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글에서 찾아보니 ‘취미’는 즐거움을 위한 활동이고, ‘특기’는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재능을 의미한다고 써있다. 이 두 단어가 인생에서 어떻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지, 경험을 나누려한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둥지를 떠난 후, 우리 부부만 남은 집은 너무 적막했다. 하루는 길었고,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 문득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어린 시절, 제대로 된 미술 도구조차 없어 그림 그릴 엄두도 못 냈던 기억 때문일까. 망설임 없이 수채화 물감, 붓, 스케치북, 이젤까지 샀다. 그 순간의 뿌듯함과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 발코니에 가득 피어있던 붉은 베고니아 화분을 처음 그렸다. 명암도 원근도 무시한 서툰 그림이었지만, 거실 벽에 기대어 세워둔 그 그림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격과 행복감에 온 마음이 베고니아로 가득 찼다. 손님들이 그림을 칭찬하며 “누가 그렸느냐”고 물으면, “취미로 시작했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라고 답하곤 했다. 학창 시절 이론만 배웠던 미술 시간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미국으로 이주한 후, 손녀의 아트 교실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나도 그림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았다.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주 1회 수업을 결정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다시금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제 정말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등학교 때 적성 테스트에서 내 공간 지각 능력 점수가 형편없이 낮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리력과 추리력은 만점에 가까웠지만, 예능 감각과 직결되는 공간 지각 능력은 80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는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분야였던 것이다. 여행 중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는 만족 못 하고 늘 그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 자식들은 나의 그림을 좋아했다. 장미를 뭉개듯 그려도, 해바라기를 들국화처럼 그려도, 어른을 아이처럼 그려도 “엄마 그림이라 좋다”며 너그럽게 봐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인 사위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분들이 내 그림에서 “아마추어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선함이 있다”며 한국에서 그린 제라늄 그림을 부엌 벽에 걸어 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1년은 10학년 손자가 우리 집에서 지냈다. 운동에 특기가 있는 손자는 본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 부모형제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전학을 왔다. 공부만 하는 집안에서 운동을 하겠다니,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잠시 그러다 말겠지 싶었지만,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손자는 옆도 뒤도 안 보고 학교생활과 클럽 스케줄에 몰두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까지 보였다. 손자는 취미와 특기가 같은 경우였다. 스스로 즐겁게 운동하며 열심히 노력하니 성과 또한 뛰어났다. 이제 손자도 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1년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너무 오래 쉬어서 아직 엄두가 나지 않지만, 나는 붓을 놓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나를 잘 아는 동생은 잘하는 일을 하지 왜 그림으로 씨름하느냐고 하지만, 그저 즐거우니까 계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롯이 즐거움을 위한 취미 생활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영희 / 수필가이아침에 행복 그림 아마추어 그림 제라늄 그림 엄마 그림
2025.07.31. 18:07
살면서 숱한 헤어짐과 만남을 겪는다. 젊었을 때는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로 헤어짐을 견디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다는 호기로 만남을 가볍게 대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헤어짐은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기고, 만남은 만남대로 부담이 되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새 교회로 부임하면서 정든 교우들과의 헤어짐과 낯선 교우들과의 만남으로 뒤숭숭해진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만남과 헤어짐의 무게를 느낄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 새로 오는 목사를 기다리던 교우들과의 첫 예배에서 정채봉 선생이 말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이자 동화 작가였던 정채봉 선생은 다섯 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했다. 그는 첫 번째로 ‘생선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에 가장 잘못된 만남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두 번째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꽃송이는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려지기에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이다. 그가 말했던 또 하나의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인데, 만남의 의미가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에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이라고 했다. 그는 또 ‘건전지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하면서 이 만남은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다가 힘이 닳아 없어질 때는 버리기에 가장 비참한 만남이라고 했다. ‘생선, 꽃송이, 지우개, 건전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단어들이 이토록 날카롭게 만남을 풍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만남을 괜찮게 빗댈 말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하늘, 바다, 산, 들’ 그럴듯한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정채봉 선생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는 ‘손수건 같은 만남’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인 까닭은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며 손수건보다 생선, 꽃송이, 지우개, 건전지가 그들과의 만남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손수건 같은 만남’을 갖겠다고 다짐하는데, ‘손수건은 무슨 손수건!’이라는 우레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소리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손수건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게 묻자, 불쑥 ‘걸레’라는 답이 들려왔다. ‘걸레 같은 만남’은 다른 이의 땀과 눈물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흘린 오물까지도 닦아 줄 수 있는 만남이다. 어머니가 그러셨고, 나를 사랑해 준 이들이 그랬다. 그래서 그분들과의 만남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애틋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메말라가는 이유는 ‘손수건 같은 만남, 걸레 같은 만남’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기꺼이 손수건이 되고, 걸레가 되어 서로의 상처와 눈물, 땀은 물론이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허물마저 덮어주고 닦아주는 만남이 잦아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손수건 같은 만남, 걸레 같은 만남’을 기대하며 이 아침을 맞는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걸레 만남 걸레 생선 꽃송이 정채봉 선생
