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언니가 카톡으로 편지 한 장을 보내왔다. 해묵은 상자를 정리하다가 발견했다는 아버지의 편지였다. 눈에 익은 아버지 글씨. 약간 날이 선 듯한 아버지의 글씨체를 보니 아버지를 만난 양 눈물이 핑 돌았다. ‘형도 어미 받아보아라’로 시작된 사연은 언니가 일전에 아버지께 무엇인가를 보낸 선물에 대한 답신이었다. 아버지 팔순을 바라본다고 적은 것을 보면 70대 후반이리라 짐작된다. 자식 보고 싶은 마음을 숨기지 않고 내비치는 아버지를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했다. 성인이 된 후 우리 8남매가 모두 한자리에 모일 수 있는 날은 드물었다. 어느 해는 언니가 아기를 낳아서, 또 어느 해는 오빠가 군대에 가서, 멀리 공부하러 떠난 나로 인해 또 몇 년간 함께하지 못했으니까. 글 속에는 내가 비인에서 건강이 회복되어 열심히 수학하고 있다는 얘기와 함께 내 동생이 D건설 기획실에서 절대적인 존재로 열심히 근무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었다. 멀리서 가끔 아버지께 편지를 올렸는데 그때도 나는 몸이 약해 아버지의 마음을 아프게 했었다. ‘절대적’이라는 말이 설핏 웃음 나오게 하지만 아버지의 기쁨이자 자랑인 우리 남매였다. 형제 많은 집안에 끄트머리인 나와 내 동생은 가끔은 안 낳아도 되는 아이였다는 자조적인 푸념을 했다. 3남 5녀 8남매 중, 나는 다섯째 딸, 내 동생은 셋째 아들이니 뭐 그리 반갑고 귀했겠나 싶다. 하지만 늘그막의 우리 아버지에게는 다시없는 소중한 존재였던 것 같다. 아버지와 가까이 살고 있는 언니 오빠들의 안부를 전하며, 작은 언니에게 틈나는 대로 연락하길 바란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자식 길러보면 부모 마음 알 것이라는 얘기와, 팔순을 바라보며 돌아갈 날이 머지않다는 대목에서는 목이 메었다. 단 하나 못이 박힌 게 있다고 하면서도 그 얘기는 상세히 적지 않으셨다. 여름쯤 언니를 만나러 가겠노라는 말씀을 끝으로 편짓글은 마무리되었다. 아버지 가슴에 박힌 못은 무엇일까. 언니와 통화하면서 물었더니 언니도 도통 모르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가슴의 못을 빼고 떠나셨을까. 내가 공부를 마치고 귀국한 지 4년여가 흐른 후 아버지는 먼저 떠난 엄마의 뒤를 따라가셨다. 말년의 아버지는 자식들에게 폐가 될까 전전긍긍하셨다. 내가 어느 정도 자라서 익숙하게 듣게 된 것 중의 하나가 남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말이었다. 틈나는 대로 전화나 편지를 하라는 말씀 속에 아버지의 외로움이 짙게 깔려 있었다. 눈을 감고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그려본다. 워싱턴 광장에 풀어 놓고 ‘헤쳐 모여’ 하며 서로 줄로 이으라고 하면 아버지와 나는 부녀라는 것을 누구도 알아볼 수 있도록 외모가 닮았다. 30년도 더 넘은 아버지의 편지가 시공을 넘어 오늘 나를 울리고 있다. 아버지는 유언으로 ‘동기간에 우애 있게 지내라’는 말씀을 남겼다. 오늘 아버지의 편지를 보니 아버지가 살아오신 것만 같아 아버지 얼굴을 더듬듯 전화기 속의 편짓글을 가만히 쓰다듬어 보았다. 이영미 / 수필가이아침에 아버지 편지 아버지 가슴 아버지 팔순 아버지 얼굴
2025.09.25. 18:27
노동절 연휴를 맞아 계획했던 산악회 캠핑이 산불로 인해 갑작스레 취소되었다. 애초에 캠프장에서 하기로 했던 써니 언니의 칠순 생일파티가 '스위처 폴스(Switzer Falls)' 토요 산행 후로 변경되었다. 산행 후 생일파티라기에 산악회 가입이 얼마 안 된 나는 당연히 근처 식당에서 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단체 카톡방에 공지가 뜨자마자 분위기는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누구는 떡을 맞춰온다고 하고, 열무 물김치며 각종 나물류, 과일과 음료수, 즉석 부침개까지 준비하겠다는 댓글이 우수수 달렸다. 유튜브를 보고 직접 만들었다는 한 남성회원의 돼지갈비찜과 백김치는 모두를 놀라게 했다. 평소 조용하던 분이 손수 만든 음식이라는 점에서 감동이 더 컸다. 주인공이 마련한 LA갈비와 정성 어린 음식들이 하나 둘 모이면서, 산행 후의 조촐할 줄 알았던 생일 잔치는 어느 뷔페식당 부럽지 않은 '산상 연회'로 바뀌었다. 한국인의 정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다. 무엇보다 특별했던 건 생일 떡이었다. 산행 중 주운 도토리를 일일이 까서 곱게 빻아 쌀가루와 섞어 만든 건강 떡이다. 당뇨가 있는 친구를 위해 준비한 맞춤형 선물이었기에 감동이 더했다. 떡 위에 일곱 개의 촛불이 켜지고, 회원들이 십시일반 모은 축하금과 손 글씨 카드가 전해지자, 주인공의 눈가가 붉어졌다. '열심히 산행해서 80세 생일에도 고기는 제가 준비하겠습니다.'라는 농담 섞인 말에 모두가 웃음과 박수로 화답했다. 낯선 땅에서 살아가는 이민자들에게 명절이나 기념일은 더 쓸쓸하게 다가온다. 가족도 오랜 친구도 가까이 없기에 특별한 날일수록 마음 한 켠이 허전해진다. 하지만 이렇게 공통의 취미로 모인 사람들과 함께 걷고, 음식을 나누며 서로의 생일을 축하하는 순간들 덕분에 외로움은 한층 가벼워진다. 그날 산속에서 열린 특별한 생일 잔치는 단지 한 사람의 칠순을 기념하는 자리가 아니었다. 함께 걷고, 땀을 흘리고, 음식을 나누며 쌓아가는 연대감이 외로운 이민자의 삶을 어떻게 지탱해 주는 지를 보여주는 증거였다. 땀을 흘리며 산을 오르고 대화를 나누는 시간은 단순한 취미생활 이상의 의미가 있다. 삶의 활력소 역할을 하며 우리가 서로의 존재를 통해 얼마나 큰 위로를 받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그날의 생일파티는 장소도 형식도 메뉴도 모두 예상 밖이었다.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욱 따뜻하고 더욱 오래 기억에 남았다. 어쩌면 진짜 잔치는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서로의 곁에서 함께 걷고, 웃고, 나누는 삶. 나 또한 언젠가 칠순을 맞는 날, 오늘처럼 따뜻하고 의미 있는 이런 생일 잔치를 하고 싶다.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산속 칠순 칠순 잔치 칠순 생일파티 생일 잔치
2025.09.23. 18:17
내가 평생 다니는 직장에서도 동료들이 은퇴하면 제삼의 장소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한다. 그중 우선순위는 따뜻한 장소와 생활비가 저렴한 곳이다. 아무래도 노인은 추위에 약하고 제한된 수입에 의존해 살기 때문이리라. 나도 은퇴 후 어디서 내 남은 생을 마감할까 많이 고민해 본 결과 결국 지금 사는 이 집이 가장 편안하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내가 사는 글렌코브는 내가 필요로 하는 많은 조건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맨해튼까지는 한 시간, 내 직장까지는 25분, 플러싱까지는 35분이면 되고 우선 동네가 조용하고 나무가 많다. 주위에 수목원이 많아 경관이 수려하고 수영할 수 있는 바닷가가 3분 이내에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날마다 운동할 수 있는 YMCA가 4분 이내에 있다. 아무리 운동을 좋아하고 하고 싶어도 장소가 멀면 귀찮아 가지 않게 된다. 일단 나는 내 집에 정을 주고 사랑하기로 했다. 이 집에 이사 온 지도 올해로 22년째다. 사람 몸처럼 20년 이상을 날마다 쓰면 집도 여기저기 고장이 나게 마련이다. 전에 살던 집에서 이 집으로 이사 올 때 낡은 짐 처리 문제로 곤욕을 치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당시 이 집이 새집이어서 새 가구를 마련하려고 모든 가구와 살림살이를 그대로 두고 나오고 싶었다. 하지만 새 집주인은 집을 깨끗이 비워주기를 요구했다. 덤스터를 하나 주문해 짐을 치우기 시작했으나 두 번째 세 번째까지 불러 겨우 낡은 짐들을 치울 수 있었다. 그 중노동에서 겨우 살아남은 나는 이사 가는 새집에서는 미니멀리스트로 살겠다고 결심했었다. 이번에 화장실을 새로 고치기로 했다. 시작 동기는 간단했으나 결국 대공사가 되고 말았다. 컨트랙터는 초대형 크기의 덤스터를 미리 갖다 놓았다. 난 처음에 그 덤스터의 크기에 압도당했었으나 이번 기회에 20년 묵은 집안 물건들을 정리하고자 마음먹었다. 서랍과 옷장 구석구석에 그동안 얼마나 물건들을 사재고, 쌓아놓았는지 숨이 막혔다. 그리고 정말 받아들이고 싶지 않지만 나에게 쇼핑 벽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항상 스스로 낭비가 아닌 합리적인 쇼핑한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내 나이 또래의 지인들은 이제 사는 것은 그만하고 있는 물건들을 정리한다고들 한다. 나 자신도 매해 1월이 되면 정리를 시작하다가 끝도 없고 표도 나지 않는 이 작업을 결국 포기하고 만다. 차라리 치우는 시간에 책을 읽고 글을 쓸 때 훨씬 행복하다. 지금까지 사들인 물건들은 할 수 없지만 앞으로는 사재기를 자제하는 것만이 답이다. 하지만 평생 몸에 밴 이 사재기 습관을 과연 버릴 수 있을는지는 아직도 의문이다. 언젠가 때가 되면 자녀들과 지인들을 불러 필요한 물건들을 챙겨가고 나머지 물건들은 다 덤스터에 버리라고 말하련다. 버리고 버려도 끝이 없는 이 작업을 겪으면서 ‘삶이란 온갖 쓰레기를 모으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된다. 죽을 때 하나도 가져갈 수 없는 이 물건들에 왜 이렇게 집착하는지 생각과 행동의 불일치감에 괴리감을 느낀다. 이번에는 내 주변에 있는 보이는 물건 정리에 초점을 두었지만, 이 기회에 내 뇌(brain)도 한번 되돌아보며 정리하고 싶다. 지난 평생 내 뇌 안에 계속 쌓여 나를 혼동하게 하고 어지럽히는 생각, 기억을 이번에 깔끔하게 정리 정돈하고 싶다. 앞으로 남은 내 생에 도움이 될 만한 것들만 남겨두고 남아있는 내 생을 위해 여백을 남겨두고 여유롭게 살고 싶다. 남아있는 삶은 실생활에서나 정신적으로도 아름답고 행복한 꽃을 피우며 살고 싶다. 내가 가진 자산으로 아름다운 꽃을 피울 수만 있다면 더 이상의 바람은 없겠다. 그동안 나를 지배해온 어둡고 무거운 기억의 파장과 혼란을 모두 비우고 새롭고 아름다운 꽃봉오리들로 꽃피우고 싶다. 워즈워스는 ‘우리 영혼은 불멸의 바다 풍경을 품고 있다’라고 했다. 인생은 물음을 던지는 만큼만 살아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될 수 없다면 시처럼 살라.’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정명숙 / 시인이아침에 직업 집안 물건들 생각 기억 물건 정리
