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촘촘히 채우며 / 나비가 꽃에 앉듯 사뿐이 내렸다 / 마른 갈대 숲에도, 앞집 지붕 위에도 / 우리집 벚나무 붉은 열매 위에도 / 잠들은 당신의 창가에도 소리없이 내렸다 / 어디에나 누구에든 / 소음과 함성과 절제된 어느 상황에도 / 공평히 내렸고 같은 무게로 쌓였다 // 하늘 가득 흰 꽃이 내렸다 / 사랑이 떠나고 미움이 가득한 세상 / 아무것도 모르는듯 흐트러짐 없이 내렸다 / 우리 모두는 제 길로 떠나 갔지만 / 같은듯 다른 생각으로 멀어졌지만 / 너에게도 나에게도 눈이 내렸다 / 거리에도 나무에도 소복이 쌓였다 / 들에도 언덕에도, 저 편백 나무 숲에도 / 하얀 하늘이 내려 앉았다 / 솜털같은 포근한 세상이 내렸다 // 눈을 뜨고 나갈 채비를 한다 / 먼길 떠나는 새들의 울음도 멈친 새벽 / 어둠은 채 가시지 않았는데 / 검은 때를 벗고 하얀세상으로 걸어야겠다 / 너의 향기 가득한 눈꽃 세상으로 창가에 앉아 바깥 세상을 바라 본다. 온 땅을 덮은 하얀 눈은 바라보는 나의 마음까지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 하얀색은 무색이 아니다. 어느 곳에 칠해져도 하얀색은 새로운 여백을 창출해낸다. 답답한 풍경을 시원한 한폭의 수묵화로 바꾸어 놓는다. 색이 아니면서도 가장 강렬한 색이기도 하다. 나무를 온통 눈꽃으로 만들어버리기도 하고, 지붕의 색을 순식간에 하얗게 바꾸어놓아 온 동네를 눈세상으로 만들어 놓는다. 잠 못 이루는 당신의 창가에도 소복히 쌓인다. 눈을 비비고 일어나는 당신의 시야에서 색을 빼앗아가기도 한다. 온통 백색의 세상이다. 이렇듯 단번에 세상을 바꿔 놓는 것은 아마도 눈이 아닐까 생각한다. 어떤 유기적인 힘도, 어떤 힘센 사람의 노력도, 첨단 장비의 효과도 아닌 그저 부드럽고 소리 없이 천천히 세상을 바꾸어 놓는 하얀 눈. 참으로 놀랍다. 패인 웅덩이를 덮어주기도하고, 꺾인 가지를 감싸기도 한다. 하얀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속의 미움도, 상처도 하얗게 차유되는 듯하다. 높낮이도 없고 밝고 어두움도 없는듯, 눈은 우리에게서 공평과 절제와 겸손을 말없이 가르치고 있다. 저기 서 있는 편백나무도 새롭게 흰꽃을 피웠다. 가지마다 소담히 피워낸 눈꽃은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에도 꽃을 피운다. 잠깐 피었다. 사라질 꽃이지만.그 꽃이 우리에게 주는 편안함과 고요함은 어디에서도 느낄 수 없는 행복이 아닐 수 없다. 세상에서 찌든 불신과 허망한 묵은 때를 하얀 눈으로. 씻어야겠다. 하얀 눈꽃향기로 가득 채워야겠다. 어떤 말은 굴러 가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마음에 와 박히는 말이 있더라 어떤 말은 생각 위로 떠 다니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생각 속으로 잠겨오는 말이 있더라 어떤 말은 숨겨 지는 말이 있고 어떤 말은 꿈에서라도 들려지는 말이 있더라 셀 수 없는 말을 내뱉고 돌아오는 길 가슴에 남겨진 말 하나 거둘 수 없더라 창가에서 마주한 눈꽃세상 힘든 마음을 어루만져 주더라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눈꽃 향기 눈꽃 향기 눈꽃 세상 우리집 벚나무
2024.12.23. 14:22
