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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아침에] 비누 향기로 남은 사랑

Los Angeles

2026.03.11 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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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영아 수필가

엄영아 수필가

인연의 시작은 우연이었지만, 그 여운은 오래 남았다. 지인의 소개로 만난 날, 나는 그녀를 ‘삼월 언니’라 불렀다. 칠월에 태어난 친구는 ‘칠월 언니’, 시월생인 나는 자연스레 ‘시월이’가 되었다. 달 이름으로 부르는 호칭은 금세 우리 사이의 거리가 되었다.
 
처음 만난 날, 그녀의 첫인상은 참 따뜻했다. 언니는 내 어깨에 빨간 숄을 조심스레 둘러주었다. 직접 뜬 것이라 했다. 한 코 한 코에 담긴 온기가 어깨를 타고 전해졌다. 우리는 칠십 중반의 나이를 잠시 잊고, 열일곱 소녀로 돌아가 첫사랑 이야기에 웃음이 터졌고, 그 웃음은 유난히 맑았다.
 
그러나 그 웃음 뒤에 언니의 삶은 오랜 인내의 연속이었다. 언니의 남편은 스무 해가 넘도록 뇌졸중을 앓았다. 언니는 그 시간을 묵묵히 함께 견뎠다. 휠체어를 밀어 공원과 바닷가를 거닐었고, 남편이 좋아하는 빵을 사기 위해 먼 길도 마다하지 않았다.
 
언니는 늘 호박꽃을 닮고 싶다고 했다. 넓은 잎 아래 수수하게 피어나 아픔을 견딘 끝에 기어이 열매를 맺는 꽃. 하지만 세월은 그 열매마저 서서히 약하게 만들었다.
 
남편의 기력은 급격히 쇠했다. 요양원으로 하루 두 번 발걸음을 옮기며 식사를 거부하는 남편을 지켜보는 언니의 마음은 말라갔다.
 
얼마 뒤 언니에게서 메시지가 왔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스칼릿 오하라가 했던 말이 떠오르네요.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떠오를 테니까. 이제는 남편의 거친 숨소리에도 겁나지 않아요. 그냥 그러려니 해요. 77세 희수의 센티멘털인가 봐요.” 이별을 준비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막상 다가온 시간은 예고 없이 시렸다.
 
사랑이란 결국 함께 늙어가는 일인지도 모른다. 언니는 남편의 가장 빛나던 시절부터 가장 초라해진 순간까지 그 모든 시간을 끝까지 동행했다.
 
운명은 묘하게도 정교했다. 동부에서 달려온 두 아들이 가족들과 추수감사절을 보내고 각자의 집으로 떠나기로 한 날 아침, 남편은 마지막 고비를 맞았다. 위독하다는 연락 앞에서 언니는 직감했다. 아들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건네고 홀로 남을 아내를 위해 두 아들의 손을 남겨주려는 남편의 배려였음을.
 
그렇게 남편은 사랑하는 이들의 배웅 속에 조용히 떠났다. 고통은 끝났지만, 남겨진 이들의 가슴에는 쉽게 가라앉지 않는 그리움이 남았다.
 
 장례를 마친 뒤, 서울에서 온 딸이 욕실에서 소리 없이 울고 있었다.
 
“엄마, 비누에서 아빠 냄새가 나요….”
 
사람은 떠나도 향기는 남는다는 말을 그날 처음 실감했다. 비누 한장에 스민 체취가 큰 파도가 되어 마음을 흔들었다.
 
 언니는 말했다.
 
“내 몫의 사랑은 다 했으니, 남은 시간은 잘 살아야지요.”
 
그 말에는 상실을 견뎌낸 사람만이 지닐 수 있는 담담함이 있었다. 이제는 서로의 빈자리를 보듬으며 남은 길을 같이 걷고 있다. 우리의 노년이 너무 쓸쓸해지지 않도록.
 
삼월 언니는 여전히 호박꽃 같은 사람이다. 화려하지 않아도 낮은 곳에서 제 몫을 다하고, 끝내 열매를 남긴 사람. 그 사랑은 이제 조용한 향기로 남아 언니의 뒷모습을 따라온다.  

엄영아 /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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