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의 외출이다. 샌디에이고 시빅 시어터가 실내 장식 리모델링을 마치고 재개장했다.그리고 유명한 브로드웨이 극단이 이 극장에서 유명한 ‘노트북’을 뮤지컬로 공연한다는 소식을 듣고 기다렸다. 그동안 나는 여기저기 병치레를 하느라 우울했다. 영국인 소설가 니콜라스 스파크스는 제약회사에 다니며 어릴 적부터 작가가 되고 싶은 꿈이 있었기에 ‘노트북 ’소설을 썼다고 한다. 작가가 아내 조부모님의 사랑 이야기를 듣고 엮은 실화를 바탕으로 한 소설이다. 그의 영국인 장인, 장모인 잭과 필리스 포터 부부 이야기를 소재로 한 영화가 ‘더 노트북(The Notebook)’이다. 소설은 읽지 못했지만 오래전 영화는 봤다. 우리 모두의 꿈처럼 아름다운 영화, ‘노트북’을 회상해 본다. 두 주인공 남녀는 1941년 10월의 가을 댄스홀에서 처음 만나 서로에게 반했다. 수줍어하는 남자에게 훗날 아내가 된 필리스가 용기를 내어 춤을 추자고 한 것이 그들 사랑의 시작이었다. 1년 4개월 동안 데이트하다 결혼했다. 인터넷을 검색하면 실제 주인공인 부부의 사진도 있다. 2004년 개봉한 영화에는 치매에 걸린 아내의 기억을 살리려 남편이 양로원을 찾아가 자신의 일기장을 읽어 주는 장면이 나온다. 매일 일상의 일들을 꼼꼼하게 기록해 둔 남편, 그리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사랑에 우린 감동한다. 철없는 젊은 시절에는 모르지만 서로 배경이 다른 사람이 만나 만들어지는 부부관계는 사실 쉽지 않은 인생 여정이다. 영화와 뮤지컬 속의 남편 노아와 아내 앨리는 우리 모두의 롤모델이며 꿈이 아닐까. 물질주의와 이기적인 생각으로 살아가는 우리 모습을 되돌아보게 한다. 뮤지컬 무대는 작은 부제 20개와 2막으로 꾸며 놓았다. 전에 오페라를 볼 때처럼 무대 중앙위에 자막 현수막이 없고 오른쪽 아래 한쪽에 모니터가 있었다. 열정적인 가수들의 노래와 세련된 무대 장식으로 마음과 눈이 즐거웠다.는 70년의 삶을 기록한 한권의 노트가 소설가인 사위의 재능을 통해 세상에 소개됐고 사람들에게 참사랑을 배우게 한다. 빠르고 편리한 전화기에 빠져서 언젠가는 감성이 메말라버릴지도 모를, 두려운 세상이 왔는데도 말이다. 슬프게도 극장 주변은 홈리스들로 인해 전과 다른 분위기였지만, 극장 안에는 청중으로 가득했다. 최미자 / 수필가이아침에 브로드웨이 뮤지컬 뮤지컬 무대 브로드웨이 극단 소설가 니콜라스
2026.05.13. 18:31
3년 만에 서울을 다시 찾았다. 서울은 정말 변화무쌍한 도시다. 경복궁 앞은 한국인보다 한복을 입은 외국인들이 더 활발하게 거리를 누비고, 세종대왕 동상 앞 대형 스크린에는 입체감이 넘치는 영상이 매 순간 돌아가며 첨단 도시의 면모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나는 마치 촌사람이 된 듯 어리둥절해져서, 정신을 바짝 차리고 마을버스에서 내려 전철역 출구를 찾아 헤맨다. 다행히 내가 머문 종로구 옥인동과 필운대로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행인지 불행인지 청와대 인근이라 건물을 4층까지만 지어야 하는 법적 규제가 있다고 한다. 천편일률적인 고층 아파트 대신, 빨간 벽돌로 지어진 4층 빌라들이 서로의 앞마당을 마주하며 다닥다닥 붙어 있다. 나는 3년 전과 이번 방문을 합쳐 이곳에서 3주 정도 생활했다. 참 재미있는 동네다. 차 한 대 겨우 지나갈 법한 좁은 골목마다 작은 가게들이 숨어 있다. 커피숍, 빵집, 파스타와 피자 전문점, 설렁탕집까지. ‘손님들이 어떻게 알고 찾아오나’ 싶지만, 늘 활기가 넘치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하다. 아침 7시쯤 골목을 나서면 어디선가 풍겨오는 고소한 빵 굽는 냄새가 절로 군침을 돌게 한다. 그 작은 빵집들은 앉을 자리조차 마땅치 않다. 어떤 집은 가게 앞에 작고 귀여운 의자 몇 개를 내놓았는데, 마치 유럽의 노천카페를 모방한 듯하면서도 정겹다. 그곳에서 담소를 나누는 젊은이들의 표정은 마냥 즐거워 보인다. 이 동네는 50~60년 된 한옥들이 여전히 그 자태를 지키고 있고, 대를 이어 사는 사람도 많다. 나는 장충동과 마포 공덕동에서 살다가 미국으로 왔다. 가끔 옛 동네를 가보면 높은 아파트들이 어릴 적 추억을 모두 뽑아버린 것 같아 씁쓸했는데, 그런 면에서 옥인동 주민들은 참 행복한 사람들 같다. 골목에서 한 발짝만 나가면 마트와 약국, ‘머리깎기’라는 정겨운 간판의 미용실, ‘라 블루’라는 빵집, 그리고 ‘이태리총각’이라는 파스타 집이 있다. 특히 그곳의 파스타와 피자는 미국의 어느 맛집보다 훌륭하다. 한국에 오면 꼭 들러야 할 나만의 맛집 명단 1순위다. 한국 사람들은 참 친절하다. 어느 오후, 남편과 시청 앞 마을버스 정류장을 찾지 못해 헤매고 있을 때였다. 일곱 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과 걷고 있던 젊은 여성이 선뜻 길을 안내해 주었다. 따라가는 내게 아이가 갑자기 먹던 과자를 쑥 내밀었다. 무지개색 꽈배기 모양의 마시멜로였다. 남편은 사양했지만, 나는 고마운 마음에 한 입 베어 물고 정말 맛있다고 칭찬해 주었다. 한번은 온천에 갔을 때의 일이다. 옆자리의 여성이 발바닥을 닦고 있던 도구가 좋아 보여 어디서 살 수 있는지 묻자, 그녀는 자기가 쓰던 것을 선뜻 건네며 미국 가져가서 쓰라고 주었다. 또 오른쪽에서 머리를 감던 여성은 내게 샴푸를 나누어주기도 했다. 순간 뭉클한 동포애가 느껴지며 눈시울이 촉촉해졌다. 미국 생활 중에는 좀처럼 느껴보지 못했던 따뜻한 ‘정’이 마음을 파고들었다. 서울이 너무 그리워 아예 한국으로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지만, 반대하는 남편 때문에 용기를 내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이렇게 좋은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내 마음은 다시금 크게 동요한다. 미국과 한국, 각기 장단점이 있겠지만 서울 골목골목에서 느낀 이 뜨거운 ‘정’만큼은 가슴 깊이 간직하고 싶다. 김규련 수필가이아침에 옥인동 추억 동네 옥인동 종로구 옥인동 옥인동 주민들
2026.05.11. 18:39
몇 년 전, 막내까지 대학에 입학시키고 나니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는 나를 위해 시간을 써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것이 골프였다. 레슨을 받으며 동작을 하나씩 익혀가던 중, 코치에게서 가장 자주 들은 말이 있다. “어깨에 힘 빼세요.” 잘하고 싶은 마음에 골프채를 꽉 쥐고 힘껏 휘두르다 보면 어느새 어깨는 하늘로 치솟아 있었다. 그렇게 스윙을 하면 결과는 늘 같았다. 공은 어김없이 슬라이스가 났다. 머리로는 수없이 들은 말인데 몸은 전혀 따라주지 않았다. 답답한 마음에 스스로를 탓하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나 고개를 떨군 적이 있다. 그러다 주일마다 교회에서 찬양을 시작하게 되었다. 나이가 들수록 더 맑고 깊게 울려 퍼지는 권사님의 소프라노를 들으며 나도 그렇게 부르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하지만 더 잘하고 싶은 욕심에 소리를 밀어 올리다 보면 어느새 또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지휘자는 나를 바라보며 조용히 말한다. “어깨에 힘 빼시고, 배에서 울리게 불러보세요.” 골프에 이어 찬양에서도 같은 말을 듣게 되자 나는 점점 의아해졌다. 왜 자꾸 힘을 빼라고 할까. 나는 왜 힘을 줘야 할 때와 빼야 할 때를 이렇게 구분하지 못하는 걸까. 다리를 다쳐 골프를 쉬게 된 후, 재활을 겸해 시작한 필라테스에서도 상황은 다르지 않았다. 스프링이 달린 침대 같은 기구 위에서 동작을 따라 하며, 잘하고 싶은 마음에 또다시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몸을 굳혀버린다. 선생님은 매번 같은 말을 한다. “어깨에 힘 빼세요.” 그 한마디를 듣는 한 시간 내내, 나는 내 어깨와 씨름한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 알게 되었다. 무언가를 잘하려고 하면 할수록 필요하지 않은 곳에 힘을 주고 있다는 사실을. 골프에서는 허리를 돌려야 하고, 찬양에서는 배에서 소리를 끌어올려야 하며, 필라테스에서는 코어를 안정적으로 잡아야 한다. 힘은 필요한 곳에 쓰일 때 비로소 제 역할을 한다. 그 외의 곳에 들어간 힘은 오히려 흐름을 막고 균형을 무너뜨린다. 요즘 나는 조금씩 어깨의 힘을 빼고 있다. 몸의 중심을 찾고, 어디에 힘을 두어야 하는지를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깨닫는다. 인생도 다르지 않다는 것을. 내 의지대로, 내 힘으로만 밀어붙이려 할 때 오히려 더 어긋나고 더 큰 역효과를 낸다. 어깨에 힘을 잔뜩 주고 살아가는 삶은 오래 버티기 어렵다. 때로는 힘을 빼고 흐름을 느끼며, 지금 이 순간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를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힘을 빼는 것도 하나의 실력이다. 이선경 / 수필가이아침에 연습