손편지 한 통을 받았다. 낯익은 글씨다. 조심스럽게 개봉을 하면서 벌써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반가웠다. 위진록 선생님께서 보내주신 편지다. 읽기 시작하기도 전에 눈익은 손글씨를 보는 것만으로도 감동이다. 한 글자 한 글자 또박또박 정성껏 쓴 손편지를 받아본 것이 언제였던가 가물가물하다. (아, 황갑주 시인께서 생전에 가끔 손편지를 보내주곤 하셨지.) 나는 제대로 안부도 여쭙지 못하고 사는데, 손편지를 보내주시니, 사람 구실 제대로 하라는 가르침을 주시는 듯해서 몹시 부끄럽다. 반성한다. 손글씨로 답신을 쓰면서 많은 생각을 한다. 올해 95세인 위진록 선생님은 여전히 건강하게 책을 읽고, 클래식 음악을 듣고, 가끔 글도 쓰신다. 보내주신 손편지를 뵈니 건강하심을 바로 알겠다. “저는 아시는 바와 같이 95세, 백두옹(白頭翁)이지만 여느 때처럼 보고, 쓰고, 생각하며 잘 늙어가고 있습니다. (중략) 아시는 바와 같이 저는 ‘컴맹’ 아닙니까. 그래서 늘 이렇게 손편지로 소식을 전하면 손편지로 회답하는 분이 있어 흐뭇할 때가 있습니다. 한국의 어떤 대학교수와는 수년 전부터 지금까지 60통 가까운 손편지가 오갔지요. 어떤 사람은 지금이 어떤 세상이라고 손편지냐고 하지만, 편지 보낸 사람의 육필(肉筆)을 볼 수 있는 손편지가 제일이라 생각해, 손편지로 근황을 전합니다. 환절기에 내외분 건강하세요.” 위 선생님 편지의 한 구절이다. 선생님께서 손편지를 쓰시는 것은 컴맹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편지 보낸 사람의 육필(肉筆)을 볼 수 있고, 사람 냄새를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사라져가는 근본적 가치를 소중하게 여기는 마음이다. 지금은 글씨를 손으로 쓰는 촌스러운(?) 시대가 아니다. 문명이 인간을 소외시키는 시대, 인간이 기계에 휘둘리는 시대… 손으로 글씨를 쓰는 사람이 희귀 인간 취급을 받고,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휴대전화 글자판을 손가락으로 누르는 사람들이 지배하고 있는 편리한 세상이다. 너무도 편리하다. 생각해보면 그동안 전화, 비퍼, 이메일, 휴대전화 문자, 카톡 등으로 계속 편리해져 왔고, 짧고 간단명료해졌다. 군더더기 없이 요점만 간단히! 앞으로도 날이 갈수록 더 편리하고 짧아질 것이다. 문제는 그래서 우리의 삶이 그만큼 여유롭고 행복해졌냐 하는 것인데, 전혀 그런 것 같지 않다. 오히려 더 바쁘고 건조해진 것으로 보인다. 손글씨에 스며있는 따스한 온기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그저 ‘아날로그 꼰대’의 뒤돌아보기가 아니다. 보다 본질적인 사람다운 삶에 대한 성찰, 정성 어린 관계의 소중함, 한없는 편리함의 함정, 애틋한 정겨움 등을 곱씹어 보는 마음이다. 느림, 여유, 낭만, 자부심, 배려, 공생 등등 잊혀가는 소중한 가치들에 대한 그리움이기도 하다. 사람 중심의 가치 체제를 바로 세우는 운동이라도 하고 싶어진다. 신언서판(身言書判) 같은 옛날 가치를 되살리자는 말이 아니라, 사람다움과 각 개인의 개성을 살리고 지키기 위해서는 기계에 너무 의존하지 않아야겠다는 말이다. 사람이 기계의 머슴이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진정한 소통이란 마음과 마음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것일 텐데, 그걸 기계에 맡길 수는 없다. 긴말 줄이고, 올해 감사의 계절과 연말연시 고마운 사람들에게 보내는 편지는 손글씨로 또박또박 써서 보내야겠다.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손편지 향기 손편지로 소식 휴대전화 글자판 선생님 편지
2023.11.16. 20:08
미나리에는 봄의 향기가 가득하다. 공심채처럼 속이 빈 줄기를 살짝 데쳐 입에 넣고 씹으면 아삭하면서 싱그럽다. 식품공학자 최낙언은 미나리의 맑고 시원한 향기가 피톤치드를 구성하는 물질과 닮았다고 설명한다. 숲속에서 숨을 들이쉴 때 마음을 정화하는 듯 울려 퍼지는 바로 상쾌한 향기다. 미나리의 이런 강한 향미를 좋아하는 나 같은 사람도 많지만 사람에 따라서는 싫어하기도 한다. 냄새 감각은 유전적 차이가 크다. 진화생물학 박사이며 저술가인 밥 홈즈는 사람의 냄새 수용체가 약 400개이지만 이들 중 30%가 사람에 따라 다르다고 말한다. 