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문한 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저쪽 테이블에 앉아 있던 S 씨의 아내가 다급한 표정으로 오더니 빨리 어머니에게 가야 한다며 S 씨를 일으켜 세운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재활병원에 있는 어머니가 넘어졌다며 빨리 오라고 전화했다고 한다. 본인이 전화하신 것으로 보아 급한 상황은 아닌 것 같다고, 음식이 금방 나올 테니 가지고 가라고 권유를 했지만 서둘러 갔다. 주변에 연로한 부모를 둔 사람들이 많다. 자주 병원을 드나드는 분들도 있지만, 아예 재활병원이나 양로병원에 들어가신 분들도 있다. 부모님 나이 80~90대면 자녀들도 60~70대다. 긴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마음이 없다는 의미는 아니다.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노인의 병시중에 자식의 몸과 마음도 지쳐간다. 그 대안이 양로시설이다. 노인에게 양로시설 입주는 고려장이며 지옥이다. 거기 들어가면 죽는다고 생각한다. 맞는 말이긴 하다. 병들고 나이 들어 양로시설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독립된 삶을 살 가능성은 없기 때문이다. 혼자 또는 가족의 도움으로 살기에는 몸이 너무 쇠약하기 때문에 양로시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결국 거기서 죽어 나올 수밖에. 세상사라는 것이 다 마음먹기 달렸고, 생각하기 나름이다. 우리 부모님도 양로병원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병원에 가면 여러 모습의 노인을 볼 수 있었다. 시름없이 창밖만 바라보는 노인, 병원 스태프들에게 끊임없이 불평하는 노인, 어디 외출이라도 할 것처럼 깨끗한 옷을 입고 화장까지 하고 앉아 있는 노인, 침실 옆 책장에 책이 가득한 노인도 있었다. 노인들의 로망은 죽는 날까지 내 집에서 살다 죽은 것이라고 한다. 내 바람도 그렇다. 하지만 현실은 다를 수 있다. 세상의 어떤 자식이 부모를 양로병원으로 내몰고 싶겠는가. 하다 보니, 상황이 그렇다 보니, 할 수 없이 그런 시설로 모시는 것이다. 노인을 아파트에 혼자 살게 하거나, 무리해서 모시고 사는 것은 장기적으로 좋은 일은 아니지 싶다. 아는 직장 동료의 할머니는 혼자 사는 것을 고집하다 결국 고독사 했다. 청소하는 아줌마가 부엌 바닥에 쓰러져 돌아가신 노인을 발견한 것이다. L 씨의 어머니는 한때 위독해서 미국에 사는 딸들이 번갈아가며 한국에 다녀왔는데, 다시 소생해 이제는 자신을 요양병원에 입원시킨 자식들을 원망한다고 한다. 자식들은 이제 은근히 어머니가 돌아가셨으면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S 씨의 장모는 100세고, L 씨의 어머니는 90대 중반이다. ‘생로병사’라 하지 않았나. 누구나 늙으면 병들고 죽기 마련이다. 지금 생각으로는 내 앞가림 못 하게 되면 자진해 양로병원에 들어갈 생각이다. 누군가 가끔 좋아하는 음식이라도 사다 주면 좋고, 가족과 친구가 찾아와 말동무해 주면 좋겠지만, 아니면 나 혼자 책 보고 바둑 두며 소일할 생각이다. 그날 S 씨의 일은 노인이 집에 가겠다고 투정을 부리기 위해 벌인 자작극이었다고 한다. 고동운 전 가주공무원이아침에 생로병사 노인 병원 노인 침실 양로시설 입주
2026.10.19. 17:58
유난히 길고 지루했던 남가주의 늦더위가 마침내 한풀 꺾이고,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지난달 추석을 앞두고 산악회에서 추석맞이 송편 빚기 행사를 가졌다. 몬로비아 하이킹 트레일에서 짧은 산행을 한 뒤, 주차장 한편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송편을 만들었다. 명절의 푸근한 정을 나누기 위해서였다. 산길에는 어느새 가을이 내려앉아 있었다. 바스락거리는 낙엽을 밟으며 걷다가 가을볕에 반짝이는 산자락을 바라보니, 명절을 앞둔 마음도 한결 넉넉해졌다. 손재주가 없는 데다 올해 처음 참가하는 행사라 설렘 반, 걱정 반이었다. 그런데 총무님이 준비한 재료의 양과 종류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단호박과 쑥, 흑미를 곱게 갈아 쌀가루와 섞은 반죽은 노랑, 초록, 보라, 흰색으로 곱게 빛났다. 대추와 녹두, 밤, 검정깨를 꿀과 섞어 만든 다양한 소까지, 준비한 이의 정성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처음 송편을 빚는 회원과 명절마다 송편을 빚어온 회원이 한자리에 둘러앉으니 서툰 손과 능숙한 손이 어우러져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야기꽃이 피어나는 사이, 주차장은 어느새 고향의 추석 풍경을 닮아가고 있었다. 나도 송편을 예쁘게 만드는 법을 전수받았다. 선생님의 손끝에서는 반죽이 순식간에 앙증맞은 송편으로 변했지만, 내 손에서는 번번이 터지거나 찌그러졌다. 반죽을 떼어 얇게 펴서 달콤한 소를 넣은 뒤 조심스레 오므렸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내 송편은 서툰 솜씨 탓에 만두인지 송편인지 어정쩡한 모양이 되기 일쑤였다. 같은 재료로 만들었으니, 맛은 얼추 같지만, 모양은 개성이 넘쳐 누구의 작품인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삼단 찜기에 솔잎을 켜켜이 깔고 송편을 올려 불에 앉히자 은은한 솔향과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사방으로 퍼졌다. 뚜껑을 여는 순간 올라오는 하얀 김과 함께 퍼지는 솔향에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졌다. 저절로 입 안에 침이 고였고 달콤한 냄새를 맡은 벌들까지 날아들었다. 대파를 듬뿍 넣고 끓인 북엇국까지 곁들이니 속이 확 풀리면서 마음까지 따뜻해졌다. 쫄깃한 송편과 시원한 북엇국의 맛에 취해 두 번째 찜기를 올리려는 순간, 반전이 왔다. 파크 레인저의 프로페인 가스 사용금지 구역이라는 경고였다. 그나마 벌금 티켓을 받지 않아 다행이었다. 남은 송편은 집에 가서 쪄먹게 싸 올 수밖에 없었다. 남가주의 지독했던 더위가 물러가고 푸른 산자락 아래에서, 비록 서툰 솜씨지만 마음을 다해 함께 빚은 송편처럼 우리 산악회의 인연도 한층 더 쫄깃하고 단단해진 듯하다. 고향에서의 추석이 가족의 북적임이었다면, 타향에서의 추석은 이렇게 마음을 나눌 친구들이 있어 외롭지 않다. 올해 추석은 보름달만큼 풍성하고 유쾌한 명절로 오래 기억될 것이다. 최숙희 수필가이아침에 가을 문턱 추석맞이 송편 추석 풍경 지난달 추석
2026.10.18. 20:00
매년 맞는 생일인데, 환갑이 되면서 앞자리가 5에서 6으로 바뀌었다고 마음이 괜히 뒤숭숭하다. 백세 시대에 환갑이면 청춘이라고 아무리 외쳐도 60이라는 숫자는 나이 들었다는 확실한 표지판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자신을 위로해 보지만, 예순을 지나는 발걸음은 절대 가볍지 않다. 지나온 세월이 빚어낸 내 모습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나이이자, 더는 젊음을 핑계 삼을 수 없는 길 앞에 서는 나이이기 때문이다. 그런 비장한 마음으로 환갑을 맞는데 아내가 물었다. “뭐 필요한 것 있으면 말씀하세요.” 해마다 생일이면 아내는 사고 싶은 것이 있으면 말하라고 했지만, 언제부턴가 갖고 싶은 것도 필요한 것도 없어져서 주면 주는 대로, 안 주면 안 주는 대로 아쉬움 없이 살아왔다. 이번에도 필요한 것이 없다고 했더니 아내가 다시 묻는다. “그럼 의자라도 하나 사 드릴까요?” ‘의자라고?’ 그 말에 왠지 마음이 끌렸다. 설교 준비한답시고, 글 쓴답시고 하루에 10시간 넘게 의자에 앉아 있을 때가 많다. 지금 쓰는 의자는 오래 앉아 있으면 얼마 전 삐끗한 허리가 먼저 알아채고 신호를 보낸다. 그동안은 그러려니 하고 지냈는데, 아내의 말을 듣고 나니 이참에 조금 편한 의자를 하나 장만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의자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무리 물가가 올랐다지만 의자 하나 값이 예사롭지 않았다. 우리 집 형편에 그만한 값을 치를 수도 없거니와, 설혹 돈이 있다고 해도 살 마음이 쏙 들어갈 정도였다. 제조 회사에서 반품받은 제품을 오픈 박스로 파는 것도 있었고 리퍼비시한 제품도 알아봤지만, 그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러다 중고 거래가 떠올랐다. 