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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같은 차, 다른 페달

Los Angeles

2026.04.28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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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젊은 날의 결혼 생활은 내가 그려 두었던 풍경과 사뭇 달랐다. 햇살이 쏟아지는 탄탄대로일 줄 알았으나, 막상 들어선 길은 짙은 안개가 깔린 미로에 가까웠다. 어떤 날은 흔들리는 다리를 건너는 듯 위태로웠고, 또 어떤 날은 끝이 보이지 않는 사막을 걷는 것처럼 막막했다. 그 긴 터널을 지나며 사랑이 반드시 온기만을 품은 감정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렇게 서늘한 계절을 통과해 우리는 어느덧 ‘함께 살아낸 세월’이라는 정거장 앞에 서 있었다.
 
남편은 마음을 말로 꺼내놓는 일이 지독히 서툰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말 대신 소리 없는 손길로 사랑을 표현했다. 아침마다 식탁 위에 놓여 있던 따뜻한 차 한 잔, 헐거워진 문손잡이를 말없이 고쳐 놓던 투박한 손, 개스 스토브를 반짝이게 닦아 놓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앉아 있는 모습…. 그 조용한 행동들이야말로 그의 언어였고, 가족을 지키려는 한 사람의 평생의 문법이었다.
 
말이 닿지 않아 서로 먼 섬처럼 느껴지던 날도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사랑이란 이해받는 기쁨만이 아니라, 이해받지 못하는 고독까지 품고 건너가는 여정임을 배워야 했다.
 
그런데도 나는 그의 기척을 지팡이 삼아 하루를 버텼다. 다정한 말이 없어도, 같은 공기 속에 그가 숨 쉬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안도하며 살았다. 마치 칠흑 같은 밤길을 달릴 때 앞이 보이지 않아도, 발밑의 도로가 이어져 있음을 믿는 것처럼 우리의 삶도 보이지 않는 신뢰로 연결되어 있었다.
 
이제 그의 손등에는 굵은 핏줄이 드러나고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지도를 그린다. 그 거칠어진 손을 잡고 있노라면 문득 명치 끝이 아릿하다. 이 손과 발이 우리 가족을 위해 얼마나 많은 바람을 막아내고, 얼마나 무거운 책임을 짊어졌을까. 그의 늙어감은 더는 슬픔이나 두려움이 아니다. 그것은 고개를 숙이게 하는 경건한 존경이며, 마음 깊이 새겨진 감사다. 함께 늙어간다는 것은 서로의 낡아짐을 외면하지 않고, 그 속에서 삶의 진실을 함께 발견해가는 성스러운 일임을 이제야 알 것 같다.
 
우리는 인생이라는 같은 차에 올라 서로 다른 페달을 밟으며 여기까지 왔다. 나는 조급한 마음에 자주 가속 페달을 밟았고, 그는 삶이 흔들릴 때마다 브레이크를 밟아 균형을 잡았다. 속도를 맞추지 못해 덜컹거리던 순간도 있었지만, 누군가 제때 멈추어 주지 않았다면 이 긴 길을 완주하지 못했을 것이다. 서로의 역할이 달랐기에 우리는 비로소 같은 방향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언젠가 이 여정도 멈출 날이 오겠지만, 그때 나는 담담히 이렇게 말할 것 같다.
 
“그때는 참 외로웠지만, 돌이켜보니 그 모든 시간이 당신 덕분에 따뜻했습니다.”
 
 아직 우리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속도는 느려졌지만, 우리가 향하는 풍경은 오히려 더 선명해졌다. 나는 여전히 설레는 마음으로 가속 페달을 밟고, 그는 곁에서 말없이 브레이크 위에 발을 올린 채 나를 지킨다. 너무 빠르지도 늦지도 않게, 우리는 오늘도 서로의 호흡에 발을 맞추며 생의 아름다운 길 위를 달리고 있다.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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