2026.05.06. 18:18
늦은 나이에 이민 와 오랫동안 자영업을 하며 미뤄 두었던 여행에 대한 갈증을 은퇴 후에야 풀고 있다. “여행은 내 영혼의 비상식량”이라는 어느 작가의 말처럼, 낯선 땅에 발을 딛는 순간 나는 당장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들과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에서 벗어난다. 친구의 제안으로 갑작스레 떠난 베트남 여행도 그랬다. 친구와의 동행은 마음을 편안하게 했다. 베트남 하면 어린 시절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선친의 친구인 파월 장병, 임 상사 아저씨가 귀국하며 가져온 도시바 냉장고와 텔레비전은 우리 집의 자랑이었다. 김일과 천규덕 선수가 출전하는 레슬링 중계가 있는 날이면 동네 어른들은 우리 집 마루에 모여들었다. 비행시간만 18시간이 넘는 여정은 쉽지 않았다. 만석의 이코노미석에서 긴 시간을 견디게 해준 건 기내 영화 ‘The Dumpling Queen’이었다. 두 딸을 데리고 홍콩으로 이주해 길거리에서 만두를 빚어 팔며 생계를 이어간 여인의 실화 속에서, 나 역시 막막했던 이민 초창기의 시간을 떠올렸다. 베트남 최대의 경제 도시 호치민은 활력이 넘쳤다. 도로를 가득 메운 오토바이 행렬은 무질서해 보이지만, 그들만의 질서가 분명히 존재했다. 피하려 애쓸수록 위험하고, 가만히 서 있으면 알아서 피해 갔다. 낮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 시원, 달콤한 음료를 마시거나 코를 박고 쌀국수를 먹는 사람들에게서 가난해도 서두르지 않고 현재를 즐기는 여유가 느껴졌다. 메콩 강의 짙은 녹음 아래를 배로 지나며 맛본 자연의 깊은 평온함도 오래 남았다. 여행의 기억은 늘 뜻밖의 순간에 깊게 새겨진다. 두 번째 도시 호이안에서 우리는 60년 만의 대홍수를 만났다. 시가지는 순식간에 물에 잠겼고 창밖에는 자동차 대신 배가 떠다녔다. 일정이 모두 취소된 채 호텔에 머물며 식사를 해결하고 마사지를 받는, 뜻밖의 ‘강제 호캉스’를 보냈다. 호텔 문이 폐쇄되어 창문으로 빠져나와 작은 배를 타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할 때는 재난영화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조상숭배와 불교가 일상생활 속에 깊이 녹아 있어서일까. 그 와중에도 찡그리거나 불평하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다. 홍수는 거부해야 할 재앙이 아니라 순응해야 할 삶의 일부처럼 보였다. 허벅지까지 차오른 흙탕물 속에서 우리의 트렁크를 머리에 지고 옮겨 주던 모습에 진심으로 감사했다. 순박한 미소는 사람 사이 마음의 벽을 허물었다. 실패와 좌절이 있어도 의연함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모습에서 이 나라의 밝은 미래가 엿보였다. 홍수로 몇몇 일정을 생략한 채, 하롱베이와 하노이를 거쳐 귀국길에 올랐다. 안개에 잠긴 하롱베이의 기암들은 묵묵히 힘든 시간을 견뎌온 얼굴 같았다. 다시 분주한 일상이 흐르는 하노이의 거리에서, 나는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며 오늘을 저당 잡혀 살았던 일상을 떠올렸다. 베트남의 흙탕물 위에서 아이러니하게도 마음이 맑아지는 경험을 했다. 모든 것을 통제하려 애쓰지 않아도, 삶은 제 나름의 흐름과 속도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배웠다. 여행이 끝난 뒤에도, 그곳에서 배운 느린 호흡과 내려놓음이 일상의 매 순간 조용히 나를 지켜주기를 바란다. 최숙희 수필가이아침에 베트남 베트남 여행 베트남 최대 도시바 냉장고
2026.05.04. 18:57
조건 없는 사랑과 호의를 받아 본 기억이 많다. 그때의 상황도 호의를 베푼 사람도 기록해 두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모습과 친절한 음성은 마음에 새겨져 있다. 수 많은 그들의 존재가 나의 삶을 여기까지 오게 한 힘이 되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민자로 살면서 인종을 초월해 받았던 호의와 돌봄은 교회와 병원에서 일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내가 병원 환자와 그 가족들에 최선을 다하는 것도 그동안 받았던 호의를 돌려주기 위함이다. 성서는 십자가 사랑을 통해 영원한 소망이 되게 하신 하나님의 언약을 기록했다. 이 거룩한 돌봄으로 우리가 삶의 도전에 마주하며 갈 수 있게 하신다. 의료계에서 5월은 ‘정신건강인식 의 달(Mental Health Awareness Month)’이다. 의료진을 대상으로 관련 교육 워크숍도 진행된다. 큰 주제 가운데 하나가 정신건강은 모두의 과제이며, 사랑하는 사람의 돌봄이 가장 효과적이고 강력한 치유 방법이라는 것이다. 삶의 환경이 점차 더 거친 광야의 모습으로 변하는 이 시대에 귀 기울일만한 임상 결과다. 농산물 생산 증가와 다양한 교육 기회, 그리고 의학 발전은 인류에게 기여한 바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가는 일상에서 행복을 느끼던 시절의 기억은 그저 지나쳐 온 삶의 모습일 뿐인 것일까. 현대인이 맞이하는 외로움과 정신건강의 도전은 어디에서 오는가. 5월은 ‘어머니 날’이 있는 달이다. 이날은 형언하기 어려운 큰 감사와 추억이 동시에 찾아온다. 어머니의 사랑과 돌봄 덕분에 생존할 수 있었지만 이를 일찍 깨닫지 못했고, “어머니의 사랑 고맙습니다”란 표현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제 철이 들어 어머니를 돌봐 드리려 했더니 그분은 벌써 떠나고 창밖의 나뭇가지만 소리 없이 흔들리고 있구나’라는 문구가 아프게 다가온다. 어머니의 조건 없는 숭고한 돌봄을 왜 일찍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인생의 철이 드는 것은 이다지도 느린 것인가. 병원 원목의 돌봄 가운데 가장 진지하고 소중한 시간은 임종환자 방문이다. 환자는 병상에서 다 이루지 못해 남기고 가는 다양한 삶의 일들을 회고하게 된다. 그 삶의 못다 한 일 가운데서도 가장 안타까워하는 것이 어머니에게 사랑의 표현을 하지 못하고, 어머니의 돌봄을 일찍 깨닫지 못했다는 것이다. 방문을 마칠 즈음, 주님의 십자가를 통해 약속하신 그 크신 사랑과 생명의 언약을 다시 영혼에 새긴다. 생명의 마지막 순간 함께 할 그 이름 ‘어머니’, 참으로 귀한 이름, 잊지 못할 이름이다. 지금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가정이나, 그리워하는 가정 모두 그 분의 큰 사랑과 돌봄을 깊이 느끼는 5월이 되기를 기원한다. 김효남 / HCMA 원목 협회 디렉터이아침에 어머니 이름 어머니 마지막 십자가 사랑 상황도 호의
2026.04.30. 18:55
