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박숙희 기자】최근 폭우가 내려 ‘물 위의 도시’ 베니스가 물에 잠겼다. 베니스에는 자동차가 다니지 않는다. 곤돌라와 워터택시, 버스 등 보트나 자전거로만 다닐 수 있다. 수백개의 다리들이 곳곳에 있는 베니스를 걷다보면 종종 길을 잃기 마련이다. 다리에서 골목으로 이동하다보면 피아자(광장)나 캄포(작은 광장)가 나타나고 그 앞에는 여지 없이 성당이 우뚝 서있다. 이럴 땐 여지없이 성당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베니스에 페기 구겐하임 뮤지엄과 아카데미아가 있지만 곳곳의 성당은 뮤지엄급의 걸작들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휘황찬란한 비잔틴 모자이크가 아찔하게 만드는 산 마르코 성당을 비롯해 베니스의 교회들은 고딕·르네상스·비잔틴 양식을 두루 아우르는 건축양식의 향연이다. 그 안에는 티치아노·벨리니·도나텔로·티에폴로·카르파치오 등 당대 명장들의 걸작을 볼 수 있다. 그랜드카날의 레알토 브리지 건너 프라리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Gloriosa dei Frari)은 아씨시의 성자 프란시스코의 추종자들이 베니스로 이동하며 지어졌다. 1250년 베니스 정부가 베네딕토 수도원을 부지로 내준 이래 1338년에야 고딕 성당이 완공된다. 1396년 지어진 종탑은 산 마르코의 종탑에 이어 베니스에서 두번째로 높다. ‘형제’라는 의미의 프라리 성당은 르네상스의 거장이자 베니스의 최고 화가로 꼽히는 티치아노의 걸작 ‘성모승천’과 ‘페사로의 성모’를 소장하고 있다. 걸출한 조각가 도나텔로의 ‘세례 요한’과 성모자상으로 이름을 날린 벨리니의 회화 ‘성모와 아기 예수’도 볼 수 있다. 티치아노와 오페라의 시조 클라우디오 몬테베르디도 이 성당에 묻혔다. ◇하이라이트 티치아노 베첼리(영어명 티시안 Titian 1488∼1576)는 이탈리아의 베니스 인근의 산골 피에베 디 카도레에서 태어났다.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티치아노는 겨우 10살 때 형 프란시스코과 함께 베니스의 거장 화가 벨리니의 문하생으로 들어갔다. 이어 당대 최고의 화가 조르지오네의 견습생이 됐다. 티치아노는 성화는 물론, 풍경화와 초상화까지 전 장르에서 탁월한 재능을 발휘했다. 1510년 스승 조르지오네가, 1516년 벨리니가 세상을 떠나며 세상을 떠날 때까지 60년간 붓을 놓지않으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576년 여름 90살을 앞두고 티치아노는 베니스에 창궐했던 흑사병으로 사망한다. 흑사병 사망자 중 교회에 묻힐 수 있던 이는 오로지 티치아노 뿐이었다. ▷성모승천(聖母昇天, L’Assunta 1518)=길이가 약 7미터가 되는 티치아노의 가장 큰 유화이자 베니스 성당의 제단장식화 중 최대의 그림이다. 이 작품은 크게 3등분 된다. 땅에는 사도들이 하늘을 행해 팔을 뻗치며 동정녀 마리아가 승천하는 모습을 경외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다. 구름 위로 붉은색 옷 차림의 마리아가 악기를 연주하며 축하하는 아기천사들에 둘러싸여 있다. 