애쓰지 않아도, 제 자리를 지키며 피워낸 고운 결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아름다움이라고. 결이라는 단어를 생각해본다. 결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다. 나무의 나이테처럼 오랜 시간 일정한 방향으로 흐르고 쌓여야 비로소 제 모양을 갖춘다. 연꽃의 잎이 비를 맞으면 물방울을 또르르 굴려 떨어뜨리는 고고함이 있다면, 수련의 잎은 내리는 비를 그대로 받아내며 제 몸에 머금는다. 세상의 시련과 외로움을 온몸으로 받아내면서도 그토록 말끔할 수 있는 이유는, 겉면을 닦아내서가 아니라 내면의 결이 곧고 바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네 삶도 이와 닮아 있지 않을까. 살다 보면 마음 바닥에 진흙이 고이고 세상의 먼지가 내려앉는 날이 분명 있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화려한 수식어나 위장(僞裝)이 아니라, 내 안의 결을 다듬는 일이다.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만의 정체성을 맑게 유지할 때, 우리는 비로소 ‘낮은 바닥을 딛고도 이토록 말끔한’ 존재로 피어날 수 있다. 수련의 분홍빛 꽃잎 위로 투명한 결이 흐른다. 그 결을 따라 마음을 씻어본다. 나이가 들수록 얼굴의 주름보다 마음의 결이 고운 사람이 되고 싶다는 소망이 간절해진다. 꾸미지 않아도 빛이 나는 사람, 어떤 환경에서도 자신만의 투명함을 잃지 않는 사람. 오늘 마주한 수련이 내 마음의 결을 매끄럽게 다듬어 준다. 엄영아 수필가이아침에 마음 바닥 하트 모양 분홍빛 꽃잎
2026.07.06. 18:27
두툼했던 달력 몇장을 뜯어냈을 뿐인데, 한 해가 절반으로 접혀버렸다. 반환점을 만나면 가던 길을 돌아와야 하는 마라톤처럼, 한 해라는 시간의 반환점을 지나며 그동안 부지런히 달려온 날들을 돌아보는 때다. 흔히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곤 한다. 출발선은 모두에게 똑같지만 저마다의 속도로 부단히 달려 각기 다른 모습으로 결승선을 통과하는 과정이 인생의 여정과 똑 닮았기 때문이다. 인생이라는 마라톤에는 세 가지 중요한 지점이 존재한다. 첫 번째는 출발점이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서 출발 신호를 기다리며 느끼는 설렘과 승리를 향한 기대는 누구에게나 눈부시다. 다른 하나는 결승점이다. 마지막 남은 숨결까지 쥐어 짜내며 결승선을 통과할 때의 성취감은 끝까지 버텨낸 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렇다면 출발점과 결승점 사이에 있는 ‘반환점’은 우리에게 어떤 의미일까. 마라토너들은 마라톤 경주 중 반환점을 돌 때 가장 편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절반을 지나왔다는 안도감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제부터 달려가는 길은 낯선 땅이 아니라 발바닥이 기억하는 익숙한 길이기 때문이다. 어디쯤에서 오르막길이 나오고 어디서 굽은 길과 마주할지 알기에, 막막함은 줄어들고 자신감이 차오른다는 것이다. 고은 시인은 “내려갈 때 보았네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이라고 노래하며 반환점을 돌아 내려오는 길의 여유를 전했다. 물론 세월이 안내하는 길은 반환점을 돌았다고 뒤로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지나온 시간을 디딤돌 삼아 여전히 앞으로만 나아가야 하는 외길이다. 그럼에도 세월의 반환점이 감사한 까닭은 지나온 길에서 저질렀던 실수를 만회하고 잘못 든 방향에서 기꺼이 돌아설 기회가 주어지기 때문이다. 반환점은 처음부터 너무 빨리 뛰다 지쳐버린 이들에게, 혹은 방향을 잃었다가 뒤늦게 자리를 찾은 이들에게 나직이 속삭인다. 지나온 서툰 세월은 잊고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진짜 의미 있는 경주를 이어가면 된다고 말이다. 