미나리를 맛보고 봄의 향기를 느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휘발유 냄새를 떠올리는 사람이 있는 건 그런 이유에서다. 고수에서 풀 향기를 느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고 비누와 벌레를 연상하며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미나리가 사람을 위해 이런 향기물질을 만드는 건 아니다. 미나리에게 향기물질은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저항 수단이다. 그래서 산이나 들판에서 자란 돌미나리에는 편안한 환경에서 자란 미나리보다 향이 더 강하다. “미나리는 어디서든 잘 자라.” 2년 전 배우 윤여정이 아카데미상 여우조연상을 받아서 화제가 됐던 영화 ‘미나리’에 나온 대사다. 영화를 보지 않은 사람도 알고 있을 정도로 인상 깊은 한마디였다. 영화에서 그려낸 것처럼 낯선 이국에서 정착하려는 한국인 가족의 삶에는 고난이 가득했다. 본래 고국을 떠난 이민자의 삶이란 척박한 땅에서 어떻게든 뿌리 내리려고 애쓰는 미나리와 비슷하다. 겉으로 보기에 미나리는 그저 아무 곳에서나 잘 자라는 강인한 생명력을 가진 식물로만 보인다. 하지만 미나리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다. 주변의 위협과 맞서 싸우기 위해 향기 물질을 만들어내고 환경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미국인의 눈에 먹어 본 적 없는 영화 속 미나리는 생소한 식재료이다. 몰라서 그럴 뿐이다. 그들에게 익숙한 당근, 셀러리, 딜, 쿠민, 회향(펜넬)이 전부 미나릿과 식물로 한 가족이다. 인간은 국적을 따지지만 식재료가 되는 식물에 그런 경계란 있을 수 없다. 먹을 수 있는 것과 먹을 수 없는 것을 지역 식문화마다 다르게 구분해놓았다고 해도 결국 음식이란 인간이 보편적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이다. 차이점보다 공통점이 많은 게 당연하다. 영화 ‘미나리’ 속 이민 가족의 삶을 보면서 누구나 공감하게 되는 것도 인간이라면 누구나 공유하는 그런 보편성 때문이다.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 어디 있을까. 우리는 모두 미나리처럼 고난 속에서도 뿌리내리고 삶을 살아간다. 그 가운데 우리가 만들어내는 삶의 냄새가 봄철 미나리처럼 싱그럽고 상쾌한 향기로 느껴지길 바랄 뿐이다. 나에게도, 당신에게도. 정재훈 / 약사·푸드라이터음식과 약 미나리 향기 미나리 향기 미나리가 사람 봄철 미나리
2023.04.27. 19:17
너의 향기 향기는 오래 남았다 / 봄이어서 더 멀리 퍼졌다 // 꽃이 피어나듯 / 강물이 흐르듯 / 바람이 불어 오듯 / 음악이 흐르듯 / 너는 오고 있다 // 걸어 잠근 겨울 뒤로 / 혹독한 것들 뒤로 / 향기로 다가오는 봄 / 너는 그렇게 오고 있다 // 향기는 오래 남았다 / 까닭도 없이 바람이 불고 / 가슴을 쓸어내듯 / 봄비가 내렸다 // 파릇 파릇 / 살아나는 너의 향기 찌푸렸다 밝아지고, 비가 뿌렸다 난 데 없는 진눈깨비가 흩날렸던 3월의 날들이 지나고 4월의 첫날 환한 아침이 밝아왔다. 어제 밤도 심한 비가 선루프를 두드려 잠이 깨었는데 이렇게 청명한 봄날 아침이라니 믿어지지 않았다. 덱크 난간 위로 몸집이 뚱뚱한 뱁새 한 마리가 봄날 아침을 즐기고 있다. 손에 든 머그에서 풍기는 커피향이 봄날의 향기와 어울려 겨우내 깨어나지 못했던 어두움을 조금은 가볍게 해주었다. 가진 것이 있었다면 잃을 것도 있는 것이 마땅함에도 난 스스로 그 사실을 부정했다. 작은 것을 가졌음에도 그것이 전부라고 믿고 싶었다. 지난 겨울 내내 나의 한계는 깊은 웅덩이를 팠고 나는 그 속에서 외로움을 견디려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깊은 어둠 속에 잠겼다. 봄은 향기로 온다. 아직 꽃이 피지 않았음에도 어디로부터 오는 향기인지. 