젊은 날의 결혼 생활은 내가 그려 두었던 풍경과 사뭇 달랐다. 햇살이 쏟아지는 탄탄대로일 줄 알았으나, 막상 들어선 길은 짙은 안개가 깔린 미로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는 듯 위태로웠고, 또 어떤 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걷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 긴 터널을 지나며 사랑이 반드시 온기만을 품은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서늘한 계절을 통과해 우리는 어느덧 ‘함께 살아낸 세월’이라는 정거장 앞에 서 있었다. 남편은 마음을 말로 꺼내놓는 일이 지독히 서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대신 소리 없는 손길로 사랑을 표현했다. 아침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따뜻한 차 한 잔, 헐거워진 문손잡이를 말없이 고쳐 놓던 투박한 손, 개스 스토브를 반짝이게 닦아 놓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는 모습…. 그 조용한 행동들이야말로 그의 언어였고, 가족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평생의 문법이었다. 말이 닿지 않아 서로 먼 섬처럼 느껴지던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랑이란 이해받는 기쁨만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까지 품고 건너가는 여정임을 배워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기척을 지팡이 삼아 하루를 버텼다. 다정한 말이 없어도, 같은 공기 속에 그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하며 살았다. 마치 칠흑 같은 밤길을 달릴 때 앞이 보이지 않아도, 발밑의 도로가 이어져 있음을 믿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보이지 않는 신뢰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드러나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지도를 그린다. 그 거칠어진 손을 잡고 있노라면 문득 명치 끝이 아릿하다. 이 손과 발이 우리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막아내고,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을까. 그의 늙어감은 더는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경건한 존경이며, 마음 깊이 새겨진 감사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서로의 낡아짐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함께 발견해가는 성스러운 일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같은 차에 올라 서로 다른 페달을 밟으며 여기까지 왔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자주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는 삶이 흔들릴 때마다 브레이크를 밟아 균형을 잡았다. 속도를 맞추지 못해 덜컹거리던 순간도 있었지만, 누군가 제때 멈추어 주지 않았다면 이 긴 길을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의 역할이 달랐기에 우리는 비로소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언젠가 이 여정도 멈출 날이 오겠지만, 그때 나는 담담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때는 참 외로웠지만, 돌이켜보니 그 모든 시간이 당신 덕분에 따뜻했습니다.”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속도는 느려졌지만, 우리가 향하는 풍경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나는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가속 페달을 밟고, 그는 곁에서 말없이 브레이크 위에 발을 올린 채 나를 지킨다.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호흡에 발을 맞추며 생의 아름다운 길 위를 달리고 있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페달 가속 페달 개스 스토브 결혼 생활
2026.04.28. 20:21
점심으로 샐러드 보울을 준비했다. 초록, 빨강, 보라 등 다양한 색의 채소로 생기 넘치는 모양이 꼭 남가주 봄 풍경이다. 샐러드를 먹으려던 찰라, 소셜미디어(SNS) 메시지 하나에 평온함이 산산이 조각났다. ‘한 나라의 문명이 사라질 것’이라는 미국 지도자의 섬뜩한 경고였다. 지난해 봄 시작된 불법 이민자 단속으로 남가주도 두려움에 떨었다. 무장하고 복면까지 쓴 이민세관단속국(ICE) 요원들이 이곳저곳을 급습했기 때문이다. 특히 LA 다운타운 지역의 단속이 심해 직장과 거주지가 그곳인 아들이 공연히 피해를 보지나 않을까 봐 가슴 졸이기도 했다. 전쟁터 같은 급습 장면을 보며 내가 사는 미국에 관해 곰곰 생각해 보았다. 미국은 베트남 전쟁, 과테말라 마야인 초토화 작전 등 많은 비극적 역사 곁에도 있었다. 이후 많은 난민과 망명자가 미국으로 몰렸고 그중 많은 이들이 가주에 자리를 잡았다. 남가주에는 130여 개국 출신 이민자와 224개 언어가 공존하고, 한인타운 등 15개 이상의 소수민족 타운이 형성돼 있다고 한다. 웨스트 LA의 테헤란젤레스, 1979년 이란 혁명 이후 고국을 떠난 망명객들이 터를 잡으며 형성된 이란 커뮤니티다. 이국적인 찻집, 고풍스러운 카페가 늘어선 거리를 기웃거리는 동안 ‘아라비안나이트’의 마법 양탄자를 상상했던 순간을 기억한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살아가는 이민자들이 다양한 언어와 문화를 나누며 땀으로 일궈낸 아름다운 남가주 풍경이다.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한 행보를 전하는 뉴스를 볼 때마다 가슴을 졸인다. 이에 대해 변화를 위한 결단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원칙 없는 파격이 초래할 혼란에 더 귀를 기울이게 된다. 이런 소용돌이 속에서 이민자로서 무엇을 할 수 있겠냐며 자세를 낮추는 나약함이 부끄러웠다. 남가주는 우리의 다음 세대가 더 깊이 뿌리를 내리고 살아갈 터전이다. 이제는 내 국적이 된 나라인 미국의 힘이 점차 무너지고 있는 듯해 서글프다. 발만 동동 구르기보다 할 수 있는 만큼 반 발짝만이라도 내디뎌 보기로 했다. ‘노 킹스 데이(No King’s Day) ‘집회에 참석한다는 남편을 따라나섰다. 다나 포인트를 지나는 해안도로로 나갔다. 1마일은 족히 될 듯한 거리의 양쪽 보도는 발 디딜 틈 없이 인파로 가득했다. 집회 참석자들은 지나가는 차량을 향해 ‘미국에 왕은 없다’ ‘내 이웃을 잡아가지 말라’ 등의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어 보였다. 한 히스패닉 남자는 집회에 참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며 ‘파워 투 브라운(Power to Brown)’이라는 피켓을 들고 있었다. 운전자들은 경적을 두 번씩 반복해 울리며 동참 의사를 알렸다. 오늘도 남가주에서는 불법 이민자 체포를 명분으로 여기저기서 급습 작전이 벌어지고 있지만 이란 전쟁의 소용돌이에 묻혀있는 듯하다. 다문화의 상징인 남가주가 대통령의 서슬 퍼런 정책에 시들어 버릴까 걱정이다. 샐러드 보울 채소처럼 남가주 빛깔을 지키며 살아가야 할 텐데, 마음이 무겁다. 이정숙 수필가이아침에 샐러드 샐러드 보울 남가주 빛깔 불법 이민자
2026.04.27. 21:03
정년퇴임 후 남편과 함께 ‘가요무대’를 시청하는 일이 소박한 일상이 되었다. 브라운관 너머로 흐르는 옛 노래들은 대개 어린 시절 아버지의 곁에서 함께 듣던 곡들이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흘렀음에도 그 가락들은 여전히 마음의 결을 울린다. 음악이란 세대를 이어주는 가장 특별한 언어임을 새삼 깨닫는 시간이다. 화면을 채우는 익숙한 선율을 따라가다 보면 잊고 있던 가사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입술 끝에 맺힌다. ‘수적천석(水滴穿石)’이라 했던가. 처마 끝 낙숫물이 바위를 뚫듯 오랜 시간 반복해서 들었던 노래들은 내 기억의 방에 깊게 새겨져 있었던 모양이다. 오늘 무대 위로 흐른 곡은 ‘꿈에 본 내 고향’이었다. 전주가 흐르자마자 아버지가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유성기에서 흘러나오는 곡조를 정확히 짚어내며 노래를 부르시던 아버지의 모습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노래에 젖어 살짝 우수에 차 있던 그 얼굴, 허스키한 목소리로 나직이 읊조리던 그 음색이 기억 속에서 따뜻하게 숨을 쉰다. 아버지는 참 노래를 좋아하셨다. 어린 시절 열병을 앓아 목소리가 조금 쉬었지만, 그 허스키한 음색은 우리 가족에게 무엇보다 특별한 위안이었다. 노래 솜씨가 빼어났던 막내 이모는 “형부는 참 멋지게 노래를 부르시네요”라며 감탄하곤 했다. 아버지가 부르시던 노래는 단순한 가락 이상이었다. ‘꿈에 본 내 고향’을 부르실 때면 청년 시절 떠나온 고향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이 묻어났다. 두고 온 벗들을 향한 향수, 그 멜로디 너머에는 아버지의 삶과 사랑, 그리고 고단했던 세월의 추억이 농축되어 있었다. 그 어떤 음반보다 따뜻했던 아버지의 노래는 오직 가족만이 이해할 수 있는 깊은 울림을 품고 있었다. 이제 아버지를 곁에서 뵐 수는 없지만 아버지가 남긴 노래들은 여전히 내 안에 살아 흐른다. 노래는 단순히 과거를 소환하는 도구에 그치지 않는다. 그 노래들이 불러오는 것은 잊고 지냈던 온 기억이며 생의 고비마다 나를 다독여준 무언의 격려다. 오늘도 나는 아버지가 즐겨 부르셨던 노래를 가만히 흥얼거려 본다. 강물이 굽이쳐 흐르듯, 옛 노래는 내 마음의 마른자리를 적시고 그 시절의 눈 부신 햇살을 되살려 놓는다. 아버지의 노래는 세대를 건너 내게 도착한 가장 아름다운 유산이자,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흐르는 사랑의 선물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아버지 노래 시절 아버지 부신 햇살 막내 이모
