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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그리움이 익어가는 시간

Los Angeles

2026.02.22 18:11 2026.02.22 1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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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비가 며칠째 내린다. 빗소리에 섞여 공기가 한결 차가워졌다. 저녁을 조금 일찍 마친 탓인지 허기라기보다는 마음이 출출했다. 말하지 않아도 생각을 알아챈 나는 자연스럽게 에어프라이어를 꺼내 고구마를 구웠다. 기계가 낮은 숨결로 윙윙거리다 멈추고 잠시 후 ‘땡’ 하는 소리가 고요한 집 안을 울렸다.
 
에어프라이어 문을 여는 순간 잘 익은 고구마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콤한 향이 김과 함께 퍼지며 집 안의 공기를 부드럽게 데웠다. 뜨거운 고구마를 이 손에서 저 손으로 옮겨 가며 껍질을 벗기는데 노란 속살을 품은 그 작은 고구마 하나에 오래된 얼굴들이 겹겹이 떠올랐다. 맛은 혀에서 시작되었지만 기억은 마음 깊은 곳에서 먼저 깨어났다.
 
학창 시절, 친구들과 길모퉁이에 서서 사 먹던 군고구마가 생각났다. 얼굴에 연탄 가루를 묻힌 채 말없이 고구마를 건네던 아저씨의 손길에는 하루를 견뎌낸 노동의 무게가 실려 있었다. 따뜻한 종이봉투 너머로 전해지던 온기 속에는 말로는 다 하지 못한 삶의 사연들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던 것 같다. 87세의 남편도 그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 잠시 생각에 잠긴다. 그의 표정에는 어느새 칠십 년 전의 시간이 천천히 다가와 있었다.
 
고구마 하면 무엇보다 먼저 생각나는 얼굴은 할머니다. 겨울밤, 화롯불 앞에 둘러앉아 있으면 할머니는 재 속에 묻어 두었던 고구마를 툭툭 털어 내 손에 쥐어 주셨다.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던 그 따끈함은 지금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부엌 아궁이 장작불 위에서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고구마가 익어가는 소리가 들리면 할머니는 부엌 쪽문을 열고 뭉근하게 구워야 맛있다면서 “고구마 꺼내서 잔불로 구워라” 하셨다. 부엌일을 돕던 언니가 다 구워진 고구마를 방으로 들고 들어올 때 퍼지던 구수하고 달큰한 냄새는 어린 나를 황홀하게 만들었다. 그때 먹던 고구마는 왜 그렇게 달았을까. 아마도 불의 온기만이 아니라 기다림과 정성, 그리고 함께 나누던 마음이 곁들여졌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참 편해졌다. 버튼 하나면 군고구마가 완성되는 시대다. 불을 지피며 재를 헤치던 수고는 사라졌고 시간은 한결 단축되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같은 말을 한다. 고구마는 역시 삶는 것보다 굽는 게 제일이라고. 그을린 껍질에서 배어 나오는 향, 그 속에 스며든 지난 시간의 기억까지 함께 씹으니 오늘 밤의 고구마는 유난히 더 달다.
 
에어프라이어 너머로 흐르는 이 맛은 단순한 간식이 아니다. 그것은 세월을 건너온 손길과 얼굴들, 그리고 함께 늙어가는 우리의 시간이 포개진 따뜻함이다. 비 내리는 밤, 고구마 하나로 데워진 마음은 조용히 말한다. 어떤 그리움은 이렇게, 천천히 익어야 제맛이 난다고.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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