스치는 바람의 향기에 마음이 편해진다. 나의 산책길은 집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두 길 밖엔 없다. 한길은 현관문을 밀고 나와 왼쪽으로 두 불락을 걸어 다시 오른쪽 길을 따라 걷다 보면 철길 쪽으로 작은 호수가 있고 맞은편 쪽으로는 괘 큰 호수가 펼쳐져 있다. 이 길을 걸을 때마다 널뛰는 마음을 잔잔하게 손잡아주는 호수는 꼭 어머니의 따뜻한 가슴 같다. 눈이 펑펑 내릴 때에도 한겨울 찬바람이 몰아칠 때에도 나는 종종 마음을 내려놓으려 이 길을 찿곤 했다. 오늘 나는 집 건너편 Quintin 길을 지나 어린 시절 동네 앞산 봉오리 같은 언덕을 오르며 봄향기를 맞고 있다. 바다내음 같기도 하고 풀내음 같기도 한 향기를 가슴속에 잔뜩 채우며 하늘과 가까운 곳을 걷고 있다. 혹독한 겨울을 견뎌낸 후 찿아온 봄. 연둣빛을 담은 들풀들이 여기저기 머리를 들고 있다. 지난밤 내린 비로 파릇해진 나무가지들이 꽃눈과 잎눈을 쓸어내고 있다. 이 길은 주말이 아니면 퇴근길에나 저녁 해가 질 무렵 찿아 가는 길이다. 높지는 않지만 제법 석양이 아름다워 기슭에 앉아있자면 멀리 노을이 짙어가는 늦은 저녁부터 밤사이를 넉 놓고 즐길 수 있는 행복한 나의 퀘랜시아다. 얼마 전 갑자기 쏟아지는 빗줄기에 온몸이 젖기도 했지만 그 또한 봄의 향기가 아니던가. 얼굴에 빗줄기는 쏟아지고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집으로 뛰어오는길이 #리틀포레스트 #리틀포레스트 멀기만 했던 기억도 있다. 봄이 오고 있다는 것은 겨우내 움추렸던 마음에도 꽃이 피어나고 있다는 반증이다. 마음속에 잠겨있던 그대라는 그리움이 싹트기 시작하는 4월의 봄. 어디에선가 불어오는 바람의 향기. 봄날의 햇살과도 꼭 닮은 너의 향기였다. (시인, 화가) 신호철신호철의 시가 있는 풍경 향기 향기 향기 한겨울 찬바람 리틀포레스트 멀기
2023.04.03. 16:51
지난주에는 내가 근무하고 있는 중환자실에 안타깝고 애처롭고 숭고한 선택의 죽음이 있었다. 44세의 K는 선천성 기형의 폐를 가지고 태어났다. 온갖 약과 치료법으로 조절하면서 지금까지 살아왔지만 잦은 병원 입원을 피할 수는 없었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병세는 더욱 악화되어 입원 빈도와 심각성은 더욱 커져만 갔다. 사춘기와 청년기, 그리고 장년기를 지내오면서 우울증을 앓게 되고 상황 또한 심각해져 자살 미수 경력도 있었다. 이번에도 심한 호흡곤란으로 그녀가 살고 있는 인근 타운 병원에 입원했다. 여러 가지 정밀검사를 한 결과 폐의 기능이 너무 악화되어 폐 이식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고 우리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폐 이식 팀이 즉각 반응을 하고 필요한 모든 절차를 하나씩 밟기 시작했다. 수많은 혈액검사, 조직검사 등 철저하게 환자의 컨디션을 최고로 만들어 가고 있던 중, 병력에 우울증과 자살시도 전력이 큰 문제가 되었다. 결국 환자의 이 정신질환으로 인해 이식환자의 리스트에서 탈락되었다. 우리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는 호흡곤란으로 인한 일반 사회생활의 제한으로 얻은 우울증이 이토록 위급한 상황에서 생명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결론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법은 엄격했고 현실은 냉정했다. 환자는 이미 호흡기를 달고 위급한 상황에 있었다. 이식환자 리스트에서 누락된 사실을 부모에게 알리고 난 2-3일 후에 환자 부모는 K가 운전면허증에 장기 기증자로 등록했다는 사실을 알려왔다. 곧바로 ‘LIVE ON’ network에 연락을 취했다. 이때부터 K는 우리 병원에서 가장 중요한 환자가 된다. 