2025.07.24. 19:25
딸 식구들이 여행을 떠나면 딸 집에서 나만의 여유있는 휴가를 즐긴다. 넓은 집에 나 혼자 독차지하고 거리낌없고 누가 귀찮게 하는 말 한마디 없는 이 귀중한 시간이다. 뜨거웠던 낮과는 달리 저녁 무렵은 선선하다. 손자 방 창문을 열고 커튼을 올려 버리면 길 건너 큰 상수리나무 사이로 별 하나가 반짝인다. 어제도 그 자리에서 반짝이며 나타났겠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인다. 잡생각을 하며 누워있는데 보름달이 내 가슴으로 안긴다. 보름달을 정면으로 보면서 불을 끄고 달맞이를 했다. 그 잠깐을 즐기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벨이 울린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받았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한다. 받지 않으면 메시지를 남기면서 자기 전화는 아무리 바빠도 받으라고 간곡히 애원한다. 우울하고 외로워서 숨이 막힌다고 투덜거린다. 친구는 젊었을 때 센트럴파크에서 달리기도 많이 했고 비즈니스를 아주 잘 운영하여 은퇴 후에도 여유롭게 생활을 하고 있다. 바쁘게 살다 은퇴하고부터 조금씩 이상 증후가 나타났는데 이제는 상태가 많이 진전되어 씁쓸한 생각이 든다. 전화를 받으면 말이 없다가 내가 왜 전화했느냐고 물으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없느냐고 물으면 그냥 매일 똑같지 뭐라고 대답한다. 맛있는 음식 먹었느냐고 아니면 어느 식당에 맛있는 것 있느냐고 물어도 입맛이 없다고 대답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숙한다, 어느 날 우연히 의료 인문학 강좌에서 인상 깊게 들었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웃을 수 있는 질병이 성숙의 계기가 된다고 했다. 아픔의 순간은 늘 고통으로 시작되지만 아프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위로도 있고 아프지 않았다면 해보지 못했을 생각도 있다. 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성숙함과 담담함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오락가락하면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하루를 살아내는 그에게는 내일이란 어떤 의미인 것일까. 도심의 불빛을 뚫고 반짝이는 창밖의 별은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에서 떠 있을 것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때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하늘에서 깜박였다.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전화를 내려놓은 지 1시간도 안 되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너무 늦은 시간이다. 많은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다. 갑자기 아프고 갑자기 떠난다. 이미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제다. 앞날을 마냥 두려워하는 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껏 걱정하다가 맞이한 미래는 잘 되어도 나쁜 상황을 피했다는 안도감을 줄 뿐이다. 오히려 미래를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인간도 앞날을 예측할 수는 없으므로 마음대로 상상하고 기다려보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다른 사람이 기대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기대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맛보는 만큼 삶이 풍성해질 것이다. 그 맛을 찾아내고 알아 가는 것도 또한 세상을 창조한 분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말이 우리의 미래를 제한할 수는 없다.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외는 끝없이 보고된다. 인간은 바늘구멍으로 책을 보듯 바라볼 뿐이다. 그 책의 다음 페이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령 뜻하지 않는 미래가 오더라도 별은 여전히 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을 우리의 미래가 아름다운 기대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기대 자기 전화 의료 인문학 상수리나무 사이
2025.07.15. 18:37
146년이 지나도, 백조는 무대 위를 날고 있다. 1877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14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생생히 살아 있다. 수많은 예술작품이 시대 속에 잊히고 사라져도, 이 작품만은 꾸준히 관객을 극장으로 이끈다. 왜일까? 47년 전,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을 기념해, 한국은 세계적인 발레단인 영국 로열 발레단을 초청해 백조의 호수를 선보였다. 주역은 전설적인 무용수 마고트 폰테인이었다. 그날 무대에서 백조들이 날갯짓하던 순간, 나는 나도 백조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공연 후 나는 무대 뒤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마고트 폰테인은 프로그램 판플렛에 “작은 발레리나, 너의 꿈은 이루어질 거야”라는 글과 함께 사인을 적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 순간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그때부터 내 안에 분명한 꿈이 생겼다. 그 이후로 나는 해마다 백조의 호수를 관람해왔고, 어느덧 관람 횟수가 40회를 넘어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미무용연합 진발레스쿨의 발사모(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30명과 함께 보스턴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관람했다. 보스턴 발레단은 1963년에 창립된 비교적 젊은 발레단이지만, 정교한 안무와 현대적인 무대 해석으로 미국 무용계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가진 단체다. 이번 공연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백조의 호수 중에서도 단연 인상 깊었다. 특히 2막과 4막에서는 검정과 흰색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모노톤 무대 위로 드라이아이스가 흐르며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무대 전체가 마치 백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느껴졌고, 현실의 질서와 인간의 욕망이 얽힌 1막과 3막, 그리고 죽음과 환상이 교차하는 2막과 4막 사이의 극적인 대비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치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오데트와 오딜 역을 맡은 한국인 발레리나 채지영의 무대였다. 그녀는 절제된 고결함과 강렬한 매혹을 자유롭게 오가며 고난도의 테크닉을 완벽히 소화했다. 특히 휘테 32회전에서는 완벽한 중심과 속도, 표현력이 삼위일체를 이루며 회전이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 인간의 육체가 예술로 승화되는, 미학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강렬했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이며 긍지다. 이번 공연은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함께한 학생들과 발사모 단원들은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며 입을 모아 찬사를 보냈다. 나는 디렉터 자격으로 드레스 리허설에 함께 참석하여 공연 전 무대의 긴장감과 예술가들의 몰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공연에 앞서 우리는 발사모 내부에서 백조의 호수 워크숍을 열어 작품의 구조와 음악, 인물 해석을 함께 공부했고, 덕분에 단원들은 무대를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있었다. 익숙한 선율이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 백조의 날갯짓은 다시 우리를 무대의 마법 속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왜 여전히 우리를 부르는가?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사랑을 믿고,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날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 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무대 백조 세계 무대 모노톤 무대 순간 백조
2025.07.08. 20:47