황금빛 하늘에는 두명의 신이 근엄한 표정으로 아기 천사의 비호를 받으며 마리아를 내려다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20여년 전 ‘최후의 만찬’을 그릴 때 평민을 모델로 한 것처럼, 티치아노도 사도들을 그리면서 어부 등 평민들을 모델로 썼다. 초상화에서 처럼 티치아노의 선명한 색채감각, 특히 붉은색은 화면을 압도하고 있다. ▷페사로의 성모(Ca’Pesaro, 1526)=프라리 성당에 가족용 예배당을 매입한 패포스의 주교 자코포 페사로의 위임을 받아 제작한 유화. 두개의 큰 기둥이 있는 건축물 계단에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있고, 그 앞에 베드로가 옆으로 터번을 두른 터키인과 무어인이 무릎을 꿇고 있다. 오른쪽으로는 아씨시의 성 프란시스코와 다섯명의 페사로 가족이 묘사됐다. 두 기둥 사이 구름 위에는 십자가를 들고 장난을 치는 아기 천사들이 아기 예수와 대조를 이룬다. 이전까지 동정녀 마리아와 아기 예수를 중앙에 비치한 전통적인 성 모자상을 깨고 과감한 구도와 여러 인물의 디테일을 살린 걸작이다. <끝> ☞뉴욕서 보는 티치아노: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에서 티치아노의 회화를 볼 수 있다. 지난달 18일 시작된 특별전 ‘르네상스 이탈리아의 예술과 사랑’에서는 ‘큐피드의 눈을 가리는 비너스’(로마의 보르게제갤러리 소장)와 ‘비너스와 아도니스’(마드리드의 프라도뮤지엄 소장)가 전시 중이다. 전시는 내년 2월 16일까지 계속된다.
2008.12.02. 17:22
【피렌체=박숙희 기자】성경에서 거구 골리앗을 물리친 양치기 소년 다비드(다윗)는 지혜와 예지력의 상징이다. 힘과 맞서는 지성의 승리는 바로 르네상스의 시대 정신을 반영하는 것이고, 피렌체의 미술가들이 즐기던 소재였다. 피렌체의 조각 전문 미술관 바르젤로 뮤지엄(Museo Nazionale del Bargello)은 미켈란젤로의 걸작 ‘다비드’(1504, 피렌체 아카데미아미술관 소장)에 앞서 제작된 두 점의 청동 다비드를 소장하고 있다. 요새를 연상시키는 바르젤로는 피렌체의 시청사에서 검찰청사를 거쳐 한때 감옥으로 이용되며 안뜰에서는 교수형이 처하곤 했다. 1865년 14∼17세기 이탈리아 고딕과 르네상스 조각을 모아 뮤지엄으로 전환된다. ◇하이라이트 ▶도나텔로의 다비드(1440년 경)=1430년 피렌체의 조각가 도나텔로(1386-1466)는 피렌체의 부호 코시모 드 메디치의 명으로 다비드상을 제작하라는 위임을 받았다. 그로부터 10여년만에 메디치 궁전에 모습을 드러낸 청동의 다비드상은 일대 센세이션을 일으킨다. 건축물의 부속품이 아니라 단독 누드 조각상이 나온 것은 고대 이후 최초의 사건이었다. 월계수 잎으로 장식한 모자에 긴 부츠 차림, 골리앗의 잘린 목 위에 발을 올린 채 수수께끼의 미소를 짓고 있는 청년 다비드는 성기가 정교하게 묘사된 나체였다. 도나텔로가 20대에 제작했던 대리석의 다비드상은 골리앗의 시체 위에 의관 입고 위풍당당하게 서있는 왕의 모습이었다. 40여년 후에 제작한 청동의 다비드상은 도나텔로가 동성애자인 것을 드러낸 작품으로 평가된다. 실제로 도나텔로는 평생 결혼하지 않고 스튜디오에서 조수들과 함께 산 것으로 전해진다. 도나텔로의 다비드는 피에로 드 메디치가 축출되자 메디치 궁전을 떠나 우피치미술관 인근의 시뇨리아 광장으로 옮겨졌다가 바르젤로로 들어왔다. 다비드는 현재 한창 보수 중으로 올해 말 경 복원이 끝나게 된다. 