2026.04.20. 20:00
미국에서 이민자로 산 지 어느덧 수십 년이 넘었음에도 여전히 영어를 써야 하는 모임이나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부담스럽다. 단순히 언어의 장벽 때문만이 아니라, 그 언어에 담긴 미묘한 문화적 뉘앙스까지 온전히 체득하지 못한 불편함이 부담감으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얼마 전 다민족 목회자 모임에 참석한 것은 주관자가 한인 2세 목회자였기에 같은 한인으로 조금이나마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모임에는 한인 목회자들 외에도 중국, 일본, 캄보디아, 베트남, 히스패닉, 흑인, 미 원주민, 그리고 남태평양 섬나라인 통가와 사모안 출신까지 다양한 배경을 가진 열댓 명의 목회자가 각기 자기 나라를 대표해서 모였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이들을 환한 웃음으로 맞으며 뻔한 질문을 하면서 어떻게든 어색함을 누그러뜨리려 애썼지만, 주변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 어색함을 깬 것은 사회자의 제안이었다. 각자의 이름 첫 글자로 시작하는 음식으로 자신을 소개하자고 했다. 그는 ‘켄(Ken)’이라는 자기 이름의 첫 글자인 ‘K’를 따서 자신을 ‘갈비(Kalbi)’라고 소개했다. 가장 좋아하는 음식인 동시에, 어린 시절 너무 말라 ‘갈비’라 불렸던 추억담을 곁들이며 분위기를 녹였다. 뒤를 이은 ‘브랜던(Brandon)’ 목사 역시 ‘B’로 시작하는 음식으로 ‘불고기(Bulgogi)’를 꼽았다. 한인 목회자로서 자신의 뿌리가 담긴 음식으로 자신을 정의하는 모습이 꽤 자연스러워 보였다. 다음 차례는 베트남 출신의 ‘쿠홍(Khuong)’ 목사였다. 모두 그가 베트남 음식으로 자기를 소개할 것이라고 짐작하면서 귀를 기울였다. 그때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는 모두의 예상을 뒤엎는 ‘김치(Kimchi)’였다. 자기는 물론 가족들 모두 김치를 너무도 좋아한다고 하면서 다양한 종류의 김치 이름을 줄줄이 대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민자로 살다 보니 인생이 꼭 김치 같더군요. 시원하고 달콤한 맛도 있지만 눈물 나게 매운맛도 있습니다.” 타국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김치 인생론’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낯선 땅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이민자의 삶이야말로, 커다란 항아리 속에서 치열하게 버무려지며 맛을 내는 김치와 너무나도 닮았기 때문이다. 김치가 완성되기 위해서는 배추와 고춧가루, 마늘, 젓갈 등 전혀 다른 성질의 재료들이 한데 섞여야 한다. 이민자의 삶도 마찬가지다. 서로 다른 문화와 언어, 차별이라는 양념 속에서 끊임없이 ‘버무려지는’ 과정을 겪는다. 이 과정은 때로 맵고 아리지만, 제각각의 자아가 부딪히며 조화를 만들어가는 이 고통스러운 버무려짐이 있어야만 비로소 깊은 맛이 우러난다. 여러 번 죽어야 김치가 된다는 배추처럼 내가 기꺼이 죽을 때, 세상 어디에서도 맛볼 수 없는 고귀하고 풍성한 어우러짐의 미학을 완성하게 된다. 오늘도 우리는 인생이라는 항아리 속에서 저마다의 맛으로 익어간다. 세상 풍파에 이리저리 치여 정신을 못 차릴 정도라면, 그것은 바로 ‘버무려져야 맛을 내는 김치’처럼 우리 인생이 비로소 깊고 진한 맛을 완성해 가고 있다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김치 김치 인생론 김치 이름 한인 목회자들
2026.04.19. 18:52
비가 내린다. 아침 산책길에 종종 마주치는 홈리스 커플이 떠오른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두 남녀를 처음 마주한 것은 5,6년 전쯤의 일이다. 해안 도로 버스 정류장 옆, 분홍색 시멘트 벤치가 있다. 그 옆 인도에 이불을 깔고 앉은 여자가 머리를 매만지고 있었다. 그 후,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나 가방을 끌고 자리를 뜨는 그들과 마주치곤 했다. 남녀가 깨끗한 옷을 입었다면 일반인과 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오후, 집으로 가는 길에 다나 포인트 도서관을 지나 공원 길을 산책할 때였다. 소나무 아래 한 남자가 배낭을 베게 삼아 누워 책을 읽고, 여자는 야자수 등걸에 몸을 기대고 전화기를 보고 있었다. 낯익은 모습에 누굴까 생각하며 그들을 다시 보았다. 아침 산책길에 마주치던 분홍색 벤치 옆 커플이었다. 한 조각 퍼즐이 전혀 다른 그림판 위에 놓인 것 같은 생소함에 놀랐다. 왜 그렇게 놀랐을까. 낡고 때 묻은 배낭을 메고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에 대한 박제된 인식 때문이었을 테다. 그들도 책을 읽고,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지 않았다. 게으른 그들에겐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는 편견이 있었다. 더하여 위협적 존재 또는 사회악으로 치부하며 무관심을 넘어 피하려고만 하지 않았던가. 근래에 우리 가게 종업원 한 명이 홈리스가 되었다. 같이 살던 여자와 헤어지며 배낭 하나 들고나와 차에서 잠을 잔단다. 페루 중산층 가정에서 성장한 그는 총기 폭력의 위험을 피해 미국에 온 지 10년째라 했다. 일주일 평균 60시간 일하는 그가 누울 작은 방 하나 얻을 수 없다니 안타깝기만 하다. 반면 돈이 많은 이들은 어떤가. 하와이섬 중 가장 작은 카우아이, 섬 개발을 저지하려는 지역인들의 노력으로 자연이 손상되지 않은 아름다운 곳이다. 이곳에 2014년 어느 재력가가 700에이커 땅을 매입했고, 야금야금 땅 매입을 늘려 지금은 2300에이커나 된다고 한다. 그리고 그곳에 5만7000스퀘어피트 규모의 메가 맨션을 짓고 있다. 지하 대피소가 있고 에너지, 물의 자급자족, 목축과 농사까지 가능한 이 거대한 설계는 지구 종말에 대비한 것이라는 소문이 자자하다. 2014년 개봉한 영화 ‘쉘터(Shelter)’를 기억한다. 뉴욕 노숙자의 사랑을 그린 영화다. 남편을 잃고 마약에 빠진 여자와 종교적 갈등과 폭력으로 가족을 잃은 남자가 고국을 떠나 불법체류자로 살아가는 가혹한 현실을 담아냈다. 세상의 차가운 시선과 죄책감으로 파멸을 재촉하는 여자에게 남자의 따뜻한 손길은 구원이 된다. 각자 다른 과거를 가진 두 사람이 길에서 만나 서로를 돌보고 의지하며 삶을 회복해 가는 이야기다. 우리 종업원 조이와 같은 처지의 사람이 많다. 홈리스 인구 절반이 직장은 있으나 비싼 주거비를 감당하지 못해 거리로 나서게 된 경우라 한다. 대학생 5명 중 1명이 비싼 등록금과 주거비로 주거 불안정을 경험한다는 자료도 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이들이 홈리스 같은 생활을 한다니, 걱정스럽다. 이정숙 / 수필가이아침에 홈리스 생각 홈리스 커플 홈리스 인구 분홍색 벤치
2026.04.16. 18:58