돌아가신 우리 장모님은 6·25사변 때 원산에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피난선을 탔다. 남편은 배가 출항하기 전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고 한 후 생이별을 했다. 장모님은 수복이 되면 빨리 원산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휴전선에서 가까운 속초에 정착했다. 장모님은 피난 올 때 가져온 재봉틀로 남의 옷을 만들어 두 딸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냈다. 큰딸인 아내가 한 말, “외삼촌은 술꾼이었어요. 술 마실 돈이 떨어지자 누이의 전 재산인 재봉틀을 훔쳐다 팔았어요. 나는 외삼촌을 미워했어요. 전쟁 후 부산 철길 옆에서 살다 상경해 판자촌에서 움막을 쳤습니다. 엄마는 재봉틀로 바느질해서 아이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바느질을 도와주었습니다.” (민병임 장편 소설 ‘꿈’에서) 조선 여인들은 키가 작고 몸은 연약하지만 예로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마을 아낙네들은 삼베 풀을 베어 뜨거운 물에 짜서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내 삼베옷을 만들었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동네 부인들이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길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도 바느질했고 나이가 많아져 눈이 침침해지자 나에게 바늘귀를 찾아달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수출 증대는 섬유업이 주도했다. 시골 처녀들은 공단에서 밤낮없이 재봉틀을 밟았다. 바느질 기술이 좋은 어머니 밑에서 은연중 재능을 전수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남미 이민이 시작되었다. 뉴욕한국일보 기자 시절 브라질 취재에서 들은 이야기. “농업이민으로 왔지만 처음부터 농장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민 보따리에 넣고 온 옷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더는 팔 옷이 없어지자 옷을 뜯어 본을 뜨고 제품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미에는 잠바라는 옷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소개했습니다. 바느질 기술이 월등한 부인들이 제품업으로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제 2세들은 현지인을 고용하면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첨단 패션을 배워 의류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동포들은 한때 세탁업에 많이 종사했다. 한인 부인들의 테일러잉(옷 수선)은 고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즐겨 입던 옷을 맡기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마음에 들게 고쳐주었다. 매직 터치였다. 드라이클리닝 업이 쇠퇴한 지금도 한인 업소들은 옷 수선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할머니,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은연중에 후손들에게 이어졌을 것이다. 이민 온 지 오래돼 할머니가 된 지금도 딸들이 옷을 사 오거나 입던 옷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순식간에 해내는 부인들, 바느질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가 이어지고 있다. 1851년 미국인 아이작 싱어(Isaac Singer)가 재봉틀을 발명했다. 바느질을 많이 하는 한인 가정은 이 신비한 기계를 너도나도 사들였다. 재봉 일은 어려웠던 시절, 생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바느질은 섬유산업을 일으켰고, 남미의 제품업을 성장시켰다.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재봉틀을 밟던 어머니들, 그 정성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최복림 / 시인이아침에 재봉틀 이민사 부인들 바느질 바느질 솜씨 바느질 기술
2025.07.02. 19:43
아침을 먹고 가게 밖을 내다보면 매일같이 비슷한 시간에 노인 부부가 큰 수레를 끌고 쓰레기통을 뒤져 소다 캔과 물병과 플라스틱 물병을 주워 담는다. 두 사람 손에는 고무장갑이 끼어있다. 맨손을 본적이 없다. 하루에 몇 마일을 걷는지 모르지만, 저녁 시간이 되면 소형차 크기의 자루에 넣은 병들을 2개씩 싣고 팔러 가는 것 같다. 아침에는 할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지만 큰 짐을 싣고 팔러 갈 때는 할머니가 앞서고 뒤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 자루가 떨어지지 않나 살피면서 수레를 끌고 간다. 가끔 나는 물병을 모아 큰 플라스틱 백을 가득 채워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전하지만 고맙다고 인사하거나 그 흔한 생큐 소리도 하지 않는다. 미국에 온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자그마한 체구에 걷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더운 날씨에는 줍는 양이 많아 자루가 꽉 채워 무척 크지만, 비가 오거나 쌀쌀한 날은 자루가 크지 않다. 이상하게 몇 주째 두 노인 부부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가게 같은 건물에 중국 식당이 있었다. 온 가족이 가게에서 일했다. 두 딸을 낳아서 학교에 보내고 친정엄마까지 불러들여 아이들을 돌보고 5~6년 가게를 운영했는데 갑자기 문을 닫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관리인에 따르면 비자가 만료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고 주방기구 하나 가져가지 않고 가게를 닫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작년 가을이었는데 지난 3월 갑자기 우리 가게에 이민세관단속국(ICE) 직원 두 명이 왔다. 나는 그들 목에 걸린 ICE 카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에게 이민세관단속국에서 왔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깜짝 놀랐다. 나는 여기에 오래 살았고 불법 체류자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랬더니 이웃한 중국 식당을 이야기하며 언제 문을 닫았고 누구누구 일을 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중국 사람도 아니고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그 가게에 가지 않아 모른다고 대답했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불법체류자 단속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내 앞에 ICE 직원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 넘어질 뻔했다. 죄도 없이 덜덜 떨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정말 뉴스에서 듣던 사실을 현실로 접하고 나니 반세기가 지나도록 영주권 보자는 사람이 없었다. 영주권이나 여권은 해외여행 시나 필요했지 일상생활에서는 쳐다보지도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영주권이 없는 사람은 오밤중에 소방차가 윙윙 소리를 내고 지나가도 자기 잡으러 오나 싶어 집에서도 숨는다고 했다.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용직이나 서류미비자 들이 쥐구멍에서 숨을 쉬고 있다. 가게 앞을 지나치던 많은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서로서로 연결되어 집 청소를 하거나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개나 고양이 돌봐주는 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멕시코 친구는 직원 중 영주권자가 없어 한밤중에 일을 하고 새벽이 되기 전에 퇴근시킨다고 했다. 영주권은 없지만 주어진 일터에서 일하고 세금 내고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마저 불안에 떨고 있는 지금이 자유로운 미국은 아닌 것 같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서류미비자 할머니 자루가 플라스틱 물병 ice 직원
2025.07.01. 18:44