반환점은 비단 2026년이라는 달력 위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성공의 정점에서 문득 공허함을 마주했다면, 예기치 못한 상실과 고난과 마주쳤다면, 앞만 보고 달리느라 주위를 살피지 못했다면 그때야말로 반환점을 돌 때다. 반환점은 성공이 아니라 의미를, 성취가 아니라 나눔을, 속도가 아니라 바른 방향을 찾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어느덧 7월이다. 온갖 어수선한 세상 이야기들과 지나간 세월에 대한 아쉬움은 한 해의 반환점을 돌며 훌훌 털어버리자. 그리고 우리를 향해 환히 열려 있는 하반기를 향해 힘찬 경주를 다시 시작해 보자. 실패와 실수를 뒤로하고 새로운 희망의 길로 나갈 수 있다면, 오늘 우리가 지나는 세월의 ‘반환점’은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 우리의 남은 여정을 밝은 미래를 인도할 것이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반환점 마라톤 경주 진짜 의미 결승점 사이
2026.07.05. 18:40
평소 크루즈를 즐기던 친구에게서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LA 샌피드로를 출발해 캐나다의 빅토리아를 거쳐 밴쿠버로 향하는 4박 5일 일정이 1인당 단돈 200달러라는 것이다. 게다가 50달러를 추가하면 발코니 객실로 업그레이드할 수 있는 행운까지 따랐다. 이 크루즈는 선박 이동 과정에서 판매하는 이른바 ‘리포지셔닝 크루즈’였다. 빈 배로 이동하느니 저렴하게라도 객실을 채워 운영비를 충당하려는 것이다. 최근 비싼 외식비를 생각하면 저렴한 비용으로 누리는 호사여서 미안할 정도였다. 며칠 동안 육지를 보지 못하고 바다만 달리는 지루함을 염려했으나 기우였다. 친구들과의 여행은 학창 시절 수학여행을 떠올리게 했다. 밤늦도록 둘러앉아 웃고 떠드니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준비해 간 똑같은 잠옷으로 갈아입고 마스크 팩을 붙인 채 서로의 고민을 털어놓던 시간은 그 자체로 힐링이었다. 부지런한 친구들 덕분에 아침에는 줌바댄스와 타이치를 배우고, 저녁에는 각종 공연을 즐겼다. 각자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친구들을 보며 나 자신을 돌아보기도 했다. 누군가는 친구 누군가는 친구와의 여행이 우정을 시험하는 무대라고 말하지만, 내게는 다정한 추억만 남았다. 깊은 정서적 교감을 나누며 나이가 들수록 친구라는 존재가 얼마나 귀한지 새삼 깨달았다. 함께 일상을 나누고 소통할 수 있다는 것, 그 자체가 큰 행복이었다. 첫 기항지인 빅토리아의 부차트 가든은 온통 꽃들의 축제였다. 형형색색의 튤립이 만개해 있었고 소박한 꽃이라 생각했던 철쭉도 다양한 색깔과 커다란 꽃송이로 감탄을 자아냈다. 꽃향기에 취해 걷는 내내 미소가 절로 나왔다. 강세인 미국 달러 덕분에 우버 비용과 입장료, 식비까지 상대적으로 저렴하게 느껴져 가성비를 따지는 은퇴자로서 마음이 흐뭇했다. 마침내 도착한 밴쿠버에서 뜻밖의 해프닝이 벌어졌다. 모든 일정을 완벽하게 준비한 친구의 착각으로 호텔 예약이 누락된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더 좋았다. 퀸사이즈 침대 두 개가 있는 넓은 방 하나에서 넷이 함께 묵게 되니, 서로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이 추억은 더 풍성해졌다. 마침 워킹홀리데이를 와 있던 한인 여학생을 만나 따뜻한 격려를 건네기도 했다. 최근 밴쿠버를 다녀온 친구 덕분에 전문 가이드 못지않은 알찬 안내를 받았다. 유명 식당과 카페를 찾았고, 도심 속 거대한 스탠리 파크를 걸었다. 캐필라노 서스펜션 브릿지에서는 아찔한 공중 산책을 즐겼다. 개스타운의 고풍스러운 증기 시계와 그랜빌 아일랜드의 예술가 거리도 인상적이었다. 여행경비를 따져보면 250달러 크루즈 비용은 사실 미끼였다. 5일간의 크루즈 팁, 호텔 숙박비, LA로 돌아오는 항공료까지 더하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다. 하지만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니 일상에는 새로운 활력이 생겼다. 비록 미끼에 걸렸어도 함께 웃고 추억을 쌓은 친구들이 곁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돈이 전혀 아깝지 않았다. 어쩌면 이번 여행에서 가장 값진 수확은 크루즈가 아닌 친구들이었는지도 모른다.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달러짜리 미끼 친구들 덕분 친구 덕분 리포지셔닝 크루즈