요즘은 온라인 중고 물품 거래가 활발하다고 해서 찾아보니, 내가 찾던 의자를 반값 이하로 판다는 광고가 눈에 띄었다. 처음에는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판매자에 대한 후기를 꼼꼼히 살펴보니 괜찮아 보였다. 중고 거래 웹사이트에 가입한 뒤 어렵게 판매자와 연락이 닿았다. 그가 알려 준 주소를 따라 한 시간을 운전해 한적한 주택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갔다. 중국계 이민자인 그는 가구점을 하다가 문을 닫고, 남은 물건을 집 차고에서 파는 중이라고 했다. 먼 길 달려와 줘서 고맙다며 시원한 물 한 병을 건네는데, 그의 등 뒤로 차고에 가지런히 놓인 가구들이 눈에 들어왔다. 그 물건들에는 낯선 땅에서 뿌리내리려 애썼던 한 이민자의 세월이 켜켜이 배어 있었다. 나는 나대로 좋은 물건을 싸게 살 수 있어서 고맙다고 했다. 돌아오는 길에 생각해 보니, 가게 문을 닫은 사람의 마음이 가벼울 리 없었다. 그런 사람과 서로 고맙다는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으니, 의자와 함께 마음 한 자락도 실어 온 셈이다. 환갑 선물로 받은 의자에 앉아 이 글을 쓴다. 편한 의자에 앉으면 글이 술술 풀릴 줄 알았는데, 역시 글은 어렵다. 몸은 조금 편해졌을지 몰라도 마음은 여전히 제자리다. 글쓰기가 날이 갈수록 어려워지는 것은 나이를 먹는 만큼 글에 대한 책임은 커지는데 내가 쓴 글과 삶의 간격은 좀처럼 좁혀지지 않기 때문이리라. 이제라도 그 사실을 깨닫게 된 걸 보니, 환갑을 맞으며 조금은 철이 드나 보다. 어쩌면 아내가 사 준 의자보다 이 깨달음이 더 귀한 환갑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환갑 선물 환갑 선물 의자 하나 중고 거래
2026.10.13. 20:05
스웨덴은 세계에서 복지가 가장 좋은 나라라고 배웠다. 어린 마음에 깊은 인상으로 남았고 꼭 가보고 싶은 나라로 마음속에 자리 잡았다. 그 스웨덴에 마침내 도착했다. 비행기에서 내려 화장실을 찾았을 때, 남녀 공용 화장실을 보고 잠시 놀랐다. 낯설었지만, 이 나라가 가진 문화와 가치관을 엿볼 수 있는 작은 장면처럼 느껴졌다. 내 앞에 한 여성이 먼저 들어갔고, 내 뒤에도 여성이 기다리고 있었다.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지만, 잠시 후에는 이 상황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싱크대에서 손을 씻는데 물비누가 나오지 않아 머뭇거리자, 옆에 있던 여성이 친절하게 다른 쪽에 세정제가 있다고 알려주었다. 그 순간, 남녀가 서로를 불편해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모습이 이 나라의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공공장소에서 여자 화장실의 줄은 길고 남자 화장실은 비어 있을 때면 미안한 마음이 들곤 한다. 그런데 스웨덴처럼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이라면 이런 불편함이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녀 모두가 더 편안해지고, 불필요한 불균형도 줄어들 것 같았다. 우리의 인식을 조금 바꿔보면 어떨까. 사실 비행기 안에서는 남녀가 같은 화장실을 자연스럽게 사용한다. 그 연장선으로 생각해 보면, 공공장소에서도 남녀가 함께 화장실을 사용하는 것이 그리 낯선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우리의 사고방식과 고정관념을 조금만 열어 둔다면, 이런 변화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남성은 신체 구조상 서서 소변을 보는 것이 편할 수 있다. 시트를 올리지 않고 변기를 사용하거나 주변을 깨끗하게 정리하지 않고 나오면 다음에 사용하는 사람은 불쾌감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그런 상태에서 여성이 들어간다면 더욱 불편함을 겪게 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다음 사람을 위해 깨끗하게 사용하고 나오는 기본적인 배려일 것이다. 서로를 생각하는 작은 실천이 공공 공간의 문화를 더 편안하게 만들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스웨덴의 남성들은 어린 시절부터 앉아서 소변을 보는 습관을 자연스럽게 익힌다고 한다. 처음부터 몸에 밴 습관이기에 그들에게는 이 방식이 어색하거나 불편한 일이 아니다. 다음에 사용하는 사람을 배려하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는 셈이다. 스웨덴은 남녀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을 줄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하는 나라처럼 보였다. 그런 문화는 화장실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남녀가 함께 사용하는 공용 화장실이 보편화되어 있어 모두가 동등하게 편안함을 누릴 수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이 나라가 왜 사회적 배려와 남녀평등을 중시하는 국가로 평가받는지 다시금 실감하게 되었다. 이정호/수필가이아침에 화장실 평등 공용 화장실 여자 화장실 남자 화장실
2026.10.11. 20:00
아끼던 것을 잃어버리면 마음 한구석이 비어버린 듯하다. 물건 하나를 잃었을 뿐인데, 그 안에 담아두었던 사람과 시간까지 함께 사라진 것처럼 허전했다. 영란과 함께 창덕궁 안에 있는 비원을 방문하기로 했다. 창덕궁에는 외국인 방문객을 위한 해설 봉사를 하는 영란 친구의 남편분이 계시는데, 은퇴 후 외국인들에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알리고 있다니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비원으로 간다는 통화를 귀담아듣고, 언제나 올까 하고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바쁜 봉사 중에도 우리를 기다려준 마음이 고마웠다. 창덕궁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남편은 더는 걷지 못하고 주저앉았다. 그 모습을 보자 그분은 망설이지 않고 뛰어가 휠체어를 구해왔다. 그리고 남편을 휠체어에 태워 직접 밀어주었다. 고마웠다. 그날 비원에서 받은 것은 휠체어의 도움이 전부가 아니었다. 사람의 마음이 얼마나 따뜻할 수 있는지를 함께 받았다. 그분은 작은 볼펜 하나를 우리에게 선물로 건넸다. 외국인들에게 나누어주기 위해 특별히 만든 것이었다. 두부 빛을 띤 작고 소박한 볼펜. 몸통에는 훈민정음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남편을 위해 휠체어를 가져와 밀어주던 모습, 우리를 기다려주었던 마음이 작은 볼펜 하나에 함께 들어 있는 것 같았다. 그 후로 그것은 내게 명품 펜처럼 귀했다. 그런데 너무 잘 보관하려 했던 탓일까. 어느 날부터 그 볼펜이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어디로 간 걸까?” 집 안을 몇 번이나 뒤졌다. 며칠, 몇 달이 지나고, 어느덧 3년이 흘렀다. 잊을 법도 한데 문득문득 생각이 났다. 볼펜이 아까운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마음을 잃어버린 것 같았다. 며칠 전이었다. 컴퓨터 가방을 정리하다가 한쪽에 작은 지퍼 포켓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 주머니가 있었는지조차 까맣게 잊고 있었다.지퍼를 열고 손을 넣는 순간 손끝에 차갑고 매끄러운 것이 닿았다. 훈민정음이 새겨진 작은 볼펜이었다. “아, 여기 있었구나.” 3년 동안 찾고 찾던 것이다. 잃어버린 줄만 알았던 것이 눈앞에 나타나 믿기지 않았다. 내가 들고 다니던 컴퓨터 가방 속, 작은 어둠 속에 가만히 누워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귀한 것들은 이렇게 가까운 곳에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멀리 있는 것을 찾아 헤매면서 정작 가까이에 있는 것들을 지나칠 때가 많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평범하게 주어지는 하루도, 이미 받은 작은 사랑도 그렇다. 잃어버리고 나서야 그것이 얼마나 귀했는지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큰 깨달음을 얻었다. 내가 잃어버린 줄 알았던 시간과 마음이 사실은 내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는 것을. 처음 그것을 받았을 때보다 지금 손에 쥔 마음이 더 깊다. 잃어보았기 때문이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마음 한구석 외국인 방문객 창덕궁 문안