식당에서 계산서를 보고 있다. 맨 아랫부분에 네 가지 팁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쓰여 있다. 음식값의 18%, 23%, 28%, 네 번째 선택은 Custom, 당신이 지불하고 싶은 금액이다. 친절하게 퍼센트 옆에 돈으로는 얼마인지 적혀있다. 이 식당에도 얼마 전까지 있던 15% 팁 선택이 없어지고 28% 팁이 새로 등장했다. Custom란에 15%의 금액을 직접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산하기가 만만찮았다. 동양 사람들을 싸잡아 망신시키지 않으려면 빨리 쿨하게 계산을 해야 한다. 계산을 잘못해 생각했던 금액보다 더 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게 식당을 나올 때는 마음이 영 께름칙하고 주머니를 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한국에서 호텔에 근무하면서부터다. 팁을 봉사료라는 명목으로 호텔을 포함 모든 숙박업소와 식당에 일정금액을 부과하는 새로운 정책을 교통부에서 발표했다. 1979년이었다. 서비스를 개선하고 손님에게 부당한 팁을 강요하는 것을 근절하겠다는 좋은 취지였다. 하지만 실무에 종사하던 나는 봉사료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목격했다. 강제 봉사료 징수는 손님과 직원 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그때도 자발적이 아닌 강제성이 문제였다. 미국에 와서 팁의 정체를 더 뚜렷이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이민자들이 팁 문화를 통해 조금씩 미국을 알아가는 것 같다. 메뉴에 쓰여 있는 가격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밥값으로 얼마를 내게 될지 식당을 나갈 때까지 알 수 없는 곳이 미국이다. 낯선 나라, 복잡한 문화, 이상한 돈, 팁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보낸 긴 세월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오래전 일이다. 한국에서 온 손님 한 분이 미국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 에이전트였던 나와 꽤 큰 건물을 보러 다니고 있던 차였다. 하루는 손님일행 여러 명과 한국 고깃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 손님이 계산을 끝내고 식당을 막 나왔을 때였다. 한 웨이트리스가 따라 나와 팁이 적다며 우리 일행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다. 그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주방으로 들어가 소금 한 바가지를 가지고 나와 우리 보란 듯이 식당 앞에 획하고 뿌렸다. 그리고는 ‘에이 퉤! 한국에서 온 것들은...’ 하는 것이었다. 이민자 망신을 그녀가 시키고 있었다. 팁이 충분하지 않다고 종업원이 손님에게 저런 행동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손님도 일행들 앞에서 저런 수모를 겪었으니 그냥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주인이나 매니저를 불렀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녀가 주인이 아니기를 바랐다. 이렇게 팁 문화는 곳곳에서 잡음을 냈다. 동전과 함께 잔돈을 테이블에 놓고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28% 팁을 요구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거래에 판매세가 따라다닌다. 그 세금은 내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늘 높이 책정돼 있다. 그 위에 얹어지는 팁까지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나는 언제 28% 팁을 흔쾌히 낼 수 있을까. 마야 정 / 수필가이아침에 강제 봉사료 이민자 망신 명과 한국
2025.06.30. 18:46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도가 눈에 아른거린다. 36년 전 신혼여행지가 제주도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남자 주인공 ‘관식이’는 가족을 향한 지고지순한 헌신과 책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소위 ‘관식이 신드롬’이라는 단어까지 유행할 정도로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끌어냈다. 말보다는 묵묵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남자로 ‘관식이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라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나는 우리 부부를 ‘로또 부부’라고 부르곤 했다. 로또를 사본 사람은 알 것이다. 로또가 대부분 ‘꽝’이라는 것을. 혈액형이 같은 걸 빼고는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다. 기억하기도 힘든 아주 먼 옛날 일이긴 하지만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믿고 복권을 긁듯 설렌 적도 있었다. 인생살이 모진 풍파를 오랜 시간 함께 헤쳐온 배우자로서의 ‘의리’ 외에 무엇이 더 남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인생의 영원한 반려자로 여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고 가슴 깊이 새길 일이 일어났다. 나는 겁이 많다. 내 손으로 내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자가 혈당 채혈기를 사 두고도 사용이 겁나서 시험지의 유효기간을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다행히 과학의 발달로 연속혈당기(Continuous Glucose Monitor)가 나와서 사용한다. 센서를 팔에 부착해 실시간으로 혈당을 측정할 수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혈당이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 추이를 알려주어 식생활을 조절하게 한다.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식사와 운동, 수면이 혈당에 주는 영향을 알 수 있다. 고혈당과 저혈당일 때 경고 알람이 울려 대처를 할 수 있게 돕는다. 당뇨를 가지고 사는 삶은 불편하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나는 음식 참기가 제일 어렵다. 약으로 당뇨가 조절되겠거니 했으나 오산이었다. 복용 중인 약을 바꾸었더니 한밤중에 저혈당이 와서 연속혈당기가 알람을 울린다. 새벽 3시에 저혈당의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남편이 우유 한잔과 참외를 깎아와서 준다. 혈당을 읽어주는 핸드폰을 남편 것와 내 것을 연동시켜 알람을 듣고 대처를 한 거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뭉클한 순간이다. 친구들과 외식으로 스시와 빙수, 붕어빵까지 먹었더니 남편한테 무엇을 먹고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온다. 집에서도 밥 먹고 나면 실내 자전거 타라고 잔소리한다. 내 당뇨병 지킴이가 되기를 자처하며 유튜브에서 식사조절 팁과 운동법을 찾아 부지런히 알려준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고 남편의 잔소리가 제일 큰 스트레스라며 불평하곤 했다. 마음속 깊이 나를 위하고 있음을 이번 일로 깨닫게 되었다. 무뚝뚝해서 다정함이나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나고 보니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온 남편이다. 말이 없어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고와 사랑을 이제는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안 맞아서 로또가 아니고 수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고 기적인 ‘로또’라고 한다면 오글거린다고 하겠지.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우리집 관식이 우리집 관식이 관식이 신드롬 식사조절 팁과
2025.06.29. 16:25
신데렐라하면 나는 언제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먼저 떠오른다. 내 두 딸이 어렸을 때, 우리 집엔 늘 디즈니 공주들이 함께 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주던 시절이었다.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때, ‘신데렐라’와 ‘인어공주’, ‘백설공주’ 같은 명작들은 우리 거실을 작은 극장으로 만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보던 그 시절, 아이들은 주문을 외우며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살라카둘라 멘치카둘라 디디부 바디부!”는 가장 좋아했던 마법의 주문이었다. 영상이 끝나면 거실은 곧 무대로 바뀌었다. 두 딸은 드레스를 입고 엄마, 아빠 앞에서 작은 발레 공연을 펼쳤다. 동작 하나하나에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었고, 마치 커튼 콜까지 준비된 사랑의 무대 같았다. 나는 매일 밤 작은 극장을 만들어주는 연출자이자 관객이었고, 무엇보다 발레 선생님이었다. 그 기억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진다. 발레 수업 시간에도 나는 그 주문을 꺼내 쓴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공주로 변신하고, 나는 그 환상 위에 발레 동작을 살며시 얹는다. 뿌리에 롤로베, 파세, 아라베스크… 그 순간, 발레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마법이 된다. 지난 주말,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발사모)’ 회원들과 함께 할리우드의 돌비 시어터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 여유로운 거리와 어우러져, 우리는 LA 발레단이 선보이는 ‘신데렐라’ 공연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신데렐라는 2년 전 사반 극장에서 보았던 같은 작품이었지만, 무대는 낯익으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 장면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음악 때문인 것 같았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 까기 인형’처럼 선율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데렐라의 음악은 나에게 아무런 잔향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 후반부, 마법이 풀리기 직전의 장면에서 익숙한 리듬이 들려왔다. ‘어? 