세상이 온통 거대한 가마솥 안으로 들어앉았다.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새벽, 산비탈에서 내려다보면 대지는 제 몸을 지우느라 여념이 없다. 분명한 선을 긋고 서 있던 능선들은 흐릿한 묵화가 되어 낮게 엎드려 있다. 안개는 산과 들의 경계를 허물며 대지 위에 하얀 나라를 건설했다. 안개는 욕심이 없다. 높게 솟은 봉우리도, 깊게 파인 골짜기도 가리지 않고 공평하게 하얀 숨결을 나누어준다. 그 품 안에서 나무들은 머리만 내민 채 가쁜 숨을 몰아쉰다. 턱 끝까지 차오른 안개의 무게가 버거울 법도 한데, 숲은 고요한 운무 아래서 가장 평온한 휴식을 취하는 듯 보인다. 발밑을 본다. 안개의 바다로 뛰어들지 못한 짙은 흙이 단단하게 발등을 붙잡고 있다. 세상이 지워지는 순간에도 우리가 딛고 선 땅만은 이토록 선명하고 정직하다. 눈앞의 풍경이 모두 사라져 불안해질 법한 순간, 발끝에 닿는 흙의 감촉은 비로소 “너는 여기 살아있다”고 일러주는 유일한 이정표가 된다. 내가 딛고 선 이 한 뼘의 대지는 안개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실존의 증거다. 안개가 시야를 가리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들리기 시작한다. 이름 모를 새소리. 평소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그 울음소리가 습기를 머금은 공기를 타고 맑게 울려 퍼진다. 눈을 감아도 세상은 여전히 그곳에 있다는 안도감이 새소리에 실려 온다. 앞이 보이지 않아도 평온할 수 있다는 것, 그것은 보이지 않는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 덕분일 것이다. 우리는 늘 명확한 것을 강요받으며 살아간다. 목표는 뚜렷해야 하고, 관계는 선명해야 하며, 성과와 지표는 숫자로 증명되어야 한다. 그래서인지 눈앞이 흐릿해지는 순간을 본능적으로 두려워한다. 하지만 가끔은 우리 삶에도 이런 가마솥 무렵이 필요하다. 복잡하게 얽힌 관계의 선을 지우고, 날 선 계획들을 뽀얗게 지워버리는 시간은 결코 낭비가 아니다. 뜨거운 증기 속에서 쌀이 뜸을 들여 맛있는 밥이 되듯, 이 하얀 정적 속에서 삶의 깊이를 뜸 들여야 한다. 안개에 몸의 절반을 내어준 나무를 본다. 잎사귀의 모양새를 뽐내던 시절을 지나, 이제는 오직 줄기의 중심만을 지키며 서 있는 모습에서 경외심이 느껴진다. 화려한 외양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나무의 ‘근본’이 비로소 드러나는 것이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다. 수많은 수식어와 사회적 직함이 안개처럼 덮여 지워질 때, 우리는 비로소 ‘나’라는 본질과 마주하게 된다. 안개는 세상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소중한 단 한 가지에 집중하게 해주는 축복의 장막이다. 산을 내려가는 길, 여전히 안개는 발목을 휘감고 있지만 마음은 더없이 평화롭다. 지워짐으로써 비로소 내가 선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 사람의 눈에는, 평범한 숲길조차 성소(聖所)처럼 보인다. 나를 지워야 비로소 내가 선 자리가 보인다는 것, 오늘 저 안개가 내게 건네는 가르침을 마음에 새긴다. 안개가 걷히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고통이 아니라, 가장 나다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날 준비를 하는 거룩한 기다림이다. 나의 삶도 이 하얀 정적 속에서 조금 더 묵직한 울림을 가진 존재로 여물어가길 바랄 뿐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선명 새벽 산비탈 가마솥 무렵 사회적 직함
2026.04.09. 18:33
오늘도 SNS(소셜네트워크서비스)에 게시물을 올리고 제일 먼저 ‘좋아요’ 버튼을 누른다. 내 게시물의 첫 ‘좋아요’ 버튼을 누르는 사람은 나다. 혹시 까먹고 안 누른 하트가 있으면 돌아가 하트가 빨간색으로 꽉 차도록 ‘좋아요’를 누른다. 이런 모습에 여동생은 언니는 진짜 특이하다고 놀렸는데 내겐 당연한 것이 여동생의 눈에는 이상하게 보인다는 것이 더 신기했다. “그럼 사람들은 자기 게시물에 하트를 안 눌러?” “보통은 그럴걸”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동생은 “언니는 진짜 자기애의 끝판왕”이라며 혀를 찼다. 애써 쓴 자기 게시물에 ‘좋아요’를 누르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내겐 의아한 지점이었다. 나는 내 게시물에 ‘좋아요’를 열 번이고 백번이고 누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도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반장 선거에 출마하곤 했다. 그때마다 꼭 나에게 투표를 했는데 함께 출마한 친구가 0표가 나오면 이상해 보였다. ‘저 친구는 자기를 뽑아 달라고 친구들에게 연설해 놓고 정작 자신은 왜 자신을 뽑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본인이 투표할 만큼 좋은 후보자가 있다면 그 친구가 당선되도록 본인은 나오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닌가. 나는 내가 찍은 한 표가 전부인 적도 있었지만 부끄럽기보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을 지지할 자신감이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펴졌다. 굳이 친구들에게 저 한 표가 내가 던진 표라고 말하지는 않았다. 이 이야기를 들은 엄마, 아빠는 웃었지만 정말 잘했다고 칭찬까지 해줬다. 겸손을 미덕으로 여기는 동양 문화권에서는 자신을 높이기보다 낮추는 게 더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본인이 만든 결과물은 본인이 가장 인정해 주고 높여줘야 한다고 생각한다. 자신도 인정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인정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일이 아닐까.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에 내보내기 전에 가장 많이 사랑하고 지지하고 보듬어주고 싶다. 거친 세상에 나가 넘어지고 쓰러지는 날이 올 때 부모에게서 받은 사랑과 온기가 역경을 헤쳐 나갈 힘과 용기가 되었으면 한다. 나 역시 부모님의 아낌없는 사랑과 지지를 받고 성장했기 때문이다. 부족한 부모지만 줄 수 있는 만큼의 사랑과 돌봄을 아낌없이 주고 싶다. 그리고 아이들이 알았으면 한다. 항상 엄마가 뒤에 있다는 것을. 오늘도 SNS의 바다에는 ‘좋아요’를 갈구하는 게시물들이 여기저기 쏟아져 나온다. 어떤 글은 많은 이들의 공감을 얻어 하트 수가 쑥쑥 올라가고, 또 어떤 글은 첫 ‘좋아요’를 누를 그 누군가를 기다리며 SNS 바다 위를 외로이 떠다닌다. 오늘도 한 자 한 자 꾹꾹 눌러써 고이 접은 작은 돛단배를 망망대해에 띄워 보내기 전에 연료부터 꽉 채워준다는 심정으로 ‘좋아요’를 힘차게 눌러준다. 그렇게 나는 또 내 글의 최초 지지자가 된다. 이 글도 꼭 안아 데워 세상에 띄워 보낸다. 이보람 / 수필가이아침에 지지자 최초 지지자 자기 게시물 엄마 아빠
2026.03.25. 19:11
며칠 전 시니어센터에서 있었던 일이다. 창밖에서 두런두런하는 소리가 들려 눈을 들어 바라보니 주차장에 노인들이 긴 줄을 만들고 있었다. 설마 반전시위라도 하는가 싶어 물어보니 식료품을 나누어 주는 날이라고 한다. 67세에 은퇴를 하기 전, 수차례 계산기를 두드려 보았다. 매달 필요한 생활비에 약간의 예비비까지 준비가 되었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막상 은퇴하고 나니 돈 쓸 일이 생기면 한 번 더 잔고를 확인하게 된다. 꼭 필요한 것이 아니면 지출을 주저한다. 아내의 전화기는 바꿔 주었지만, 3년이 지난 내 것은 그냥 쓰고 있다. 2~3년은 더 쓸 생각이다. 손주들 생일에 사주는 선물의 가격도 전에 비해 다소 줄었다. 적립해 둔 돈을 다 찾아 쓰면 끝이 나는 개인은퇴계좌(IRA)와 달리 연금은 평생 보장된다. 매달 들어오는 돈을 다 써도 다음 달이 되면 같은 금액이 은행 계좌로 입금된다. 그런데도 매달 다만 얼마라도 돈이 남아야 마음이 놓인다. 이유인즉슨, 연금 인상률이 직장인의 봉급이나 물가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난 30년 동안 소셜 연금의 평균 인상 폭은 2.7% 였는데, 동기간 임금은 연평균 3.67%, 물가는 2.5~3% 올랐다. 최근 10년 간 임금은 더 크게 올라 연평균 4.17%였다. 