2025.09.18. 18:25
일요일 아침이다. 편안하고 시원한 운동복을 골라 입고 운동화 끈을 조이고 밖으로 나오면 저절로 달리게 된다. 오랫동안 습관이 되었는지 문밖 공기 탓인지 구분이 안 되지만 자연스럽게 한 발 한 발 빠르게 움직인다. 90도가 넘는 햇볕이 살갗에 닿으면 벌에 쏘인 느낌을 받는다. 오늘도 14마일 연습 목표다. 단조로운 일상생활에 일요일 아침에 달리기 연습은 잔잔한 호수에 돌 하나 던져 보고 싶은 충동이다. 일주일을 치열하게 살아온 나에게 주는 다독임이다. 한 발 내디딜 때마다 내 등을 밀어주는 바람과 아스팔트의 단단함에 무딘 내 발이 압력으로 느끼는 무게를 실감하면서 속도를 내본다. 고개를 들어 눈을 찡그리고 눈 부신 해를 마주한다. 쉼없이 앞으로 나가는데도 해는 여전히 그 자리다. 조금 더 속도를 내본다. 심박 수가 오르면서 귓속으로 심장의 박동 음이 전해져 온다. 내가 한걸음 내밀 때마다 해는 조금씩 내 뒤로 멀어진다. 마치 내가 세상을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든다. 내 발과 내 리듬으로 이제 내 발을 감싸는 땅의 촉감이 제법 익숙해진다. 앞서 난 발자국들이 눈에 들어온다. 언제 지나간 걸까 누가 지나간 걸까 여러 모양의 발자국들이 뒤섞여 이 길이 커다란 판화 같다. 흙 위에 오롯이 남은 개의 발자국에 속도를 늦추고 뒤를 돌아본다. 나의 발자국은 선명하지 않다. 이 개는 얼마나 힘차게 발을 내디뎌서 이렇게 또렷한 발자국을 남긴 걸까. 시원한 공기에 콧구멍을 벌름거리며 그저 좋아서 달리는 개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하늘을 올려다본다.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 없는 구름이 몽글몽글하다. 머물러 있는 건지 떠다니는 건지 소리도 없고 정해진 모양도 없이 그저 그렇게 자기만의 것들이 보인다. 매미들의 요란한 합창의 계절이다. 정확하게 7월 초부터 8월 말까지 울어댄다. 조용한 숲 공원에서 한 마리가 소리를 내면 덩달아 가까이에 있는 매미들이 한목소리로 함성을 지르며 장단을 맞춰가며 자기들의 있음을 과시하는 것 같다. 비가 내리지 않는 데다 90도 이상의 기온이 한 달 이상 계속되어 공원 잔디밭은 노랗고 밟으면 잔디 부스러지는 소리가 난다. 나무들도 목이 말랐는지 이파리가 힘없이 축 늘어져 있다. 날씨가 화창하고 무덥지 않으면 개와 같이 산책하는 무리가 많은데 더운 날씨에는 개를 끌고 나오는 사람도 드물다. 산 중턱에 나무 그늘로 가려지지 않은 땅에서 살고 있던 지렁이가 모두 길가로 기어 나와서 죽어있다. 땅속이 뜨거우니까 밖으로 기어 나왔는데 길바닥은 더 뜨거워 죽을 수밖에 없다. 비가 오지 않고 기온이 올라가면 자연에서 생식하는 많은 생물도 영향을 받는 것 같다. 졸졸졸 흐르던 냇가도 메말라 흐르는 물 양옆으로 잡풀들이 자라고 있다. 다른 때 같았으면 물이 가득 차 물 흐르는 소리가 요란했고 물안개를 날리며 산책하는 사람들을 즐겁게 했었다. 냇가 주변으로 작은 꽃과 풀들은 예쁘다. 이름은 알 수 없지만 설사 이름이 없더라도 변함없이 청초하다. 그저 어디선가 날아온 씨앗에서 움튼 작은 생명이 이리 고울까. 이리저리 뒤엉켜 자라나는 것들은 그 나름의 사랑스러움이 있다. 아무렇게나 빛 따라 비 따라 자라고 피어난 꽃들의 싱그러움을 부러워하며 다시 달린다. 이제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내 발을 품어주는 흙과 내 등을 쓰다듬는 햇살을 응원 삼아 달리기는 나를 채우는 시간이다. 개똥에도 너그러워지고 바지런히 움직이는 벌레에도 애정이 생긴다. 뛰다 잠깐 멈춰 서서 보게 되는 작고 다정한 것들에 마음을 쏟으며 충만함을 가득 느낀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다정 공원 잔디밭 달리기 연습 나무 그늘로
2025.09.11. 18:57
여름 내내 너무 더웠다. 창문을 열어 놓고 밤잠을 청해야 했다. 창문으로 벌레 소리가 라이브 밴드처럼 들려온다. 쏴아 쏴아 짜르르. 낮에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데 어디 숨어서 저런 소리를 내는지. 가지런한 생명의 합창처럼 들리지만, 저 중에는 숨이 찬 벌레도 있을 것이다. 몸집이 유달리 작은 사마귓과의 어떤 벌레는 자기 몸보다 훨씬 큰 나뭇잎에 몸을 감싼다고 한다. 벌레는 날개를 비벼서 소리를 낸다. 작은 날개의 미미한 소리에는 어떤 암놈도 다가오지 않는다. 그래서 몸에 나뭇잎을 두르고 확성기처럼 큰 소리를 낸다고 한다. 작은 벌레의 영리한 전략에 나는 감탄했다. 아침이 되니 두 손주가 들이닥쳤다. 여름내 다니던 캠프가 끝났다고 하면서 며느리도 나름의 전략을 세웠다. 학교 개학 전에 아이들이 좀 쉬어야 한다는 것이다. 할머니네 가서 먹고 놀면서 뒹굴라는 것이다. 아이들은 느지막이 아침 10시쯤 우리 집에 왔다. “아침 먹었니?” “아니, 아빠가 할머니 집에 가서 먹으래.” 늦잠에서 깬 아이들을 바로 데리고 온 것 같았다. “파니니 해줘?” 와플 기계에 빵을 넣었다. 두툼한 빵이 들어간 기계의 뚜껑을 빵이 납작해지도록 눌렀다. 빵은 바싹하게 구워지고, 모차렐라 치즈는 녹아서 실처럼 늘어진다. 캔탈롭을 서너 쪽 곁들였다. 덩치가 두툼한 누나에 비해서 베짱이처럼 마른 둘째 아이가 한 모금 베어 문다. 제 누나가 후딱 먹고 사라진 식탁에서 작은 아이는 오물거리며 오랫동안 먹는다. 나는 예쁘다고 머리를 쓸어준다. 작년까지만 해도 작은 아이와 나는 사이가 별로 좋지 않았다. 식성이 까다롭고 소리를 지른다고 나는 못마땅해 했다. 제 누나가 무슨 말을 시작하면 거의 고함 수준으로 중간에 치고 들어온다. 누나 말을 끊지 말라고 야단쳤다. 밥을 먹으라고 부르면 제 누나는 얼른 달려오는데, 작은 아이는 먹기 싫다면서 미꾸라지처럼 어디론가 숨는다. 그러다 보니 작은 아이와 나 사이에 냉랭한 기류가 흘렀다. 나는 반성했다. 그리고 지난 일 년 동안 노력했다. 내 친구들은 묻는다. 이제 둘째와 사이가 조금 좋아졌느냐고. 물론이다. 작은 아이가 말한다. “나는 할머니 음식이 아빠가 만든 것하고 똑같이 좋아.” 어느덧 자라서 초등학생이 된 아이들 입에서 할머니에 대한 평가가 한두 마디씩 나오기도 한다. 내 음식이 좋다는 둘째의 말에 나는 입맛 까다로운 고객에게 팁이라도 두둑이 받은 것처럼 기분이 좋아졌다. 손주에게 성적표를 받다니. 내 곁에는 오지도 않던 둘째 아이가 이제는 카드를 가져와서 같이 놀자고도 한다. 자기기 이기기 위해서 킹과 퀸같이 서열이 높은 카드는 이미 골라서 가졌다. 그러고는 좋아서 ‘킥킥 크크’ 하고 웃는다. 할머니가 된 내 친구들은 입을 모아서 말한다. 큰 아이는 착한데, 둘째 아이가 극성스럽다는 의견에 우리는 만장일치로 동의한다. 작은 아이는 태어나 보니 몸집이 자기의 두 세배쯤 되는 라이벌이 곁에 버티고 있었다. 부모의 시선을 독차지하고 있는 존재 때문에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다. 목청을 부풀려서 울어야 했고, 만만해 보이지 않으려고 말 안 듣고 온갖 전략을 써야 했을 것이다. 그래야 자기의 말을 들어주니까 말이다. 사마귀가 존재감을 뿜어내기 위해서 나뭇잎을 확성기로 이용하듯 말이다. 가을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는 밤이다. 나는 벌레 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한다. 저 중에 몸집이 유달리 작은 벌레도 있겠지. 김미연 / 수필가이아침에 벌레 벌레 소리 할머니 음식 사마귀가 존재감
2025.09.09. 18:20