이 음악… 어디서 들었더라?’ 순간 떠오른 이름, 프로코피예프. 맞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특히 로미오와 티볼트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던 ‘Montagues and Capulets’의 무겁고 위압적인 리듬. 클라이맥스 긴장감은 그 음악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묵직한 금관의 울림, 반복되는 리듬, 절정으로 치닫는 구성. 서로 다른 이야기를 운명이라는 공통 주제로 엮어내는 음악적 언어였다.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용수들의 표정이었다. 맨 앞자리에서 본 얼굴 하나하나는 마치 대사를 말하듯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다음엔 무조건 앞자리!” 무용은 동작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전해질 때, 진짜 예술이 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사바사바 아이사바… 얼마나 울었을까” 딸들을 재우며 자장가처럼 불러주던 ‘신데렐라’ 노래였다. 공연이 끝난 뒤 딸이 말했다. “엄마, 그 신데렐라 노래가 생각나.”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예술은 잊고 지낸 감정을 다시 불러오는 힘이다. 오늘 본 신데렐라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처음 만나는 감정처럼 새로웠다. 같은 작품도 다른 시간에 보면, 다른 내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공연장을 나와 거리를 걷는 길, 마음 한구석에 유리구두 한 짝이 조용히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구두 하나, 기억 하나. 나는 오늘도 예술을 믿는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유리구두 기억 신데렐라 노래 유리구두 하나 발레 공연
2025.06.24. 18:35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처럼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꽃’은 다른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관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이 지나쳐 집착으로 변하면 더 피곤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항상 기운이 없고, 쉽게 피곤해지고, 짜증도 많아졌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것도 망설였다. 스스로는 ‘늙어 가는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증상들에 대해 우울증, ‘번아웃(burnout)’, 또는 스트레스나 갱년기(menopause)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그렇게 단정 지어버린다.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예 회피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약물이나 술 등에 의존하는 경우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도피일 뿐, 진정한 도움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중독이라는 더 심각한 병을 만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육체적 피곤함에 의미를 부여해 버리기 전에 자신을 다잡기로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여성 건강, 특히 중년 여성 건강에 대해 많은 전문가의 다양한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된 조언은 야채 위주의 건강 식단, 꾸준한 운동과 숙면, 그리고 명상(meditation)을 통해 정신 건강을 챙기라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한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명상을 한 시간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께 의존하고 내려놓는 것, 나에 대한 의미와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을 달렸다. 마라톤 동호인 모임에 처음 참석한 것은 2017년이었다. ‘마라톤 완주’가 버킷리스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LA마라톤을 완주했고, 마라톤은 그것으로 마지막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달리고 있다.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보스턴 마라톤 참가 자격을 따는 것이다. 새로운 목표가 생기니 동호인 모임이 열리는 주말이 기다려지고, 삶이 더 건강해졌다. 지금 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기에 토요일 새벽이면 패서디나의 로즈보울로 부랴부랴 향한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순간이 행복하다. 뛰는 동안 나에게 집중하게 되고, 마음은 맑아지고, 스트레스는 흘러가듯 사라진다. 얼마 전, 지니 라이스라는 한인 여성 마라토너의 기사를 보았다. 77세의 나이에 25세 여성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분이다. 지난해 런던 마라톤을 3시간 35분에 완주했다. 정말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이 우리 동호인 모임(여성드림러닝팀·WDRT) 초청으로 이번 주 토요일(28일) 패서디나 로즈보울 브룩사이드 공원에서 강연을 하신다니 정말 기대가 크다. 뛰면 건강해진다. 도파민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고, 삶의 무게도 가벼워진다. 이윤정 / 간호 실무 박사(DNP)이아침에 마라톤 행복 마라톤 동호인 마라톤 완주 보스턴 마라톤
2025.06.22. 19:04
초등학교 미술 시간에 크레용으로 그림을 그리는 숙제가 있었다. 빨간 꽃, 노란 꽃, 파란 꽃, 분홍 꽃을 그렸다. 마지막에 칠한 보라색 꽃이 마음에 들어서, 내친김에 나무도 칠했다. 짝꿍이 그걸 보고 세상에 보라색 나무는 없다고 했다. 하긴 나도 본 기억이 없었다. 곧 줄반장이 숙제를 걷기 시작했고, 다른 색으로 덧칠할 시간도 없고 해서 그냥 제출했다. 나중에 선생님이 나의 보라색 나무를 가리키며 상상력이 뛰어나다고 말씀하셨다. 많은 반 아이에게 그 말은 비꼬는 말로 들렸다. 방과 후, 그림을 아빠에게 보여주며 시무룩하게 친구들의 반응을 얘기했더니, “이 넓은 세상천지에 왜 보라색 나무가 없겠니. 가을이면 단풍이 드는 빨간 나무도 있고 은행나무는 노랗기만 하다. 속상해 하지 마라. 조물주가 어딘가에 만들어 놨을 거다.”라고 하셨다. 그 보라색 나무를 LA에 와서 처음 봤다. 자카란다는 황홀한 보랏빛 꽃을 피운다. 많은 꽃이 핀 자카란다는 나무 한 그루가 다 보라색으로 보인다. 바로 내가 그렸던 그 보라색 나무다. 아빠가 맞았다. 조물주의 능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내 말을 들어주고 가능성을 믿어주던 아빠는 이 세상에 안 계시다. 그는 처음 두발자전거를 탈 때 뒤에서 밀어줬고, 팽이 치는 법과 다루는 법을 가르쳐줬고, 다 낡은 모기장으로 잠자리채를 만들어줬다. 우리는 겨울이면 꽁꽁 언 논바닥 위에서 함께 만든 연을 날렸다. 한여름에는 동생과 나를 냇가로 데려가 돌 틈과 수풀을 뒤져 작은 물고기도 잡았다. 미꾸라지를 놓쳐도 신바람이 났다. 아버지. 그는 나의 커다란 우산이었다, 그가 있었기에 나는 마음 놓고 들녘에서 팔랑거리는 나비를 잡으러 다녔고, 털이 수북해서 만지기조차도 무서웠던 할미꽃도 단숨에 꺾었다. 따로 과외 공부를 시키거나 피아노 학원을 보낼 만큼 넉넉한 살림은 아니었지만, 어린 시절은 행복했다. 내 행복의 척도는 아마 아버지와 함께했던 감정에서 시작하지 않을까 싶다. 살면서, 기가 막힐 웅덩이에 빠졌던 때와 형통하지 않은 때도 있었다. 나에게 힘이 되어주던 아빠가 있었기에, 그를 기억하기에, 힘들고 어려웠던 날을 버티며 지냈다. 그리고 그날들도 어김없이 냇물이 흐르듯이 떠내려갔다. 만약에 딸이 보라색 크레용으로 하늘을 칠한다면, 난 자신 있게, 아빠가 그랬던 것처럼, 이렇게 말하련다. “이 넓은 세상천지에 왜 보라색 하늘이 없겠니. 노을이 질 때 하늘은 오렌지색으로 변하고, 눈 오기 전의 하늘은 어린 비둘기 털 같은 엷은 회색을 띠기도 하는데”라고. 이 세상을 창조한 조물주는 보랏빛 하늘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이리나 / 수필가이아침에 보라색 나무 보라색 나무 보라색 하늘 보라색 크레용
2025.06.12. 18:32