2026.07.02. 19:48
지난주 오랜만에 아들 집을 찾았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손주들이 반갑게 달려왔다. 거실에 들어섰을 때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벽에 붙어 있는 커다란 글씨였다. ‘Happy Birthday’. 생일파티 때 사용하는 흔한 장식이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번 달은 손주들도, 아들 내외도 생일이 아닌 것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일이 지난 후 미처 떼지 못했나 보다 생각하며 대수롭지 않게 넘기려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거 왜 아직도 안 떼었니?” 아들이 웃으며 대답했다. “아버지, 우리는 그냥 계속 붙여 놓기로 했어요.” “계속?” “네. 우리 네 식구가 서로의 생일을 일 년 내내 축하하는 마음으로 살자는 뜻이에요. 그래서 떼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어요.” 순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화려한 액자도, 값비싼 예술품도 아닌 종이 장식에 불과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어떤 것 보다 아름답게 보였다. 생각해 보니 생일이란 참 이상한 날이다. 일 년에 하루만 특별한 날로 정해 놓고 축하한다.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이 함께 살아가는 매일이 사실은 축하받을 만한 날이 아닐까. ‘Happy Birthday’라는 이 말은 그저 하루를 즐겁게 보내라는 가벼운 인사가 아니다.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누구에게는 커다란 기쁨이자 위로라는, 존재에 대한 가장 다정한 긍정이라고 본다. 우리가 매년 무심코 주고받는 축하 속에는 “당신이 우리 곁에 있어서 참 다행입니다”라는 고백이 숨어 있다. 우리들의 일상 속에서 ‘태어남과 존재’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는 특별한 날임에는 틀림이 없다. 세상에는 값비싼 장식품도 아름다운 그림도 많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는 것은 물건의 가격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생각이라는 것을 그날 다시 배웠다. 아들 집 거실 벽에 365일 늘 붙어 있는 ‘Happy Birthday’. 그것은 생일 장식이 아니라 가족의 사랑을 적어 놓은 작은 가훈이었다. 제이 황 / 서양화가이아침에 버스데이 birthday happy birthday 해피 버스데이 아들 내외도
2026.06.30. 19:46
산길을 오르는 발걸음은 늘 익숙하면서도 번번이 새로운 풍경을 선물한다. 그날도 오닐 리저널 파크(O‘Neill Regional Park)의 흙길을 따라 산으로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무심히 지나칠 뻔한 길가에서 걸음을 멈추게 한 것은 거대한 고목 한 그루였다. 오랜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못해 몸속이 하얗게 비어버린 나무였다. 거칠게 갈라진 껍질과 깊게 팬 몸통에는 지나온 비바람의 시간이 켜켜이 새겨져 있었다. 이제는 생명을 다하고 조용히 대지로 돌아갈 일만 남은 듯 보였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내 눈길을 붙드는 뜻밖의 풍경이 있었다. 