시니어들의 걱정은 죽기 전에 모아놓은 돈이 떨어지는 일이다. 어찌 보면 안 해도 될 걱정일 수도 있다. 돈이 없으면 없는 대로 다 살아갈 길은 있기 마련이다. 저소득층 시니어를 위한 아파트, 각종 의료 및 복지 프로그램 등의 안전망이 있지 않나. 젊어서는 가족을 부양하느라 돈을 쓰지 못했는데, 어느 정도 책임을 마친 노년에도 돈 때문에 하고 싶은 일을 못 한다면 이 또한 억울하고 슬픈 일이 아닌가 싶다. 남은 가족에게 큰 빚을 남기고 가지는 말아야겠지만, 형편에 맞게 돈을 쓰며 사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집이 있다면 리버스 모기지를 활용하는 방법도 있다. 에쿼티의 일부를 빼서 쓰고, 나머지는 상속이 가능하다. 머리로는 계산이 되고 이해도 되지만, 마음 한구석에 남은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 외모는 노인이 되지만 마음은 여전히 청춘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감성은 개인에 따라 크게 차이가 난다. 자그마한 체구에 곱슬머리, 미소가 귀여운 A는 80 중반의 백인 여성이다. 그녀가 들려준 이야기다. 자신을 눈여겨보는 영감이 있었는데 어느 날 다른 여성을 통해 전화번호를 건네주었다고 한다. A는 그에게 전화를 걸어 만남이 이루어졌고, 몇 차례 각자의 집을 방문해 가족도 만났다. A는 딸네 집에 살고, 그 영감은 손주, 손녀를 포함 대가족과 함께 산다. 그 후, 그에게서 전화가 와 우린 안 맞는 것 같다며 이별을 통보해 그 일은 잠깐의 해프닝으로 끝이 났다. ‘내로남불’이라고 하지만, 독신 시니어라면 로맨스도 선택 가능한 옵션이다. 로맨스에도 돈은 필요하다. 낭비와 허세는 피해야겠지만 필요할 때 지갑을 열 수 있는 사람이 멋진 시니어가 아닐까. 고동운 전 가주공무원이아침에 돈타령 저소득층 시니어 포함 대가족 마음 한구석
2026.03.23. 20:00
“가장 좋은 노동자 로봇은 가장 값싼 로봇, 일하는 데 필요한 것 이외에는 모든 것을 제거한 노동 로봇이 최고다.” 체코의 작가 카렐 차페프가 쓴 희곡 R.U.R. (Rossom Universal Robots)에 등장하는 로봇 생산 공장 공장장이 한 말이다. 희로애락, 이런 감정은 노동자 로봇 그리고 군인 로봇에게는 필요가 없다. 그래서 로봇은 즐거움이나 두려움이 없이 주어진 일을 시키는 대로 한다. 인간 사용자들에게는 가장 경제적 효율성이 높은 노동자가 로썸 로봇이다. 겉보기에는 사람과 똑같은 로봇 노동자에게 인간적인 대접을 해야 한다는 운동이 일어난다. 헬레나라는 여인이 로썸 로봇 회사에 온다. 그녀는 로봇에게 ‘영혼’을 주자는 요구를 한다. 로봇 디자인 담당자가 그녀의 말을 조금 들어준다. 로봇에게 고통을 느끼는 신경(pain nerve)를 만들어 준다. 고통을 느낀다는 것은 로봇이 사람처럼 될 수 있는 첫걸음이다. 고통을 느끼기 때문에 어떤 일에 대해 좋고 나쁜 감정이 생기고, 좋은 일에는 애착을 갖고 나쁜 일은 피하고 싶은 욕망이 생긴다. 사랑도 미움도 다 아픔에서 시작된 감정이다. 로봇마다 호불호의 감정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차이가 모여 로봇 사이에서 ‘나’와 ‘남’의 구분이 생긴다. 비슷한 감정을 가진 로봇끼리 ‘우리’를 만든다. 남자 로봇, 여자 로봇 간에 애정도 일어난다. 로봇(robot) 프리머스와 로봇테스(robotess) 헬레나, 그들은 상대방을 위해 대신 죽어줄 수 있는 마음도 갖게 된다. 이 상황은 로봇이 죽음이라는 현상을 이해하고 이미 감정적으로 내재화했다는 이야기다. 죽음이 존재의 끝이고 존재가 끝나면 사랑하는 상대와 더는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초기 로썸 로봇은 죽음에 대해 전혀 감이 없었다. 자신을 해부하면 그들의 생명이 없어진다는 사실이 로봇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었다. 그러나 고통을 느끼면서,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욕망이 생기고, 죽음을 두려워하게 된다. 죽음을 인식하는 순간 삶이라는 반대 개념도 따라오고, 탄생이라는 개념도 생기게 된다. 한 로봇의 수명이 다하면 새 로봇으로 채워지는 끊김 없는 흐름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생기는 순간 죽음의 순간과 삶의 세월로 나누어 진다. 그리고 삶에 대한 애착이 생기고 그 애착이 죽음 뒤에 새로운 탄생을 바라는 마음이 된다. 이러한 마음이 로봇으로 하여금 “번성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달라”라고 간청하게 하는 것이다. 그렇게 로봇 프리머스와 로봇테스 헬레나는 아담과 이브가 된다. 새로운 아담과 이브는 지상에서 새로운 발생과 소멸의 굴레 속에서 죽음에 대한 공포와 탄생의 기대를 안고 역사를 만들어 간다. 이 희곡을 쓴 차페프는 1920년대에 이미 100년 후 인류가 맞게 될 운명을 정확하게 그려냈다. 인공지능(AI)을 가진 로봇이 인간을 밀어내고 지구의 주인이 되는 상황이 상상 속의 허구로 끝날 것 같지 않다. 인간 멸종, 인류에게는 대재앙이겠지만 그렇다고 지구나 우주가 없어지지는 않는다. 사람인 듯 아닌 듯한 존재가 사람의 자리를 차지할 때가 오고 있다. 김지영 / 변호사이아침에 로봇 연애 순간 죽음 universal robots 헬레나 그들
2026.03.22. 19:01
어릴 적 꿈이 택시운전사였던 남편은 운전을 좋아한다. 그 좋아하던 운전을 요즘엔 잘 못 한다. 허리에서 엉덩이 그리고 허벅지에서 종아리로 이어지는 라인이 저릿하고 통증이 있다고 한다. 병명은 척추관 협착증. 치료차 맞는 주사는 마취해야 해서 보호자가 함께 와야 한단다. 허구한 날 내 간병인 역할을 했던 남편의 보호자로 따라갔다. 환자가 환자를 돌보는 격이다. 주사 맞은 후의 운전은 보호자가 꼭 해야 한다고 한다. 보호자로 입장이 바뀌니 책임감에 잔소리도 하게 되고 보양식도 먹여야겠다는 의무감도 불끈 생겼다. 나는 싫어서 안 먹는 염소탕을 진상하고 홍삼, 공진단도 억지로 먹게 했다. 처음 맞은 통증 주사가 별 효과가 없어 2주 후에 한 번 더 맞았다. 주사 맞고 대기실에서 15분 쉰 후 나오는데 환자가 약간 어지럽다고 한다. 평소 무쇠 같은 남편으로 내 의지처였던 사람이 아프다니 가슴이 덜컹한다. 나보단 하루라도 더 살아야 할 사람이다. 내게 신장하나를 떼어주고도 건강했던 사람인데 나이 드니 건강도 장담을 못 하는가 보다. 통증은 심했다가 덜했다가 간헐적이고 속 시원히 낫질 않는다. 아프다면서 회사 일도 하고 교회도 가고 늘 하던 수영도 꾸준히 했다. 남편이 아픈 것이 내 탓인듯해 미안했다. 지난 토요일엔 협착증으로 고생하면서도 선배님들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고 아침에 나가서 함흥차사. 비행기 타러 나간 날은 온종일 불안하다. 특히 86세 선배님을 모시고 갔기에 더욱 걱정되었다. 세스나는 장난감처럼 부실해 보여 나는 잘 안 탄다. 선배님들이 너무 재미있었다고 또 타고 싶다 하셨다며, 경비행기 운행 중엔 다리 통증이 없었다고 한다. 거참 신기하기도 하다. 놀 때는 안 아프다니 말이다. 그러더니 이번엔 맘모스 스키장에 스노보드를 타러 갔다. 안 아팠단다. 그야말로 내 맘대로 통증이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 통증을 못 느끼는 모양이다.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니 그런 통증이 있다. AI(인공지능)와 위키백과에 의하면 ‘선택적 통증’이란다. ‘선택적 통증(Selective Pain)은 특정 신경병증성 통증이나 신체형 통증 장애 등에서 주로 사용되는 개념으로, 특정 자극, 자세, 혹은 부위에서만 선택적으로 발생하는 통증을 의미한다. 이는 통증이 주관적으로 특정 상황에서만 나타나거나 심해지는 특징을 보인다.’ 심인성 통증과도 관련이 있다는데 그건 나도 겪어보아 안다. 집에서 부엌일 할 땐 한 시간도 못 견디는데 좋은 사람들과 밥 먹고 놀 땐 반나절 앉아있어도 피곤하지 않다. 꾀병처럼 보이는 이걸 전문용어로 ‘선택적 통증’이라고 하나보다. 남편의 병이 차라리 꾀병이었으면 정말 좋겠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선택 통증 선택적 통증 통증 주사 심인성 통증
2026.03.17. 19:58