그녀의 이 결심으로 인해 이제 수많은 환자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폐만 빼고 그녀는 젊고 건강하기에 모든 장기와 조직을 보존하기에 최선을 다한다. 우선 당장 심장과 신장은 기증받을 환자를 스크린해 둔 상태였고, 오후 5시에 수술 방에 가서 장기적출 수술을 받기로 되어있었다. 수술실로 떠나기 전에 가족들이 모두 10명 정도 모였다. 함께 기도를 하고 한 명씩 돌아가며 환자와 고별인사를 하는 중에 우리 스태프들은 이 숭고함에 앞에서 전율했다. 순식간에 중환자실이 울음바다가 될 수도 있었지만 모두 소리 없이 삼키는 울음과 감동이 허공을 가득 메웠다. 폐를 기증 받으러 왔다가 폐만 빼고 모든 장기를 다 기증하러 떠나는 그녀! 결국 그녀는 우리 곁을 떠났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향기는 이 지상에 오래오래 아름답게 퍼져나갈 것이다. 옛말에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이름을 남긴다고 했다. 그녀는 이름보다 더한 진한 감동과 생명을 살리고 갔다. 나는 여기 중환자실에서만 30년을 일하고 있다. 그동안 정말 많은 죽음을 보아 왔지만 지금도 많이 보고 느끼고 배우고 있다. 특히 그녀의 죽음은 나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주었다. 죽음은 피해갈 수 없기에 우리 모두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이야기하기를 불편해 한다. 심지어는 임박한 죽음 앞에서 조차 언급하기를 꺼려한다. 하지만 잘 준비된 죽음은 충분히 아름답고 감동적일 수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적으로 죽음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자세다. 요즈음은 대부분 병원이나 아니면 홈 호스피스에서 죽음을 맞게 된다. 마음만 차분하게 정리하면 죽어갈 때의 육체적 고통은 의료진이 다 해결해준다. 정리된 마음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친구들과 작별인사를 하면서 조용히 새로운 세계로 날아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죽음은 자각하면 할수록 진정한 자유를 더 누릴 수 있다. 정명숙 / 시인삶의 뜨락에서 향기 이식환자 리스트 여기 중환자실 환자 부모
2022.07.08. 17:24
5월이 지나고 6월이 열린다. 5월의 향기가 가고 6월의 향기가 퍼지고 있다. 아카시아 진한 꽃내음이 사라지고 연두색을 지나 초록빛으로 물드는 나뭇잎의 싱그러움이 6월을 채운다. 무심히 지나치면 모두 같아 보이는 자연의 모습이 시절을 따라 다른 색채로 다가오고 있다. 봄이 열리며 드러나던 꽃잎과 새순, 따뜻해지는 바람과 촉촉해진 대지와 그 위에서 분주하던 벌과 나비와 새들과 더불어 살아나는 생명이 봄의 향기를 만들어 내었다. 사람들은 그 부드러운 감촉으로 봄을 깨닫고 봄의 세계로 즐거이 나아간다. 봄의 끝자락에 어느 사이 바뀌어버린 나뭇잎의 색깔과 움직임 속에 새로운 계절을 느끼며 새 계절의 문을 연다. 새로운 향기가 우리를 이끌어 간다. 그렇게 내딛는 발걸음이 무겁지 않다. 다시 돌아온 푸르른 계절이 반갑다. 어느 시절의 향기를 기억한다. 어떤 풀잎의 향기를 기억한다. 그것이 좋은 것이었다는 사실도 알지 못하고 함께 다녔던 시간이 지나고, 생각 없이 손안에 가득 담아보던 싱싱한 풀잎의 때가 지나고 어느 날 문득 기억 저편에 가 있는 향기를 그리워한다.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와 낯익은 냄새로 인사하고 우리는 인사를 받는다.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유년기의 향기와 비슷한 청년기의 냄새를 생각 없이 받아들이고 돌아온 계절처럼 대접한다. 청년기의 향기와 비슷한 장년기의 숨결 또한 그렇게 상대한다. 