썩어 내린 몸통 깊은 틈 사이로 연둣빛 새순 하나가 고개를 내밀고 있었다. 거칠고 거뭇한 고목의 살결을 뚫고 나온, 금방이라도 툭 터질 듯 싱그러운 생명이었다. 주변의 짙은 녹음 속에서도 그 빛은 유난히 맑고 투명했다. 죽음의 흔적 위에서 피어난 어린 생명은 햇살을 향해 조용히 손을 뻗고 있었다. 거칠고 어두운 고목과 연약하도록 여린 새순이 한자리에 서 있는 모습 앞에서 나는 한동안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그 연둣빛을 바라보며 문득 우리의 삶도 이 고목을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비바람을 견디며 살아간다. 세월이 흐를수록 몸과 마음에는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고, 때로는 삶의 한 부분이 허물어져 내리는 상실도 겪는다. 나 역시 나이가 들어가며 채우는 일보다 비워내고 내려놓는 일이 더 많아졌음을 느낀다. 오래 쥐고 있던 짐들을 하나씩 덜어내며 삶을 정돈하는 요즈음이기에, 속이 텅 빈 나무의 모습이 남 일 같지 않았다. 그런데 자연은 썩어가는 몸을 단순한 소멸로 남겨두지 않았다. 오래된 나무는 자신의 몸을 내어주어 어린 생명이 뿌리내릴 자리를 만들고 있었다.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생명을 품어내는 가장 깊은 자리가 되고 있었다. 생각해 보면 삶도 그러한지 모른다. 한 시절이 저문다는 것은 단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다음 생명을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과정인지도 모른다. 내가 지나온 시간의 상처와 흔적들이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따뜻한 그늘이 되고, 다시 살아갈 힘을 주는 부드러운 흙이 되어줄 수 있지 않을까. 산길을 내려오며 오래도록 그 고목의 연둣빛이 마음속에서 흔들렸다. 가장 늙고 깊이 상한 자리에서도 삶은 끝내 새로운 빛을 밀어 올리고 있었다. 엄영아 수필가이아침에 고목 연두 연둣빛 새순 다음 생명 한동안 발걸음
2026.06.29. 18:10
한때 남가주 한인 경제의 한 축이었던 봉제업계가 큰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파르게 오른 최저임금으로 생산 단가가 치솟으면서 봉제 공정의 상당 부분은 이미 타주와 해외로 빠져나갔다. 히스패닉계 노동자들마저 떠나기 시작했고, 일거리가 있어도 인력이 부족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다. 삼십여 년을 봉제 공장 한길만 걸어온 형님도 예외는 아니었다. 요즘같이 힘든 적은 처음이라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사업을 접자니 평생을 쏟아부은 시간이 무너지는 것 같고, 그렇다고 다시 남 밑에서 일을 시작할 수도 없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몇 주 전, 형님에게서 전화가 왔다. 오랜만에 큰 온라인 쇼핑몰 납품 계약을 따냈는데, 일손이 부족하니 며칠만 도와달라는 부탁이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다른 일정을 미루고라도 가겠다고 했다. 공장에 도착해 보니 예전과 달리 썰렁했다. 기계 소리는 여전했지만, 사람의 기척은 눈에 띄게 줄어 있었다. 내가 맡은 일은 완성된 옷을 정갈하게 접어 사이즈별, 컬러별로 분류해 봉투에 넣는 포장 작업이었다. 단순해 보였지만 끝없이 밀려드는 옷더미 앞에서 허리를 펼 틈조차 없었다. 하지만 내 손끝에서 완성품이 하나씩 쌓일수록 형님의 근심은 조금씩 덜어지는 것 같아 마음은 가벼웠다. 돌아가지 않는 재봉틀 앞 빈 의자들이 자꾸 눈에 밟혔다. 한때는 사람들로 북적였지만, 지금은 스무 대 정도의 기계 소리만 공장 안을 메우고 있었다. 점심시간이 되어도 형님은 쉽게 자리에 앉지 못했다. 