2026.10.06. 19:03
한국에서 추석이나 가을 시제 때면 문중 후손들은 어르신들의 진두지휘로 조상님 산소를 찾아 산비탈을 오른다. 반세기 전만 해도 흰 두루마기 행렬이 이 산줄기 저 산줄기에서 해 질 녘까지 나타났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볼 수 없는 풍경이다. 나도 중학생 때 산 너머에 있는 증조할머니 산소로 제주가 담긴 주전자를 들고 할아버지들의 뒤를 따랐다. 이제는 전설 속 풍경이 된 고향 마을. 장날 신작로에는 갓을 쓰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어르신들이 걸어가시고 소 구루마들도 지나갔다. 읍내 장 골목은 막걸릿잔을 서로 권하시는 할아버지들과 허리에 끈을 묶은 할머니들이 난전을 오가시느라 늘 번잡했다. 섬유산업이 발달하지 않았던 그 시절에 고향 할아버지들이 서양식 옷들을 걸친 모습은 보기 어려웠다. 나의 종조 할아버지도 겨울에는 흰 솜바지 저고리 위에 조끼를, 여름에는 삼베, 모시 적삼과 바지를 입었고, 나들이 때는 짙은 회색의 두꺼운 두루마기 혹은 흰 옥양목 두루마기를 입으셨다. 아무리 춥거나 더워도 그분들 복장은 엄격하고도 철저했다. 할머니들도 박수근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옥양목 한복을 주로 입으셨는데, 어머니들은 무늬 있는 나일론 한복 차림으로 나섰지만 집 안에서는 흰 광목 앞치마를 입었다. 이웃에 초상이나 환갑, 혼례 등의 큰일이 있으면 여인들은 흰 사각 행주치마를 두르고 그 집으로 모여들었다. 그때는 이불호청도 모두 흰색이어서 흰 면섬유들을 깨끗하게 유지하기 위한 여인들의 삶은 마음을 다스리던 고행의 길이었으리라. 흰 빨랫감들은 냇물에 씻은 후 잿물에 푹 삶아 햇빛에 말려야 했다. 그리고 풀을 먹여서 어느 정도 말랐을 때 다듬이 방망이로 두드리며 손질했다. 세탁기도 세제도 고무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비비고 문질렀다. 그런 광목과 옥양목은 내 마음에 강렬한 빛으로 살아있다. 살얼음 밑을 흐르는 맑은 물로, 따사로운 가을볕으로, 서늘한 다듬이 소리로 마음에 스며드는 흰 빛이다. 아기들을 키울 때는 면 종류의 소목천 기저귀를 사용했다. 씻고 푹 삶아서 몇 번이나 헹구어 바람에 말렸다. 지금 우리 집의 흰색 면 수건들 본래 색을 잃어가고 있다. 20대 때 꽃을 달고 겸연쩍게 서 있던 스승의 날 행사, 말썽꾸러기 학생들이 노랑 빨강 가발을 쓰고 흥겹게 응원하던 체육대회, 작고하신 원로 시인들과 함께 한 한국시인협회 세미나, 재경여고총동창회, 윷놀이 판이 벌어진 외갓집 입택 날 등등에도 수건은 등장했다. 이들 수건에는 몇 년 몇 월 며칠의 숫자가 선명하다. 그뿐 아니라. 12년 전에 시아버지께서 한아름 주신 수건들에도 사연이 있다. 이 수건들을 보면 멋진 교사였던 시아버지님의 모습이 선연하다. 표백제를 넣고 하얗게 삶아 햇빛에 널면 모든 시간이 탈색될까, 사오 십 년의 하늘을 붙잡고 있다. 권정순 / 전직교사이아침에 빨래 기억 옥양목 두루마기 증조할머니 산소로 고향 할아버지들
2026.10.04. 18:00
책을 낸다는 것은 내가 글을 계속 쓰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같다. 30년 넘게 글을 쓰면서 이번에 일곱 번째 수필집을 내었다. 유명 작가도 아닌 내가 꾸준히 글을 쓰고 책을 내지만 책을 팔아 돈을 벌기는 매우 어렵다. 수입은 일찍이 포기한바, 다음 책 나오기까지 명함을 대신하여 나를 소개하는 용도로 책을 사용하곤 한다. 그럴 때 책이 유용하다. 길게 말을 안 해도 내가 책 속에 다 들어있으니 말이다. 내 의지로 책을 내기도 하지만 “ 이선생, 책 나올 때 되지 않았어? 글이 오래 묵으면 독자들께 실례인데. 3~4년에 하나씩은 나와줘야지! ” 하며 채근하시는 나태주 선생님이 곁에 계셔서 너무 감사하다. 책을 내면 출판 기념회는 하지 않는다. 2004년에 출간한 첫 책은 도서관 후원회에서 성대하게 기념회를 해 주셔서 감사했지만, 민폐가 크다는 걸 알아 그 이후엔 안 하고 지나간다. 읽지도 않는 책을 안면 때문에 억지로 사야 하는 지인들께 미안한 일이지 뭔가? 요즘엔 소모임으로 절친들이 모여 밥을 사주면서 축하하고 나는 답례로 새 책을 선물한다. 가장 편하고 자연스러운 방법이다. 새 책이 나오면 동창회나 교회의 전도회에 기증을 한다. 이곳 동창회에선 연말 파티 때 경품 추첨 상품으로 쓴다며 좋아하고, 교회에선 전도회에서 판매하여 선교비로 쓴다. 즐거운 기부다. 어제는 교회에서 책을 팔았다. 남편이 속한 남전도회에 잔고가 없어 후반기 선교비를 보내지 못한다기에 내 책을 판매하여 돕기로 했다. 뜻을 아는 페친 몇 분들과 교우들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선교비가 모아졌다. 큰돈 들여 책 내고 책은 판매하지 않고 기부하면 그런 비효율적이고 바보 같은 일이 또 있을까만, 선교를 위해 구심점이 되었다는 게 오히려 흐뭇하다. 누군가의 희생을 밑에 두면 그 위에 즐거운 사람이 여럿 생긴 다는 건 이 나이 되니 알만한 세상의 이치이다. 어려서 배운 십시일반(十匙一飯)은 밥 열 술이 한 그릇의 밥이 된다는 뜻으로, 여러 사람이 조금씩 힘을 합하면 한 사람을 돕기 쉽다는 것을 의미한다. 노구의 멕시코선교사 최선교사님을 돕기 위한 책 판매에 동참함으로 우리도 보내는 선교에 참여한 셈이니 의미 없다 할 수 없을 것이다. 오늘부턴 날씨도 시원하다. 마음도 홀가분하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십시일반 후반기 선교비 멕시코선교사 최선교사님 출판 기념회
2026.09.30. 19:30
노동절 연휴를 이용해 ‘랜체리아 워터폴스 캠프그라운드(Rancheria Waterfalls Campground)’로 캠핑을 다녀왔다. 꼬박 여섯 시간을 운전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지만, 막상 도착하고 보니 ‘잘 왔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전나무와 소나무가 빽빽하게 들어선 숲과 바다처럼 드넓은 호수가 어우러진 곳이었다. 웅장한 대자연 속에서 일상의 모든 것을 잠시 내려놓고 온전히 쉴 수 있었던 꿈같은 시간이었다. 캠핑장에 어둠이 내리고 찬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한 선배님은 불을 피워 계속 물을 끓여 주셨다. 쌀쌀한 날씨에 따뜻한 물로 세수하고 설거지도 할 수 있도록 챙겨주시는 배려가 고마웠다. 밤에는 물주머니에 더운물을 가득 담아 침낭 속에 넣어두니 온기가 새벽까지 이어졌다. 캠핑의 꽃이라 할 수 있는 모닥불 앞에서 불멍도 실컷 즐겼다. 바람에 흔들리는 물결마다 별빛처럼 빛나는 윤슬로 가득한 호수를 바라보는 물멍도 환상적이었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영혼이 깨끗이 씻겨지는 느낌이었다. 캠핑을 간다고 하면 아직도 사서 고생을 하느냐고 묻는 이들이 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전기와 더운물도 없고 잠자리마저 불편한 곳에서 인터넷도 안 되는 원시적인 생활을 어떻게 견디느냐는 뜻일 것이다. 사실 내가 캠핑을 자주 다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매달 한 번씩 캠핑을 가는 산악회에 다니면서부터다. 간신히 기본 장비만 마련했을 뿐, 여전히 짐을 싸는 요령도 음식 장만도 서툰 초보 캠퍼다. 그래서 갈 때마다 베테랑 동료들의 노하우를 보며 감탄사를 연발하고, 매 순간 그들의 지혜를 배운다. 게다가 나는 캠핑 바로 전 산행에서 넘어져 어깨부터 팔, 손까지 여기저기 아팠다. 부상이라는 핑계까지 생기니 친구들은 ‘그냥 몸만 오라’고 했다. 여기저기서 밥 먹으라며 차려낸 음식에 놀랐다. 손수 농사지은 갖가지 쌈 채소와 석쇠로 구운 고등어, 솥뚜껑에 지글지글 구운 고기까지,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처음 맛본 고구마순 김치는 별미 중의 별미였다. 캠핑 마지막 날, 대파를 듬뿍 넣어 끓인 시원한 황탯국은 과식으로 불편해진 속을 달래주었다. 아름다운 자연을 기대하고 떠난 캠핑이었지만, 더 깊이 마음에 남은 것은 사람의 따뜻함이었다. 기대했던 시원한 폭포는 오랜 가뭄 탓에 가는 물줄기로 변해 아쉬웠다. 하지만 자연은 한쪽이 비면 다른 한쪽을 채워주는 것일까. 폭포로 가는 길목마다 신기한 버섯들이 눈길을 사로잡아 구경하는 재미가 쏠쏠했다. 힘들지 않은 산책 수준의 짧은 하이킹 덕분에 시간이 여유로웠다. 한쪽에서는 고소한 기름 냄새를 풍기며 부침개가 노릇하게 익어가고, 옹기종기 모여 화투를 즐기는 이들의 유쾌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저마다의 방식으로 누리는 한가로움이 좋았다. 무언가를 꼭 해야 한다는 강박감에서 벗어나 타인의 눈치를 보지 않는 당당한 무관심이 좋다. 완벽한 밤하늘의 별빛이 캠핑의 정점을 장식한다. 자연을 만나고 사람의 정을 느끼며 일상의 무게를 내려놓을 수 있는 캠핑, 그것으로 충분하다. 최숙희/ 수필가이아침에 노동절 캠핑 노동절 캠핑 캠핑 마지막 캠핑 그것