얼마전 뉴욕이 폭설로 난리가 났을 때, 샌디에이고에는 비가 흠뻑 내렸다. 그런데 그 무렵 나는 온 천지가 빙빙 돌며 침대에서 일어설 수조차 없었다. 급히 깊은 새벽잠을 자고 있던 딸을 깨워 응급실로 향했다. 유난히도 짙은 안개가 산마루를 휘감은 탓에 한 치 앞도 분간이 어려워 느린 속도로 고속도로를 달려 겨우 병원에 도착했다. 그 시간은 아마도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십년 만에 또 높은 혈압으로 가족을 놀라게 했다. CT 스캔 후 여의사와 친절한 남자 간호사가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마그네슘과 포타슘 치료도 차츰 혈압을 내려가게 했다. 날이 밝자 주치의는 이석증인 것 같다며 약을 처방해주었다. 처음 듣는 병이라 집에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하고 지인들에게도 물어보니 나이 들면 생기는 병이란다. 늘 약물 부작용이 즉각 반응하는 나는 물리치료사도 만나 운동하는 법도 배웠다. 집 안팎 살림뿐만이 아니라 오만 가지에 신경을 쓰고 살아야 하는 내가 일상의 스트레스를 벗어나기는 힘든 일이다. 주어진 업보라며 위안을 하지만, 가끔은 사경을 헤매면서 참으로 허무한 삶을 체험한다. 고맙게도 다시 살아난 나는 집 마당에 만든 법당을 찾아 그곳에 모셔둔 가족을 바라보며 합장하며 안부 인사를 나눈다. 달포쯤, 프리지아가 꽃망울을 조랑조랑 맺고 키 자랑을 하더니 지금은 노란 봉오리들이 우아하게 터지면서 달콤한 향기로 내게 희망을 주며 나를 일으켜 세운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온 딸을 불러 시멘트를 뚫고 나오는 꽃들의 저력을 보라 했더니, 그 생명력에 놀라 사진을 찍는다. 프리지아의 빨간빛은 정열, 흰 꽃은 순결, 보라색은 동경, 분홍은 여성스러움이 꽃말이다. 나의 뜰에 핀 노란색은 ‘새 출발을 응원한다’ 는 말이 있다. 그것도 우정으로. 사실 한국에 있는 내과 의사 친구가 나의 회복에 한몫했다. 카톡으로 내 병에 대해 문의를 했는데, 변하지 않는 우정으로 성심성의껏 조언을 해줬다. 남아프리카가 원산지인 프리지아가 전 세계로 퍼져나갔듯 나도 이민자의 삶을 살고 있다. 세월과 함께 부서져 가는 내 몸은 연약한 프리지아 줄기 같지만, 강한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버티면서 하루하루 살아간다. 게다가 프리지아 꽃처럼 신비스런 향기까지 멀리멀리 날린다면 얼마나 좋을까. 최미자 수필가이아침에 프리지아 생명력 프리지아 줄기 달포쯤 프리지아 포타슘 치료
2026.03.15. 7:00
인연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날, 나는 그녀를 ‘삼월 언니’라 불렀다. 칠월에 태어난 친구는 ‘칠월 언니’, 시월생인 나는 자연스레 ‘시월이’가 되었다. 달 이름으로 부르는 호칭은 금세 우리 사이의 거리가 되었다. 처음 만난 날, 그녀의 첫인상은 참 따뜻했다. 언니는 내 어깨에 빨간 숄을 조심스레 둘러주었다. 직접 뜬 것이라 했다. 한 코 한 코에 담긴 온기가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우리는 칠십 중반의 나이를 잠시 잊고, 열일곱 소녀로 돌아가 첫사랑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은 유난히 맑았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언니의 삶은 오랜 인내의 연속이었다. 언니의 남편은 스무 해가 넘도록 뇌졸중을 앓았다. 언니는 그 시간을 묵묵히 함께 견뎠다. 휠체어를 밀어 공원과 바닷가를 거닐었고, 남편이 좋아하는 빵을 사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니는 늘 호박꽃을 닮고 싶다고 했다. 넓은 잎 아래 수수하게 피어나 아픔을 견딘 끝에 기어이 열매를 맺는 꽃. 하지만 세월은 그 열매마저 서서히 약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기력은 급격히 쇠했다. 요양원으로 하루 두 번 발걸음을 옮기며 식사를 거부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언니의 마음은 말라갔다. 얼마 뒤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 오하라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이제는 남편의 거친 숨소리에도 겁나지 않아요. 그냥 그러려니 해요. 77세 희수의 센티멘털인가 봐요.” 이별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다가온 시간은 예고 없이 시렸다. 사랑이란 결국 함께 늙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남편의 가장 빛나던 시절부터 가장 초라해진 순간까지 그 모든 시간을 끝까지 동행했다. 운명은 묘하게도 정교했다. 동부에서 달려온 두 아들이 가족들과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남편은 마지막 고비를 맞았다. 위독하다는 연락 앞에서 언니는 직감했다. 아들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두 아들의 손을 남겨주려는 남편의 배려였음을. 그렇게 남편은 사랑하는 이들의 배웅 속에 조용히 떠났다. 고통은 끝났지만,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그리움이 남았다. 장례를 마친 뒤, 서울에서 온 딸이 욕실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엄마, 비누에서 아빠 냄새가 나요….”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는 말을 그날 처음 실감했다. 비누 한장에 스민 체취가 큰 파도가 되어 마음을 흔들었다. 언니는 말했다. “내 몫의 사랑은 다 했으니, 남은 시간은 잘 살아야지요.” 그 말에는 상실을 견뎌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담담함이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빈자리를 보듬으며 남은 길을 같이 걷고 있다. 우리의 노년이 너무 쓸쓸해지지 않도록. 삼월 언니는 여전히 호박꽃 같은 사람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 제 몫을 다하고, 끝내 열매를 남긴 사람. 그 사랑은 이제 조용한 향기로 남아 언니의 뒷모습을 따라온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비누 향기 비누 향기 첫사랑 이야기 남아 언니
2026.03.11. 19:50
교회 예배당 뒷벽에 예배 인도자들이 볼 수 있도록 커다란 TV를 달았다. 그런데 생각보다 화면이 작았던 모양이다. “화면이 너무 작다.” “글씨는 보이는데 악보는 보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아쉬운 소리가 들려왔다. 교인들이 토요일 아침부터 건설 현장에서나 쓸 법한 비계를 세우고, 사다리를 이리저리 옮기는 큰 수고를 해서 단 TV였지만, ‘잘못 달았다’라는 판정을 받았으니 떼어낼 수밖에 없었다. TV를 떼어내면서 서운한 마음이 가시지 않았던지 구두덜대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잘 보이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앞에서 찬양을 인도하고, 예배를 돕는 이들의 눈에는 작게 보인다니 말이다. 결국 다른 곳에 달려있던 조금 더 큰 TV를 떼어다가 다시 달았다. 주일 아침, 찬양팀이 예배 준비를 위해 예배당에 들어섰다. ‘새로 단 TV를 보면서 이번에는 잘 보인다고 할까? 아니면 여전히 안 보인다고 할까?’ 긴장된 마음으로 반응을 지켜보는데, 이번에는 모두가 다 잘 보인다고 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안도의 숨이 나왔고, 입에서는 나도 모르게 이런 말이 새어 나왔다. “이번에는 잘 달았구나.” 그때 권숙월 시인의 시구절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잘못 한다에서 못을 빼니 잘 한다가 되었다’라는 구절이었다. 시인은 이어서 ‘잘못 먹었다에서 못을 빼면 잘 먹었다 잘못 살았다에서 못을 빼면 잘 살았다’가 된다면서, ‘못’을 빼면 뜻이 뒤바뀐다고 했다. 문장에서 ‘못’을 빼면 꾸중은 칭찬이 되고, 부정은 긍정이 되는 것처럼, 삶에 박힌 ‘못’을 빼면 인생이 달리 해석된다는 말이다. 시인의 표현을 빌리면 TV도 ‘잘못 달았다’에서 ‘못’ 하나만 빼면 ‘잘 달았다’라는 말이 되는데, 우리는 그 ‘못’ 하나 빼는 데 무척 인색하다. 새해를 시작하면서 잘해 보겠다고 결심한 것들이 여럿 있었다. 운동도 잘하고, 음식도 잘 먹고, 인간관계도 잘 맺고, 일도 잘하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겨우 두 달쯤 지났을 뿐인데 잘한 것보다는 잘못한 것이 더 또렷하게 마음에 남아 있다. 