삶의 어느 때 그 냄새가 진한 도전으로 다가오면 인생을 읽어보려고 향기의 목록을 뒤적인다. 어떤 지경에서 이 향기를 깨닫고 있는가 질문하고 답을 구해보는 몸짓이 바뀌는 계절 속에서 또 다른 체취를 만들어 낸다. 향기로 남게 될 것인가 조바심하면서. 화초 중에 난이라 불리는 것이 있다. 이것을 다시 동양란과 보통 양란이라 불리는 서양란 2가지로 나눈다. 대체로 큰 특징은 꽃의 향기와 모양으로 구분된다. 꽃이 핀 동양란 화분 하나 방 안에 있으면 그 향기가 방안에 가득히 은은히 퍼진다. 그러나 꽃 가까이 가면 향기는 사라진다. 다시 물러서면 물결치듯 향기가 에워싸지만, 색채와 모양은 지극히 겸손하다. 화려한 꽃잎과 색채를 가지는 양란은 그러나 향기가 없다고 할 정도로 꽃내음이 건조하다. 그러나 아름다운 꽃잎과 색채로 방안을 화사하게 장식한다. 꽃향기를 대신하는 색채와 꽃잎의 향기라고 받아들여진다. 좋은 냄새뿐만 아니라 좋은 다른 무엇도 향기가 되어 우리에게 스며든다. 로마의 역사책은 기독교와 로마 항목에 기독교의 승리 요인을 몇 가지 정리해 준다. 당시 사람들의 정신세계, 놀라운 여러 가지 이적 기사, 누구에게나 열린 희망의 약속, 기독교 공동체의 성장과 그에 따른 이익 등을 말하고 있으며 이에 더하여 당시 기독교인들의 순수하고 금욕적인 바람직한 생활방식을 들고 있다. 다른 많은 설명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상당히 야만적이었던 그 시대에 보이던 기독교인들의 향기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가짜가 아닌 향기는 사람을 감화시키며 올바른 방향으로 안내한다. 사람들은 그것으로 사물을 읽어내고 선택한다. 인생을 네 가지 계절로 표현하여 말하기도 한다. 유년기의 향기로 읽는 봄과 청년기의 향기로 읽는 여름과 장년기의 향기로 읽는 가을과 노년기의 향기로 읽는 겨울이 언급될 때 각 계절이 자기의 향기가 있음을 잊지 않는다. 저마다의 가치를 지니는 계절의 향기를 찾아보며 오늘도 발걸음을 옮긴다. 안성남 / 수필가삶의 뜨락에서 향기 계절 가면 향기 당시 기독교인들 동양란 화분
2022.05.30. 16:52
옷장을 정리한다. 두툼한 겨울 옷을 뒤로 밀고 산뜻하고 밝은 옷을 앞쪽으로 건다. 봄맞이 준비를 한다. 그동안 너무 움츠리고 살았다. 중서부의 겨울은 길고 춥다. 폭설이 내린 며칠을 빼고는 지구 온난화로 예전보다 날씨가 훨씬 덜 추웠는데도 하루하루 살얼음 딛듯 움츠리고 산다. ‘겨울’이라는 계절의 이름에 눌려 목도리 둘둘 감고 중무장하고 에스키모 사람들처럼 지낸다. 마음이 추워서 일까. 꽁꽁 얼어붙은 북해처럼 빙하 속을 떠돌며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지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 일도 안 일어난다. 마스크 벗을 용기도 없어 친구도 안 만나고 고립무원, 고독을 씹으며 유배생활을 자처했다. 의미 없이 갇혀 산 날들. 정지된 시간은 고장 난 벽시계처럼 삶의 곳곳에 또아리 틀었다. 뭔가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불안감, 폭설로 집이 무너지고 소통이 끊어질 것 같은 위기감. 전화벨이 울리면 누가 또 아픈가 죽었나 놀라 가슴이 두근거린다. 이어령 선생님 별세하셨다는 소식 듣고 인터넷에 들어가 스승님과 선배, 그리운 분들의 이름을 검색한다. 다행히 모두 살아계신다. 애들 돌잔치. 졸업식, 결혼식 초대 받아 가던 때가 어제 같은데 이제 죽음을 검색하다니. 다시 사랑하고 품고 껴안고 함박꽃 웃음 날리며 살 수 있을까. 죽음이 아니라 생을 찬미하고, 작별이 아닌 만남을 기다리고, 슬픔 대신 별사탕처럼 달콤한 기쁨이 밤하늘을 수놓던, 너와 나의 일상에 작은 꽃망울로 터지는, 그런 행복한 날들이 남아 있기나 하는 것일까. 작가는 꿈꾸듯 흐느끼며 언어의 마술 소리를 적고, 화가는 무지개의 색깔로 꽃향기와 목마른 잎을 화폭에 담고, 바이올린의 현이 울릴 때마다 생명이 태어나는, 피아노 건반이 높낮이로 출렁일 때 생과 죽음이 하나 되는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을 수 있는 날들이 내일 속에 있을까. 