2026.09.27. 14:29
안개비가 걷힌 아침, 화단 구석의 거미줄에 이슬이 걸렸다. 투명한 물방울이 명주실 한 줄 한 줄에 매달려 있다.햇살이 비추자 작은 물방울마다 하늘과 나무와 집의 모습이 들어왔다. 손바닥만 한 거미줄 안에 바깥세상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손끝을 내밀어 거미줄을 건드렸다. 수많은 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졌다. 잠시 전까지 보석처럼 빛나던 거미줄도 힘없이 흔들렸다. 거미는 어디선가 가만히 이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지도 모른다.대문을 나서려다 얼굴에 거미줄이 감겼다. 끈적한 실이 볼과 머리카락에 닿자 저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몇 번 털어내다 결국 빗자루를 들었다. 한 번 쓸어내리자 공들여 지은 집이 한순간에 허물어졌다. 빗자루 끝에 엉겨 붙은 가느다란 실을 바라보다가 발걸음이 잠시 멈췄다. 저 작은 거미에게도 저곳은 하루를 살아내기 위해 지은 집이었을 것이다. 먹이를 기다리고 새끼를 품으며 살아갈 터전이었을 것이다. 나는 불편하다는 이유로 그것을 너무 쉽게 걷어냈다. 그날 오후, 다시 화단을 들여다보았다. 거미는 어느새 무너진 자리에 새 줄을 걸고 있었다. 끊어진 곳에서 다시 시작해 하나씩 실을 이어가고 있었다. 누가 시키지도 않았고, 그저 다시 지을 뿐이었다. 가느다란 실 하나를 몸에 달고 바람을 타고 떠나는 새끼 거미도 보였다. 작은 몸은 바람에 흔들리면서도 어디론가 멀어져 갔다.자신이 살아갈 곳을 찾아 떠나는 첫 비행 같았다. 한쪽에서는 왕거미 한 마리가 거미줄 가운데 웅크리고 있었다. 거미줄에는 이미 나방과 파리 몇 마리가 걸려 있었다. 왕거미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기다림도 사냥도 소리 없이 이루어졌다. 저녁이 되자 바람이 차가워졌다. 거미줄에 걸린 나방은 더는 날개를 움직이지 않았다.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의 먹이가 되는 순간에도 자연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살아 있는 것들은 서로에게 먹이가 되고, 그렇게 생명은 또 다른 생명으로 이어졌다. 거미의 집을 바라보다 문득 어머니 생각이 났다. 어머니는 평생 자식들을 위해 살았다. 자신의 삶보다 자식의 안녕을 먼저 생각했고, 힘든 일이 있어도 쉽게 내색하지 않았다. 돌아보면 어머니가 우리를 위해 건넨 것은 거창한 말이 아니었다. 말없이 밥을 차리고, 기다리고, 걱정하고, 다시 일어서는 일이었다. 거미가 한 줄 한 줄 실을 뽑아 집을 짓듯, 어머니도 한평생 보이지 않는 실을 뽑아 가족을 지켜냈던 것인지 모른다. 그 침묵 속에는 말보다 깊은 사랑이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우리의 삶도 거미줄과 다르지 않은지 모른다. 애써 지은 것이 한순간에 무너질 때가 있고, 다시는 일어설 수 없을 것 같은 날도 있다. 그러나 어느 순간 우리는 다시 실 한 가닥을 뽑아낸다.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한다. 화단을 다시 바라보았다. 어둠이 내려오는데도 거미줄은 가느다랗게 빛나고 있었다. 아무 말 없이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세상은 끊임없이 소리를 내며 움직이지만, 거미는 침묵 속에서 자신의 집을 짓는다. 무너지면 다시 짓고, 바람이 불면 다시 줄을 잇는다. 나는 그 작은 생명에게서 배운다. 말보다 오래 남는 것이 있고, 무너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하는 침묵이 있다는 것을. 저녁 햇살이 사라지고 나서도 거미줄은 한동안 눈앞에 남아 있었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정교 침묵 거미줄 가운데 새끼 거미 어머니 생각
2026.09.24. 20:27
한 모금 마신 물이 식도 중간에 얹혀 넘어가질 않는다. 그 체증이 가슴 통증으로 이어진다. 며칠째 겪는 증세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의 회고록을 바탕으로 만든 영화 한 편 때문이다. 마음 한쪽에 웅크리고 있던 영상이 현실의 한 단면처럼 불쑥 들고일어나 일상의 행동과 생각을 멈추게 한다.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2002년 영화 ‘피아니스트’. 실존 인물인 폴란드계 유대인 피아니스트 브와디스와프 스필만의 생존기다. 감정이입이 심해 체화가 되었는지 영화의 많은 장면이 파편처럼 뇌리에 박혀 좀처럼 떠나지 않는다. 전쟁의 참상을 잔인하리만큼 건조하고 절제된 영상으로 보여주는 영화. 스펙터클한 대하(大河)가 아니라 한 인간의 생존을 통해 예술이 인간을 살리는가, 인간이 예술을 살리느냐는 질문을 던지고 스스로 답하는 영화. 1939년, 독일의 폴란드 침공으로 스필만 가족은 바르샤바 게토로 내몰린다. 1942년, 가족과 함께 죽음의 수용소로 이송 도중 그를 알아본 유대인 경찰의 도움으로 간신히 살아남는다. 이후 몇몇 지인의 도움으로 여러 은신처를 전전하다 바르샤바 폐가에 홀로 숨어든다. 인기척이 날까 봐 피아노 건반에서 한 뼘이나 떨어진 허공에서 연주하는 손가락이 쓸쓸하고, 물 공급이 끊긴 수도꼭지를 여는 장면이 슬프다. 먹을 것을 찾아 헤매다 오이 피클 통조림을 발견하지만 독일군 장교 호젠펠트에게 발각되는 순간, 숨이 멎는다. 장교의 지시로 피아노 앞에 앉은 스필만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쇼팽의 발라드 1번을 연주하는 그의 옆모습이 서럽다. 코와 입에서 새 나오는 입김이 하얗고,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온 햇살이 그의 콧등에서 내려와 피부 막을 반투명으로 비춘다. 장교는 그를 숨겨주고 빵과 잼을 가져다준다. 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을 보는 그 동작이 목메게 한다. 사람이 죽는 장면보다 먹는 장면이 더욱 아프다. 삶의 본질은 죽이는 것과 먹는 것에 있다고 조셉 캠벨은 말했다. 삶은 죽여서 먹음으로써, 남을 죽이고 자신을 달처럼 거듭나게 함으로써, 살아지는 것이라는 게 그의 통찰이다. 맞다, 사는 일은 먹는 일이다. 먹지 못하면 쇼팽도 예술도 없다. 무서우리만치 참혹한 고독이라니. 생명이 없는 거리에 홀로 선 모습이라니.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을 것 같은, 살아있음으로인해 겪는 불안과 그 극한의 공포라니. 그런데도 영화는 아름답다. 김병익 문학평론가는 "아름다움이란 그 대상 자체보다 대상을 바라보는 인식에서 피어난다"고 했다. 사람들이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스필만을 도운 이유는 그가 재능 있는 피아니스트였기 때문이다. 내게는 한 예술가뿐 아니라 그가 품고 있는 예술까지 보호하고자 하는 은유로 닿아왔다. 그렇다, 고통스러운 홀로코스트 영화가 아름답다고 느낀 이유는 예술의 가치가 옹호 받는다는 인상 때문이었다. 사는 일은 먹는 일이다. 감사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예술을 하는 마음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하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예술 가치 홀로코스트 영화 홀로코스트 생존자 폴란드계 유대인
2026.09.22. 18:15