요즘 골칫거리가 생겼다. 예고도 없이 들이닥치는 불청객 때문이다. 출입을 막아보려 갖은 방법을 써봤지만 녀석은 마치 비웃기라도 하듯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다. 며칠 전에는 여러 마리가 몰려와 작은 파티라도 벌였는지 뒤뜰 잔디밭이 여기저기 흉하게 뒤집혀 있었다. 피해가 잔디에서 그치면 좋으련만 이젠 내가 가꾸는 텃밭까지 넘본다. 처음으로 화단 한켠에 상추, 열무, 깻잎, 고추 씨앗을 심었다. 싹이 트기를 기다리며 직접 기른 채소를 따먹는 상상을 하곤 했지만 그 꿈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침에 나가보니 텃밭은 이미 쑥대밭이 되어 있었다. 범인은 다름 아닌 다람쥐다. 산길에서 마주치던 귀여운 모습과 달리 일상에 나타난 다람쥐는 꽤나 성가신 장난꾸러기였다. 덫을 놓을까 했지만 잡히면 동물보호소에 보내거나, 산이나 공원에 풀어줘야 하는 번거로움이 따른다. 쥐약을 쓰려 하니 남편이 펄쩍 뛰며 말린다. 자칫 죽기라도 하면 동물보호법에 저촉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점점 오기가 치밀어 올라 이대로는 물러설 수 없었다. 이번엔 절대 당하지 않겠다는 마음으로 큰 화분 여러 개를 사서 씨앗을 다시 뿌렸다. 그 위에 플라스틱 덮개를 씌우고 남편의 10파운드짜리 아령 두 개를 올려놓았다. 말 그대로 완전무장한 방어 시스템으로, 누가 이기나 해보자는 심정이였다. 사흘쯤 지났을까 그 녀석이 또 다녀간 모양이다. 뚜껑을 열려고 안간힘을 쓴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덮개는 옆으로 밀려 있었지만 결국 포기한 듯했다. 속이 다 시원하고 통쾌했다. 그러면서도 작은 녀석과 실랑이를 벌이는 내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났다. 진짜 문제는 따로 있었다. 발코니에 벗어둔 내 슬리퍼 한 짝이 너덜너덜하게 뜯겨 있는 게 아닌가. 성질머리가 보통이 아닌 게 분명하다. 얼마나 억울했으면 그랬을까 싶다가도 하필 여러 켤레 중 내 것만 골라 물어뜯다니 얄밉기 짝이 없었다. 평소 남편과 아이들은 다람쥐가 귀엽다며 집에서 키우고 싶어했지만 나는 “어떻게 해야 다시는 못 오게 할까” 궁리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더니 다람쥐가 내 말을 엿들은 걸까. 녀석이 파헤쳐 놓은 흙 속을 들여다보니 땅콩이 숨겨져 있었다. 우리 집 뒤뜰이 다람쥐에게는 양식 창고였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다람쥐 입장에서는 이곳이 가장 안전한 보금자리였을지도 모른다. 도대체 누구로부터 그 소중한 먹이를 지키려 했던 걸까. 문득 내가 너무 야박하게 굴었던 건 아닌가 싶었다. 작은 몸으로 텃밭을 헤집은 것이 어쩌면 살아남기 위한 필사적인 몸짓이었을지도 모른다. 그 순간 미안함이 밀려왔고 치열하게 살아가는 작은 생명과 화해하고 싶었다. 마음 같아선 화단 한켠에 조그만 집이라도 지어주고 싶었다. 마트에 들러 땅콩 한 봉지를 샀다. 오로지 우리 집에 찾아온 손님 다람쥐를 위해서다. 엄마는 집에 온 손님을 빈손으로 돌려보낸 적이 없었다. 아낌없이 내어주시던 정 많은 성품이 나도 모르게 내 안에 스며든 걸까. “다람쥐랑 화해했어?” 남편이 툭 한마디를 던진다. “그 녀석, 우리 집이 제일 안전하다고 생각했나 봐. 이제 가족처럼 같이 살아야겠어. 이름 하나 지어줄까?” 그 말에 입가에 번지려던 미소를 살포시 눌렀다. 맞다. 매일 실랑이를 벌이긴 했지만 다람쥐가 우리에게 해를 끼치려던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소중한 양식을 숨길 곳을 찾다 보니 우리 집 뒷마당이 가장 안전해 보였을 뿐이다. 뒤뜰 잔디밭을 창고 삼아 살아가는 작은 생명을 마음에 그려보니 한때 짜증스러웠던 감정은 어느새 녀석을 받아들이는 넉넉함으로 바뀌어 있었다. 작은 생명을 쫓아내기보다는 이웃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나에게는 소소한 텃밭일 뿐이지만, 다람쥐에게는 하루하루를 버티는 삶의 터전이다. 이제는 그 녀석의 삶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워가려 한다. 그나저나 다람쥐를 핑계 삼아 예쁜 슬리퍼 하나 새로 장만해야겠다. 김윤희 / 수필가이아침에 다람쥐 화해 다람쥐 입장 손님 다람쥐 뒤뜰 잔디밭
2025.09.03. 18:37
병원 진료실 앞 복도에서 내가 앉은 휠체어를 남편이 밀고 있었다. 큰 수술을 마친 뒤여서 초췌한 내 몰골이 말이 아닐 때였다. 용모에 신경 쓸 새도 없고 만사가 귀찮았다. 병고로 찌든 머리칼은 백발이었다. 그때 옆에서 우리 내외를 보고 있던 분이 나더러 “착한 아드님을 두셨네요” 이러는 게 아닌가? 남편과 나를 모자지간으로 보다니. 그분이 민망할까 봐 괜찮다며 웃었지만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었다. 병원에서 오던 길로 미용실에 들러 당장 흑발로 염색을 했다. 염색약이 독성이 있다며 주치의는 하지 말라 했어도 안 할 수 없는 마음이었다. 특단의 조치가 필요했다. 남편에겐 앞으로 염색하지 말고 흰머리로 살 것을 명령했다. 오랜만에 미용실에 가니 예전의 흑색 염색흔적은 없어지고 백발에 약간의 검은 머리칼이 섞였다며 슈퍼 트렌드인 ‘솔트 앤 페퍼(salt & pepper)’가 되었단다. 돈을 번 기분으로 이후로는 염색 않고 흰머리를 유지하는 중이다. 작년 한국 방문 시 남편의 친구 목사님 교회를 방문하게 되었다. 택시기사분이 남편더러 “어르신이 카카오 택시 부르셨어요?” 한다. 내 눈엔 남편보다 나이가 더 들어 보이는 기사가 남편을 “어르신” 하고 부르니 당황했다. 욕도 아니고 비하의 단어도 아니건만 기분이 별로였다. 호칭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서도 남편은 염색을 다시 시작했다. 요즘엔 남편과 나를 더 이상 모자지간으로 보진 않는다. 다행이다. 백발에도 유행이 있고 관리법이 있는 걸 알았다. 갤러리에 전시회 구경을 갔다가 흰머리의 K화백을 만났다. 그녀가 백발을 관리하는 보랏빛 샴푸를 알려준다. 연한 보라색이 들어가면 흰머리가 훨씬 깔끔하고 생동감이 있어 보인단다. 그대로 따라 하며 현재 잘 관리되고 있는 내 머리칼. 며칠 전 교회에서 목사님과 장로님이 내게 아닌 남편에게 “보라색 염색을 하셨어요?” 난데없이 묻는다. 아들아이도 아빠머리가 보라색이라며 이상하다고 전화를 했다. 남편은 염색약 알레르기가 있어 한 가지 염색약만 쓰는 걸 내가 안다. 흑색 염색이 물이 빠지면 햇빛 아래선 그리 보이나보다. 70세 가까운 이가 BTS도 아니고 보랏빛 머리라니. 당치도 않다. 멕시코 선교를 다녀온 남편이 금요예배 때 간증을 했다. 선교팀 중 가장 연장자여서 다들 ‘어르신’으로 호칭하더란다. ‘어르신’이 되도록 선교에 열심을 못 낸 자신이 너무나 부끄럽다며 내년에 은퇴하면 선교에 힘을 쓰겠다고 고백했다. 이번에 들은 ‘어르신’은 감동적이었다. 보랏빛 머리 어르신이 된 남편은 더 자주 선교를 갈 것이고, 나는 여유롭게 글 쓰는 시간이 많아지기를 기대한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보랏빛 어르신 보랏빛 샴푸 염색약 알레르기 보랏빛 머리
2025.09.02. 20:13
이문세. 내가 좋아하는 가수다. 지난 6월, 피콕 극장에서 열린 그의 콘서트에 남편과 함께 다녀왔다. 5000석 티켓이 거의 매진되었다고 들었다. 미국에서 근 40년을 살았지만, 그동안 내 또래의 그 많은 한국 사람과 한자리에 모인 적은 없었다. 같은 시대를 살아온 이들이 한 공간에 모여, 공연을 보며 함께 노래를 부르고 웃을 수 있다니. 그 자체로 축복이었다. 콘서트를 기다리는 마음마저 벅찼고, 공연은 그 기대를 훨씬 뛰어넘었다. 그의 노래는 우리를 1980년대와 90년대, 청춘과 낭만이 흐르던 시절로 데려다 주었다. 지갑보다 마음이 넉넉했던 시절. 고된 이민 생활을 함께하며, 부딪치며 살아내는 우리에게 그의 노래와 이야기는 아련한 추억을 불러왔다. 관객과 대화하는 코너가 있었다. 이문세씨가 애너하임 힐스에서 온 J씨에게 신청곡을 받겠다며 본인의 곡 중에서 제일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고 물었더니, J가 망설임 없이 ‘세월이 가면’이라 답했다. 그런데 이문세 씨의 반응이 의외였다. 그가 쭈뼛하며, “응, 그 노래요.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하고 부르자, 객석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J가 기쁘게, “네! 그 노래 맞아요!”라고, 대답하자, 그가 멋쩍게 말했다. “아. 그거. 제 노래 아니고요, 최호섭 씨 노래인데요. 저도 좋아합니다, 하하하.” 그러자 공연장이 한차례 웃음의 물결로 출렁거렸다. 처음엔 짜고치는 유머인가 했지만, 작가가 써도 이런 자연스러운 대본은 나오지 않으리라. 이어 그는 다시 말했다. “세월이 흘러가면~, 어디로 가는지~. 나는 알 수가 없잖아요~. 혹시 이 노래 말씀하시는 거 아니었어요?” J가 쑥스러운 듯, “네, 그건데요!”라고 말했다. 또다시 폭소가 터졌다. 예순을 훌쩍 넘긴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그 시절 그대로였고, 댄스 가수는 아니지만 ‘샤방샤방’한 율동도 선보였다. 세월이 잠시 비켜선 듯했다. 하지만 우리가 앉은 곳은 이층, 무대와는 거리가 멀었다. 노안이 찾아와, 눈이 침침하고 가까이 있어야 겨우 보이는 우리 세대. 실망스럽게도 양쪽에 설치된 스크린은 대부분 꺼져있었다. 멀리서라도 그의 모습을 비춰주었더라면, 그날 밤의 기억이 더 선명했을 것을. 주름 없는 예순이 어디 있으랴. 이문세를 보러 갔는데, 정작 이문세는 보지 못했다. 마지막에 앙코르곡으로 ‘붉은 노을’이 흐르자, 관객들이 떼창을 했다. 이 곡은 나의 그리고 우리의 젊은 날을 풍성하게 채워준 노래다. 그에게 고맙다. 다음에 그가 또 미국 무대에 서게 된다면, 이번엔 친구들과 함께 가겠다. 그들과 함께 20대의 아름다운 세월로 돌아가련다. 이리나 / 수필가이아침에 이문세 노을속 정작 이문세 청춘과 낭만 이층 무대
2025.09.01. 19:00