우리는 모두 나름의 ‘선’을 두르고 살아간다.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나와 타인을 구분 짓는 경계선. 그 선은 때로 ‘예의’라는 이름을 하고, 때로는 ‘배려’라는 가면을 쓰며 조용히 자리를 지킨다. 가깝고 싶은 마음이 있어도, 불편하지 않기 바라는 마음이 더 크기에 사람들은 그 선 앞에서 망설이고, 조심하며, 침묵을 선택한다. 그래서인지 선을 넘기 전의 관계는 참 평화롭다. 적당히 웃고, 적당히 안부를 묻고, 적당히 거리를 둔다. 속내를 다 드러내지 않아도 충분히 괜찮고, 적당한 거리감 속에서 오히려 오래도록 ‘무난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가 깊어지기 시작하면, 그 ‘적당함’은 점점 무너지기 시작한다. 마음이 열리고, 정이 쌓이고, 기대가 자라고, 그 기대 위에 욕심이 얹힌다. “내가 널 잘 아니까”라는 익숙한 핑계와 “이 정도는 괜찮잖아”라는 착각이 그 선을 무너뜨리기 시작한다. 상대의 삶에 의견을 보태고, 조언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며, 관심이라는 명분으로 타인의 경계 안으로 스며든다. 선을 넘는다는 건, 어쩌면 인간관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니까, 아끼니까, 더 알고 싶고, 더 함께 있고 싶으니까. 그런 마음이 쌓이면 결국 우리는 경계를 흐리게 만든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건, 그 선 너머에는 ‘또 하나의 우주’처럼 고유한 타인의 세계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 우주에는 나와는 다른 리듬이 있고, 겉으로는 보이지 않는 상처와, 자신만의 기준, 그리고 성장의 역사가 존재한다. 우리가 그것을 온전히 알 수는 없고, 안다고 믿는 순간 가장 소중한 신뢰가 깨어질 수도 있다. 그래서 더욱 필요한 건 ‘멈춤’이다. 선을 넘기 전, 단 한 번이라도 멈춰 서서 스스로에게 묻는 것이다. “내가 지금 가고 있는 이 발걸음이, 혹시 누군가의 마음을 밟고 있는 건 아닐까?” 관계는 다가서는 만큼 조심스러워야 하고, 가깝고 싶을수록 더 섬세한 배려가 필요하다. 진짜 가까운 사이란, 서로의 선을 존중하며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이다. 언제든 마음속의 문을 열 수 있지만, 상대가 문을 열어줄 때까지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 우리는 그 지혜를, 삶의 시행착오 속에서, 조금은 늦게라도 배워야 한다. 그래야 더 깊고 단단한 관계를 만들어갈 수 있다. 그리고 그래야 비로소, 내 선도 지키고, 타인의 선도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이선경 / 수필가이아침에
2025.06.10. 18:12
“크루즈는 이미 떠났습니다.” 숨이 턱 막혔다. 머릿속이 하얘졌고, 발밑의 땅이 꺼지는 듯했다. 거센 바람 속에 바다도 출렁였다. 단 한 글자의 착오 때문이었다. 출발 시각을 12시 PM이 아닌 12시 AM으로 착각한 실수가, 내 여행을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았다. 하이킹을 함께하던 친구 두 명과 알래스카 크루즈 여행을 떠난 것은 칠순을 맞이하던 해였다. 우리는 존 웨인 공항에서 만나 설레는 마음으로 시애틀을 향해 출발했다. 시애틀에서 크루즈에 오르던 날, 뜻밖의 반가운 얼굴을 마주쳤다. 모두가 알고 지내던 박 사장님 부부가 한국에서 여행을 와 있었던 것이다. 놀라운 우연에 우리는 금세 어울렸고, 그들은 자연스럽게 우리 일행에 합류했다. 아침에는 함께 식사하고, 저녁에는 사우나에서 하루의 피로를 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광활한 알래스카의 자연은 그 자체로 경이로웠다. 끝없이 펼쳐진 빙하와 눈부신 설산, 푸른 바다가 어우러진 풍경은 마치 꿈속 한 장면 같았다. 빙하가 부서질 때마다 찢는 듯한 굉음이 울렸고, 나는 거대한 자연의 위엄 앞에서 한없이 작은 존재임을 실감했다. 인간의 시간은 이 태고적 공간 앞에서 얼마나 덧없던가. 우리는 글레이셔 베이를 지나 스케그웨이를 거쳐, 주노의 글레이셔 하이웨이에서 처음 보는 새먼베리(Salmonberry)를 만났다. 숲은 생명력으로 가득했고, 쓰러진 나무 위에 돋아난 이끼는 부드러운 초록빛 융단 같았다. 케치칸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배에서 내려 항구를 둘러보았다. 그런데 유난히 조용했다. 점심을 먹고 사진을 찍으며 한가로이 시간을 보냈지만, 왠지 모르게 어딘가 낯설었다. 연어가 산란을 위해 거센 물살을 거슬러 뛰어오르는 모습은 삶의 역경을 넘어서는 의지를 상징하는 듯했고, 자연의 깊은 울림을 주었다. 하지만 그 순간이 끝나고 항구로 돌아왔을 때, 내 인생의 가장 큰 실수가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낯선 백인 여성이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배는 떠났어요.” 믿을 수 없었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을 뻔했고, 손끝이 얼어붙는 듯했다. 다행히 크루즈 측 젊은 여성이 사무실로 우리를 안내했고, 친절하게 절차를 설명해 주었다. “짐은 시애틀 항구에서 찾을 수 있다”며 우리를 안심시켰고, 시애틀행 항공권도 도와 구입해 주었다. 우리는 핸드백 하나만 가진 채, 하룻밤을 케치칸의 호텔에서 보내야 했다. 가까운 마켓에서 치약과 칫솔, 로션을 사는 것으로 밤을 준비했다. 그날 저녁, 문득 사우나에서 만나기로 했던 박 사장님의 부인이 떠올랐다. 우리가 보이지 않아 얼마나 걱정했을지 생각하니 마음이 짠해졌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기보다는, 각자 시간을 제대로 챙기지 못한 것임을 인정했다. 함께였기에 두려움을 나누고, 서로를 의지하며 해결 방법을 찾을 수 있었다. 다음 날 아침, 케치칸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시애틀로 향했다. 크루즈는 다음날 도착 예정이었기에, 우리는 시애틀에서 하루를 보내게 되었다. 친구의 사돈 덕분에 유명한 마운트 레이니어를 오르는 행운도 누렸다. 아름다운 풍광이 어제의 당혹감을 조금씩 씻어주었다. 이튿날, 크루즈가 도착하는 항구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 복잡한 절차를 거쳐 수천 개의 수하물 사이를 헤매던 순간, 정확한 위치 정보 덕분에 우리의 짐을 무사히 찾을 수 있었다. 가방을 껴안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여권, 비상금, 약, 운전면허증…. “모든 게 그대로야. 정말 다행이야.” 이번 여행은 내게 큰 교훈을 주었다. 인생이라는 항해에는 언제나 예상치 못 한 풍랑이 찾아온다. 그럴 때 누구를 탓하기보다는, 옆에 있는 이의 손을 꼭 잡고 함께 길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어떤 어려움도 넘어설 수 있다. 집으로 돌아와 조심스레 남편에게 여행 이야기를 꺼냈다. 예상치 못 한 지출 이야기에 남편은 조용히 나를 바라보다가, 한마디를 건넸다. “그럴 수도 있지. 죽지 않고 돌아온 것만으로도 고맙지.” 그 말에 가슴이 뭉클했다. 삶은 언제나 예상 밖의 순간들로 가득하다. 하지만 함께하는 이들이 있기에, 우리는 언제든 다시 웃을 수 있다. 알래스카의 대자연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빛났던 것은, 벗들과의 우정이었다. 이 여행을 오래도록 기억하며, 앞으로도 함께 웃을 날들을 꿈꾼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알래스카 알래스카 크루즈 시애틀 항구 시애틀행 항공권
2025.06.05. 18:58
다리가 부실해서 오래 걷기가 힘든 나는 여행을 싫어한다. 남편이 결혼기념 여행계획을 짜면서 어디 가고 싶으냐고 물어서 무심히 ‘스위스’라고 했다. 그 대답에 코가 꿰어 프랑크푸르트를 거쳐 암스테르담을 지나 스위스 인터라켄까지의 길고 복잡한 여행을 하게 되었다. 남편을 외삼촌이라 부르는 시댁조카를 프랑크푸르트에서 보고, 고모부라 부르는 친정조카를 암스테르담에서 만나서 인사하고 교제하고 그 아이들의 피앙세도 면접(?)하고 오는 길은 간단한 길이 아니었다. 직항으로 목적지에 가서 호텔에 체크인하는 것도 힘든 몸이 비행기와 기차와 우버를 번갈아 타며 돌아다녔다. 다행히 전동 스쿠터를 가져가서 큰 도움이 되었다. 아들아이가 여행코치처럼 자세히 예약을 해주고 코스를 안내한 길로 두 시니어가 착실히 따라다녔어도 변수는 있는 법. 암스테르담의 국립박물관, 고흐뮤지엄 현대미술관들이 모여있는 그 멋진 장소인 뮤지엄 스퀘어에서 대자로 눕는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약간의 턱이 있는 곳을 평지인 줄 헛디뎌서 다리 허리부터 마지막 머리까지 도로에 부딪혔다. 친절한 시민들과 구경꾼들에 싸여있다 일어나려니 아픈 것도 아픈 거지만 망신살이 뻗친 날. 예수승천공휴일이라 인파가 더 많은 날, 나도 예수님 따라 승천할 뻔했지 뭔가. 동행한 이들이 김샐까 봐 타박상이어서 다행이라며 괜찮다고 일행을 독려하여 일정을 마치고 돌아와 진짜 뻗었다. 그날 스쿠터의 파트 하나가 고장 나서 남편은 하드웨어 스토어를 들락거리며 고친 진땀 나는 날이기도 했다. 미래의 조카사위인 팀이 옆에서 많이 도와줘 고마웠다. 네덜란드에서 일을 다 본 후엔 비행기로 취리히까지 와서 스위스 열차로 인터라켄에 도착했다. 호텔 방 창문으로 차원이 다른 맑은 찬 바람이 훅 들어온다. 발코니에 앉으니 멀리 만년설이 덮인 두 봉우리가 보인다. 두부 자른 듯 보이는 만년설봉우리가 융프라우라고 한다. 산중턱 마을은 녹음 울창한 여름이고 만년설이 녹은 아레강이 흐르고 하늘엔 알록달록 패러글라이더가 떠다닌다. 거리엔 관광 마차의 말발굽소리가 따그락 따그락 들린다. 평화롭고 아름답다. 관광객들도 차분하다. 분위기를 타나보다. 힐링이 절로 되는 이곳에 오려고 우여곡절을 겪었나 싶다. 돌아보니 결혼 45주년 우리의 역사도 순탄한 길 만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정을 위해 함께해 온 사랑과 헌신에 서로 감사할 일이다. AI에게 물어보니 결혼 45주년은 ‘홍옥혼식’ 또는 ‘명주식’이라 한단다. 이날에는 루비나 비단과 같은 홍옥을 선물하거나, 명주로 된 선물을 하는 것이 일반적이라고 한다. 나는 지금 홍옥 대신 홍옥색 스위스제 불파스를 타박상에 도포 중이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결혼기념 여행 결혼기념 여행계획 스위스제 불파스 스위스 인터라켄
2025.06.03. 19:39