납기가 늦어져 계약이 끊기지는 않을지, 형님은 계산기를 두드리다 말고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침묵이 기계 소리보다 더 크게 들렸다. 시간은 기계 소리 사이로 흘러갔고, 마지막 박스들이 하나둘 트럭에 실려 나가자, 형님은 내 손을 꼭 잡았다. “동서, 정말 고마워. 동서 아니었으면 제때 못 내보냈을 거야.” 처음 해보는 일이라 도움이 되었을까 내심 걱정했지만, 그 인사 앞에서 더 묻지 않았다. 공장을 나선 뒤에도 기계 소리보다 형님의 한숨이 오래 귓가에 맴돌았다. 묵직한 적막 속에서 지는 석양을 바라보다 문득 오래전 읽었던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그래도 살아진다. 우리 안에는 섬이 하나 있는데, 그 이름이 ‘그래도’다.” 나는 그 다정한 섬 이름을 입안에서 가만히 굴려 보았다. 모진 세파가 삶을 거칠게 흔들 때, 우리는 쉽게 무너질 것처럼 느낀다. 하지만 그 순간 우리를 버티게 하는 것은 대단한 기적이 아니다. ‘그래도’ 가족이 있고, ‘그래도’ 곁에 사람이 있고, ‘그래도’ 내일은 다시 온다는 믿음 하나로 오늘을 견딘다. 시간이 흐르면 지나가지 않을 것 같던 순간도 결국은 지나간다. ‘그래도’를 품은 사람은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그것은 체념이 아니라 삶을 끝까지 붙드는 힘이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형님의 공장 재봉틀 소리가 오래 멈추지 않기를 바랐다. 고단한 삶을 버티는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그래도’라는 말 하나가 불씨처럼 남아 있기를. 미래는 멀리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가 지켜낸 삶의 자리에서 시작된다. 그래도, 그렇게 하루는 흘러간다. 김윤희 / 수필가이아침에 기계 소리 공장 재봉틀 봉제 공장
2026.06.28. 18:41
매년 6월이 되면 한미무용연합 진발레스쿨이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행사가 있다. 바로 6·25 참전용사 기념행사다. 올해도 어김없이 초청을 받았다.월드컵 응원 행사와 각종 공연으로 바쁜 시기지만 이 행사만큼은 꼭 참석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 민족의 역사와 아픔을 다음 세대에게 전하고, 참전용사들의 희생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는 소중한 자리이기 때문이다. 공연 준비 중 LA에서 태어난 여섯 살 한인 학생이 내게 물었다. “선생님, 한국전쟁이 뭐예요?” 아이의 눈높이에 맞춰 “아주 오래전 한국에서 전쟁이 있었고, 많은 사람이 나라를 지키기 위해 희생됐단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거야”라고 설명해 줬다. 하지만 어린아이에게 전쟁의 의미를 모두 이해시키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오늘 행사에 가면 더 잘 알게 될 거야”라고 덧붙였다. 퍼시픽 팰리세이즈 재향군인회관에서 열린 한국전쟁 76주년 기념행사에는 한국과 미국의 참전용사와 가족들, 지역사회 인사들이 함께했다. 한국전쟁의 역사와 희생을 담은 영상이 상영되었고, 기념사와 감사 영상이 이어졌다. 학생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영상을 바라보며 역사 속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특히 한국과 미국의 참전용사들이 반갑게 재회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유를 위해 헌신했던 분들이 서로의 건강을 기원하며 따뜻하게 인사를 나누는 모습에서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존재하고, 우리가 자유롭게 살며 예술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이날 학생들과 함께 ‘한미 우정의 깃발’, ‘카르멘’, ‘독도는 우리 땅’을 공연했다. 