“걱정이 많았는데 이제 홀가분합니다(I came in heavy, but now I am in light).” 환자의 아들이 ‘완화치료 상담(Palliative Care Meeting)’을 마친 뒤 한 말이다. 정원 일을 하다가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진 어머니가 뇌사에 빠졌다. 지난 5일 동안 병상에 누워있는 어머니를 지켜보면서 그가 경험한 시간은 절망과 좌절, 무기력과 혼돈의 절정이었다. 82세의 모친은 고혈압 말고는 건강한 편으로 교회와 지역 사회에 많은 봉사활동을 하며 정원 가꾸기가 취미였다고 한다. 사고가 난 그날 오전에도 정원에 새로 사 온 모종을 심다가 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집 안으로 들어왔다. 소파에 앉자마자 구토하면서 쓰러졌다. 앰뷸런스에 실려 응급실에 도착, 바로 인공호흡기를 꽂고 CT Scan을 해보니 뇌의 3곳에 심한 출혈이 있었다. 조속하게 응급처치했으나 환자는 이미 의식을 잃고 동공은 풀렸으며 팔다리 경직 증세도 보였다. 생명을 유지하는 가장 기본적인 호흡과 맥박도 매우 불안정한 상태로 생명이 위독한 응급상황이 되었다. 거의 뇌사에 가까워지고 있으며 오직 한 가지 살아있는 증후로는 자가 호흡이 2~5번 정도 있었다. 의사는 가족에게 환자의 회복 가능성이 아주 희박하다고 언질을 주었다. 환자는 남편과 아들, 딸을 두고 있다. 가족 간의 사랑이 넘치고 화목함을 첫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중환자실에서 일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질병만큼이나 다양한 가족관계(family dynamic)를 경험하게 된다. 상상을 넘어서는 아름다운 관계부터 비인간적인 냉혈한 행위들도 쉽게 만난다. 하루하루 평화롭게 일상을 이어가던 가족에게 이 환자와 같은 갑작스러운 사고는 가족을 엄청난 충격에 빠뜨린다. 가족 멤버 셋은 입원 당시부터 지금까지 5일 동안 줄 곳 환자 곁에 머물렀다. 5일 동안 환자 상태가 호전을 보이지 않자, 의사는 완화 치료 상담을 주선했다. 간호사들은 다른 환자도 돌보아야 하므로 참석하기가 쉽지 않다. 그런데 웬일인지 이번에는 꼭 참석하고 싶었다. 미팅은 한 시간을 훌쩍 넘었다. 먼저 의사는 가족 일원 개개인에게 그들이 현재 상황을 어떻게 얼마만큼 이해하고 있는지 물었다. 참 우연이지만 환자 가족은 모두 고등학교 교사다. 환자와 환자 남편은 은퇴했지만 아들과 딸은 현역이다. 환자는 평소에 자상하고 너그럽고 베푸는 타입이어서 많은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다고 한다. 지난 며칠 동안 환자를 방문한 수십 명의 지인만 보아도 그녀가 얼마나 많은 사람한테 사랑을 받고 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집은 항상 열려 있었고 지역 사회 모임에 중요하고 어려운 일을 도맡아 많은 이들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고 한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요즘처럼 화창한 날씨, 뺨을 어루만지는 달콤한 바람, 손에 들어온 맛있는 음식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사람과의 교류를 진심으로 즐겨왔다고 딸이 울먹이며 전한다. 환자는 회생 가망성 없는 생명을 기계에 의존하며 생명을 연장하고 싶지 않다고 분명히 유서에 명시해 놓았다. 가족은 한결같이 이성적으로는 환자의 뜻을 존중해야 함을 알고 있지만 현실적으로는 이 생명 장치를 제거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 결정인지 한없이 밀려오는 죄책감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의사는 치료책이 없는 지금은 증상 완화 방법으로 진통제, 안정제, 가래 말리는 약 등을 처방해 놓겠다고 설명한 후 미팅을 마쳤다. 그때 환자 아들이 “I came in heavy, but now I am in light”하며 긴장을 풀었다. 함께한 우리는 무거웠지만 가볍게, 서로 깊은 포옹을 했다. 정명숙 / 중환자실 간호사이아침에 죄책감 유서 환자 가족 가족 일원 가족 멤버
2025.08.26. 20:11
우리 가게 옆으로 조그마한 미국 교회가 있다. 여러 민족이 다양하게 모이는 곳이다. 그 교회에서는 매월 둘째·넷째 주에 교인들이 음식을 손수 만들어 지역 내에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원하는 사람에게는 두 손 모아 기도를 해준다. 봉지에는 여러 가지 콩으로 만든 수프와 사과나 바나나·오렌지 하나, 초콜릿 바 하나 물병, 냅킨에 스푼과 포크를 넣고 성경 말씀과 교회 안내서도 한장 들어있다. 교인들은 번갈아 봉사한다. 우리 가게 앞 사거리에서 음식을 나누어 주기도 하고 길거리에 다니면서 나누어 주기도 한다. 음식을 받은 사람들의 표정을 보면 웃으면서 고맙다고 인사를 한다. 교인들이 아침 일찍 모여 음식을 만들고 포장해서 나누기까지 정성을 들인 모양새가 저절로 배어난다. 어느 날 손님이 그 음식을 나에게 준다. 먹어보니 여러 가지 콩 종류에 특별한 양념을 다 집어넣었는지 맛있었다. 미안하고 고마워 그 손님을 통해 정기적으로 후원하게 되었다. 가게 옆이고 손님들이고 동네 사람들이다 보니 교인은 아니지만 지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나는 내 삶이 훌륭하다고 생각지도 않고 그렇다고 걱정할 만큼 내 삶의 질이 떨어져 있지도 않다. 물론 나는 나만을 위한 욕망은 많이 내려놨지만 오히려 그러고 나자 더 충만한 행복과 평안이 찾아왔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소중한 존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는 삶을 산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신의 아이를 위해 어떤 희생도 마다치 않는다. 나도 이와 비슷하다. 내 삶이 다른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종류의 큰 사랑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무엇이 너희 영혼을 높이 끌어올렸는가? 무엇이 그대의 영혼을 가득 채우고 기쁨을 주는가?’ 프리드리히 니체의 질문에 가만히 답을 하다 보면 내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다. 사람들이 살면서 허무하다고 느끼는 때를 보면 자신의 삶이 또는 자신이 이루어 나간 것이 아무런 의미도 있지 않는다고 생각될 때이다. 타인을 돕거나 누군가의 힘이 되어줄 때 우리는 우리 존재의 의미를 실감하고 순수한 기쁨을 맛보게 된다. 즉 봉사라는 삶은 우리에게 또 다른 삶의 활력이 되어줄 수 있다. 가게 손님 루시는 항공사에서 25년 일하고 정년 퇴직했다. 오랫동안 어린이 암 치료 병원에 매달 20달러를 보낸다. 아이도 없고 결혼도 하지 않았다. 생활이 넉넉하지도 어렵지도 않지만 꼬박꼬박 우체국에 가서 돈을 부친다. 나는 삶 속에서 행하는 작은 선의의 봉사와 기부는 균형 있는 삶을 위해 꼭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요즈음 나 자신만을 위한 욕망과 돈을 밤낮으로 쫓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세계의 부자라는 사람은 결혼식에 사람들이 놀랄 만큼 돈을 뿌려 댄다. 결혼식 비용의 1만분의 1이라도 가자지구에 먹을 것이 없어 배급을 줄 서서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식량이라도 나누어 주었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욕망은 채우면 채울수록 마음은 더욱 공허해진다. 현대인이 갖는 불안과 공허를 잘못된 방법으로 극복하려 하기 때문이다. 나 자신만이 아닌 타인이나 다른 생명체를 위해 작은 일을 하다 보면 생각보다 내가 얻는 것이 많다. 나를 희생하는 이타심이라기보다는 나에게 있는 것을 조금 나눈다는 생각의 봉사는 장담컨대 그토록 갖고 싶었던 충만함을 선사할 것이다. 조금씩 모두가 힘을 합친다면 아직 오지 않은 날들은 어쩌면 더 희망차게 바꿀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결혼식 비용 교회 안내 우리 가게
2025.08.21. 18:30