“어머!”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리고 맥박이 빨라졌다. 1년 넘게 손대지 못했던 습작 노트를 퇴고하기로 결심한 날이었다. 대학교 앨범 속에 숨겨두었던 열쇠를 꺼내 나만의 보물창고를 열었다. 몇 권을 꺼내자 가장 안쪽에 꽂혀 있던 빨간 다이어리가 힘없이 쓰러졌다. 개인정보와 가끔 되새겨야 할 말들이 적힌 다이어리였다. 한 손으로 집어드는 순간, 그 사이에 끼워져 있던 하얀 봉투가 툭 떨어졌다. 놀라 뒤로 젖히는 바람에 무릎 위 노트들이 바닥에 쏟아졌다. 나는 봉투부터 집어들었다. ‘Bank of America’의 로고가 선명했다. 거실엔 아무도 없었고 내 심장만이 요란하게 뛰고 있었다. 놀람은 곧 감동으로 바뀌었다. 나는 봉투를 다이어리 사이에 다시 끼워 넣고 품에 안은 채 내 방으로 올라와 문을 잠갔다. 이 은행과 거래한 적이 없었기에 혼란스러웠다. 마치 할머니들이 돌아가신 후 집안 구석에서 발견되는 검정 비닐봉지 속 현금처럼. 나도 그 전철을 밟고 있는 듯했다. 봉투는 테이프로 겹겹이 밀봉되어 있었고, 가운데엔 검은 펜으로 X표시가 되어 있었다. 손톱으로는 뜯기 어려워 가위로 조심스럽게 잘라냈다. 안에는 백 달러짜리 푸른빛 신권이 들어 있었다. 향긋한 잉크 냄새가 퍼졌고, 손끝으로 지폐를 넘기니 정확히 20장, 2000달러였다. ‘어떻게 이 돈을 잊고 있었지?’ 기억하고 있었다면 보관이지만, 까맣게 잊고 있었으니 방치였다. 출처가 떠오르지 않아 답답했지만 다이어리를 넘긴 지 1분도 안 되어 단서를 발견했다. 암호였다. 〈2020년 9월 이천쌀 싸가지〉 ‘이천쌀’은 2000달러, ‘싸가지’는 프리랜서 시절 수퍼바이저 K였다. 외국인 직원에겐 까칠했지만 나에겐 유독 친절했던 그녀. 팬데믹으로 회사가 문을 닫자 수고했다며 내민 보너스였다. ‘싸가지’는 그녀를 단번에 기억하게 하는 암호였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돈으로 뭘 해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렌트비로는 부족했고 식비로 쓰기엔 아까웠다. 결국 다시 제자리에 돌려놓기로 하고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런!” 아이처럼 몸이 굳었다. 바닥엔 습작 노트들이 너저분하게 흩어져 있었다.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것들이 잠시 하대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나는 노트들을 하나씩 조심스레 들어올려 품에 안으며 중얼거리듯 다짐했다. “나한텐 너희가 최고의 보물이야.” 박하영 / 수필가이아침에 비상금 이천쌀 이천쌀 싸가지 비상금 암호 습작 노트들
2025.06.01. 13:14
지난 3월에 동남아 크루즈를 다녀왔다. 비행기로 뉴욕에서 타이페이로, 타이페이에서 인도네시아 발리까지 거의 하루 만에 도착했다. 계절이 겨울에서 여름으로 하루 사이 바뀐 셈이다. 88도의 바닷바람이 끈끈하게 몸에 엉긴다. 가로수의 야자수 나무가 ‘Welcome to Bali’ 두 손 벌려 환영한다. 세계적인 휴양도시인 발리의 제일 큰 자랑은 하늘에서 춤추는 구름과 시시각각 변하는 바닷물 색의 오묘하고도 신비로운 조화였다. 건축물과 관광산업을 위한 모든 시설은 인간이 만들었지만, 결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자연경관은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그대로 멋진 한 장의 그림엽서가 된다. 인도네시아는 국토 한가운데로 적도가 통과하여 많은 지역이 열대 정글로 이루어져 있고 많은 섬에는 사화산, 활화산, 휴화산들이 있다. 일 년 내내 고온다습한 우기와 고온 건조한 건기가 교차한다. 이슬람교가 국교는 아니지만 2억이 넘는 88%가 이슬람교를 믿지만 발리는 87%가 힌두교 신자이다. 다만 발리 힌두교는 발리 토착 신앙과 인도 불교 및 힌두교의 융합으로 인도와 다르게 ‘성스러운 물의 종교’라 불리며 현세적인 정령신앙에 가깝다. 그들에게 종교는 일상생활에 젖어있어 각 개인의 집에, 공공장소에 또 마을에 성전을 모시는데 식사 전에 마른 바나나 잎으로 만든 접시에 꽃, 밥, 음식 등을 담아 조상신께 정성껏 공양하는 ‘카낭 사리’로 가는 곳마다 공양 접시가 눈에 띄었다. 덥고 습한 날씨여서 위생과 질병이 염려되었으나 그들은 진지하고 마냥 행복해 보였다. 발리는 네덜란드 식민지로 300여 년을 보내고 일본의 짧은 지배 기간을 거쳤으나 서구식 건물이나 철도 하나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 섬에서 생산되는 천연자원을 유럽으로 실어 나르는 관광지로만 알려졌기에 더 이상의 발전을 보지 못했다. 아직도 사람의 손을 타지 않고 자연 그대로인 순수하고 아름다운 경관은 세계인의 눈을 사로잡는다. 타나롯 사원은 발리의 명소다. 주위에 바위가 많아 옥색 바다와 더불어 숨이 막히는 경관을 자아낸다. 논과 커피농장(Coffee Plantation)도 그들만의 자랑이며 아주 인상적이었다. 어떤 사원을 방문했는데 힌두교 사원, 교회, 성당, 절과 모스크가 함께 있어 신기했다. 가이드가 발리에서는 모든 종교를 서로 존중하고 하모니를 이루며 살기를 기원하는 의미에서 지어졌다고 설명하자 가슴이 뭉클했다. 발리에서 3일을 바쁘게 보낸 후 크루즈에 승선했다. 하룻밤을 항해 후 첫 도착지가 롬복(Lombok)이다. 발리와 다르게 여기는 거주민의 90%가 이슬람교 신자다. 남자들은 밭에 나가 벼농사를 짓고, 히잡을 쓴 여성들이 매일 아이들을 등하교시키고 일상생활을 한다. 아낙들은 바틱(Batik)이라는 수공예품을 직조해 일상에 필요한 생활용품을 만든다. 다음에 들린 곳은 스삭 엔디(Sesak Ende)라는 마을이다. 차에서 내리자, 소똥 냄새가 진동했다. 이번 여행에서 나에게 가장 깊은 인상을 남긴 할머니 한 분이 조그만 방갈로 같은 초가집 앞 마루에 앉아 계셨다. 소똥을 바른 마루 뒤에 4x4 피트 크기 방이 있었는데 선반 위에는 담요 한 장과 바구니 하나가 전부였다. 부엌은 마을 공동으로 마을 중심부에 있었는데 역시 솥 하나와 몇 개의 기구들이 전부였다. 가이드는 3월 한 달이 라마단(일출에서 일몰까지 금식하는 종교의식)이어서 부엌을 사용하지 않는다고 했다. 정갈하게 차려입은 이 할머니는 우리에게 당신의 집안을 보여주는 호의를 베풀었지만, 이분은 하루를 어떻게 소일하실까 궁금해졌다. 여기 주민들은 모두 무소유주의자이며 금욕주의자들인가. 마을 회당에 들어가니 사내아이 넷이 평상에서 카드 게임을 하고 한 9살 정도로 보이는 한 여자아이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그 장면 또한 나에게는 충격이었다. 이 애는 과연 무엇을 보고 있을까. 인터넷이 연결되어 있을까. 그들은 현실과 인터넷 세상을 어떻게 조율하며 살아가는 것일까.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할머니 휴대폰 인도네시아 발리 발리 힌두교 휴양도시인 발리
2025.05.27. 18:36
새 교황이 탄생했다. 그것도 2000년 역사의 교회 안에 첫 미국인 출신 교황이다. 지난 8일 로마 시스틴 성당에서 거행된 콘클라베를 통해 선출된 69세의 시카고 출신 로버트 프랜시스 프레보스트 추기경이 ‘레오 14세’라는 이름으로 제 267대 교황이 됐다. 특히 ‘빈자의 아버지’라는 애칭으로 전 세계인의 사랑과 애도 속에 세상을 떠난 전임 프란시스코 교황 후임이라 남다른 관심과 기대가 클 수밖에 없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신임 교황 역시 겸손한 삶을 살아왔다. 시카고에서 프랑스·이탈리아계 아버지와 스폐인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시카고 가톨릭 신학 연수원에서 신학을 전공했다. 27세 때 로마로 유학하여 성 아우구스티노 수도회에 들어가 1982년 사제 서품을 받았다. 그 후 페루 선교사가 되어 20년 넘게 원주민 공동체와 가난한 이들을 섬겼다. 덕분에 영어, 스페인어, 라틴어,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포르투갈어로 사람들과 격의없이 소통할 수 있다고 한다. 마치 하느님께서 미리 그를 교황으로 점지하여 혹독하게 훈련한 ‘준비된 교황’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이미 섬김과 소통으로 돌봄의 삶을 살아야 할 교황의 자질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때마침, 최근 지인이 카톡으로 보내온 ‘섬김의 위대함’이라는 시의적절한 글이 있어 ‘섬김’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 싶다. 4년간 리처드 닉슨 대통령의 특별 보좌관을 지냈던 찰스 콜슨은 미국 의회 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순간을 회고했다. 그 순간은 인도 캘커타의 고인이 되신 마더 테레사 수녀가 미국 국회를 방문하여 연설했던 때라고 한다. 미국인들은 대부분 외부 초청자의 연설 때 연설자에게 박수를 아끼지 않는다고 하는데, 이상하게도 테레사 수녀가 연설을 마치자 그 누구도 박수를 치지 않았다. 오히려 침묵만 감돌았다고 한다. 그날 그들은 숨 막히는 감동과 전율이 그들의 가슴과 목을 누르고 있었기 때문에 박수 보낼 여유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 이유는 테레사 수녀가 던진 마지막 한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섬길 줄 아는 사람만이 다스릴 자격이 있습니다.” 여름엔 시멘트 바닥에서, 겨울엔 거기에 얇은 천 하나만을 깔고 지내면서 환자와 장애아를 돌보는 그녀에게 주변에서 돈과 지위를 갖고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부럽지 않으냐고 묻자, 대답은 간단했다.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겐,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답니다.” 하느님께서 피조물인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해 인간의 모습으로 이세상에 오신 주님께서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며 제자들의 발까지 씻어주셨다. 앞으로 레오 14세 새 교황에게서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고 기대하면 지금부터 가슴이 설렌다. 하느님, 새 교황을 축복하소서. 김재동 / 가톨릭 종신부제·의사이아침에 신임 교황 테레사 수녀 시카고 출신
2025.05.20. 18:46