얼마 전 주일이었다. 나이가 지긋한 낯선 부부가 교회에 들어섰다. 주차장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예배당에 들어섰는데, 당연히 부부가 함께 앉아 있어야 할 자리에는 아내의 모습만 보일 뿐 남편은 보이지 않았다. 사연을 들어보니 남편은 일본 사람으로, 한국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해 차에서 예배가 끝나기를 기다린다고 했다. 날도 무더운데 차에서 기다린다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그렇다고 당장 일본어 통역사를 구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요즘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는 인공지능(AI) 기술이 문득 떠올랐다. 하지만 이건 설교 통역이다. 여행지에서 나누는 간단한 일상 대화를 통역하는 것이 아니라, 30분 넘게 이어지는 설교를 그 뜻과 의미를 살려 동시통역한다는 것은 아무리 기술이 발전했다고 해도 쉬운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알아본 인공지능 기술은 어느새 실시간 동시통역이 가능할 정도로 발전해 있었다. 구형 스마트폰 하나를 꺼내 인공지능 앱을 켜고 테스트해 보니, 기대 이상으로 통역이 매끄럽고 자연스러웠다. 문제는 전달 방식이었다. 통역이 필요하신 분께 스마트폰을 쥐어 드리고 복잡한 앱 사용법을 매번 설명해 드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때 문득 교회에서 사용하는 무선 설교 수신기 시스템이 떠올랐다. 청각이 어두우신 분들이 마이크 음성을 잘 들으실 수 있도록 마련해 둔 무선 송수신기를 이용하면, 통역된 음성도 어렵지 않게 들려드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다. 마침내 주일이 되었다. 일본인 성도님이 아내와 함께 예배당 안으로 들어설 때 준비해 둔 무선 수신기를 드렸다. 이어폰을 귀에 꽂기만 하면 통역이 들리도록 세팅도 마쳤다. 인공지능에는 지금부터 내가 하는 설교를 일본어로 통역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예배가 시작되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통역이 잘 되고 있는지, 중간에 끊기지는 않았는지…’ 회중석에 앉은 그분이 고개를 조금만 갸우뚱해도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그렇게 예배를 마치고 함께 점심을 나누는 자리에서 오늘 예배를 잘 드리셨는지 조심스럽게 여쭸다. 그러자 그분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하게 밝아졌다. 아내를 따라 한인 교회에 올 때마다 늘 겉돌았는데, 오늘 처음으로 아내 곁에 앉아서 편안하게 예배를 드렸다며 진심 어린 만족감을 표했다. 내친김에 인공지능을 통해 대화를 나눴다. “오늘 동시통역으로 들은 설교를 잘 이해하셨습니까?” 내가 던진 질문이 스마트폰을 거쳐 유창한 일본어로 흘러나오자, 그분은 전화기를 향해 고개를 크게 숙이며 이렇게 답했다. “하이, 와카리마시따!” 다른 일본어는 몰라도 그 한마디만큼은 내 귀에 또렷이 들렸다. “예, 잘 이해했습니다”라는 뜻이다. 인공지능의 발전 속도가 놀랍다. 앞으로 인공지능이 바꿀 세상이 어떤 모습일지 두렵기도 하다. 세상은 부작용을 염려하기도 하지만, 사랑과 배려의 마음을 담아 잘 활용한다면 인공지능이야말로 언어의 장벽을 허물고 영혼과 영혼을 잇는 유익한 도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절감한 하루였다. 이창민 / 목사·시온연합감리교회이아침에 실시간 동시통역 인공지능 기술 오늘 동시통역
2026.09.13. 18:47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소설 ‘그리스인 조르바(The Greek Zorba)’를 읽고 한동안 깊은 생각에 잠겼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다.” 두려움과 집착을 벗고 진정한 삶의 기쁨을 발견한 조르바의 이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았다. 그는 이성보다 삶 그 자체를 온몸으로 살아낸 사람이었다. 세상을 자유롭게 받아들이는 그의 태도는 내게도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나는 과연 그런 자유를 알고, 그렇게 살아본 적이 있었던가. 조용히 책을 덮고 지난 삶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꺼내보았다. 남편이 다니던 회사가 오하이오주로 이전하게 되었을 때, 아이들은 고등학생과 대학생이었다. 남편은 가족과 떨어져서는 살 수 없다며 단호히 회사를 그만두었다. 나는 그의 결정을 존중했다. 그러나 그 선택 이후, 새 직장을 알아보았지만 취직은 어려웠다. 나는 그의 잃어버린 꿈과 삶의 무게를 대신 품고 기도했다. 몇 해 동안 일하지 못한 남편 곁에서, 우리는 맨발로 끝없는 모래밭 길을 걸어가는 듯한 힘든 시간을 지냈다. 조르바는 말한다. “서재에서 책을 읽는다고 삶을 아는 게 아니오. 삶은 부딪치고 쓰러지고 다시 일어나면서 배우는 거요.” 그의 말이 옳았다. 고요하던 삶에 닥친 풍파에 부딪치며 나는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성찰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그가 내게 준 믿음과 사랑이 있었기에, 나는 끝까지 그의 곁을 지켜야 했다.경제적 어려움의 시절은 단순히 불편을 견디는 일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고통은 우리 가족을 오히려 단단하게 빚어주었다. 조르바는 또 말한다. “고통은 우리를 깨어 있게 만들지.” 그 말 또한 진리였다. 나 역시 고통 속에서 깨어 있었고, 그 속에서 사람을 바라보는 눈도, 삶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지난 25년간 나는 ‘가정폭력 여성 보호소’에서 일하며 상처 입은 여자들의 눈빛을 마주했다. 그들의 눈물은 곧 삶의 고백이었다. 단지 사람답게 살고 싶다는 간절한 외침이었다. 같은 여자로서 나는 그들의 눈물 앞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 눈물의 골짜기를 함께 건너며, 세상의 그 어떤 지우개로도 쉽게 지워지지 않는세상에서 가장 깊은 흉터가 바로 부부간의 배신임을 처절하게 목도했다. ‘저들을 짓누르는 거대한 상처의 수렁에서 어떻게 하면 온전히 건져낼 수 있을까’ 하는 탄식은, 여전히 내 기도책 안에서 영원한 숙제로 남아 있다. 나는 은퇴한 지 십년이 되었고, 88세 남편 곁을 지키며 조용한 일상을 산다. 그러던 어느 날, 조르바를 다시 만났다. 그리고 내 삶 또한 그 못지않게 충만했음을 새삼 깨달았다. 나는 조르바처럼 격정적으로 살지는 않았지만, 그가 세상과 맞서며 얻은 자유가 있었다면, 나는 사랑을 끝까지 지켜내며 얻은 자유가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의 자유는 바람처럼 거칠고 뜨거웠지만, 나의 자유는 오래된 등불처럼 잔잔하고 따뜻했다. 나는 오늘도 그 불빛 아래서 조용히 묻는다 “진정한 자유란, 사랑을 끝까지 지켜내는 용기가 아닐까.”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자유 니코스 카잔차키스 가정폭력 여성 경제적 어려움
2026.09.10. 18:53
2년전 봄, 비가 갠 교회 마당에 허름한 외투를 걸친 여든 살 노인 한 분이 조심스레 들어오셨다. 첫눈에 보아도 삶의 무게가 깊게 새겨진 분이었다. 김 선생님. 그분은 갈 곳이 없어 아들 집에 얹혀 지낸다고 했다. 중국인인 며느리는 밤낮으로 카지노에서 일했고, 말도 통하지 않는 데다 예민해져 있어, 혹시나 잠을 깰까 봐 선생님은 집안에서 발끝으로만 걸어 다니며 숨을 죽이고 지낸다고 했다. 미국에 오신 지 40년이 넘었다는 그는 무역업을 하며 한국과 미국을 바쁘게 오갔지만, 정작 이 땅에서 가장 중요한 세금보고를 하지 못한 채 세월을 흘려보냈다. 그 결과 SSA(사회보장연금)도, SSI(웰페어)도, 시니어 건강보험인 메디케어도, 심지어 저소득층에게 주어지는 메디칼 혜택조차 받을 수 없는 처지가 되어 있었다. 아들에게 용돈을 받는 것이 미안해 빈병을 모아 팔아보기도 했지만, 온종일 쓰레기통을 뒤져도 점심 한 끼 사 먹을 돈도 되지 않는다고 하소연하셨다. 아파도 보험이 없어 병원 문턱을 넘지 못하고, 밤새 끙끙거리며 혼자 견뎌야 했다고 했다. 그런데도 김 선생님은 버스도 다니지 않는 길을 2마일씩 걸어 매주 교회에 오셨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단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그렇게 교회에 나오시며 신앙도 깊어지고, 얼굴빛도 조금씩 밝아졌다. 나는 그분을 모시고 사회보장국 오피스를 찾아가 메디칼을 신청해 드렸다. 이어 웰페어도 신청해 월 980달러의 현금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왔다. 