구글에서 찾아보니 ‘취미’는 즐거움을 위한 활동이고, ‘특기’는 남들보다 뛰어난 기술이나 재능을 의미한다고 써있다. 이 두 단어가 인생에서 어떻게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지, 경험을 나누려한다. 자식들이 성장하여 둥지를 떠난 후, 우리 부부만 남은 집은 너무 적막했다. 하루는 길었고, 무얼 하며 시간을 보낼까 고민하다 문득 그림을 그려야겠다는 생각에 미쳤다. 어린 시절, 제대로 된 미술 도구조차 없어 그림 그릴 엄두도 못 냈던 기억 때문일까. 망설임 없이 수채화 물감, 붓, 스케치북, 이젤까지 샀다. 그 순간의 뿌듯함과 설렘은 아직도 생생하다. 집 발코니에 가득 피어있던 붉은 베고니아 화분을 처음 그렸다. 명암도 원근도 무시한 서툰 그림이었지만, 거실 벽에 기대어 세워둔 그 그림을 보며 벅차오르는 감격과 행복감에 온 마음이 베고니아로 가득 찼다. 손님들이 그림을 칭찬하며 “누가 그렸느냐”고 물으면, “취미로 시작했고, 초등학교 이후 처음”이라고 답하곤 했다. 학창 시절 이론만 배웠던 미술 시간은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저 새로운 취미를 시작했다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다. 시간이 흘러 미국으로 이주한 후, 손녀의 아트 교실에 데려다 주고 데려오면서 나도 그림을 다시 배우고 싶다는 열망이 샘솟았다. 용기를 내어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흔쾌히 허락해 주셨고, 주 1회 수업을 결정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다시금 설렘으로 가득했다. 이제 정말 ‘그림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에 부풀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고등학교 때 적성 테스트에서 내 공간 지각 능력 점수가 형편없이 낮았던 기억이 떠올랐다. 수리력과 추리력은 만점에 가까웠지만, 예능 감각과 직결되는 공간 지각 능력은 80점도 채 되지 않았다. 그림 그리기는 타고난 능력이 부족한 분야였던 것이다. 여행 중 멋진 풍경을 보면 사진으로는 만족 못 하고 늘 그리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히지만, 그것이 오히려 부담으로 다가오기도 했다. 다행히 우리 자식들은 나의 그림을 좋아했다. 장미를 뭉개듯 그려도, 해바라기를 들국화처럼 그려도, 어른을 아이처럼 그려도 “엄마 그림이라 좋다”며 너그럽게 봐주었다. 더 놀라운 것은, 미국인 사위의 부모님 두 분이 모두 미술을 전공했는데, 그분들이 내 그림에서 “아마추어 그림에서만 볼 수 있는 신선함이 있다”며 한국에서 그린 제라늄 그림을 부엌 벽에 걸어 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지난 1년은 10학년 손자가 우리 집에서 지냈다. 운동에 특기가 있는 손자는 본인의 실력 향상을 위해 부모형제를 떠나 샌프란시스코에서 LA로 전학을 왔다. 공부만 하는 집안에서 운동을 하겠다니, 우리 모두는 깜짝 놀랐다. 처음엔 잠시 그러다 말겠지 싶었지만, 우리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손자는 옆도 뒤도 안 보고 학교생활과 클럽 스케줄에 몰두했다. 몸에 해로운 음식은 절대 먹지 않는 등 철저한 자기 관리까지 보였다. 손자는 취미와 특기가 같은 경우였다. 스스로 즐겁게 운동하며 열심히 노력하니 성과 또한 뛰어났다. 이제 손자도 제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1년 전의 일상으로 돌아왔다. 이제 가장 먼저 하고 싶은 일은 다시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너무 오래 쉬어서 아직 엄두가 나지 않지만, 나는 붓을 놓지 못할 것이라고 다짐한다. 나를 잘 아는 동생은 잘하는 일을 하지 왜 그림으로 씨름하느냐고 하지만, 그저 즐거우니까 계속하게 된다고 말한다. 오롯이 즐거움을 위한 취미 생활이 되어야 함을 잊지 않으려 한다. 이영희 / 수필가이아침에 행복 그림 아마추어 그림 제라늄 그림 엄마 그림
2025.07.31. 18:07
살면서 숱한 헤어짐과 만남을 겪는다. 젊었을 때는 언젠가 다시 만나리라는 기대로 헤어짐을 견디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언제든 떠나보낼 수 있다는 호기로 만남을 가볍게 대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수록 헤어짐은 더욱 깊은 여운을 남기고, 만남은 만남대로 부담이 되어 마음을 무겁게 한다. 새 교회로 부임하면서 정든 교우들과의 헤어짐과 낯선 교우들과의 만남으로 뒤숭숭해진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만남과 헤어짐의 무게를 느낄 나이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채 새로 오는 목사를 기다리던 교우들과의 첫 예배에서 정채봉 선생이 말한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시인이자 동화 작가였던 정채봉 선생은 다섯 종류의 만남이 있다고 했다. 그는 첫 번째로 ‘생선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하면서 이런 만남은 만날수록 비린내가 묻어나기에 가장 잘못된 만남이라고 했다. 그가 말한 두 번째 만남은 ‘꽃송이 같은 만남’이다. 꽃송이는 피어 있을 때는 환호하지만 시들게 되면 버려지기에 가장 조심해야 할 만남이다. 그가 말했던 또 하나의 만남은 ‘지우개 같은 만남’인데, 만남의 의미가 순식간에 지워져 버리기에 가장 시간이 아까운 만남이라고 했다. 그는 또 ‘건전지 같은 만남’이 있다고 하면서 이 만남은 힘이 있을 때는 간수하다가 힘이 닳아 없어질 때는 버리기에 가장 비참한 만남이라고 했다. ‘생선, 꽃송이, 지우개, 건전지.’ 평소 아무렇지 않게 여기던 단어들이 이토록 날카롭게 만남을 풍자할 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며, 만남을 괜찮게 빗댈 말이 있는지 찾기 시작했다. ‘하늘, 바다, 산, 들’ 그럴듯한 단어들이 떠올랐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가 또렷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정채봉 선생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이라며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는 ‘손수건 같은 만남’이 가장 아름다운 만남인 까닭은 힘이 들 때는 땀을 닦아 주고, 슬플 때는 눈물을 닦아 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차 싶었다. 지금까지 만났던 여러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며 손수건보다 생선, 꽃송이, 지우개, 건전지가 그들과의 만남을 말해주었기 때문이다. 이제라도 ‘손수건 같은 만남’을 갖겠다고 다짐하는데, ‘손수건은 무슨 손수건!’이라는 우레같은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라 주변을 살폈지만, 그 소리의 주인공을 찾을 수 없었다. 그 소리는 내 마음에서 나오는 소리였다. ‘손수건이 아니라면, 무엇이란 말인가?’ 스스로에게 묻자, 불쑥 ‘걸레’라는 답이 들려왔다. ‘걸레 같은 만남’은 다른 이의 땀과 눈물만이 아니라 누군가가 흘린 오물까지도 닦아 줄 수 있는 만남이다. 어머니가 그러셨고, 나를 사랑해 준 이들이 그랬다. 그래서 그분들과의 만남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이 애틋해진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점점 더 메말라가는 이유는 ‘손수건 같은 만남, 걸레 같은 만남’이 슬그머니 자취를 감췄기 때문이다. 기꺼이 손수건이 되고, 걸레가 되어 서로의 상처와 눈물, 땀은 물론이고, 때로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와 허물마저 덮어주고 닦아주는 만남이 잦아질 때, 우리가 사는 세상은 살 만한 세상이 될 것이다. ‘손수건 같은 만남, 걸레 같은 만남’을 기대하며 이 아침을 맞는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걸레 만남 걸레 생선 꽃송이 정채봉 선생
2025.07.24. 19:25
딸 식구들이 여행을 떠나면 딸 집에서 나만의 여유있는 휴가를 즐긴다. 넓은 집에 나 혼자 독차지하고 거리낌없고 누가 귀찮게 하는 말 한마디 없는 이 귀중한 시간이다. 뜨거웠던 낮과는 달리 저녁 무렵은 선선하다. 손자 방 창문을 열고 커튼을 올려 버리면 길 건너 큰 상수리나무 사이로 별 하나가 반짝인다. 어제도 그 자리에서 반짝이며 나타났겠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반짝인다. 잡생각을 하며 누워있는데 보름달이 내 가슴으로 안긴다. 보름달을 정면으로 보면서 불을 끄고 달맞이를 했다. 그 잠깐을 즐기고 있는데 친구에게서 전화벨이 울린다. 받을까 말까 망설이다가 받았다.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한다. 받지 않으면 메시지를 남기면서 자기 전화는 아무리 바빠도 받으라고 간곡히 애원한다. 우울하고 외로워서 숨이 막힌다고 투덜거린다. 친구는 젊었을 때 센트럴파크에서 달리기도 많이 했고 비즈니스를 아주 잘 운영하여 은퇴 후에도 여유롭게 생활을 하고 있다. 바쁘게 살다 은퇴하고부터 조금씩 이상 증후가 나타났는데 이제는 상태가 많이 진전되어 씁쓸한 생각이 든다. 전화를 받으면 말이 없다가 내가 왜 전화했느냐고 물으면 똑같은 말을 반복한다. 재미있는 이야기 없느냐고 물으면 그냥 매일 똑같지 뭐라고 대답한다. 맛있는 음식 먹었느냐고 아니면 어느 식당에 맛있는 것 있느냐고 물어도 입맛이 없다고 대답한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성숙한다, 어느 날 우연히 의료 인문학 강좌에서 인상 깊게 들었다. 삶의 끝자락에서도 웃을 수 있는 질병이 성숙의 계기가 된다고 했다. 아픔의 순간은 늘 고통으로 시작되지만 아프기 때문에 받을 수 있는 위로도 있고 아프지 않았다면 해보지 못했을 생각도 있다. 이 친구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그 성숙함과 담담함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오락가락하면서도 희망을 찾지 못하는 순간에도 여전히 하루를 살아내는 그에게는 내일이란 어떤 의미인 것일까. 도심의 불빛을 뚫고 반짝이는 창밖의 별은 오늘도 내일도 그 자리에서 떠 있을 것이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을 때도 한 번도 빼놓지 않고 하늘에서 깜박였다. 