런던의 빅토리아 앤 알버트뮤지엄에 칼이 잘려나간 복사품이, 커네티컷주 노위치의 슬레이터 뮤지엄에도 복사품이 있다. ▶베로키오의 다비드(1473-75)=피렌체 태생의 베로키오(1435-88)는 도나텔로의 제자였다고 한다. 베로키오는 또한 레오나르도 다 빈치·페로기노·지란다이오, 그리고 보티첼리의 스승이었고, 미켈란젤로에게 영향을 준 미술가였다. 베로키오는 천재성이 풍부했을 뿐만 아니라 미소년이었던 레오나르도를 애지중지한 것으로 전해진다. 우피치미술관에는 사제가 나란히 그린 유화 ‘그리스도의 세례’(1475)가 있다. 베로키오는 이 그림을 완성한 후 제자를 뛰어넘을 수 없다고 생각해 붓을 꺾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다비드상은 베로키오가 레오나르도와 ‘그리스도의 세례’를 함께 그리던 시기에 제작한 청동 조각으로, 그 모델은 다름 아닌 ‘아름다운 청년’ 레오나르도였다. 베로키오의 다비드는 골리앗의 절단된 머리 위에 칼을 들고 서 있는 젊은 왕의 모습을 하고 있다. 금박이 장식된 시스루 원피스를 입은 다비드는 차라리 패션모델 같다. 다비드는 1476년 베키오 궁전에 세워졌다가 바르젤로로 들어간다. 미술사가들은 따로 떨어져있는 골리앗의 머리를 어디에 두어야 하는가를 두고 논쟁을 거듭해왔다. 바르젤로 뮤지엄에서는 다리 사이에, 워싱턴DC의 국립미술관과 애틀랜타의 하이뮤지엄 전시 중에는 머리가 오른쪽 칼 아래 배치됐다.
2008.11.18. 17:23
영국영화 ‘전망 좋은 방’과 일본영화 ‘냉정과 열정 사이’의 배경이 된 피렌체(영어이름 플로렌스)는 르네상스 미술의 요람이다. 막대한 재력을 자랑하던 귀족 메디치 가문이 대대로 미술가들을 지원하며 피렌체는 이탈리아 미술사의 황금기를 누렸다. 피렌체가 자랑하는 뮤지엄은 단연 우피치 미술관(Galleria degli Uffizi)이다. 우피치는 이탈리아어로 사무실을 뜻한다. 원래 우피치는 1581년 메디치가문이 사무실로 사용하기 위해 궁정 안에 지은 사무실 건물이었다. 우피치를 제안한 이는 세계 최초의 미술사를 집필한 조르지오 바사리. 그는 미켈란젤로의 전기를 쓴 작가이자 화가이며 건축가로 건물 설계에 가담한다. 메디치 가문이 몰락한 후 그들의 소장품을 모아 1765년 미술관으로 개관됐다. ‘ㄷ’자로 설계된 우피치는 비잔틴 미술품을 비롯, 지오토,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티치아노, 카라바지오 등의 작품 3100점을 소장하고 있다. 우피치에선 두 명의 유명한 비너스를 만날 수 있다. 비너스의 탄생=우리에게 친숙한 조개 위에 서있는 비너스의 누드. 바로 산드로 보티첼리의 걸작 ‘비너스의 탄생’(1486)이다. 비너스의 모델은 권세가 줄리아노 메디치의 애인 시모네테로 보티첼리가 짝사랑한 여인이기도 하다. 같은 보티첼리 방에 전시 중인 ‘봄(Primavera)’의 플로라도 역시 시노네테가 모델이었다. 탐험가 아메리고 베스푸치의 사촌과 결혼했던 시모네테는 22살 때 결핵으로 요절했다. 보티첼리는 자신이 죽으면 시모네테의 무덤 발끝에 묻어달라고 유언했고, 서른넷에 그녀 옆에 누웠다. 우르비노의 비너스=초상화의 대가 티치아노의 걸작(1538). 누드의 비너스가 요염한 자태로 궁정의 침대에 누워 있다. 자세도 도발적이지만 관람객을 노려보는 듯한 시선은 더 자극적이다. 마크 트웨인은 이 작품을 “세상이 소장한 가장 품위 없고, 비도덕적이며 외설적인 그림”이라고 혹평했다. 훗날 프랑스 화가 마네는 이 작품의 영향을 받은 누드화 ‘올림피아’(1863)를 그리면서 비너스를 매춘부로 바꾸었다. 