마지막으로 메디케어 신청을 위해,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우산을 함께 쓰고 사회보장국과 카운티 오피스를 찾아다녔다. 마침 2025년부터 캘리포니아 주 정부가 영주권 취득 5년 이상 이거나 시민권자는 Medicare Part A buy-in 프로그램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해 김 선생님도 마침내 메디케어를 받을 수 있었다. 며칠 후, 김 선생님은 메디케어 카드를 손에 들고 사무실을 찾아오셨다. 몇 번이고 허리를 굽혀 인사하시며,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정말 고맙습니다… 정말 고맙습니다…”하고 연신 말씀하셨다. 그날 이후로 소식이 끊겼다. 한 달쯤 지났을까. 또 다른 노인 한 분이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오셨다. 그리고 조심스레 김 선생님의 부고를 전해주었다. 메디케어 카드를 받고 처음으로 의사를 찾아 진료를 받은 날, 우리 사무실에 들러 감사 인사를 전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길이었다고 했다. 그 길에서 갑작스러운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 갔고, 며칠 후 조용히 세상을 떠나셨다고 했다. 참, 인생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웰페어도 받고, 메디케어도 받고, 이제는 독립하겠다며 그렇게 기뻐하시던 분이었다. 그러나 그 기쁨을 누려보기도 전에, 그토록 기다리던 평안의 문턱에서, 그분의 삶은 허무하게도 막을 내렸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그분의 마지막 걸음은 허무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더 깊은 평안으로 이어진 길이었다는 것을. 하나님은 그분을 교회로 인도하셨고, 그 영혼을 구원하시어 마침내 천국으로 부르셨다. 그 봄날, 김 선생님은 이 땅의 고단함을 벗고 하늘의 쉼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정기철 / 수필가이아침에 봄날 노인 메디케어 신청 메디케어 카드 사회보장국 오피스
2026.09.03. 18:28
아직 겨울이 떠나지 않은 날, 봄이 먼저 도착한 곳이 있었다. 하늘은 맑았고, 바람은 꽃잎의 온도를 닮아 있었다. 우리는 그 하늘 아래 팜스프링스로 향했다. 친구 네 명과 함께한 여행이었다. 봄·여름·가을·겨울, 각자의 계절을 품고 살아온 우리가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이번 여행은 단순한 나들이가 아니라 또 하나의 계절을 함께 맞이하는 시간처럼 느껴졌다. 동부의 봄방학 때문인지 다운타운 거리는 유난히 활기가 넘쳤다. 색과 향이 짙은 멕시칸 식당에 둘러앉으니 음식보다 웃음이 먼저 식탁을 채웠다. 오래된 우정은 특별한 양념이 없어도 깊은 맛을 내는 법이다. 여행의 중심은 언제나 그곳, 아트 뮤지엄이었다. 현대미술과 디자인 작품들이 고요히 숨 쉬는 전시관 안에서 우리는 각자의 호흡으로 그림과 조각 앞에 머물렀다. 어떤 작품은 말없이 시선을 붙잡았고, 어떤 작품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게 하며 오래 생각하게 했다. 전시관을 나와 걷던 길, 거리 한복판에 서 있는 마릴린 먼로 동상 앞에서 우리는 한순간 소녀가 되었다. 영화 속 한 장면처럼 바람에 치맛자락이 흩날리는 모습은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사람들의 웃음을 불러낸다. 우리도 그 웃음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다음 날, 팜 스프링 트램이 천천히 고도를 높였다. 발아래 펼쳐진 사막과 눈 덮인 설산이 맞닿는 풍경 앞에서 계절의 경계는 사라졌다. 360도로 회전하는 창밖에는 계곡의 숨결과 설산의 결이 한 폭의 수묵화처럼 번져갔다. 정상에 내려 트레일을 걷자 첫눈처럼 순결한 눈밭이 눈앞에 펼쳐졌다. 그 위에 몸을 눕히니 차가운 공기가 온몸을 감싸 안았고, 오래 묵은 고요가 가슴 깊숙이 스며들었다. 쓰러진 소나무 곁에 엎드려 있으니 나 또한 자연의 한 조각이 된 듯했다. 그 순간, 마음속에서 한 가지 질문이 피어올랐다. “나는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대답은 없었다. 그러나 눈 속에 묻힌 나무뿌리가 조용히 속삭이는 듯했다. 긴 기다림 속에서도 봄을 향해 새싹을 틔우듯 삶의 깨달음도 저마다의 때가 되어 찾아온다고. 자연은 말없이 가장 깊은 진실을 가르쳐 주고 있었다. 여행은 풍경을 나열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우정의 숨결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C. S. 루이스의 말처럼, 친구와 함께 하는 따뜻한 시간보다 더 큰 기쁨은 드물다. 서로 다른 계절을 살아온 우리는 꽃을 피우고 잎을 틔우며 함께 자라왔다. 물이 고이지 않도록 서로를 향해 조용히 흘러주었고, 그 흐름이 오늘의 우정을 만들었다. 이번 팜스프링스에서의 나날은 오래도록 내 안에서 빛을 잃지 않을 것이다. 눈 덮인 산, 바람에 실려 오던 웃음소리, 그리고 살아 있음이 주는 단순하고도 깊은 기쁨. 그 모든 순간은 봄빛처럼 따뜻했고, 하늘처럼 맑았다. 나는 안다. 다음 계절이 오면 우리의 우정은 또 한 번 새싹을 틔우리라는 것을. 봄이 해마다 변함없이 돌아오듯, 사람의 마음에도 다시 피어나는 계절은 찾아온다. 문득 “우리 삶의 어제는 역사이고, 내일은 미스터리이며, 오늘은 선물이다”라는 말이 떠오른다. 오늘이라는 선물을 소중한 벗들과 함께 걸을 수 있었던 시간, 그것이야말로 내 삶이 다시 피어나는 또 하나의 봄이었다. 엄영아 수필가이아침에 계절 다음 계절 디자인 작품들 겨울 각자
2026.08.30. 18:10
석양이 빨갛게 물든 어느 화요일 저녁, 발걸음은 찬양과 말씀이 있는 조그만 모임으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도착해 맛있는 음식을 나누며 사람들과 친교를 나누었습니다. 친근하고 다정한 이야기들로 꽃피웠습니다. 식사 후에 찬양이 스며 나오는 곳으로 들어갔습니다. 왼쪽 뒤에 철수(가명)가 보입니다. 철수는 찬양팀에서 기타를 치고 있습니다. 그의 눈빛은 어딘가를 바라보며 깊은 생각 속으로 잠겨 있습니다. 선율 하나하나가 흘러갈 때마다 그 음률은 그의 내면 깊은 곳의 울림을 깨워내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자신을 지켜주고 이끌어 준 모든 순간이 떠오르며, 그의 마음에는 조용한 감사가 잔잔하게 흐르고 있습니다. 그곳에 참석한 사람들은 그의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메시지를 들으며 찬양을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그의 몸짓은 말보다 더 많은 것을 전하며, 찬양과 감사로 넘쳐 흐르는 그의 영혼이 우리 모두를 조용히 감싸줍니다. 그를 지금까지 있게 한 하나님의 은혜가 그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으며 우리에게도 전하고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사실 그는 기타를 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기타에 손을 얹은 채, 연주하는 듯한 몸짓으로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나이는 마흔이 넘었지만 정신 연령은 어린아이와 같습니다. 그는 일종의 자폐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표정으로 기타를 치고 있으며 마음으로 음률을 전하고 있습니다. 조용하고 잔잔한 그의 리듬이 우리에게 들어오고 있습니다. 스크린에 가사가 보이고 우리는 그것을 따라 부르고 있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받고 있지요/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지금도 그 사랑받고 있지요.” 찬양팀을 인도하고 있으며 맨 앞줄에서 기타를 치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그를 살짝 쳐다보았습니다. 그에게 사랑의 눈빛을 보내었습니다.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많이 있었겠습니까. 그의 아버지는 그것들을 하나님의 은혜와 은총으로 모두 다 극복했습니다.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아들 철수를 사랑과 헌신으로 보살펴 줄 것입니다. 그의 아버지의 얼굴에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표정으로 물들어 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입니다. 찬양이 끝난 후 그의 아버지는 그를 조심스럽게 부축하며 그의 자리로 데려다줍니다. 자식에 대한 사랑이 한없이 느껴집니다. 마음속으로 그의 아버지를 존경합니다. 이 세상 누구보다도 마음 한 가운데서 그의 아버지를 가장 존경합니다. 자식에 대한 끝없는 사랑과 감사와 기쁨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한없는 존경을 보냅니다. 이정호 / 수필가이아침에 철수 아들 철수 화요일 저녁 정신 연령