여섯 살 어린 학생들부터 시니어 단원들까지 세대를 아우르는 출연자들이 한 무대에 서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했다. 단순한 공연이 아니라 역사를 배우고, 봉사의 가치를 나누며, 세대 간의 화합을 경험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현장이었다. 그날 우리는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는 예술의 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매년 뜻깊은 행사를 준비하는 대한민국 육군협회 관계자 여러분께 감사를르 전한다.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과 참전용사들에 대한 존경이 없다면 오랜 세월 이런 행사를 이어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또 바쁜 주말에도 기꺼이 아이들과 함께해 준 학부모님들께도 감사드린다. 사업과 가정의 일을 뒤로하고 봉사에 참여하는 모습은 아이들에게 무엇보다 좋은 교육이 되었을 것이다.공연 후에는 봉사 공로상을 받는 뜻깊은 시간도 있었다. 그 상은 학생들과 실버 발레팀, 학부모님들, 그리고 함께 봉사한 모든 분과 나누고 싶다. 그날 우리는 단순히 무대에 오른 것이 아니었다. 역사를 배우고, 감사를 전하고, 봉사의 의미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에서 왔는지, 그리고 왜 역사를 기억해야 하는지 조금씩 배워가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이 우리가 예술을 통해 지역 사회와 함께 하는 이유일 것이다. 정체성을 지키며, 감사의 마음을 다음 세대에 전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 기억 속에서 우리를 잊지 않기 위해서…. 진최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한국전쟁 기억 선생님 한국전쟁 가족들 지역사회 봉사 공로상
2026.06.23. 19:01
나는 곁에 앉아 있는 강아지를 애완견이라 부르지만 한 학생은 달랐다. 그 학생은 자신의 강아지를 ‘최고의 친구, 마음 치료사’라고 소개한다. 어느 날 초대를 받은 지인의 집에 갔다. 그 지인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할머니가 나를 불렀다. 할머니는 낮은 목소리로 “우리 집에 걱정이 한 가지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여유가 있는 집에 걱정이라니? 무슨 일일까? 할머니는 2층을 가리키며 “저기 손녀딸이 있는데요. 학교를 그만뒀어요. 학교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도통 말을 안 해요. 그래서 걱정이 이만저만 아녜요. 달래고, 훈육하고 비위도 맞추고 온갖 방법을 동원해도 소용이 없어요. 사람을 싫어해 밖에도 안 나가요. 스트레스로 먹기만 하니 살만 찌고, 우울증 환자가 되었어요.” 할머니의 말을 들으니 본 적 없는 학생이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러던 어느 날, 강아지를 키워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을 받았다. 그 순간 그 아이가 떠올랐다. “아, 이거다. 강아지를 키워보게 하는 거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번쩍였다. 한걸음에 달려가 강아지를 안았다. 하얀 털 사이로 검은 무늬가 번져 있는 예쁜 강아지였다. 가슴에 안으니 생명이 지닌 온기가 고스란히 전해졌다. 나는 그 온기를 망설임 없이 그 아이에게 건넸다. 시간이 지난 후 들려온 이야기. 처음엔 귀찮아했다고 한다. 하지만 작고 여린 존재는 쉽게 외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해피’라 부르며 돌보기 시작했단다. 해피는 매일 같은 음식을 먹어도 신이 났고, 같은 공을 가지고도 즐거워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불러주기를 기다렸다. 