겨울이 떠나가기도 전에 서둘러 봄 맞을 채비를 한다. 기다림의 시간을 아름답다. 길어도 길지 않다. 사랑은 추워도 따스하다. 시간은 번개처럼 지나가지만 사랑의 향기는 가을 저녁 마지막 모닥불이 꺼질 때까지 방울소리로 남아있다. 봄을 마냥 기다리지 않겠다. 두 손 놓고 하늘만 쳐다보고 한숨 짓지 않을 테다. 무거운 외투 벗고 시집가는 각시처럼 꽃단장 하고 봄을 맞을 생각을 한다. 어둡고 아픈 기억 지우고 아득한 사랑, 새로운 만남을 찿아나선다. 기억의 창고에 숨겨둔 보석보다 아름다운 말들로 한땀 한땀 수놓듯 적으리라. 계절은 스쳐 지나가는 슬픈 시간이 아니라 비슬산 중턱을 쓰다듬고 피어나는 찔레꽃 향기로, 낙동강 구비구비 돌아 긴 행렬로 서있던 플라타너스 사이 모래알로 반짝일 테니. 무기력은 영혼을 갉아먹는다. 봄은 등 푸른 민물고기처럼 창공으로 튀어올라 생의 목줄을 풀어 주리니. 사랑은 약속이다. 돌아오지 않아도 참고 기다리는 믿음이다. 청춘이 사라진 벌판에서 기다림은 참혹하지만 작은 성냥불을 지핀다. 봄은 향기로 온다. 먼 발자국 소리로, 비 오는 날 창 밖에서 작은 흐느낌으로 온다. 봄이 오면 눈부시게 하얀 산딸나무와 핏빛 아젤리아를 심을 작정을 한다. 제일 먼저 핀 꽃 꺾어 머리에 꽂고 사랑을 준비하리라. 혼자라도 잘 삭은 와인을 목이 긴 잔에 붓고 가지에서 떨어지는 다람쥐 보며 까르르 웃으리라. 겨울은 멈춤의 시간이 아니다. 봄을 잉태하기 위한 인고의 날들이다. 삭풍 몰아쳐도 목숨줄 놓지 않는 겨울나무처럼, 버티며 사는 시간 속에 봄은 향기로 온다. (Q7 Fine Art 대표, 작가) 이기희이기희의 같은 하늘 다른 세상 향기 찔레꽃 향기 불안감 폭설 발자국 소리
2022.03.01. 15:46
며칠 전, 영선 씨가 모과를 가져왔다. 로사 씨의 주말 하우스는 남부 뉴저지에 있는데, 그곳에 영선 씨는 여러 가지 과일나무를 심었다. 영선 씨와 문기 씨 내외는 내가 일이 있을 때마다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는 특별한 친구들이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이 없다. 그날도 원래는 점심 약속을 했었는데, 내가 몸이 좋지 않아 나가지 못하겠다고 했더니 문기 씨가 설렁탕 사서 모과랑 갖다 주자고 했다고 한다. 마침 영선 씨가 스파게티를 만들어서 이왕이면 홈메이드 스파게티가 나을 것 같아 따끈따끈한 스파게티 소스와 국수, 모과 한 보따리에 커다란 배 두 개를 얹어서 배달해준 것이다. 방금 만든 스파게티는 훌륭한 점심이 되었다. 모과(木瓜)는 유자와 함께 가을의 전령 중 하나이다. 한국에 살 때는 가을이면 유자와 모과를 사서 꿀에 재어 겨울 채비를 하는 게 일이었다. 중국이 원산지인 모과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조선 시대 이전이라고 추측한다. 모과는 ‘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못생긴 모양 때문에 천대받는 과일이다. 모과를 두고 사람들은 세 번 놀란다고 한다. 첫 번째는 너무 못생겨서, 두 번째는 향기가 그윽하고 좋아서, 세 번째는 맛이 시고 떫어서. 그런데 네 번째, 모과가 한약재로 유용하며 또 나무줄기가 단단하고 매끄러운 데다 다루기가 쉬워서 가구의 목재로 많이 쓰였다는 사실은 잘 모른다. 모과의 약효 또한 감기 예방이나 가래 제거, 기침을 멎게 해서 한방에서는 감기와 기관지염, 폐렴을 치료하는 데 사용하고, 구토나 설사, 이질에도 효과가 뛰어나다니, 생긴 것과 달리 쓰임새가 다양하다. 특히 모과는 썩어서도 그 향이 그대로라고 한다. 그래서 변치 않는 사랑의 표징이 되기도 한다. 모과의 사랑 전설은 고전인 시경(詩經)에도 나온다. 