2026.08.27. 18:53
입추가 지났지만 아직도 무더위는 기승을 부린다. 그래도 계절은 더위에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간다. 가을이 깊어지면 우리 집 처마 밑에는 감이 주렁주렁 매달렸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잘 익은 감의 껍질을 얇고 매끄럽게 돌려 깎아,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에 줄줄이 끼워 매달았다. 햇살이 비껴가는 그늘진 바람길에 달아두면 떫고 딱딱했던 감은 서서히 속살을 부드럽게 익히며 겉부터 꾸덕꾸덕 말라갔다. 바람을 맞고 시간이 얹힐수록 떫은맛은 사라지고 표면에 하얀 분이 피어오르면 깊은 단맛이 배어든다. 기다림 끝에 비로소 완성되는 맛이다. 어린 시절 오빠와 나는 아무도 보지 않는 틈을 타 곶감 줄 밑에서 까치발을 들고, 맨 아래 매달린 곶감부터 몰래 한 입씩 베어 물곤 했다. 말랑한 과육이 입안 가득 퍼지면 세상에 그것보다 더 맛있는 것은 없었다. 남은 곶감은 다시 조심스레 걸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시치미를 떼었다. 줄이 비어 있는 것을 두 분이 모를 리 없었다. “허허, 어떤 도둑고양이가 와서 이렇게 맛있는 곶감을 홀랑 먹고 갔을꼬.” 우리 남매의 엉성한 속임수에 속으신 것이 아님을 어린 마음에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철없는 손주들을 나무라지 않는 너른 품이었고, 정성껏 말려낸 단맛을 기꺼이 내어주고 싶었던 넉넉한 마음이었다. 돌이켜보면 오빠와 몰래 먹었던 것은 곶감이 아니라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자애로운 사랑이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곶감을 만드는 풍경도 달라졌다. 이제는 시장에 가면 사철 곶감을 손쉽게 살 수 있고, 냉장·냉동 기술은 계절의 맛마저 붙잡아 둔다. 모든 것이 편리해졌지만 기다림의 시간은 우리 삶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있다. 우리는 시간을 건너뛴 채 결과부터 원하고, 깊어지기도 전에 결실을 재촉한다. 비워 내고 견디는 과정 없이 얻은 달콤함이 어딘가 허전한 것은, 그 안에 시간이 빚어낸 깊이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곶감이 익어가는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인생의 숙성에 대해 생각한다. 감은 나무를 떠난 뒤에도 긴 시간을 견뎌 깊은 맛을 완성한다. 사람도 다르지 않다. 젊은 날에는 자신을 드러내기에 바빴고, 작은 상처에도 쉽게 아파하며 떫은맛을 내곤 했다. 그러나 세월의 비바람을 지나며 마음의 껍질을 벗겨내고, 욕심을 덜어내며 조급함을 말리다 보면 어느 순간 타인을 품을 수 있는 깊이가 생긴다. 어릴 적 조부모님이 도둑고양이 핑계를 대며 모른 척 웃어주셨던 그 너른 품처럼, 나이가 든다는 것은 어쩌면 내 삶의 곶감 줄에서 누군가 마음껏 단맛을 따 먹을 수 있도록 밑자리를 내어주는 일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그렇게 익어간다. 가을바람 속에서 시간을 견디며 깊어지는 곶감처럼, 나 역시 세월이 쌓일수록 곁에 있는 이들에게 따뜻한 단맛을 나누는 사람으로 익어가고 싶다. 곶감은 그저 감이 마른 것이 아니다. 시간을 견디며 단맛을 품은 사랑의 흔적이다. 올가을에는 나도 감을 깎아 발코니에 매달아 보리라. 김윤희 / 수필가이아침에 곶감 도둑고양이 핑계 냉동 기술 가면 사철
2026.08.26. 18:17
유튜브 화면 위로 푸치니의 아리아 ‘그대 찬 손’이 흐른다. 감미로운 음률은 22년 전 어느 하루 기억을 오롯이 불러온다. 그때, 훗날 남편이 된 론과 렌터카로 유럽을 여행하고 있었다. 뮌헨에서 빈을 향해 가는 길에 잘츠부르크에 들렀다. 고풍스러운 골목길에 빠져 걷다 보니 배가 출출해져 왔다. 중세의 품격이 느껴지는 맥도날드 간판이 보였다. 론이 햄버거라도 먹자며 식당에 들어서 주문할 때, 나는 빈에 가서 근사한 식사를 하겠다고 미루었다. 이윽고 빈에 들어섰다. 웅장한 국립 오페라 극장이 눈에 들어왔다. 벽면에 걸린 라보엠 포스터를 보자 가슴이 벅차올랐다. 예술의 도시에서 좋아하는 작품을 마주하는 데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서로 눈빛만으로 마음을 확인한 우리는 곧장 극장으로 향했다. 4유로짜리 입석 티켓은 있었다. 두세 시간이 남았지만 망설이지 않고 줄을 섰다. 허기가 밀려왔다. 한 사람은 자리를 지켜야 했기에 직원에게 혼자 나가 먹을 것을 좀 사와도 되겠냐고 묻자, 나가면 재입장은 절대 불가라 했다. 금강산도 식후경, 진리였다. 4유로 오페라를 위해 허기를 삼키는 동안 햄버거 생각으로 예술적 허세는 무너져 내렸다. 결코 내 배고픔을 달래주지 못할 예술의 가치와 당장 허기를 채워줄 빵 한 조각 사이에서 나는 갈피를 잡지 못했다. 머리에선 화려한 극장 안의 선율을 쫓고 있었으나, 텅 빈 뱃속이 전해오는 아우성에 무력하기만 했다. 드디어 입장, 입석 자리는 극장 천장과 거의 맞닿는 곳이었다.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객석 가까이 무대는 장난감 세트 같았다. 하지만 오페라 본고장 국립극장에서 푸치니 ‘라보엠’을 감상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설레었다. 객석에 불이 꺼지고 음악이 시작되었다. 둥근 천장을 타고 흐르는 푸치니의 완벽한선율에 배고픔도 잠잠해졌다. 단돈 4유로 입석 표로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다니, 그저 기뻤다. 론과 처음 나선 여행, 고단함마저 낭만이 되어 가슴 뿌듯했다. 그러나 배고픔과 입석의 고단함은 낭만이라는 감정으로 포장되지 않았다. 다리는 저려 왔고 허기와 피로로 온몸이 떨렸다. 가난 속에서 서로의 체온에 기대는 무대 위 연인들처럼, 나 역시 론에게 온전히 기대어 있는 동안 오페라는 4막에 접어들었다. 무대 위 차가운 다락방에서 미미가 결핵과 굶주림으로 숨을 거두던 순간, 피로와 허기에 지친 나 역시 무너져 내렸다. 입석 객석에서 미미라도 된 듯 시야가 흐려지고 사방의 소리가 잦아들더니 나는 그대로 차가운 바닥에 쓰러지고 말았다. 가난한 루돌포가 미미를 안고 절규할 때, 론은 나를 업고 얼마나 떨었을까.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극장 로비 벤치에 기대있었다. 나와 첫 유럽 여행을 계획하며 준비한 프러포즈로 나를 놀라게 했던 다정한 남자. 당황한 론은 미국에 사는 의사 형에게 전화해 상황을 알렸다. 형은 공복 증후군이니 당장 식당으로 가라 했단다. 어느새 일흔이다. 되돌아보니 인생의 눈부신 순간은 예고 없이 찾아온 소동 속에 있었다. 허기마저 아름답게 물든 그때가 그립다. 이정숙 / 수필가이아침에 라보엠 추억 라보엠 포스터 입석 객석 4유로 오페라
2026.08.25. 18:32