두 달 사이에도 이토록 잘못한 일이 많은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잘못했다고 여겨온 일들은 또 얼마나 많았겠는가. 삶이 어려울 때마다 이민을 잘못 왔다고 생각한 적이 어디 한두 번이었겠는가. 일이 풀리지 않을 때마다 직업을 잘못 택했고, 사람을 잘못 만났고, 때를 잘못 탔다고 투덜거리다 보니 그 ‘못’들은 후회와 상처라는 이름으로 우리의 인생에 깊숙이 박혀 버렸다. 녹슬고 구부러져 이제는 쉽게 빠지지도 않는 ‘못’들이 자책과 비교의 잣대가 되어 우리의 인생을 ‘잘못 살았다’라고 단정 짓게 했다. 그렇다고 그 ‘못’들을 우리가 일부러 박은 것이 아니다. 낯선 땅에서 가족을 지키기 위해 눈치 보며 버티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생겨난 흔적들이다. 잘살아 보겠다고 선택한 이민자의 삶이 ‘못’ 하나 때문에 잘못 살았다는 판정을 받아야 한다면 억울하지 않은가. 이제는 그 ‘못’을 뺄 때다. ‘잘못 선택했다’가 아니라 ‘그때는 잘한 선택이었다’로, ‘잘못 살아왔다’가 아니라, ‘힘들었지만 여기까지 잘 살아왔다’로. 아직도 우리 삶에는 ‘못’을 빼고 나면 남게 될 ‘잘’이 얼마든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교회 예배당 예배 인도자들 예배 준비
2026.02.23. 19:14
비가 며칠째 내린다. 빗소리에 섞여 공기가 한결 차가워졌다. 저녁을 조금 일찍 마친 탓인지 허기라기보다는 마음이 출출했다. 말하지 않아도 생각을 알아챈 나는 자연스럽게 에어프라이어를 꺼내 고구마를 구웠다. 기계가 낮은 숨결로 윙윙거리다 멈추고 잠시 후 ‘땡’ 하는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울렸다. 에어프라이어 문을 여는 순간 잘 익은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콤한 향이 김과 함께 퍼지며 집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뜨거운 고구마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가며 껍질을 벗기는데 노란 속살을 품은 그 작은 고구마 하나에 오래된 얼굴들이 겹겹이 떠올랐다. 맛은 혀에서 시작되었지만 기억은 마음 깊은 곳에서 먼저 깨어났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길모퉁이에 서서 사 먹던 군고구마가 생각났다. 얼굴에 연탄 가루를 묻힌 채 말없이 고구마를 건네던 아저씨의 손길에는 하루를 견뎌낸 노동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따뜻한 종이봉투 너머로 전해지던 온기 속에는 말로는 다 하지 못한 삶의 사연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던 것 같다. 87세의 남편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의 표정에는 어느새 칠십 년 전의 시간이 천천히 다가와 있었다. 고구마 하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할머니다. 겨울밤, 화롯불 앞에 둘러앉아 있으면 할머니는 재 속에 묻어 두었던 고구마를 툭툭 털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던 그 따끈함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부엌 아궁이 장작불 위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는 부엌 쪽문을 열고 뭉근하게 구워야 맛있다면서 “고구마 꺼내서 잔불로 구워라” 하셨다. 부엌일을 돕던 언니가 다 구워진 고구마를 방으로 들고 들어올 때 퍼지던 구수하고 달큰한 냄새는 어린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때 먹던 고구마는 왜 그렇게 달았을까. 아마도 불의 온기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정성, 그리고 함께 나누던 마음이 곁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참 편해졌다. 버튼 하나면 군고구마가 완성되는 시대다. 불을 지피며 재를 헤치던 수고는 사라졌고 시간은 한결 단축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을 한다. 고구마는 역시 삶는 것보다 굽는 게 제일이라고. 그을린 껍질에서 배어 나오는 향, 그 속에 스며든 지난 시간의 기억까지 함께 씹으니 오늘 밤의 고구마는 유난히 더 달다. 에어프라이어 너머로 흐르는 이 맛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월을 건너온 손길과 얼굴들, 그리고 함께 늙어가는 우리의 시간이 포개진 따뜻함이다. 비 내리는 밤, 고구마 하나로 데워진 마음은 조용히 말한다. 어떤 그리움은 이렇게, 천천히 익어야 제맛이 난다고.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그리움 시간 고구마 하나 부엌 아궁이 부엌 쪽문
2026.02.22. 19:11
“나중에 기운 차리면 만나자.” 그 말이 마지막 인사가 될 줄은 몰랐다. 한국에서 직장생활을 함께하며 오랫동안 자매처럼 지낸 명순 언니가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믿기 어려웠다. 언니의 문자를 받은 지 사흘 만이었다. 70세 생일을 불과 석 달 앞둔 때였다. 서울 서초동의 같은 아파트단지 옆 동에 살며 우리는 아이들을 함께 키웠다. 겨울이면 과천 서울랜드 눈썰매장에서 양 볼이 빨개지도록 썰매를 타고, 돌아오는 전철 안에서는 꾸벅꾸벅 졸곤 했다. 광화문 화랑에서 닥종이 작가 김영희의 ‘아이를 잘 만드는 사람’ 전시를 보며 한국의 전통 풍속을 언니와 경쟁하듯 아이들에게 설명한 기억이 생생하다. 그때는 몰랐다. 그 평범하고 분주한 일상이 훗날 가장 그리운 장면이 될 줄은. 삼풍백화점이 무너진 날에도 우리는 함께 있었다. 조카를 맡아 다섯 아이를 돌보느라 기진맥진하여 백화점 폐장 세일에 가지 못했는데, 그 일이 우리를 살렸음을 알고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다. 삶은 언제나 알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늘 바쁘다는 핑계로 다음에 보자는 말로 만남을 미루지 않았던가. 한국을 방문하면, 당시 뷰티서플라이를 운영하던 나를 위해 언니는 기꺼이 남대문 시장을 안내해 주었다. 미국의 가게에서 판매할 반짝이는 머리 액세서리를 사고 시장통의 좁은 골목에서 갈치조림을 먹었다. 음식의 맛보다 더 진하게 남은 것은 마주 앉아 웃던 언니의 얼굴이다. 90년대 말, 우리는 손편지로 소식을 주고받았다. 언니 시누이를 통해 신청한 영주권이 나와서 내가 사는 도시로 오게 되었다는 소식에 뛸 뜻이 기뻤다. 낯선 타국에서 다시 이어진 인연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삶의 고비마다 솔직하고 지혜로운 조언을 아끼지 않던 사람인 언니를 나는 많이 따랐다. 함께 바닷가와 공원, 트레일을 걸으며 서로의 건강을 걱정해 주었는데, 이제는 혼자 걸어야 한다는 사실이 서글프다. ‘나중’이라는 시간은 사라졌지만, 함께한 시간은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최근 이집트 여행 후 시차로 고생하다가 언니에게 연락했지만 위암 투병 중이라 전화를 받지 못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나중에 기운 차리면 보자”는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못했다. 우리는 ‘나중’을 당연한 미래로 믿지만, 그 시간은 누구에게도 보장되지 않는다. 온화한 미소와 수줍은 듯 양 볼에 패인 볼우물이 어여쁘던 언니의 모습과 추모식에서 마주한 언니의 야윈 모습이 겹친다. ‘기억이 지워질 때까지 그 사람은 죽은 사람이 아니다’라는 어느 인디언 부족의 말이 생각난다. 언니와 함께한 시간이 또렷이 남아 있는 한, 언니는 완전히 떠난 것이 아니다. 사랑한다는 말, 고맙다는 말, 보고 싶다는 표현을 더는 미루지 않겠다고, 나중이라는 시간 대신 오늘을 선택하겠다고, 다짐해 본다. 그것은 남겨진 이들이 서로를 지키는 방식일 것이다.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시간 시간 대신 언니 시누이 명순 언니
2026.02.19.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