수태고지=세상에 24점 남짓 남아있는 다빈치의 명화. 가브리엘 천사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예수를 임신할 것을 알리는(수태고지) 그림(1472-75)이다. 다빈치는 원래 날고 있는 새의 날개를 베껴 천사의 날개를 그렸다가 후에 길게 변형한 것으로 전해진다. 비행에 관심을 보였던 다빈치는 새들의 비행을 연구해 헬리콥터와 글라이더 등을 고안했다. 그리스도의 세례=다빈치가 그의 스승 베로키오와 함께 완성한 작품(1475)으로 그리스도가 요한의 세례를 받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베로키오는 그리스도와 세례 요한을 맡았고, 완벽주의자 다빈치는 금발의 천사와 배경의 풍경을 그렸다. 청출어람이라고 다빈치의 섬세한 터치가 스승의 붓을 압도한다. 홀리 패밀리=미켈란젤로가 시스틴 성당의 걸작 ‘천지창조’ 전 1503년에 그린 작품. 아기 그리스도, 동정녀 마리아와 세례 요한을 담았다. 동그란 프레임은 르네상스 시대 결혼을 상징하는 것으로 피렌체의 명문가인 아그놀로 도니가 딸 막달레나의 결혼식을 기념하기 위해 위임했다고 한다. 문제는 배경의 누드들이다. 이들은 세례를 위해 목욕재계하는 죄인들이라는 해석과 동성애자와 예언자, 목자, 혹은 세례를 기다리는 사람들, 날개 없는 천사를 묘사한 것이라는 다양한 설이 있다. 박숙희 기자 [email protected]
2008.10.28. 20:38
【로마=박숙희 기자】옛날 옛적 이탈리아에서는 종교가 국가이념이자 철학이었고, 서민과 귀족 삶의 토대였다. 인쇄술이 발달치못해 성경이 널리 보급되지 못했던 시대, 가톨릭 교회는 미술가들을 고용해 성서 이야기를 담은 그림과 조각으로 성당 내부를 장식하며 전도했다. 세계 미술사에서 15∼16세기를 풍미했던 르네상스 미술을 빼놓을 수는 없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보티첼리, 티치아노 그리고 벨리니 등 거장을 비롯해 르네상스 화가들은 교회의 위임을 받아 수많은 걸작을 제작했다. 그들의 작품을 소장한 로마, 피렌체(플로렌스), 베니스의 주요 뮤지엄을 소개한다. 로마 바티칸 교황청 내 자리한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은 역대 로마 교황이 수집한 미술품을 소장하고 있는 뮤지엄이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 박물관(British Museum)와 함께 유럽의 3대 뮤지엄으로 불리는 바티칸박물관은 지난해만 431만명이 방문했다. 비수기에도 30여분, 성수기에는 2시간 넘게 줄서 기다려 입장하는 관람객들은 성지 순례자들을 연상시킨다. 교황 율리어스 2세가 벨베데레 정원에 고대 그리스 조각 ‘라오쿤’을 전시한 것이 바티칸 박물관의 시초였다. 1773년 교황 클레멘스 14세가 역대 교황들의 수집품을 모아 정식 박물관으로 발족하게 된다. 뮤지엄 방문객들은 십중팔구 미켈란젤로의 프레스코 걸작이 있는 시스틴 성당으로 향한다. 이 성당에만 하루 방문객이 평균 2만명선. 뮤지엄 입구에는 영어·이탈리아어·불어·독어·일본어·중국어와 함께 한국어 오디오 가이드도 마련되어 있다. ◇하이라이트 ^천지창조=조각가로 명성을 떨치던 미켈란젤로가 1508년 서른셋의 나이에 율리우스 교황의 위임을 받고 완성한 천장 프레스코화. 프레스코는 회반죽이 마르기 전에 그리는 회화기법으로 상당한 기교와 순발력을 요구한다. 