보이는 것만 믿으려는 인간은 얼마나 어리석은가.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것이다. 전화를 내려놓은 지 1시간도 안 되었는데 또 전화벨이 울린다. 너무 늦은 시간이다. 많은 일들이 갑자기 일어난다. 갑자기 아프고 갑자기 떠난다. 이미 주어진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개개인에게 주어진 숙제다. 앞날을 마냥 두려워하는 태도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한껏 걱정하다가 맞이한 미래는 잘 되어도 나쁜 상황을 피했다는 안도감을 줄 뿐이다. 오히려 미래를 기대할 줄 알아야 한다. 어떤 인간도 앞날을 예측할 수는 없으므로 마음대로 상상하고 기다려보는 데에는 아무런 제약이 없다. 다른 사람이 기대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기대하는 즐거움을 맛볼 수 있다면 맛보는 만큼 삶이 풍성해질 것이다. 그 맛을 찾아내고 알아 가는 것도 또한 세상을 창조한 분의 의도일지도 모른다. 더 이상 방법이 없다는 말이 우리의 미래를 제한할 수는 없다. 여전히 설명할 수 없는 기적은 일어나고 있다. 이해할 수 없는 예외는 끝없이 보고된다. 인간은 바늘구멍으로 책을 보듯 바라볼 뿐이다. 그 책의 다음 페이지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설령 뜻하지 않는 미래가 오더라도 별은 여전히 떠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변해도 변치 않을 우리의 미래가 아름다운 기대와 경이로움으로 가득 찼으면 좋겠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기대 자기 전화 의료 인문학 상수리나무 사이
2025.07.15. 18:37
146년이 지나도, 백조는 무대 위를 날고 있다. 1877년 러시아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서 초연된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146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세계 무대에서 생생히 살아 있다. 수많은 예술작품이 시대 속에 잊히고 사라져도, 이 작품만은 꾸준히 관객을 극장으로 이끈다. 왜일까? 47년 전, 초등학교 시절이었다. 1978년 세종문화회관 개관을 기념해, 한국은 세계적인 발레단인 영국 로열 발레단을 초청해 백조의 호수를 선보였다. 주역은 전설적인 무용수 마고트 폰테인이었다. 그날 무대에서 백조들이 날갯짓하던 순간, 나는 나도 백조가 되고 싶다는 강렬한 열망을 느꼈다. 공연 후 나는 무대 뒤에서 그녀를 기다렸고, 마고트 폰테인은 프로그램 판플렛에 “작은 발레리나, 너의 꿈은 이루어질 거야”라는 글과 함께 사인을 적어 내게 건네주었다. 그 순간은 내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되었고, 그때부터 내 안에 분명한 꿈이 생겼다. 그 이후로 나는 해마다 백조의 호수를 관람해왔고, 어느덧 관람 횟수가 40회를 넘어섰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미무용연합 진발레스쿨의 발사모(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 회원 30명과 함께 보스턴 발레단의 백조의 호수를 관람했다. 보스턴 발레단은 1963년에 창립된 비교적 젊은 발레단이지만, 정교한 안무와 현대적인 무대 해석으로 미국 무용계에서 확고한 존재감을 가진 단체다. 이번 공연은 내가 지금까지 보아온 백조의 호수 중에서도 단연 인상 깊었다. 특히 2막과 4막에서는 검정과 흰색이 강렬하게 대비되는 모노톤 무대 위로 드라이아이스가 흐르며 환상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무대 전체가 마치 백조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처럼 느껴졌고, 현실의 질서와 인간의 욕망이 얽힌 1막과 3막, 그리고 죽음과 환상이 교차하는 2막과 4막 사이의 극적인 대비는 더욱 선명하게 그려졌다. 마치 삶과 죽음, 이성과 감성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 편의 시를 보는 듯했다. 무엇보다도 감격스러웠던 순간은 오데트와 오딜 역을 맡은 한국인 발레리나 채지영의 무대였다. 그녀는 절제된 고결함과 강렬한 매혹을 자유롭게 오가며 고난도의 테크닉을 완벽히 소화했다. 특히 휘테 32회전에서는 완벽한 중심과 속도, 표현력이 삼위일체를 이루며 회전이 단순한 테크닉을 넘어 인간의 육체가 예술로 승화되는, 미학적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그 한 장면만으로도 관객의 숨을 멎게 할 만큼 강렬했다. 한국인으로서 자랑이며 긍지다. 이번 공연은 전석 매진이라는 기록을 세웠고, 함께한 학생들과 발사모 단원들은 모두 “평생 잊지 못할 감동”이었다며 입을 모아 찬사를 보냈다. 나는 디렉터 자격으로 드레스 리허설에 함께 참석하여 공연 전 무대의 긴장감과 예술가들의 몰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공연에 앞서 우리는 발사모 내부에서 백조의 호수 워크숍을 열어 작품의 구조와 음악, 인물 해석을 함께 공부했고, 덕분에 단원들은 무대를 더욱 깊이 있게 감상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감동의 중심에는 언제나 차이코프스키의 음악이 있었다. 익숙한 선율이 무대 위에서 울려 퍼지는 순간, 백조의 날갯짓은 다시 우리를 무대의 마법 속으로 데려갔다. 그래서 나는 다시 묻는다.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는 왜 여전히 우리를 부르는가? 그것은 우리가 여전히 사랑을 믿고, 아름다움을 갈망하며,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끝없이 날고 싶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 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무대 백조 세계 무대 모노톤 무대 순간 백조
2025.07.08. 20:47
돌아가신 우리 장모님은 6·25사변 때 원산에서 어린 두 딸을 데리고 피난선을 탔다. 남편은 배가 출항하기 전 잠깐 집에 다녀오겠다고 한 후 생이별을 했다. 장모님은 수복이 되면 빨리 원산으로 돌아갈 마음으로 휴전선에서 가까운 속초에 정착했다. 장모님은 피난 올 때 가져온 재봉틀로 남의 옷을 만들어 두 딸을 먹여 살리고 학교에 보냈다. 큰딸인 아내가 한 말, “외삼촌은 술꾼이었어요. 술 마실 돈이 떨어지자 누이의 전 재산인 재봉틀을 훔쳐다 팔았어요. 나는 외삼촌을 미워했어요. 전쟁 후 부산 철길 옆에서 살다 상경해 판자촌에서 움막을 쳤습니다. 엄마는 재봉틀로 바느질해서 아이들을 공부시켰습니다. 어린 나는 엄마의 바느질을 도와주었습니다.” (민병임 장편 소설 ‘꿈’에서) 조선 여인들은 키가 작고 몸은 연약하지만 예로부터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다. 마을 아낙네들은 삼베 풀을 베어 뜨거운 물에 짜서 한 올, 한 올 실을 뽑아내 삼베옷을 만들었다. 유년 시절을 시골에서 보낸 나는 동네 부인들이 모여 오순도순 이야기를 나누며 길쌈을 하는 것을 보았다. 우리 어머니도 바느질했고 나이가 많아져 눈이 침침해지자 나에게 바늘귀를 찾아달라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한국의 수출 증대는 섬유업이 주도했다. 시골 처녀들은 공단에서 밤낮없이 재봉틀을 밟았다. 바느질 기술이 좋은 어머니 밑에서 은연중 재능을 전수하였을 것이다. 1970년대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으로 남미 이민이 시작되었다. 뉴욕한국일보 기자 시절 브라질 취재에서 들은 이야기. “농업이민으로 왔지만 처음부터 농장에서 일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이민 보따리에 넣고 온 옷을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더는 팔 옷이 없어지자 옷을 뜯어 본을 뜨고 제품업을 시작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남미에는 잠바라는 옷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소개했습니다. 바느질 기술이 월등한 부인들이 제품업으로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이제 2세들은 현지인을 고용하면서 미국, 프랑스, 이탈리아 등에서 첨단 패션을 배워 의류업을 주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에 이민 온 동포들은 한때 세탁업에 많이 종사했다. 한인 부인들의 테일러잉(옷 수선)은 고객들의 사랑을 받았다. 즐겨 입던 옷을 맡기면 오래 기다리게 하지 않고 마음에 들게 고쳐주었다. 매직 터치였다. 드라이클리닝 업이 쇠퇴한 지금도 한인 업소들은 옷 수선으로 수입을 올리고 있다. 할머니, 어머니의 바느질 솜씨가 은연중에 후손들에게 이어졌을 것이다. 이민 온 지 오래돼 할머니가 된 지금도 딸들이 옷을 사 오거나 입던 옷을 고쳐달라고 부탁하면 순식간에 해내는 부인들, 바느질을 통해 가족 간의 사랑과 신뢰가 이어지고 있다. 1851년 미국인 아이작 싱어(Isaac Singer)가 재봉틀을 발명했다. 바느질을 많이 하는 한인 가정은 이 신비한 기계를 너도나도 사들였다. 재봉 일은 어려웠던 시절, 생계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바느질은 섬유산업을 일으켰고, 남미의 제품업을 성장시켰다. 희미한 전등불 아래서 재봉틀을 밟던 어머니들, 그 정성과 사랑을 잊을 수 없다. 최복림 / 시인이아침에 재봉틀 이민사 부인들 바느질 바느질 솜씨 바느질 기술