대학 졸업과 동시에 결혼했다. 낯선 이국땅에 남편 하나만 믿고 발을 디뎠다. 내 편은 오직 남편 한 사람뿐이었다. 작은 일 하나까지도 의논하며 살았다. 시집오던 날, 친정어머니는 내 손을 꼭 잡고 말씀하셨다. “남편에게 순종하며 살아라.” 나는 그 말을 지켜왔다. 착해서가 아니라 부모님의 당부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나보다 열 살 많은 남편은 어린 색시를 많이 가르쳐주고, 참아주고 도와주었다. 고마운 마음이 먼저였고 순종은 자연스러웠다. 남편이 결정하면 나는 따랐다. 그렇게 사는 것이 부부의 길이라 믿었다. 그러던 어느 해 겨울, 예순을 넘긴 나이에 처음으로 내 주장을 내세웠다. 지금으로부터 17년 전 일이다. 연말이면 사돈댁에 작은 정성을 전하는 것이 내 기쁨이었다. 그해에는 직접 숄을 떠 선물하기로 마음먹고, 공예품점에서 검은색과 짙은 보라색 털실을 골랐다. 텔레비전 앞에 앉아 뜨개질하고 있는데, 남편이 말했다. “뜨개질하지 마.”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러나 이튿날 남편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내가 하지 말랬지! 당신, 이혼당하고 싶어?”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이혼이라니. 40년 가까이 함께 산 사람에게 너무 기가 막힌 말이었다. 억울함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그날 나는 처음으로 남편에게 대들 듯 말했다. “언제까지 당신 시키는 대로만 하고 살아야 해요?” 내 입에서 나간 말이었지만 정작 내가 더 놀라 얼른 부엌으로 들어갔다. 남편의 얼굴을 마주하고 끝까지 대들 용기까지는 없었기 때문이다. 남편도 예상치 못한 반격에 당황했는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적막이 흐르는 부엌에서 나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가슴은 세차게 뛰었지만, 마음은 이상하게도 가벼웠다. 그날부터 나는 남편이 잠든 밤에 조용히 일어나 숄을 완성했다. 세 개의 숄이 가지런히 놓였을 때 그것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내 안의 작은 독립 선언이었다. 세월이 흐르며 나는 그날의 일을 다르게 이해하게 되었다. 이국땅에서 서로가 전부였던 세월이었기에, 남편은 내 시선이 털실에만 가 있는 것이 서운했을지도 모른다. 무뚝뚝한 남자의 질투가 ‘이혼’이라는 서툰 말로 튀어나왔던 것이다. 이제 남편은 노쇠해졌다. 자연스럽게 우리의 임무는 교대되었다. 지금의 나는 예순의 그 날보다 훨씬 자유롭다. 여전히 남편은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지만 더는 그의 눈치만 보지 않는다. 나는 하고 싶은 일을 당당하게 즐기며 산다. 지금은 그가 나를 의지한다. 세월은 그렇게 균형을 바꾸어 놓았다. 가끔 실 뭉치를 손에 쥐면 그 보랏빛 숄이 떠오른다. 그날의 작은 반항은 우리 부부 사이에 금이 간 사건이 아니었다. 오히려 한 단계 깊어지는 매듭이었다. 순종만으로는 사랑이 완성되지 않는다는 것. 사랑은 이해를 통해 서로의 자리를 조금씩 내어주며 자라는 것임을 나는 그 보랏빛 숄에서 배웠다. 엄영아 / 수필가이아침에 보랏빛 매듭 이튿날 남편 남편 하나 보라색 털실
2026.08.18. 18:26
LA 다저스가 월드시리즈 우승을 향해 달려가던 경기를 TV로 보고 있었다. 푸른 유니폼으로 물든 화면과 함성이 눈앞에 펼쳐지는 순간, 기억은 어느새 2017년 가을로 돌아갔다. 다저 스타디움을 가득 메운 수만 명의 관중 속에 나도 한 사람이었다. 플레이오프 최종전을 며칠 앞두고 다저스의 열혈 팬인 아들이 함께 가자고 했다.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어지는 말에 깜짝 놀랐다.“엄마 표도 이미 샀어.” “얼마인데?” “2000달러.” 순간 말을 잃었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하지만 아들은 “엄마, LA에서 열리는 다저스 플레이오프 결승전을 다시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래서 엄마랑 꼭 같이 가고 싶었어. 엄마한테 주는 선물이야.” 그 한마디에 더는 사양할 수 없었다. 아들은 내게 평생 한 번뿐인 하루를 선물해 주었다. 경기 당일. 오래전부터 갖추어 둔 다저스 티셔츠와 재킷, 모자를 쓰고 경기장으로 향했다. 푸른 물결로 뒤덮인 거대한 구장. 수많은 관중 사이에 앉아 그 자리에 나를 데려와 준 아들을 바라보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차올랐다.‘나는 참 행복한 엄마구나.’ 이 기쁨을 온전히 누리는 것이 아들에게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화답이라 생각했다. 나도 다른 사람들 못지않게 목이 쉬도록 응원했다. 사람들의 환호에 맞춰 일어나고, 손뼉 치고, 두 손을 흔들며 힘껏 소리쳤다. 나의 함성은 선수들을 향한 응원이기도 했지만, 아들에게 보내는 감사의 외침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던 순간이었다. 무언가가 내 오른손등을 ‘툭’ 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주변 사람들이 일제히 몸을 던졌다. 홈런공이었다. 나는 무슨 일인지도 모른 채 얼떨결에 허리를 숙여 손을 뻗었지만 이미 공은 자취를 감춘 뒤였다. 순식간에 수많은 손이 한꺼번에 몰려들었고, 결국 공은 바로 옆 사람의 손에 들어갔다. 조금만 빨랐더라면. 아쉬움이 스쳤다. 그러나 이내 웃음이 번졌다. 그 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내 손을 찾아온 홈런공이라니. 공은 다른 사람 손에 들어갔지만, 먼저 내 손등에 인사를 남기고 다녀간 셈이었다. 나는 아들을 끌어안으며 말했다. “브라보! 홈런공이 엄마 손을 맞추고 갔네. 이것도 엄마 평생 자랑거리다. 고마워, 아들.” 아들은 내가 기뻐하는 모습을 보며 더 환하게 웃었다. 순간 내 눈에 가장 빛난 것은 홈런공이 아니라 아들의 미소였다. 그날 다저스는 승리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의 기억 속에서는 패배한 경기로 남아 있지 않다. 수만 명이 한마음으로 일어나 응원하고, 낯선 사람들과도 기쁨과 아쉬움을 함께 나누던 광경. 스포츠가 사람들을 하나로 묶는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았다. 지금도 야구를 보고 있으면 관중의 함성 사이로 아들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엄마, 다시 이런 경기를 볼 기회가 없을지도 몰라.’ 그날의 티켓은 경기장의 문을 열어주었다. 그러나 아들이 건네준 사랑의 입장권은 지금도 내 마음의 문을 열어 준다. 이영신 / 수필가이아침에 입장권 사랑 다저스 플레이오프 다저스 티셔츠 엄마 평생
2026.08.16. 18:30
이민 연차가 오랜 분들, 이젠 안정적인 분들께 종종 이런 말을 듣는다. “이제 겨우 밥이나 좀 먹게 되었지요.” 겸손한 안분지족(安分知足)이다. 그 밥, 아직도 살만한 기준이 되는 잣대로 쓰인다. 삼시세끼 밥을 먹던 우리 세대에겐 밥을 먹는 게 곧 살아가는 일이었다. 서로 마주치면 “식사 하셨습니까?” 하고 안부하던 시절이 있었다. 요즈음 밥은 갈수록 홀대를 받는다. 드넓은 캘리포니아 곡창지대에서 질 좋은 쌀을 공급받고 있어서 귀한 줄 모르게 되었다. 다이어트 열풍 속에서 탄수화물 집합체인 밥은 접시 한 귀퉁이의 흰색 데커레이션으로 남은 채 버려도 되는 음식물이 되었다. 지난 주일 교회에서 배식하고 밥이 남았다. 큰 솥 한 솥이 남아 봉지봉지에 담겨 구원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교우들 대부분이 밥에 눈길조차 주지 않고 오히려 떠맡을까 봐 전전긍긍한다. 우리집에도 밥을 안 먹는 이가 있어서 쌀을 아예 들이질 않는다. 그래서 우리 집엔 밥이 귀하다. 내가 기꺼이 한 봉지 얻으니 다른 교우들도 마지못해 가져가서 밥이 눈 앞에서 버려지는 참사는 없었다. 맨밥을 얻어가며 나처럼 좋아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고 주변에서 놀린다. 오래전 김지하 시인의 글에서 ‘밥은 하늘’ 운운한 시를 읽은 뒤엔 더욱 밥을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 교회에서 얻어온 밥 5공기 분량이 냉장고에 들어있어서 마음이 쓰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김치볶음밥을 만들고, 한봉지의 밥을 볶아선 둥글게 뭉쳐 김자반을 뿌려 주먹밥을 만들었다. 주먹밥에 김이 잘 안 붙어서 억지로 붙인 후 한 개씩 랩으로 쌌다. 한 공기 분량의 밥으로는 유부초밥도 만들었다. 김치 없이 야채와 달걀과 햄을 넣은 볶음밥도 했다. 밥전도 했다. 더 얻어왔으면 누룽지도 만들 수 있었다. 밥을 버리지 않고 모두 활용한 뿌듯함에 스스로 기특했다. 예전에 감동하였던 김지하 시인의 '밥은 하늘입니다'시를 다시 읊조려본다. '하늘을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같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을 몸 속에 모시는 것 아아 밥은/ 모두 서로 나눠 먹는 것' 함께하고 나누어야 하는 것이 어찌 밥뿐이겠는가? 식은밥 한 덩이에서도 배울 게 있어 감사하다. 이정아 / 수필가이아침에 덩이 김지하 시인 오래전 김지하 남아 봉지봉지
2026.08.13. 1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