미켈란젤로는 젊은 나이에 시험대에 올랐다. 미켈란젤로는 바티칸의 성베드로(St. Pietro) 성당의 건축가였던 브라만테와 라이벌 화가 라파엘로가 그림 실력이 입증되지 않은 자신이 실패하는 것을 보기 위해 교황을 부추긴 것이라고 회고한 적도 있다. 그는 홀로 천장에 매달려 등장인물만 300여명이 넘는 이 작품을 완성하는데 꼬박 4년이 걸렸고, 그후 목 디스크와 시력 악화로 고생했다고 한다. 미켈란젤로는 천장을 9개로 나눈 후 이를 34개로 분할했다. 창세기에서 중앙에 구약성경의 창세기와 그 주변으로 ‘12명의 예언자’ 삼각 모양의 벽과 반월형 벽면에 ‘그리스도의 조상’ 그리고 네 모퉁이에는 ‘이스라엘의 역사’가 그려져있다. ^최후의 심판=‘천지창조’ 완성 후 고향 피렌체로 돌아가 활동하던 미켈란젤로는 1534년 로마로 돌아온다. 59세의 노장은 교황 클레멘트 7세의 명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프레스코 벽화를 그리기 시작한다. 그리스도의 부활과 묵시적인 세계를 묘사한 ‘최후의 심판’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거의 벌거벗고 있다. 동성애자로 알려진 미켈란젤로는 남성의 근육미를 강조하는 누드를 통해 신의 인간화, 인간의 신격화를 추구했다. 여성의 가슴이 부자연스러운 것도 대부분 남성을 모델로 했기 때문이라는 것. 성 바르톨로뮤가 들고 있는 벚겨진 가죽 속의 얼굴은 바로 미켈란젤로의 자화상이다. ‘최후의 심판’이 공개되자 추기경들은 거룩한 성당에 나체화가 불경스럽다고 반발했다. 추기경들의 탄원에도 교황은 굴하지 않았다. 그러나 1564년 미켈란젤로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제자였던 다니엘 다 볼테라가 그림 속 성기를 모두 가리는 작업을 해버린다. 때문에 다니엘은 ‘기저귀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 1546년 교황은 미켈란젤로에게 세계 최대 성당이 될 성베드로 성당의 돔(dome) 건축자로 임명했다. 미켈란젤로는 돔이 완성을 보지 못한 채 88세로 사망한다. ^아테네 학당(1510~11)=교황의 서재에 성모자상으로 이름을 떨친 라파엘로에게 자신의 서재인 ‘스탄차 델라 세나투라’에 프레스코화를 위임한다. 라파엘로는 그리스 철학자 54명을 등장시켜 기독교와 고대 철학의 조화를 묘사했다. 다빈치의 얼굴을 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앙에 있고, 그리고 미켈란젤로를 닮은 헤라클레이토스와 검은 모자를 쓴 자신의 모습을 등장시켰다. ^라오쿤 군상=기원전 1세기 경 제작된 대리석 조각으로 트로이의 제사장 라오콘과 두 아들이 뱀에 물려 죽는 모습을 표현한 작품. 1506년 한 농부가 발견, 미켈란젤로가 교황 율리우스 2세에게 청원해 구입한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라오쿤 군상에 심취했고, 이에 영향을 강하게 받아 ‘반항하는 노예’‘죽어가는 노예’ 그리고 교황 율리어스 2세의 무덤 조각을 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799년 라오쿤 군상은 이탈리아를 정복한 나폴레옹이 약탈해 루브르 박물관으로 옮겨갔다. 이 조각은 프랑스 신고전주의 미술에 영향을 주었다가 1816년 나폴레옹의 몰락과 함께 바티칸으로 돌아온다.
2008.10.21. 21:57