아이에게 해피는 사랑스러운 존재가 되어갔다. 얼굴을 비벼대고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목욕을 시켜주고, 머리를 빗겨주고, 함께 하루를 시작하고 끝내며 아이의 멈추어 있던 일상이 조금씩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해피와의 산책을 위해 집 밖으로도 나가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이야기로 웃음을 나누며 아이는 다시 세상과 이어졌다. 무엇보다 강아지는 가족에게 공동의 화젯거리를 만들어 내며 서로의 마음을 이어주는 다리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일 년이 지나갈 무렵 아이는 책상에 앉아 다시 책을 펼쳤다. 강아지에게 무슨 힘이 있는 걸까? 약도 아니고, 어떤 처방도 아닌데. 그저 곁에 머물렀을 뿐인데. 강아지는 알고 있을까? 그 작은 몸으로 꼬리를 흔들며 살아가는 동안 어둠 속에서 헤매는 누군가에게는 빛을 밝혀주고, 웃음을 읽은 누군가에게는 웃음을 찾아 주고, 그리고 누군가에게는 삶을 이어가게 한 손길이 되었다는 것을. 그래서 오늘도 나는 생각한다. ‘작은 마음 치료사’, 그 이름이 참 잘 어울린다고. 오귀순 / 수필가이아침에 치료사 마음 마음 치료사 친구 마음 우울증 환자
2026.06.16. 19:12
인생이라는 긴 여정 위에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그어지는 ‘보이지 않는 선’들이 있다. 때로는 서툰 발걸음으로 타인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고, 소중한 기물을 깨뜨려 당혹스러운 순간을 만들기도 한다. 50년 전, 갓 신앙의 문을 두드렸던 젊은 날의 나에게도 그런 잊지 못할 기억이 하나 깊이 박혀 있다. 우리 가족은 구역 식구들을 초대한 집으로 갔다. 아이들의 해맑은 공놀이가 한창일 때, 초등학교 2학년이던 아들의 손에 들려있던 공이 거대한 통유리창을 향해 날아갔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유리창은 산산조각이 났다. 시간이 멈춘 듯한 정적 속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막막함이었다. 그러나 집주인이었던 권사님은 깨진 유리 파편보다 아이의 발끝을 먼저 살피셨다. 간호사였던 그분에게 깨진 유리는 ‘갈아 끼우면 되는 물건’이었지만, 겁에 질린 아이는 ‘다쳐서는 안 될 고귀한 생명’이었던 것이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나에게 수리비를 극구 사양하시던 그분의 인자한 미소는 오랫동안 내 마음 한구석에 갚지 못한 해묵은 부채로 남았다. 그로부터 반세기 가까이가 흐른 며칠 전, 막내딸과의 점심 자리에서 딸의 전화가 울렸다. 20년이나 딸의 집 마당을 관리해온 가드너 아저씨의 기계속으로 돌멩이가 튀어 1400달러짜리 통유리를 깨뜨렸다는 것이었다. 절대 가볍지 않은 금액이었으나, 전화를 받는 딸의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딸은 오히려 “괜찮아요, 아저씨. 다치신 곳은 없으세요?”라며 연신 부드러운 웃음으로 대답하고 있었다. 나는 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엄마, 그 돈이 우리에겐 돈일 뿐이지만 일흔세 살 그 아저씨에겐 식량일 거예요.” 딸의 입술을 타고 흐르는 그 말은, 50년 전 나를 감싸 안았던 권사님의 음성과 묘하게 겹쳐 들렸다. 친절과 자비는 공중으로 흩어지는 연기가 아니었다. 그것은 보이지 않는 공기 중에 머물다,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타인의 손을 빌려 되돌아오는 온기였다. 아들이 깨뜨린 유리를 딸이 대신 갚는 이 절묘한 ‘인생의 되돌이표’를 마주하며, 나는 비로소 반세기 동안 품어온 마음의 짐을 가볍게 내려놓을 수 있었다. 세상에 베푼 선의는 결코 허공에서 소멸하지 않는다. 그것은 누군가의 기억 속에 씨앗으로 잠들어 있다가, 세월의 강을 건너 자녀의 삶에서 눈부신 꽃으로 피어나기도 한다. 오늘 딸이 보여준 넉넉함은 50년 전 내가 받았던 그 사랑이 내 아이의 영혼 속에서 바르게 자라주었다는 증거이리라. 깨진 유리창 사이로 스며든 것은 차가운 바람이 아니었다. 그것은 세대를 관통하며 흐르는 나의 해묵은 부채의식까지 환하게 비추는 따스한 은혜의 햇살이었다. 엄영아 수필가이아침에 유리창 유리창 사이 1400달러짜리 통유리 가드너 아저씨