나에게 모과를 던져 오기에/ 어여쁜 패옥으로 갚아 주었지/ 꼭이 보답하고자 하기보다는/ 길이 사이좋게 지내보자고 그 시대 여자들은 수줍어서 직접 고백 대신 과일을 던져 사모하는 마음을 표시했고, 과일을 받은 남정네는 여인에게 보석으로 화답했다고 한다. 그 대목엔 모과뿐만 아니라 복숭아와 오얏도 나오는데, 썩어도 향기가 좋은 모과는 변치 않는 사랑에선 어느 과일도 이길 수 없는 고수일 것이다. 영선 씨가 준 모과를 깨끗이 썰어 꿀에 재어 담으면서 많은 생각이 떠올랐다. 나이가 든 게 참 좋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물론 나이를 먹으면 육체적으로 쇠진하는 건 사실이나 그보다는 나이 들어변한 내가 좋은 거다. 젊었을 때는 살면서 기쁜 일, 안타까운 일, 억장이 무너지는 일들로 고달팠다. 하지만 나이가 드니 그런 모든 일이 흘러가는 강물처럼 그냥 흘러간다. 이제는 사람의 속이 보이고, 사람의 소중함이 속속들이 느껴져서 더 깊은 정을 주게 된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집착이 없으니 구속도 없는 자유로움이 모두를 내 편으로 만들어준다. 나도 어릴 때는 모과꽃처럼 작고 예뻤겠지. 자라서는 세파에 시달려 울퉁불퉁, 세월의 상처가 얼마나 많았을까. 비록 뒤뚱거리는 인생이었겠으나 그래도 말년엔 모과처럼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는 ‘나’, 썩어서도 향내 나는 그런 ‘나’가 되면 괜찮은 인생이지 않을까. 영선 씨 덕에 모과차를 만들면서 또 한 수 배운다. 이영주 / 수필가뉴욕의 맛과 멋 모과 향기 모과 향기 모과가 한약재 모과가 우리나라
2021.12.03. 17:46
사람의 마음은 느낌일까, 생각일까. 찰나에 바뀌는 마음은 겉과 속이 다르다. 푸른 하늘에 유유히 흘러가는 구름처럼 활짝 피어나다 꿈결 같이 사라지는 것이 마음이다. 맑다 가도 검푸른 먹구름이 몰려오는 변화무쌍함을 보여준다. 흐렸다 개었다 여름 장마철 같은 변덕이 우리 마음에 자리잡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에게 기도한다. 마음속에 따뜻한 마음만 깃들게 해 달라고. 나이가 든다는 것은 자기 몫의 외로움을 겸허히 견디는 일이다. 사람의 몸은 늙어 가면서 손질해도 비가 새는 낡은 집처럼 고장이 나기 마련이다. 몸이 건강해야 마음의 건강도 유지할 수 있다. 자신이 건강해야 남에게 기쁨을 줄 수 있고 위로도 나눌 수 있다. 메마른 세상이라 사람들 마음에 사랑이 고이지 못하고 인정도 연민도 비 오지 않은 마른 땅처럼 팍팍해진다. 때로는 천사 같은 사람들이 베푸는 메마른 사랑의 손길보다 악인의 굵은 눈물에서 사람 냄새가 날 때도 있다. 나쁜 사람들의 마음속에도 뜨거운 눈물이 있다는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람의 마음속에 공존하는 두 갈래 마음, 악마의 마음과 천사의 마음. 오랜만에 하늘 냄새를 맡아본다. 우리는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감춰진 하늘 냄새를 찾아가야 한다. 하늘 냄새는 우리 마음속에 나쁜 생각을 떨치게 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간직하게 한다. 악마의 마음속에 하늘 냄새가 깃들게 해주는 것이 우리들의 몫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굳게 쌓아 놓은 옹벽을 용서로 무너뜨려 화해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서로 사랑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야 한다. 그런 세상의 사람들 마음속에는 항상 감사의 마음이 가득할 수밖에 없다. 사람의 마음은 항상 바뀌지만 그 속에 우리는 사랑을 담아야 한다. 이산하 / 노워크독자 마당 마음 향기 우리 마음속 사람들 마음속 갈래 마음
2021.11.14. 12: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