2025.07.02. 19:43
아침을 먹고 가게 밖을 내다보면 매일같이 비슷한 시간에 노인 부부가 큰 수레를 끌고 쓰레기통을 뒤져 소다 캔과 물병과 플라스틱 물병을 주워 담는다. 두 사람 손에는 고무장갑이 끼어있다. 맨손을 본적이 없다. 하루에 몇 마일을 걷는지 모르지만, 저녁 시간이 되면 소형차 크기의 자루에 넣은 병들을 2개씩 싣고 팔러 가는 것 같다. 아침에는 할아버지가 빠른 걸음으로 앞서가지만 큰 짐을 싣고 팔러 갈 때는 할머니가 앞서고 뒤에서 할아버지는 할머니 자루가 떨어지지 않나 살피면서 수레를 끌고 간다. 가끔 나는 물병을 모아 큰 플라스틱 백을 가득 채워 할머니나 할아버지에게 전하지만 고맙다고 인사하거나 그 흔한 생큐 소리도 하지 않는다. 미국에 온 지 오래되지 않은 것 같다. 자그마한 체구에 걷는 속도가 무척 빠르다. 더운 날씨에는 줍는 양이 많아 자루가 꽉 채워 무척 크지만, 비가 오거나 쌀쌀한 날은 자루가 크지 않다. 이상하게 몇 주째 두 노인 부부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가게 같은 건물에 중국 식당이 있었다. 온 가족이 가게에서 일했다. 두 딸을 낳아서 학교에 보내고 친정엄마까지 불러들여 아이들을 돌보고 5~6년 가게를 운영했는데 갑자기 문을 닫고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관리인에 따르면 비자가 만료되었다고 하는데 다른 사람에게 넘기지도 않고 주방기구 하나 가져가지 않고 가게를 닫은 것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게 작년 가을이었는데 지난 3월 갑자기 우리 가게에 이민세관단속국(ICE) 직원 두 명이 왔다. 나는 그들 목에 걸린 ICE 카드가 무엇인지도 모르고 가만히 서 있었다. 고개를 갸우뚱하는 나에게 이민세관단속국에서 왔다고 자세히 설명했다. 깜짝 놀랐다. 나는 여기에 오래 살았고 불법 체류자가 아니라고 강변했다. 그랬더니 이웃한 중국 식당을 이야기하며 언제 문을 닫았고 누구누구 일을 했느냐고 묻는다. 나는 중국 사람도 아니고 중국 음식을 좋아하지 않고 그 가게에 가지 않아 모른다고 대답했다. 갑자기 내 머릿속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불법체류자 단속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내 앞에 ICE 직원이 나타났다는 사실에 놀라 넘어질 뻔했다. 죄도 없이 덜덜 떨었다. 이게 무슨 일인가 정말 뉴스에서 듣던 사실을 현실로 접하고 나니 반세기가 지나도록 영주권 보자는 사람이 없었다. 영주권이나 여권은 해외여행 시나 필요했지 일상생활에서는 쳐다보지도 어디에 두었는지도 모르고 지냈다. 어느 누가 말했던가. 영주권이 없는 사람은 오밤중에 소방차가 윙윙 소리를 내고 지나가도 자기 잡으러 오나 싶어 집에서도 숨는다고 했다. 이 정부가 들어서면서 일용직이나 서류미비자 들이 쥐구멍에서 숨을 쉬고 있다. 가게 앞을 지나치던 많은 사람들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 서로서로 연결되어 집 청소를 하거나 주인이 여행을 떠나면서 개나 고양이 돌봐주는 일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한다. 세탁소를 운영하는 멕시코 친구는 직원 중 영주권자가 없어 한밤중에 일을 하고 새벽이 되기 전에 퇴근시킨다고 했다. 영주권은 없지만 주어진 일터에서 일하고 세금 내고 정상적으로 사는 사람들마저 불안에 떨고 있는 지금이 자유로운 미국은 아닌 것 같다. 양주희 / 수필가이아침에 서류미비자 할머니 자루가 플라스틱 물병 ice 직원
2025.07.01. 18:44
식당에서 계산서를 보고 있다. 맨 아랫부분에 네 가지 팁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쓰여 있다. 음식값의 18%, 23%, 28%, 네 번째 선택은 Custom, 당신이 지불하고 싶은 금액이다. 친절하게 퍼센트 옆에 돈으로는 얼마인지 적혀있다. 이 식당에도 얼마 전까지 있던 15% 팁 선택이 없어지고 28% 팁이 새로 등장했다. Custom란에 15%의 금액을 직접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계산하기가 만만찮았다. 동양 사람들을 싸잡아 망신시키지 않으려면 빨리 쿨하게 계산을 해야 한다. 계산을 잘못해 생각했던 금액보다 더 준 적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렇게 식당을 나올 때는 마음이 영 께름칙하고 주머니를 털린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팁에 대해 알게 된 것은 한국에서 호텔에 근무하면서부터다. 팁을 봉사료라는 명목으로 호텔을 포함 모든 숙박업소와 식당에 일정금액을 부과하는 새로운 정책을 교통부에서 발표했다. 1979년이었다. 서비스를 개선하고 손님에게 부당한 팁을 강요하는 것을 근절하겠다는 좋은 취지였다. 하지만 실무에 종사하던 나는 봉사료로 인한 많은 부작용을 목격했다. 강제 봉사료 징수는 손님과 직원 간의 갈등을 조장했다. 그때도 자발적이 아닌 강제성이 문제였다. 미국에 와서 팁의 정체를 더 뚜렷이 알게 되었다. 다양한 이민자들이 팁 문화를 통해 조금씩 미국을 알아가는 것 같다. 메뉴에 쓰여 있는 가격이 진짜가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리는데 오래 걸리지 않는다. 40년이 지난 지금, 내가 밥값으로 얼마를 내게 될지 식당을 나갈 때까지 알 수 없는 곳이 미국이다. 낯선 나라, 복잡한 문화, 이상한 돈, 팁이다.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보낸 긴 세월이 새삼스럽게 떠오른다. 오래전 일이다. 한국에서 온 손님 한 분이 미국 부동산에 관심이 있어 에이전트였던 나와 꽤 큰 건물을 보러 다니고 있던 차였다. 하루는 손님일행 여러 명과 한국 고깃집에서 점심을 먹었다. 내 손님이 계산을 끝내고 식당을 막 나왔을 때였다. 한 웨이트리스가 따라 나와 팁이 적다며 우리 일행에게 삿대질을 하며 욕을 했다. 그리고도 분이 안 풀렸는지 주방으로 들어가 소금 한 바가지를 가지고 나와 우리 보란 듯이 식당 앞에 획하고 뿌렸다. 그리고는 ‘에이 퉤! 한국에서 온 것들은...’ 하는 것이었다. 이민자 망신을 그녀가 시키고 있었다. 팁이 충분하지 않다고 종업원이 손님에게 저런 행동을 하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내 손님도 일행들 앞에서 저런 수모를 겪었으니 그냥 있을 리 없었다. 그가 다시 식당으로 들어갔다. 그는 먼저 주인이나 매니저를 불렀을 것이 틀림없다. 나는 그녀가 주인이 아니기를 바랐다. 이렇게 팁 문화는 곳곳에서 잡음을 냈다. 동전과 함께 잔돈을 테이블에 놓고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28% 팁을 요구받고 있다. 미국에서는 거의 모든 거래에 판매세가 따라다닌다. 그 세금은 내 주머니 사정과 상관없이 늘 높이 책정돼 있다. 그 위에 얹어지는 팁까지 고공행진을 하고 있다. 나는 언제 28% 팁을 흔쾌히 낼 수 있을까. 마야 정 / 수필가이아침에 강제 봉사료 이민자 망신 명과 한국
2025.06.30. 18:46
노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핀 제주도가 눈에 아른거린다. 36년 전 신혼여행지가 제주도였다. 넷플릭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남자 주인공 ‘관식이’는 가족을 향한 지고지순한 헌신과 책임감으로 인기를 끌었다. 소위 ‘관식이 신드롬’이라는 단어까지 유행할 정도로 세대를 아우르는 공감을 끌어냈다. 말보다는 묵묵한 행동으로 사랑을 보여주는 남자로 ‘관식이 같은 남자랑 결혼하고 싶다’라는 여성도 많다고 한다. 나는 우리 부부를 ‘로또 부부’라고 부르곤 했다. 로또를 사본 사람은 알 것이다. 로또가 대부분 ‘꽝’이라는 것을. 혈액형이 같은 걸 빼고는 하나도 맞는 것이 없었다. 기억하기도 힘든 아주 먼 옛날 일이긴 하지만 하늘이 내린 인연이라 믿고 복권을 긁듯 설렌 적도 있었다. 인생살이 모진 풍파를 오랜 시간 함께 헤쳐온 배우자로서의 ‘의리’ 외에 무엇이 더 남았을까, 싶었다. 그런데 인생의 영원한 반려자로 여생을 함께할 사람이라고 가슴 깊이 새길 일이 일어났다. 나는 겁이 많다. 내 손으로 내 손가락을 바늘로 찔러 피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자가 혈당 채혈기를 사 두고도 사용이 겁나서 시험지의 유효기간을 넘겨 버리기 일쑤였다. 다행히 과학의 발달로 연속혈당기(Continuous Glucose Monitor)가 나와서 사용한다. 센서를 팔에 부착해 실시간으로 혈당을 측정할 수 있다. 어떤 음식을 먹을 때 혈당이 오르는지 안 오르는지 추이를 알려주어 식생활을 조절하게 한다. 나침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식사와 운동, 수면이 혈당에 주는 영향을 알 수 있다. 고혈당과 저혈당일 때 경고 알람이 울려 대처를 할 수 있게 돕는다. 당뇨를 가지고 사는 삶은 불편하다. 