2026.06.15. 18:25
야외에서 밤을 보내는 캠핑은 언제나 가슴을 설레게 한다. 이번 메모리얼데이 연휴에도 그 설렘을 안고 길을 나섰다. 블랙앵거스가 자유롭게 풀을 뜯는 목가적인 풍경을 지나 도착한 실버레이크 캠프그라운드는 이름처럼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5월의 끝자락임에도 사방은 눈 덮인 고산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청량한 폭포 소리가 계곡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람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슴 가족이 한가로이 거니는 풍경은 마치 TV 여행 프로그램 ‘텐트 밖은 유럽’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 평화로웠다. 본격적인 산행은 새벽 6시부터 시작됐다. 저녁 7시 40분까지 무려 13시간 동안 3만5000보 이상을 걸은 긴 여정이었다. 이스턴 시에라의 웅장한 바위산과 푸른 호수, 거침없이 쏟아지는 폭포와 야생화를 마주하니 거칠고도 순수한 캘리포니아의 진짜 속살을 맛본 느낌이었다. 그러나 대자연의 압도적인 아름다움 뒤에는 만만치 않은 시련이 숨어 있었다. 고산지대의 등산로는 여전히 깊은 눈에 덮여 길을 찾기 어려웠고, 리더가 의지하던 등산 앱 ‘올트레일즈(AllTrails)’마저 먹통이 되기 일쑤였다. 감각과 경험에 의존해 길을 찾아야 하는 구간도 적지 않았다. 얼어붙어 미끄러운 경사면과 가파른 스위치백 구간을 지나야 했지만, 우리는 눈 산행에 필수인 크렘폰조차 없었다. 그런데도 끝까지 침착함을 잃지 않고 길을 안내한 리더의 책임감과 내공에 모두가 감탄했다. 산행 중 내가 가장 긴장했던 순간은 계곡을 건널 때였다. 양말과 등산화를 벗어들고 얼음처럼 차가운 물 속을 맨발로 건너야 했다. 이끼 낀 돌에 미끄러질까 온몸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또한 얼어붙은 경사면을 걸어야 했을 때 산행 경험이 풍부한 자넷 언니가 앞장섰다. 가파른 눈길을 자기 등산화로 여러 차례 꾹꾹 밟아 단단한 발자국을 만들며 말했다. “내 발자국을 밟고 그대로 따라와.” 그 한마디는 단순한 안내 이상이었다. 해발 1만 피트가 넘는 고지에서 고산병 증세로 두통이 밀려왔지만, 타이레놀을 나누고 서로를 격려하며 한 걸음씩 나아갈 수 있었다. 무사히 하산해 캠핑장으로 돌아올 때, 또 한 번의 뭉클한 감동이 기다리고 있었다. 산행에 참여하지 못한 선배들이 이웃 캠퍼에게 망원경을 빌려서 우리의 위치를 확인하며 제시간에 마중을 나와 준 것이다. 무릎 통증으로 산행에 동참하지 못한 팀의 막내 써니는 우리 손에 동전을 쥐여 주며 코인 샤워장에 얼른 다녀오라고 등을 떠밀었다. 샤워를 마치고 돌아오니 정성껏 차린 저녁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족발과 육개장, 따끈한 부침개와 고등어구이까지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을 따뜻한 온기로 위로해 주었다. 길을 잃고 헤매던 눈길에서도, 하산 후 둘러앉은 따스한 식탁 위에서도 가슴 깊이 남은 단어는 결국 ‘함께’와 ‘감사’였다. 낯선 땅에서의 이민 생활 역시 쉽지 않은 여정이다. 그러나 서로의 발자국이 되어주고 따뜻한 밥상을 나누는 이웃들이 있기에 견딜 만했다. 한밤중 문득 잠에서 깨어 올려다본 하늘에 별들이 유난히 밝게 빛난다. 그 빛은 어쩌면 함께 걸어준 사람들에 대한 감사의 마음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메모리얼 캠핑 산행 경험 스위치백 구간 실버레이크 캠프그라운드
2026.06.09. 18: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