현재 다니는 미국 회사에 입사하기 전, 나는 10여 년을 한인 의류 회사에서 일했다.그곳은 ‘포에버21(FOREVER 21)’이라는, 한때 전국에서 큰 인기를 끌던 한인 브랜드였다. 전성기 시절 포에버21은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에 약 800여 개의 매장을 운영하며 자라(ZARA), 망고(MANGO)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성장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이 오프라인에서 온라인 중심으로 빠르게 바뀌자, 무리한 사세 확장으로 인해 점차 무너졌다. 각 매장에 쏟아부은 투자는 온라인으로 전환하기엔 너무 무거운 짐이었고, ‘정크 패션’이라는 오명을 쓰게 되면서 쉬인(SHEIN), 아소스(ASOS) 등 중국계 브랜드의 공세에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브랜드가 가장 빛나던 시절, 나 또한 그 안에서 함께하며 직원들 사이의 따뜻한 정과 활기 넘치는 분위기를 누릴 수 있었다. 1년에 세 차례나 받았던 200% 보너스, 연말 선물 보따리, 회사 창립기념일마다 열리던 고기 파티와 경품 이벤트…. 그 시절의 사내 문화는 직원들에 대한 애정과 사기를 북돋우려는 노력이 가득했다. 우리 팀은 멕시칸 직원을 포함해 20여 명으로 구성돼 있었고, 그중 15명이 한인이었다. 칸막이 없이 한 공간에서 일하다 보니, 점심시간이면 서로 음식을 나누고 숟가락 개수까지 알 만큼 가까워졌다. 오전 7시30분까지 출근해야 했던 우리 팀은 대부분 아침을 거르고 출근했지만, 누군가 정성껏 음식을 싸오면 5~10분 정도 다 함께 둘러앉아 아침을 나눴다. 배추전, 고추전, 깻잎전, 군고구마, 찐계란, 수제 빵, 찹쌀떡까지 연륜 있는 샘플사 언니들의 솜씨 덕분에 매번 푸짐한 식탁이 차려졌다. 우리 패턴사들은 그 고마움에 보답하고자 하루씩 정해서 30여 개의 빵과 간식을 사오기도 했다. 당시 빵 값은 개당 1~2달러 정도 하던 때라 큰 부담이 아니었고, 함께 나누는 즐거움이 더 컸다. 인기 메뉴는 베이글과 크림치즈, 곰보빵, 김치만두, 붕어빵, 프렌치토스트, 샌드위치 등 다양했다. 때로는 부지런을 떨며 한인타운에서 김밥, 떡, 떡볶이까지 사오기도 했다. 그렇게 일주일에 3~4번은 누군가가 돌아가며 아침을 준비했는데, 어느 날부턴가 자연스럽게 ‘칭찬 → 축하 → “빵 사!”’가 문화처럼 굳어졌다. 예를 들면 이렇다. “언니, 요즘 피부 너무 좋다~” “아드님 결혼 날짜 잡았어요?” “따님 대학 잘 갔다면서요?” 이런 덕담이 오고 가면 이어지는 말은 거의 늘 같았다.“그럼 빵 사야지~!” 경조사가 많고 자랑거리도 많은 아줌마 15명이 함께하다 보니, 매번 누군가는 빵을 사야 했고, 우리는 그것을 즐겁게 받아들였다. 정이 넘치고 먹는 인심이 좋았던, 지금도 그리운 그 시절이었다. 그 회사를 떠나 지금 근무하는 미국 회사에 오면서, 나는 그 따뜻한 문화가 아쉬웠다. 가벼운 농담 삼아 “도넛 사!(You should buy the donut!)”라고 말해봤지만, 미국 직원들은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한인들처럼 축하할 일이 생기면 음식으로 나누는 문화가 익숙하지 않은 이들에게는 다소 낯설었던 것이다. 생일이면 매니저가 슈퍼마켓에서 사온 크림 가득한 케이크 하나가 전부였다. 그러던 중, 코로나 이후 구조조정으로 팀원이 줄고 내가 팀장을 맡게 되었다. 팀원이 8명이라 부담도 적었기 때문에 어느 날 회사 근처에서 베이글을 사갔다. 직원들은 예상보다 훨씬 고마워 했고, 그것이 시작이 되었다. 이후로는 누가 먼저 시키지 않아도, 각자 돌아가며 음식을 사오게 되었다. 멕시칸 동료는 자신이 즐겨 찾는 빵집에서 전통 빵을, 미국인 동료는 SNS에서 유명한 도넛을 사왔다. 이제는 “빵 사!”라는 말 없이도, 다들 자연스럽게 돌아가며 나누는 문화가 생겼다. 누군가 기쁜 소식을 전하면, 다 함께 축하해 주고 마음을 나눈다.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사람은 누구나 정을 나누는 걸 좋아한다는 것. 국적과 문화는 달라도, 따뜻한 마음은 통한다는 것. 그리고 그 시작은 한 조각의 음식처럼 작고 소박할 수 있다는 것을. 이선경 / 수필가이아침에 보따리 회사 멕시칸 직원 사내 문화
2025.05.15. 19:02
미국에서 구입한 첫 집에서 37년째 살고 있다. 요령이 없는 것인지 능력이 없는 것인지 집을 늘려가지도 바꾸지도 못하고 산 지 오래되었다. 아들아이가 결혼하고 독립하여서 더 넓은 집이 이젠 필요하지도 않다. 세월만큼 살림살이도 쌓여, 버려야 할 허섭스레기도 산과 같다. 버리자니 정이 들어 버린다 버린다 하며 끼고 살았다. 친정 엄마 돌아가신 후의 심란했던 엄마의 짐 정리가 생각이 났다. 크지 않은 아파트에 장롱마다 광마다 가득했던 물건들은 분류에 지쳐 동생이 비용을 써가며 새 물건조차 모두 버렸다고 한다. 징글징글하다는 동생의 평에, 엄마처럼 쟁여놓는 스타일의 나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 후로 ‘봄맞이 대청소 기간’을 정했다가 흐지부지하길 수년 째. 어떤 해는 ‘굿 윌’에 보내기도 하고, 교회 야드세일에 내놓기도 했지만 시원치 않아 얼마 전 다른 방법을 써 보기로 했다. 한국의 당근마켓(당신 근처의 마켓 줄임말)처럼 LA에도 중고거래앱이 생겼다기에 일단 남들은 어떻게 하나 살펴보다가 가입을 했다. 별의별 물건이 다 나온다. 가구, 온돌침대, 마사지체어부터 명품백에 신발, 의류, 육아용품에 이르기까지, 밥주걱에 조리기구 등 소소한 것도 있어 종일 구경만 해도 재미있다. 물건을 팔아야 집정리가 될 텐데 남의 물건 구경만 하다 시간을 보냈다. 그러다 남이 내놓은 조말론(Jo Malone) 향수를 보고, 향기가 나와 안 맞아 쓰지 않는 조말론을 내놓아봤다. 100밀리 큰 것이 시중에선 150불 정도 하는데 50불로 내놓으니 금방 팔렸다. 새 신발 하나와 핸드백 두 개도 팔렸다. 현금이 들어오니 너무 재미있어서 팔릴만한 물건이 무엇일까를 스캔하는 게 일이 되었다. 그러다 보면 수입과 함께 집안 정리는 절로 되는 게 아닌가. 혼자 흥분했다. 팔리는 물건들의 공통점은 품질은 좋고 싸면 팔리는 거였다. 친환경적이라는 점도 중고거래의 장점이다. 제품의 대량 양산과 일회용 쓰레기 등으로 환경 파괴가 가속화되는 지금, 환경에 관심을 가지고 사소한 것이라도 실천에 옮기는 이들이 많아지고 있다. 중고 거래는 저렴하고 합리적인 소비를 넘어 환경까지 생각하는 가치소비로 진화하고 있다. 미국의 대표적인 리세일 플랫폼 중 하나인 스레드업(ThreadUp)은 10년 이내에 패스트 패션을 구매하는 사람보다 세컨드핸드 제품을 구매하는 사람의 비율이 더 높아질 것으로 전망했으며, 2033년에는 중고제품이 개인 옷장의 3분의 1을 채우리라 예측했다. 며칠 전 전자드럼을 구입하려는 남편에게 중고거래앱을 통해 좋은 걸 사주겠다고 장담을 했다. 매직처럼 박스도 개봉 안 한 새 드럼이 나왔다. 시니어 디스카운트까지 받아 좋은 가격으로 사게 되었다. 그런데 소소한 물건 4개 팔고 큰 덩치의 드럼을 들인 것이 ‘봄맞이 대청소’에 합한 일이었나 애매하기만 하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당근거래 물건 구경 봄맞이 대청소 환경 파괴
2025.05.08. 20:32
몇 해째 이어지던 소송에 지쳐 있을 때였다. 삶은 고달프고 하루하루는 메말랐다. 오로지 견뎌내야 한다는 일념에 매달려 안간힘을 쏟을 뿐이었다. 한 달에 한 번, 온 가족이 모여 단골 레스토랑에서 나누던 브런치도 어느새 먼 기억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으면, 그때 가서 다시 시작하리라 막연히 미루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를 모시고 늘 가던 맥도널드 대신 새로 문을 연 커피숍에 들렀다. 커피를 한 모금 머금으신 어머니는 환하게 웃으시며 물으셨다. “언제 이런 멋진 곳을 알아두었니?” 어머니 얼굴에 번지는 잔잔한 미소가 내 마음결에 밀려들어와 속삭이듯 일깨웠다. 어떤 형편 속에서도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만큼은 무엇보다 우선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 자리에서 결심했다. 가족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어머니는 초록의 새순을 피워내는 봄 나무 같으셨다. 인고의 겨울을 잠잠히 견디며, 한결같은 따뜻함으로 나를 감싸주셨다. 사소한 일에도 ‘고맙다’시며 밝은 미소를 지으셨고, 말끝에 머무는 미소는 봄 햇살처럼 사람을 편안하게 했다. 그 미소를, 나는 너무 오랫동안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 주말, 오랜만에 가족이 한자리에 모였다. 어머니, 두 아들, 며느리, 손주들, 그리고 나. 온 식구가 둘러앉아 나누는 식사는 묵혀 두었던 단란함을 모처럼 맛보게 했다. 식탁 위로 흐르는 웃음소리가 마치 오래된 악보 위에 새롭게 얹히는 기쁨의 선율 같았다. 우리는 매달 셋째 주 토요일을 ‘가족이 함께하는 날’로 정했다. 모임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 어머니는 내 등을 토닥이며 말씀하셨다. “가족 브런치를 다시 시작하기로 한 건 참 잘한 일이야.” 그러곤 가는 길에 99센트 스토어에 들르자고 하셨다. 하얀 플라스틱 공을 집어들고 “이거 사도 될까”. 머뭇거리듯 한 어머니의 물음 속에, 그나마도 주저하는 애틋한 염려가 묻어 나왔다. 목이 메었다. “갖고 싶은 건 다 사세요”라 툭 던지듯 말했지만, 목울대 너머로 울컥함이 밀려와 시선을 돌렸다. 다음날, 어머니 집 장식장 한켠에 놓인 하얀 공을 보았다. ‘별것 아닌 걸…’하는 표정을 짓자, 어머니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씀하셨다. “이 공으로 놀면 운동도 되고, 저기 두고 바라보는 재미도 있어”. 그렇게 보니 조명 아래 은은한 형광 빛을 머금은 공이 둥근 달처럼 보였다. 그리고 한 달 후, 두 번째 가족 브런치를 앞두고 어머니는 갑작스레 우리 곁을 떠나셨다. 유품을 정리하던 날, 장식장 한가운데 놓인 공이 눈에 들어왔다. 무심코 버리려다 문득 공 한쪽에 적힌 글귀를 발견했다. ‘매달 셋째 주 토요일, 우리 가족 함께하는 날. 나의 가장 행복한 날.’ 그 곁에는 정성스럽게 그려진 한 다발의 꽃. 그 자리에 주저앉아 울고 말았다. 어머니에게 가장 큰 행복은 우리가 함께하는 날이었다. 어머니의 행복이 너무 소박해서, 그래서 더 가슴이 메어졌다. 지금, 그 공은 내 장식장의 한가운데 놓여 있다. 옆에는 환하게 웃고 계신 어머니의 사진이 자리한다. 미소 너머로 어머니가 남기신 말들 속에 심겨 있던 행복을 되새겨 본다. 어머니가 일상의 삶으로 보여주신 행복을 지켜가고 싶다. 작은 행복이지만, 가장 큰 행복이다.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행복 어머니 얼굴 가족 브런치 다음날 어머니
2025.05.06. 18: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