음식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나는 음식 참기가 제일 어렵다. 약으로 당뇨가 조절되겠거니 했으나 오산이었다. 복용 중인 약을 바꾸었더니 한밤중에 저혈당이 와서 연속혈당기가 알람을 울린다. 새벽 3시에 저혈당의 위험을 미리 알리는 경고음이 울렸다. 남편이 우유 한잔과 참외를 깎아와서 준다. 혈당을 읽어주는 핸드폰을 남편 것와 내 것을 연동시켜 알람을 듣고 대처를 한 거였다. 오랜만에 맛보는 뭉클한 순간이다. 친구들과 외식으로 스시와 빙수, 붕어빵까지 먹었더니 남편한테 무엇을 먹고 있느냐고 묻는 전화가 온다. 집에서도 밥 먹고 나면 실내 자전거 타라고 잔소리한다. 내 당뇨병 지킴이가 되기를 자처하며 유튜브에서 식사조절 팁과 운동법을 찾아 부지런히 알려준다.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고 남편의 잔소리가 제일 큰 스트레스라며 불평하곤 했다. 마음속 깊이 나를 위하고 있음을 이번 일로 깨닫게 되었다. 무뚝뚝해서 다정함이나 상냥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지나고 보니 든든한 울타리 역할을 해온 남편이다. 말이 없어도 행동으로 보여주는 수고와 사랑을 이제는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고나 할까. 안 맞아서 로또가 아니고 수많은 사람 중에 당신을 만난 것이 내 인생 최고의 행운이고 기적인 ‘로또’라고 한다면 오글거린다고 하겠지. 최숙희 / 수필가이아침에 우리집 관식이 우리집 관식이 관식이 신드롬 식사조절 팁과
2025.06.29. 16:25
신데렐라하면 나는 언제나 디즈니 애니메이션이 먼저 떠오른다. 내 두 딸이 어렸을 때, 우리 집엔 늘 디즈니 공주들이 함께 살았다. 하루도 빠짐없이 비디오테이프를 틀어주던 시절이었다. 인터넷도, 유튜브도 없던 때, ‘신데렐라’와 ‘인어공주’, ‘백설공주’ 같은 명작들은 우리 거실을 작은 극장으로 만들었다. 테이프가 늘어질 정도로 반복해서 보던 그 시절, 아이들은 주문을 외우며 이야기 속 주인공이 되었다. 그 중에서도 “살라카둘라 멘치카둘라 디디부 바디부!”는 가장 좋아했던 마법의 주문이었다. 영상이 끝나면 거실은 곧 무대로 바뀌었다. 두 딸은 드레스를 입고 엄마, 아빠 앞에서 작은 발레 공연을 펼쳤다. 동작 하나하나에 순수한 마음이 담겨 있었고, 마치 커튼 콜까지 준비된 사랑의 무대 같았다. 나는 매일 밤 작은 극장을 만들어주는 연출자이자 관객이었고, 무엇보다 발레 선생님이었다. 그 기억은 25년이 지난 지금도 이어진다. 발레 수업 시간에도 나는 그 주문을 꺼내 쓴다. 아이들은 눈을 반짝이며 공주로 변신하고, 나는 그 환상 위에 발레 동작을 살며시 얹는다. 뿌리에 롤로베, 파세, 아라베스크… 그 순간, 발레는 기술이 아니라 살아 있는 마법이 된다. 지난 주말, ‘발레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발사모)’ 회원들과 함께 할리우드의 돌비 시어터로 향했다. 일요일 오후 여유로운 거리와 어우러져, 우리는 LA 발레단이 선보이는 ‘신데렐라’ 공연을 보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이번 신데렐라는 2년 전 사반 극장에서 보았던 같은 작품이었지만, 무대는 낯익으면서도 새롭게 다가왔다. 당시 장면은 또렷이 기억나지 않았는데, 그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보니 음악 때문인 것 같았다. ‘백조의 호수’나 ‘호두 까기 인형’처럼 선율이 떠오르지 않았다. 신데렐라의 음악은 나에게 아무런 잔향도 남기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 후반부, 마법이 풀리기 직전의 장면에서 익숙한 리듬이 들려왔다. ‘어? 이 음악… 어디서 들었더라?’ 순간 떠오른 이름, 프로코피예프. 맞다. 그는 ‘로미오와 줄리엣’의 작곡가이기도 하다. 특히 로미오와 티볼트가 대치하는 장면에서 울려 퍼지던 ‘Montagues and Capulets’의 무겁고 위압적인 리듬. 클라이맥스 긴장감은 그 음악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묵직한 금관의 울림, 반복되는 리듬, 절정으로 치닫는 구성. 서로 다른 이야기를 운명이라는 공통 주제로 엮어내는 음악적 언어였다. 공연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무용수들의 표정이었다. 맨 앞자리에서 본 얼굴 하나하나는 마치 대사를 말하듯 감정을 전하고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다음엔 무조건 앞자리!” 무용은 동작만이 아니라 감정까지 전해질 때, 진짜 예술이 된다는 걸 다시금 느꼈다. 그리고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쑥 떠올랐다. “사바사바 아이사바… 얼마나 울었을까” 딸들을 재우며 자장가처럼 불러주던 ‘신데렐라’ 노래였다. 공연이 끝난 뒤 딸이 말했다. “엄마, 그 신데렐라 노래가 생각나.” 그 한마디에 마음이 조용히 흔들렸다. 예술은 잊고 지낸 감정을 다시 불러오는 힘이다. 오늘 본 신데렐라는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였지만, 처음 만나는 감정처럼 새로웠다. 같은 작품도 다른 시간에 보면, 다른 내가 그 이야기를 받아들인다. 공연장을 나와 거리를 걷는 길, 마음 한구석에 유리구두 한 짝이 조용히 남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유리구두 하나, 기억 하나. 나는 오늘도 예술을 믿는다. 진 최 / 한미무용연합회회장·진 발레스쿨 원장이아침에 유리구두 기억 신데렐라 노래 유리구두 하나 발레 공연
2025.06.24. 18:35
김춘수 시인의 유명한 시 ‘꽃’처럼 누구에게, 또는 무엇에 의미를 부여하면 그 ‘꽃’은 다른 존재로 다가오게 된다.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은 관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관심이 지나쳐 집착으로 변하면 더 피곤한 관계가 되기도 한다. 중년에 접어들면서 항상 기운이 없고, 쉽게 피곤해지고, 짜증도 많아졌다. 무언가 새로 시작하는 것도 망설였다. 스스로는 ‘늙어 가는 것’이라며 의미를 부여하곤 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증상들에 대해 우울증, ‘번아웃(burnout)’, 또는 스트레스나 갱년기(menopause)라고 이름 붙인다. 그리고 이런 단어들에 자신을 끼워 맞추고, 그렇게 단정 지어버린다. 그렇게 스스로 부여한 의미를 극복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이 있지만, 아예 회피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약물이나 술 등에 의존하는 경우다. 하지만 그것은 순간적인 도피일 뿐, 진정한 도움은 되지 못한다. 오히려 중독이라는 더 심각한 병을 만나기 쉽다. 그래서 나는 육체적 피곤함에 의미를 부여해 버리기 전에 자신을 다잡기로 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이겨낼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의 답을 찾으려 노력했다. 여성 건강, 특히 중년 여성 건강에 대해 많은 전문가의 다양한 주장이 있다. 하지만 그들의 공통된 조언은 야채 위주의 건강 식단, 꾸준한 운동과 숙면, 그리고 명상(meditation)을 통해 정신 건강을 챙기라는 것이었다. 오늘 아침에도 한 시간 동안 성경을 읽고 명상을 한 시간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하나님께 의존하고 내려놓는 것, 나에 대한 의미와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큰 위로를 받았다. 그리고 아무 생각 없이 한 시간을 달렸다. 마라톤 동호인 모임에 처음 참석한 것은 2017년이었다. ‘마라톤 완주’가 버킷리스트의 하나였기 때문이다. 마침내 LA마라톤을 완주했고, 마라톤은 그것으로 마지막일 줄 알았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달리고 있다. 새로운 꿈이 생겼기 때문이다. 바로 보스턴 마라톤 참가 자격을 따는 것이다. 새로운 목표가 생기니 동호인 모임이 열리는 주말이 기다려지고, 삶이 더 건강해졌다. 지금 뛸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알기에 토요일 새벽이면 패서디나의 로즈보울로 부랴부랴 향한다.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달리는 순간이 행복하다. 뛰는 동안 나에게 집중하게 되고, 마음은 맑아지고, 스트레스는 흘러가듯 사라진다. 얼마 전, 지니 라이스라는 한인 여성 마라토너의 기사를 보았다. 77세의 나이에 25세 여성의 체력을 유지하고 있다는 분이다. 지난해 런던 마라톤을 3시간 35분에 완주했다. 정말 경이롭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런 분이 우리 동호인 모임(여성드림러닝팀·WDRT) 초청으로 이번 주 토요일(28일) 패서디나 로즈보울 브룩사이드 공원에서 강연을 하신다니 정말 기대가 크다. 뛰면 건강해진다. 도파민이 분비되어 기분이 좋아지고, 삶의 무게도 가벼워진다. 이윤정 / 간호 실무 박사(DNP)이아침에 마라톤 행복 마라톤 동호인 마라톤 완주 보스턴 마라톤
2025.06.22. 19: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